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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넓은 세계로

1. 개요2. 역사적 차이점
2.1. 소련의 기적적인 생존2.2. 개판의 시기를 넘어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국기
국장
표어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Пролетарии всех стран, соединяйтесь!)
국가
인터내셔널가 (1922년~1944년)
소련 찬가 (1944년~)
위치
정치체제
국가원수
인민대표회의 주석서기장
무종교 60%
러시아 정교회 20%
이슬람 10% 등 (1991)
민족
러시아인 51%
우크라이나인 15%
우즈베크인 6% 등 (1991)
통화
성립 이전

1. 개요[편집]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가상지구 알파 세계관의 국가이다. 본 세계관에서는 소련이 극적으로 해체를 피했고, 냉전의 체제 경쟁에서는 사실상 패권을 포기했지만 '소련'이라는 국체를 유지, 존속하여 재기를 꾀하고 있다는 설정이다.

2. 역사적 차이점[편집]

본 세계관의 소련 서기장이었던 니키타 흐루쇼프는, 그의 임기 시절 벌이던 스탈린 격하 운동 과정에서, 스탈린과 영합하여 소련의 농업학계를 지배하던 트로핌 리센코의 권위를 현실 역사보다 일찍 끌어내리고, 니콜라이 바빌로프의 이론을 소련 과학계의 정설로 채택하게 되었다. 이 효과로 인해 흐루쇼프가 진행한 소련의 농업 증산 계획은 현실에서는 몇 년 뒤에 말아먹은것과는 달리 성공적으로 우크라이나 및 시베리아의 미개간지를 대규모 농경지로 개발하였고 소련의 식량 자급 정책에 큰 도움을 주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이 다른 영역에서 일어난 흐루쇼프 서기장과 당 내 간부들간의 갈등을 완화시킬 수는 없었고, 브레즈네프를 위시한 당 간부들은 흐루쇼프의 군사교리 수정에 의한 반발,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의 실패 등을 이유로 그를 비난하고 퇴임할 것을 강요하였고, 실제 역사와 동일한 1964년에 흐루쇼프는 강제로 퇴임당하고, 연금생활자 신세가 된다. 그 후 다음 서기장이 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던 소련의 농업발전 계획에 숟가락을 얹어 소련 인민을 배불린 것은 나 브레즈네프다라고 선전, 선동을 벌였다.

그러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행적은 현실 소련과 거의 유사했고, 그의 행적 하에서 소련은 큰 변화가 없었지만, 서서히 몰락해 가기 시작했고, 그 후의 서기장들인 유리 안드로포프, 콘스탄틴 체르넨코 또한 집권하자마자 금방 사망하여 제대로 된 정책을 펼칠 여유가 없었다. 그 후임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 시기에 있어서 다음 대격변의 시기가 찾아왔는데, 그는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라는 대대적인 개혁 정책을 시도하였으나, 고르바초프는 전임 서기장이었던 안드로포프의 계획안을 많이 참고하여 급진적인 개혁은 역풍을 불러와서 오히려 연방을 더 빨리 붕괴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어느정도 점진적인 개혁을 시도하는 것으로 연방의 붕괴를 최대한 늦추고 재건할 시간을 벌려고 하였다. 그러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같은 거대한 내적 재난, 그리고 제 2세계라고 불리던 다른 공산세계는 소련처럼 개혁이나 체제개방을 시도하기는 커녕 현상유지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폴란드레흐 바웬사의 반정부 투쟁, 루마니아에서는 니콜라에 차우세스쿠가 사실상 시민의 손에 벌집이 되어 죽어가는 등의 추태는 국제적으로 보도되면서 공산 진영이라는 것이 더 이상 굳건한 연합이 아니라. 이미 소련의 위성국부터 차례차례 무너져가고 있음이 확인되었고, 이 소식을 접하는 다른 공산 국가들도 점점 붕괴되어 가기 시작했다. 동독은 공중분해되어 서독에 합병되었고, 소련은 이를 반대할 수 없었으며 주 동독 소련군을 철군시키고 통일을 사실상 승인하였다.

이러한 와중 소비에트 연방 내에서 가장 거대한 소비에트 공화국이었던 러시아 공화국의 수장 보리스 옐친소련은 이미 끝났다. 이 나라의 숨을 붙이는 것은 의미가 없다 라는 식으로 대대적으로 반소련 선전을 하고 다니면서 연방을 내적으로 갉아먹고 있었다.

2.1. 소련의 기적적인 생존[편집]

1980년대가 가고 1990년이라는 시대가 오자, 사실상 전 세계가 냉전은 이미 끝났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독일이 통일되는 데 소련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차우세스쿠는 사살당했으며, 폴란드는 레흐 바웬사가 집권하고 공산주의 체제를 폐기하였다. 이 와중에서 국제사회는 이제 소련은 붕괴할 것이다를 확정지었고, 언제 붕괴할 것인가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소련의 종식과 연방 해체를 노골적으로 선언하던 보리스 옐친이 (공식적으로는) 지나친 보드카 음주로 인한 교통사고로 급사하고[3] 소련의 공산당의 보수파들이 극적으로 고르바초프와 회합, 타협안을 찾으면서 당 내의 분열도 일단락되었다. 또한 가장 거대한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장이었던 옐친이, 연방 내 반소련파, 해체주의자들의 구심점이나 마찬가지었는데, 그 옐친이 죽으면서 연방 해체주의자들의 세가 약화되었다. 그리하여 일부 사회주의 공화국들이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연방 구성원들 중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 카자흐스탄 사회주의 공화국, 벨라루스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의 잔류를 선언하는 역사적 변곡점이 생겨났고,[4]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상지구 알파에서는 1992년 2월의 모스크바 회담이 발생하였다.

해당 회담의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 소비에트 연방의 구성국 중 탈퇴를 원하는 공화국들은 독립을 허락한다.
  • 탈퇴에 동의하지 않은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 카자흐스탄 사회주의 공화국, 벨라루스 사회주의 공화국은 연방 체제를 개편하여 연방 내에서 더욱 높은 자치권을 지니며, 동시에 더욱 긴밀하게 협력하는 연방으로 재편한다.

이 회담의 결과로 인하여 발트 3국(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캅카스 지역 국가들(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중앙아시아 지역 일부 국가들(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등이 독립하게 되었으나, 소련이라는 나라는 신 연방 시대를 선언하며 어떻게든 살아남게 되었다.

2.2. 개판의 시기를 넘어서[편집]

소련이라는 나라는 살기는 살았지만 호흡기에 의존하는 신세가 되었다. 연방은 일부 국가들의 잔류로서 존속되었으나, 서기장 고르바초프는 공식적으로 '냉전의 종식'과 '패권주의 추구의 종료'를 선언하며 체제 경쟁의 실패를 인정하였고, 얼마 가지 않아 수많은 소련 인민들과 정치계의 반발로 사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후임 서기장이었던 겐나디 주가노프는 이 당시 고르바초프를 강경하게 비난하던 사람 중 하나였으나 정작 그가 서기장으로 집권한 뒤에는 고르바초프의 '체제경쟁 실패선언'을 현실적으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인민공화국의 주일소군을 제외하면 군사적인 파견도 모두 종료되었다.[5]

(작성중)
[1] 원래 소련의 국부인 블라디미르 레닌은 국가 주도의 공용어라는 개념을 반대했다. "강제적인 국어는 필요한가?"라는 논문까지 썼다. 그래서 소련에는 연방 차원에서 법으로 정한 국어가 없었고 법률적으로 따지면 러시아어는 각 민족간의 소통을 위한 언어의 지위 - 공용어 내지 교통어 정도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현실은 그런 거 없고 닥치고 러시아어 그러다 소련 붕괴 직전인 1990년에 연방 공용어로 지정했다.[2] 당연히 국가 특성상 국교는 없었다. 또한 국가 차원에서 무신론을 장려하였다.[3] 가상지구 알파 세계관 내에서는 이것이 고르바초프 혹은 소련의 다른 세력에 의한 암살이라고 주장하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옐친은 실제 세계에서도 엄청난 알콜중독자였으며, 그가 진짜로 음주운전을 하다가 자멸한 것인지, 아니면 정치적 음모에 의한 암살인지는 직접 설정으로 확정하기보다는 이 문서를 읽는 독자의 상상의 영역으로 맡긴다.[4] 니키타 흐루쇼프의 농업개혁 정책에 의해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 지역은 농업 생산량이 크게 증가하여 식량 문제에서 엄청난 이득을 보았고, 이로 인하여 소련 체제에 대해 긍정적인 여론이 매우 높아졌다는 이유가 있었다.[5] 주일소군도 해군과 공군력 위주로만 남고 육군은 상당수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