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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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봉
泰封
존속기간
901년 - 918년[1]
국호
고려마진태봉
수도
정치체제
국가원수
주요사건
901년 궁예 고려 건국
904년 국호 마진으로 변경
905년 철원 천도
911년 국호 태봉으로 변경
918년 멸망[3]
성립 이전
성립 이후
멸망 이후

1. 국호
1.1. 왜 후고구려가 되었는가?
2. 천도3. 역대 군주와 연호4. 태봉국은 한국사의 뿌리인가 ?5. 인물

1. 국호[편집]

본래 국호는 고려이지만, 왕건고려와, 고대의 고(구)려와 구분하기 위해 나중에 후고구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우리가 고구려라고 알고 있는 고구려는 사실 장수왕 때에 국가 체제를 정비하면서 국호를 정식으로 고려로 변경한 것으로 추정된다(고구려 문서의 설명을 참고). 따라서 아마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후삼국 시대에만 하더라도 이 고구려를 그냥 가장 마지막에 쓰인 '고려'로 지칭했을 것이다.[7]

역사 서술에서 후(後)+국명의 국가들은 거의 대부분 후대의 사가들이 구분의 용이를 위해 붙인 일종의 가칭이라고 보면 된다. 중국 역사 중 오호십육국, 오대십국시기의 무수히 난립했던 '후(後)'자가 붙는 국가들은 당대에는 전부 원 국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영토나 중심지 변화로 방위를 붙인 국명도 마찬가지(서주, 동한, 동진, 남, 북위 )

궁예는 국호를 자주 바꾸었는데, 898년 사실상의 국가가 된 뒤 901년 고려라는 왕조를 선포하여 시작했다가 904년 마진(摩震)으로 바꾼다. 참고로, '마진'이 '마하진단(摩訶震旦)'의 약자이며 '대동방국'이라는 뜻이라는 주장이 있다. 마하와 진단 모두 산스크리트어를 한자로 음역한 말로 불교에서 쓰는 단어들이다. 마하는 '크다'는 뜻이고 진단은 Cinitana의 음역으로 동방을 뜻한다. 하지만 마진이 마하진단의 약자라고 명시한 사료가 있는 건 아니고 단지 미륵불을 자칭한 궁예 정권의 특성에 미루어 추정해본 것에 불과하다. 마진이 단순히 마한진한을 합칭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물론 흔히 쓰는 마한과 진한의 '마', '진' 자와 한자가 다르지만 이 이름들이 본래 한자어가 아니라 순우리말이었기 때문에 표기상 같은 발음의 여러 가지 한자로 표기되었다.[8] 마진이라는 국호가 정말 마한과 진한을 합친 것이라면 고구려 계승 뿐만 아니라 기존 왕조인 신라를 흡수하겠다는 의지도 아울러 천명한 것일 수 있다. 물론 현대 역사학계의 정설은 마한이 백제로, 변한이 가야로, 진한이 신라로 흡수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시대 후기부터 마한이 고구려, 변한이 백제, 진한이 신라가 됐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다. 따라서 마진=마한+진한이라면 마진=고구려+신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 911년 태봉(泰封)으로 다시 국호를 바꾸고, 918년 왕건의 역성혁명으로 멸망하여 국호는 다시 고려로 돌아간다.

이후 전통적으로 이 나라를 후고구려라고 불러 왔다. (그 이유는 이 문서의 '왜 후고구려가 되었는가?' 단락 참고.) 광복 이후의 한국사학계에서도 그 관습을 따랐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 거의 태봉이라는 이름으로 통일하고 있는 추세다. 일단은 태봉이 그나마 가장 오래 쓰인 국호이며 최종안(…)이라서 그런 것.

국호에 변동이 있었을 뿐, 지배층의 세력과 국가 조직이 완전히 계승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고려의 전신, 아니 그냥 고려 그 자체다. 애초에 본래 국호는 고려였으니, 왕건이 국호를 고려로 한 것도 그저 원래대로 국호를 되돌린 것에 불과하다. 다만 역사적으로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를 모두 차지한 것은 물론 나머지 팔도 중 전라도를 제외한 평안도, 함경도, 경상도, 충청도에 적어도 조금은 영토는 걸쳤다는 의의가 있다.

1.1. 왜 후고구려가 되었는가?[편집]

궁예 정권에서 '고려'라는 국호를 쓴 것은 901~904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으며, '마진과 태봉'으로 나누어지기는 했으나 해당 국호를 쓴 것은 904~918년 기간으로 '고려'라는 국호를 썼던 때보다 훨씬 길었다. 따라서 궁예 정권은 왕건이 세운 고려의 전신이 확실하기는 하나, 궁예가 고려라는 국호를 잠깐만 썼으므로 '고려'라고 부르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부적절한 것이 사실이다.

고려시대의 역사서 삼국사기에서 궁예 정권을 일부러 '후고구려'라고 부른 것은 왕건의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목적도 있었으나,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의 개인적 성향상 왕건의 고려는 단순히 고대 삼국 중 하나인 고구려를 그대로 계승한 게 아니라 삼국 전체의 정통을 계승한 나라임을 강조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고구려라고 부르는 그 나라도 실제로 장수왕 때에는 공식 국호를 그냥 고려로 교체해서 쓴 걸로 보는 게 정설인데(고구려 문서 참고) 삼국사기에서는 그냥 무시하고(...) 고구려로 통일하고 있다.[9]

일단은 궁예가 국호로 했을 때도 정식 국호는 분명 장수왕 이전의 '고구려'가 아니라 망할 때까지 썼던 '고려'였음이 분명한데, '고려'라고 부르게 되면 기록을 보는 사람에게 궁예는 고려의 왕으로 인식되고 건국자로서 왕건의 정통성은 손상을 입게 된다. 따라서 '후고구려'라는 명칭을 붙임으로서, 독자성을 형성했던 궁예의 왕조는 '고구려'의 잔당 세력처럼 보이도록 곡필된 것이다. 그래서 궁예의 '후고구려'는 '고구려'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정통성의 매개체로 격하된다.

실질적으로 더 오래 쓰인 '마진', '태봉'을 무시한 것 또한 궁예를 한 왕조의 창시자로서 대우하지 않으려는 곡필이다. 궁예를 '마진왕'이나 '태봉왕'으로 대우하면 왕건은 명백하게 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정통성을 찬탈한 자로 보이게 된다. 이러한 국호를 없앰으로서 궁예의 나라는 독자적인 왕조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다.

2. 천도[편집]

최초의 수도는 오늘날 개성인 송악이었지만, 905년 수도를 철원으로 옮긴다. 국호를 '마진'으로 변경하는 것과 철원 천도는 거의 동시기에 일어났다. 그런데 이 도성의 현재 위치가 참으로 절묘하다. 정확히 비무장지대안에 있으며 군사분계선이 관통한다. 게다가 오롯이 북방한계선과 남방한계선 사이에 있다. 그래서 일반인은 물론 역사학자들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상황.

오늘날 휴전선 비무장지대 안에는 궁예가 건설한 철원성의 유적이 남아있다고 하지만 비무장지대인 탓에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요원한 상황이다. 궁예도성은 경원선3번 국도가 정확하게 남북 방향으로 관통한다. 하지만 현재 경원선은 원래의 노선이 단선에다가 선형이 약간 좋지 못한 관계로, 도성의 동쪽을 지나도록 새로 노선을 계획했다. 남북 관계가 호전되면 태봉유적의 대대적인 발굴을 일으킬 것이다. 또한 유적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신)월정리역부터 평강역까지 새로 철도가 놓일 것이고, 아마 통일 후에는 경원선이 주간선이므로 복선 또는 복복선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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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 도성 남문 근처에 있었던 석등. 일제강점기 당시 국보 118호로 지정되었으나 6.25 전쟁 이후 소재 불명 상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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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봉국 도성 유적

왕건궁예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집권하면서 다시 수도를 송악으로 옮기게 된다. 이때부터 송악 일대는 개경(開京) 또는 송도(松都)라고 불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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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를 한 곳이 철원이다 보니 이런 드립도 나온다. 실제로 철원은 수도로서의 입지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철원 지역은 한반도 중부지역에서 손꼽히는 곡창지대이지만, 한 국가의 수도로서 기능을 수행하려면 이런 생산력 외에도 교통로가 편리하게 서 사람과 물자가 원활하게 드나들 수 있어야 한다. 전근대 시절의 주요 도시들이 해안이나 강가에 있는 것도 수운을 통해서 교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한국사에서 등장하는 주요 국가들의 수도가 하나같이 강이나 바다를 끼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동해를 끼고 있고,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부여금강을 끼고 있으며,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대동강을 끼고 있고,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예성강을 끼고 있고, 후백제의 수도인 전주만경강을 끼고 있으며, 백제조선의 수도였던 서울한강을 끼고 있다. 하지만 철원은 내륙 깊숙한 지역인데다 인근의 한탄강도 수운이 그다지 원활하지 못한 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철원의 물가는 크게 올랐고, 궁예에 대한 반감도 커져서 궁예가 몰락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경기도 곡창지대인 이천, 여주보다는 매우 춥다.

2020년까지 후삼국시대 궁예와 태봉국을 테마로한 역사.문화 테마공원이 조성된다고 한다,#

후삼국시대를 다룬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태봉국 수도 철원의 묘사는 말그대로 생지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원래 궁예는 철원을 수도로 삼고자 했으나, 결국 왕륭이 바친 송악에 도읍을 세운다. 여기까진 괜찮았는데, 아지태의 농간에 넘어간 궁예가 극단적인 거대함, 화려함 및 북벌에 집착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나주전투 등으로 이미 지출이 많은 상황에서 궁예는 철원에 거대한 황궁을 지었고, 이에 국고는 바닥나고 백성들의 삶은 궁핍해진다. 그렇찮아도 철원에 이주한 백성들에게 별다른 지원도 없는데, 극심한 가뭄까지 겹치다보니, 철원은 한 국가의 수도임에도 길거리에 아사한 시체들이 널려있고, 백성들은 유리걸식하는 세기말 지옥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궁예는 허황된 북벌에만 신경쓰니 구휼활동같은게 있을리가. 이런 상태가 몇년 지속되다가, 시중 왕건이 무리한 북벌을 중단시키고, 구휼 활동을 벌이면서 민심이 어느정도 안정되긴 한다(그 와중에 궁예는 또다시 전쟁을 시작할려고 했으나 그전에 태봉국이 망했다).

3. 역대 군주와 연호[편집]

김씨 왕조랑 태봉을 기준으로 한다면 궁예 1대(...)로 끝나지만 고려를 기준으로 한다면 신라처럼 왕조가 다른 성씨로 바뀐 채 쭉 지속된다.
초대 궁예
901-918 6월 14일
2대 왕건
918-
태봉국 멸망 / 고려 1대왕 태조 왕건
순서
왕명
시호
연호
휘(이름)
재위기간
01
궁예(弓裔)
-
-
901년 ~ 918년 6월 14일(17년)
02
왕건(王建)[10]
-
-
-
918
무태(武泰, 904)
성책(聖冊, 905~910)
수덕만세(水德萬歲, 911~914)
정개(政開: 914~918)[11]

4. 태봉국은 한국사의 뿌리인가 ?[편집]

태봉이 대한민국의 뿌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라 → 태봉 → 고려조선대한제국대한민국으로 체제가 이어졌다고 주장하지만, 상당히 무리한 주장이다.

일단 가장 유명한 반박으로선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할때 이념인 삼한을 체제로 두고 있다고 하는 것이며 체제연속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신라가 제외되고 태봉 → 고려조선대한제국으로 볼 수 있지만, 대한제국 이후로는 일제에 의해 나라 자체가 사라지면서 체제연속성이 한 차례 단절되었으니, 태봉이 대한민국의 뿌리라고 할수는 없다. 거기에다가 한국사에서는 체제연속성보다는 인적, 문화적, 정신적 계승의 사항들이 더 강조되는 편이고, 태봉 자체는 한국사에서 그다지 오래 존속한 정권이 아닌데다가 민족사에 기여한 바도 적음을 고려해보면 이는 그렇게까지 크게 고려할 요소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태봉의 인적, 문화적, 체제적인 면모는 기본적으로 신라에서 왔으나, 태봉의 건국 자체가 기존 신라 체제 자체를 부정한 고구려 계승의식을 통해 이뤄졌기에 태봉이 신라를 이었다는 주장은 틀린 얘기다.

남북국시대 신라 안의 옛 백제지역과 옛 고구려 일부지역의 사람들이 완전히 신라인으로 동화되지 않아서, 그래서 그때까지 백제인과 고구려인의 정체성이 남아 있었기에 후삼국 시대가 있었으므로, 고려가 신라의 연속체라고 '단정'하는 건 옳지 않다. 견훤이나 궁예백제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하니 토착민들에게 지지를 받았다는것 자체가 통일신라가 국가적으로는 하나였어도 그 안의 사람들은 아직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반영한다.[12]

또한 무신정권 이후 지방통제력이 약화되자 과거 들어선 지방에서 각기 고구려, 백제, 신라계승을 외치며 반기를 든 민중 반란이 있었다. 비록 명분상 계승을 외쳤다고 하더라도 각 지방민들에게 아직 과거 삼국의 후손이라는 의미는 지금보다도 매우 크게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본격적으로 한반도 전체가 하나의 한민족이라는 인식이 완전히 들어선 게 신라의 삼국통일도 왕건의 후삼국통일도 아닌 여몽전쟁이라는 주장은 여기에 주로 기반을 둔다.

5. 인물[편집]

[1] 왕건쿠데타로 멸망.[2] 궁예의 성이 진짜 궁(弓)인지 아니면 그냥 이름인지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그러나 아직 확실하지 않기에 국성 관련 운운은 삭제하였다.[3] 왕건이 쿠데타를 일으켰다.[4] 926년, 에 의하여 멸망한다. [5] 926년 ~ 936년 [6] 926년 ~ 938년 [7] 그러다가 (왕건이 세운) '고려'시대에,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고(또는 망각하고) 통째로 '고구려'라고 부르고 '고려'는 왕건이 세운 나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고정시키는 관행이 생겨났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죄 고려로 불렀다가는 고씨 고려, 대씨 고려, 김씨 고려, 왕씨 고려처럼 왕조의 성씨로 왕조명을 지칭해야 했을 것이다.[8] 신라도 '나날이 새로와져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으로 한자를 '新羅(신라)'로 고정 표기하기로 정하기 이전에는 비슷한 발음의 수많은 다른 한자로 음역되었다.[9] 아무래도 같은 왕조이므로 한 명칭으로 통일하는 게 편한데 김부식이 살던 고려와 구분도 지어주면서 고려가 옛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점을 희석시키기 위해 동명성왕이 세운 나라를 고구려, 태조 왕건이 세운 나라를 고려로 구분했다.[10] 이후 고려로 국호를 바꾸고 수도를 철원에서 개성으로 천도[11] 후백제 임금 견훤의 연호였던 정개(正開, 900~936)와 다르니 주의[12] 비슷한 경우로 금나라청나라의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다. 금이 멸망하고 금의 중심세력이었던 완안씨 황족이나 중앙 귀족들은 학살당하거나 숨어살게 되면서 완전히 와해되어 버렸고 중심세력과 한참 떨어져 방계세력이라 할 수 있는 변방 여진족들이 원나라명나라의 지배 하에 복속되어 근근히 여진족의 정체를 이어갔을 뿐이었다. 금의 부흥을 기치로 들었던 누르하치의 선조들 또한 건주좌위지휘사(建州左衛指揮使)라는 명나라의 지방관직을 대대로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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