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수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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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신강성 정부주석
정체
金樹仁
간체
金树仁
한국식 독음
영문
Jin Shuren
덕암(德庵)
출생
1879년 청나라 감숙성 금가현
사망
1941년 9월 12일 중화민국 감숙성 란저우
국적
학력
청나라 수재
직업
군인

1. 개요2. 생애
2.1. 신강왕이 되기까지2.2. 폭정2.3. 1931년 하미 반란2.4. 몰락
3. 참고문헌

1. 개요[편집]

중화민국의 군벌. 양쩡신의 뒤를 이어 짧은 기간 동안 신강성의 지배자가 되었으나 무능으로 인하여 4.12 디화 정변으로 축출되었다.

2. 생애[편집]

2.1. 신강왕이 되기까지[편집]

1879년 감숙성에서 5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92년 과거에 합격하여 수재가 되었으며 감숙성의 지현으로 부임한 양쩡신과 만나 그의 부하가 되었다. 양쩡신의 후원으로 감숙문고등학당, 법정대학을 졸업하였으며 용천서원과 봉림서원 원장으로 재직했다. 1908년, 양쩡신을 따라 신강성으로 이주하였으며 그를 추종하며 승진을 거듭했다. 1911년 신해혁명 발생 이후 수립된 중화민국 중의원에 당선되었다. 1915년, 양쩡신의 서기관에 임명되었다가 아커쑤현 현장을 역임했고 10년간 현장에 있다가 1926년 우루무치로 돌아와 신강군 부사령관 겸 민정청장에 임명되었다.

1928년 7월 7일, 양쩡신판야오난의 음모로 살해되자 관인을 차지하여 신강성 주석에 취임하려는 판야오난과 그 지지자들을 체포하여 처형한 후 스스로 신강성 정부주석 겸 신강군 사령관에 취임하였다. 1928년 11월 17일, 국민정부가 그의 직위를 승인함에 따라 공식적으로 신강의 지배자가 되었다. 집권 후 친척과 고향 감숙성 사람들을 대거 초빙하여 군직에 앉혔다.

2.2. 폭정[편집]

양쩡신의 통치가 구시대적일지언정 안정적이었다면 진수런의 통치는 과격하고 무능했다. 양쩡신은 재정적자에도 불구하고 통화량을 1000만 량 이상으로 늘리지 않았지만 진수런은 집권 초기부터 통화량을 1억 4500만 량으로 폭증시켰으며 기존 세금을 증세하는 한편 가축 도축세를 비롯하여 새로운 세금을 대거 신설했다. 그리고 금, 옥, 양가죽을 비롯한 주요 산업들을 사익을 위해 독점하고 이렇게 모은 재산을 베이징에 저축하였는데 당시 신강성을 여행하던 영국인 피터 플레밍은 진수런을 들어 "탐욕스러움이 행정적 재능에 의해 충분히 뒷받침되지 못한 관료."라고 그를 비판했다.

진수런의 또 다른 학정은 양쩡신이 세심하게 관리해돈 소수민족들의 불만을 폭발시킨 것이었다. 진수런은 신강성 무슬림들의 메카 성지 순례를 금지(!)하였으며 기존의 비한족 엘리트들을 숙청하고 한족 관료들로 무리하게 대체하려 했다. 또한 산악지역의 몽골과 키르기스족 유목민들에게 한족 관리들의 통제를 받을 것을 명령했고 기존 종교 지도자들의 권리를 부정해버렸다. 또한 양쩡신이 용인해왔던 신강성의 작은 칸국들을 모조리 폐지했다. 당시 하미 칸국의 칸은 막수드 샤였는데 막수드 샤가 1930년 사망하자 진수런은 하미 칸국을 폐지하고 하미, 이허, 이우 3개 행정구역을 새로 설치하였다. 막수드 샤가 위구르족에게 가혹한 노역과 무거운 세금을 물리던 폭군이었기 때문에 위구르인들은 처음에는 진수런의 지배를 환영하였으나 진수런은 이들의 기대에 농업세를 2배로 늘리는 것으로 보답했고 위구르 농부들이 휴경하고 있던 농지들을 몰수하여 한족 이민자들에게 주었다. 또한 한족 이민자들에게 농기구와 종자를 무상으로 공급하고 2년간 세금을 면제하는 등 적극적인 한족 이민을 추진했고 위구르족을 사막의 황무지로 내몰았다.

1931년에는 난징 국민정부의 허락 없이 소련과 신강임시통상협정을 체결하였다.

2.3. 1931년 하미 반란[편집]

그러다가 1931년 2월, 하미의 샤오푸 마을 징세관 겸 경찰서장 장씨가 위구르인 미녀를 강제로 자신의 아내로 삼으려고 들자 분노한 위구르인들이 중국인 경찰들을 살해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100가구 상당의 한족들을 학살하였다. 진수런은 여단장 웅발유를 파견하여 하미를 도로 장악했으나 보복으로 닥치는대로 위구르인들을 학살하여 민심을 폭발시켰다. 한족들에게 항복해봐야 죽음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위구르족들은 너도나도 무기를 들고 저항하기 시작했고 막수드 칸의 대신이었던 호자 니야즈율바르스 칸이 가세함에 따라 소요는 곧 1931년 하미 반란이라는 위구르족들의 대규모 반란으로 번졌다. 여기에 카자흐족, 키르기스족, 회족을 비롯한 소수민족들이 가세하였다.

호자 니야즈율바르스 칸하미 칸국의 복고를 주장하며 일으킨 반란은 이들이 감숙성 군벌 마중잉의 도움을 요청하면서 조직적인 반란으로 커졌다. 감숙성의 야심가이며 국민혁명군 36사단장이었던 마중잉은 10대의 나이에도 엄청난 위세를 떨치는 야심가였고 율바르스 칸의 요청으로 신강성을 정복하여 새로운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신강으로 진출하였다. 국민정부는 위구르족 반란을 진압하기는커녕 이들에게 수정공서주임 자리를 내줌으로 오히려 이들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고 1933년 시점에는 우루무치까지 위험해졌다.

진수런은 사태를 만회하기 위해 난징 국민정부에 비서인 노효조를 파견하여 상교참모 성스차이를 신강성의 육군군관학교 교장 겸 독판공서 참모주임으로 임명하여 신강성의 군관 훈련 시스템을 개혁하고 마중잉을 상대하기 위한 전법을 연구하게 하였다. 신강성의 연고가 없던 성스차이는 진수런의 신임 하에 순식간에 신강성 최고의 군사 실력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2.4. 몰락[편집]

결국 1933년, 4.12 디화 정변이 일어남에 따라 진수런은 신강성의 지배자 자리에서 축출되었다. 진수런은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믿었던 성스차이가 쿠데타군과 합세하여 신강성 독판에 임명되어 그의 세력을 격파함에 따라 소련으로 망명했다. 4월 24일, 진수런은 자신이 난징으로 돌아갈 것이라 발표했고 1933년 10월, 중국으로 귀국하여 난창에서 장제스와 만났다. 하지만 국민정부는 성스차이로부터 진수런이 국민정부의 허락도 없이 소련과 협정을 체결한 것을 알고 있었고 국민정부 비서장 저민의는 진수런을 기소하였다.

1935년 3월, 진수런은 3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으나 그해 10월 10일, 국민정부 주석 린썬의 명의로 사면되어 고향인 감숙성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후 란저우에 거주하다가 중일전쟁 중인 1941년 사망했다.

3. 참고문헌[편집]

  • 신장의 역사, 제임스 A. 밀워드, 사계절.
  • 중일전쟁시기의 중소관계 : 성세재의 역할을 중심으로, 정형아, 중국근현대사연구 39호, 중국근현대사학회.
  • 盛世才의 新疆지배와 성격, 이선희, 전남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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