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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
仁祖反正
시기
1623년 3월 12일 (음력)[1]
장소
조선 한성부 창덕궁 및 인근
원인
광해군의 폭정 (봉산옥사, 계축옥사 등)
광해군의 對명-후금간 중립외교
교전 세력
조선 조정
(진압군)
능양군 세력
(반란군)
주요 인물
지휘관

광해군 (국왕)
지휘관

능양군
신경진 (효성령별장)[2]
김류 (거의대장)
참가자

이이첨[3]
정인홍[4]
유희분[5] † 등
참가자

이서[6]
이귀[7]
김자점[8]
최명길[9]
구굉[10]
이괄[11]
병력
불명
2,000명
피해
불명
불명
결과
진압 실패
- 광해군 폐위 및 인조 즉위
- 중립외교 철폐 및 친명배금 노선 강화
영향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후금의 연이은 침공
1. 개요

1. 개요[편집]

주상(인조)이 의병을 일으켜서 왕대비(인목왕후)를 받들어 복위시킨 다음 대비의 명으로 경운궁(慶雲宮)에서 즉위하였다. 광해군을 폐위시켜 강화로 내쫓고 이이첨 등을 처형한 다음 전국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 3월 13일 계해 1번째 기사
인조반정(仁祖反正)은 조선의 4대 반정(쿠데타)의 하나로, 1623년 4월 11일(광해군 15년 음력 3월 12일) 서인 반정 세력이 광해군 및 대북 세력을 축출하고 왕의 조카인 능양군 이종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 및 추대한(인조) 사건이다. 계해년에 일어나서 계해반정 또는 계해정사(癸亥靖社)라고도 한다. 주도자는 왕이 되는 능양군과 흔히 4대장으로 일컬어지는 김류, 이귀, 신경진, 이서와 최명길이다.[12]

핵심 인물들이 정2품 정도였던 중종반정[13]과 비교하면, 인조반정은 그보다 낮은 종3품 관직자들이 주도하였다. 인조반정의 4대장들이 현직이거나 직전에 지냈던 관직들은 모두 종3품 부사직이었다. 중종반정은 연산군의 동생인 중종이 반정이 일어난 것을 알지도 못했으나 신하들에게 추대되어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의 위세가 높아 왕의 본처인 단경왕후 신씨는 왕비 책봉도 되었고, 중종 본인이 조강지처임을 내세웠음에도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압박받아 결국 폐위되었다. 반면 능양군은 모의 과정에서 김류의 집에 찾아가기도 하고 심기원이 군사를 모을 비용을 대고, 거사 일에는 군사를 직접 거느리고 왕이 거처하던 창덕궁을 점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양군 또한 처음에는 차기 군왕 복수 후보자 중 한 명이었을 뿐 신하들이 선택한 사람이었다. 반정 추진 과정에서 선조의 부마 박미는 능양군에 대한 평가에 동의하지 않기도 했다. 그래도 인조는 훗날 그를 포용하며 이는 신하가 임금을 택한 때의 일이니 어찌 개의칠 것이냐고 하고 혜민서 제조로 등용하였다. 또한 인조실록의 첫 번째 기사에서도 이서, 신경진이 김류와 함께 '추대의 계책'을 세웠다고 하였으며, 즉위 교서에서도 신하들의 추대를 받은 것임을 밝힌다.[14]
"나는 덕이 부족하여 선왕이 남기신 가르침을 받들어 삼가 울타리의 거처를 지키며 일생을 마치려 하였지만, 다행히 충성스럽고 의로운 두세 신하가 종묘·사직이 위험에 빠져 망하려고 하는 것을 걱정하고 사람의 떳떳한 도리가 무너져 없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대의를 분발하고 내란을 안정시켜 자전(慈殿)의 위호를 바로잡은 후 이어 덕이 모자란 나를 추대하기를 원하였다. 나는 아래로 여러 사람의 뜻에 밀리고 위로 대비의 뜻을 받드니 깊은 못과 골짜기에 떨어진 것과 같은데 그 어찌 감당하겠는가."

인조실록 1년 3월 기사조

연산군 때는 내각을 구성하던 신하들마저 연산군에게 등을 돌리고 반정파에 붙었으며 반정파도 이를 선선히 응낙했다. 반면 인조반정은 왕의 지지 기반인 대북 전체가 타 정파의 공공의 적이 된 판이라 이들 전부를 타깃으로 삼았고, 상당수 북인을 제거했다. 북인 중에서 특히 대북의 중심을 이루는 사람들이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에서 싹쓸이되었지만, 소북이나 경기 일대의 대북 학맥은 주류학파가 된 서인과 남인에 비교할 수 없어도 살아 있었다. 오히려 북인 계열들은 이후 원래 같은 동인이었던 남인에 통합되어서 활동했다.

결과적으로 반정을 통한 인조의 집권은 실질적인 조선 제2왕조의 창건으로 평가된다. 당파로만 보아도 한 붕당의 씨를 말려버리고 한 붕당의 절대 우위를 만들었고, 왕통으로 보아도 이후 조선의 모든 국왕은 인조의 후손이기도 하다. 이른바 조선 전기와 후기 왕가를 나누는 실제적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성공 가능성이 낮은 도박이 성공한 케이스이지만, 동시에 반정 직후부터 카운터 쿠데타(이괄의 난)가 일어났음은 물론 사대와 민생이라는 명분도 부실하게 되었다는 미묘한 평가를 받은 사건이기도 하다.[15]


[1] 광해군 15년. 양력으로는 1623년 4월 11일이다.[2] 거사 계획이 들통나는 바람에 좌천된 탓에, 직접 참여하진 못했다.[3] 예조판서 겸 대제학[4] 대북 세력의 영수. 전 영의정.[5] 병조판서[6] 장단부사 겸 경기방어사[7] 평산부사[8] 전 병조좌랑[9] 전 병조좌랑[10] 능양군의 외삼촌. 무인으로 반정 초기 멤버이다. 반정 당일 능양군을 모시고 있었다.[11] 평안병사 겸 부원수[12] 1등 공신 중에서도 격이 다른 다섯이다. 반정의 성공 이후 정사공신의 선정 과정에서 인조와 친견하여 대화하는 사람은 나이와 명망이 있던 '4명 + 최명길' 다섯 신하이다.실록 링크[13] 박원종은 정2품 지중추부사이며 왕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던 외척이였고, 성희안은 종2품 이조참판을 지내고 실직에서는 물러난 상태(한편 성희안도 박원종만큼이 아닐 뿐 정종의 아들 덕천군의 외손자라 왕실과 혈연관계가 있었다), 신윤무는 종3품 부정이었다. 게다가 이 당시는 뚜렷한 당파같은 것도 없었고 세력을 초월해서 연산군의 폭정을 버티지 못하고 무언가 해야한다는 기조가 있었기에 임사홍, 신수근 같은 이들을 제외하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연산군 조정 내에 임관했던 대다수 신료들이 반정 당일 우르르 몰려서 합류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래서 참가자들 면면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지는 고위직 원로들이 다수 포진해 있는데 대표적으로 중종반정의 최선임자이자 최고위직이였던 영의정 유순이 있다.[14] 참고 - 오수창, 반정, 조선시대 군주 축출의 논리와 성격[15] 물론 이후로 무리한 궁궐 공사가 중단되고 세금과 부역이 감소하고 대동법이 확대되는 등 민생 면에서는 나아지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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