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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15대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 주니어
James Buchanan Jr.
파일:external/thebsreport.files.wordpress.com/james_buchanan.jpg
출생
사망
1868년 6월 1일 (향년 77세)
재임기간
제17대 국무장관
제15대 대통령
서명
[ 펼치기 · 접기 ]
부모
아버지 제임스 뷰캐넌 1세
배우자
없음(독신)
학력
디킨슨 대학교
종교
신장
183cm
정당

1. 개요2. 생애3. 평가4. 사생활5. 여담

1. 개요[편집]

제임스 뷰캐넌 : 나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오. 당신은 행복합니까?
에이브러햄 링컨 : 임기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가는 상황이라면 더 행복하겠죠.
제임스 뷰캐넌 : 만약 백악관으로 들어가는 것이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나만큼이나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당신은 이 나라에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오.

후임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의 취임식장으로 가던 중 링컨과 만나서 나눈 대화.[1]

미국의 제15대 대통령.

2. 생애[편집]

펜실베이니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넉넉한 가정의 지원을 바탕으로 1809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뷰캐넌은 미영전쟁이 발발하자 자진하여 군에 입대한다. 군 복무를 마치면서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유일하게 병사 신분으로 군 복무를 마친 대통령이라는 이력을 얻는다. 전쟁이 끝난 후 민주당에 입당한 뷰캐넌은 펜실베이니아의 주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한다. 그 후로도 러시아 대사, 펜실베이니아 하원의장을 거치며 승승장구한 뷰캐넌은 1844년 대선에 도전하지만 앤드루 잭슨의 지지를 등에 업은 제임스 포크에게 패배한다. 대신 포크에 의해 국무장관이 되어 오리건 협약으로 미국 영토를 거의 완성시킨다.[2] 국무장관 시절에는 매우 유능한 인물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기대를 받았고 뷰캐넌을 지명한 포크 역시 뷰캐넌의 능력을 후하게 칭찬하였다.[3]

1848년1852년에도 대선에 도전하나 모두 패배한 뷰캐넌은 프랭클린 피어스에 의해 영국 대사로 임명되어 활동한다. 1856년에 대통령 후보가 된 뷰캐넌의 경쟁자는 피어스와 스티븐 A. 더글러스였는데 노예제에 유화적이면서도 북부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남북의 화해를 도모할 수 있다는 강점을 중진으로부터 인정받아 뷰캐넌은 후보가 된다. 실제로 당시 민주당 경선 후보 중에는 뷰캐넌이 가장 노예제에 유화적이었다. 다른 후보인 스티븐 A. 더글러스는 노예제를 반대하였으며, 루이스 카스는 노예제가 주민들의 의사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새로 생겨나는 주들 대부분의 주민들이 노예제에 반대했으므로 노예제를 반대하는 입장이나 마찬가지였다. 피어스도 노예제에 유화적인 인물이었지만 임기 도중의 실책으로 남부와 북부 모두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당내 경쟁이 치열해서 17번의 경선을 치르고 뷰캐넌이 후보로 결정된다. 상대 정당인 휘그당이 밀러드 필모어 등의 여러 후보들로 분열된 상태였고 미국 국민들이 북부의 강경한 노예제 반대정책을 우려한 점이 맞물려 뷰캐넌은 아주 쉽게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뷰캐넌 역시 전임자인 피어스와 마찬가지로 북부 출신임에도 남부의 노예제를 용인하는 도우페이스(doughface) 성향이었다. 실제로 뷰캐넌은 임기 도중 남부를 달래려고 노력하는데 연방의 분열을 막으려고 노력한 것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남부 편만 드는 대통령이라고 비난한 사람도 있었다. 뷰캐넌은 전쟁을 피할 수 있고 분열을 잦아들게 할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도 연방이 탈퇴할 권리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 한 막을 수 없다고 믿었다. 남부의 주들이 연방 탈퇴를 선언한 최후의 순간까지 전쟁을 피하기 위해 사우스 캐롤라이나 군대가 섬터 요새를 습격하지 못하도록 설득하고 퇴임 후 1달까지 전쟁을 미루는데 성공한다.[4]

이러한 뷰캐넌의 성향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 드레드 스콧 사건. 이 사건을 둘러싸고 남부와 북부의 치열한 대립이 벌어지는데 뷰캐넌은 북부 편을 들던 연방대법원 판사들을 설득하여 결국 남부의 편을 들도록 만들어 북부의 극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만다. 거기다가 뷰캐넌은 당시 유력한 대권 후보로 떠오르던 스티븐 A. 더글러스를 매우 싫어해서 따로 후보를 지지하고 이는 민주당이 분열되어 선거에서 패배하는 원인이 된다. 뷰캐넌이 민주당을 탈당하고 자신의 부통령이기도 했던 존 C. 브레킨리지를 남부 민주당(South Democratic) 후보로 내세우면서 그 결과 표가 분산된 민주당은 공화당에이브러햄 링컨에게 패배한다.[5] 퇴임 후 남북전쟁이 발발하고 후임인 링컨이 노예 해방을 선언하면서 지지도가 대폭 상승하였기 때문에 민주당은 오랜 시간을 낮은 지지도와 함께한다.[6]

뷰캐넌은 종전 이후 연방이 분열되기 직전의 자신의 상황에 대해 해명하는 자서전을 쓴다. 하지만 당시는 물론 현재도 뷰캐넌의 남부 달래기 정책은 조명받지 못하고 오히려 더 비난받는다. 게다가 1857년에 발생한 경제 공황으로 인해 뷰캐넌이 퇴임할 당시 연방 정부의 빚이 1,700만달러가 더 늘어났다는 점 역시 뷰캐넌이 비판받는 이유이다.

3. 평가[편집]

미국 대통령 인기 순위에서는 항상 하위권을 고수하고 있다. 후임인 에이브러햄 링컨의 업적이 막강하기도 하고 위기의 순간에 연방을 분열시킨 책임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하위는 워런 G. 하딩이나 앤드루 존슨이 주로 담당하는 편인데 가끔 이 둘을 제치고 최하위를 기록하기도 한다. 링컨이라는 빛이 있는 이상 전쟁을 유발하고 연방을 수호하지 못한 뷰캐넌은 그림자가 되는 것이다. 유능한 장관이자 정치인인 뷰캐넌의 실패는 대공황을 마주한 허버트 후버와도 겹친다. 뷰캐넌의 임기에 전쟁이 발발하였다면 차라리 평가가 더 나을 것이란 측면도 있는데 뷰캐넌도 남부의 무력 사용은 절대 용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밀러드 필모어와 달리 임기 중에 남북 대립 문제로 소소한 업적도 세우지 못한 채 임기를 마쳤다.

대통령으로는 높이 평가받지 못하지만 인간으로서의 뷰캐넌은 선한 사람이어서 본인이 노예들을 구입해서 자유주인 펜실베이니아에 해방시킨 일화가 있다. 정치적으로는 노예제 허용 여부는 주의 의사에게 맡겨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노예제에 반대하는 입장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뷰캐넌의 임기에는 부통령인 존 C. 브레킨리지가 실세였고 브레킨리지는 전쟁이 발발하자 남부로 넘어가서 전쟁장관을 역임할 정도로 노예제 폐지를 극렬하게 반대하였다. 뷰캐넌은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브레킨리지를 섭외한 것에 가까워서 임기 도중 항상 브레킨리지에게 휘둘리게 된다.

4. 사생활[편집]

평생 결혼하지 않은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다. 하지만 평생 친밀한 사람은 있었는데 바로 전임자 피어스의 부통령인 윌리엄 킹.[7] 킹도 평생 미혼이었다는 사실과 겹쳐서 역사학자들은 뷰캐넌을 게이라고 추측하기도 하였다. 사실은 앞으로도 밝혀질 가능성이 적지만 뷰캐넌과 킹은 15년을 같은 집에서 살았고, 그 시기에 킹은 '미시스 제임스 뷰캐넌'이나 '팬시 아줌마 (Aunt Fancy)'라는 별명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당시에는 지금보다도 동성애가 혐오받던 시절이라 게이라는 분명한 증거를 남기는 경우는 많지 않으므로 사실 확인이 어렵다.

다른 설로는 첫사랑을 잊지 못해서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앤 콜먼이라는 여성과 약혼하게 된 뷰캐넌은 앤의 집안에서 반대하는 바람에 파혼에 이른다. 앤의 아버지는 철강공장을 소유한 부유한 인물이었는데 앤은 약한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었다. 정신질환을 가진 딸을 열렬히 사랑하는 뷰캐넌을 본 앤의 아버지는 뷰캐넌이 자신의 재산을 목적으로 결혼하려는 것이라고 의심하고 둘의 결혼을 완강히 반대한다. 계속된 갈등 끝에 앤의 아버지가 강제로 필라델피아로 가족들을 데리고 떠나버리면서 둘의 관계는 파경을 맞는다. 파혼으로 상심한 앤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훗날 앤의 부고를 듣고 충격받은 뷰캐넌은 앤의 죽음을 애도하며 평생 결혼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두 이야기 모두 검증되지 않은 설에 불과하기 때문에 뷰캐넌이 결혼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난무한다. 아내가 없던 뷰캐넌의 임기에는 조카가 영부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뷰캐넌 이외의 미국 대통령 중 임기 동안 영부인이 없던 사례는 토머스 제퍼슨, 앤드루 잭슨, 마틴 밴 뷰런, 체스터 A. 아서가 있지만, 이들은 취임 전에 결혼한 전적이 있지만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전에 아내가 먼저 사망한 사례이다.

5. 여담[편집]

  • 뷰캐넌은 항상 좌측으로 머리를 기울인 상태로 사진을 찍었다. 일부러 머리를 기울인 것은 아니고 선천적인 부동시가 원인이다. 뷰캐넌은 왼쪽 눈이 근시이고 오른쪽 눈이 원시라서 물체를 바르게 보려면 머리를 왼쪽으로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시선을 집중할 때는 눈을 심하게 깜빡거리는 증세를 보였다. 뷰캐넌이 안경을 착용한 이야기나 사진들은 현재 전해지지 않아서 사용 여부는 불확실하다.
  • 1999년 미국 공영방송인 C-SPAN이 조사한 역대 대통령 인기도 최하위를 기록하였다. 워런 G. 하딩이 왜 들어가지 않았냐는 의구심을 품을 수 있는데 해당 조사에서는 조지 워싱턴부터 그로버 클리블랜드까지만 고려하였다. 클리블랜드의 후임까지 따지면 하딩은 반드시 들어갈 것이다.
  • 18세기에 태어난 마지막 미국 대통령이다.
  • 서재필의 아내인 뮤리엘 암스트롱은 제임스 뷰캐넌의 사촌 형제이자 전쟁 당시 철도우편국을 창설함 미국의 정치인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George Buchanan Armstrong)의 딸이다.
  • 생가가 펜실베이니아의 소도시인 랭카스터에 소재한다. 뷰캐넌의 생가는 이후 기념관으로 꾸며졌지만 지지도가 바닥인 대통령이라 관광객들도 잘 찾지 않는다.

[1] 그러나 링컨은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2] 정확히는 워싱턴 주, 오리건, 아이다호 주가 이 무렵에 미국 영토가 된다. 이전에는 영국과 공동으로 점유한 지역이다.[3] 하지만 동시에 포크는 뷰캐넌의 지나칠만큼 신중하고 유우부단한 성격을 우려하였다. 포크가 우려한 뷰캐넌의 성격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뷰캐넌의 문제점으로 극명하게 드러난다.[4] 뷰캐넌은 어디까지나 전쟁을 미룬 것일 뿐이다. 당시 분위기는 전쟁이 일어날 거라고 확신할 수 있는 분위기였고 뷰캐넌은 요새의 미 연방군 증원 요청도 거부하였다.[5] 브레킨리지는 역대 최연소인 만 36세에 부통령에 취임한 인물이다. 그래서 뷰캐넌과의 나이차가 29년 9개월로 미국 역사상 최대의 러닝메이트 나이차이다. 그리고 2번째로 단명한 미국 부통령이다. 수정헌법으로 러닝메이트제가 도입된 이후의 미국의 선거법 상 대통령 후보는 만 35세 이상, 부통령 후보는 만 32세 이상이면 출마가 가능하다. 뷰캐넌은 이미 고령이었기 때문에 민주당의 차세대 주자를 민다는 명목으로 30살이나 어린 브레킨리지를 부통령으로 지명한 것. 브레킨리지 이후로는 30대 부통령은 나오지 않는다.[6] 1865년 남북 전쟁이 끝난 후 1933년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당선 이전까지 민주당 출신 대통령은 우드로 윌슨그로버 클리블랜드 단 둘뿐이다...[7] 60대 후반의 나이에 취임하여 1달 보름 후 사망한 부통령이다. 뷰캐넌보다 5살 연상이었고 임기가 짧지만 뷰캐넌처럼 미국 역사상 유일한 미혼 부통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