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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행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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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투표는 선거에 포함되지 않으나, 편의상 기술함.
** 2014년 7월 24일 헌법재판소가 국민투표법 제14조 제1항 내용 중 일부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으나, 국회에서 추가적인 법률 개정이 이뤄지지 않아 2016년 1월 1일자로 효력을 상실하여 시행 불가함.
대한민국 제1회 참의원의원 선거
1차 헌법 개정
참의원 설립
1960년 7월 29일
1회 참선
5차 헌법 개정
참의원 폐지
투표율
84.3%
선거 결과
정당
지역구
총합
비율
31석
31석
53.4%
4석
4석
6.9%
1석
1석
1.7%
1석
1석
1.7%
1석
1석
1.7%
20석
20석
34.5%

대한민국 제5대 민의원의원 선거
투표율
선거 결과
정당
지역구
총합
비율
175석
175석
75.1%
4석
4석
1.7%
2석
2석
0.9%
1석
1석
0.4%
1석
1석
0.4%
1석
1석
0.4%
49석
49석
21.0%

1. 개요2. 배경3. 결과4. 선거 이후: 국무총리 후보자 임명안
4.1. 1차 지명 : 김도연 국무총리 후보자 임명안4.2. 2차 지명 : 장면 국무총리 후보자 임명안

1. 개요[편집]

1960년 7월 29일 동시에 치러진 민의원의원 선거와 참의원의원 선거로 투표율은 84.3%를 기록했다.

발췌 개헌이래로 헌법에만 명시되고 시행되지 않던 양원제를 실시하여 하원민의원의원상원참의원의원을 각각 따로 선출했다.

민의원의원은 기존과 같은 소선거구제, 참의원의원은 대선거구제로 선거 방식 또한 달랐다. 참의원의원의 대선거구는 서울특별시와 도(道) 등 광역단체를 선거구로 하였다. 민의원의원의 임기는 4년, 참의원의원은 6년(3년마다 1/2를 교체하는 선거 실시). 의원정수는 민의원의원 233명, 참의원의원 58명.

2. 배경[편집]

4.19 혁명 이후 치러진 첫 선거다.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회에 양원제가 도입되었고, 참의원의원민의원의원을 뽑았다. 민의원의원에는 1,563명이 출마하여 6.7대 1, 참의원의원에는 201명으로 3.5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처음으로 참의원의원 선거가 치러졌는데 투표 방식이 독특했다. 투표용지에 1명의 후보에게만 투표하는 단기명 투표가 아닌 당선 정원의 2분의 1까지 투표할 수 있는 제한적 연기명 투표 방식을 첫 도입하였다. A라는 선거구에서 4명의 참의원의원을 선출하도록 되어있다면, 유권자는 2명의 후보한테까지 투표할 수 있다는 말. 다만, 민의원의원 선거는 단기명 투표 방식을 유지했다.

민주당은 공천을 두고 신파와 구파 간 갈등이 치열했다. 어느 지역구에서 신파가 공천되면 낙천된 구파 인사가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등 공천 불복도 허다했다. 1959년 전당대회의 결과로 당시 당권은 신파가 쥐고 있었으므로, 선거 내내 구파는 신파가 편파 공천을 한다고 주장하고 총선이 끝나면 분당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는 실제로 총선이 끝나고 몇개월 안가 구파가 민주당을 탈당, 신민당을 창당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3.15 부정선거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 자유당 후보들은 당적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경우가 많았다.

선거권 연령은 만 20세로 낮아졌는데 이는 2005년 선거 연령을 개정하기 전까지 40여 년간 유지되었다.

3. 결과[편집]

정당 득표율
정당
득표수
득표율
3,786,304
41.7%
541,021
6.0%
249,960
2.9%
57,965
0.6%
17,293
0.2%
26,649
0.3%
4,249,180
46.8%
총합
9,077,835
100.0%
제1회 참의원의원 [1] 선거 결과
제1당
31석
제2당
4석
제3당
1석
제4당
1석
제5당
1석
-
20석
제5대 민의원의원 [2] 선거 결과
제1당
175석
제2당
4석
제3당
2석
제4당
1석[3]
제5당
1석
제6당
1석
-
49석

이른바 혁명 총선이라 불린 해당 총선은 4.19 혁명의 여파로 자유당 몰락과 민주당 압승이란 결과를 가져온다. 압승도 보통 압승이 아니었는데, 헌정 역사상 유일한 여극대야소 체제가 이때 성립된다.[4] 집권당인 민주당의 민의원 의석 점유율이 4분의 3 즉 75% 이상을 넘었다. 심지어 무소속 의원 중에서도 상당수는 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한 민주당계 인사들이었다. 80% 넘길 기세 한국 헌정사에서 집권여당 의석수가 이 정도로 비대한 경우는 73.7%의 비율을 기록한 7대 총선과 함께 유이하며,[5] 사실 7대는 불법선거가 판을 친 선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6]흠좀무한 결과기도 하다. 철권통치가 이뤄지고 2인 중선거구제 및 대통령의 유신정우회 의원 임명, 전국구 의석의 2/3 1당 배정 등의 게리맨더링이 판쳤던 4공화국과 5공화국 시절에도 집권 여당이 전체 국회 의석의 2/3를 넘은 사례는 한 차례도 없었다.[7]

또 이전의 1대 총선부터 4대 총선까지 원내1당의 의석수가 1960년 총선 당시의 민주당 의석수를 넘지 못했음은 물론이고, 그 이후의 6대 총선부터 20대 총선까지도 원내 1당 의석수가 1960년 총선 당시의 민주당 의석수를 넘은 사례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6대 총선부터 10대 총선까지는 5대 총선 당시의 의원 정수를 넘지 못했지만 11대 총선부터는 5대 총선 당시보다 전체 의석수가 많아졌음에도 넘지 못하다가, 2020년 21대 총선에 이르러서야 더불어민주당의 180석으로 기록이 겨우 갱신되었다.[8] 사실 이마저도 전체 의석수가 많아져서 가능했지 비율로 따지면 21대 총선은 60%로, 75.1%를 차지한 5대 총선을 앞서진 못했다. 물론 87년 민주화 이후 기준으론 최대긴 하지만.

한편, 혁신계로 민주당과 양당제 시대를 열겠다고 공언하던 사회대중당은 민의원 선거에서 6%대 득표율을 기록, 의석수는 4석밖에 못건지는 충격의 참패를 당하고 만다. 이는 4.19 혁명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당시 한국 사회에서 사회주의 정당은 유럽식 사민주의조차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보여준 방증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선거는 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났지만, 이들의 리즈 시절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애초에 민주당 구파와 신파는 자유당 독재를 견제하기 위해 이합집산이 이뤄진 케이스로, 자유당 정권이 붕괴하자 내부 계파 갈등이 심화되었기 때문. 신파는 자신들이 당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당을 유지하고 싶어했지만, 구파는 당권도 굴러온 돌인 신파에 내주면서[9] 당을 유지할 생각이 점점 없어졌고, 이는 총선 공천 과정과 국무총리 선출 과정에서 신파에 계속 밀리자 더 굳어지게 된다. 그렇게 1960년 말 민주당 구파는 거대여당만 존재해선 이 나라 민주주의에 도움이 안된다며 일당독재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탈당한 후 신민당이라는 정당을 따로 창당, 보수 양당제를 구성하게 된다.

4. 선거 이후: 국무총리 후보자 임명안[편집]

제69조

제1항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지명하여 민의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단, 대통령이 민의원에서 동의를 얻지 못한 날로부터 5일 이내에 다시 지명하지 아니하거나 2차에 걸쳐 민의원이 대통령의 지명에 동의를 하지 아니한 때에는 국무총리는 민의원에서 이를 선거한다.

제2항 전항의 동의나 선거에는 민의원의원재적 과반수의 투표를 얻어야 한다.

제3항 대통령이 국무총리를 지명한 때에는 민의원은 그 지명을 받은 때로부터 24시간이후 48시간이내에 동의에 대한 표결을 하여야 하며 제1항단서에 의하여 국무총리를 선거할 때에는 그 사유가 발생한 날로부터 5일이내에 선거를 하여야 한다.

제4항 대통령은 민의원의원총선거후 처음으로 민의원이 집회한 날로부터 5일이내에 국무총리를 지명하여야 한다.

(후략)

대한민국 헌법 제4호 중 발췌

제2공화국의 헌법에 따르면 행정부의 구성자인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지명하되 민의원 재적 과반의 동의을 받도록 되어 있다. 또한 만일 대통령이 지명한 후보자가 민의원의 동의를 받지 못 할 시에는 5일 내로 대통령이 2차 후보자를 지명해 새로 인준받게 할 수 있었고 5일 내로 새 후보자를 대통령이 지명하지 않거나 2차 투표에서도 후보자가 낙마하면 민의원에서 국무총리를 선출하게 되기에 윤보선 대통령은 국무총리 후보자를 지명하여 민의원의 동의를 받도록 했다.

4.1. 1차 지명 : 김도연 국무총리 후보자 임명안[편집]

김도연 국무총리 임명안 투표
찬성
기권
반대
111표
1표
112표
49.6%
0.4%
50.0%
부결

윤보선 대통령은 1960년 8월 16일 민주당 구파 정치인인 김도연 의원을 국무총리로 지명하여 국회의 동의를 받게 하였으나 대통령과 국무총리 두 자리 모두 다 구파가 독점한다는 민주당 신파의 반발로 부결되었다.

4.2. 2차 지명 : 장면 국무총리 후보자 임명안[편집]

장면 국무총리 임명안 투표
찬성
무효
반대
117표
1표
107표
52.0%
0.4%
47.6%
가결

신파의 반발로 인해 지명되었던 김도연 의원이 낙마하자, 윤보선 대통령은 1차 투표가 끝난지 3일만인 1960년 8월 19일 신파인 장면 의원을 지명하여 국회의 동의를 받도록 하였고, 장면 후보자는 과반의 동의를 받아 국무총리에 임명되어 내각을 이끌게 되었다.
[1] 양원제에서 상원에 해당한다. [2] 양원제에서 하원에 해당한다. [3] 의석수가 동일한 경우는 비례대표 득표율로 정당 순서를 구별하는데, 제5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에는 비례대표제가 없었으므로 이 문서에서는 정당득표율대로 순서를 구별하였다.기사 [4] 다만 후술되어있듯 몇개월 후 구파가 떨어져나가 양당제가 성립된다.[5] 1990년 3당 합당으로 집권여당의 의석비율이 70%를 넘었던 적이 한 차례 더 있었지만, 여긴 선거가 아닌 인위적인 정계 개편으로 인한 결과였다. 당연히 다음 총선에선 이전보다 대거 의석을 잃는다.[6] 당장 당시 민주공화당에서 부정선거라고 형식상으로나마 제명시킨 최소한의 의원만 빼도 70%선이 무너진다.[7] 제4, 5공화국 시절은 지금처럼 선진화법이 있는 것도 아니라, 상기된 꼼수 제도로 사실상 과반 확보는 이미 따논 상태에서 굳이 2/3를 넘어보겠다고 용쓸 필요가 없기도 했고, 애초에 중대선거구제라 한 정당이 2/3를 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긴 했다.[8] 참고로 비례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의 의석을 합산한 수치로, 더불어민주당 단독으로는 163석이었다.[9] 구파는 1955년 민주당 창당 이전부터 한국민주당, 민주국민당 등에서 활동한 인사들이고, 신파는 원래 야당에서 활동하지 않다가 민주당 창당 때 참여한 사람들이었다. 즉, 구파 입장에서는 자기들은 원래부터 야당을 해온 사람들이고, 신파는 뒤늦게 들어온 사람들인데 신파가 당의 주도권을 잡는 게 내키지 않았을테고, 반대로 신파 역시 당권 못잡았다고 당을 흔들어대는 구파가 곱게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