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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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쟁패 시대
전한(서한)
전한
西漢
Han Dynasty Western Han
존속기간
206 BCE–8 CE[1]
장안(長安, Chang'an)
정부
군주제
면적
BC 50년 6,000,000 km2(2,316,613 sq mi)
인구
2 CE 5959만[3]
화폐
반량전(半兩錢)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니 동북쪽이라,
한(漢)의 장군들 집을 떠나 적을 쳐부수는구나.
남아란 본래 거리낌 없는 행동을 귀히 여기는 법,
천자는 특별히 기쁜 표정 보이시네.

징을 치고 북을 치며 유관(楡關)으로 내려가니
군대의 깃발[旌旆], 구불구불 갈석산(碣石間)에 가득하네.
교위(校尉)의 급한 서신, 사막으로 날아들고,
전쟁을 알리는 선우의 사냥 불, 낭산에 비치는구나.

변방의 끝, 쓸쓸하고,
오랑캐 사나운 말은 언덕에 의지하여 비바람과 섞였도다.
최전방의 전사들 반이나 죽었건만,
미인은 휘장 안에서 노래하며 춤을 추네.

고적(高適 707-765) ─ 연가행(燕歌行)[4]
1. 개요2. 역사
2.1. 초한 쟁패기2.2. 군국제 확립
2.2.1. 유방의 공신 숙청
2.3. 여후의 시대
2.3.1. 여인 천하2.3.2. 공신들의 반격
2.4. 내부 정비 시간
2.4.1. 문제의 치세2.4.2. 오초칠국의 난과 중앙 집권의 확립
2.5. 한무성세 : 무제의 치세
3. 로마와의 비교4. 역대 황제5. 계보6. 추존 황제

1. 개요[편집]

중국을 하나의 국가, 문화권으로 형성한 첫 번째 제국.[5][6]

한 고조(高祖), 정식 묘호는 한태조. 고조는 시호인 고황제의 존칭이고, 사마천이 처음 유방을 고조라고 표현하자 모두들 사마천을 따라 유방을 고조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은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에 건국한 제국으로서 에 이어 중국을 두 번째로 통일한 제국이다. 무제 시기에 최고의 세력을 떨쳤으며, 국가 역사의 말기에는 외척들의 힘이 강해져 그 중 한명인 왕망에게 제위를 찬탈당하여 멸망한다.
함양 유방 부장묘에서 출토된 기마 무사용

사실상 하나의 중국을 가능하게 한 나라다. 그전까지의 중국은 지역에 따라 언어, 문자, 단위가 다 제각각이었으며, 따라서 수많은 여러 국가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러한 차이점은 사람들의 생각에도 강하게 뿌리내려져 있었으므로, 서로간에도 민족적 동질 의식보다는 서로 다른 나라 사람들일 뿐이라는 인식이 강했으나,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 전한과 후한에 이르며 장장 400여년간 같은 나라 사람으로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는 하나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의 교과서에서는 이 시대를 광무제 이후의 시기와 구분하여 전한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나 역사학 전공자나 중국 현지에서는 서한(西漢)이라고도 부르는 데 이유는 (후한의 수도인 낙양의) 서쪽에 위치한 장안이 도읍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후에 장안보다 동쪽에 있는 낙양을 도읍으로 삼은 후한은 동한(東漢)이라고도 부른다.

중국을 대표하는 민족인 한족이 사실상 하나의 민족이라고 보기 어려운 외관과 혈면 그리고 문화적으로 차이가 나는 많은 지역의 수많은 민족을 통합하여 이룩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것을 중국이라는 하나의 테두리 안에 있을 수 있게 한 점은 한나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중국의 민족을 한나라의 한(漢)자를 따서 한(漢)족이라 부르는지 가만히 생각해보자. 그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중화(中華)가 시작된 뿌리라 봐도 무방하다.

오늘날 중화주의는 단순히 '중국의 민족주의'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근대 이전 동양의 국가질서를 고찰해보면 여기서 내세우는 중화의 의미는 현대 중국이 내세우는 근대적 민족주의적 사고 방식과 다르다. 이는 서양의 로마제국과 비슷한 의미의 '동양의 보편적인 질서'라고 할 수 있다. 중화제국들은 '중화가 중심이 되는, 중화가 곧 천하'로 대표되는 자신들의 규범을 만들고, 자신의 세력권에 속하는 국가들에게 규범에 대한 준수와 자신에 대한 존중을 요구한다. 옛날부터 중원의 제국들은 주변국에게 책봉과 조공이라는 자신들의 질서를 강요하고 이에 따르지 아니하면 징벌하며 주변국들이 칭신하고 조공을 바치면 막대한 하사품을 내려 이들을 복종시켰다. 그리고 이를 따를 경우, 제국은 조공국들에게 안정과 번영을 제공할 것임을 약속한다. 제국은 이 질서를 유지하는 것 자체에서 이득을 거두며, 질서가 도전받는 경우를 제외하면 별도의 무력행위나 제재를 통해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기틀을 세운 첫번째 중화제국이 바로 전한이며 이 중화 의식이 동양 각국의 세계인식에 영향을 주었으며 후대엔 이런 보편적인 질서를 내제적으로 적용시킨 소중화 사상이 나오는등 동양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수많은 시대에 수많은 영웅 호걸들이 즐비하는 중국사에서도 대단히 중요하게 취급받으며 상당한 입지를 가지고 있다. 단순히 하나의 중국이 시작되었다는 것만도 아닌데, 일단 동아시아 문화권의 핵심인 유교가 국학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고[7], 또 다른 핵심인 율령(律令) 역시 BC 130년 장탕(張湯)과 조우(趙禹) 등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군현제도가 정비된 것도 이 시기이다. 역시 시작은 이사의 건의에 따라 진나라가 먼저 시행했지만 법가사상에 의한 폭정으로 순식간에 망해버려서…… 이후 진나라를 멸망시킨 항우는 천하를 다시 제후들이 나누어 통치하는 봉건제(封建制)로 부활시켰지만, 반대로 유방은 장량의 건의에 따라 천하를 분열케하는 봉건제 대신 군국제(郡國制)를 실시하였고[8] 이후 오초칠국의 난과 무제 시기를 걸쳐 중국 전체에 군현제가 완전히 확립되었다. 이 군현제는 이후 장장 2000년간 중국 통치 시스템의 기본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중국은 유럽 등의 타지역과는 비교될 수 없을만큼 빠른 시기에 광대한 지역에 중앙 집권의 영향력을 완전히 확립할 수 있었다.
장사 마왕퇴에서 출토된 비단옷.[9]

또한 무제 시기의 군사 작전으로 이후 중국 주변국의 역사에 어마어마한 파장을 미쳐오기도 했다. 엄청난 힘을 자랑하던 최초의 유목 제국 흉노에 대한 미칠듯한 공세로 인해 흉노는 큰 타격을 입어 이전같은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남월은 순식간에 멸망당하고 대신 9군이 세워지게 되면서 베트남은 이후 수백, 수천년간 이어지는 중국과의 지리한 대립을 시작하게 되었다.

한국의 역사에도 큰 비중을 가지고 있다. 이는 바로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것이 전한이기 때문이다. 다만 위만조선은 이전의 남월에 비하면 그 한나라도 꽤나 고생을 해서 멸망시켰다. 단, 감옥에 있던 죄수들을 석방하는 것만으로 멸망시켰다는 점이 함정(...) 그리고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을 설치하였는데, 유민들의 저항과 고구려의 성장과 한사군 자체의 통제력 문제로 얼마 못가 통제력을 상실하고, 이때 부여와의 관계도 다소 서먹해졌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전한의 위업이라는게 죄다 한무제 때 이루어졌는데. 이에 따른 엄청난 지출이 있었고, 그것은 고스란히 전한에게 막대한 피해로 되돌아왔다. 단 한무제 이후로 전한이 그 정도의 넘치는 포스를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성급하게 다 망해간다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다.

선제라는 명군의 활약으로 어느정도 후유증을 회복했고, 망해간다는 나라의 인구가 6000만을 바라보고 있는데 후한은 멸망할때까지 그 망해간다는 전한의 인구수에 도달하지 못하고[10] 망했다. 삼국시대가 시작되면서 그 인구 숫자는 더 나락으로 떨어지고 몇백년이 넘도록 회복이 되지 못했는데, 중국 대륙이 다시듬 그 시기의 이상의 인구 숫자를 회복한 때는 무려 600년이 지난 수문제의 빛나는 개황의 치 시대였다. 하지만 수양제가 출동하면 어떨까?

전한이 멸망할때를 보면 중국사에서도 유례없이 조용하게, 별다른 일 없이 왕망에게 넘어간다.[11] 결국 후대의 황제들이 너무 나이가 어리거나 황제가 되기에는 부적절한 인물이 계속 나타나면서 왕망에게 빼앗겼지만, 그렇게 전한이 급속도로 내리막길을 걸었다면, 온갖 권력쟁탈의 대결이 벌어지며 대혼돈이 일어났어야 앞뒤가 맞지 않을까?

역시나 대혼돈을 피해가지 못했다. 전한의 6천만에 가까웠다는 인구수가 조사된 시기가 AD 2년이었는데, 광무제가 죽은 AD 57년의 인구수는 2800만이었다. 무슨 짓을 한거냐 왕망[12] 사실 그래봤자 삼국정립이 된 이후의 위촉오 전체 인구 총합은 수백만명에 불과했는데 이 당시에는 황건적의 난을 시발점으로 여러가지 크고 작은 난이 일어나 사람들이 계속 죽어나가서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깎이던 시절이었고 30살만 넘겨도 오래 산 것으로 인정될 정도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어나갔다.

여하튼 고대 동아시아의 압도적 패권국가. 막말로 다른 나라들은 이제 나라라는 모양새을 좀 갖추어가고 있는데 이를 비유하자면 인구 6000만초원으로 10만 명 이상의 기병을 진격 시키는 등 말도 안되는 수준이다.

2. 역사[편집]

2.1. 초한 쟁패기[편집]

고황제 유방
항우

전한의 시작은 패국의 시골 하급 관리이자 건달이었던 유방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유방은 집에서는 일도 안 하고 늘 불량배들과 어울려 다녔기에 아버지로부터 미움을 받았지만, 시골 관리인 정장(亭長)이 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후에 진나라의 공사에 참가해야 될 인부들을 이송하는 도중에 도망간 인부들이 너무 많자, 후에 돌아올 책임에 따른 책망이 두려워 아예 산적으로 돌아서버렸다가 패국의 관리/장정들과 합세하여 반란군을 형성했다.

그러던 중 유방은 한참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던 항량의 군과 합류하였고, 항량이 장한에게 죽은 후에는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의 수도였던 함양으로 진격하였다. 항우가 진나라 주력군을 거록에서 깨부수고 장함과 맞붙다가 그의 항복을 받아내느라 시간을 지체하는 사이에 함양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항우는 곧 대군을 이끌고 함양을 향해서 달려왔고, 도저히 대적할 전력이 아닌 유방은 홍문연에서 장량번쾌, 무엇보다 희대의 스파이 항백의 도움으로 인하여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변경인 촉 땅으로 유배나 다름없는 먼길을 떠나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 한신이라는 명장을 얻게 되었고, 항우가 제나라에 온 신경을 쏟아부은 사이에 촉 땅을 나와 여러 제후들을 물리치거나 병합시켜 화려한 재기에 성공하였다.

항우는 여러차례 유방을 물리쳤지만, 보급 문제 등으로 인하여 결정타를 주지 못했고, 그 사이에 유방이 북으로 파견한 한신은 조나라와 제나라를 물리쳐 세력의 역전의 기회를 가져왔고, 항우의 우방이었던 영포도 유방의 치밀한 계획 끝에 편을 바꿔 유방의 세력으로 합류, 항우는 전투에서 패배한적도 없으면서 전쟁에선 이미 패배한것이나 다름없는 기막힌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결국 BC 202년 해하 전투에서 항우가 자결함으로써 초한대전은 사실상 끝을 고하게 되었다.

싸움의 결과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유방의 운과 그의 밑의 재사들을 드는 경우가 많지만 전략적인 관점에서 봐도 상대인 항우와 달리 유방은 실수한게 거의 없다. 촉 땅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곧바로 팽월에게 장군의 인을 주어 아군으로 끌어들였으며- 팽월의 유격전으로 인한 항우의 보급 곤란은 항우 최대의 패배 원인중 하나였다. 대패를 당한 후에도 재빠르게 군사를 수습하는데 성공했고, 한신에게 별동대를 주어 한쪽 방면의 전투를 맡긴 일도 대성공으로 돌아왔다.- 이는 장량의 조언이었다. 한신이 중국 동북부를 쓸어버리는 동안 유방 자신도 빈집 털리는 상황에 광폭적으로 변한 희대의 명장 항우와 그의 대군을 상대로 1년여 동안 쏟아지는 집중공격을 묵묵히 이겨내며 탱커 역할을 매우 훌륭하게 수행했다. 이때 생사의 기로에 서서 수많은 전투를 벌이고, 항우에 의해 포로가 되어 있던 아버지가 눈 앞에서 솥에 내걸리거나 항우의 화살에 맞은 후 군의 사기를 위해 아픔을 참고 허세로 일관하는 등 수많은 고생을 했으므로 세간의 말처럼 결코 거저 먹진 않았다. 경포를 포섭한 것도 주효했다.

또한 민심과 치세의 관리에 대해서 역시 실수한 점이 없다. 유방은 관중을 얻었지만 함양의 귀중한 보석과 궁전과 창고를 모두 봉하여 피해를 입지 않게 하고 조용히 성을 나와 성 밖에 진을 치게 하여 약탈과 방화 그리고 살인에 두려워하던 진의 주민들을 안심시켰다. 그럼에도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있자 파상까지 퇴각한 후 각 현의 노인들을 불러모아 말한다. "그대들은 진나라의 잔학한 법률에 지금까지 고통받아왔다. 나는 오늘부로 모든 가혹한 형벌을 폐지한다. 살인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상해를 입히거나 도둑질한 자는 그에 상응하는 벌을 내릴 것이다. 오직 세가지 법으로만 처리할 것이다" 이에 모든 진의 관리가 집을 나와 전처럼 일했으며 사람들의 입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백성들은 패공이 진의 왕이 되지 못하면 어찌하는가 하며 걱정하였다. 항우가 함양을 싸그리 불태우고 모든 지역의 약탈을 허용하며 진왕 자영을 잔살한 후에 사방에서 떠도는 말이 있었으니, 이는 곧 패공이 관동으로 돌아오면 우리 백성들이 눈물을 씻고 호시절을 보낼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이에 반해 항우는 쓸데없는 대학살로써 민중의 저항만 거세지게 하여 민심을 잃었고, 범증 등의 수하의 부하들을 쓸데없을 정도로 의심했으며, 자신의 삼군 중 우군에 대한 관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마천은 항우의 패배에 관해서, 본인이 모자라서 싸움에서 진 것을 어찌 하늘 탓을 하냐며 비난하기도 하였다.

초한대전으로 인해 중국은 군현제의 확립에 한걸음 나아가게 되었다. 항우는 이미 자신이 봉건제를 선호하는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증명한 적이 있으며, 본래 항우 본인도 초나라의 귀족 계급이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유방은 왕후장상의 씨가 어디 따로있나라는 유명한 사기의 말과 같이 평민 출신으로써 새로운 정치인이었고, 봉건제 대신 군국제를 선택하여 향후 중국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2.2. 군국제 확립[편집]

  • 군국제와 군현제를 나타낸 그림. 다만 한나라의 군국제는 왼쪽의 그림에 비해서는 황제가 직접 다스리는 부분이 크다.

항우(項羽)는 장한을 격파하고 황제 자영을 자결시켜 진나라를 멸망시킨 뒤, 스스로를 패왕이라 일컫고 봉건제를 부활시켰다. 일단 진나라와 진나라의 제도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을 시기였기도 하고, 항우 입장에선 자기를 따라 싸운 별장(別將)들에게 무언가 보답을 해줘야 했다. 이리하여 장한을 옹왕으로, 사마흔을 새왕으로, 동예를 적왕으로, 위표를 서위왕으로, 영포를 구강왕으로 임명하는등 골고루 전부 왕을 시켜주었다.

항우에 의해 한중왕이 된 유방은 항우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항우와 격돌하다 수수전투에서 패배해 위기에 봉착한 유방은 장량과 역이기를 불러 계책을 물었다. 이때 역이기는 멸망한 6국의 후예에게 봉토를 내려 공격하자며 봉건제를 주장하여 유방의 마음을 혹하게 하는데 성공했지만 장량은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결국 장량의 계책을 받아들인 유방은 봉건제도를 쓰는것을 포기하였다.

마침내 항우를 패배시킨 유방은 이제 한나라의 통치 제도를 정하여야 했다. 봉건제를 쓸 마음이 없었던 유방이지만 자신을 따라 싸운 공신들을 푸대접한다면 반란을 일으킬 것이 염려되었다. 그리하여 일단은 7명을 왕으로 봉하고 공신들을 열후(列侯)로 삼아 1개 현(縣)을 단위로 한 봉읍을 지급해 그곳에서 징수된 조세가 그들의 수입이 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왕국와 후국(侯國)을 제외한 나머지 영토는 진나라의 군현제를 본받아 다스렸다. 이리하여 봉건제와 군현제가 섞인 통치 체제가 탄생했는데, 그것이 바로 군국제였다.

2.2.1. 유방의 공신 숙청[편집]

신나는 토사구팽 시간(…).

여러 공신들이 상을 받은 한나라 초기에는 103개나 되는 군국(郡國)이 존재했다. 이들은 한나라 땅의 3분의 2나 되는 막대한 영토를 조정으로부터 공의 댓가로 받았다. 이로 인하여 조정이 직접 다스릴 수 있는 땅은 고작 15개의 군에 지나지 않았다[13]. 황실에 당장 위협이 되는 세력은 유씨가 아닌 왕들이었다. 유방과 혈연 관계로 맺어지지 않은 이들은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고, 한때 초나라의 왕이었던 한신은 반란을 꾸미기도 했다. 유방은 슬슬 기반이 잡혔다고 판단이 되자 공신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한신은 전부터 탄압을 하긴 했지만 어쨌건 죽은것은 진희와 손 잡고 반란을 꾸몄기 때문이며, 경포와 장도 역시 자신들이 반란을 일으켰기에 망했다. 노관의 경우는 장도 대신에 연왕 자리까지 주었지만 역시 반란을 꾸미다 도망쳤다. 심지어 장오 같은 경우엔 부하인 관고 등이 유방을 암살하려고까지 했지만, 관고등이 고문을 받으면서도 주인을 배신하자 않자 감동한 유방이 장오를 선평후로 강등시키는 수준에서 멈추었다. 진짜 억울한 사람은 팽월.

BC 201년, 연왕 장도가 간이 부었는지 천하통일 직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살해당했다. BC 196년 유방은 양나라 왕인 팽월을 죽여 젓갈로 만들었다. 같은 해에 유방이 진희의 반란으로 출정한 사이 왕 자리에서 끌어내려진 채 지내고 있던 한신이 반란죄라는 명목으로 여후와 소하에 의해 살해된다. 겁을 먹은 영포는 다음해인 195년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키다 패배해 죽었다. 비록 이러한 과정에서 유방 역시 영포의 군대에게 부상을 당해 죽었지만, 장사문왕 오예(吳芮)를 제외한 나머지 왕들을 모조리 유씨로 바꾸는데 성공한다. 그나마 오예는 봉지가 멀었던 것이 명줄에 도움이 되었다.

또한 각 봉국의 재상과 고급 관료를 제후가 마음대로 임명하지 못하게 하고 황제가 직접 임명하여 파견함으로써 제후들의 손발을 잘랐다. 실로 가혹하기 그지없는 일이었지만 유방은 기꺼이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황실의 권위를 높이고 조금이라도 반란의 가능성이 생각된다면 모조리 찾아내 철저하게 짓밟아 버렸다. 아직도 봉건제의 이상에 취해있거나 한에 겉으로만 따르던 불순한 제후와 재상 그리고 신하들은 더 이상 이러한 한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거나 역모를 꾸밀 수 있는 역량 자체를 상실해버렸고 이러한 잔혹한 과정을 거친 연후에야 중국은 마침내 진정한 첫 통일을 이루었다.

이렇게 끔찍한 일을 벌인 이유는 유방은 중국 최초의 평민 출신 황제였고 진나라 말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군사만 있으면 스스로 장군이니 왕이니 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유방의 숙청은 필수불가결한 정치였다. 물론 별 생각 없었는데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억울할 수 밖에 없지만……

2.3. 여후의 시대[편집]

2.3.1. 여인 천하[편집]

고황후 여치

그러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는데, 유방은 제후왕들을 유씨로 바꾸었으나 유방 사후 정권을 차지한 여후가 조정의 모든 정권을 여씨의 손아귀에 주어버린 것이다.

생전의 유방은 태자인 유영을 유약하다는 이유로 폐위시키고 총애하는 척부인 소생인 유여의를 자기와 가장 닮았다고 치켜세우며 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척부인도 여의를 태자로 만들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쓰면서 여후와 대립각을 세웠다.

하지만 유방의 생각은 주창(周昌) 등 대신들의 반대에 부닥쳤으며, 여후는 신선술을 배운다는 명분을 세워 숙청의 피바람을 모면한 장량과 손을 잡고 당대의 은둔명사인 '상산사호'를 모셔와 유방 앞에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

자기가 불러도 오지 않던 명사들이 태자를 따르는 것을 본 유방은 결국 태자를 폐위하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대신 여의를 조나라 왕에 봉하여 그의 모친인 척희와 함께 가도록 했으며, 질투도 꽤 심한 여후가 자기가 죽은 후 여의 모자를 핍박할 것을 우려해 태자 폐위에 반대해 여후에게 도움을 준 주창을 조나라의 재상에 임명했다.

그러나 유여의 모자는 여후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유방이 사망하고 아들인 혜제가 즉위하자, 여후는 우선 척부인을 영항(永巷, 궁녀를 가두는 감옥)에 감금하고 하루 종일 쌀을 찧는 형벌을 내렸다. 그 다음에 조왕을 장안으로 소환한 후 제거하고자 했다. 조나라 재상이 된 주창은 여치의 의도를 파악하고 세번에 걸친 소환 명령을 조왕의 병환을 핑계로 모두 거절했다.

이에 여후는 주창을 소환한 후 조왕을 소환했다. 여의는 계모의 명을 어길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장안으로 출발했고, 혜제의 혼신을 다한 선방에도 불구하고 사냥을 나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독살당했다. 여의의 사망으로 모든 기반이 사라진 척부인 또한 산 채로 팔다리를 자르고, 눈을 뽑고, 약을 먹여 벙어리로 만든 다음 귀를 잘라 귀머거리로 만든 다음 돼지우리에 던져져 똥을 먹여 죽이고 말았다. 이를 가리켜 사람돼지란 뜻인 '인체(人彘)'라고 불렸다.

…그런데 그 꼬라지를 자기 아들인 황제 혜제에게도 보여줬다. 아들이 척부인과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쎄빠지게 노력한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14] 이 광경을 보고 만 혜제는 "사람이 되어가지고 이럴 수는 없습니다"라고 어머니에게 말하고 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때버리게 되었다.
"이는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신은 태후의 아들이지만 이제 천하를 다스리지 못하겠습니다."
- 사기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 中

정사를 돌보는 일을 그만 둔 혜제는 이후 이 엄청난 트라우마로 인해 폐인과 다름없이 지내다가 23살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고 만다.

아들 혜제가 죽은 이후, 혜제의 양자인 소제 유공이 즉위하지만 나이가 어렸었기에 섭정으로서 국가 권력을 좌지우지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남편 유방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연나라 왕의 자리를 자신의 친족인 여통에게 물려주고 군대의 수장들도 대부분 여록과 여산과 같은 자신의 친족들에게 맡겼다. 이 탓에 유공이 성장하면 보복할 것을 이야기하자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 유공을 폐위시키고 유홍을 즉위시켰다.

2.3.2. 공신들의 반격[편집]

그러나 아직 한나라에는 주발, 왕릉, 진평 등 통일 전쟁에서 유방을 도와 싸웠던 기라성같은 호걸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었다. 아직 여후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기세에 눌려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지만 곧 기회가 왔다. 여후가 드디어 죽은 것이다.

갑자기 나타난 투명한 푸른 소리없는 아우성 개에 물리는 환상체험 후에 병을 앓더니만 죽었다. 죽으며 자기가 없어지면 다른 유씨나 기타 추종세력이 달려들테니 조심하라는 유지를 남겼지만 뒤를 잇는다는 놈들이 모조리 함량 미달 찌끄레기들. 결국 숙청당하지 않고 살아남아 때를 기다리고 있던 왕릉-주발-진평 등의 유방 직속 공신과 다른 유씨들이 들고 일어나 일족이 몰살당했다. 이때 같은 개국공신인 번쾌의 아내인 여동생 여수도 죽고 말았다.

이 때 주발이 그를 따르던 병사들의 충성심을 알기 위해서 "여씨를 계속 따를 자는 오른쪽 어깨갑옷을 벗고 유씨를 따를 자는 왼쪽 어깨갑옷을 벗어라." 라고 명령하자 군사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왼쪽 어깨갑옷을 벗었다고 한다. 여후의 악명이 얼마나 높았는지 짐작이 가는 부분…이랄까, 분위기를 봐도 오른쪽 어깨갑옷을 벗을수가 없었겠지만.[15]

그 후 공신들은 유방의 넷째 아들, 혜제의 이복 동생인 대나라 왕 유항을 군주로 추대하였는데, 이 인물이 한문제였다. 본래 후보였던것은 제나라 왕이었지만 제왕의 외척이 지독한 인물이라는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 다음에는 회남왕이 후보였지만 이쪽도 외가가 지독하였다. 반면에 한문제는 외가에 별로 사나운 인물들이 없었다.

그 토사구팽 숙청 속에서도 유방이 손도 안대었던 최후의 공신들은, 결국 유방이 죽은 후까지도 나라를 구했던 것이다.

2.4. 내부 정비 시간[편집]

2.4.1. 문제의 치세[편집]

한문제(漢文帝) 유항(劉恆)
이제 한나라는 긴 휴식의 시기로 들어가게 된다. 춘추전국시대의 통일, 초한 대쟁패를 겪은 중국은 분명 대격변을 지나면서 많은 발전을 이루긴 했으나, 너무나 오랜 시간 이어진 전란으로 매우 피폐해져 있었다. 그래서 문제를 비롯한 그 당시 원로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을 국시로 삼았다. 일단은 휴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따지고보면 여후 시대는 분명 정치적으로는 혼란스러웠으나, 대규모 군사 원정이 있거나 무력 투쟁이 있거나, 큰 토목공사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사마천이 여후에 대해서 비교적 나쁘지 않게 평가한것도 그 때문.[16] 여후 시절부터 시작한 이 '다스리지 않는 정치'는 문제 시기도 그대로 이어졌다.

사실 한나라의 번영은 문제 없이 설명되기 힘들 정도로 문제의 공은 크다. 철저할정도로 검소하고 소비를 극단적으로 줄였으며, 나라의 경제력을 발전시키고 힘을 키웠다. 흉노에는 약간 저자세로 나가면서까지 전쟁을 벌이지 않았고, 아들인 경제와 더불어 이른바 문경지치라 불리우는 정치로 한나라의 힘을 크게 키웠다.

본인 스스로도 대단히 검소하였고, 큰 건물을 지으려다 그리하려면 황금이 많이 쓰여진다는것을 알게 되자 포기하였다. 옷도 장식이 없는 검은색 옷을 주로 입었으며 자신의 부인들에게도 사치를 줄일것을 부탁하였다. 봄이 되면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백성들에게 농업과 누에치기에 힘쓸 것을 부탁하였다. 또한 각 관청에 명해 백성들이 농사지을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이르도록 말하고 가난한 백성들에게는 씨앗과 식량을 대여해주었으며, 조세를 반으로 줄였고 유방이 정한 15분의 1의 세를 30분의 1로 바꾸었다.

통일된 중국의 생산력 등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인데, 그동안은 정상적으로 나라가 조용하게 굴러간적이 없기에 그 힘이 발현인 늦어졌을 뿐이다. 이제 문제 시기를 기점으로 전한은 절정기를 향해 박차를 가했다.

2.4.2. 오초칠국의 난과 중앙 집권의 확립[편집]

2.5. 한무성세 : 무제의 치세[편집]

한무제 참조.

과거에는 한무성세라고 부르며 높이 평가했던 편이지만, 현재는 한무성세의 어둠이 많이 비춰져서 요즘은 '치세'라고만 부르는 편이다. 한무제 초기 3700만 가량이던 인구가 말기에 이으면 3200만대로 추락하게 되었다.[17]

3. 로마와의 비교[편집]

로마와 한나라는 주된 VS 놀이 떡밥 중 하나다.

- 인구 : 로마의 추정 인구수는 관련 학술논문들을 대략 4400만에서 7000만 사이를 오고 간다.[18] 전성기 기준으로는 대략 5500만~6000만 가량으로 추정되고 있다.[19] 다만, 전성기(5~6세기) 비잔티움 제국 인구는 2600만명 가량으로 추정#된다.
한나라의 전성기 인구는 5959만명 혹은 5767만명이며, 행정권에 벗어는 인구까지 합하면 최대 8천만으로 추정되는 연구가 있다. 참고 - 중국 국가통계국의 중국 인구 추이에 대한 연구 그래프 모음 일단 한나라는 로마와 달리 당대에 한서지리지라는 서적이 있어서 이 책에 AD 2년의 한나라의 인구가 일일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얼마나 인구가 행정권에 들어왔는지가 알 수 있다. 한나라는 기록이 2개인 이유는 한서지리지에서 총인구수로 기록된 것은 분명히 5959만명인데 실제로 각 군국별로 나온 인구를 합쳐보면 5767만명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즉, 둘 중 하나는 부실한 기록.[20]
대체적인 연구 결과를 보면 로마 제국의 초기 인구는 한나라의 인구보다 적었으나, 전성기로 갈수록 점점 그 인구가 늘어나 한나라의 인구를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는데 하나는 전한이 멸망하고 왕망신나라를 세운 이후 황하가 범람하여 기근과 전염병이 들끓었고, 이에 각지에서 반란과 내전이 일어나면서 중국의 인구가 크게 줄은 것을 이유로 들 수 있다.[21] 또 하나는 당시 동서양의 지역적 특색의 문제인데, 로마가 점령해나간 지역은 이미 오리엔트라는 발달된 문화권이 존재하고 있거나 최소한 일정 수준 이상의 인구밀도를 가진 지역이었던데 반해, 당시 동아시아의 인구는 대부분이 중원 지역에 밀집해 있었고 한나라가 멸망시킨 가장 큰세력인 흉노의 영토는 그 영토에 비해 인구밀도가 형편없이 적었고 쓸모없는 땅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점령당하지 않고 방치되었던 데다, 그 외의 지역들 역시 당시의 기준으로는 문화적으로 낙후된 지역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 군사 : 로마의 경우에는 아우구스투스 초기 상비군의 수는 일단 36만명이며, 이후 꾸준히 감축했기에 그것을 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의 경우에는 Michael Loewe는 당시 등록된 인구수와 병역제도를 바탕으로 계산한 수치가 있는데, 그에 따르면 전한의 총병력은 한 무제 시절에는 269,347 ~ 1,077,388 명 왜 이렇게 고무줄이야
간혹가다가 한나라의 병력은 허접한 농민 징집병이라고 얘기하며, 한나라군을 무시하는 견해가 있는데, 한나라는 당대 동양 최강이자 최고 수준의 무장을 자랑했다. 다만, 군인의 질적인 부분에서만 보자면, 신체적 조건에서는 동양인의 한계라서, 신체 조건이 중요한 백병전에서는 로마보다 열세한 것은 사실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이라면, 로마나 한이나 초기에는 적은 투자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으로 우수한 질의 군사력을 가진 반면에, 둘다 후기에는 초기에 비하면 매우 떨어지는 질의 군사력을 가졌다는 것과 후기에는 둘다 군에 투자 하는 것에 비해 장병들의 질적 향상은 그리 크게 이루어 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 전술 : 둘다 자신들 환경에 맞춰서 전술이 발전했으며, 둘다 (고대 기준의) 기동전이 발달[22]했으며, 둘다 보급을 중시했다는 점을 보면 어느쪽이 우위냐고 판단하기는 어려운걸로 보인다.

- 경제 : Angus Maddison 와 Goldsmith 의 주장에 따르면 AD14년 단순히 동서 유럽의 총합과 한나라의 총 GDP는 로마가 Angus Maddison에 의하면, 16300(Goldsmith는 14500) 한나라는 27000으로 한나라가 약 11000정도(13000) 더 높다. 로마 제국이 보유했던 아프리카와 아시아 일부까지 합산 하였을시 22000 대 27000 으로 추산했다. 한이 약 5000정도 더 국가 GDP가 높은걸로 추산된다.[23][24]
그러나, 이런 식의 비교는 무의미한 것이 1000년, 2000년 전의 경제규모를 알아낸다는 것 자체가 극히 어려운 일이며,라기보단 불가능 학자들마다 경제규모를 보는 기준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종류의 글은 본인의 입장에 유리한 부분만 짜집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한다. 한 가지를 예로 들자면 로마 제국을 고평가하는 부류의 학자들인 Scheidel/Friesend의 경우에는 로마가 월등히 경제력이 높은걸로 나오는데, 이런 다른 연구는 쏙 빼고 Angus Maddison의 한나라 자료만 가져와서 한나라가 높다며 비교해 놓은 글이 있다. Angus Maddison의 경우에는 한나라를 고평가 하지만 기준이 완전히 다른 Scheidel/Friesend의 자료의 경우에는 로마가 고평가 되며, 결론적으로 양측 학자 모두 편파적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학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감안해야할 점은 로마가 한나라보다 화폐경제가 더 발달했으며, 지역간 교류도 로마가 한보다 더 활발하다는 사실이다. 한은 지역간 교역이 로마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을 뿐만 아니라, 최대 행정통치 영토도 로마에 비해서 작았다. 참고자료 - 동서양 제국의 차이 애시당초, 로마에서는 금과 은을 동전 제조뿐만이 아니라, 사치품으로도 사용된 반면, 한에서는 사치품 용도로만 사용됐었다.
단, 오해하지 말아야할 사실은 한이 화폐경제나 지역간 경제가 로마보다 낮다고 해서 완전히 없는 수준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나라는 세금을 화폐로 지급하기도 했으며#, 한나라의 화폐인 오수전은 제주도나 한반도 서남부쪽에서도 곧잘 발굴된다.# 이쯤에서 보면 알겠지만, 한나라도 고대 국가임을 감안하면, 화폐 경제가 꽤나 발달한 수준이었다. 아니, 애초에 한나라는 동양에서 화폐 경제가 가장 넘사벽으로 발달한 곳이다. 단지, 로마가 너무 뛰어나게 화폐가 발달 한 것일뿐. 애당초 로마가 있던 지중해 문명권 자체가 타 문명권에 비해 유달리 화폐가 발달했고, 외부 문명권과의 교류에 비교적 경계적인 태도를 가지던 동양권과는 달리, 서양권은 외부 문명권과의 교류에는 비교적 개방적이었다.

결과적으로 누가 더 강하다고 할 것 없이 각각 동서양을 대표하는 초강국이었다는 것이다.

4. 역대 황제[편집]

  • 사람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한나라 황제의 호칭은 시호에서 '효(孝)'와 '황(皇)'을 빼면 된다. 예컨대 효무황제 = 무제, 효경황제 = 경제
대수
묘호
시호
이름
출생
사망
연호
재위기간
능호
1대
태조
(太祖)
유방
(劉邦)
BC 247.5.29
BC 195.6.1
-
BC 202 ~ BC 195
장릉
(長陵)
2대
-
유영
(劉盈)
BC 211
BC 188.9.26
-
BC 195 ~ BC 188
안릉
(安陵)
3대
-
유공
(劉恭)
?
BC 184
-
BC 188 ~ BC 184
-
4대
-
유홍
(劉弘)
?
BC 180
-
BC 184 ~ BC 180
-
5대
태종
(太宗)
유항
(劉恒)
BC 203
BC 157.7.6
전원(前元, BC 179 ~ BC 164)
후원(後元, BC 163 ~ BC 157)
BC 180 ~ BC 157
패릉
(覇陵)
6대
-
유계
(劉啓)
BC 188
BC 141.3.9
전원(前元, BC 179 ~ BC 164)
중원(中元, BC 149 ~ BC 144)
후원(後元, BC 143 ~ BC 141)
BC 157 ~ BC 141
양릉
(陽陵)
7대
세종
(世宗)
유철
(劉徹)
BC 157.7.14
BC 87.3.29
건원((建元, BC 140 ~ BC 135)
원광(元光, BC 134 ~ BC 129)
원삭(元朔, BC 128 ~ BC 123)
원수(元狩, BC 122 ~ BC 117)
원정(元鼎, BC 116 ~ BC 111)
원봉(元封, BC 110 ~ 105)
태초(太初, BC104 ~ BC 101)
천한(天漢, BC 100 ~ BC 97)
태시(太始, BC 96 ~ BC 93)
정화(征和, BC 92 ~ BC 89)
후원(後元, BC 88 ~ BC 87)
BC 141 ~ BC 87
무릉
(茂陵)
8대
-
유불릉
(劉弗陵)
BC 94
BC 74.6.5
시원(始元, BC 86 ~ BC 80)
원봉(元鳳, BC 80 ~ BC 75)
원평(元平, BC 74)
BC 87 ~ BC 74
평릉
(平陵)
9대
-
유하
(劉賀)
BC 92
BC 59
-
BC 74
-
10대
중종
(中宗)
유순
(劉詢)
BC 91
BC 48.1.10
본시(本始, BC 73 ~ BC 70)
지절(地節, BC 69 ~ BC 66)
원강(元康, BC 65 ~ BC 61)
신작(神爵, BC 60 ~ BC 58)
오봉(五鳳, BC 57 ~ BC 54)
감로(甘露, BC 53 ~ BC 50)
황룡(黃龍, BC 49)
BC 74 ~ BC 48
두릉
(杜陵)
11대
고종
(高宗)
유석
(劉奭)
BC 76
BC 33.5.9
초원(初元, BC 48 ~ BC 44)
영광(永光, BC 43 ~ BC 39)
건소(建昭, BC 38 ~ BC 34)
경녕(竟寧, BC 33)
BC 48 ~ BC 33
위릉
(渭陵)
12대
통종
(統宗)
유오
(劉驁)
BC 51
BC 7
건시(建始, BC 32 ~ BC 29)
하평(河平, BC 28 ~ BC 25)
양삭(陽朔, BC 24 ~ BC 21)
홍가(鴻嘉, BC 20 ~ BC 17)
영시(永始, BC 16 ~ BC 13)
원연(元延, BC 12 ~ BC 9)
수화(綬和, BC 8 ~ BC 7)
BC 33 ~ BC 7
연릉
(延陵)
13대
-
유흔
(劉欣)
BC 27
BC 1
건평(建平, BC 6 ~ BC 3)
원수(元壽, BC 2 ~ BC 1)
BC 7 ~ BC 1
의릉
(義陵)
14대
원종
(元宗)
유간
(劉衎)
BC 9
6.1.4
원시(元始, 1 ~ 5)
BC 1 ~ AD 6
강릉
(康陵)
15대
-
유영
(孺婴)
5
24
거섭(居攝, 6 ~ 8)
초시(初始, 8)
6 ~ 8
-

5. 계보[편집]

한나라 문서의 계보를 참조.

6. 추존 황제[편집]

  • '황제(皇帝)'가 아니라 '황(皇)'으로 시호가 끝난다.
시호
이름
생몰기간
능호
비고
태상황(太上皇)
? ~ BC 197
만년릉(萬年陵)
고조 추숭, 고조의 부친
효도황(孝悼皇帝)
유진(劉進)
BC 113~BC 91
-
선제 추숭, 선제의 부친
효공황(孝恭皇帝)
유강(劉康)
BC 1C?~BC 23
-
애제 추숭, 애제의 부친

[1] 지도는 BC 89년 경의 상황.[2] 한무제 때 세계 최초로 유교를 관학으로 지정하였다.[3] 혹은 57,671,400명[4] 당나라의 변새시(邊塞詩)는 주로 한나라를 모델로 자주 삼았다.[5] 최초의 통일은 중국 진나라 때이긴 하지만, 중국을 하나로 묶어내는 데 처참하게 실패하여 3대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도량형, 문자, 언어 등의 통일시도가 진나라에서 시작되었고 한나라도 이 사업을 상당히 계승하였단 점에서 진나라의 업적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도 없다.[6] 오늘날 중국인 상당수는 자신을 한(漢)족이라고 부른다.[7] 다만 전한은 도가적 사상과 도교가 강세여서, 한무제가 유교를 국교화하면서도 할머니인 효문황후 두씨의 눈치를 보느라 고생을 했고, 국학이 된 다음에도 도가적 사상과 도교는 여전히 강력했다. 후한은 다르다. 광무제 유수는 태학(太學)에서 공부했던 사람으로, 유교의 세는 후한때 훨씬 강해진다. 그런데 여담으로 광무제는 참위와 도참에 꽤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8] 역이기는 이때 봉건제를 주장하다가, 장량에게 논파당하고 유방에게 욕을 얻어 먹는다.[9] 2000년도 더 된 유물이 이렇게 발굴된 것도 기적이라 할 수 있다. 무덤이 완전 밀봉된 구조에다가 세월이 흐른 뒤에 잊혀져 70년대에야 방공호를 짓다 발견된 것이기에 보존상태가 좋을 수 밖에 없었다.[10] 설사 사람 자체는 더 늘어났다고 해도, 집계할 능력이 더 떨어졌을 수도 있다.[11] 왕망의 신급의 정보조작 능력이 큰 힘을 발휘했다. 왕망은 자신을 꾸미는데 엄청난 재주를 지녔는데, 후대에는 별 생각없이 시행되었던 선양도 왕망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졌다.[12] 다만 인구 통계의 경우 호적에 모든 인구가 잡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평시에도 유교적 정책에 의해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자 호구조사를 엄격히 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고, 난세가 되면 유랑민이나 대호족의 예속민이 누락되기 일쑤였다. 난세에는 국가의 행정체계와 통제력의 붕괴로 인해 제대로된 호구 조사와 이에 따른 합당한 파악이 이루어 지지 않았다.[13] 다만 직할령 15군은 어떤 제후국보다도 많은 것이라서, 다른 제후국의 반란을 1:1로 찍어누를 수 있는 힘은 갖추고 있었다.[14]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혜제는 이복동생인 여의를 살리기 위해 그가 조나라에서 소환에 응할 때도 성문 밖으로 직접 마중을 나와서 데리고 오고 항상 곁에 있으며 숙식을 함께 했다. 그러다 혜제가 어느날 아침 사냥을 가게 되자 '잠깐 동안은 괜찮겠지' 하고 나간 동안 여후는 여의에게 독주를 마시게 해서 죽였다.[15] 좌단(左袒)이라는 고사의 유래가 되었다.[16] 번쾌가 자기가 흉노를 때려잡을 수 있다고 대군을 이끌고 원정을 하려고 하다가 계포에게 욕을 얻어먹은 일은 있다.[17] 물론 500만이 죽은거는 당연히 아니고, 500만이 국가 행정력에서 이탈한 것이다.[18]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 인구가 1억 2천만은 될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기번의 과장 내지는 망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19] 이 수치는 로마에 있는 속주민, 노예 등을 모두 포함한 수치.[20] 애시당초 고대 국가가 정확한 호구 조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21] 당장 광무제가 천하를 재통일하고 안정시킨 당시 행정권에 들어온 인구는 약 2800만명으로 추산된다.[22] 둘다 현재까지 확실시 되는 자료들을 기준으로 했을때, 중국쪽은 춘추시대 말기, 즉 손자병법이 등장한 시기, 로마는 제1차 포에니 전쟁을 기점으로 기동전이라는 개념이 출현한 걸로 보인다.[23] Paul A. Bairoch, Economics and World History,Kenneth Pomeranz The Great Divergence,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regions_by_past_GDP_(PPP) = 1세기 항목[24] https://en.wikipedia.org/w/index.php?title=List_of_regions_by_past_GDP_(PPP)&oldid=272230369 [25] 사기한서에는 태공(太公)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건 이름이 아니라 존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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