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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나무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Te_lawrence.jpg
Thomas Edward Lawrence
(1888년 8월 15일,~1935년 5월 19일 )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유명한 실존인물

1. 개요[편집]

영국의 고고학자, 작가, 군인. 우리에게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잘 알려진, 정치, 학문, 문학, 예술, 운동, 전투 등 모든 분야에 천재적 재능을 보인 실존했던 초인. 도덕적으로도 완벽했던 인물로 아랍 민족의 독립을 위해 청춘을 바쳤으며, 이후 세속적 명성을 피해 속세에서 고행을 자처하기도 했다.

2. 초년기와 특징[편집]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는 1888년 8월 16일 웨일스의 작은 소도시 트리머독에서 태어났다.

로렌스는 어릴 때부터 자기 단련에 미친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피곤하면 눕는데, 이 로렌스는 철이 들 무렵부터 굶었다. 자기가 먹을 걸 안 먹고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물 안 먹고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체력과 근력의 한계는 어디인지 끊임없이 시험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체구는 상당히 작아 키가 166cm에 불과 했다고.

사람들과의 신체적 접촉을 극도로 싫어해 사람을 만나면 악수를 하지 않으려 반사적으로 두 손을 등 뒤로 숨기는 버릇이 있었다. 또한 섹스를 혐오하는 기이한 결벽증도 있어서, 로렌스는 평생 결혼은 물론 여자와 교제했던 기록이 없었다. 하지만 자서전에 나온 시들과 행적들을 보면 동성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당대 혐동성애적 사회 시대에 맞추어 자신의 성욕을 억제하거나 섹스 전반을 기피한다고 외부사람들에게 보이도록 한 듯하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고고학 탐구에 재능을 발휘하고, 옥스퍼드 대학의 사학과에 진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한다. 이후 첩보원 신분 겸 유프라테스 강에서 발굴 작업을 하던 대영박물관 원정대의 일원으로 특파되어, 1914년까지 메소포타미아, 소아시아, 그리스, 이집트 등지를 조사했다. 이 기간 동안 로렌스는 아랍인들의 문화 및 언어를 배웠다. 원래는 이렇게 고고학자가 될 예정이었다.

3. 1916년 아랍 반란 이전[편집]

1914년 1월 로렌스는 영국군의 지원 아래 시나이 반도의 네게브 지방에 대한 고고학 탐사를 진행하였다. 물론 이는 순수한 고고학 탐사가 아니라 영국군에게도 중요한 탐사였는데 향후 오스만과의 전쟁 돌입시 오스만 군대가 이집트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나이 반도를 지나야했기 때문에 시나이 반도는 이집트 방위에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로렌스는 바로 영국군에 입대하지는 않았으나, 같은 해 정보 장교로 임명되어 10월에 카이로에 있는 아랍 부서국으로 부임한다.
1915년이 되면서 아랍 민족주의 열풍이 불기 시작하여 아랍 반란의 기미가 점점 보이기 시작한다. 당시 영국은 이라크의 이미르였던 샤리프 후세인과 접촉하게 되는데 후세인은 오스만 제국에 반기를 드는 대신 헤자즈,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포함한 아랍 국가에 대해 영국이 독립을 보장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10월이 되도록 영국이 답을 내놓지 않자, 후세인은 오스만 제국 편에 붙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안그래도 갈리폴리 전역에서 곤욕을 치루고 있던 영국은 결국 헨리 맥마흔 경의 편지를 통해 신 아랍 국가의 독립을 보장해주기로 한다. 이에 따라 로렌스는 1916년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파견되어, 아랍 반란을 지원하기 시작한다.

4. 1916년 아랍 반란 이후[편집]

1916년 6월 아랍 반란이 일어나고 같은 해 10월 로렌스는 헤자즈로 파견된다. 그는 샤리프 후세인의 세 아들들과 면담을 하였는데 그중 파이잘이 아랍반란을 이끄는데 적격자로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11월 연락장교로 파견될 예정이었던 S.F. 뉴컴 대신 로렌스가 영국-아랍 간 연락 장교로서 임시로 파이잘 왕자의 곁에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로렌스와 파이잘은 메디나로부터 오스만이 아랍 반란군의 거점을 위협하지 않도록 하고 시리아에서부터 메디나로 이어지는 철도에 대해서 지속적인 파괴공작을 벌였다.

당시 파이잘 왕자와 로렌스가 세웠던 아랍 반란군의 전략은 크게 두가지였다. 첫째는 오스만 제국의 거점이었던 메디나를 지속적으로 위협하되, 점령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메디나는 메카 다음으로 중요한 이슬람의 두번째 성지였고 당시 주둔 중이었던 오스만 군도 질병과 포위 속에 약체화되어있어 마음만 먹으면 점령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메디나를 점령하지 않는 대신 시리아-메디나 간 철도를 지속적으로 파괴하고 다님으로써 오스만 제국은 메디나를 유지하기 위해 병력을 철도 복구 및 수비에 쓸 수 밖에 없었고 이런 이유로 아랍 반란군의 거점에 대한 대대적인 공략이 불가능하였다. 둘째는 아랍 반란군의 진격 방향으로 남쪽으로부터 다마스쿠스를 향해 북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진격 전략은 영프 양국을 긴장시켰는데 당시 영프 양국은 사이크스-피콧 협약을 통해 전후 중동 지역 분배에 대해 이야기를 마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시리아는 프랑스가 식민지로 삼기 위해 매의 눈으로 노리던 지역으로 프랑스는 영국에게 시리아 지역에 아랍 독립국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아랍 스스로의 힘으로 해당 지역을 해방시켜야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로렌스가 사이크스-피콧 협약의 내용을 얼마만큼 자세히 알 수 있었는지, 파이잘 왕자가 협약의 내용을 알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아랍 반란군의 진격 방향은 시리아를 향해 북진으로 정해졌다.

이후 S.F. 뉴컴이 도착하였고 로렌스는 그에게 연락 장교 임무를 넘기고 떠날 준비를 하였으나 파이잘 왕자가 나서서 계속 자신을 보좌하도록 강하게 요청하였고 결국 로렌스는 1918년 다마스쿠스 함락 때까지 파이잘 왕자의 최측근으로써 전쟁을 수행한다.

5. 아카바 함락과 다마스쿠스 함락[편집]

1917년 로렌스는 아랍 반란군과 함께 홍해 근처 요충지였던 아카바 공략에 나선다. 로렌스와 아랍 반란군은 오스만 군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공격을 가했는데 그것은 바로 사막으로부터의 공격이었다. 프랑스가 방해할 것을 염려한 로렌스는 자신의 상관에게 구체적인 공격 계획을 보고하지 않았으며, 1917년 7월 6일 아카바 공략에 성공한다.

로렌스는 다마스쿠스 함락에도 기여하였으나, 정작 다마스쿠스 함락 당시엔 그는 다른 곳에 있었으며 함락 몇 시간 이후에 다마스쿠스에 들어갔다. 다마스쿠스에서 그는 파이잘 왕자가 아랍 독립국을 세우기 위한 행정 기반을 닦는데 도움을 주었다.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한 시리아 아랍 왕국이 이후 탄생했지만 이 왕국은 사이크스-피콧 협약을 내세운 프랑스가 군대를 파견하여 다마스쿠스를 점령해버리는 바람에 1920년 멸망하게 된다. 로렌스는 전쟁 막바지에 자신의 상관들에게 아랍 독립국 건설에 대해 지속적으로 설득하였으나 영프 양국은 이전에 맺은 협약을 그대로 실천에 옮겼으며 결과적으로 로렌스가 바랐던 아랍의 진정한 독립을 박살내버렸다.

6. 종전 후[편집]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으나 로렌스는 은둔해버린다. 자신과 영국이 주도한 중동의 독립 운동이 결국 팔레스타인 분쟁이라는 무시무시한 결과를 빚은데다, 전쟁 중 겪은 정신적 충격이 겹친 탓.
그래서 그는 속세를 떠나 작가가 된다. 작가가 돼 쓴 작품이 자신의 회고록 지혜의 일곱 기둥이다. 그는 마음만 먹었다면 국회의원이나 저명한 정치인, 혹은 영화배우가 될 수도 있었으나, 세상 관심으로부터 완전히 사라지기 위해, 30대의 나이에 영국 공군에 몰래 이등병으로 입대한다. 오래지 않아 공군 내 같은 부대 사람들은 이 중년의 이등병이 저 유명한 로렌스라는 걸 알아차렸지만 로렌스를 배려해 아는 척 하지 않았다.

공군 입대 후 로렌스는 각종 진기한 이야기를 남긴다. 팔팔한 20대도 통과하기 어려운 특수 훈련을 최우수 성적으로 마치는가 하면, 이등병 신분으로 비행기 추락 사고를 지휘해 조종사를 살렸내기도 하고, 자신의 정치적 인맥을 이용해 고통받는 사병들의 복지를 개선시켜 주기도 했다.

1935년 십 년간의 병역 만기를 채우고 제대했으나, 바로 그해 영불해협 근처 클라우즈힐에서 자신이 애용하던 오토바이를 타다 사고로 숨을 거두었다. 이때가 그의 나이 45세였다. [1]
그의 유해는 5월 21일 모턴 교회에 매장되었다

7. 여담[편집]

1918년, 오스만 제국에서 로렌스에 대한 현상금을 걸었는데 처음에는 5천 파운드였으나, 나중에는 2만 파운드까지 올라갔다.

아랍 쪽에서는 위의 내용은 모두 거짓이며 로렌스는 아랍 반란에서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 제기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쉴레이만 무서가 지은 <아랍이 본 아라비아의 로렌스>. 또한 국방tv에서 방영했던 토크멘터리 전쟁史 40부 독립전쟁특집 세계편에서 이 로렌스에 대해 말하는데 로렌스 스스로도 자신히 한 일은 아랍인들을 지원하고 단순 연락장교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고 한다. 로렌스의 아랍에서의 신화는 언론과 영화가 만든 상상이 내포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1] 영화에서도 그의 오토바이 사망을 암시하는 장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