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통일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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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쟁패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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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2.1. 통일 이전2.2. 통일 이후2.3. 분열과 멸망
3. 역대 군주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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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최초의 황제국

중국의 서주 시대부터 존재하던 제후국. 춘추오패 국가 중 하나다. 중국어 발음은 Qin(친).[1]

춘추전국시대를 종결시키고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세운 국가이다. 춘추전국시대의 전반기라고 할 수 있는 춘추시대에 공존했던 다른 춘추오패인 진나라(晉)와는 다른 나라다.

중국 서부에 위치한 나라로, 척박한 땅과 야만적인 국가란 이유로 무시당했지만[2] 꾸준히 무력으로 주변국을 강하게 압박하였으며, 진시황에 이르러 중국을 통일하게 된다. 이후 만리장성을 쌓고,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하는 등 하나된 세계로써 중국의 기틀을 다졌지만 2세 황제에 이르러 전국은 반란으로 분할되고, 진왕 자영대에 이르러 제후국으로 내려앉아 멸망하고 말았다.

국색은 검은색이었다. 황제의 의복, 관리들의 관복, 군복, 군기의 색을 검은색으로 통일했고 심지어는 백성들도 검수(黔首)라고 불렀다고 한다.[3]

국호 '진'이 서양권에서 중국을 지칭하는 이름인 시나(Sina)[4]차이나(China)의 어원이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2. 상세[편집]

2.1. 통일 이전[편집]

사기에 의하면 진은 은나라 주왕의 시중을 든 간신 오래의 후예라 한다. 오래의 아버지는 비렴인데 비렴에게는 오래 말고도 계승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이 계승의 후손 중에서 조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조보는 말을 잘 몰아 주 목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던 어느날 목왕은 기, 온, 화류, 녹이라는 명마를 얻어 서쪽으로 순수를 떠났는데 너무나 즐거워 돌아오는 것을 잊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서언왕이 난을 일으키자 조보는 목왕의 수레를 끌고 하루에 천리를 달려 주로 돌아와 난을 평정하니 목왕은 조성을 조보에게 주고 조보는 이때부터 조씨가 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오래의 자손들도 조성에 살며 조씨로 살고 있었는데, 기원전 900년 즈음에 주의 효왕을 시중들고 있던 비자가 말의 생산을 실시해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이에 효왕이 "옛날 백예가 순 임금을 위해 가축을 잘 번식시켜 봉토와 영씨 성을 받았는데 그 후손이 다시 가축을 잘 관리하니 땅을 주고 부용국으로 삼는다."라고 하여 영(嬴)이라는 성, 조(趙)라는 씨를 받아 영씨의 제사를 잇고, 대부가 되어 진(秦)읍에 영지를 받았다고 한다.

진은 춘추시대에 들어가는 동시에 제후가 되었지만 풍속적으로는 중원 제후국과 크게 달라 야만스러운 나라로 여겨졌다. 대대로 진나라 제후들은 주로 서융과 항쟁하면서 영토를 확장했고 법률의 정비 등을 실시하여 나라의 기틀을 만들어 갔다.

법가 사상이 공식적으로 채택되기 전부터도 진나라는 다른 나라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법가 사상가들의 시조라고 볼 수 있는[5] 순자는 진나라를 방문하고 방문기를 남겼는데, 그 묘사를 보면 개미굴의 느낌을 준다. 순자가 감탄한 점은 엄격하게 집행되는 법률 아래서 각 백성들이 불평없이 각자 맡은 일을 척척 한다는 것인데, 순자가 든 유일한 진나라의 단점은 유학자들이 없다는 것이다. 민족적으로 봐도 진나라의 반은 이민족이었으며 이렇게 이민족과의 부단한 투쟁 및 사방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군국주의적인 분위기가 나라에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진이 최초로 흥한 장소는 현재의 간쑤 성 리 현 부근이며 현재 이 땅에서 진의 선조의 능묘라고 추정되는 것이 발견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기원전 770년에 주나라가 견융에 쫓겨 도성을 동쪽으로 천도하는 과정에서 양공은 주의 평왕을 호위 한 공으로 주의 구지인 기(岐)에 봉해지게 되었고, 이후 진은 제후의 반열에 오르고, 융족이 정복해있는 땅을 영지로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영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견융족을 대거 공격했지만 사망할 때까지 성공하지 못했다.

통일 이전에는 제후국 중 가장 서쪽에 위치한 변방국으로 춘추시대에는 수도가 옹이었으나 전국시대에는 함양[6]이 수도가 되었다. 본디 서융의 변방국이자 소국이었으나 견융의 침략으로 주 왕실이 쇠해졌을때 진(晉)과 함께 가장 먼저 왕을 도운 공로로 백작위를 제수받고 옹주를 제패함으로써 실질적인 천승지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이를 서융지패라고 하는데, 옹주를 평정하는 과정에서 진나라 국군(國君)이 몇 명이나 전쟁터에서 사망한다. 결코 그저 거저 먹은 게 아닌 것.[7]

목공 시절에는 오랜 전란에 시달린 중원에서 많은 인구가 유입되면서 그중 백리해와 건숙을 등용하여 국력을 착실히 키워나갔고, 서쪽에 치우친 위치 때문에 중원의 제후국들에게는 크게 인정받지는 못했으나 서융에서 신하로 일하던 유여를 포섭하여 진(秦)나라로 유여가 건의한 방법으로 서융의 여러 부족들을 복속시켜 서방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목공은 진(晉)나라의 내전에 두 차례나 개입, 결국 진문공(晉文公)을 진나라 왕으로 세워 친선관계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진(晉)문공은 진(秦)목공의 연상의 사위다.

그러나 중원 진출을 노리는 진(秦)나라는 중원으로의 길목에 위치한 진(晉)과는 자웅을 가릴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미 진문공의 사후, 진(晉)과 진(秦)은 적대관계로 돌아섰고, 이 대립관계는 진(晉)이 멸망하고 삼진(三晉)으로 불리우는 , , 이 일어선 후까지도 계속되었다.

진(晉)의 국력이 유지되는 동안 진(秦)나라는 중원에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으나[8], 황하 문명의 근거지라 할만한 위수 인근의 비옥한 황토지대를 영유한 진(秦)은 착실히 국력을 쌓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풍부한 진의 잠재력에 불을 붙인 촉매는 공손앙(혹은 위앙 또는 상앙)의 개혁. 공손앙은 (衛)나라 사람으로 법가의 선두주자였다. 공손앙이 법치를 이념으로 진나라를 뜯어고쳐 최강대국으로 만들어놓았고, 이를 바탕으로 후에 범수가 원교근공을 기치로 패도를 쌓아나갔던 것이다.

진순신의 '이야기 중국사'에서는 기원전 316년의 파촉 정벌이 중국 통일에 결정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진(晉)이 분열된 이후 국토와 인구 등을 따져 전국칠웅 중 양대 강국은 진과 초였는데, 두 강국 중 '천부(天府)의 땅'이라 불릴 정도로 생산력이 높았던 파촉 땅을 먼저 먹는 국가가 중국을 통일할 운명이었다는 것. 초나라가 지도층 간의 내분에 휩싸여 있는 동안 진의 명장 사마착이 파촉을 점령해 초에 대해 압도적인 우위에 서게 된다. 파촉 땅의 생산력에 더해 장강의 상류를 점령함으로써 군사적으로도 초나라에 대해 우위를 쥐게 된 것.

이렇게 강대해진 진나라의 위력 앞에, 전국시대에 들어오고 나서는 감히 대적할 나라가 없어졌다. 범수를 등용한 소양왕 때는 힘의 절정을 이루었으며, 장평대전에서 백기가 장평에서 (趙)나라의 대장 조괄을 깨부수고 조군 40만을 생매장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시점에서 이미 진은 전국시대의 최대 강국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고, 다른 국가들은 연합해서 진에게 대항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였다.

효문왕과 장양왕 시절에는 조금 주춤했다고 할 수 있지만 진왕 정이 등장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승상 이사를 발굴하고 한비자의 의견을 중용하는 등의 혁신을 통해 진은 다시금 전국시대의 최강자가 되었다.

진왕 정은 활발한 정복사업을 통해 주변국을 차례차례 무너트렸고, 결국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이후 진왕 정은 왕의 지위보다 높은 황제에 올랐으며, 중국 최초의 황제이므로 시황제, 즉 진시황이 되었다.

2.2. 통일 이후[편집]

진시황은 외부의 이민족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고, 각 지방별로 다르던 문자도량형을 통일하는 등 하나된 세계로써 중국의 기틀을 다졌다.

전국시대부터 이어진 거대한 궁궐인 함양궁보다도 더 거대한 아방궁을 지었다는 소리도 있다. (다만, 아방궁은 실존 자체는 의문시 되는 상황이다.)

2.3. 분열과 멸망[편집]

시황제가 죽고난 이후 진나라는 2세 황제 호해, 진왕 자영을 끝으로 15년만에 단명한다.(...)[9]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왕조임과 동시에 가장 단명한 통일왕조기도 하다.[10] 진왕 자영은 황제 칭호를 포기했기 때문에 진 황제는 2세로 종료되고, 진은 황제국에서 제후국으로 내려앉았다.[11]

시황제가 흉노를 막고자 만리장성의 축조에 들어갔고, 자기 무덤을 짓고, 도로를 만드는 등 거대하고 무리한 토목공사를 일으켜 민심을 잃고 말았다. 진시황이 죽자 환관 조고가 어린 황제를 등에 업고 명재상 이사의 몸을 찢어 죽이는 등 악행을 벌였다. 결국 진승 · 오광의 난을 필두로 한 대대적인 민란에 휩싸이게 되고, 항우유방이 그 세력 중 가장 큰 영웅으로 떠오르게 되어 결국 초한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를 다룬 소설이 바로 초한지.

농담으로 진나라가 망한 이유는 나라 이름을 ''나라라고 지었기 때문에 망했다는 말도 있다. 배한성, 배칠수의 고전열전에서 유선이 한 대사.

3. 역대 군주[편집]

진중 이전의 군주들의 정확한 계보나 재위 기간은 정확하게 알려진 게 없다. 기원전 841년 경 주나라에서 국인(國人)의 반란이 일어나 많은 사료들이 없어져서 사기에서도 기원전 841년부터 연표를 작성하고 있다. 이른바 공화 원년이다.
시호
성명
재위연수
재위기간
-
진중(秦仲)
23년
기원전 844년 ~ 기원전 822년
장공(莊公)
영기(嬴其)
44년
기원전 821년 ~ 기원전 778년
양공(襄公)[12]
영개(嬴開)
12년
기원전 777년 ~ 기원전 766년
문공(文公)
?
50년
기원전 765년 ~ 기원전 716년
헌공(憲公)
영립(嬴立)
12년
기원전 715년 ~ 기원전 704년
출자(出子)[13]
영만(嬴曼)
6년
기원전 703년 ~ 기원전 698년
무공(武公)
?
20년
기원전 697년 ~ 기원전 678년
덕공(德公)
?
2년
기원전 677년 ~ 기원전 676년
선공(宣公)
영념(嬴恬)
12년
기원전 675년 ~ 기원전 664년
성공(成公)
영재(嬴載)
4년
기원전 663년 ~ 기원전 660년
목공(穆公)
영임호(嬴任好)
39년
기원전 659년 ~ 기원전 621년
강공(康公)
영앵(嬴罃)
12년
기원전 620년 ~ 기원전 609년
공공(共公)
영도/영화/영가[14]
5년
기원전 608년 ~ 기원전 604년
환공(桓公)
영영(嬴榮)
27년
기원전 603년 ~ 기원전 577년
경공(景公)
영석(嬴石)
40년
기원전 576년 ~ 기원전 537년
애공(哀公)
영적(嬴籍)
36년
기원전 536년 ~ 기원전 501년
혜공(惠公)
영녕(嬴寧)
10년
기원전 500년 ~ 기원전 491년
도공(悼公)
영반(嬴盤)
14년
기원전 490년 ~ 기원전 477년
여공공(厲共公)
영랄(嬴剌)
34년
기원전 476년 ~ 기원전 443년
조공(躁公)
영흔(嬴欣)
14년
기원전 442년 ~ 기원전 429년
회공(懷公)
영봉(嬴封)
4년
기원전 428년 ~ 기원전 425년
영공(靈公)
?
10년
기원전 424년 ~ 기원전 415년
간공(簡公)
영도자(嬴悼子)
15년
기원전 414년 ~ 기원전 400년
혜공(惠公)
영인(嬴仁)
13년
기원전 399년 ~ 기원전 387년
출공(出公)[15]
영창(嬴昌)
2년
기원전 386년 ~ 기원전 385년
헌공(獻公)
영연/영사습(嬴連/嬴師隰)[16]
23년
기원전 384년 ~ 기원전 362년
효공(孝公)
영거량(嬴渠梁)
24년
기원전 361년 ~ 기원전 338년
혜문왕(惠文王)
영사(嬴駟)
27년
기원전 337년 ~ 기원전 311년
무왕(武王)
영탕(嬴蕩)
4년
기원전 310년 ~ 기원전 307년
소양왕(昭襄王)
영직(嬴稷)
56년
기원전 306년 ~ 기원전 251년
효문왕(孝文王)
영주(嬴柱)
1년
기원전 250년
장양왕(莊襄王)
영이인(嬴異人)[17]
3년
기원전 249년 ~ 기원전 247년
시황제(始皇帝)
영정(嬴政)
37년
기원전 246년 ~ 기원전 210년
이세황제(二世皇帝)
영호해(嬴胡亥)
3년
기원전 209년 ~ 기원전 207년
-
영자영(嬴子嬰)
1년
기원전 206년

[1]섬서성의 별칭이기도 하다.[2] 그런데 당시에는 전쟁으로 인한 적대감 덕분에 제나라나 초나라 같은 나라도 오랑캐라고 욕을 먹는 분위기라 야만인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별로 의미가 없었다. 사실 실제 대우를 보면 무시는커녕 오히려 중원에 있던 국가들보다 더 높은 대접을 받은 적이 많다.[3] 음양오행에 따라 화(火)의 나라였던 주나라의 시대 이후의 통일 왕조이므로 수(水)의 색인 검은색을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북쪽을 상징하는 색이 검은색이어서 원래 검은색을 사용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만약 단순한 썰이 아니라 정설이라면 고대인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도교적 세계관 속에서 살았다는 이야기.[4] 과거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권에서 중국을 지칭하던 다른 이름인 '지나(支那)' 역시 이 Sina를 음역한 것에서 유래한다.[5] 그러나 순자는 법가가 아니라 유학자다. 그의 제자들 또는 후계 중에 한비자, 이사, 상앙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법가의 기초는 성악설에서 나오지만 정작 순자 자신은 인간은 교화가 가능하다고 했지만 한비자는 인간은 법으로만 통제가 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6] 우리가 잘 아는 진시황제의 6대조 할아버지가 되는 진효공 12년(B.C 350년)에 천도 했다.[7] 실제로 유여를 포섭하여 서융을 복속한 이후에도 서융은 계속해서 잔존하였고, 헌공이 완전히 안정시키기 전까지 서융은 상황에 따라 위수까지 넘봤다. 효공이 융 원왕을 죽이면서 거의 토벌된 것으로 보인다.[8] 진(晉)은 춘추시대의 사실상의 패자나 다름없는 위치였고 그러다보니 진(秦)은 춘추시대에는 그다지 힘을 쓰지 못했다. 진문공 사후, 두 진은 일진일퇴의 싸움을 거듭한다.[9] 진나라는 개막장인 춘추전국 시대를 끝내고 통일을 처음하는 셈이라 중국 통일에 대한 사상도 별로 없었다. 후의 일단 중국 통일만 달성하면 찬양하는 풍조와 다르게 지배층들이나 사람들이 승자에게 온갖 저주를 퍼붓고 망해서 반란이 아무래도 당연했다. [10] 마찬가지로 단명했다는 이미지가 있는 수나라, 서진도 통일왕조였던 기간만 따져도 진나라 2배 가량 되는 30년 정도는 갔다.[11] 현대에는 자영 역시 황제로 인정하기도 한다.[12] 정식 제후로 인정받은 최초의 군주. 견융 족에 의하여 파탄난 주 왕실을 도운 공으로 정식 제후로 승격되었다.[13]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곧 살해당하였다.[14] 춘추좌씨전에는 도(稻), 사기에는 화(和), 사기색은에는 가(貑)로 나온다.[15] 왕위를 뺏기고 살해당했는데, 어머니도 같이 살해당한데다가, 어머니의 시체와 함께 그의 시체는 우물에 파묻혔다.매우 불쌍하다.[16] 여씨춘추에는 연(連), 사기색은에는 사습(師隰)으로 나온다.[17] 후에 자초(子楚)로 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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