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바르비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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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arbirolli_mahler_symphony_5_EMI.jpg


박스- 틴타겔

Sir John Barbirolli, CH(1899.12.2~1970.7.29)
1. 개요2. 소개3. 그의 녹음4. 참고 자료

1. 개요[편집]

영국 지휘자. 맨체스터 할레 오케스트라에서 오랫동안 재직하며 악단의 리즈시절을 이끌었다. 뉴욕 필하모닉, 버팔로 필하모닉, 휴스턴 오페라의 상임지휘자로 재직하였다.

토머스 비첨, 에이드리언 볼트 등과 더불어 영국의 대표적인 지휘자로 불리었다. 영국 그라모폰지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지휘자를 묻는 설문을 했을 때,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에 이어 2위를 랭크되었을 정도로 영국에서 그의 인기는 독보적이다.

2. 소개[편집]

아버지는 이탈리아인이었고, 어머니는 보로도 출신 프랑스인이었다. 그의 세례명은 이탈리아식인 Giovanni Battista Barbirolli(조반니 바티스타 바르비롤리)이다.[1] 그의 첫번째 언어는 이탈리아어, 두번째 언어는 프랑스어, 그리고 영어는 세번째 언어였다. 그러나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뉴욕 필 상임지휘자 시절을 제외하면 일생을 영국에서 살았다. 존 바비롤리 본인 스스로도 영국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바이올리니스트였고, 그는 첼로를 배웠다. 17세 때부터 오케스트라 첼로 단원으로서 프로 음악가 경력을 시작했다. 퀸즈 홀 오케스트라 등에서 첼로 단원을 지냈다. 이후 런던을 중심으로 지휘자로 활동했다. 젊은 시절에는 코벤트가든 오페라 등에서 오페라 지휘자로서도 많은 활동을 했다. 또 맨체스터의 할레 오케스트라와 가까운 인연을 맺기도 했다.

1936년에는 일약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허나 뉴욕 필 시절은 그에게 영광이라기 보다는 시련의 시기가 되었다. 그의 전임자는 무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였다. 게다가 뉴욕 필은 토스카니니의 후임으로 처음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영입하려고 했으나 푸르트벵글러 본인이 뉴욕 행을 꺼려했고, 당시 미국과 나치 독일간에 고조되던 정치적 긴장감 등으로 인한 반대 여론도 있어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뉴욕 필의 포스트에 오르게 된 바비롤리는 처음부터 뉴욕 필의 후원자들과 평론가들의 성에 차지 않았고 임기 내내 평론가들과 애호가들로부터 부정적인 평에 시달렸다. 뉴욕 필에서의 임기가 끝나고 할레 오케스트라의 초청을 받아 영국행 화물선[2]에 몸을 실으면서 홀가분함을 표했을 정도.

1941년 뉴욕 필의 상임지휘자 임기가 끝나면서 영국 맨체스터의 할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할레 오케스트라에서 25년간 상임지휘자를 지내면서 악단의 명성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게 되었다. 아울러 런던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주요 객원지휘자로 활동했으며, 유럽 대륙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 유수의 오케스트라에서 객원 지휘자로 활동했다. 1960년대 베를린 필에서 객원 지휘자로서 일련의 말러 교향곡들을 연주했는데, 당시 베를린에서는 말러가 별로 연주되지 않았기 때문에 큰 화제를 모았다. 말러 교향곡 9번을 객원 지휘하고 나서 연주에 감동한 베를린 필 단원들의 요청으로 동곡을 음반으로 녹음하기도 했다.

1968년 고령을 이유로 할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악단과 관계를 이어갔다. 1970년 7월 29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일본 공연을 위해 말러 교향곡 1번 리허설을 마치고 자택으로 돌아간 후 그날 새벽 심장마비로 눈을 감았다.

바비롤리는 영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영국인 지휘자로 꼽혔다. 10여년전 영국 그라모폰지가 영국인들을 대상으로 가장 선호하는 지휘자를 묻는 설문 조사에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에 이어 존 바비롤리가 2위에 올랐다.

아내도 오케스트라의 수석을 맡았다고 한다.

브루크너 교향곡 7번 3악장 리허설 장면이 남아 있어 그의 리허설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

3. 그의 녹음[편집]

EMI 등에서 많은 음반 녹음이 남아 있다. 음반 녹음이 흔치 않던 1930년대초부터 적지 않은 녹음을 남겼다. 당시 음반 녹음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지휘자는 매우 소수였기에 운이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1930년대 남긴 음반 대다수가 협주곡 녹음이라는 점은 다소 안습한데, 일례로 그는 1930년대에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만 각기 다른 피아니스트와 세 번 녹음했고 이것은 동곡의 최초 ~ 세번째 음반이었다. 때문에 1944년 이전에 발매된 모든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 음반의 지휘자는 모두 바비롤리였다. 때문에 젊은 시절 바비롤리를 협주곡 전문 지휘자로 평하는 경우도 있는데, 협주곡 녹음 같은 것은 순전히 음반사의 기획으로 녹음되는 경우가 많기에 바비롤리 본인 협주곡 지휘를 선호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EMI와 계약 후에는 협주곡 녹음이 거의 없고 대부분이 교향곡, 관현악곡들이다.

EMI에서 남긴 음반들을 보면 레퍼토리가 폭넓다. 특히 엘가, 본 윌리엄스, 딜리어스, 박스 등 많이 연주되지 않는 영국음악을 많이 녹음했는데, 특히 딜러어스에 많은 애정을 보였다. 할레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시벨리우스 교향곡 전곡은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핀란드에서 가서 할레 오케스트라 시벨리우스 교향곡을 연주했을 때도 격찬을 받았다. 또 당시에 흔히 연주되지 않던 말러 교향곡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EMI GROC에 오토 클렘페러, 토머스 비첨과 더불어 가장 많은 재발매 횟수를 자랑하며 워너 클래식으로 넘어온 현재까지 재발매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4. 참고 자료[편집]

[1] 존으로 불린 이유는 본인이 사람들이 부르기 편한 이름을 선호했기 때문이다.[2] 당시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화물선이라도 타고 대서양을 행단하는 것은 힘든 상황이었다. 당시 바비롤리가 탄 화물선 역시 미해군 군함들에 의해 호위를 받으며 운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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