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에 건너간 삼국 이주민 및 패망한 백제의 유민들이 최초의 재일동포로 볼 수 있으며, 이들은 현대에는 모두 일본인에 동화되었지만 역사서, 일본 각지의
신사, 지명,
족보, 구전설화 등 여러 형태로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그 후
왜구들의 해적질, 특히
임진왜란 때 잡혀간 조선인들도 재일동포로 볼 수 있다. 이 당시 잡혀간 학자와 도공들, 특히 도공들은
도쿠가와 막부의 재산으로 관리되었으며 "조선인"의 "자기"를 유지관리하는 차원에서 좋은 대우를 받으며 도자기를 굽든지, 귀화해서 바닥부터 시작하든지 선택지를 강요받았는데
메이지 유신으로 인해 막부의 비호가 사라지면서 "조선인"적을 대부분 포기하고 일본인으로 귀화했으나, 그대로 도공으로 남아 아직까지 도자기를 굽고 있는 경우도 있다.
본격적인 재일동포의 시작은
대한제국 때 일본으로 유학한 학생들이 해당된다.
일제강점기부터는 2등 국민 신세가 되지만, 병역의 의무가 없어서
[7] 일본인보다 사업에 유리하고 외지에서 산다는 끈기가 있어서 조선인을 우대하는 업자도 나와 사업에 성공하는 동포도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로 인하여 일본 본토인부터 자기 일자리를 빼앗겼다는 시기를 받게 된다.
일본에 돈을 벌기 위해 넘어가는 사람도 많았는데,
경상도 출신도 많았지만 특히
제주도 출신이 일본에 많이 건너갔다. 제주도의 주산업이 농업,어업으로, 열악한 산업환경과 인구증가 따른 실직자가 다수 발생하였고, 당시의 제주도출신에 대한 멸시가 한반도에 있었기에 결국 제주도에서 발생한 실업자를 받아들일수있는 곳은 필연적으로 일본본토에 한정되어
일제강점기초기부터 많은 제주도인이 일본으로 떠났다. 경술국치 이후 일단은 한반도가 일본의 일부로 편입됐기 때문에 그 절차도 다른 외국에 가는 것보다는 훨씬 쉬웠고, 특히 1922년 자유도항제가 실시된 후에는 폭발적으로 일본으로 일하러 넘어가는 사람이 늘어났다. 1923년에는 제주도와
오사카를 잇는 직항 배편이 개통하기도 했다. 한때 제주도민 1/4이 일본에 가 있고 오사카 재일교포의 60%가 제주 출신이었다. 또한 주로 정치적 이유로 양반등의 지식계급이 귀양오는 유배지였던 덕분에 한반도에서 문해 수준과 교육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그 덕분에 일본생활에서도 적응에 어려움이 없거나 상당한 지위를 구축하는 사람도 나오게 된다. 지금도 제주 토박이치고 일본에 친척 없는 사람이 드물 정도고, 거의 모든 동네의 마을회관 앞에는 재일교포 공덕비가 세워진 곳이 많다.
1928년에는 제주와 오사카를 잇는 배편의 운영사인 일본 회사가 운임을 기존 8원에서 12원 50전으로 오르자 오사카 거주 제주인들이 반발해 '우리는 우리 배로' 구호를 내걸고 '동아통항조합'을 결성해 1930년 11월 임대 선박 '교룡환'을 운항하기 시작했다. 교룡환의 요금이 6원 50전이었기에 일본 선사는 부랴부랴 3원으로 운임을 내렸지만 제주 사람들은 두 배가 넘는 돈을 내면서도 우리 배를 이용했다. 이는 1930년 11월 7일자 동아일보에 올라와 있다.
때는
태평양 전쟁.
일본 정부는 조선의 불균형발전과 공업화의 부진
[8], 인구 증가, 세계 불황, 대량의 실업자 발생, 그로 인한
독립운동의 기운에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중국과
만주에서 벌이는 전쟁, 그리고 나중에는
태평양 전쟁으로 병역의무가 있었던 자기 국민을 마구 징발해 갔기 때문에 일본 본토는 노동력이 부족한 사태가 되었다.
일본 정부는 이 문제들을 "조선의 실업자에게 일본에 일자리를 소개"하는 것으로 해결하려 한다. 처음에는 일본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조선인 실업자와, 싼 노동력을 얻을 수 있는 일본업자들의 서로 이득되는 정책이라 호평이였지만, 싼 노동력의 대량공급은 노동자의 대우를 급격하게 하락시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인 노동자를 혹대하여
노예취급하게 된다.
전시상황에서 구
일본군의 일본 본토로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는 조선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9][10][11][12]전쟁 말기에 일본의 패전으로 가면서 일본의 공권력의 약화한 뜸에, 일본 내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대우의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하거나 조합을 설립하여 일본 업자와
일본 정부에 대항하게 된다. 후에 이 조합들이 이념으로 해산/분열되어
민단/
조총련이 된다.
1945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도 많은 조선인들이 군수공장에서 일했었는데, 이때
원자폭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이외에도
홋카이도,
사할린등 석탄 다산지에서의 석탄 강제노동으로 끌려간 조선인도 숱하다.
[13] 오늘날, 이들 원자폭탄으로 희생된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나
한국 정부 양측에서
전혀 보상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14]원자 폭탄을 떨어뜨린 미국 정부의 책임? 모릅니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혼란의 와중에서 일본 민간인(자경단)과
일본군,
일본 경찰에 의하여 무차별적으로 조선인을 대상으로 학살을 벌여 상당수의 조선인들이 희생되었다.
[15][16] 이미 이 당시에 상당히 많은 수의 조선인들이 일본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그들에 대한 취급이 어땠는지 이를 보아 짐작할 수 있다. 1923년에 일본 열도에 있던 조선인의 수는 8만 명으로 추정한다. 1945년 패전 직전에는 200만에 이른다.
갱스 오브 뉴욕의 아일랜드 이민자들도 아니고.해방 후 일본에 체류하던 조선인의 대부분은
한반도로 돌아갔지만,
[17] 불안한 한반도의 정치상황과 경제혼란으로 일본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숫자도 많았고 이들은 일자리가 부족
[18]했기에, 노동력이 필요했던 한때 일했던 공장과 지역으로 돌아간다.
오사카가 재일동포가 많은 이유는 그 곳에 있는 군수공장이 밀집하고 있었고, 그 곳에서 많은 조선인이 일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재일동포 1세대는 이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의 혼란이 시작되면서, 일본의 재일교포 사회에서도
남한을 지지하거나
북한을 지지하는 쪽으로 갈라서기 시작한다. 이쯤에서 재일교포 양대 단체인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이하 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하 조총련)가 발족되기 시작한다. 또한 이 시기에는
4.3 사건의 참화를 피하기 위한
제주도출신의 한국인이 대거 일본에 입항하고
[19], 한국전쟁의 참화를 피하기 위해서 건너온 이들도 많았다. 반대로
재일학도의용군이란 이름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재일교포도 있었다.
해방과 전쟁 이후를 거친 뒤로, 일본에 잔류한 재일교포들은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져온 각종 사회적 차별에 여전히 시달려야 했다. 또한 남북간의 반목이 민단 vs 조총련이라는 형태로 재일교포 사회에서도 나타났었고, 이들은 서로 헐뜯기 바빴다. 그 와중에도 이 두 단체가 화해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대개 좌절로 돌아갔다.
[20] 60년대~80년대의 독재체제에는 재일교포가 피해를 특히 심하게 봤다. 한국에 잘못갔다 억울하게 붙잡혀서 고문당하다 죽은 사람들이 숱하며
한국어도 제대로 못하니 외국인 취급받기가 일쑤였다.
북한에선 더 심했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재일출신 귀환자들을 '재포' 내지는 '째포'라고 낮춰부른다.
그 와중에, 일본정부는 패전초기에 비해서 급격하게 늘어난 재일교표와 그에 따른 물자부족, 치안악화, 잦은 민족단체들의 충돌에 따른 테러위험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북한과 협의하여 자국에 있는 다수의 북한 출신이나 좌익인 재일 조선인을 일본 적십자회의 이름으로 배에 태워 북으로 돌려보내는 사업을 실시한다. 본래 북한은 UN에서 인정하지 않은 비합법적인 국가였으나, 일본 적십자회는 이를 묵인하고 북송을 추진하였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강력히 반발하여 한반도의 합법적인 정부는 오직
대한민국뿐이며, 따라서 일본에 거주하던 교포의 송환지도 대한민국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본 내부의 분쟁들을 하루 빨리 정리하고 싶어했던 미국이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국적 선택은 다른 국가가 참견할 수 없는 권리라고 내세우면서 대한민국 정부의 주장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 와중에 북한과 일본 매스컴 모두가 북한을 살기 좋은 유토피아로 묘사하면서 북송을 희망하는 교포들을
재일교포 북송으로 끌어 모았다. 허나 실상은 일본에 살던 시절보다 더욱 궁핍한 수준. 게다가
이렇게 북송한 사람들을 자본주의에 물든 사람들이라 치부하며 온갖 차별을 가했다. 이윽고 북한 내부의 비인권적인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져나갔는데 정작
국제 적십자회는 이를 쉬쉬했다.[21] 게다가 소문은 처음 북송한 지 몇 년이 지나 처음 흘러나왔으나
[22], 일본 적십자회는 무려 80년대까지 재일교포의 북송을 추진했다.
멋모르고 북한행 배에 탑승했던 9만명의 재일조선인과 1800여명의 일본인들의 운명은
[23][24] 안습이다.
아무튼 이 과정에서 재일 조선인, 특히 조총련계의 반수 이상이 일본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결국, 북한에만 득이 되었고, 일본 내 조총련계 재일한국인들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재일교포 북송을 참고할 것. 다만 이때 북한과 일본이 저지른 일은 나중에 일본인
종북주의자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요도호 공중 납치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이 이들의 약점과 꼬투리를 잡을 구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때문에, 일본 내부에서는
조총련은
빨갱이 공작원,
민단은
파시스트 깡패라는 악명을 얻기도 했다. 이 항목 초반에도 잠시 나와있듯, 민단의 구성원 중 상당부분이 무직인데다가, 이 항목 끝에 서술되어 있는 재일한국인 중 민단계의 거물 상당수가 실제로
야쿠자라는 점, 그리고
심지어 그 야쿠자들이 한국정부로부터 민단 건설 및 교포사회 확립에 대한 공로로 훈장까지 받았다는 점[25][26]에서 이런 오명을 얻은 흑역사가 존재하는 셈이다. 그리고 조총련계는 일본 내 민간인 납치사건과 관련하여
흑역사가 존재하고, 실제로 조총련은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을 비롯한 급진 과격단체와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보니, 시선이 고울래야 고울 수가 없다.
조총련계와 그 가족의 현재 처지를 단적으로 나타낸 비극적인 사례로,
옴진리교의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의 주범 중 하나인 재일조선인 하야시 야스오(임태남)이 있다. 야스오의 아버지는 북한 출신의 조총련계 비밀공작원이었고, 이미
일본 경찰에게 항상 마크당하는 상태였다. 중학교 때까지 자신이 재일조선인이라는 걸 몰랐던 야스오는 평소 재일한국인들을 멸시해왔으나, 아버지가 북파 공작원이라는 사실과 자신이 재일조선인이라는 걸 알게 되자 대학교를 졸업한 후 전 세계를 방황하며 떠돌다 옴진리교 조직에 가입하게 된다.
교단 내에서도 운전사 등 한직에 위치했던 그는
아사하라 쇼코에게 스파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고 있었다. 결국 도쿄 사건에 가담하게 된 그는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하려고 남들은 사린가스 용액이 든 봉지 하나만 들고 가는데 3개나 들고 나가서 더 많은 구멍을 뚫었으며, 지하철이 출발하는 타이밍을 잘 잡은 덕분에 그가 탔던 열차 안에서 희생자가 가장 많이 발생하였다. 이 후, 1년여의 도주 생활 동안 가장 위험한 도주범으로 손꼽혔으며, 결국 1996년에 잡혀 사형판결을 받았다.
당시
GHQ(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전후에 조선인의 귀국을 허락하면서 귀국시 가져갈 수 있는 재산 규모에 제한을 두었고 일본이 패전하고 나서 연합군 최고사령부 측에서 징용된 조선인들의 귀국을
일본 정부에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 상당수는 이 명령을 따르지 않아 전쟁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일본의 공장이나 농지 등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이러한 여러가지 이유로 일본에 남아 있다가 이후 발발한
한국전쟁 등의 여파로 계속 일본에 사는 것을 선택했다.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