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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카터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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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39대 대통령
제임스 얼 "지미" 카터 주니어
James Earl "Jimmy" Carter Jr.
파일:JimmyCarterPortrait2.jpg
출생
미국 조지아 주 플레인스
재임기간
제76대 조지아 주지사
제39대 대통령
서명
링크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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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형제자매
배우자
로잘린 카터 (1927 ~ / 결혼: 1946)[1]
자녀
잭 카터 (1947 ~ )
칩 카터 (1950 ~ )
도넬 카터 (1952 ~ )
에이미 카터 (1967 ~ )
학력
플레인스 고등학교 (졸업)
조지아 남서 주립대학교 (공학과 / 편입)
조지아 공과대학교 (편입)
미국해군사관학교 (졸업)
유니언 칼리지
종교
신체
178cm, A형
정당
상훈
노벨 평화상 (2002)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 (1999)
제49회 그래미 어워드 최고의 낭독 앨범상 (2007)
제58회 그래미 어워드 최고의 낭독 앨범상 (2016)
약력
조지아 주의회 상원의원 (1963~1967)
제76대 조지아 주지사 (1971~1975)
미국 제39대 대통령 (1977~1981)

1. 개요2. 생애
2.1. 성장기2.2. 1976년 ~ 1980년 대통령 선거2.3. 퇴임 후 활동
3. 평가
3.1. 외교
3.1.1. '도덕주의 외교' - 반론과 재반론3.1.2. 카터와 한국, 그리고 DJ3.1.3. 국방
3.2. 내치
4. 카터 내각의 용인과 인물들
4.1. 경제 - 폴 볼커 연준의장4.2. 외교 - 브레진스키 국가안보보좌관
5. 종교적 성향6. 등장 매체7. 장수
7.1. 시한부 흑색종 4기 선고와 완치
8. 기타

제39대 미국 대통령 취임 선서

1. 개요[편집]

미국의 제39대 대통령.

본래 "제임스 얼 카터 주니어(James Earl Carter Jr.)"라는 풀네임을 가지고 있으나, 일반 대중들을 대상으로는 애칭인 지미(Jimmy)를 써서 통칭 "지미 카터"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으며, 서명을 하거나 선서를 할 때도 이 이름을 사용했다.[2] 덕분에 다른 제임스라는 이름을 가진 대통령과는 확실히 구분되기도 한다.

2. 생애[편집]

2.1. 성장기[편집]


조지아 주 플레인스(Plains) 시 출생. 증조부가 남북전쟁 당시 남군 장교 출신이었다. 원래 1941년 조지아 공대에 입학했지만 중퇴하고 1943년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한다. 1946년 미국해군사관학교를 59등으로 졸업[3]한 뒤 잠수함에서 근무하게 된다.[4][5] 1953년 아버지의 부음 소식을 듣게 된 카터는 해군에서 촉망받는 인재였음에도 가업을 잇기 위해 전역을 선택하여 땅콩 농장과 함께 각종 농기구를 취급하는 카터 상회를 운영했다. 이 땅콩 농장주 경력은 유명해서 이후에도 카터에겐 '땅콩 장수'라는 별명이 붙어 다닌다. 해군에선 그가 전역을 선택한다니 많이 아쉬워했다고 한다.

이후 조지아 주 미국 상원 선거에 나서서 낙선했지만, 당선한 후보의 부정선거가 드러나 그가 당선되었고 이후 조지아 주 주지사까지 역임했다. 이 기간에 그는 흑인 등용법을 제정하는 등 인종차별 폐지와 도덕주의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인종차별이 심한 조지아 주에서 태어나서 인종차별을 가장 싫어한 사람 중의 한 명이다. 그 본인은 백인이지만 어렸을 때 흑인들이랑 같이 놀다보니 저절로 편견이 없어졌다.

오해가 있는데 조지아 주는 남북전쟁 이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반(反) 북부 정서로 인해 미국 민주당의 텃밭이던 조지아는 이후 공화당의 보수 전략에 따라 "빨간 주"로 넘어갔지만, 주지사는 2003년까지 민주당에서 나왔다. 1868년~1872년의 4년을 빼고는 무려 #[6] 150년간 민주당 독주. 여하간 카터는 76대 조지아 주지사(1971년~1975년). 12년 뒤 클린턴 역시 남부 출신 주지사인지라 주목을 받았는데 오바마가 기록을 깰 때까지는 "당분간 민주당 출신 대통령은 (보수 성향이 강한 남부의 표를 끌어올 수 있는) 남부 출신 주지사들만 가능한 직종은 아닐까" 하는 푸념도 나왔다고 한다. 한국으로 치면 "민주당 출신 대통령은 경상도 출신 후보만 가능한 직종은 아닐까" 정도로 볼 수 있다. "남부전략" 이후 공화당의 우세가 강했던 시절의 반영.

해군 복무 시절이 워낙 짧게 끝나서 잘 인식되지 않는 사실이지만, 카터는 1950년대 전후 미 해군에서 차세대 브레인으로 촉망받았던 인물이다. 카터가 복무하던 시기인 194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초반은, 하이먼 리코버 제독이라는 매드 사이언티스트원자력 잠수함을 처음 만들어내던 시절이었다. 이 당시부터 로널드 레이건 시절까지 이 원자로 깎던 노친네는 막무가내로 갈궈대고 시험에 들게 하며 머리 깨나 한다는 인재들에게 엄청난 좌절과 환희를 안겨줬다.[7] 카터는 이런 리코버의 시험을 통과하고 초창기 원자력 잠수함 개발팀에 들어갔던 초엘리트였다. 리코버가 허구헌날 욕먹던 시절에는 별로 감이 안 잡혔을지 모르나 훗날 1980년대부터 리코버의 제자들이 해군참모총장을 독점하는 시대가 온 것을 보면 카터 또한 미 원자력 해군의 역사에 크게 기여했을 수재에 해당된다. 아버지가 남긴 가업을 잇기 위해 창창한 미래를 포기했던 효자는 훗날 제독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대통령의 지위에 올랐다.

한편으로는 리코버와의 일화가 있다.
리코버: 자네 해사 몇등으로 나왔나?
카터: 59등입니다.(820명 중)
리코버: 최선을 다 했나?
카터: 최선을 다... 하지는 않았고 좀 설렁설렁 한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
리코버: WHY NOT THE BEST?(왜 최선을 다 하지 않았나?)
카터: ...!

이 WHY NOT THE BEST는 카터가 자주 입에 담는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고 대통령 취임 후 낸 자서전 제목으로도 쓰였다.

2.2. 1976년 ~ 1980년 대통령 선거[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ElectoralCollege1976.svg.png

전국적으로 거의 무명이던 카터는[8] 197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 돌풍을 일으켜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된다. 도덕주의 정책과 인권 외교를 공약으로 해 당시 현직 대통령이자 공화당 대통령 후보 제럴드 포드를 이기고 대통령에 올랐다. 케네디, 닉슨 등 쟁쟁한 인물들이 박빙의 대결을 펼쳤던 1960~1990년대의 대통령 선거 중에서 가장 박빙이었다.[9] (297:241, 50.1% 대 48%.) 남부의 분열 이후 약체화 된 민주당은 8년마다 돌아오는 정권교체의 기회에서도 쉽게 이기지 못한 것이다. 민주당 내부에서도 카터에 대한 반발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남부출신인 카터가 보수적인 정책을 펼쳐서 민주당을 보수화시킬까봐(...).

당시 카터는 서부 전역을 포드에게 내주었지만 1960년대 이래 흔들렸던 남부의 옛 민주당 텃밭을 온전히 되찾으면서도 북부(미네소타[10], 위스콘신)와 동부에서도 승기를 거두면서 대선에 승리했다. 그로버 클리블랜드존 F. 케네디가 승리했던 전략을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한 예로, 미국 지도가 동서로 딱 갈라지는 결과를 보인다. 민주당에겐 불행히도 이때 딱 한 번만 성공했다.[11] 그는 조지아 주의 모든 카운티에서 이겼다고 한다.[12]

한편, 1976년 대선에서 두 후보의 득표율 차이가 5%도 안될 정도로 박빙이였던 주가 무려 20개나 되었는데, 이 주들은 전부 1980년에 레이건에게 돌아가게 된다.

파일:1200px-ElectoralCollege1980.svg.png

1980년 대선에서 카터는 텍사스플로리다를 뺀 남부의 지지를 상당부분 이끌어냈지만, 무소속 후보인 존 B. 앤더슨의 독자출마로 조지아를 제외한 남부 전역에서 패하고 북부에서 표가 크게 나뉘면서 결국 로널드 레이건에게 대권을 넘기고 재선에 실패했다. 앤더슨은 공화당 출신이었고, 홀로 고작 6.6%만을 득표했지만 그 득표 대부분이 동부에 집중해 카터의 전략에 큰 악영향을 미친 것이다. 뒤에 설명하는 이란 대사관 인질 사건도 한 몫 한다.

앤더슨의 당시 선거 뱃지 Anderson BeCause Anybody But Carter(앤더슨인 이유는 카터가 아니니까)

2.3. 퇴임 후 활동[편집]

파일:Photograph_of_the_Four_Presidents_(Reagan,_Carter,_Ford,_Nixon)_in_the_Blue_Room_prior_to_leaving_for_Egypt_and..._-_NARA_-_198523.jpg
퇴임 직후인 1981년 10월, 백악관을 방문해서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 제럴드 포드(레이건 바로 옆), 리처드 닉슨(맨 우측) 전직 대통령들과 닉슨 옆에 손만 있는 아빠 부시과 담소를 나누는 모습.[13] 사실 이 사진은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집트로 떠나기 전날 밤에 찍은 사진이다. 사진 속 인물들 중 유일하게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자 현재 유일하게 생존 중이다.[14] 이 때, 레이건 대통령은 사다트 대통령의 장례식에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지만[15], 대통령 전용기를 이 세 전직 대통령들에게 빌려주었다고 한다.

파일:attachment/f0043889_4fa1f9cc43df7.jpg
대통령 자리에 물러난 뒤 전직 대통령 자격으로 많은 활동을 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Habitat for humanity 운동이다. 사랑의 집짓기라고도 부르는 집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집을 지어주는 봉사활동에 참여해 봉사활동에 앞장섰으며, 이것과 별도로 자연재해에 집을 잃은 이재민들을 위한 단기간 집짓기 봉사 프로젝트인 지미 카터 프로젝트를 만들어 동남아시아 쓰나미 사태나 카트리나 사태, 아이티 지진 등 굵직한 사건 때마다 봉사단을 조직해 전 세계를 돌았으며 2001년 대한민국 아산시 도고면에서 열린 지미 카터 프로젝트에도 직접 참여하였다. 지미 카터는 해비타트 운동을 세계로 알린 역할로 Habitat for humanity 본부에서 '수석 자원봉사자' 라는 명예직을 주었고, 지미 카터가 중심이 되어 참여하는 건축봉사 활동을 지미 카터 프로젝트로 독립시켜주었다. 이 해비타트 수석 봉사자 명예직은 건강상의 이유로 2009년에 반납했다고. 여담으로 2002년 수능 외국어 영역에 그의 해비타트 운동이 문법 관련 지문으로 나온 적이 있다. 그 지문은 대부분의 문제집에서 과거와 현재 완료의 시제를 비교하면서 예제로도 많이 나온다.

파일:4487.jpg
정치, 외교적으로도 전 대통령의 위치를 살려 1994년에는 북한을 전격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나고, 북핵문제 해결과 북미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도 했다. 당시 북한의 경제난 등으로 갈등이 고조되고 있었으나[16] 북한과 미국 모두 실상은 사태의 원만한 해결을 바라던 참이라서 카터의 방문을 계기로 관계는 호전되었다. 하지만 그 직후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되었다. 이런 업적에 힘입어 2002년, 인권과 중재 역할의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덕분에 대통령으로 있을 때보다 전 대통령으로서의 활동이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물론 이는 대통령 시절이 그만큼 평가가 낮다는 것을 애둘러 비판하기 위해 언급되는 경우도 많다. "가장 훌륭한 전 대통령" 이라는 말도 있고, 여기서 더 나아가 "처음부터 전 대통령이었다면 더 좋았다" 라는 비아냥도 나온다. 일단 지미 카터 프로젝트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선한 이미지를 쌓았고 정치적 이미지도 옅다보니 미국 안보상 중요한 문제에 비공식 특사로도 몇차례 가게 되었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에는 연이은 말 실수 등으로 구설에 오르며 여러 번 비난받으면서 위대한 전직 대통령이라는 그동안의 평도 많이 깎아먹고 있다. 특히, 오바마 대통령 시절 지나치게 북한을 옹호하는 발언과 다소 극단적인 종교적 발언을 여러 차례하면서 미국 내에서 비판적인 여론이 높아졌고 이후 대외 활동이 잠잠해졌다. 물론 건강 이유도 있었지만...

2011년 4월에는 마르티 아티사리핀란드 대통령, 그로 부룬드란트노르웨이 총리, 메리 로빈슨아일랜드 대통령을 비롯한 세계의 여러 전직 지도자들과 같이 방북했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북한의 열악한 인권 상황은 북한의 내부 사정이니 외부 세력이 개입하면 안 되며, 북의 기아와 핵개발의 책임은 전적으로 미국과 남한에 있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가 북한 대변인 노릇하러 갔냐는 비아냥에 시달렸고, 지미 카터가 자신이 북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미국 국무부에서의 브리핑을 요청하자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hell no"라고 싸늘하게 대답했다.

2013년 4월 존 스튜어트와 인터뷰를 했었는데 미 행정부(적어도 카터 행정부 및 본인)의 전통적 대북 협상 접근법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언급을 했다. 당시 북한이 정전협정을 파기한다며 협박을 하던 중이었는데 카터 왈 남한과 북한간 정전협정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미국과 북한, 더 나아가 미국과 중공군간의 정전협정만이 존재한다는 언급을 지나가듯이 했다. 이는 바꿔 말하면 남한은 최소한 정전협정과 관련해선 아예 협상 대상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뜻. 너무 확대해석하는 것도 지양해야 겠지만 이런 협상 주도자에 대한 인식 차이는 평화 또는 통일을 향한 미국식 다자회담과 한국식 양자 또는 다자회담 주장의 의견 차이를 보여줄 수 있는 단적인 예시이기도 하다. #

2014년 12월, 통합진보당 이석기 전 의원의 유죄판결에 대해 우려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한국 대법원에 발송했다.#

카터는 퇴임 후에 종교, 외교와 관련해서 논란이 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또 일부 해외 언론들은 미국 언론이 카터의 퇴임 후 활동을 지나치게 미화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2010년에는 스스로를 다른 전직 대통령들보다 우월(superior)하다고 주장했다가 미국 내에서도 큰 비난을 초래하기도 했다.

러시아의 대선 개입 덕분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됐다면서 정통성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2019년 11월 11일 자택에서 넘어져서 눈 주변에 크게 멍이 들었는데도 멀쩡한 상태로 집짓기 행사에 참석했다. 그런데 미국 뿐만 아니라 이 뉴스를 접한 세계인들의 반응은 "저 양반이 아직도 살아 있었다고??" 이런 반응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게, 이 사람은 2020년 10월 1일 기준으로 96세를 맞이했다. 장수로 유명한 엘리자베스 2세보다도 두 살이 더 많다! 다만 저 낙상 여파로 뇌압이 높아져서 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둘째 아들 칩 카터가 가수 윌리 넬슨과 백악관 지붕에서 마리화나를 피운 사실을 털어놨다.#

본인과 비슷한 또래의 과거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들인 조지 H. W. 부시프랑스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등이 말년에 성추행 논란을 일으킨 것에 비해 성적으로 아무런 스캔들이 없는 것도 귀감이 되는 부분이다. 애초에 이 사람은 TED 나와서 여성학대 문제에 대한 강연도 했다.#

파일:카터 먼데일.jpg
흥미롭게도 카터의 러닝메이트이자 부통령이었던 월터 먼데일1928년생으로 퇴임후 40년간 생존해 역대 부통령 중 가장 오래 살아남은 부통령이었다. 하지만 2021년 4월 19일에 향년 93세로 타계하였다.

거기다 영부인 로잘린 여사도 1927년생으로 현재까지 생존 중인 역대 영부인 중 최고령이다.

2020년에는 28년만에 대통령 선거에서 고향 조지아 주에서 민주당이 승리하는 기쁨을 맛봤다.

2021년 1월 20일에 행할 예정인 조 바이든의 대통령 취임식에는 불참을 결정했다. 불참 이유를 명확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코로나19의 유행에 따른 방역 지침을 지키기 위해서로 보인다.# 그 대신, 바이든의 대통령 취임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2021년 미국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 사태 이후 "국가적 비극이며 이건 미국의 모습이 아니다"며, 평화적인 상황 해결과 정권 교체를 촉구하는 발언을 했다.#

3. 평가[편집]

밑의 평가들은 '대통령'으로서의 카터에 관한 내용이다. 퇴임 이후 많은 선행과 평화적인 활동을 하면서 '인간 지미 카터'로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있지만 애석하게도 '대통령을 할 위인'은 아니었다는 것이 중론이다.[17] 일반적으로 외교나 경제 문제에 있어서 실패한 대통령으로 평가 받는다. 이상주의로 인하여 크게 말아먹은 외교는 물론 그나마 나았다는 내치에 있어서도 공보다는 과가 더 두드러진다는 평이다. 미국 역사상 재선에 실패한 몇 안 되는 대통령 중의 하나라는 것이 그에 대한 평가를 대변한다.

미국 내에서보다는 해외에서 크게 인기있는 대통령이다. 아직도 그의 집권 4년 간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지만, 퇴임 후 업적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편이다. 퇴임 후 업적 때문에 집권 당시의 문제가 미화되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 사실 레이건 이후로는 아들 부시 같은 총체적 난국의 대통령들도 정치 안정(4년만에 바뀌면 혼란이 올 것이니)을 이유로 대체로 재선에 성공했던 지라, 카터 집권 당시의 내용도 의외로 후대의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보다 나쁘지 않다. 반쯤 농담삼아 21세기에 대통령이 되었다면 재선에 성공했을 것이라고.[18]

3.1. 외교[편집]

카터의 이상주의적 도덕주의 외교정책은 현실에서 많은 좌절을 겪었다. 특히 그의 이러한 외교정책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촉진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 그의 인권 외교는 우방국들과의 동맹에 균열을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이란의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여 미국 내 여론이 크게 악화되었다. 이러한 연속된 외교적 실패로 미국의 국제적 위상이 추락했다는 평가를 받고, 결국 강한 미국을 내세운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에게 정권을 내주고 말았다.[19] 일부 카터 지지자들이 내세우는 카터의 업적으로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와 제2차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등을 들지만 두드러지지 않는 데다가,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는 주로 닉슨 정권의 핑퐁외교가 결실을 맺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카터의 인권 외교는 일관되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우방국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었지만 몇몇 공산권 독재국가들에게는 오히려 우호적이었다는 것이다. 일례로 카터는 1978년 4월 워싱턴을 방문한 악명 높은 독재자 차우셰스쿠에게 "우리(카터와 차우셰스쿠)는 신념과 목표를 공유한다. 정치와 경제의 공정한(just) 체제를 갖고, 개인적 자유를 누리고 …"는 내용의 환영사를 안겨준 적이 있다. 훗날 카터가 북한의 인권문제를 옹호하는 발언을 봐도 그의 인권 외교가 이중 잣대라는 평가를 부정하기 힘들게 된다.

다만 당시의 차우세스쿠 건은 인권 외교의 이중성보다는 소련 견제 전략이 인권 외교 정책에 우선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차우세스쿠는 내치에서는 분명한 독재자였지만 국제 관계에서 보면 중국의 마오쩌둥, 유고의 티토와 함께 동구권에서 소련의 패권주의를 비난하면서 독자 노선을 걸었다.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동구권 내의 반소 국가들과 관계 증진을 시도했던 것은 닉슨 때부터 있었던 일이다.

당시의 인권정책은 사회들의 민주화보다는 개인의 정치적 자유를 중시했다. 카터의 인권정책들은 남한보다 인권이 훨씬 열악했던 남아메리카 독재정권들을 제재하는 데서 출발했고, 임기말까지 그 틀은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임기초부터 미국이 가진 힘의 제한을 정확히 판단했고, 목표가 "사회 변화"가 아님을 명확히 명시했다.

한편, 임기 중반인 1979년에는 중국(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면서 미국-대만 상호방위조약을 파기했다. 이때 미국 상원의원이었던 배리 골드워터가 지미 카터 대통령의 이러한 결정에 대해 상원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며 반발, 미국 연방대법원에 소송을 걸었으나, 연방대법원은 "그것은 정치적인 문제에 불과하고, 미 의회가 직접 반대한다는 서한을 보내는 등 공식적인 반대 의견 표명이 없었기 때문에 법원이 판단할 수 없다. 상고를 기각한다."고 판시, 그대로 파기로 이어졌다.

3.1.1. '도덕주의 외교' - 반론과 재반론[편집]

카터가 낙선한 원인으로는 흔히 뜬구름 잡는 도덕주의 외교의 실패를 꼽는다. 그러나 카터의 도덕주의가 뜬구름 잡는다는 비판은 정확하게 그의 도덕주의 정책들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나온다.

카터의 도덕주의 정책은 명확히 미국의 힘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20] 카터의 도덕주의 정책은 6~70년대 미국 내의 반인종차별운동, 반전운동과 페미니스트 시민권운동 등 여러 인권운동들에서 힘을 받고, 비아프라 전쟁[21]이나 방글라데시 기근 등 당시 발생한 국제적인 인권위기들, 그리고 그에 따른 여러 유명한 인권단체들 (국경없는 의사회, 옥스팜, 국제 엠네스티 등)의 탄생에 힘입어 탄생했다. 인권을 앞세웠던 카터가 당선된 것 자체가 그 당시의 인권에 대한 시대정신을 잘 반영해주는 현실이었다. 타겟 또한 주로 남아메리카로서, 80년대로 진입하면서 일어난 폴란드나 한국의 민주주의에 관련된 사태들은 그의 외교 정책의 주된 타겟이 아니었으며 카터의 외교 정책 설계 한참 후에 벌어진 일련의 사태들이다.

이렇게나 상당히 자신들의 목적과 한계를 잘 파악한, 매우 정교한 외교안을 뜬구름 잡는다고 느낀다면, 인권 개념 자체를 추상적이고 비현실주의적인 것으로 보는 입장에서이다. 다르게는, 무작정 모든 인류의 인권을 지켜주고 상향시키지 못했기에 실패했다는 식의 비판이 된다.

당시 남아메리카는 심지어 유신체제 아래 한국보다도 인권이 열악한, 정부에 의한 납치와 살해가 아주 공공연히 일어나던 국가였다. 이런 현실에 맞게 카터는 외교정책을 설계했고, 실제로 남아메리카에선 카터의 정책들이 빛을 본 경우가 많고 그의 인권정책 참모였던 패트리샤 다리엔 (Patricia Darien)은 여전히 남아메리카에서 칭송받고 있다.[22]

현실주의가 아닌 도덕주의를 내세웠으면서도 미국 국내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그 도덕적 기준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 자체가 정책으로서는 실패라는 견해도 있다. 미국은 중미와 남미를 "내 앞마당"취급해왔기에, 타이밍 나쁘게 들이대는 인권문제 제기는 길들이기 위해 트집잡는 몽둥이로서 인식되기 좋았다. 현실주의라면 모를까 도덕주의에서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자기만의 기준을 세웠다는 것은 적절하다고 볼 수 없다. 그렇게 한국의 경우처럼 아무도 이해하기 힘든 기준으로 인권외교를 멋대로 휘두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그 결과 남미와 한국등 지미카터의 인권외교는 반미세력의 확대만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카터의 인권외교는 어찌되었는 "의도는 좋았다"는 중지는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이 항목이 인권외교 자체의 성패를 말하고 있지만, 카터가 인권외교로 비난받는 다른 이유는 인권외교 그 자체의 성과보다는 인권외교를 하며 트레이드 오프로 내준 것에 있다.

3.1.2. 카터와 한국, 그리고 DJ[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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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사건 때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유진곤 씨의 아들 유동민 씨가 지미 카터에게 보낸 편지. 카터가 박정희 정부에게 압박해서 유진곤 씨는 풀려났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도 박물관에 편지 전부가 남아있다.

카터의 '인권 외교'는 대한민국에도 적용되었다. 카터는 임기 내내 박정희 정권이 저지르던 인권 탄압을 문제삼아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 당시 박정희 정부와 크게 마찰을 빚었다. 당시 한미관계는 역대 최악이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1979년 6월 30일 열린 한미정상회담 때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사실 한미정상회담도 원래는 열리지 못할 뻔 했다고 한다.[23] 특히 카터가 한국의 인권 문제에 대해 비판하며, 긴급조치 9호 해제를 촉구했더니, 박정희는 오히려 "인권 좋아하시네"라고 말하며 카터 앞에서 40분간(!) 안보 훈시를 한 것이다. 그래서 회담 후 카터가 주한미국대사를 불러 박정희의 무례함을 항의하며 크게 화를 내기도 했다. 방한 일정을 모두 마치고 공항으로 돌아가던 도중, 박정희에게 "하나님을 믿으라"라고 전도한 것은 유명하다. 카터가 부마항쟁10.26 사건으로 이루어지는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사실상 방조했다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이때 박정희가 외교적으로 얼마나 막나갔는지, 카터한테 말한 박정희의 장광설을 정확히 옮기면, "인권 문제는 내가 먹여 살리는 내 국민인데, 내가 더 잘 압니다. 간섭하지 마십시오."라며, 굳이 가겠다면 (주한미군도) 빼내가라면서도, 무기와 장비는 놔두고 가라는 뻔뻔한 소리까지 하는 바람에, 주변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고 카터를 더 빡치게 했다. 기사 당시 배석자로서 그런 분위기를 경험한 주한미국대사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니어의 말에 따르면, "정상회담에 여러 번을 배석해봤지만, 이런 정상회담은 본 적이 없다."고 회고할 정도(...). 또한 아마코스트 미 국방부 차관보도 정상회담 후 당시 합참 전략기획국장이던 손정래에게 찾아와 "It's a disaster(이건 재앙이다)"라고 말했을 정도.

전날인 6월 29일에도 김포공항에서 환영 행사 하는 내내 표정이 굳어있는 것도 모자라, 마중 나온 박정희하고는 악수만 한 번 하고, 환영행사가 끝나자마자 청와대가 아닌, 헬기로 동두천 미군 2사단으로 날아가서 거기서 하룻밤을 보냈을 정도. 다음 날 아침에 조깅까지 해놓고, 한국군 기지 시찰 일정을 날씨가 나쁘다면서 취소해버렸다(...).

한편 박정희 사후 신군부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는 논란적이다. 당시 미국 대사가 12.12 군사반란을 하루 만에 쿠데타가 아니라고 결론지어 전두환의 정권 장악을 못 막았다며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24] 5.18 민주화운동도 임기 말이었기에 거의 방조하는 상황이었고, 한반도 정세의 안정성을 고려한 면이 컸다. 게다가 당시 미국 본토 정가는 이란 왕정 몰락과 이란 대사 피랍사건이라는 초특급의 외교적 위기에 빠져있었다.

다만 이와 별개로 전두환의 군사반란과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김대중이 사형 선고를 받자 카터는 김대중의 신변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이것이 전두환이 김대중을 함부로 죽이지 못한 이유다. 후임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에게 인수인계를 한 사항 중 "김대중 문제는 꼭 챙겨달라."도 있었고, 전두환은 보수 성향인 레이건이 당선되자 잘 됐다며 김대중에 대한 사형을 집행하려 했으나, 오히려 미국 측에서 극구 반대하였다. 레이건 행정부는 김대중을 석방하는 대신 전두환을 방미시키는 방법으로 사형을 막았고, 이후 김대중을 미국에 망명시킨다.[25] 그래서 김대중 前 대통령에겐 카터가 생명의 은인이다.[26] 실제로 김대중의 목숨은 당시 카터에게 직접 보고가 되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김대중은 당시의 인권정책에 정확히 부합하는 정치적 수감수였다.

김대중의 목숨을 살린 것과는 별도로, 정작 광주 민주항쟁 1년 전까지는 미국 동아시아 안보의 핵심인 주한미군을 가지고 박정희에 대한 통제를 시도하는 등 인권을 명분으로 큰 몽둥이를 마구 휘둘렀던 카터는 바로 반년만에 신군부 세력을 용인해버리고, 묵인을 넘어 일부 외교문서를 보면 암묵적으로 지원까지 하는 행보를 보여주었다. 민주화 세력에게는 표리부동했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렵다. 이런 행보 때문에 한국의 민주화 세력 내에는 반미적 성향의 계파가 뿌리깊게 자리 잡았고, 미문화원 점거와 방화는 물론이고 그 중 일부는 더 나아가 북한과 연계를 시도하는 등까지 나아갔다. 이런 맥락에서, 카터의 인권외교는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상술하였듯 군부의 탄압으로 죽음에 처해진 김대중이라는 개인을 살리는 행위야말로 카터식 외교의 전형으로, 현실적인 개인 보호에 치중한 인권 외교의 결과물이었다.

물론 보론하자면 우선 당시 미국의 입장에서 핵무장을 통해 역내 균형을 깨려는 박정희와, 그걸 완전히 포기한 전두환이 동격일 수는 없었다. 또한 임기말 일어났던 이란 대사 피랍사건과 독수리발톱 작전[27]의 실패의 영향도 카터의 대외(여기서는 대한국) 개입을 망설이게 했을 것이다.[28]

3.1.3. 국방[편집]

이미지메이킹을 통해 어필한 레이건에 가려져서 그렇지 실질적으로 소련을 군사력으로 압도하려 했던 핵심인물이었다. M1 에이브람스, F-117, M270 등 밀리터리 매니아들에게 잘 알려진 주요 무기체계들이 카터 정권 때 집중적으로 추진되었으며 국방비도 오히려 증가되었다. ALCM, LGM-118A 피스키퍼[29], B-2, UGM-96 트라이던트 I 등 전략무기체계의 현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었다. 카터 정권 때 추진된 대규모 군사력 프로젝트는 후에 레이건 행정부의 큰 군사적 자산이 되었다. 안그래도 미국 경제력의 반도 안되는 소련은 질적으로 우월해진 미국의 군사력에 대응하기 위해 거대한 재래식 군사력을 계속 유지하다가 군비경쟁을 감당못하고 경기침체에 빠지게 되었다.

3.2. 내치[편집]

내치에 있어서는 심각한 경제 불황에 직면했다. 특히 임기 후기에 제2차 오일쇼크가 발생해서 큰 타격을 입었다. 당시 오일쇼크로 인해 미국이 경제적으로 받은 타격은 어마어마했다. 가파른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동시에 실업자가 급증한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이 나타난 시기였다. 다만 제2차 오일쇼크가 대외적인 요인이었기 때문에 카터 정부의 실정이라 보기는 어렵다는 옹호론도 있다.[30] 경제문제에서의 실패는 카터가 재선에 실패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이 시기에 발생한 극심한 인플레이션은 다음 레이건 정부에 이르러서야 안정화되었다. 다만 레이건 정부에서 인플레이션을 잡는 데 성공한 폴 볼커 FRB의장이 카터 정부 임기 말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이를 카터 정부의 경제정책의 업적이라고 보는 평가도 있다.

특히 카터가 외교적으로는 실패했지만 내치가 성공적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경제 불황은 오일쇼크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며, 그 밖의 국내 문제에 있어서는 성공적이었다는 것. 카터의 업적으로는 항공산업과[31] 화물운송의 규제를 풀고[32] 국립공원 체계를 정비하며 최초로 히스패닉계도 등용했다는 것.

다만 임기 초에는 50%를 상회하는 지지율을 보여줬지만 후반에 경제 불황과 이란 대사관 사건 등이 터지면서 급격하게 하락한다. 웬만하면 재선되는 미국 치고는 안습한 대통령. 이게 얼마나 안습한 것인지를 강조하면 이렇다. 미국 역사상 8명의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했는데[33], 정권 교체를 이룩한 뒤 재선에 패배, 그것도 참패한 대통령은 오직 카터뿐이다.[34] 하지만 달리보면 닉슨 이후 아버지 부시까지 이어지는 24년간의 공화당 초강세 기간(1969-1992년) 중 한번이라도 집권에 성공한 카터가 용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35]

4. 카터 내각의 용인과 인물들[편집]

4.1. 경제 - 폴 볼커 연준의장[편집]

"민간 기업들이 고금리정책의 여파로 파산하고 근로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있다는 점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은 이제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고 있습니다."
폴 볼커,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볼커는 인플레이션의 숨통을 끊었지만 카터 정권의 숨통도 함께 끊었다." (어느 민주당 인사)

카터의 경제 인사는 임기 말에 윌리엄 밀러 연준 의장의 오락가락 정책이 실패로 끝난 뒤 취임한 폴 볼커 연준 의장이 대표적이었다. 그는 독일 혈통 미국인으로, 통화주의자로 케인스 주의와 대립한 밀턴 프리드먼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래서 그의 정책을 요약하면 닥치고 고금리 . 연 13%에 달하는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엄청난 고금리 정책으로 버블을 깨버리는데 성공했다. (어느정도였냐면, 1979년에 1차로 14%로 올리고 1981년엔 21%나 되었다. 정말 지금같은 저성장 시대에는 상상도 못할 금리다.) 실업자가 넘쳐나고 경기가 침체되는 등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펴기 적절한 상황을 만들어버렸다.

물론 폴 볼커가 일반적 의미의 신자유주의자는 결코 아니었다. 볼커는 악명을 감수한 깨끗한 원칙주의자라는 게 정평. 그러나 그의 정책 덕에 실업자가 넘쳐나고 경기가 침체되었으며, 일본 경제에 따라 잡히는 상황이 벌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다.[36] 이 때문에 볼커는 '대공황과 버블 위험을 넘긴 카터 최고의 인사 정책' 이란 칭찬과 '카터 재선 실패의 원흉' 혹은 '정리해고로 점철된 신자유주의의 대문을 열은 인물' 이란 비판을 함께 받는다. 즉, 그의 통화주의가 이른바 케인즈주의의 조종을 알렸다는 사실엔 모두가 동의한다.[37]

카터의 재선 실패에는 이란 대사관 사건 못지 않게 경제 악화도 있다. 간신히 정권을 잡은 민주당 입장에선 경제정책을 전문가에게 위임함으로서 "경제에 무능한 대통령"이란 이미지로 끌려내려갔다는 푸념이 나올 수 밖에. 그래서 '외치보다 내치엔 더 실패했다' 는 평가를 받는다. # 빌 클린턴이 바깥에서 여기저기 물리고 다녔지만 아주 좋은 이미지를 남긴 것은 경제면에서 미국을 번성시켰기 때문이다.

폴 볼커의 정책은 비록 당시에는 고통스러웠지만, 레이건 대통령은 커다란 반발과 농민들의 파업 속에서도 그를 계속 중임했는데, 1983년에야 인플레이션이 잡히면서 미국 경제의 내실은 안정되었다. 그는 1987년까지 FRB 의장으로 재직한 뒤, 1927년생으로 82세의 노령에도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경제회복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재직했다.

볼커는 신자유주의의 대문은 열었다지만 월가의 유태인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며 '투자와 상업, 회계와 컨설팅은 나눠야 한다' 라고 외친 인물이기도 했다. 볼커가 있었다면, 비록 출혈은 있었어도 대침체같은 일은 없었을 것이란 이야기. 볼커는 한발 더 나아가 "은행권에서 혁신이라고 하는 것 중 쓸 만한 건 현금 자동 입출금기 하나뿐" 이라면서 글래스-스티걸법 금융규제법 폐지를 끝까지 반대한 이유로 사임했고 지금 시점에선 그가 옳았다. 볼커 식으로 말하면 간신히 욕 먹어가면서 버블 꺼뜨려놨더니 후임자인 앨런 그린스펀이 기어이 다 버블 올려서 칭찬만 먹다가 이 사단을 냈다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볼커는 그런 점에선 감세정책으로 고성장 저물가를 기록하면서 임기중엔 칭찬 일색이었으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욕을 먹는 그린스펀과 대비된다. # 민주당에 호의적이었던 볼커는 반통화정책을 폈는데도 공화당 레이건 정부에서 중용했고, 공화당에 호의적이었던 그린스펀은 통화정책을 폈는데도 민주당 빌 클린턴 정부에서 중용한 것이 놀랍고도 재미있다. 원래 미국은 상대 당파 성향의 인물을 비교적 인정하는 미덕이 있기 때문이다.

4.2. 외교 - 브레진스키 국가안보보좌관[편집]

사실 내치는 잘하고 외교문제에 난관이었음은 린든 B. 존슨 이후 민주당 대통령의 공통적 현상이기도 하지만(클린턴을 빼면[38]) 그 역시 인재복은 있었다. 공화당에 헨리 키신저가 있다면 카터에겐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인 젊은 인재 즈비그뉴 브레진스키[39]가 있었던 것.

이른바 '카터의 제갈공명'이었던 브레진스키는 평화적 수단을 통해 미국의 패권을 유지/강화하는 정책, 즉 온건해보이지만 현실주의적인 전략가로 유명한데 이렇듯 카터 정부를 단순히 지미 카터라는 개인의 성격으로만 해석하려면 상당한 무리임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카터 정부의 이미지는 온건해보이지만 임기 말에 터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반대해 나중에 먼 뒷날 미국과 앙숙이 되는 오사마 빈 라덴 등의 반소 게릴라를 지원한 것도 브레진스키의 조언에 따른[40] 카터의 정책이었다. 1980 모스크바 올림픽보이콧한 것도 그때다.

다만 반론도 있다. 브레진스키는 미·중 국교에 집착하고, 밴스 국무장관을 무시하고 외교라인을 장악했다가 기어이는 밴스는 사임하고 무장 헬기를 이란 대사관에 들였다가 패망했다는 해석이다. 물론 뒤에 보듯 브레진스키 선에서 수습하긴 했지만 국민들이 그걸 아나. # 사실 진보 측에서는 카터가 애초에 지론인 "인권외교" 에서 벗어나 친팔라비 행보를 보인 것이 대선의 향방을 바꾼 외교적 실수라는 평도 있으며, 브레진스키를 "냉전 진영주의자" 라고 보기도 한다. 아프간 전쟁에 따른 소련의 몰락도 끝내 공화당 시대에나 드러나니... 아프간 개전시에 그렇게 될 거라고 내다본 사람은 없었으니 공적을 돌릴 순 없다.

여하간 카터의 임기는 이 볼커, 브레진스키라는 두 관료가 주도했고 성과도 있었지만 거꾸로 카터의 인기가 급전직하, 재선엔 결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밖에 F-20 항목에 보다시피 한국이 F-20을 도입하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결국 도입은 취소했지만. 또한 이때 박정희 정권의 인권탄압을 비판하여 한국 정부와 크게 갈등하였고 나중에는 카터 정부에서 주한미군 철수 문제까지 거론하자 박정희의 핵개발을 자극한 것도 덤.

5. 종교적 성향[편집]

프로필에서 봤듯이 종교개신교인데, 것도 아주 독실한 개신교[41][42] 신자로 유명하다. 주일예배를 빠짐없이 참석하고 주일학교 교사로도 봉사하는 등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평생 140명을 전도했다고... 아울러 그의 이상론적 도덕주의 외교는 독실한 개신교 신앙이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카터의 개신교 신앙은 보통 미국 남부의 독실한 침례회 개신교도라고 하면 떠올릴법한 근본주의적 태도와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상기했듯이 "여성을 목사로 임명하는 걸 반대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거나 "동성결혼은 반대하지만,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존재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43]

게다가 미국 정치인으로서는 드물게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인권 탄압에 문제제기를 했는데, 미국 민주당을 지배하는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나 항의하여 주장을 철회했다. 미국에서 이스라엘을 비판하면 현직 정치인이나 전직 대통령에게조차 위험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

1979년 방한 때 마찰을 빚고 있던 박정희를 개신교 신자로 전도하려 한 일은 유명하다. 뿐만아니라 당시 공산주의 국가이던 폴란드의 기에레크 서기장에게도 전도를 시도했다.

2013년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가톨릭과 이슬람교의 행태와 교리를 비판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가톨릭이슬람에 남아 있는 성차별적 요소를 비판한 것이다. 가톨릭에서 여성 사제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이슬람에서 여성을 차별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이야기. 다니던 교단에서 여자 목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여 여자 목사를 인정하는 교단으로 옮긴 인물이니, 충분히 납득이 가는 발언이다.

카터가 자신의 신앙에 대해 말하는 영상들. 예수의 산상수훈을 언급하며 "하나님의 은총은 비신자들에게도 열려 있으며, 무신론자도 좋은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6. 등장 매체[편집]

남북전쟁을 모티브로 한 대체역사소설 타임라인-191 시리즈에서는 젊은 나이에 남부연합[44] 해군육전대로 휴가중 집을 지키다가 흑인 게릴라 부대의 총격으로 사망한다.

워게임: 유러피안 에스컬레이션의 DLC 캠페인 "중대한 오류(Fatal error)"[45] 에서는 자던 와중에 페탈 에러 사건이 벌어졌고 졸지에 안보보좌관 브레진스키가 모든 전쟁 권한을 떠안아 보복 핵공격과 전면전을 지시한다.[46] 이후 소련의 핵공격이 없었음을 알자 발사한 핵미사일을 다 자폭시켰지만 NATO군은 매우 뜬금없이 바르샤바 조약군을 패퇴시켜 동서독을 무력통일하였고 이는 구소련 영향권의 몰락을 불러와 졸지에 "번개와 같은 신속한 행동으로 소련을 무릎 꿇린" 위대한 군사지도자에 올랐다.

심슨 가족에서는 항상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안습한 전 대통령으로 나온다. 스프링필드에 카터의 동상을 세웠는데[47] 그걸 공개하자마자 시민들이 나쁜 놈이라면서 폭동을 일으키고 동상을 끌어내리며 길바닥에서 끌고 다녔고, 번즈의 생일 행사에 전직 대통령들이 입장하는데 재선 못한 사람은 안 받아준다며 입장 거부당하고 뒤이어 입장 거부당한 조지 H.W 부시한테도 무시당한다. 주택 건설 봉사를 할 때는 조지 H.W 부시를 모르고 건설 자재로 때렸다가 두들겨 맞기도 했다.

레이첼 맥아담스, 해리슨 포드 주연의 '굿모닝 에브리원(Morning Glory)'에서는 성범죄 용의자(Sexual offender)라고 나오는 굴욕을 당했다. 사실 극중에서도 카터가 성폭행을 저질렀다는 게 아니라, 뉴스 중에 도주중인 성폭행 용의자 소식을 전한 후 화면이 지미 카터 근황 소식으로 넘어갔는데 자막이 계속 'sexual offender'라고 떠 있었던, 즉 방송사고 장면.

상기한 예시들처럼 뭔가 거물 정치인 중 만만한 사례로 미국 대중매체에서 자주 인용된다. 코난 오브라이언스티븐 연과 함께 찍은 디지털쇼트 찜질방 편에서도 코난이 농담의 소재로 언급한다. "이봐, 그 땟국물들은 지미 카터가 대통령이던 시절부터 내 몸에 붙어있었다고!" 아무래도 카터의 이미지가 개신교 평화주의자라서 그런지 소송드립에서 좀 자유로울 것이라는 미국사회의 편견 같은 게 있을지도?[48]

울펜슈타인 2: 더 뉴 콜로서스에서는 해당 세계관의 자니 카슨이라고 할 수 있는, TV 토크쇼 진행자로 '지미 카버'가 등장하는데, 이름이나 생김새나 영락 없는 지미 카터를 모델로 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7. 장수[편집]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장수하고 있는 대통령이기도 하다. 2018년 1월 29일에 로널드 레이건(93년 120일)의 기록을 넘어섰고, 3월 6일에 제럴드 포드의 기록(93년 165일)을 넘었다. 조지 H. W. 부시가 11월 30일 사망한 뒤인 2019년 3월 22일 이후로 아버지 부시의 기록도 넘었으며, 2020년 10월 1일 생일을 보내 96세로 확정. 그리고 퇴임 후 지내는 시간이 가장 긴(2021년 기준 40년) 전직 대통령이기도 하다.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도널드 트럼프와 함께 현재 생존하고 있는 전직 미국 대통령 5명 중 한 명으로 당연히 이들 중 나이가 가장 많다. 카터 전 대통령은 1924년생인데 클린턴 전 대통령과 부시 전 대통령 그리고 트럼프 전 대통령은 1946년생[49], 오바마 전 대통령은 1961년생이다.[50]

영국의 군주 엘리자베스 2세보다도 2살이나 많다. 할리우드 배우들로 보자면 1950~60년대 황금기를 맞은 세대들[51]과 나이가 비슷하다.

사실 카터는 암 중에도 최악의 암이라는 췌장암으로 많은 가족을 잃었다. 아버지와 형제자매를 모두 췌장암으로 잃었고 어머니는 췌장암은 아니지만, 유방암이 췌장에까지 전이되어 세상을 떠났다.# 이런 췌장암 가족력 때문에 카터가 이렇게 장수한 것은 인간 승리라고 할 수 있다.[52]

또, 2019년 10월에는 낙상으로 눈이 심하게 멍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집짓기 행사를 참여하는 등 괜찮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7.1. 시한부 흑색종 4기 선고와 완치[편집]

2015년 간 종양이 발견되어 수술을 받아서 좋은 결과가 나온... 줄 알았는데 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된 것이 발견되어 수술을 받을 예정이라 한다. 암은 흑색종으로 진단되었으며 간에서 종양이 2.5cm 절제되었다. 허나 암이 뇌에 전이된 것이 발견되었고, 2015년 8월 20일(현지시간) 오후에 첫 방사능 치료를 앞두고 있다.

8월 말, 그는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회견을 통해 밝혔다. 그는 매주 자신이 강연하는 교회 주일학교 성경교실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 대신 성경교실을 이끌려고 기다리는데 그들에게 좋은 기회가 될 거예요."라며 의연한 모습을 보여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SBS 보도,죽음 앞둔 '평화전도사'…뭉클한 품위

그런데 감동이 가시기도 전인 2015년 12월 6일 암을 치료했다는 소식이 나왔다. 카터는 본인이 다니는 교회에 나와서, 면역관문수용체[53] 기술을 이용한 새로운 약물 치료법으로 4기 흑색종(뇌에 전이된 부분 포함)이 완치되었다고 발표했다.#영문 그리고 그 다음날인 12월 7일 손자인 '제임스 카터'가 카터 전 대통령의 자선 재단 '카터 센터'에서 공식적으로 흑색종이 완치되었음을 발표했다. 면역 요법제(Immunotherapeutic Drugs)인 키트루다[54]를 사용해 흑색종을 치료했다고 하는데 가장 최근에 받은 MRA[55] 검사에서 뇌에 전이되었던 흑색종이 사라졌다고 한다. #영문 #BBC 보도

암 중에서도 무섭기로 소문난 뇌암에다 당시 카터가 91세의 고령임을 고려하면 기적에 가까운 일로, 현장에 있던 사람들 역시 박수 갈채를 보냈고 네이버 검색어 핫토픽 키워드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다만, 종종 뇌부위에 암이 돌아와서 아직은 계속 치료중이라고 하는데, 만약 암의 재발을 잘 막아낸다면, 장수의 길이 활짝 열릴 듯.

레딧 뉴스 서브 쪽 댓글#레딧 영어 댓글을 보면 불사신 영감님, 대통령 재선 선거 때 낙선했으니 미국 법률상 대통령 후보 출마가 가능하니 이번에 2016년 대통령 선거 후보로 나와 재선하자는 댓글이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카터는 1980년에 레이건에게 패배해 재선에 실패했으므로, '이론상'으로는 대통령 선거 출마가 가능하며, 이런 경우에는 상대 편 쪽에서는 아버지 부시도 나올 수 있다. 물론 이건 카터의 나이를 생각하면 어려울 듯하다. 무엇보다도 아버지 부시가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둘 다 선거에 나오는 일은 영영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가 암을 이겨낸 지 불과 2주 만에 그의 손자인 제레미 카터가 사망했다는 비보를 듣게 되었다. 그나마 수면 중 심장마비로 고통없이 사망했으며 심장병에 걸린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8. 기타[편집]

저술활동을 상당히 즐겨, 20권이 넘는 책을 집필했다. 한국에도 몇 권의 도서가 번역되어 출간되었으며, 가장 최근에는 카터의 자서전이 2018년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카터는 집필한 책 가운데, 두 권을 통해 그래미상도 두 차례 수상했다. 2016년 그래미상 수상 도서가 바로 카터의 자서전이다.

한국어 위키백과의 첫 번째로 작성된 문서의 표제어이기도 하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2002년 10월에 서비스를 시작하였는데, 그 당시 지미 카터가 노벨평화상 수상자라서 먼저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관련 링크).

정식 퍼스트네임 본명 대신 애칭을 본명처럼 사용한 최초이자 셋뿐인 대통령이다. 제임스(James)라는 본명이 올드하게 생각했는지 대신 지미라는 애칭을 성과 합하여 '지미 카터'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했다. 선거 포스터나 언론 기사 등 대외적으로 언제나 '지미 카터'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했고, 미국인들조차도 위키피디아를 찾아보지 않는다면 그의 본명이 제임스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56] 지미 카터 이외에는 빌 클린턴이 윌리엄이라는 퍼스트 네임 본명 대신 빌이라는 애칭을 가지고 '빌 클린턴'이라는 이름을 대외적으로 사용했고, 조 바이든 현 대통령도 조세프 대신 조라는 애칭을 주로 사용한다(덤으로 이들의 공통점은 풀네임이 ○세로 되어 있다. 지미 카터는 제임스 얼 카터 2세, 조 바이든은 조세프 로비넷 바이든 2세, 빌 클린턴은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드 3세. 셋 다 민주당 대통령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아이젠하워의 경우 아이크라는 애칭으로 불리웠지만 본인이 사용한 것이라기 보다 언론이 긴 독일식 성 대신 붙여진 애칭이라 할 수 있으며, 이와 별도로 그가 언론이나 선거에서 대외적으로 사용한 이름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라는 본명이었다.

존 F. 케네디 이후로 계속 이어지던 해군 출신 대통령의 기록을 그가 마감했다. 이후, 후임 로널드 레이건을 건너 뛰어 조지 H. W. 부시가 현재로서는 마지막 해군 출신 대통령이 되었다.

웹툰 이말년 서유기에 드립으로 등장했다.프랑스에 사는 불효자는 에밀 졸라. 그렇다면 미국에 사는 불효자는? 미국에 사는 불효자(...) 라고.[57]

롤링 스톤즈믹 재거를 닮았다.

1979년 국빈으로 한국에 방한했을 때, 영부인 로잘린 여사와 딸 에이미 카터가 덕수궁 방문 도중 구두 끈이 끊어지자 맨발로 걸어다녀 한국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자식을 유일하게 워싱턴 D.C.의 공립학교에 보낸 대통령이다. 이렇게 보면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사실 자녀를 보낸 공립학교가 있던 지역이 흑인밀집지역이데가 교육 수준이 형편없기 때문에 거의 빈민가이다. 공화당계는 물론 민주당계 대통령들도 자기 자식들을 값비싼 사립학교에 보냈다. 버락 오바마도 두 딸을 연 3만불 가까이 수업료를 받는 사립학교에 보냈을 정도인데, 카터는 유일하게 공립학교에 보냈다.

4년 임기를 채운 대통령 중 연방 대법관을 지명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 유일한 대통령이다. 4년을 채 못 채우고 백악관을 떠난 카터의 전임자 제럴드 포드조차도 연방 대법관을 지명할 기회가 있었던 걸 생각하면[58] 나름 안습...

여담으로 모타운을 설립한 배리 고디와 육촌이다.[59]

조 바이든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에서 지미 카터가 작게 보인 것이 화제가 되었다.#

카터 이후 당선된 대통령들은 모두 키 180cm를 넘는다.당장에 20세기에 집권한 대통령들 중 180cm를 넘지 않는 사람은 카터 포함 6명 뿐이다.[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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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명한 연쇄살인범 존 웨인 게이시를 만난 적이 있다. 다만 당시에는 게이시의 살인이 밝혀지기 전이었기에 단순히 평범한 사회사업가 겸 지역 유명인으로 알고 만난 것이었지만. [2] 비슷한 예로 후에 빌 클린턴이 있다. 이쪽은 풀네임이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이며, 본래는 윌리엄 블라이스 3세였다. 빌 클린턴의 경우 법안에 서명은 '빌 클린턴'으로도 자주 했지만 취임 선서를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이라고 했기에 사면장 등에는 '윌리엄 J. 클린턴'이라고 서명했다. 조 바이든 역시 본명은 조지프 로비네트 바이든 주니어지만 애칭인 조를 공식적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조 바이든 역시 취임 선서에서는 본명을 사용했다.[3] 입학은 1943년에 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때문에 교육기간이 단축되었다. 참고로 동갑내기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1942년 해군으로 입대했다.[4] 요즘 대통령의 이름은 웬만하면 항공모함에 붙지만 잠수함에 근무했다는 인연으로 세계 최강의 원자력 잠수함 시울프급의 3번함이 그의 이름을 따서 '지미 카터'로 이름지었다.[5] 카터는 미국 해군사관학교와의 인연으로 2004년 펫코 파크 개장 첫 공식경기 때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부터 초청을 받아 시구를 던지기도 했다.[6] 주지사 명단. 1847년부터 파랑의 압박에 주의하라.[7] 심지어 2차대전 이후 미 해군 최고의 명장에 꼽히는 엘모 줌왈트 제독도 깨갱했을 정도.[8] 얼마나 무명이었는지 대통령 경선 당시 갤럽에서 민주당 후보 32명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는데 명단에 카터의 이름은 없었다고 한다.(이전에 경선장에서 카터가 직접 받았다는 것은 작성자의 기억의 오류임) 한마디로 아웃 오브 안중이었던 셈. 그럴 법도 한게 경력이란게 주의원 4년, 주지사 4년이 전부다. 이정도면 도널드 트럼프에도 안 밀릴 갑툭튀다.[9] 사실 이 시기에는 스윕 결과도 많았다. 린든 존슨의 1964년 486:52, 닉슨의 1972년 17:521, 레이건의 1980년 49:489, 1984년 13:525 등.[10] 부통령 후보인 월터 먼데일의 고향이다.[11] 그리고 현재 각 주들의 정치 상황을 볼때 앞으로도 영원히 나올 일은 없을 듯. 사실 이 당시 남부가 카터 편을 든 것은 공화당의 남부 전략과 민주당의 진보화로 양당의 텃밭이 바뀌어가는 와중에 워터게이트의 충격+남부 출신인 카터+포드의 공산권에 대한 미적지근한 태도 등등이 겹쳐서 일어난 일종의 회광반조(?)라고 할 수 있다.[12] 그리고 민주당이 이후 대선 때 조지아 주에서 다시 승리를 거둔 건 남부 아칸소 주 주지사인 클린턴이 승리한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뿐이다. 특히 2020년에는 개표 초중반까지는 도널드 트럼프 우세였다가 막판에 조 바이든이 역전하였다.[13] 파일:fordreagancarternixon.jpg 사실 이 사진은 편집된 사진으로, 원래는 오른쪽에 당시 부통령 이였던 조지 H. W. 부시도 있었다.[14] 사실 다른 3인이 만약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전부 100살을 넘긴 나이이다.(제럴드 포드: 1913년 7월생, 리처드 닉슨: 1913년 1월생, 로널드 레이건: 1911년 2월생)[15] 대통령에 취임한 첫 해이자, 그 해 3월에 존 힝클리 주니어에 의한 암살 미수 사건이 벌어지기도 해서 만약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일을 당할까하는 우려였을 것이다. 아니면, 전직 대통령 3인이 사다트 집권기(1971년 ~ 1981년)와 같은 기간이었던 대통령이었던 점을 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16] 당시 북한 정권에 무지했던 김영삼 대통령은 북한 체제의 동요를 전쟁 가능성으로 보고 강경대응하려 했지만, 당시 영국 유학중이던 김대중은 유화적 대응 및 비밀 회담을 제의했다.[17] 역대 최악까지는 아니나, 후에 대통령을 역임하는 로널드 레이건,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보다는 평가가 대체로 낮은 편이다.[18] 사실상 보수 정치계의 영웅 중의 영웅인 레이건이 급상승해서 하필 카터와 맞붙었는데, 카터의 경우 역대 미국 대통령 중 평균에 못 미치는 내치 수준을 보였기 때문에 대다수의 유권자들이 레이건에 투표한 것이 컸다.[19] 이란의 호메이니는 인질을 레이건 취임식 직후에야 이들을 풀어줌으로써 끝까지 카터를 엿먹였다. 하지만 이 문제는 사실 레이건이 아닌 카터가 풀었는데 안습. 그리고 호메이니는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더 큰 엿을 먹고 말았다.[20] PRM-28 참고 # pdf 파일 특히 "사회를 바꾸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라는 구절이 인상적이다.[21] 나이지리아 동부 지역[22] 폴란드에 왜 개입하지 않았냐는 시각이 있지만 근거가 없다. 당시 폴란드에 카터가 브레즈네프와 싸워가며 간섭했다면 그것은 민주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냉전시작 이래의 친소정권을 뒤엎는 시도가 됐을 것이다. 물론, 80년대에 폴란드 자유노조는 서방측 단골 토픽이었지만, 소련 몰락 전에는 가능성없는 이야기.[23] 이때 김영삼이 국회에서 제명된지 얼마 안 됐던 때였다.[24] 미국 외교력의 특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의 힘은 마치 큰 몽둥이 같아서, 12.12사태 같은 현상을 고치기에 필요한, 의료용 메스처럼 작고 정밀하게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절대 아니다. 조금이라도 심기 불편하다는 뉘앙스조차도 가히 절대적인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게 미국의 힘이지만, 메스처럼 국지적 상황에서 정밀하게 작동하기는 또 어렵단 것. 미국은 당시 보복성 외교절차를 생각했지만, 결국 대북 억지력을 위해 별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25] 미 대사관을 비롯한 미 당국은 투옥된 김대중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2016년 기사[26] 나이도 같고, 둘 다 젊은 민주당/신민당 소속의 개혁파에 속하는 대통령이며, 인권운동을 하고 평화주의자였던 것 등에서 겹치는 측면이 많았다.[27] 피랍된 인질들을 구출하려던 군사작전.[28] 미국에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은 정치성향과 상관없이 나타나는데, 훗날 보수진영의 탄핵반대 태극기 시위에 등장한 성조기, 진보진영의 소수자 인권 시위에 등장한 성조기를 들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혹은 대한민국 국군의 평시작전통제권은 주한UN군 사령관 즉 주한미군 사령관에게 있었다며 미국 대통령에게 확실한 책임을 묻는 견해도 있다.[29] 카터 정권 당시의 이름은 MX 미사일[30] 여담이지만 박정희 장권 말기의 경제사회불안도 오일쇼크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이 내건 정당성과 국민이 인정한 정당성은 어쨌든 먹고사니즘이었는데, 설사 외적 요인 때문이라 해도 그 목표가 불투명해지면서 불만이 커지게 되었고 당장 내려오라는 말이 힘이 얻을 수밖에 없었다.[31] 1978년, 이 규제 완화가 훗날 항공산업 대세를 크게 뒤바꿨다. 팬암이나 유나이티드 항공 등 기존의 대형 항공사들이 몰락한 대신, 사우스웨스트 항공으로 대표되는 저가 항공사들이 크게 성장했다.[32] Motor Carrier Act of 1980. 관련 법인수를 폭발적으로늘렸고 전국단위 운임을 내렸으며 화물운송노조의 힘을 크게 약화시켰다.[33] 징검다리로 집권한 그로버 클리블랜드를 더하면 9명[34] 존 애덤스는 연방주의자로 집권했으나 정당의 개념이 처음 생긴 시대였으니 논외. 그로버 클리블랜드도 사실 위 기준에 들어가긴 하는데, 그는 낙선 4년 뒤 재기했다. 애덤스vs제퍼슨, 퀸시 애덤스vs존슨, 밴 뷰런vs해리슨, 클리블랜드vs해리슨 대결의 경우는 2번 맞부딪쳐 각각 1승 1패를 한 케이스. 2016년 대선에서 정권교체에 성공한 트럼프도 카터처럼 단임에 그치게 되었지만 득표율 47%로 선거인단을 25개주에서 232명은 확보했기 때문에 카터 만큼의 참패는 아니다. 반면에 카터는 불과 6개 주에서 49명 밖에 확보하지 못했을 정도로 철저하게 패했다.[35] 이후 민주당이 집권한 것은 민주당 버전의 레이건인, 쇼맨쉽 뛰어나고 정치를 잘하는 클린턴이 나오기까지 한 번도 없었다.[36] 인플레를 잡으면 실업이 증가한다는 것은 '필립스 곡선'으로 유명한 이야기다. #[37] 아예 케인스 경제학보다도 좌파적인 해석에선 포드주의 이래 뉴딜 호황으로 잠시 화해를 맞았던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가 필연적인 인플레로 파국을 맞았으며 결국 자본가와 통화의 승리로 끝났다고도 해석한다.[38] 그러나 그 클린턴도 비슷한 면이 있다. 소말리아 문제, 북핵 문제 등. 걸프전의 뒷처리를 해야 하는 대통령이라 축소기에 있기는 했지만, 클린턴도 임기말에는 유고 내전 등 큼직큼직한 군사행동을 결정해야 했다.[39] 1928년생으로 당시 겨우 만 49세에 발탁되었다. 폴란드계로 망명한 외교관의 아들이었기에 더 반공적이고 러시아에 원한이 있었다. 2017년 5월 26일 타계.[40] 브레진스키는 그때 "이제 소련은 놈들의 베트남 전쟁을 겪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고 그건 사실이었다. 특히 베트남 전쟁에서 실패한 미국이 불황을 겪어도 나중엔 회복한것과 달리 소련은 아프간 전쟁에서 실패한 후 경제에 회복할수 없는 큰 타격을 입었고 이는 소련이 망하는 중요한 원인으로 적용된다.[41] 미국 개신교 최대교단 중 하나인 남침례회였으나, 여성 목사를 인정하지 않는 것에 반발하여 다른 침례교 교단으로 갔다.빌 클린턴역시 카터를 따라 2008년 새로운 침례교 교단으로 옮겼다.[42] 단,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 성향의 개신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 계열의 목회자나 개교회 중에서도 예배 인도자의 성향에 따라 오히려 보수 성향을 띄는 경우도 많으니 교단의 성향이랑 교단에 소속된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 개개인의 성향이 꼭 일치하지도 않는다.[43] 이건 사실 가톨릭을 포함해 개념적인 크리스천으로선 평범할 정도의 상식이다. 다만, 카터가 속한 미국의 침례회는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 교단이라서, 교단 차원에서 동성결혼을 반대하며 더불어 장로회감리회 등에서 허용하고 있는 여성 목사 임직을 허용하지 않는 교단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그 중에서도 최대 교파이자 가장 근본주의에 가까운 분파라 할 수 있는 남침례회 출신이므로 카터가 엄청 특이한 경우. 단, 정치적 보수와 신앙적 보수가 항상 일치하는 건 아니라(대체로 일치하는 편이긴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의외로 있다.) 그리 이상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44] 본작에선 남부연합이 1944년까지 존속한다.[45] NORAD에서 근무하는 엔지니어가 새 미사일 요격체계 연습 전, 시스템을 훈련 모드로 돌려야 되는걸 잊고 소련이 일제히 전면 핵공격을 한다는 시나리오 디스크를 삽입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수천개의 핵미사일이 미국을 향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는 경보가 발령되었다. 당직자에게 일단 묵념[46] 실제 역사에서는 NORAD에서 2200여개의 핵미사일이 발사되었단 경보가 울렸지만 다른 기관에서 이런 경보가 없어서 허위경보임을 안다.[47] 마지가 감옥에 가는 바람에 공모금이 부족해서 땜빵으로 만든 동상이다.[48] 역으로 말하자면 위 문단의 '굿모닝 에브리원'에서 해리슨 포드가 "이제 카터에게 소송당할 준비나 하라고, 뭐 성범죄 용의자?"라고 비꼬는 건 그만큼 큰 방송사고를 쳤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49] 가장 최근에 대통령을 지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이 3명중 생일이 가장 빠르다[50] 현직 대통령인 조 바이든은 1942년생으로 카터와는 18세 차이. 참고로 바이든도 이미 평균 수명을 넘겼고 대통령들 중 아주 나이가 많은 편임을 감안하면...[51] 말론 브란도와 동갑이고 오드리 헵번, 마릴린 먼로보다 먼저 태어났다. '대부'에서 말론 브란도의 아들 역을 맡은 알 파치노가 지금 80세이다.[52] 카터의 경우 뇌암에 걸렸지만 완치했다.[53] 2018년 노벨생리의학상의 주제였다.[54] 상표명 Keytruda, Pembrolizumab. PD-1 저해제[55] Magnetic Resonance Angiography. MRI를 통해 뇌 혈관만 보는 검사다.[56] 물론 미국인이라면 지미가 애칭이고 제임스 정도가 본명일 것이라고 직감적으로 추측할 수 있지만, 이를 확실하게 확인해 보고자 할 때, 제임스라는 본명이 공식적으로 사용된 경우가 거의 없으므로 위키피디아를 찾아서 확인할 수 밖에 없는 것.[57] 지미(지 어미) 카터(cutter). 지 어머니를 베는 놈이라고(...).[58] 2010년 6월에 은퇴한 존 폴 스티븐스 대법관을 지명하였다.[59] 배리 고디의 할아버지 배리 고디 1세와 지미 카터의 외할아버지가 이복형제이다.[60] 60 다른 5명은 윌리엄 매킨리(170cm),시어도어 루스벨트(178cm),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179cm),해리 S 트루먼(172cm),캘빈 쿨리지(178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