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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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반적인 의미2. 조선 임진왜란 때의 학자&의병장
2.1. 개요2.2. 생애2.3. 칠백의총2.4. 우저서원(牛渚書院)2.5. 관련 문서
3. 후한 말의 인물

1. 일반적인 의미[편집]

  • 造獻: 지어서 바침
  • 朝憲: 조정의 법규

2. 조선 임진왜란 때의 학자&의병장[편집]

2.1. 개요[편집]

조선 임진왜란기의 의병장. 본관은 배천(白川)[2]이며,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경기도 김포 출신이다.

2.2. 생애[편집]

원래는 문신이었다. 정여립과 대립으로 정치적으로는 정철과 함께 서인 측 강경파로 분류되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의병장, 행동하는 선비로 길이 남게 된다.

전쟁 전에는 이이를 열렬히 숭배하는 서인 강경파이자[3] 전투적인 성질로 유명했고 이이의 제자였다가 스승 이이를 비판하고 동인으로 전향한 정여립을 맹렬히 비난했다. 관직에 있다가 자기 의견이 안 받아들여진다 싶으면 물러나면서도 물러난 이후에도 계속 정치 현안에 대한 상소를 올리는 등 독한 면모를 지니고 있어서, 선조가 "조헌 이 자는 서인 놈들 중에서도 간귀이니 앞으로도 마천령을 넘게 될 것이다(=유배 보낼 것이다.)."라고 깔 정도였다. 임진왜란이 터지기 전에는 서인 내 주전론자의 중심이었고, 전쟁을 대비하자는 상소를 자주 올렸다.

또한 상소를 올릴 때 도끼를 함께 가져가거나 머리를 여러 번 땅에 치는 등 상소를 강경하게 올리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이렇듯 도끼를 들고 가서 상소를 올리는 일이 바로 '지부상소'(持斧上疏)', 이른 바 '도끼 상소'라 알려진 것이다. 요컨대, 상소를 가납하지 않을 것이라면 차라리 가져간 도끼로 자기를 찍어 죽이라는(!!) 것. 상소를 올릴 당시에는 허세로 보였을지도 모르겠지만, 후에 이 양반이 하는 일을 본다면 아마 이건 진담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흠좀무. 조헌의 이 지부상소는 후대에도 일부 양반, 유생들이 따라 행한 바가 있다. 대표적으로 숙종조의 윤지완, 고종조의 최익현 등이 있다. 이러한 지부상소를 두고는 호의적인 평을 하는 사람도 있었던 반면 무례한 일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존재했다. 가령 심노숭이라는 양반이 쓴 '자저실기'에서는 조헌 때문에 임금 앞에서 도끼 들고 함부로 설치는 못된 풍조가 생겨났다는 투로 지부상소를 비판하고 있다.

낙향한 후에도 지방관을 하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전쟁에 대비할 것을 촉구했지만 다들 무슨 마약하시길래 이런생각을 했어요라고 비웃었다. 오로지 연안성을 지키던 신각 장군만 그의 말을 옳게 여겨서 성을 정비했고, 이는 나중에 이정암연안성에서 일본군에 맞서 승리를 거두는 밑거름이 된다. 신각은 약탈하던 일본군 수십명을 임진강 어귀에서 섬멸하여 조선군 사상 첫 승리를 거두었지만 도원수 김명원이 사실관계를 파악 않고 장계를 올리는 중대한 실수를 하여 적전도주 죄목으로 목이 잘리는 어처구니없는 운명을 맞이한다.

각설하고 그가 우려했던 것처럼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며, 조선군은 일본군을 감당하지 못했다. 자신의 경고가 현실이 된 상황에서 조헌은 이제 의병으로 전쟁터에 뛰어들 결심을 했다. 입만 놀리는 주전론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조헌은 1592년 5월, 옥천에서 병력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문인 이우·김경·전승업 등의 도움으로 16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는 데 성공하고 7월 초부터 본격적인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조헌은 “귀신과 사람이 다 같이 증오하는 것은 도적이라. 화살이 이 원수들에게 함께해 그들의 고향 땅에 돌아가지 못하게 하리라. 뜻을 굳게 먹는다면 귀신이 감동하고 백성들이 따라나서며, 일을 이루려고만 한다면 천지만물도 도우리라”라는 격문을 써 의병을 모집했다.

조헌은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이 1차 금산 전투에서 전사하자 청주성 탈환을 계획했다. 그 전에 포위망을 역으로 분쇠한 전투가 있을탠대?관군 및 영규대사가 이끄는 1000 승병과 합세해 청주를 탈환하였고 전라도로 향하는 군을 막기 위해 7백 의병을 거느리고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이끄는 1만 5천 왜군과 2차 금산 전투에서 분전[4]하다가, 아들인 조극관과 영규의 800 승군을 비롯한 전 의병들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야사에 의하면 비록 패했지만 이들이 죽기살기로 저항했기에 왜군도 수천여명이 죽을 정도로 피해가 커서 우두머리를 난도질했는데, 아들인 조극관을 우두머리로 알고 난도질을 했다고 한다 이들의 분전으로 왜군은 피해를 추스려야 했기에 호남 곡창지대 방어에 큰 기여를 했다.

다만 금산 전투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실제 일본군 사상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좀 의문이다. 일방적으로 당한 것에 가깝기 때문. 이치 전투 항목에 적혀 있는 것처럼 이치 전투가 웅치 전투보다 일정 정도 시간이 지나서 다시 벌어진 것이라면, 웅치 전투, 이치 전투, 2차 금산 전투의 시간순부터 애매해진다. 이치=웅치->금산이 아니라, 웅치 이후에는 순서가 불분명해지기 때문. 일본군이 조헌을 털어버린 다음에 다시 전주로 진격해서 이치 전투가 벌어졌을 가능성 마저 존재한다. 이 상황이라면 실질피해는 크지 않았을 듯 뒤에 조선군은 반격으로 금산을 탈환하게 된다.

율곡 이이제자이기도 했는데, 이이의 제자 중 가장 뛰어났다라는 이야기도 있다.

2.3. 칠백의총[편집]

전투 4일 후인 22일 조헌의 제자인 박정량과 전승업이 조헌을 포함한 전사한 조선군 700명의 유골을 모아 큰 무덤 한 곳에 합장하면서 ‘칠백의총(七百義塚)’이라 불렀다훗날 조정에서는 조헌에게 이조판서를 추증했다. 이후 인조대에 순의단을 세우고 종용사라는 편액을 내리면서 종용사라는 이름으로 알려지다가 종용당서원이 세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인 1940년 진화사라는 사원을 세우면서 싹 밀려나갔다가, 광복이 되자 국민성금으로 복원되었다.

하지만, 이 700명에는 영규가 이끌었던 승병의 숫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조헌의 제자인 박정양 등이 붙인 이름이기 때문에 조헌쪽 인사들의 이름만 넣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시신들은 같이 수습한 것으로 보이고[5] 영규의 이름을 일단 같이 모셔지고 있다[6] 하지만 불교계에서는 천오백의총으로 바꿔야 한다는 불만이 종종 나오고 있다.

2.4. 우저서원(牛渚書院)[편집]

경기도 김포시에 있는 서원으로 중봉 조헌을 배향하였던 곳이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서도 살아남았고 1973년 보수하였다. 서원에는 조헌 추모비와 사당 등이 있다.

참고로 조헌의 고향이 김포이기도 하여서 의미가 깊은 곳이기도 하다. 김포시에 있지만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참고: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2.5. 관련 문서[편집]

3. 후한 말의 인물[편집]

曹憲
생몰년도 미상

후한 헌제의 후궁. 조조의 첫째 딸로 조절, 조화, 청하공주, 안양공주, 금향공주, 임분공주 등과는 자매.

213년에 조조가 세 딸인 조헌, 조절, 조화를 헌제에게 바쳤고 이들은 모두 헌제의 후궁이 되어 궁에 들어갔다. 그런데 나이가 어려서 위국에서 나이가 차기를 기다렸는데, 214년에 셋이 모두 귀인으로 승격되었다.

자치통감의 호삼성 음주에는 조절을 황후로 삼았다면서 범엽은 이에 근거해 황후기를 썼다고 하는데, 원굉의 후한기에서는 사마표의 속한서에서 나온 설로 연유해 조조가 두 딸을 귀인으로 삼아 큰 귀인을 세워 황후로 삼아 조헌을 황후로 삼았다고 했다. 그러나 진수가 한나라와 위나라의 일을 대부분 몸소 경험하고 눈으로 보면서 상세하고 확실한 바에 따라 스스로 비교했다고 한다.

진수와 호삼성의 기록에는 헌제의 두 번째 황후는 조절이며, 후한서집해교보에서 지적한 것에 따라 속한서에 조헌과 조절이 모두 황후인 것으로 기록된 것은 사마표의 오류로 조헌은 황후가 아니라 귀인인 것으로 보인다.

조헌이 사용했다는 청동 사자 문양의 도장인 조헌인신이라는 것이 유물로 남아있다.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는 활달한 성격과 뛰어난 무술 솜씨의 소유자였다는 속성이 붙어 있는데, 왠지 병종은 책사다(...). 무력이 72로 꽤 높은 편이고 지력/민첩/행운도 70, 80대로 고른 편이지만 통솔이 65다. 문관이 부채로 때려 싸울 것도 아니고. 여성 책사를 키운다면 모르겠지만....

[1] 칠백의총기념관 보관 중. 운보 김기창[2] 배천 조씨의 시조는 무려 송태조 조광윤의 직계손자 조지린. 이런 그가 왜 한국 땅으로 왔는지에 대해서는 송태조 항목 참조.[3] 호가 후율인데 이 율자는 율곡의 율을 따온거라고 한다.[4] 이 때 관군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같이 공격하자는 영규의 주장을 배격하고 일단 돌격을 주장했다는 이야기가 있다.[5] 다만 이것도 현시창인 것이 상투달린 시신만 수습했고 머리 깎은 시신들은 그냥 내버려둬서 근처 마을 사람들이 수습했다라는 일화도 전한다고 한다[6] 영규의 무덤은 충청남도 계룡산 갑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