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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투표는 선거에 포함되지 않으나, 편의상 기술함.
** 2014년 7월 24일 헌법재판소가 국민투표법 제14조 제1항 내용 중 일부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으나, 국회에서 추가적인 법률 개정이 이뤄지지 않아 2016년 1월 1일자로 효력을 상실하여 시행 불가함.
대한민국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투표율
선거 결과
정당
지역구
전국구
총합
비율
87석
61석
148석
53.6%
50석
17석
67석
24.3%
26석
9석
35석
12.7%
15석
5석
20석
7.2%
1석
0석
1석
0.4%
1석
0석
1석
0.4%
4석
-
4석
1.4%

1. 개요2. 배경3. 과정4. 결과5. 지역별 결과

1. 개요[편집]

1985년 2월 12일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로 투표율은 84.6%를 기록했다. 이 수치는 역대 총선 가운데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 최고치를 기록한 것으로, 현재도 깨지 못하고 있으며 이후에 치러진 선거 가운데서 유일하게 1987년 치러진 13대 대선만이 넘어섰다.

한편으로는 한국 선거 역사상 최대의 반전 드라마이기도 한데, 훗날 치러진 선거중에도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등 예상을 뒤엎는 결과가 나온 사례가 종종 있었지만 무소불위의 독재 정권을 국민의 힘으로 당혹스럽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12대 총선의 비중이나 여파는 더 극적이었다.

2. 배경[편집]

의원 정수는 276명으로 11대 총선과 같았다. 선거제도도 중선거구제였다. 184명의 지역구, 92명이 전국구였다. 다수당에 유리한 선거법은 변화 없이 유지되어 지역구 의석에서 1위를 한 정당이 전국구 의석의 2/3를 독식했다.

3. 과정[편집]

당초 상당수 정치인들이 대법원 판결에 의해 규제가 풀리자 김영삼계김대중계 등 구 신민당 출신 인사[1]들은 신한민주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어떻게든 신한민주당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꼼수를 부렸는데[2] 애초에 신민당이라는 이름으로 창당되려던 것을 거부한 것도 모자라, 약칭조차 신민당을 쓰지 못하게 딴지를 걸었고[3][4] 무엇보다도 관행상 3~4월에 치러지던 국회의원 선거를 2월 12일로 앞당겼다.[5]

이로 인해 신한민주당은 사실상 창당한지 불과 보름도 채 안되어 선거를 맞이하는 어려움에 직면했으며, 관제 야당인 민주한국당신상우 사무총장을 비롯한 몇몇 주요 인사들은 정권의 협박으로 인해 신한민주당 합류를 못하는 등의 정치 공작도 있었다. 신상우의 경우 안기부 서울분실장 방준필이 불러서 나갔더니만, "신한민주당에 입당하면 구속시켜 버리겠다.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공권력은 아주 많고, 당신의 사돈에 팔촌까지 죄는 만들면 된다."는 말로 탈당을 못하게 했다고. 게다가 당시의 선거 제도는 지역구당 2명을 뽑는 중선거구제인데다, 지역구 1당이 전국구 의석의 2/3을 독식하는 것이라서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과반은 기정사실이었다. 특히 당시는 아직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이 밝혀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광주를 제외한 호남 지역에서도 민주정의당이 의석을 확보하는데 별 문제가 없었다.[6]

하지만 전두환 정권의 폭압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낀 대도시 유권자를 중심으로 신한민주당의 지지세는 올라가기 시작했으며, 이들이 결정적으로 정권에 마음을 돌린 건은 다름 아닌 언론의 편파 보도였다. 총선을 앞두고 양대 방송사에서 아예 대놓고 땡전뉴스를 비롯하여 정권에 유리한 편파보도도 모자라 전비어천가 드라마를 편성했다. KBS와 권력(강동순 저) 참조. 결국 KBS 사장 이원홍MBC 사장 이웅희는 신한민주당 김재광 선거대책본부장에 의해 선거법 위반으로 피소되었다.

이런 식의 편파 보도는 도리어 역효과를 불러 일으켰고 판세가 차츰 신민당에게 유리해지는데, 특히 대학생들의 신민당 유세참여 및 대도시 지역 합동연설회가 큰 역할을 해냈다고 평가된다. 1980년 5월 17일 이후로 5년 간 언로가 꽉 막혀있다보니[7] 대도시에서는 선명 야당을 내건 신민당의 합동연설회에 국민들이 큰 관심을 가졌으며, 특히 일부 대학생들은 여당인 민정당과 당시 제1야당인 민한당 연설회장에 야유를 보내서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용자짓을 감행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신민당 연설회를 통해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이나[8]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 등 전두환 정권 하에서 벌어진 각종 사건들이 연설회를 통해 간접적이나마 폭로되면서 이목을 집중시켜 놓았다.[9] 그리고 연설회 현장에 있었던 유권자들의 구전을 통해 대도시 지역 주민들에게도 이런 내용들이 전파되며 신민당에 대한 지지세가 알게 모르게 확산된 것.

거기에 김영삼과 함께 재야의 거목인 김대중이 선거 4일 전인 2월 8일 오전에 전격적으로 미국에서 귀국하면서[10] 야당을 향하는 표심이 결집하기 시작한다.

4. 결과[편집]

선거 결과는 그야말로 파란이었다. 신민당은 전국 합산 29.3%의 지지율로 지역구 50석 + 전국구 17석을 얻어 총 67석으로 제1야당으로 등극하는건 물론 서울 및 부산, 대구, 인천 등 대도시 지역에서 민정당과 호각을 다투는 성과를 올렸다. 특히 서울에서 민정당은 꼴랑 27.3%에 그친 반면 신민당은 43.9%의 득표율을 올렸는데, 중선거구제라서 호각이었지 만약 소선거구제로 치러졌으면 대도시 지역의 의석수를 대거 신민당이 싹쓸이했을 수도 있었다.[11]

뿐만 아니라 전국구 또한 신민당과 민한당의 득표율 총합인 49%에 맞춰 고르게 배분했다면 신민+민한 120석 VS 민정 119석으로 사상 초유의 여소야대 정국이 나올 수도 있었고, 심지어 다음 선거인 13대 총선전국구 배분 방식으로 배분해도[12] 민정 133 vs 야당+무소속 143으로 여소야대가 나온다. 이러니 당시 선거 결과를 들은 전두환 대통령은 탁자를 툭툭 치며 허탈한 반응을 보이다가, 국회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다는 노신영 안기부장의 보고에 "전국구가 있으니 그 정도 얻은거잖소!"라면서 역정을 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신민당 돌풍에는 앞서 언급했듯이 국민들의 정권 심판론에다가 김대중이 선거 나흘 전 미국 망명생활을 끝내고 과감한 귀국을 한 것 또한 한몫했다.[13] 왜냐하면 약 2년 전인 1983년필리핀의 야당 인사 베니그노 아키노가 미국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다가 마닐라 공항에서 암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김대중 또한 같은 상황을 맞이할 것을 우려한 미국의 정치인, 언론인 등이 비행기에서부터 그를 에워싸 김포국제공항 입국장까지 동행했으며 이 모습은 국민들에게 아직 민주투사들의 활동은 죽지 않았으며 미국이 지지한다는 것을 내보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심지어 이 때 김영삼이 직접 김포공항까지 김대중을 마중나가려고 했었으나, 전두환 정권이 사전에 상도동 자택을 에워싸 결국 실패했다. 참고로 이 때 입국장에는 김대중을 동교동 자택으로 데려가기 위해 안기부 요원 및 경찰들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미국 인사들에게 무력을 휘두르면서까지 김대중을 끌고 갔다. 이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당시 동행했던 전직 외교관인 로버트 화이츠 왈, "한국 경찰들이 우리한테 폭력을 휘두르는데, 3년 뒤에 미국인들이 안심하고 서울에 올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한편, 민주정의당은 예상보다 적은 의석을 얻었으나 여당에게 지극히 유리하게 짜여진 선거제도 탓에 과반은 유지했다. 하지만 관제야당인 민주한국당한국국민당은 제도상으로도 불리한 마당에 신한민주당에 밀리면서 제대로 유탄을 맞아 의석수가 크게 줄어들어 참패를 면하지 못했고 이는 결국 민주정의당에게 불리하게 작용되었다. 심지어 민주한국당은 관제야당이었지만 은근슬쩍 신한민주당과 공조하는 모양새까지 보였으니..

앞서 말했듯 선거 결과에 격분한 전두환은, 총선 판세 분석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이었던 노신영을 해임했고[14], 민주한국당 의원 상당수는 이후 신한민주당에 입당하면서 신민당은 103석의 거대야당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는 KBS 시청료 거부운동과 인천 5.3 운동을 비롯한 민주화운동의 큰 원동력이 되었다.

실제 신민당은 이후 내각제 개헌(이민우 구상) 파문으로 양김계에 속한 대다수 의원들이 통일민주당으로 옮겨졌으나, 그럼에도 어찌됐든 1987년 6월 항쟁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한편, 선거 결과 분풀이 격으로, 전두환에게 여러모로 밉보였던 재벌 국제그룹이 해체된 거 아니냐는 웃지 못할 후문도 있다.(...) 당시 국제그룹이 부산을 기반으로 하는 대기업이니만큼 양정모 회장이 부산에서 여당의 승리를 위해 영향력을 행사해달라는게 전두환 대통령의 의중이었는데, 부산의 6개 선거구 총 12석 중에 여당 의석수는 고작 3석밖에 안 나오는 바람에...[15] 나머지는 신민 6, 민한 2, 국민 1. 심지어 3개 선거구에서는 민정당이 3위로 낙선했다.

국제그룹뿐만 아니라 똑같이 전두환의 미움을 받아온 김준엽 고려대 총장도 경질을 피할 수 없었는데, 총선 다음날 손제석 청와대 교문수석과 권이혁 문교부장관은 고려대에 감사를 실시해 전년도 민정당사 점거농성 학생들의 처벌에 소극적인 김 총장을 사퇴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에 김 총장이 압력을 거부하자, 개각 후 새로 부임한 신극범 청와대 교문수석과 손제석 문교부장관은 다시 고려대 감사를 실시해 교직원 자녀 특례입학을 문제삼아 3월 8일부로 김준엽 총장을 쫓아냈다. 이에 대해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자 정부는 김 총장에 학교 출입금지 및 외유를 강요했다.

서울에서 민정당은 고작 27% 득표에 그쳤지만, 민한당 후보들이 신민당 돌풍의 유탄을 맞아 3위로 밀리는 바람에 어부지리격으로 13석을 차지할 수 있었는데 반해 부산에서는 신민 - 민한 양당이 아빠는 신한민주당, 엄마는 민주한국당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은근슬쩍 공조를 했고, 그 결과 3개 선거구에서 민정당을 3위로 끌어내린 것. 물론 민한당으로 표가 분산되면서 부산 지역 신민당 득표율이 서울에서보다 다소 낮은 36%대에 머물렀지만 그만큼 민정당의 의석수를 빼앗는 효과가 있었으며 만약에 타 지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선거전략을 썼으면 민정당이 과반은 고사하고 원내 1당조차 못 오를 수도 있었다.[16][17]



이 영상은 당시 총선 당일 MBC 뉴스데스크이다. 당시 선거 개표방송 특집 뉴스에서도 첫 뉴스가 전두환 대통령 내외가 투표소에서 한 표를 행사했다는 소식인 것을 보면 선거 개표방송에서도 땡전뉴스를 엿볼 수 있다.

5. 지역별 결과[18][편집]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지역
합계
서울
13
1
0
14
0
0
0
28
인천
2
0
0
2
0
0
0
4
경기
10
3
3
4
0
0
0
20
강원
6
1
4
0
0
0
1
12
충남
8
4
0
4
0
0
0
16
충북
4
1
1
2
0
0
0
8
전남
11
5
0
5
1
0
0
22
전북
7
1
3
2
0
1
0
14
부산
3
2
1
6
0
0
0
12
경남
10
4
1
5
0
0
0
20
대구
2
1
1
2
0
0
0
6
경북
10
3
1
4
0
0
2
20
제주
1
0
0
0
0
0
1
2
지역구
87
26
15
50
1
1
4
184
전국구
61(35.2%)
9(19.7%)
5(9.2%)
17(29.3%)
0(1.4%)
0(0.6%)
0
92
합계
148
35
20
67
1
1
4
276
전국구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인
7,040,477
35.2%
61
3,931,300
19.7%
9
1,828,744
9.2%
5
5,843,827
29.3%
17
288,863
1.4%
0
112,654
0.6%
0
75,634
0.4%
0
17,257
0.09%
0
185,859
0.9%
0
650,028
3.2%
-
총합
19,974,477
100.0%
92

[1] 당시 양김은 아직 정치 규제 대상자였기 때문에 공동의장을 맡고 있던 민추협 내 인사들을 신당에 대거 합류시켰다.[2] 당시 선거 제도상 민주정의당이 과반 의석을 얻는 건 기정 사실이었다지만, 선명성을 강조하는 신한민주당이 제1 야당에 오를 경우에는 사사건건 정부와 여당을 걸고 넘어질게 뻔했기 때문에 청와대 입장에서 신한민주당은 껄끄러운 상대였다.[3] 실제로 선거 당일 MBC개표방송에서는 신한민주당의 약칭을 신민이 아닌 신한을 사용했고, 호칭도 신민당 대신 신한당, 내지는 신한민주당 풀 네임을 많이 사용했다.[4] 하지만 민한당은 물론이거니와 여당부터가 민정당이라는 약칭을 쓰고 있었던지라 결국에는 흐지부지되었다.[5] 참고로 그 이전까지 음력 설날이 휴일이 아니었지만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음력설(1985년 2월 20일)을 하루짜리 공휴일로 지정한다.[6] 실제로 이 선거의 전남 지역 개표결과를 보면 광주를 제외하곤 전부 민주정의당이 1위를 차지했다. 웃긴건 대구에선 신민당 득표율이 민정당을 앞섰다.[7]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는 정권 초기인데다가 여당관제 야당이 서로 나눠먹는 식이었기에 국민의 뜻이 반영되지 않은 선거이므로 제외. 물론 이런 식이면 사실 민주화 이전 선거는 죄다 관권선거의 영향이 강했기에 국민의 뜻이 상당히 왜곡된 선거긴 하다만. 그런데도 득표율 면에서 여당이 밀린건 당시 민심을 알 수 있는 지표기도 하고.[8] 물론 5.18 당시 광주를 취재한 외신 기사를 인용해서 들려주는 방식이었다. 대놓고 주장했다가는 정부가 가만두지 않았을테니... 사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광주 민주화운동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는 일이었다.[9] 물론 중앙언론에서는 이러한 내용이 일절 공개되지 않았다. 알다시피 당시엔 정부가 대놓고 언론통제를 걸었기 때문.[10] 물론 당시 내란죄 혐의로 20년형을 선고 받았다가 형집행정지 상태였기에 귀국 직후 김포공항에서 동교동 자택으로 직행해야 했다.[11] 아무리 중선거구제라도 저정도 득표율이면 의석차가 더 벌어질 법도 한데, 민한당 후보들이 신민당 돌풍의 유탄을 맞아 3위로 밀리는 바람에 여당이 거의 어부지리격으로 13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12] 13대 총선에서는 지역구 1위 정당이 전국구 의석의 절반을 얻는 방식으로 조정되었다.[13] 다만 김대중 본인은 신생 야당인 신한민주당보다는 비록 관제 야당이지만 조직 자체는 어느 정도 굳건한 민주한국당이 제1야당으로 유력하다 생각하여 민주한국당에 좀 더 관심을 가졌다. 대표적으로 김대중과 막역했던 정일형-이태영 부부의 아들인 정대철이 종로.중구에 민한당 후보로 출마했는데 3위로 낙선.(...) 그만큼 국민들의 표심이 정치판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김대중의 예상조차 빗나가게 한 셈이었다.[14] 다만 노신영을 신임하던 전두환이었던지라, 아예 쫓아내진 않고 국무총리로 발탁하는 식으로 물러나게 했다. 사실상 경질의 탈을 쓴 영전인 셈. 원랜 전 직책인 외무부 장관으로 보내려고 했으나 부총리급인 안기부 장관과 격이 안 맞았다고 한다.[15] 사실 양정모 회장은 일해재단 건부터 시작해서, 기업사정도 좋지 않은데 정치자금으로 사실상 삥을 뜯는 군부정권에 염증을 내고 있었다고 한다.[16] 만약 전국적으로 신민-민한 양당이 암묵적인 공조를 해서 민정당을 3위로 밀어낸 곳이 더 많은 동시에 신민당이 그 자리를 차지했더라면 현실화되었을 것이다. 실제 지역구 의석수가 민정 87, 신민 50석으로 37석 차이인데, 민정당이 3위로 떨어지고 신민당이 차지한 지역이 딱 19곳만 더 있었어도 민정 68, 신민 69로 뒤집혀서 신민당이 전국구 총 의석수의 2/3인 61석을 독식하여 민정 85±α, 신민 130이 되어버린다. 이러면 민한당 하나만 신민당과 공조해도 야권이 160±α로 거대해졌을 테고 그야말로 전두환 정권에 강력히 맞설 수 있는 원동력을 확보했을 것이다. 물론 이랬다면 당시 막가파 군부정권이 의회해산 등 막장 행보를 보였을 수도 있지만, 이럴 경우 6월 항쟁은 2년 먼저 재현되었을지도 모른다.[17] 의회 해산 관련해서, 5공화국에서는 대통령제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에게 의회 해산권이 있었다. 삼권분립 저리 가라 물론 대통령에게 의회 해산권이 없음에도 의회를 해산하는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더 막장 박정희도 있긴 하다만. 당시 군부정권이 어디서 배웠겠는가?[18]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역대 선거 결과에는 충북과 경남의 신한민주당 당선인 2명을 신민주당으로 잘못 적어 신한민주당 48, 신민주당 3으로 적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