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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가필드에서 넘어옴

미합중국 제20대 대통령
제임스 에이브럼 가필드
James Abram Garfield
파일:James_Abram_Garfield,_photo_portrait_seated.jpg
출생
사망
미국 뉴저지 주 롱브랜치 엘버론
재임기간
제20대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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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에이브럼 가필드(1799 ~ 1833)
일라이자 가필드(1801 ~ 1888)
배우자
루크리샤 가필드(1832 ~ 1918)
자녀
엘리자(1860 ~ 1863)
헨리 어거스트(1863 ~ 1942)
제임스 루돌프(1865 ~ 1950)
메리(1867 ~ 1947)
얼빈(1870 ~ 1951)
에이브럼(1872 ~ 1958)
에드워드(1874 ~ 1876)
학력
하이럼 대학교
윌리엄스 대학교
종교
신체
183cm
정당
최종 계급
파일:garfield-1.jpg
백악관 공식 초상화

1. 개요2. 일생3. 짧은 재임 시절과 암살4. 여러가지 일화
4.1. 가필드 증명

1. 개요[편집]

미국의 제20대 대통령.

2. 일생[편집]

오하이오 주 카이어호가군 모어랜드 힐스에서 출생하였다. 2세 때 부친인 에이브럼과 사별하고 어머니 일라이자 혼자 일과 가정을 담당할 수는 없어 어린 그도 노동에 나서야 했다. 10대에 가출하여 6주 정도 운하를 오르내리는 선원 일을 했는데, 물에 열 네번이나 빠진 끝에 열병에 걸려 버렸다. 병석에 있던 가필드에게 어머니가 17달러를 줘서 그 돈으로 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돈으로 학업에 열중하다가 그 17달러가 떨어지자 직접 목수 일을 하고 가정교사 역을 하면서 학비를 벌었다. 또한 성직자 경력도 있는데, '그리스도의 교회 제자파'의 설교자로 뛰기도 했다. 가필드의 연설 능력은 성직자 생활에서 크게 길러졌다고 한다. 그래서 훗날 대통령이 되고 나서 붙은 별명이 '설교자(Preacher) 대통령'.

어쨌든 고생하면서 공부한 끝에 윌리엄스 대학교를 졸업하고 그 대학의 학장을 역임했으며, 변호사, 오하이오주 상원의원을 역임했으며, 남북전쟁 당시 북군 장교로 참전하였다. 그러니까, 가난한 집 출신으로 고생은 많이 했지만 링컨과 달리 대학을 졸업했다는 것.

이후 18년간 오하이오의 연방 하원의원을 역임했고 1880년 연방 상원의원이 되는 등 출세가도를 달리다가 그 해 36개 주 예비선거에서 승리하여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1880년의 선거는 민주당과의 쟁점이 관세 외에는 큰 차이가 없었고, 인신공격도 그다지 없기는 했지만 선거 자체는 치열했는데, 가필드가 자금이 부족했다. 그래서 가필드는 공화당 내 최대파벌 영수였던 로스코 콩글링과 교섭하여 콩클링 파벌의 사람들에게 한 자리씩 준다는 조건으로 자금 지원을 받았다. 그 대신 콩클링은 자기 계파 사람인 체스터 A. 아서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선거 결과 역시 초박빙이었다. 4,446,158 대 4,444,260 민주당 후보 윈필드 스콧 핸콕과와 표차는 딱 1,898표(0.02%). 오늘날에 이 표차 나오면 바로 재검표 요구에 부정선거 논란까지 벌어질 표차다. 더구나 당시 유권자는 921만명에 불과했다.[1]

결국 가필드는 콩클링의 지원을 받은 뉴욕 주에서 2만 3000여표차로 앞선 덕분에 선거인단 35명을 차지해서 당선될 수 있었다. 선거인단 수로는 214대 155. 뉴욕 주 35명이 민주당 쪽으로 갔으면 189대 190으로 민주당 후보가 당선될 표였다.[2] 어쨌거나 당선되는 데는 성공하고 이후 1881년 3월 대통령에 취임했다. 미국 역사상 현직 하원의원이 대통령에 당선된 경우는 가필드가 유일하다.

3. 짧은 재임 시절과 암살[편집]

대통령이 된 가필드는 부패한 공직자를 일소하기 위해 부정행위를 조사하도록 명했다.

당시에는 대통령이나 선거에서 승리를 쟁취한 정당이 승리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행정부 관직을 주는 엽관제가 성행했다. 가필드는 콩클링 파벌의 협력을 받았고, 그 대가로 엽관제에 따라 콩클링 파벌에게 관직이 배분되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에도 부패로 이름을 날렸던 콩클링 파벌에게 관직을 줘버리면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음은 물론 부패 척결도 불가능함을 깨달았고, 결국 가필드는 콩클링 파벌에 관직 준다는 약속을 깼다. 물론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콩클링 파벌은 가필드에게 크게 반발했다.

파일:6.제임스_가필드_대통령_저격_사건_묘사_그림.jpg

제임스 A. 가필드 대통령 저격 사건 묘사 그림

그러던 중 7월 2일 워싱턴 역 앞에서 기차를 기다리다가 찰스 J. 기토의 총격을 받았다. 기토는 콩클링 파벌 사람으로써 관직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은 데에 불만을 품고 암살을 생각하고 있었다. 기토는 가필드를 지지하는 연설을 작성하고 연설문을 공화당 전당대회에 배부하는 등 가필드를 지지해왔다. 그는 자신이 가필드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고 망상생각하면서, 가필드가 당선되자 파리 주재 미국 공사직을 요구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대선 승리에 대한 기토의 기여도는 미미했고, 가필드와 그의 내각은 기토를 무시했다. 정신병 증세가 있던 기토는 백악관에 계속 드나들거나 대통령을 스토킹하며 끈질기게 공직을 요구하고, 결국 백악관 출입 금지를 당했다. 끝내 기토는 자신이 공직에 오르려면 콩클링 파벌 인물인 부통령 아서가 대통령이 되는 수밖에 없다 생각하고 암살을 결심하게 된다.

그는 암살 며칠 전 일기에 이렇게 썼다.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은 슬프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일은 공화당을 단결시킬 것이고, 나아가 미합중국을 구원할 것이다. 난 대통령에 대한 악의는 없지만 죽음은 정치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가필드를 쏘고 나서 기토는 "대통령은 죽었다! 이제 부통령 아서가 대통령이 될 것이다!"라고 크게 외쳤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아서는 자신을 끌어들인데 대해 크게 분노했지만 특이하게도 이 이야기에 대해 직접 변명하지는 않아서 가필드의 암살 배후에 아서가 있다는 소문도 제법 나돌았다.

어쨌든 가필드는 등에 두 발의 총알을 맞고 쓰러졌는데, 다행히 그 자리에서 바로 죽지는 않았고 2개월 조금 넘게 병석에서 버텼지만, 의사들은 가필드 몸의 총알을 끝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당시 갓 개발된 금속탐지기를 이용했지만, 실패했다. 한 발은 팔을 스쳤고 다른 한 발은 복부에 박혔는데 주치의 블리스 박사는 엉뚱하게도 등쪽에서 총알을 찾으려 했다. 심지어 소독하지도 않은 손으로 상처부위를 찔러댔다. 결국 9월 19일에 패혈증까지 겹치면서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향년 50세. 죽기 며칠 전에 의사들이 가필드를 뉴저지주 엘버론의 바다 휴양지로 이동할 것을 권유했는데, 이 때 너무 무리하게 이동하는 바람에 오히려 가필드의 병세를 키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게다가 당시 향수였던 매딜럼과 음식 튜브, 나무로 제작한 에어콘을 치료법으로 사용했다고... 이건 지금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게 엉뚱하게 전해지기도 했는데 당시 의료수준이 나뻐서 소독도 안한 의료기구로 그를 수술해 패혈증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사실은 2000년대까지 팔리던 미국 대통령에 대한 국내 저서에서 가필드가 죽은 원인으로 나올 정도.

대통령을 암살한 기토는 당연히 붙잡힌 뒤 사형을 선고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는 대통령이 된 아서가 자신을 사면해줄 것으로 망상했지만 당연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후 그의 시신은 의료기관으로 넘겨져 해부 실험 대상이 된다. 지금도 그의 뼈와 뇌를 보관중인 병원이 있는데, 암살자의 뼈는 여러 상징적 의미가 있어 보통은 붙이는 꼬리표조차 달지 않으며 현재도 엄중하게 보관되어 있다. 또한 뇌는 단면을 보면 그 사람이 미친 줄 알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진 의사들에 의해 아주 조각조각난 상태로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해부 도중 두개골이 사라졌는데, 이 행방은 1912년 워싱턴 포스트에서 도난당했다는 기사가 나온 이후 아직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율리시스 S. 그랜트는 가필드를 "지렁이 뼈대도 가지지 않은 자"라고 혹평했다. 이건 그랜트가 가필드에게 자기 계열 사람들을 중용하라고 청탁을 했지만 가필드가 이를 들어주지 않자 이에 앙심을 품고 내뱉은 말이다.

전임 대통령인 러더퍼드 B. 헤이스는 "미합중국의 역사를 통틀어 이토록 가난하게 출발해서 많은 것을 성취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벤자민 프랭클린도 링컨도 그와 같지 않았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일반적으로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대통령의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지만, 엽관제도의 희생양으로 죽어간 비운의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 대통령 편에서는 콩클링과의 타협 때문에 '부패한 정치인'이라는 평가도 존재한다고 소개했지만, 그보다는 엽관제도의 희생자로서 행정학 계열에서 많이 다뤄진다. 미국 대통령으로써 활동한 기간이 4개월밖에 되지 않아서 업적을 평가하기가 어렵다.

가필드의 암살은 엽관제도의 심각한 부패성과 무능률 등의 여러가지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기에 오늘날의 공무원 시험의 기초를 놓은 펜들턴 법이 나오고, 엽관제도의 폐해를 막아내고자 정치와 공직을 분리하려는 정치행정이원론이 등장하게 된다.

4. 여러가지 일화[편집]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께서 장래희망을 물었을 때, '사람이 되겠다'고 대답했다. 무슨 뜻이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사람다운 사람이 되겠다'고 답했다.

오른손으로 라틴어, 왼손으로 그리스어를 쓰는 것이 가능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양손잡이'였던 인물. 그 외 그가 세운 기록은 역대 대통령 중 두 번째로 단명한 대통령(49세 10개월. 제일 단명한 대통령은 존 F. 케네디)[3], 9대 대통령 윌리엄 해리슨에 이어 두번째로 재임기간이 짧았던 대통령(약 6개월. 그나마 2개월 넘게 병석에 있었다)이다.

총에 맞아 병석에 누워 있을 때 종이판과 연필을 부탁하고는 자기의 풀네임을, 그리고 라틴어"Strangulatus pro Republica"라고 적었다고 한다. 대충 '나라를 위해 고문당했다' 정도의 의미. 또한 병석에서는 라임을 탄 물과 빻은 오트밀로 연명했는데, 가필드는 오트밀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하루는 붙잡힌 아메리카 원주민 추장이 옥에서 단식한다는 말을 듣자 처음에는 "굶어 죽게 내버려 둬"라고 말했다가 별안간 "아니, 아니. 그에게 내 오트밀을 가져다 주게"라고 지시했다. 실제로 오트밀을 추장에게 가져다 줬는지 알 수 없지만 최후를 맞을 때도 제법 여유 있는 태도였던 모양이다.

미국에서는 농담삼아 유명한 고양이 캐릭터인 가필드와 연관짓기도 한다. 그리고 행정학계에서는 유명하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지 그냥 가필드라고 하면 먼저 고양이 가필드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고. 다만 이 대통령과 아주 무관한 이름이 아니다. 고양이 가필드는 이것을 그린 짐 데이비스의 할아버지 제임스 가필드 데이비스에서 온 이름으로 할아버지의 이름이 대통령 가필드를 따라 지어졌으므로 간접적으로 연관은 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에겐 학원에서 행정학, 특히 엽관주의의 폐해를 배울 때 자주 듣는 미국 대통령 이름이다.

90년대 한 국내 영어 학습지에선 어느 농장주 집에서 머물던 살던 10대 일꾼이 농장주 딸과 사랑에 빠졌으나 가난뱅이 일꾼이라 농장주가 반대해서 둘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헤어졌다. 그로부터 30여년 뒤에 그 농장주가 신문을 보니 새로 대통령이 된 제임스 가필드라는 이름이 어디선가 낯익어서 보니 수십여년째 그대로 쓰고 있던 일꾼 숙소에 있던 침대에 사인한 글씨랑 같았다는 걸 알았다. 알고보니 30여년전 그 10대 일꾼이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농장주가 후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4] 하지만 가필드는 취임 4개월만에 죽었고, 그가 죽었을 때 매우 빈곤하여 그의 유족들에게 연금을 지불한 것이 대통령 가족에 대한 연금의 시작이었다고 하니, 농장주의 안목은 옳았다.

매직 더 개더링의 디자이너 리처드 가필드의 조상이다. 제임스 가필드의 great-great-grandson 이므로, 정확히는 고조. 즉 리처드는 제임스 가필드의 현손이 되는 셈이다.

4.1. 가필드 증명[편집]

사다리꼴을 이용해 피타고라스 정리증명한 적도 있다. 고대언어를 가르치는 문학과 교수가 취미로 수학을 한다는 것도 특이할 뿐더러, 그림 하나와 수식 한줄만으로 이루어진 명쾌한 증명이라 더더욱 대단하다.[5]

파일:ZwFtGsB.png

△ABC+△CBE+△BDE=□ADEC
bc2+a22+bc2=(b+c)2×(b+c) \frac{bc}{2} + \frac{a^2}{2} + \frac{bc}{2} = \frac{(b+c)}{2} \times (b + c)

이를 정리하면

a22+bc=b22+bc+c22 \frac{a^2}{2}+bc = \frac{b^2}{2} + bc + \frac{c^2}{2}

가 되고, 이는 다시

a2+2bc=b2+2bc+c2 a^2+2bc = b^2 + 2bc + c^2

로 정리되고 양변에 2bc를 빼면

a2=b2+c2 a^2 = b^2 + c^2

가 되어 피타고라스 정리가 성립된다.
[1] 여성 참정권이 없었고, 선거 연령도 높았고, 등등등...[2] 이렇게 "공약차는 별로 없는데 투표는 아슬아슬한" 경우는 1876년 러더퍼드 헤이스 당선 때부터 1896년 윌리엄 매킨리 당선까지 한동안 계속되었던 시대적 흐름이었다. 득표에서 지고 선거인단에서 승리한 대통령이 두번, 군소당 후보의 존재만으로 뒤집힌 선거도 한둘이 아니었다.[3] 3번째는 제임스 포크로 사망시 나이가 53세였다. 다만, 임기를 다 마친 대통령 중에서는 가장 단명했다 볼 수 있다.[4] 판본에 따라선 농장주가 젊은이를 두들겨 패는 경우가 있다.[5] 하지만,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피타고라스의 증명법에 쓰인 도형을 단순히 절반 잘라놓았을 뿐임이 보일 것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00px-Pythagoras-proof-anim.svg.png 사진의 왼쪽 도형이 피타고라스의 증명법에 쓰이는 도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