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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제20대 태왕
長壽王 | 장수왕
시호
장수(長壽)
성씨
고(高)
거련(巨連, 巨璉) / 연(璉)
태자
고조다(高助多) / 고공(高共)?
태손
(太孫)
생몰연도
음력
394년 ~ 491년 12월 (96-97세)
재위기간
음력
413년 10월 [1] ~ 491년 12월
(78년 2개월)
1. 개요2. 시호와 휘3. 압도적인 재위기간4. 치세
4.1. 내치
4.1.1. 평양성 천도4.1.2. 내부 분쟁의 가능성?4.1.3. 국호 변경
4.2. 외정
4.2.1. 남진 정책
4.2.1.1. 관련 문서
4.2.2. 왜와 교섭4.2.3. 남북조시대의 고구려
4.3. 지두우 분할 시도
5. 평가6. 삼국사기 기록7. 대중매체에서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용성왕 풍군[2]이 야숙을 하고 있으니 병사와 말이 피곤하겠소.
"龍城王 馮君 爰適野次, 士馬勞乎."

북연의 황제 풍홍이 고구려로 도망쳐 왔을 때 사신을 통해 건넨 위로의 말. 삼국사기 발췌.
고구려의 제20대 군주. 394년에 광개토태왕의 아들로 태어나 413년 10월 19살 때 왕위에 오르고 491년 12월 97세를 일기로 승하하며 재위를 마쳤다.

2. 시호와 휘[편집]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가 전하는 시호는 '장수왕(長壽王)'이다. 실제로 오래 살았다는 뜻의 장수다.[3] 장군이라는 의미의 將帥王이 아니다. 오래 살아서 장수라는 시호를 올렸다는 해석이 대세이고 종종 불교 용어 장수와 연관짓기도 한다. 당시 고구려가 불교 진흥 정책을 밀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자연스러운 주장이다.

는 거련(巨連). 단순 한자 풀이로는 '크게 잇는다'는 뜻. 아마도 부왕 광개토대왕의 뜻을 잇는다는 의미일 듯하다. 중국에서는 줄여서 연(璉)이라 기록했다.

북위에서는 강(康)이라는 시호를 주기도 했다.

3. 압도적인 재위기간[편집]

장수왕 재위기간의 위엄

시호인 장수(長壽)의 의미처럼 매우 오래 산 임금이다. 고대인 기준으로도 그리 오래 살지 못한[4] 아버지 광개토태왕과 무척 대비되는 부분. 의학이 매우 발달한 21세기 현시대에도 97세까지 생존하기는 무척 어려우며 5세기 당시의 의학과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정말 오래 장수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158세까지 살았다고 전해지는 금관가야수로왕, 119세까지 살았다고 전해지는 태조왕 다음으로 한국 역사상 가장 오래 산 군주로 전해져 오는데 역사적 모순점이 많고 신화적 기록이 가미됐을 것으로 여겨지는 수로왕이나 태조왕과는 다르게 장수왕은 교차 검증이 가능한 실증적 재위 기록이 존재하기에 일말의 의혹 없이 확실한 역사적 팩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실질적으로는 한국사에서 가장 장수한 왕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재위 기간은 무려 79년. 83세까지 52년간 조선을 다스리며 조선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영조고려 역사상 최장기 재위 군주이자 최장수 군주인 고종(45년), 발해 역사상 최장기 재위 군주인 문왕(57년)보다도 재위 기간이 길고 더 오래 살았다.

위의 연도를 보다시피 5세기 초부터 5세기 말까지가 장수왕의 치세라 사실상 5세기의 고구려는 장수왕의 단독 치세였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엄청 길다. 원래 후계자였던 태자 조다는 부왕이 너무 오래 재위한 탓인지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떴고 후대의 영조[5]프랑스 부르봉 왕조루이 14세[6]처럼 손자인 문자명왕이 장수왕에게 보위를 이어받아야 했다.

같은 고구려의 왕들인 태조왕, 신대왕, 차대왕[7] 등이 믿을 수 없는 장수로 이름이 높고 미천왕, 고국원왕, 문자명왕 등도 3~40년에 달하는 재위 기간을 자랑하며 안장왕, 영양왕, 영류왕 등도 환갑쯤은 가뿐히 넘기는 레벨의 장수를 자랑하는 것을 보면 고구려 왕가 자체가 장수하는 집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장수는 유전자에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왕의 수명은 국가의 존망을 좌지우지하는 요소이고 왕은 살아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 국가의 상징이기 때문의 왕의 생존은 그 자체로 의의를 갖는다.

4. 치세[편집]

'장수왕은 이름이 거련(巨連)이고(일설엔 연(璉)이라고도 한다), 개토왕의 원자(元子)이다. 체격과 외모가 걸출했으며 그 의지가 크고 위대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장수왕 본기에 나오는 첫 문구.
보통 아버지인 광개토태왕의 활발한 정복 사업을 접고 뒷수습과 남진정책으로 선회한 수성군주의 이미지가 강하다. 광개토대왕만큼 적극적이지는 않고 내치에 주력한 시기도 있었지만, 실상은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아버지 이외에는 비견할 대상을 찾기 힘든 패왕 타입의 정복군주다.

광개토왕이 412년에 승하하고 나서 즉위하여 맨 처음 한 일은 만 24개월 동안 삼년상[8]을 치룬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부왕인 광개토왕의 릉비에서 알수 있는데, 광개토왕릉비에는 부왕이 412년에 승하 하였고 414년 9월 29일에 릉비를 이장 했다고 기록 되어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413년 10월에 사망 했다고 기록 되어있는데, 이는 삼국사기와 광개토왕릉비의 1년 격절을 토대로 보정하면 정확히 24개월 동안 장사를 지냈음을 역산 할수 있다. [9]
비문을 포함한 다른 기록을 종합할 때 장수왕은 즉위 당시 나이가 18세에 지나지 않아 왕으로서의 본격적인 권위를 발휘하기 대단히 힘들었다고 판단되다. 이런 그가 아버지의 삼년상이 끝나는 시점에 맞추어 이 비를 세울 당시에는 21세였다. 동양의 전통적인 왕위 계승 시스템에서는 선왕의 삼년상이 끝나는 시점이 어떤 면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친정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본다면 장수왕은 아버지가 죽고 즉위한 바로 그때 실질적인 왕이 아니라 이 비를 세우는 그 시점에서 진정한 고구려왕으로 등극했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廣開土王碑, 父王의 運柩 앞에서 靑年王이 보낸 경고, 김태식[10]

북쪽으로는 몽골 초원으로 말을 달려 지두우 분할을 시도하는 동시에 거란과 물길을 압박하고, 서쪽으로는 요서 일대에서 북연의 절대 투항을 이끌어내 황제를 포함한 황족과 인구를 접수하고 외교전략을 병행하여 북위를 상대로 기싸움에서 유리함을 선점했으며 남쪽으로는 한강 유역과 충청도는 물론이고 경상도 일대와 일본 열도에까지 매우 적극적인 군사 활동을 벌였다.

아버지 광개토태왕이 미처 못 이룬, 고구려의 두 원수 후연[11]백제의 수도인 화룡성과 위례성을 불태우고, 북연 황제 풍홍과 백제 임금 개로왕을 죽여 아버지의 못 이룬 한을 풀었다. 거기에 신라실성 마립간의 죽음과 눌지 마립간의 즉위에도 고구려가 관여했다는 기록도 있고 백제의 비유왕이 고구려에게 암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최소 2명, 최대 4번이나 다른 나라 임금을 갈아치운 무시무시한 사람이다. 저 시기에 백제는 신라의 지원이 없었다면 고구려에게 짓밟혀 나라 자체가 멸망할 뻔했다.[12]

이때 고구려는 잘 나갔겠지만 아버지가 넓힌 땅, 흡수한 북연의 인구, 평양성 천도로 인해 생겼을지 모르는 신, 구세력의 대립, 물길의 발흥, 북위의 압박, 고구려의 세력에서 이탈하려고 나제동맹을 맺어 안간힘을 쓰는 백제와 신라의 도전 등 나름 골머리 앓으면서 신경을 쓸 일이 많았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장수왕은 이러한 과제를 훌륭하게 수행해 고구려는 본격적으로 과거와 급을 달리하는 동아시아 강대국으로 자리잡는다.

4.1. 내치[편집]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정 관련 기록이 워낙 빈약하여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 나오는 선전 문구를 바탕으로 당시 고구려는 장수왕이 왕권 강화를 위해 귀족들을 압박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414년, 만주 일대에 광개토대왕릉비를 건립했다.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려서 고구려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주변국과의 관계를 규정하며, 광개토대왕 때 입안된 수묘인 제도를 성문화하기 위한 조치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이건 손자인 문자명왕 때 건립됐다는 설도 있다. 광개토대왕릉비의 건립 시점을 장수왕 시기로 보느냐, 문자명왕 시기로 보느냐는 건립 목적과 관련되어서 중요한 부분이라 논란이 많다.
경주시 호우총 그 유명한 호우명 그릇도 장수왕 3년(415년)에 제작 되었다. 바닥에 씌여진 문구는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으로 "국강(國岡) 위에 있는 광개토대왕릉용 호우"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광개토대왕의 제사를 위해 만들어진 제기인데, 어째서 신라로 흘러들어왔는지는 불명.바람타고 날라왔나

419년 여름, 나라의 동쪽에 홍수가 나서 사신을 보내 위문했다. 424년, 나라에 풍년이 들어 왕이 군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4.1.1. 평양성 천도[편집]


평양성 천도와 관련해서는 이미 아버지인 광개토대왕대 부터 평양성으로의 천도를 염두해 두고 있었고[13], 장수왕은 부왕의 정책을 이어받아 평양성 천도를 단행했다.

기존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동천왕 때의 경험으로 그다지 방어하기 좋지 않은 곳이라는 게 입증된 데다 척박하기까지 하여 생산력이 떨어지는 곳이었다. 이곳의 겨울 평균 기온 -11℃. 쉽게 말하자면 철원보다 겨울에 6도 정도 낮은데, '냉대 동계 건조 기후(Dw) + (한반도보다) 내륙 지방 + (평양성보다) 고위도'라는 악조건 덕분에 여름엔 철원보다 더운 데다 춘천 평야의 반에 불과한 좁은 평야 외 모두 산이다.

반면 평양성 지방은 황해도의 평야와 인구 밀도를 바탕으로 높은 생산력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 고조선의 후기 수도였다는 점과 낙랑군에서도 행정 중심지였던 탓에 당대 동방(중국 동방)의 정치, 문화, 경제 중심지였다. 더구나 백제, 신라, 가야의 세력을 미리 꺾어두었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불의의 습격을 당할 위험도 적은데다[14] 떠오르는 강자 북위를 방어할 만한 위치였다. 이때 건설된 궁궐이 바로 안학궁(安鶴宮)이다.[15]

4.1.2. 내부 분쟁의 가능성?[편집]

특이하게도 무지막지한 대외 침공과 정복, 천도를 한 이후 고구려는 갑작스레 모든 외국의 기록에서 자취를 감춘다. 기껏해야 가끔 고구려 상인들과 거래했다는 기록들이 나올 뿐이다. 다른 나라에선 이들이 무슨 상황인지 궁금했을 법도 하지만, 찔러보기에는 고구려의 직전 행적이 많이 부담스럽기 때문에 고구려는 수십년 간 외부와 거의 어떤 교류도 없이 유지되었다.

개로왕472년북위에 보낸 국서에 "지금 연(璉)[16]의 죄로 나라는 어육(魚肉)이 되었고, 대신들과 호족(豪族)들의 살육(殺戮)됨이 끝이 없어 죄악이 가득히 쌓였으며, 백성들은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등장한다.[17]

4.1.3. 국호 변경[편집]

평앙 천도를 기점으로 고구려의 국호는 고려(高麗)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광개토대왕대의 중원 고구려비에서 고려태왕(高麗太王)이라는 명문이 등장하므로 고려라는 국호는 이미 전대부터 존재했으나 국호가 고려로 굳혀진 시기는 장수왕대로 본다. 중국의 기록에서도 장수왕 재위시기 부터 고구려를 고려라고 일관적으로 기록하기 시작한다.

다만 최소 고려시대부터는 고구려라는 국호가 더욱 보편화되어 있었다. 《삼국사기》가 좋은 예이다. 현대의 학계에서도 왕건이 건국한 고려 왕조와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여전히 고구려라 부르고 있다. 조경철 등을 비롯한 다소 급진적인 소수의 연구자들은 아예 고대고구려중세고려를 각기 전고려 · 후고려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미 오랜 세월 동안 한국인들이 고구려고려로 구분해온 마당인지라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4.2. 외정[편집]

내정이나 외정이나 고구려 자체의 사료가 거의 없다. 외정 관련 기록은 주변국에서 남긴 것들이 퍽 있기 때문에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 특히 중국에서는 조공, 책봉 기록의 양이 후덜덜하고 중국과의 교섭 과정에서 벌어진 사소한 사건들도 주목할만하다. 일본에서는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이탈하는 과정을 꽤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물론 장수왕 대로 추정되는 시기의 일본과 고구려의 교섭도 기록으로 남아있긴 한데 《일본서기》의 이주갑인상 때문에 정확하게 장수왕 시기의 기록인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4.2.1. 남진 정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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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서 사냥을 하던 고구려 장수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신라에 주둔했던 고구려 장수가 자신의 신라인 부하에게 우리나라가 너희 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라고 불어서 경각심이 생긴 신라 측에서 신라 내의 고구려 군인들을 몰살해버렸다. 이렇게 신라는 국내에서 일시적으로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는 갓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터라 아직 단독으로 고구려에 단독으로 비빌 국력은 안되었기에 백제와 힘을 합쳐 나제동맹을 체결하고 장수왕의 남진에 대항했다. 이때는 둘을 합쳐도 고구려보다 강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대륙의 북위, 유연 등과 국경을 접한 고구려백제 - 신라 - 가야소백산맥을 끼고 하는 방어선을 완전히 제압할 정도의 전력 투사가 사실상 무리였다.

장수왕 대에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 지대에서 잦은 마찰이 발생했는데, 450년엔 신라의 하슬라(현 강원도 강릉시) 성주 삼직(三直)이 고구려 변경 성주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468년 장수왕은 신라를 공격하여 하슬라(현 강원도 강릉시)와 실직성(현 강원도 삼척시)를 점령했다.

한편 백제의 개로왕북위에게 밀서를 보내 고구려를 침략을 해달라고 요청한 사실이 472년 고구려 국내에 전해졌다. 장수왕은 첩자인 승려 도림을 백제에 파견하여 개로왕이 왕권을 강화한다는 목적으로 궁궐 등을 짓게 하여 국고를 낭비하게 했다.[18][19]

백제의 국고가 바닥날 낌새를 보이자 475년 장수왕은 백제를 전격적으로 침공해 수도 위례성을 함략하여 개로왕을 비롯해 여러 왕족과 귀족들을 죽여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았다(475년). 이때 비로소 우리가 교과서에서 흔히 보는 고구려의 남방 강역의 확장이 이루어졌다. 이때 직접 출병한 장수왕은 나이는 82세.

위례성 함략 때 살아남은 백제의 왕자 문주는 고구려가 위례성을 침공하자 나제동맹에 있던 신라에 지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신라 지원군을 이끌고 돌아오던 문주는 이미 위례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포기하지 않고 위례성으로 진격하길 선택했고, 위례성으로 진격하자 한강 이북으로 일단 물러간 고구려군을 마주하게 된다. 이에 문주왕은 신라-백제 연합군의 비호 아래 위례성에서 즉위했던 것으로 보이며, 한 달 동안이나 천도를 심사숙고했다.[20]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결국은 남하하여 웅진성에 진을 치고 항전 태세에 들어가자 장수왕은 파죽지세로 남진하여 웅진 인근의 대전까지 내려와 산성을 쌓았다.(월평산성)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웅진성과 대전 사이에서 장수왕의 고구려군과 나제 연합군의 치열한 교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결국 장수왕의 고구려군을 저지하는 데 성공한 백제는 멸망 위기에서 가까스로 살아남게 된다.[21]

개로왕을 무너뜨린 뒤 숨을 고른 장수왕은 481년 이번에는 신라를 침공하여 신라 북변 7개 성을 점령하고 계속 진격하던 중 신라, 백제, 가야 연합군에게 격퇴당했다고 하고 고구려군이 무려 모산성(남원)에까지 출몰하였다고 한다.

남한지역에서 남진 정책과 관련된 고구려 유적들은 발굴조사의 누적이 상당히 진행되었고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양주분지에 위치하는 여러 보루들까지도 2018년인 현재 조사되고 있다.

보루를 통한 고구려의 진출방식은 한탄강, 임진강을 기점으로 이뤄지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황해도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한 고구려는 임진강, 한탄강에서 백제와의 국경을 형성하였고 이를 넘어 양주분지 일대를 장악하였고, 나아가 아차산 일대 보루군을 설치하면서 한강 유역에 대한 공세를 펼쳐나가 475년 한성을 공략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보루들은 서술한 3개의 권역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한강 이남의 대전 월평동 유적(목책), 안성 도기동 목책, 청원 남성골 산성(목책)에서는 공통적으로 고구려 토기들이 확인되고 있는 점으로 백제에 의해서 형성된 방어시설을 고구려가 지속 남하하여 점령 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가장 남쪽인 대전 월평동 유적에서 고구려 토기가 나오고 있는 상황은 웅진의 상황이 얼마나 다급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웅진의 바로 옆인 현재의 세종시 나성동 유적에서는 고구려 토기가 확인된 사례도 있다.

이후 경기 이남지역이 다소 혼란해지는 상황에서 신라의 한강 진출이 시도되면서 고구려와 마찰을 빚게 된다. 이때 고구려는 위의 보루들을 보강하여 신라와의 전쟁에서 활용하기도 하였다.

기사는 간단하게 나오지만 삼국사기조선왕조실록의 지리지를 보면 경상북도 거의 절반 정도에 고구려의 행정구역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고구려군이 무려 남원의 모산성(아막성)에 등장하고 왜국도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출항이 힘들 정도였으니... 각각 백제, 신라, 대가야의 왕성 반나절 거리까지 고구려의 국경이 밀고 들어왔으니 한반도 남부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을지 짐작이 간다.

아래는 모산성(아막성)의 위치.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아막산성(阿莫山城)또는 모산성(母山城)으로, 삼국사기 귀산열전에는 아모성(阿暮城)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막(莫) 자가 영(英) 자와 비슷해 아영성(阿英城)으로도 기록됐는데, 아영면(阿英面)의 이름이 바로 여기서 딴 것. #
파일:baekje_map_ge.jpg
4.2.1.1. 관련 문서[편집]

4.2.2. 왜와 교섭[편집]

한편 《일본서기》에 의하면 고구려가 백제 한성을 함락시켰을때 고구려 장수들이 더 치고 내려가 백제를 완벽하게 멸하자고 건의하자 장수왕이 백제의 뒤에 야마토가 버티고 있다는 식의 핑계를 대면서 거부하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 기록에는 장수왕이 뜬끔없이 백제가 야마토(왜)의 속국이라는 것은 다 알고있는 상식이라고 말한다.[22] 그냥 수사 다 띄고 백제 - 신라에 야마토까지 본격적으로 합세한 반고구려 동맹을 우려한 것으로 보면 된다. 참고하기위해 그 내용을 아래에 적어놓는다.
20년 겨울에 고구려 왕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쳐서 없앴다. 그런데 몇몇의 남은 무리들이 창고 아래에 모여 있었다. 무기와 양식이 이미 다떨어지고 근심하여 우는 소리가 매우 심하였다. 이때 고구려의 여러 장수들이 왕에게 “백제의 마음가짐이 범상치 않습니다. 신들이 볼 때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 정신을 잃습니다. 다시 덩굴이 뻗어 자라듯 되살아날까 두렵습니다. 뒤쫓아 가서 제거하기를 청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왕이 “그럴 수 없다. 과인이 듣기에 백제국은 일본국의 관가(官家)가 된 것이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또한 그 왕이 들어가서 천황을 섬긴 것은 사방에서 모두 아는 바이다.”라고 말하니, 그만두었다. 【『백제기(百濟記)』에서는 개로왕(蓋鹵王) 을묘년 겨울, 고구려(狛)의 대군이 와서 대성(大城)을 7일 낮 7일 밤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왕성이 함락되고 마침내 위례(尉禮)를 잃었다. 국왕과 대후(大后), 왕자 등이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고 적고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고구려에서 온 사신이 왜왕 앞에서 외교 문서를 읽는데 그 내용이 고구려 왕이 교한다(=가르친다)라는 것이라서 왜의 왕자가 그 문서를 찢어버렸다고 한다. 왜왕이 남조에 보낸 외교 문서에 의하면 고구려가 왜의 변경을 약탈하고 사신을 차단해서 제대로 사신을 보낼 수 없다고 하소연하는 내용이 나온다.

4.2.3. 남북조시대의 고구려[편집]


중국인 입장에서 쓴 중국 사서에는 조공을 했다고 말하나 일본서기와 같이 외국 사신에 대한 기사는 무조건 조공으로 기록한 중국 사서를 그대로 사실로 믿는 것은 안 된다는 비판도 있다.[24]

북위의 위협에도 효과적으로 대처했다. 후연(後燕)이 멸망한 직후 건국 된 북연(北燕, 407년 ~ 436년) 2대 황제 풍홍은 북위가 북연을 멸망시키려 하자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했을 때(436년), 장수왕은 갈로맹광의 지휘 하에 군사 수 만을 파견해 화룡성의 주민들을 구출한뒤 화룡성을 약탈, 방화하고 돌아왔다. 북연 황제 풍홍은 고구려로 망명했다가 분수를 모르고 대접을 바라다가 더 천대를 받게 되었다.[25] 이후 풍홍은 (宋, 420년 ~ 479년)에 망명을 요청하게 되고, 결국 풍홍은 이 때문에 장수왕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후 남북조 사이에 등거리 외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송 태조가 북위를 공격하고자 말 800필을 송나라에 지원하여 송나라와 해빙하고 북위를 압박하기도 한다.

물론 고구려의 위세가 남북조를 압도할 정도는 아닌지라, 송의 사신이 이때 풍홍의 잔당군으로 풍홍을 죽인 장수를 죽이고도 송의 형식적인 처벌만 받은 사건[26][27] 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역대 중국 왕조들이 이렇게 형식적으로나마 처벌한 경우도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면 그당시 고구려의 국력이 상당히 강력했다는 반증은 된다.[28]

이후 북위는 고구려 왕실과의 혼인을 바랐지만 장수왕의 한 신하가 "저 놈들 연나라도 저렇게 뺑끼치고 침공했음"이라고 하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되었다. 그러나 10여 년 뒤에는 역으로 고구려 측에서 북위에게 요구하여 혼인이 성사된다. 이때 고구려에서 북위로 건너간 자가 문소황후로, 그녀의 오빠 고조는 북위의 권력자가 되어 북위의 정계를 주무른다. 그래서인지 삼국사기에 장수왕이 승하했을 때 북위 황제가 애도 의식까지 치렀다고 한다.

참고로 일부에서는 장수왕이 북위에 역대 황제의 계보를 바치도록 요구하였고 이에 응한 북위가 황실 계보를 바쳤다는 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해석의 오류로 기실 북위가 신하국으로서 계보를 고구려에 바친 것이 아닌 고구려가 봉물을 바치면서 일종의 조공국으로서 북위 황실에 대한 피휘(避諱)를 하기 위한 이유로 원한 것이다.

여하간 이 당시 고구려는 북위, 송보다 강성한 것은 아니었지만 서로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수준의 비교적 강한 국력을 자랑했다. 이때 고구려는 북위, 남조, 유연과 함께 동아시아 4강 체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다. 중국의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고구려에 최대한의 높은 직위를 내리면서 고구려를 자신들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꾸준히 노력했다. 중국 국가들이 내린 작위 기준으로 장수왕보다 높은 위치에 오른 국왕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 기껏해야 원 간섭기 몇몇 고려 왕들 정도가 고작인데[29] 독립국이었던 고구려와는 그 위상을 논할 순 없다. 고구려가 북위를 공격하고, 북위 사신의 고구려 통과를 불허하고, 대놓고 양다리 외교를 펼치는 등 피책봉국답지 않은 태도를 보여도 북위는 고구려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을 지경. 토욕혼, 유연, 남조는 틈만나면 괴롭히면서도 고구려는 한 번도 건드린 적이 없었다.

남제서(南齊書)에 따르면 북위에서 사신을 대우할 때 남제의 사신과 고구려의 사신을 동등하게 대우해 남제의 사신들이 불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489년(장수왕 77년)에 효문제가 고구려 사신을 제나라 사신과 동급으로 대하자 제나라 사신이 항의한 사례가 대표적.

또한 삼국사기에도 북위가 사신들의 숙소를 배치할 때 남제의 사신을 첫 번째로, 고구려의 사신을 두 번째로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4.3. 지두우 분할 시도[편집]

파일:attachment/장수왕~1.jpg
빨간 선은 원정로가 아니라 답사로다.

이후 479년에 몽골 고원의 유연과 모의하여 현재의 대흥안령(大興安嶺)에 위치한 유목민 부족 국가인 지두우의 분할을 시도했다. 유연과 지두우 분할 모의를 했다는 기사만 남아있고 그 경과에 대해서는 기사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성공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지두우와 고구려 사이에 있던 거란이 고려(물론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대릉하 인근으로 도망했다는 기록이 2건이나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성공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분할 시도는 했던 것 같다. 헌데 그때 유연은 북위에게 털리고 있던 터라 지두우를 원정보낼사정이 못되었고 이후에도 지두우나 물길이 여전히 사신들을 보내 외교활동을 하는걸로 보아서는 실패했거나 완전히 삼키지는 못했을 가능성도 무시할수 없다. 확실한 건 지두우 원정 성공 여부를 떠나서 시도는 이루어졌고 그 와중에 거란이 고구려에게 침략당하여 당시 내몽골의 유목민 세계에 혼란을 야기했다는 것. 종종 내몽골에서 발견되는 고구려 계통의 성터를 이 사건과 연관짓기도 한다.

국사 교과서에는 역사 부도 표기에는 거의 나타내지 않되 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를 장악하였다는 서술을 남김으로써 두리뭉실하게 다루고 있다.

5. 평가[편집]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기가 3대라고 이야기한다. 고구려의 경우가 저 3대에 빗댄다면 소수림왕-고국양왕 시대가 1대로 무너진 나라를 재건하여 힘을 다시 비축했고 2대가 광개토대왕으로써 비축한 힘으로 주변국을 정복하고 다녔다면 3대인 장수왕은 넓어진 나라를 다스릴 체제를 다시 재구축하고 전대의 과제들을 해결해야했다.

넓어진 영토, 점점 다시 강해지는 남북조와 고구려의 빈틈을 시시각각 찾고있는 백제와 신라를 사방에 두고 장수왕은 훌륭하게 문제를 해결한 명군으로 평가받는다. 평양으로 수도를 이전하며 국내성 주변에 힘을 길러온 귀족들을 타파하고 왕권을 강화시켰으며 고구려의 체제를 정비했다. 동시에 남쪽으로 수도를 옮김으로서 남벌을 천명하며 실제로 백제와 신라를 제압했다. 신라가 광개토대왕 시기에는 세력권 밖으로 나가기는 하였으나 백제와 신라는 최소한 장수왕 당대에는 고구려에 힘에 짓눌려있었다라고 표현해도 무리가 없었다. 남북조에게는 양면외교를 시행하며 형식상 조공을 주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대등한 외교로 동북아를 남북조, 유연과 함께 4강체제로 평화를 정착시켰다.

결론적으로 장수왕은 광개토대왕 다음 대의 왕으로써 편하게 국가를 운영했을것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야할 시대적 상황에서 집권했다. 하지만 탁월한 본인의 능력을 활용하여 강해진 고구려의 국력을 바탕으로 안으로는 왕권 강화, 밖으로는 주변국 장악을 성공적으로 이루었으며 본인도 장수하며 강력한 고구려의 국력을 향유한 왕이다. 실제로 장수왕이 받은 중국 남북조의 왕호들과 지위들 주변국의 대접들은 역대 한반도의 군주들 중에 당연히 최상위라고 할만했다

6. 삼국사기 기록[편집]

《삼국사기》 장수왕 본기
一年冬十月 장수왕이 즉위하다
二年 동진이 왕을 책봉하다
三年秋八月 이상한 새가 왕궁에 모이다
三年冬十月 흰 노루를 사냥하다
三年冬十二月 국내성에 많은 눈이 내리다
八年夏五月 나라 동쪽에 홍수가 나다
十三年春二月 신라가 사신을 보내다
十三年秋九月 풍년이 들어 왕이 잔치를 베풀다
十四年 북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十五年 평양성으로 천도하다
二十四年夏六月 북위에 조공하니 북위가 책봉하다
二十四年 북연 왕 풍홍이 도움을 요청하다
二十五年 북위가 북연을 토벌할 것임을 알려오다
二十五年夏四月 북연의 화룡성을 점령하다
二十五年夏五月 북연 왕 풍홍을 데려오다
二十六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七年春三月 북연 왕 풍홍을 죽이다
二十八年冬十一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八年冬十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九年 신라가 변방의 장수를 죽이다
四十三年秋七月 신라 북쪽 변경을 침략하다
四十四年 남송에 조공하다
五十一年春三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二年 남송이 왕을 책봉하다
五十四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五年春三月 북위가 후궁으로 들일 왕녀를 요구하다
五十六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七年春二月 신라의 실직주성을 빼앗다
五十七年夏四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八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八年秋八月 백제가 침입하다
五十九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九年秋九月 백성 노구 등이 북위로 달아나다
六十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年秋七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一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一年秋八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二年春三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二年秋七月 북위와 남송에 조공하다
六十三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三年秋八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三年秋九月 백제 한성을 함락하다
六十四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四年秋七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四年秋九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五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五年秋九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六年 남송에 조공하다
六十七年 백제의 연신이 투항하다
六十八年春三月 북위에 조공하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장수왕의 내정 관련 기록의 거의 전부[30]로, 나머지는 거의 대부분이 북위와 남조에 조공한 기사들이다. 북위에 조공기록만 25회. 기록의 반이 북위 조공기록이다. 덕분에 일부 역사애호가들 사이에서 조공왕이라는 괴랄한 별명도 있다.

이 부분에서 김부식의 사대 정책이 드러나는 거 아니냐는 주장도 간혹 나오는데, 그보다는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에 대한 기록이 심히 부실한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글자수라도 채우기 위해 중국 사서 내용을 옮겨 적었어야 했다. 이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삼국사기는 거의 천 년쯤 뒤에 쓴 책이고,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하고나서는 후기 고구려와 관련된 사료 대다수가 소실되어 남아있는 자료가 많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국내 기록이 부족하면, 《삼국사기》에서는 당연하게 중국 사서의 기록을 모아서 내용을 채웠다. 당연히 중국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장수왕 관련 기사야 조공으로 기록된 외교 기사만 있을 수 밖에.백제보다는 낫지만

신집 5권을 인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국원왕 대까지[31]의 기록은 그럭저럭 있고, 광개토대왕은 광개토대왕릉비의 존재 때문에 기록이 어느 정도 받쳐주는데, 장수왕 대 기록부터는 전적으로 중국 기록에 의존해야 했다. 을지문덕, 연개소문과 관련된 기록을 보더라도 《삼국사기》 편찬 당시에 고구려 기록이 없어서 김부식이 골머리를 싸맨 기록이 남아있으며, 민간에서 주도해 만든 《삼국유사》의 경우에도 신라의 기록에 비해 고구려, 백제의 기록은 심히 부족하다.

또한 많이들 오해하는데, 전근대 시대 중국과의 조공 관계는 상하관계가 아니라 국제 외교로써, 굳이 쓸데없는 위축감 가질 필요가 전혀 없다. 그냥 조공 = 외교를 활발히 한 것이다. 오히려 이 당시엔 조공국이 책봉국을 선택할 수 있는 아이러니도 있었고, 2개국 이상의 책봉을 받기도 했다. 책봉국도 조공국을 늘리려는데만 관심 가졌지, 조공국이 적국의 책봉을 받건 말건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32] 그러니 이 당시 책봉 - 조공 관계는, 그냥 중소 국가나 지역 강국이 강대국들이랑 친하게 지낸 것 정도의 수준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굳이 비유하자면 오늘날의 4강 외교?

7. 대중매체에서[편집]

아버지 광개토대왕과 비교해도 딱히 꿀릴 것 없는 업적과 유명세를 자랑하고 상당히 오래 재위해서 고구려의 역사에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의외로 대중매체에서 다뤄진 적이 거의 없는데 기록이 많지 않아서 그런 듯. 그래서 앞으로도 장수왕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을 만들기는 쉽지는 않아 보인다. 장수왕 본인도 부왕 때 미친듯이 팽창하던 국가의 왕자로 태어나 즉위한 뒤 대내외로 패권을 휘둘렀던 사기캐 수준의 인물이라 입체적인 주인공으로써의 캐릭터를 만들기 쉬운 인물은 아니다. 차라리 이 무서운 인물을 대해야 했던 백제신라의 입장에서 극강의 최종 보스 역할이면 모를까.
  • 형민우의 만화 <태왕북벌기>에서는 마지막 권에서 어린 시절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무술을 수련하면서 이후 자신의 포부를 밝히는 모습으로 잠깐 등장하고 끝.
  • 2011년 KBS 드라마 <광개토태왕>에서는 당연히 등장해야 하는 배역이지만 끝까지 나오지를 않는다.
  • 게임 <천년의 신화>에서는 고구려 영웅으로 등장한다. 양쪽에 뿔이 달린 투구를 쓰는데 모델링이 영 괴악해서 대머리처럼 보이며 투구뿔도 얼마 안 남은 머리카락으로 착각해 헤이하치 컷인 줄 아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정작 초상화는 중세 프랑스 왕족을 연상시키는 머리스타일에 곱상한 얼굴이다. 전차를 몰고 활을 쏘는 영웅 유닛으로 현혹술을 통해 적을 아군으로 만들 수 있다. 덧붙여 다른 나라는 왕이 현혹술을 가지고 있는데 고구려만 유일하게 태자가 현혹술을 쓰고 있다. 여담으로 목소리가 나카오 류세이와 비슷하다.
  • 2017년 KBS 드라마 <한국사기>에서는 영화 관상에서 마지막 장면의 한명회를 연기한 배우 우상전이 연기했다. 노년의 장수왕 모습이 대중매체에 등장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8. 둘러보기[편집]

[1] 이는 삼국사기를 토대로 즉위년을 기록 한 것인데, 당대 고구려인들에 의해 작성된 광개토왕비에서는 412년 10월에 즉위 했음을 알 수 있다.[2] 용성은 북연의 수도 화룡성을 뜻하고, 풍씨는 북연의 국성이다. 엄연한 황제국의 황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연왕도 아니고 용성왕이라 대놓고 낮춰 부른 것은 국왕도 아니고 군왕(郡王)급으로 취급해버린 것이라 엄연히 한 나라의 황제였던 풍홍 입장에서는 모멸적으로 들릴 만한 명칭이다.[3] 긴 장(長), 목숨 수(壽). 긴 수명이라는 소리다.[4] 전근대 시대에 평균 수명이 낮았다지만 그건 유아기 사망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고 일단 성인까지 성장했다면 4~50대까지는 사는게 보통이었다. 30대 후반은 아직 정정할 나이다. 동시대 인물인 모두루도 '하늘이 이 나라를 어여삐 여기지 않아(태왕께서 승하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괄호 안은 실제 기록은 아니며 문맥으로 판단한 사항이다.[5] 다만 이쪽은 자연사가 아니라 본인이 아들을 죽인 경우다. 워낙 늦둥이였던 것도 있어서 살아 있었다면 아버지의 승하 때 40대 정도에 불과했을 나이였다.[6] 단 이쪽은 증손자. 루이 14세의 증손자인 루이 15세 역시 손자인 루이 16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7] 다만 이들은 기록이 조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20년쯤 조작되었어도 90살에 죽었다고 봐야하는 태조왕 등을 볼 때 장수한 것 자체는 사실로 보인다.[8] 만 24개월~27개월[9] 무령왕릉 지석에서도 사망한 년도와 장사를 지낸 년도가 딱 27개월의 차이가 나는 것을 보아, 당대에도 널리 통용되는 관습임을 알수 있다[10] 홍익대 가야사 전문가 김태식과 동명이인의 역사 전문 기자이다.[11] 당시는 북연.[12] 더 안습한 것은 백제의 지방군보다 더 멀리 위치한 신라의 지원군이 기록에 등장한다는 것[13] 이는 삼국사기나 광개토대왕릉비 등 관련 기록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는데 재위 2년째에 평양성에 절을 무려 9개나 건설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영락 9년과 14년에 평양성을 순시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대 사회에서 은 사회망을 구축하는 기관으로써의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단기간에 평양에 사찰을 9개나 세우고, 왕이 직접 남쪽에 위치한 곳을 순시했다는 기록이 공덕비에 나오는 점을 감안해 보면 광개토대왕도 평양성으로의 천도를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14]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후대에 돌궐, 북주, 말갈(물길), 신라, 백제로부터 전방위적인 압박을 받았고 대성산성을 건축하기도 했다. 6세기 말부터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이후로는 평양성이 국경에 인접해버리는 위험한 꼴이 되어버린다. 이건 백 년 가까이 훗날의 이야기이니 장수왕이 예상하기 어려운 부분이긴 하지만. 이때 고구려는 신라가 우리 대신 백제를 공격하라는 밀약을 맺었고 그 결과 일어난 사건이 관산성 전투.[15] 다만 안학궁은 이미 수당 시대에는 사라진 한나라 미앙궁 양식의 궁궐 조성과, 북위 궁전에서 보이는 태극전, 동서당제 등이 확인된다. 이는 안학궁이 수당시대 이전에 지어졌다는 것이며, 북위의 낙양궁이 지어진 때가 5세기 후반이므로, 이를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 안학궁이 (북위 낙양궁이 지어지기도 전인) 장수왕 15년(427)에 건설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기에 안학궁을 장수왕 대의 궁전으로 보지 않는 견해 역시 존재하고 지지를 얻고 있는 실정이다.[16] 장수왕을 말한다.[17] 임용한은 이 문구에서 착안하여 토크멘터리 전쟁史에서 고구려의 내분이 존재했다고 주장한다.(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고 나서 굉장히 오랫동안 내전에 휩싸이게 됩니다. (중략) 의외로 장수왕의 기록이 없어요. 기록이 없다는 것은 그때 굉장히 혼란스러웠다는 거에요. 아마 평양 천도 하고 굉장히 심각한 내적 갈등이 있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국내성파와 평양 세력 간의 갈등은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끝나지 않거든요.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사## [18] 다만 백제가 무너진 건 이 국고낭비가 진짜 원인이 아니라, 백제가 도림의 꼬드김에 넘어가 개성 일대 방위선을 소홀히 하고 한성 방어에만 불필요한 민력을 낭비한 것이 최근 지적되는 중이다.[19] 신라 소지 마립간 때 거문고 갑을 활로 쏴서 그 안에 숨어있던 간통관계인 승려와 왕비를 죽였다는 <사금갑(射琴匣)조>는 보통 신라 내부 불교 세력과 토착 종교 세력의 갈등으로 풀이하는 경우가 많지만, 장수왕이 백제에 한 번 써먹은 방법으로 신라에도 승려를 간첩으로 보냈다가 실패한 것이 아니냐고 보는 주장도 있다.[20] 한성백제박물관 발간 백제사 시리즈 11권 한성에서 웅진으로 참조[21] 이때 신라는 언제 고구려군이 수도를 기습할 수 있으니 자비 마립간명활산성에 임시로 들어가 항전을 대비한다.[22] 물론 이는 일본서기 특유의 국수주의적 사관을 생각해보면, 허세력이니 하고 넘어갈 대목이다.[23] 한국 측의 초상화나 표준 영정은 없다. 청빙이는 역대 고구려 왕들의 초상을 그렸는데 하나같이 유인원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장수왕은 그나마 나은 편.[24] 특히 야마토 진나라 동래설과 같이 많은 이민족의 조상이 중국인이라고 주장하는 중국 사서도 많다[25] 고구려는 북위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풍홍을 보내지 않았다. 충분히 할일을 했다는 것.[26] 송의 사신인 배구라는 사람이 이때 풍홍의 잔당군으로써 풍홍을 죽인 장수를 공격해 전사시켰다.[27] 그러나 송 입장에서도 당대의 강국이었던 고구려를 차마 대놓고 적대할 순 없어서, 고구려가 배구를 죽이라고 극딜을 퍼붓자 그를 송환하여 감옥에 가둔 뒤 몰래 풀어주었다.[28] 남제서에는 고구려가 워낙 강국이라 마음대로 남북조와 마음대로 교류하는데도 어찌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또한 고구려 사신의 관저를 남조에 버금가게 지었으며 사신들의 의전 서열도 동등하게 하였는데 이를 남제 사신들이 항의해도 북위는 그나마 이것도 대접해준 것이라고 대꾸한 일화가 있다.[29] 원간섭기 고려 왕은 부계로만 고려인 피가 간신히 이어졌지, 모계로 치면 걍 원나라 황금씨족 일원이었다. 당연히 국력보다 작위가 높을 수밖에 없다.[30]광개토대왕릉비』 건립 기사는 《삼국사기》가 아니라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31] 신집은 소수림왕 때 편찬된 100권의 역사서 유기를 5권으로 줄인 것이기 때문에 고국원왕 대까지가 상세하다.[32] 이렇게만 써 놓으면 마냥 조공국에게만 유리한 것 같지만 그래도 책봉국에게도 이점은 있었다. 책봉국 자신은 조공국이 늘어난다는 것은 곧 외교관계를 맺은 국가가 늘어난다는 것 다시 말해 우호국이 늘어나기에 자신의 조공국이 된 국가와의 전쟁 위험이 경감되고(이는 조공국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다른 경쟁관계에 있는 책봉국과 입지 다툼을 할 수 있다. 단적으로 북위는 무려 20개국의 조공을 받은 바 있다. 나름대로 자기 나라가 이만큼 강대국이라고 광고할 수 있는 효과가 있는 셈 게다가 이 시대에서 양대 책봉국인 북조와 남조는 사이가 나빴으니 서로 많은 조공국을 확보하는것 그 자체만으로도 이득이라 생각했을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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