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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형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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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6대 외무부 장관
정일형
鄭一亨 | Jeong Il-hyeong
출생
평안남도 용강군
(現 평안남도 룡강군)
사망
1982년 4월 25일 (향년 78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자택
본관
금연(錦淵)
재임기간
제6대 외무부 장관
1960년 8월 23일 ~ 1961년 5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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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정기찬, 어머니 하은총
배우자
이태영
자녀
아들 정대철, 딸 정미숙
친인척
손자 정호준
학력
광성고등보통학교 (졸업)
연희전문학교 (졸업)
뉴욕 대학교 (종교교육학 / 학사)
의원 선수
8
의원 대수
2, 3, 4, 5, 6, 7, 8, 9
경력
미군정청 인사행정처장
미군정청 물자행정처장
미군정청 조선인 위원회 위원장
제4대 미군정 충남도지사
제2~5대 국회의원(중구 을)
제6~8대 국회의원(서울 중구)
제6대 외무부 장관
제9대 국회의원(종로구·중구)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2. 생애 3. 정치활동
3.1. 해방이전(독립운동)3.2. 해방이후
4. 선거 이력5.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관료이자 정치인.

2. 생애 [편집]

1904년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태어났다. 서울광성고등학교,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함.

졸업 후에는 감리교 총리원 교육국에서 근무했으며 2년 뒤인 1929년 미국으로 건너가 1935년 미국 뉴저지주 드루대학교(Drew University) 대학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뒤 1936년 미국 드루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1936년 10살 연하의 이태영과 결혼하였고 1937년부터 연희전문학교, 숭실전문학교 등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다

3. 정치활동 [편집]

3.1. 해방이전(독립운동)[편집]

1919년 2월 광성학교(光成學校) 2학년 재학시 3·1독립운동계획이 알려지자, 동교 기숙사 지하실에서 김재호(金載浩) 등 10여명의 상급생과 함께 대소(大小) 태극기 5,000여 매를 제작하여 민족대표 33인 중 한사람인 신홍식(申洪植) 목사의 지도를 받으며 시위군중에게 태극기를 배부하여 주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일제 평양(平壤)경찰서에 피체되었으나 미성년자(당시 16세)로 7일 후에 출감하였다.

1923년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2학년때 미국인 핫취 교수의 “한국의 여건상 기술·자본·원료 및 시장확보 등이 일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므로 한국의 독립은 부당하다”는 친일발언에 대하여 이창희(李昌熙) 등 5∼6명의 학생들이 합세하여 구타하므로써 퇴학을 당할 뻔하였으나 조병옥(趙炳玉) 교수의 변호 덕에 1년간 정학(停學)을 당했다.

1929년 도미(渡美)한 후 신학(神學)을 전공하면서 재미유학생회(在美留學生會) 조직에 참여하여 외교부장으로 피선되어 독립정신 고취와 임시정부(臨時政府) 지원을 위한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37년 10월 평양지방 감리교(監理敎) 기독청년연합회(基督靑年聯合會) 회장으로 피선되어 활동하다가 안창호(安昌浩)의 특별강연회를 개최한 것을 빌미로 일경에 피체되어 소위 유언비어 유포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3개월간 구류되었다가 출감하였다. 그러나 다시 흥사단(興士團) 사건으로 피체되어 투옥되었으며 연이어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운동으로 피체되어 기소유예를 받고 출옥하였다.

1940년에는 일제의 창씨개명(創氏改名) 강제에 저항하다가 수차례에 걸쳐 구금당하였다.

1942년 1월 서울에서 이동욱(李東旭)·안흥국(安興國)·한익수(韓益洙)와 함께 태평양전쟁에서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는 등 국제정세를 논의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1943년 평양지방법원에서 소위 육해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항고하여 1943년 11월 29일 평양복심법원을 거쳐 1944년 3월 30일 고등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미결기간중 2년 3개월간 수감되었다가 출옥하였다.

3.2. 해방이후[편집]

8.15 광복 후인 1945년 9월 송진우, 김성수, 장덕수, 조병옥, 윤보선 등과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미군정기 미군정청 인사행정처장과 물자행정처장을 역임하였다. 이 무렵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과 중도파의 좌우합작론이 나올 때 이승만을 지지하였다. 역시 1947년 12월부터 나온 남북협상론에 대해서도 이승만의 지지를 선언하였다. 한편 이 무렵 강남대학교의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이승만 집권 후인 1949년 11월 한국민주당이 대한국민당 탈당파와 연합, 민주국민당이 창당되자 그도 참여하였다. 1950년 5월 서울 중구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제2대 ~ 제9대 국회까지 8선의 의정생활을 하였다. 다만 그 중 2번은 강제로 국회가 해산되었다. 그리고 1번은 중간에 의원직 상실

이승만의 독재가 노골화될 무렵인 1954년 호헌동지회가 결성되었을 때는 관망하다가 1955년부터 그는 조병옥, 곽상훈, 장면 등과 민주당 창당 준비 회의를 하였다. 1955년 9월 민주당이 창당되자 참여하여 활동했다.

1960년 4.19 혁명장면 내각에서는 외무부(현 외교부)장관에 기용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계속 민주당, 민중당, 신한당, 신민당 등의 야당에 소속되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비준에 반대하여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1969년 3선 개헌 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76년 3월 유신정치에 반대하는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고 국회의원직을 상실하고, 공민권까지 박탈당하였다. 1977년 열린 중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는 아들 정대철이 대신 입후보하여 국회의원으로 당선된다.

1976년 9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당총재 경선에 출마했지만, 1차투표를 마친 뒤에 이철승 지지를 선언하고 사퇴하였다. 정일형의 지지로 김영삼 대신에 이철승이 신민당 총재로 선출되었다.

1978년의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자격정지로 입후보하지 못하고, 아들 정대철을 지원하였다. 이후 계속 재야에 머물렀다.

1979년 10.26 사건 이후 복권조치 되었다.

1980년 5월 5.18 민주화운동과 신군부가 조작한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재판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김대중의 구명을 호소하기도 했다.

1982년 4월 25일에 고혈압으로 사망했다. 이때가 향년 78세.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4월 27일에는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훈장에 추서되었다.

1990년 일제강점기 동안의 독립 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비서들 중 조홍규는 3선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4.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50
서울 중 을
무소속
11,982 (51.53%)
당선 (1위)
초선
1954
4,090 (20.55%)
재선
1958
18,344 (65.92%)
3선
1960
17,222 (58.09%)
4선 [2]
1963
서울
19,278 (33.37%)
5선 [3]
1967
27,361 (50.8%)
6선
1971
28,685 (58.65%)
7선[4]
1973
33,183 (24.94%)
당선 (2위)
8선[5]

5. 여담[편집]

해방직후 1946년, 32살의 부인 이태영은 서울대 법대에 진학하는데, 본인 능력이 물론 중요하지만 당시 사회분위기 상 남편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었던 것이 굉장히 파격적이었으며, 이태영은 1952년 국내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된다.

김대중의 최대 후원자이자 정치적 선배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이다. 김대중에게 이희호 여사를 소개시켜준 것도 이태영 변호사였다.

[1] 민의원[2] 5.16 군사정변으로 국회 해산[3] 1965년 사퇴[4] 유신 선포로 인한 국회 해산 [5] 1977년 의원직 상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