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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대지의 깃발
흩날리는 이녁의 땅
어둠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
검붉은 저녁 햇살에
꽃잎 시들었어도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리
아아... 아아...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이여

잠들지 않는 남도(안치환)

나무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Jeju_Massacre.jpg

1948년 5월 촬영된 사진. 사진 촬영 직후 그들은 모두 처형당했다.
1. 사건 개요2. 기원3. 과정4. 결과5. 평가6. 영향7. 민주화(6월 항쟁) 이후에도 계속된 부정8. 노무현 전 대통령 위령제 추도사9. 인물
9.1. 주동 세력9.2. 학살 행위가 확인된 자들9.3. 학살을 저지하려했거나 저지한 공로가 확인된 인물들
10. 문화에서 4.3사건11. 4.3 사건을 다룬 역사책들12. 4.3과 일본13. 4.3 평화기념관

1. 사건 개요[편집]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2조(정의) 이 법 사용하는 용어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개정 2007.1.24>

1. "제주4·3사건"이라 함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1] 당한 사건을 말한다.
바다로 둘러싸여 고립된 섬 제주도는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였다.
-제주 4.3 평화공원 내 전시장에 있는 문구. 4.3 사건을 한 줄로 요약했다.
제주도 역사상 최대의 비극
반민특위 해산, 한강 인도교 폭파, 보도연맹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사사오입 개헌, 3.15 부정선거 등과 함께 이승만 정권의 대표적 흑역사
근, 현대 한국사에서 제주도를 슬픔의 섬, 침묵의 섬으로 바꾼 또다른 사건.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2] 제주도에서 일어난 양민학살로, 일본제국의 패망이후 남북한의 이념갈등 발단이 되어 봉기한 남로당 무장대와 미군정과 국군, 경찰간의 충돌 과정과, 이승만 정권 이후 초토화작전 및 무장대의 학살로 많은 주민이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건이다.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에서 단독으로 무장대 조직, 기습에서부터 시작되어 제주 4.3 사건이라고 불리지만 그 날에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말하자면, 1947년 3월 1일부터 한국전쟁이 휴전될 때까지 계속된[3], 제주도 역대 최대의 참사 중 하나보도연맹 학살사건과 더불어 양민학살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힌다[4].

오늘날 반공주의 성향이 강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것을 '제주4.3남한단독정부수립반대 및 남한적화기도 무장반란폭동'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제주 4.3 사건의 발단은 48년 4월 3일 남로당의 봉기가 아니며, 47년 3월 1일에 제주 경찰이 시위 군중에 발포하여 민간인 6명이 사망한 것이 최초 원인이었다. 또한, 1948년 4월 3일 당시에는 남한에는 미군정 체제로, 합법적인 정부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무장대의 슬로건은 '경찰과 서청의 탄압 중지 / 단선, 단정 반대 / 통일정부 수립' 이었으며, 당시 제주도 당국의 폭정 [5]과, 남북한 총선거가 화두로 떠오르던 시대 상황을 생각하면 충분히 고려할 법한 슬로건이었으므로, 이 사건을 '대한민국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보는 것은 지극히 비약이다.

선동을 통해 대안 없이 일을 크게 벌리면서도 '등산[6]하면 혁명적, 부등산은 비겁 행위'라며 제주도민들에게 입산을 요구했던 김달삼, 강규찬, 안세훈, 고진희 ,문등용, 이정숙 등 남로당 지도부 6인은 도민들이 죽어가는 와중에 해주에서 열린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구실로 떠나버렸고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들과 북한이 연결되면서 제주도민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강해졌다. 이들 중 김달삼은 무장공비 지휘관으로 강원도 쪽을 헤집다 결국 사살되었다. 유격대가 무너져가고 도민들의 희생이 누적되는 가운데 투쟁을 중단하고 대피 생활을 지시했던 유격대 사령관 송원병, 조직부책 백창원, 군사부책 고승옥은 이에 반발한 대원들 손에 죽었다.

2. 기원[편집]


사건의 기원은 1947년 3월 1일에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삼일절 기념 제주도 대회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행사를 끝낸 군중들이 가두 시위에 들어갔고 그 중에 기마경찰에 아이가 채이고 경찰이 이를 모르고 지나가는 작은 소동이 발생하여 군중들이 몰려들었다.[7] 박헌영의 비서 출신이라고 자처하는 박갑동[8]은 이 사건을 이용 선동하여 공산당이 제주도에서 어느정도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경찰은 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줄로 알고 발포하여 소수의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이 사건 이후로 중앙정부에 사과를 요구하는 민관합동파업(!)이 도내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하지만 중앙정부는 당연히(...)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파업에 참여한 66명의 경찰이 해임되고 그 자리는 육지(제주도를 제외한 한반도 본토를 뜻하는 제주 방언으로 제주 화자가 '육지'라고 말하면 십중팔구는 이 뜻으로 봐도 무방하다)에서 온 서북청년회[9] 소속 사람들로 충원되었다. 이후 각종 고문치사 사건들이 발생하고 서북청년회의 패악질이 극심해지면서 민심은 극단으로 치닫기에 이르렀다.[10]

이것이 지옥의 씨앗이었다.

3. 과정[편집]

1948년 4월 3일, 5.10 총선거를 반대하고 이른바 통일된 조국을 설립할 것을 주장하던 남로당 제주도 지부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의 전 경찰지서 24개 중 12개를 공격하고 경찰 가족을 살해했다. 사망은 경찰 12명, 경찰가족 6명, 공무원 5명, 민간인 37명 등 60명이었다.

문제는 이 사건에 대한 군경들의 대처였는데, 그들이 파악한 최대 무장대 숫자는 500명이었으나 제주도민 전체를 배후로 보고 무장대 본부가 있는 한라산 지역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해버렸다.

그리고 군경[11] 및 토벌대들은 이 근처를 얼씬거리는 사람은 남로당 무장대로 간주하여 가차없이 죽였다. 특히 서북청년회 소속 토벌대들은 노인, 어린이, 아기, 성별을 가릴 것 없이 일반 서민들을 빨갱이와 한통속으로 치부하여 모조리 죽여버렸다고 한다. 게다가 이미 해안지대로 소개된 일반 서민들마저 가족이 없으면 대신 살해당하는 대살(代殺)을 당했다. 이들 서북청년회는 월남한 지주나 이북 출신 조직폭력배, 친일세력 장정들이 주류로서 제주에서 화풀이와도 같은 만행을 저질렀고, 진압군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으로 악명높았다. 학살, 약탈, 강간 및 살인연습 등의 증언자료가 남아있다.[12]

물론 군경들뿐만 아니라 빨치산들도 심심하면 내려와서 군경에 협조하는 반동분자를 처단한답시고 도민들을 학살하곤 했다. 전체 희생자 중 약 20%가 무장대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13]

그러니까, 벌건 대낮에는 서북 청년회의 토벌대 및 군, 경찰이 '빨갱이 색출'을 하고, 빨치산들이 나올 시간인 저녁에는 하산을 해버린다. 그리고 저녁에 빨치산들이 내려와서는 살기 위해 군경에 협조한 서민들을 학살하는 것.

실제로 당시 미군 정보보고서를 살펴보면, 당시 진압을 맡았던 조선경비대 제 9연대가 전체 도민들 중 10%가 공산주의자거나 공산주의에 동조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 대량 학살계획(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고 되어 있다.

초기에 군경과 빨치산 사이에서 강화가 이루어져 사건이 조기에 끝날 수 있었으나, 서북 청년단이 일으킨 것으로 추정되는 의문의 습격 사건이 이어지면서 화의가 깨지고 말았다. 제9연대장 김익렬[14][15]은 직접 빨치산 측을 찾아가 김달삼(본명 리승진)과 평화협상을 시도했으며 완전한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우선적으로 72시간 동안 휴전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72시간이 거의 끝나가던 5월 1일에 정체 불명의 무장세력이 제주읍 오라리의 전략촌을 습격하고 방화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경찰은 "배신자들에 대한 공비들의 보복"이라고 주장했지만, 현재는 협상 및 토벌의 주도권이 경비대로 넘어간 데 대한 경찰측의 훼방놓기로 보고 있다. 실제 습격 현장에서 체포된 포로가 자신은 경찰관이며 제주경찰서장의 명령에 따라 행한 일이라고 자백하기도 했다. 물론 경찰 측에서는 좌익의 이간질이라고 주장했다.[16]

참고로 오라리 방화 사건은 4.3사건 관련 여러 사건들 중 드물게 영상이 존재한다. 바로 미군이 화재현장을 지상 및 상공에서 촬영한 영상인데 미군측에서는 이 영상을 <제주도의 메이데이(May Day in Korea:Cheju-Do)>라는 제목의 기록영상물로 제작하여 보관하였다. 불의의 사건을 급작스럽게 찍은 영상 치고는 퀄리티가 좋기 때문에 미군 측에서도 방화 계획을 사전에 알고 대비하여 촬영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여튼 오라리 방화 사건으로 평화협상은 파기되고, 김익렬 연대장과 딘 미 군정장관, 맨스필드 제주도 군정장관, 안재홍 민정장관, 유해진 제주도지사 등이 모여 대책회의를 여는데 이 자리에서 경찰측 총수인 조병옥[17]이 강경진압을 주장하며 김익렬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했고 이에 김익렬은 조병옥과 드잡이질을 벌이기에 이른다. 결국 회의의 총의가 강경진압 기조로 결정됨에 따라 김익렬은 쫓겨나듯이 제주도를 떠나야 했고, 서청을 내세운 경찰조직이 마음껏 잔혹한 진압을 자행하였다. 김익렬의 후임 연대장으로 내려온 박진경은 부대 내의 남로당원에 의해 암살당했고, 그 후임 송요찬은 '해안선에서 5km 이상 떨어진 지역을 통행하는 자는 모두 빨치산으로 간주하여 발포한다.'는 정신나간 포고령을 내리고 섬 전체를 피바다로 만든다. 중산간 부락 중에는 주민이 한꺼번에 학살당하여 마을이 아예 사라진 곳도 많다.

한국전쟁현리전투의 참패로 평가가 안 좋은 유재흥 장군 역시 4.3 사건이 진행되는 와중에 파견되었는데, 온건책으로 주민 피해를 줄였다. 거꾸로 말하면 얼마나 초기의 진압이 부조리하고 가혹한 것이었는 지를 증명하는 것이가도 할 수 있다. 항목 참조. 그리고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 또한 임관하자마자 이곳으로 자대배치를 받았었다.

4. 결과[편집]

이 사건으로 인한 총 희생자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최대 제주도민 8분의 1이 죽거나 행방불명(추정치는 3만명에서 최대 8만명)된 것으로 추정된다[18]. 말하자면, 친척 몇 다리만 건너면 4.3사건 희생자라는 뜻인데 실제로 오늘날도 제주도에 가 보면 촌락별로 제사가 거의 비슷한 날 치러지는 걸 보면 당시에 제주도민들이 얼마나 학살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19]

그 후유증은 아직도 지대하여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과 대화하다 그쪽 화제가 나오면 진저리를 치실 정도다. 바로 눈 앞에서 가족이 살해당하는 걸 보셨는데 거기에 무덤덤할 수가 있겠는가[20]? 심지어 그 사건으로 인해 보통 제주 밖을 일컫는 육지(한반도측) 사람들에 대한 인식마저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래서 사건 이후 90년대까지(!) 육지에서 제주로 시집오거나 장가온 사람들은 괜히 그런 이미지를 덧씌워받아 고생한 일이 많다. 그리하여 레드 컴플렉스가 극심하였다[21].

브루스 커밍스는 제주 평화포럼에서 1949년 제주도민 사망자가 6만명 발생한 것으로 당시 임관호 제주도지사가 미 정보국에 전달했다는 전문가의 주장을 제기하였다.#

5. 평가[편집]

1998년 11월 당시 ‘한라일보’에 따르면, 김대중 대통령이 CNN과의 인터뷰에서 “제주 4·3은 공산폭동이지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으니 진실을 밝혀 누명을 벗겨줘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화 이후, 특히 2000년대 이후 4.3 사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2000년에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으며, 2003년 10월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사건 55년 만에 최초로 국가원수의 첫 사과를 하고, 2005년에는 국가 차원에서 최초로 4.3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를 했다. [22] 또한 2006년에는 직접 제주도를 방문하여 4.3 사건 58주기 행사를 치르며 거듭 사과하기도 했다. 이런 정성과 노력 이후로 제주지역 선거에서는 민주당계 정당의 성적이 좋은 편이다.제16대 17대 18대 19대 20대 총선은 이지역에서 새누리당의 패배.[23][24]

6. 영향[편집]

4.3사건을 경험한 유족들의 회고를 들어보면 이념과는 상관없이 자기 마음에 안들면 마구잡이로 죽여버리는, 완전히 미쳐버린 세상이었다.

얼마나 미쳤냐면 총살은 기본으로, 비협조적인 사람이나 경찰과 군인의 가족들은 본보기로 참수형에 처했고 연좌제를 적용한다며 친인척이나 면식이 있는 사람들을 공개처형했다.[25] 더 나아가 소의 생식기를 건조시켜 만든 쇠좆매라는 채찍에 가까운 도구로 태형을 벌이거나, 사람들을 모아두고 돌팔매질을 하게 린치하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헬게이트를 열었고 이를 수습하고 진압하려한 14연대는 자신들이 개입하기 전까지 살아 남은 제주도의 거주자 대부분이 직간접적인 가해자라는 상황속에 수습할 타이밍을 놓쳐 보복성의 성격을 가진 여순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4.3사건과 여순사건으로 인해 한국전쟁 당시 제주도 사람들은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다!"라는 주장과 함께 죽는게 거의 기정 사실이었던 해병대에 자원 입대를 하기도 했다.[26] 한국 현대사의 안타까운 장면이다.[27] 그런데 아이러니한 점은, 4.3 사건기간의 후반기 때 당시 제주지역 계엄군을 맡고 있던 해병대도 양민학살에 가담했었다는 것이다.#[28][29]

4.3 사건 후기에서 정부는 계엄령을 폐지하고 산 속에 숨어있는 사람들에게 귀순을 권유하였는데, 6.25 전쟁 중 예비 검속으로 이때 귀순한 사람들 다수가 학살당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30] 게다가 귀순한 사람들 말고도 무고한 사람들 다수가 모함이나 잘못된 정보에 의해 희생되었다. 마을 유지들한테 밉보였던 이들, 아니면 그 사람들의 일가친척 등이 학살 당한 경우가 있다.

한편 제주도 방언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 사건 당시 제주도 방언을 쓰는 사람들은 피해를 당하지 않게 제주인인 척을 안할려고 억지로 제주도 방언을 기피하는 경향이 생겼고, 사건 이후에도(현재는 사라졌지만) 제주도에서 제주도 방언은 훈육의 대상이었다. 수업중 제주어를 사용한 교사는 장학관에게 지적을 받았고, 제주어를 사용하는 학생은 수업중에는 반드시 표준어만 사용하도록 강요받는 사례도 있었다. 게다가 6.25 전쟁 이후 육지 학생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사투리는 촌스럽다'라는 인식까지 퍼져 현재 언어 사용인구가 약 5,000~10,000 명까지 줄어들었으며 이는 현 제주인구[31]1/60수준이다. 그래서 현재 유네스코에 의해 소멸 위기의 언어 가운데 4단계인 '아주 심각하게 위기에 처한 언어(critically endangered language)'에 등록될 정도로 소멸 위기 상태이다. 다행이도 현재 제주어는 보존되고 지켜야할 소중한 유산이자 언어로 자리잡았으며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에선 거주민들에게, 특히 학생들에게 제주어를 배우고 사용하도록 장려하고 있다[32].

이 사건은 제주도 내의 종교 분포에도 영향을 주었다. 제주도의 종교 인구 통계를 보면 개신교천주교 등 기독교 전반의 신자 수가 적은 편이다. 천주교는 이재수의 난이 일어날 정도로 악행을 저지른 사례가 있어서 이전부터 신도의 수가 적었다. 한편 개신교 신자의 수가 적은 이유가 이 4.3 사건과 연관이 있다. 학살의 주동자들인 서북청년단은 이북에서 내려 온 보수 개신교 교단과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7. 민주화(6월 항쟁) 이후에도 계속된 부정[편집]

민주화 이후에도 4.3 사건에 대한 탄압은 계속됐다. 노태우 정부까지만 해도 경찰에서 학살 피해자들의 유족들을 주기적으로 감시하고 방문조사하였으며 문민정부역사바로세우기가 끝난 김대중 정부까지도 주민들은 진상규명과 경찰의 감시/연좌제 중단, 피해보상 등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대통령에게 보냈다. 아래항목인 '문화에서 4.3 사건'에 적혀있듯이 다큐멘터리와 관련자들이 탄압받은 적이 있다. 어처구니 없게도 원세훈 국정원장 시절인 2009년최고의 간첩전문가도 탄압을 받은 일이 있다. 윤모 단장은 지난 2009년 5월 때 감찰실 직원과 점심을 먹다가 "제주 4.3 진압은 정부쪽에서 심하게 한 측면이 있다"는 말을 했다. 감찰실은 윤 단장의 발언을 '좌파적 발언'이라고 몰았고, 윤 단장은 대기발령당했다[33]. 미군 G-2 보고서에 따르면 사망한 제주도민들중 80%이상은 토벌대에게 죽었다. 윤모 단장이 한말은 좌우파를 떠나 절대 과장이 아니다. 그런데도 대기발령을 받은 것이다.

2014년에 새로 바뀌는 역사 교과서에서는 실리지 않는다는 풍문이 돌았으나, 뚜껑을 열어보니 한국사 교과서에 기재되었다. 설명이 줄기는 했는데 이건 과목 전반의 문제라.

마침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인 이영조[34]가 2010년 11월 5일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벌어진 국제학술회의에서 '공산주의자가 주도한 모반, 폭동(communist-led rebellion)이라고 주장하여 논란을 빚게 되었다. 사실 관계만 논하자면 4.3사건은 일단 남로당에 의한 폭동이 맞긴 맞지만, 문제는 이를 진압하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민간인의 희생을 언급하지 않고 있어서 논란이 된 것.

정작 이 사건을 일으킨 중심인물들은 대다수가 이미 사망하였거나, '유전무죄'를 통해 빠져나가서 처벌조차 받지도 못했다고 한다. 물론 여순사건도.

2014년에 4.3희생자 추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자 자칭 우파 단체가 반발하며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까지 언급했다. 지들이 원하는대로 3년 후에 탄핵됐다#[35] 또한 제주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박원순 서울시장이 만든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좌익폭도들을 감싸고 이승만 대통령을 학살자로 만드는 등 왜곡되었다며 박원순 시장의 사임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요즘 "대한민국 예비역 영관장교 연합회" 라는 어버이연합과 비슷한 시기에 반짝 하고 나타난 극우단체가[36] 제주 4.3사건때 일어났던 군의 학살을 극구 부정하고, 군이 오히려 정당한 대처를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2017년 시점에도 5.18 민주화운동, 부마항쟁, 4.19혁명, 6월항쟁 등과 비교해 보면 비교가 안될 정도로 인지도가 적고, 공교육 과정에서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나마 7차 교육과정이 되고 난 후 단순한 반공논리적 서술이 약간 개선된 것이다.[37]앞서 언급한 네 가지 대표적 민중항쟁과 달리 4.3을 민중항쟁으로 선뜻 떠올리는 국민은 연령과 지역을 막론하고 드물다. 유명한 광주민주화운동조차도 유명세에 비하면 놀랍도록 전문가에 의한 학술적 연구의 수는 그리 많지 않은 실정인데, 4.3에 대해서는 제주지역 언론, 시민단체, 향토사학자들이 아니고서는 거의 관심을 가져 오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4.3에 대해서 남아있는 자료의 수는 결코 적지 않지만 대다수의 논자들이 이를 제대로 검토하지도 않는 것도 문제다.[38]

8. 노무현 전 대통령 위령제 추도사[편집]



2006년 4월 3일 4.3사건 위령제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과거사 정리 약속을 포함한 추도사를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차원에서 최초로 사과한 것이며 당시 김태환 제주지사를 비롯한 4.3 사건 유족들이 눈물을 흘리기도.

그로부터 3년 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4.3 사건 유족들이 직접 봉하마을을 찾아가 눈물로 애도했고 김태환 제주지사 또한 도내 분향소를 직접 찾은 뒤 서울에서 열린 영결식에도 참석했었다. 당시 기사

9. 인물[편집]

9.1. 주동 세력[편집]

9.2. 학살 행위가 확인된 자들[편집]

  • 유해진[39]: 서북청년단 출신으로 제주도지사로 부임해 학살에 깊이 관여했다.
  • 조병옥: 제주도 강경진압 및 학살에 가장 깊이 관여했다.

9.3. 학살을 저지하려했거나 저지한 공로가 확인된 인물들[편집]

  • 유재흥: 이승만 정권이 승인한 계엄령 이후 송요찬이 벌인 결과를 치운 공로가 있으며, 정부에 계엄령 해제를 건의해서 받아낸 것도 유재흥이다. 한국전쟁 당시 현리 전투 등의 실책과 겹쳐 학살자로 오해받았다.
  • 문형순 : 당시 성산포경찰서, 모슬포 경찰서장을 역임. 예비 검속으로 체포된 사람들에 대한 총살을 거부하고 모두 석방했다. 이 때 일명 '자수사건'도 벌어졌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군경이 주민들에게 '자수'를 강요해놓고 정작 자수한 주민들을 '빨갱이 혐의가 있다'며 학살한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자수를 해도 죽고 안 해도 죽는다'라는 생각에 제대로 자수하거나 군경에게 협조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자 군경에게 협조하도록 주민들을 설득하는 일을 하던 조남수 목사와 김남원 민보단장이 문형순에게 '자수하는 주민들은 죄가 없으니 살려달라'고 부탁했고, 문형순은 이를 받아들였다. 주민들이 자수하러 경찰서에 오자 서북청년단 단원들이 주민들을 처벌할(= 학살할) 준비를 하였으나 문형순은 이들을 내쫒고, 이후 주민들의 자술서를 읽고는 '시시하다. 아무런 내용도 없다'며 주민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런 노력으로 그가 관할하던 지역은 제주도에서 가장 적은 8명의 사상자만이 발생했다. 하지만 이때 미운 털이 박혔는지 1953년에 경찰에서 퇴직한 뒤 쌀 배급소, 극장 직원 등의 일을 하다가 1966년 병사했다. 문형순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나온 제주 지역언론 기사 이를 소재로 한 역사 만화 상편/하편

10. 문화에서 4.3사건[편집]

오랫동안 금기시되었다가 제주 4.3사건을 다룬 소설인 '순이 삼춘'의 경우 책은 금서가 되고 작가 현기영은 고문 등 고초를 겪어야 할 정도였다.[40] 사실 5.16 이전에 나온 오영수의 단편 '후일담'은 아주 리얼하게 4.3 사건 당시 민초들이 당한 이야기들이 나온다.[41] 시사 만화가 박건웅이 이 사건을 다룬 <홍이 이야기>라는 작품을 그렸다.

운동권 출신 시인이자 <양철북>으로 유명한 이산하 씨도 1987년에 해당 사건을 소재로 <한라산>을 냈다. 그러나 해당 시집은 그해 11월에 작가가 치안본부 대공수사대에 의해 연행되고 1988년에 유죄 판결을 받아 '이적표현물'로 판정되어 더 이상 나오지 못하다가 2003년에야 복간되었다. 그 외에 시인 고은 선생도 해당 사건을 소재로 한 시 <오라리>를 썼고 시인 김명식 선생도 <유채꽃 한 아름 안아들고(1989)>, <한락산(1992)> 등의 4.3 연작시를 썼다.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가 이 사건을 비교적 중립적인 시각으로(말하자면 아주 건조하게) 다루면서 인지도가 많이 올라갔다. 하지만 본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독립영화 레드헌트국가보안법에 의거 '이적 표현물'로 판단되었고, 1997년에 이 작품을 상영한 인권영화제의 주최자인 인권운동사랑방 대표 서준식이 구속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3년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도 중립적으로 조병옥의 강경책 등에 조명했다. 또한, 극중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이 일을 재조사하고, 공식사죄를 검토하고 있다고 해설에서 추가 소개하기도 했다. 작중에선 이 일에 이정재가 깊게 관여하기도 했다. 최동열의 말이나 나레이션을 통해 '아마 죽은 사람들 대부분은 좌.우익이 뭔지도, 자기가 왜 죽어야 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라며 씁슬하게 묘사한다. 다만 서북청년단의 이화룡이 경찰인 이정재에게 항의하는 것은 역사 왜곡이다. 서북청년단이 학살에 부정적이었던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 다큐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첫방송에서 다뤄지기도 했다.

그리고 공식 사과 한지 딱 10년이 지나 제주인 감독 오멸이 만든 2013년 지슬이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월드드라마) 수상. 제주에서 선행 개봉하고 전국 순차 개봉인데 독립 영화치고 흥행 성적이 좋다.

이 외 제주도 출신 노시인인 문충성이 자신의 시집 '허물어버린 집'에서 직접적으로 다루기도 했다. 참고로 문충성 시인은 10대 시절 대부분을 제주도에서 4.3 사건으로 보냈다.

판타지 만화인 아일랜드의 소설판에서는 원미호가 4월 3일에 제사를 지내고 지각한 학생들에게 화를 내는 장면도 있다.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얼마나 잘 알려지지 않았는지를 상징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위에서 보듯 4월 3일에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게 아니다.

단편선과 선원들의 싱글중 하나인 <국가>는 이 사건을 풍자했다는 해석이 있다.

늘푸른 프로덕션의 한국전쟁[42] 마지막권을 보면 제주 4.3사건의 피해자들에대한 보상에대해 이야기하는데 "김영삼, 노무현 정부는 바보같이 간첩들한테 보상금이나줘서 잘못됬다." " 4.3사건때 일어난 군의 학살은 정당했다"는 논조로 이야기한다. 애초에 이 만화는 극우적 성향이 아주 심한 만화이다. [43]

11. 4.3 사건을 다룬 역사책들[편집]

앞서 말한 시인 김명식이 이끌던 재야 역사학 단체인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연구원(이하 아라리연구원)'이 1988년에 엮은 <제주 4.3 민중항쟁(총 3권)>이 있는데 이 책은 4.3 학살과 미국의 책임관계를 다룬 서적이었으나, 1990년에 해당 도서가 이적표현물로 판정되고 이를 저술한 김명식이 국보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루기까지 하였다.

또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학생이던 노민영이 존 메릴의 논문과 항쟁 관련자인 김봉현의 현장기록 등을 토대로 같은 해에 쓴 <잠들지 않는 남도>가 있었으나, 이 책 역시 이적표현물 판정을 받은 바 있다.

12. 4.3과 일본[편집]

학살을 피하기 위해, 혹은 빨치산에 있다가 검거를 피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이 많다. 또한 살아남은 사람들도 일본으로 도망간 친척 등을 통해 간첩 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 재일교포 1세대 중에 제주 출신이 유난히 많은 이유가 바로 이 사건 때문.[44] 이러한 이유로 과거에는 한국보다 일본 쪽에 더 잘 알려져 있었다.

김석범의 장편소설 <화산도>가 본 사건에 대한 재일교포 문단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그는 이 사건의 원인을 미국의 남한 점령과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라 주장하였다.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 '피와 뼈' 등으로 잘 알려진 최양일도 4.3 사건을 다룬 영화를 준비 중이라는 얘기가 있었으나 현재까지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제작이 무산된 듯하다.

또한 조류 때문에 학살된 제주도민의 시신들이 일본까지 떠내려 가는것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일본에는 이때 거두어진 시신들을 화장한 곳에 위령비를 세운곳이 있다고.

90년대 말에 은퇴한 한국통 일본 외교관이 쓴 회고록이 국내에 출판된 적이 있는데 이 외교관은 젊은 시절 제주도에서 근무했다. 그는 당시 일본인 외교관으로 보기 드물게 한국어를 전공했기에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일반 제주도민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는데 그가 현지에서 사귄 친구의 증언에 따르면 그 사람의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사귄 이웃친구에게 형을 고발당하고 그 형이 처형 당하는 것을 눈 앞에서 보는 참사를 겪었다.이후, 그 이웃 친구는 일본으로 달아났고 수십년이 지나 고향으로 돌아와서 그 친구에게 "죽기 전에 용서받고 싶다."면서 노구의 몸으로 대문 앞에 무릎 꿇고 빌었으나 아버지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대문을 넘어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그 아들은 저런 노인이 저렇게까지 비는데 용서해도 되지 않을까, 했지만 말을 할 수는 없었다고. 이런 내용을 생각하면 피해자와 가해자를 불문하고 가까운 일본으로 달아난 경우가 적지 않은 듯.

2000년대 초반 아직 한국에 대한 정보가 일본에 본격적으로 유입되기전, 일본의 우익들이나 우파 네티즌은 상기한 4.3 사건의 일본에의 여파와 제주도민들의 일본으로의 탈출 때문에 제주도가 아직도 한국 본토와 사이가 안 좋다거나, 독립을 염원하고 있다거나 하는 낭설이 진지하게 돌았었다. 거기에 근거해 한국과 전쟁을 하게 되면 제주도민의 도움을 받아 제주도를 해방시키자고 하는 주장도 있었다. 이후 한국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흘러들어가며 그런 낭설은 줄었지만, 개중엔 아직도 제주도를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13. 4.3 평화기념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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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봉개동에 위치해 있다.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갔다면 아마 가 보았을 것이다. 대중교통으로 갈 경우 제주시청 등지에서 43번 버스를 타고 갈 수 있지만 버스 배차간격이 길고 불규칙적이다.
[1] 일부 극우단체들은 왜 빨갱이들에게 보상을 해야하냐고 반발하지만, 법에 나오다시피 이러한 대치 상황에서 죽은 민간인에 대한 법이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민간인들중에 협력자가 있어야 빨치산도 움직인다며, 이런 민간인도 결국 협력자이자 공산주의자라고 말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6.25 당시 일어난 북한군들이 저지른 학살에 대해서 아무말도 할 수 없게된다.[2] 9월 21일 한라산 금족구역이 해제됨에 따라 공식적으로는 막을 내렸다. 한라산 금족구역 해제라는 말은 당시 무장 공비들이 한라산에 숨어 지냈기에 한라산을 금족구역(출입 금지 구역)으로 지정하고 일반인의 출입을 막았던 것이다. 그러나 서청, 민보단 등의 무차별 진압으로 인해 한라산으로 도망친 일반인 가족들도 많았다. 이 때 산에 올라간 사람들은 공비나 일반인이나 할 것 없이 '산폭도'라고 불렸다. 이들은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산에서 내려와 투항해 '귀순자'라고 부리며 일종의 게토에 수감되었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6.25 때 의심간다는 이유로 사살당했다.[3] 어찌보면 그 후로도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이승만, 박정희 시대를 거치며 반공정권에 의해 외면당했으며, 그 사이에도 수많은 민간인이 의심만 된다 하여 끌려가거나 고문당했다[4] 사실 1945년 이후부터 종전 전까지 엎친 데 겹친 덕으로 제주도는 사상 최악의 지속적 흉년에 시달려 이 때 제주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5] 47년 삼일절 총격사건, 48년 3월 고문치사사건 등[6] 산에 올라가는 그 등산 맞다. 한라산으로 올라가 투쟁하라는 것.[7] 여기에 대해서는 아이가 말에 채인 사건 자체가 없었고, 좌익 분자에 의한 선동으로 경찰서 습격 시도가 발생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이 사건에 관해서는 목격자가 엄연히 존재하며, 시위 중에 벌어진 일도 아니었다.그리고 피해자 무덤까지 있다!!![8] 이 사람은 자신이 남로당 중요간부 출신이라고 스스로 자칭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해방정국 시기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 기자이자 남로당 하급간부 출신이다. 남로당 어떤 간부 명단을 봐도 안나오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과거 중앙정보부에 포섭돼있다. 이 사람이 오늘날 극우 반공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제주 4.3은 북한 공산당 주도 폭동 지령에 의한것'이라는 이른바 '남로당 중앙당 폭동 지령설' 최초 주장자.-1973년 중앙일보를 통해 해방정국 시기 조선공산당과 남로당에 대해서 많은 글을 연재,기고했었다. 훗날 6월항쟁 이후 제주도 지역신문사인 제민일보에서 '남로당 중앙당 폭동 지령설'에 대한 사실여부를 밝히기 위해 이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일본 도쿄에 가서 취재, 인터뷰해본 결과 박갑동 자신도 '나도 그 근거는 모른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인터뷰에 따르면, '중앙 지령설은 내 글이 아니고, 1973년 중앙일보에 연재할때 정보기관에서 고쳐서 쓴 것'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이 사람이 쓴 회고록과 주장들은 상당부분 잘못된 정보들이 많으므로 걸러들을 필요성이 있다.[9] 약칭 서청. 북한 평안도 지역 지주 계층 출신으로 북한의 토지개혁 때 재산을 몰수당하고 빈손으로 월남한 사람들, 공산주의가 아닌 민족주의자, 자유주의자, 개신교인 등 다른 이념을 가지고 있다가 소련군정에게 탄압 받은 사람들이 함께 조직한 단체다. 따라서 사회주의에 대해 엄청난 피해의식과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들은 빨갱이는 모조리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분단 초기 이들은 일종의 의용군 비슷한 조직으로 경찰과 함께 좌익 탄압이나 빨치산 진압 등에 투입되었으며, 대한민국의 정부 체계가 잡혀감에 따라 차츰 군대나 경찰 같은 공식 조직으로 흡수되었다.[10] 새로 부임한 유해진 지사는 대놓고 "일반 대중을 극좌단체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극우단체의 힘을 빌렸다"고 발언했다. 제주도를 감찰하던 미군정 넬슨 중령은 "유 지사가 무모하고 독재적인 방법으로 정치이념을 통제하려는 헛된 시도를 해왔고... 경찰은 수없이 테러활동을 했다"며 사태가 봉기로 치닫을 가능성을 경고했다.[11] 이 때 파견된 경찰 중에서 경무부(현 대한민국 경찰청) 작전과장 최치환 총경이 작전참모로 파견되었다. 참고로 최치환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최고위원의 장인이다.[12] 얼마나 잔혹했냐면 같은 우익들 마저도 그들을 외면했다. 실제로 그들이 민간인이라 할 지언정 6.25 전쟁, 혹은 그 후에 일어난 것을 보면 전쟁범죄자와 다를바가 없다.[13] 제주도 주민들이 해안가에 몰려사는 이유로 흔히 해안가에 물이 존재해서 그렇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 중산간지대에 사는 사람들도 많았다. 더구나 중산간 일대에 나름의 반촌 성격의 집성촌이 많았었기에. 하지만 4.3사건을 겪으면서 죄다 초토화되었고 완전히 폐허가 된 채 지금껏 복구되지 못한 마을도 상당수이다.[14] 한국전쟁 개전 당시 1사단 제13연대장으로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 김익렬 대령(4.3 당시 중령)으로, 이후 한국전쟁 내내 용감히 싸워 기량을 인정받은 우수한 장교였다. 이후 이승만 정권 내내 진급은 했으되 한직을 주로 거치다가 박정희 집권 이후 고위직을 역임했으며, 1969년 중장으로 예편했다. 그가 남긴 4.3 관련 회고록은 사후에 출판되었다.[15] 일부 우익단체에서는 그의 4.3 사건 당시 행적과 그의 회고록을 근거로 김익렬을 좌익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말이 안 되는게, 한국전쟁 때 공산군을 상대로 혁혁한 전과를 올린 장교이며 박정희의 군사혁명에 가담한 그가 좌익이라는 건 어불성설이며, 그를 내치지 않고 어쨌든 자리를 준 이승만과 고위직에 앉힌 박정희 역시 좌익과 한통속이라는 논리가 된다. 이 단체들이 지지하는 이승만과 박정희가 좌익이 된다는 건 그들 스스로 우익단체가 아니라 좌익단체가 되는 셈이다. 자가당착에 빠지는 경우.[16] 이 사건도 여명의 눈동자에 묘사된다. 물론 여러가지 사정 때문에 가명으로 나오기는 하지만.[17] 훗날 이승만 반대파의 총수가 되는 그 사람 맞다.[18] 기록상에는 자체 조사를 했을 때 '신고만' 들어온 게 1만5천명이라고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신고만으로 파악한 게 1만5천명이다. 사실 일가족 전체가 몰살당하거나 학살도중 육지로 도피, 살아남았어도 트라우마로 인해 신고조차 하지 못한 경우도 허다하다. 현재까지 유해 발굴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며, 그에따라 희생자 수는 아직까지도 늘어나고 있다. 또한 유해발굴이 되었어도 신고한 사람 대부분이 70~80대를 넘긴 고령이거나 이미 사망한 경우도 허다해서 유해가 발굴되었어도 신원이 파악되지 못해 피해자로 등록되지 못한 경우도 있다.[19] 트위터를 중심으로 광주에는 5월에, 제주에는 4월에 향냄새가 진동한다는 글이 나돈 바 있는데, 이는 너무 단순하고 도식적인 비교이다. 4.3사건은 5.18과 비교했을 때 인구가 적은 섬지역에서 만 단위 이상의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제주섬에 인구학적인 영향(최대 1/8 추산 학살을 피한 주민의 일본으로 이주 등)을 줄 정도였지만, 5.18의 경우는 당시 80만 인구에 피해자 규모가 수백~수천명이므로 상당한 규모 및 비율의 차이가 있다. 사건의 성격도 꽤 다르며, 무엇보다도 4.3은 5.18과는 달리 4월 3일 전후가 중심이 된 사건이 아니다. 4.3이란 명명에는 이 헬게이트의 원인을 무장대의 봉기에 귀인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고, 실제 사건의 단초는 위에서도 서술하였듯이 3.1절 발포사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4.3 사건에서 가장 중대하게 다루어져야 할 부분인 민간인 학살은 1948년 11월부터 본격 실시된 초토화작전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아마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의 일부분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이 어느 하루에 동네 집집마다 다같이 제사를 지내는 것을 의아해하는 대목이 있는데, 사실 이 소설의 소재가 된 북촌리 학살은 1949년 1월에 발생하였다. 즉 토벌대가 전도를 돌아다니며 순차적으로 학살을 자행하였기 때문에 각 촌락별로 학살이 발생한 날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지, 제주도 전체가 같은 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니다.[20] 게다가 그냥 죽인 것도 아니다. 민보단이라고 제주 사람들을 동원해 일부러 자신들의 손을 더럽히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들이 직접 죽이지 않고 민보단을 이용해 사람들을 죽창으로 찔러 죽였는가 하면, 살기 위해 한라산으로 피신한 사람들을 '사냥'하지 않나(이들은 귀순자라고 불렸으며, 분위기가 좀 풀어졌을 때 항복해 격리 수용되었다가 하필 6.25 전쟁의 발발로 다시 갇혀 대부분 살해당했다), 하여간 이들의 잔인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당시 폐허가 된 마을에서는 땅을 조금만 파도 시체가 마치 젓갈(멸치젓.제주 말로 '멜젯') 담근 것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또 제주 폭포 상당수는 서청이나 군대의 '사격장'이었다는 증언이 있다. 과녁은 '민간인'. 심지어 일본군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았던 '영아 살해' 마저 있었다고 한다.[21] 이로 인해 6.25 당시 제주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그 악명높은 해병대에 다수 지원했다. 슬픈 역사의 자화상.[22] 그 때 유족 대표들은 물론이고 당시 제주도지사까지도 울음을 터뜨렸을 정도였다.[23]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2010년 6.2 지방선거에서는 민주당 계열 성향의 무소속 후보(우근민)가 당선되었고 2008년 18대 총선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도 민주당 후보가 모든 선거구를 싹쓸이해갔으며,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도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3개 선거구에서 모두 당선되었다. 다만,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승리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박 후보가 4.3 해결과 국가추도일 지정을 공약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전에는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여당의원들이 강세를 보였다. 현오봉 전 의원의경우 공화당의장을 역임했고 최근 뇌물수수로 기소된 현경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부의장도 민주정의당- 민주자유당에서 6선을 거두었으며, 민정당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친박계 측근으로 비서실장에 유력시되었다. 하지만 이는 4.3의 흔적으로 인해 제주도 출신 중 중앙정계에 영향력있는 인물을 배출하고자한 도민들의 욕구가 반영된 점이 크다.[24] 다만 여기서 알아둬야 할점은, 4.3과 관련된 사람들 대부분이 이미 4.19혁명당시에 대거 축출당했다는 것이다. 에초에 4.3 사건은 이승만이 한 폭정에 반발해서 일어난 사건이며, 이후 박정희, 전두환과는 전혀 관계가 없진 않아도 상관관계를 찾기 힘들다. 따라서 제주도가 역대 대선에서 여당, 야당과 상관없이 표를 던질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있다.[25] 그것도 섬에서 말이다!!! 지금에서야 항해, 비행기술이 발달해 더이상 섬도 육지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지만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제주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배가 몇척 없을 정도로 제주도는 거의 단절된 섬 수준이였다. 한마디로 섬에서 사는 사람중에 몇사람만 거치면 4촌 아래 혈족일 수준으로 외부사람의 유입이 적었다.[26] 실제로 한국전쟁동안 거제도 탈환작전, 인천상륙작전 등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27] 2차 대전 당시 일본계 미국인들이 가장 용감하게 싸운 이유도 이 때문이다. "우린 쪽발이가 아니라 미국인이다!" 같은 이유로 이오시프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코사크와 유태인들이 스탈린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소련군에 입대하여 용맹히 싸웠고, 현대 러시아의 체첸인들도 보스토크 대대 등에 입대하여 싸우고 있다.[28] 하지만 한국전쟁기 제주도에서 해병대 초창기 기수들이 쏟아져 나왔고(당연히 생존해 있는 사람들은 보훈 대상자로 지원을 받는다.) 무엇보다 제주도내 예비군 훈련을 해병대에서 담당해왔기 때문에 현재 제주도내에서의 해병대 이미지는 좋다.[29] 또한 서북청년단이나 초반에 있었던 계엄군들에 의한 학살들이 후반기에 일어난 학살보다 더욱더 빈번해서 후반에 있었던 학살들이 크게 눈에 띄지 않은 이유도 있다.[30] 대표적으로 송악산 기슭의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일어난 학살 등이 있다. 현재 그 희생자들의 무덤이 백조일손지묘란 이름으로 사계리에 조성되어 있다.[31] 약 60만명이다.[32] 일례로 제주의 초등학교들에서는 '제주어 사투리 연극 대회'가 열린다. 실제 제주어 대본을 가지고 연극을 한다.[33] 출처 : 여기.[34] 뉴라이트계열의 정치학자 출신이다.[35] 이건 박근혜 대통령이 선거 때 내걸은 공약을 이행한 것이다. 공약도 안 보고 대통령을 뽑았다는 반증이나 마찬가지다.[36] 재향군인회 소속 단체이다(...) 답이없다- 단체이지만 듣보잡의 인지도였는데 최근 뉴스타파에서 제주4.3사건을 왜곡하고있다는 보도로 알려지게 됬다. 회원들은 재향군인회 소속 회원이 주요 구성원들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영관장교연합회라면서 위관급장교들까지 짬뽕으로 뒤섞여있다. 그리고 약장과 훈장을 전투복에다가 주렁주렁 붙이고다니는 사람들까지 보이는데 과연(...) 이들은 군의 흑역사를 감추고 싶어하는 국방부에게 아주 호의적인 시선을 받고 있다. 현재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난뒤 친박집회에 이들이 참여하고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는데 자세한 추가바람[37] 국정 국사 교과서와 7차 교육과정 내 한국사 교과서를 비교했을 때 국정 국사 교과서에선 4.3 사건이 날개로 아주 짧게 나온데다가 반공논리를 내세운 서술이 눈에 띈다. 이에 비해 7차 교육과정의 한국사 교과서에서 비상교과서의 예를 들자면, 한국사 교과서에선 서술도 좀 중립적으로 바뀌었고 탐구활동으로 관련 자료를 더 추가했다.[38] 십수년전 제민일보사에서 출간한 '4.3은 말한다' 같은 연구서만 해도 두꺼운 책이 6권이나 현재 절판되어 도서관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다.[39] 신임 제주도 도지사. 4.3 사건 이후 제주도 도지사에서 해임되었으며, 이후 6.25 전쟁때 귀향 도중 북한군에게 붙잡혀 전주형무소에서 총살당했다. #[40] 오타가 아니다. '삼촌'이 아니라 '삼 '이다. 제주 방언은 집계 사회의 흔적이 남아 성별 구별 없이 연하자를 '조캐(조카의 변형)', 연상자를 '삼춘(삼촌의 변형)'으로 부른다. 당시 젊은 여인이었던 작중의 순이 삼촌이 4.3 사건을 겪은 일과 그 후를 액자 형식으로 이야기해나가는 단편 소설이다. 여담이지만 한 번 수능에 나왔다 '삼춘'이라는 말 때문에 시험치는 학생들 대부분이 남자로 착각해 문제 풀이에 난항을 겪은 적이 있었다. 현기영은 제주 출신 작가로 4.3사건 당시 초등학생이었으며 어릴적 살던 노형리(1990년대 신제주 개발로 노형동이 됨)가 불타는 등 끔찍한 일들을 겪은 바가 있다. 이러한 경험들은 어린 시절을 다룬 자전적 소설인 '지상에 숟가락 하나'에서 잘 드러난다.[41] 부끄러워 말도 못할 고문이라든가 경찰에 의한 총살이라든가, 결국 여주인공을 국군 장교인 남자 주인공의 보증으로 살려주지만 한국전 발발후 남자 주인공이 제주도에 왔을때 여주인공은 "돌 매달고 배타고 나가서 빈배만 돌아왔다는 이야기만 남는다.[42] 말그대로 한국전쟁 만화 초.중.고등학교 도서관에 있는경우가 많다.[43] 예를들면 우리나라 초등학생의 70~60%가 한국전쟁은 남한이 먼저 침략한거라고 주장한다고(...) 그려놓은거 부터시작해서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북한과 맞서기 싫어하는 겁쟁이들이라는 내용, 초등학교 교사들이 극좌여서 미군철수, 주체통일을 하게 만든다는둥(...) 똘이장군[44] 1945년 당시 조선 전체 인구 3,000만 명 중 1%인 30만 명 정도가 제주도민인데, 재일 한국인의 20%가 제주도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