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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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티베트 독립의 상징4. 판첸 라마 문제5. 티베트 독립 문제는 과장되었다?
5.1. 반론
6. 티베트 독립운동의 현재7. 대한민국의 입장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티베트의 국기인 설산사자기.
티베트 망명정부의 국기로 사용한다.[1]
오른쪽에는 노란색 테두리를 그리지 않는다. [2]
FREE TIBET!(티벳 독립 만세!)[3]

중국의 지배 하에 있는 티베트에서, 티베트인들이 주도하여 중국에 빼앗긴 티베트의 국권을 회복하자는 독립운동이다.

2. 상세[편집]

티베트는 오랫동안 중원과는 다른 문화와 정체성을 가져왔으나, 몽골족 왕조인 원나라, 만주족 왕조인 청나라에 편입되어 중국 지역과 같은 나라로 묶이게 된다. 청나라가 멸망한 직후 티베트는 "만주족의 나라와 세속적, 영적인 관계가 끝난 것으로 보아 티베트는 명실상부 독립국임을 밝힌다."며 독립을 선언, 이후 수십년간 실질적인 독립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티베트는 원 티베트(캄, 암도, 우창, 아루나찰 프라데시 일부)를 회복하지 못했는데 중국과 영국(당시 인도 지배국), 티베트가 협상해서 나온 결과 맥마흔 라인 아래의 남티베트(아루나찰 프라데시)는 영국이, 내티베트(칭하이성 및 쓰촨성 서부)는 중국이, 현 티베트 자치구 영토는 라싸의 달라이라마 정부가 가져갔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 측은 반대했고 심라 조약에 서명조차 하지 않았다. 중화민국은 한만몽회장의 오족공화를 내세우고 있었는데 이는 청 시절 영토를 오롯이 보존하고자 하는 한족들의 노력이었다.

중일전쟁국공내전장제스와 국민정부를 대만으로 몰아내고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은 티베트를 위와 같은 중화민국의 주장과 비슷한 주장을 하며 1950년 10월 6일 혹은 7일 티베트를 침공했다. 당시 실질적 피해는 1950년보다 후의 1959년이 더 많았다. 티베트는 달라이 라마 13세의 티베트 근대화가 실패한 탓에 군인들의 근대화가 이루어지지 못했고, 현대 군대인 중국군을 상대한 결과 너무나 손쉽게 패배했다. 그리고 중국은 같은 해에 한국전쟁이 발발해서 중국 인민지원군을 보내느라 티베트 쪽에 군대를 장기간 투입할 수 없었는데도 1950년 10월 19일 티베트군은 패배했다. 그러나 중국은 이후로 더이상 전투를 벌이지 않았고 티베트측과 협상을 시도했다. 1951년 5월 몇 차례의 협상을 해서 티베트가 중국의 영토임을 인정하지만, 달라이 라마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선에서 타협하게 된다. 이것을 '티베트의 평화적 해방을 위한 17조 협의'라고 한다. 위키백과의 17조 협의 항목

그러나 차근차근 토지개혁, 반종교 정책과 같은 공산화 정책이 시행[4]되자 기득권인 승려들과 귀족층을 중심으로 반발이 일어나서 티베트 정세는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1958년에서 중국 전역에서 대약진운동이 야기한 대기근이 발생하자 원래부터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았던 티베트의 반중 감정은 폭발하게 되었다. 1959년 3월 10일 티베트인들은 라싸를 중심으로 집단 무장 봉기에 나섰으나,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중국군의 공세 앞에 무장 봉기는 실패로 돌아가고,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남긴 채 실패로 끝난다. 이후 두어 차례 크고 작은 무장 봉기가 시도되었지만, 이 역시 번번이 실패로 끝나고, 달라이 라마 14세 텐진 갸초(Tenzin Gyatso, 1935년생)의 비폭력 평화 투쟁 노선의 영향도 있어 무장 투쟁은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된다.

당시 티베트의 무장 저항군은 1970년 무렵까지 CIA의 지원을 받아 티베트 변경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중국군에 게릴라전으로 맞서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73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 수립을 하면서 중국에 대한 적대 정책을 철회하고, 그에 따라 미국이 주는 지원도 끊겼다. 그 바람에 티베트 저항군들은 중국과 싸우다 전사하거나 인도로 망명하고 무장 항쟁도 끝났다.[5]

결국 티베트 정부는 당시 그 일로 중국과 사이가 크게 틀어진 인도티베트 망명 정부를 수립했다. 인도 북부 다람살라티베트 망명 정부를 수립한 달라이 라마 14세는 국제적으로 중국을 규탄하고, 티베트 독립을 호소하는 비폭력 노선을 견지하고 있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1989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노벨평화상도 티베트 독립의 가능성을 높여주지는 못했다. 특히 중국은 결코 티베트를 독립시켜 줄 생각이 없는터라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3. 티베트 독립의 상징[편집]

티베트 망명정부 국가
༄༄། བོད་རྒྱལ་ཁབ་ཀྱི་རྒྱལ་གླུ།(뵈걜 캅끼 걜루(Bod Rgyal Khab Kyi Rgyal Glu): 승리의 노래)[6]
2011년 5월 달라이 라마 14세미국 미네소타주 방문 당시 불려진 승리의 노래
སྲིད་ཞིའི་ཕན་བདེའི་འདོད་རྒུ་འབྱུང་བའི་གཏེར།
Si Zhi Phen De Dö Gu Jungwae Ter
씨시 팬데 되구 즁외 떼르
윤회계와 열반계의 소원을 이루는 보고(寶庫)

ཐུབ་བསྟན་བསམ་འཕེལ་ནོར་བུའི་འོད་སྣང་འབར།
Thubten Samphel Norbue Onang Bar
툽땐 쌈팰 노르뷔 외낭 바르
불법(佛法)의 여의보주(如意寶珠)가 빛이 난다네.

བསྟན་འགྲོའི་ནོར་འཛིན་རྒྱ་ཆེེར་སྐྱོང་བའི་མགོན།
Tendroe Nordzin Gyache Kyongwae Gön Chogkün Jham Tse Kyong
땐되 노르진 갸체르 꾱외 괸
법과 중생을 널리 이롭게 하시는 보배를 지니신 보호존(保護尊)[7]

འཕྲིན་ལས་ཀྱི་རོལ་མཚོ་རྒྱས།
Trinley Kyi Rol Tsö Gye
틴래끼 뢸초걔
크나큰 위업(偉業)의 장엄(莊嚴)이 바다같이 펼쳐져

རྡོ་རྗེའི་ཁམས་སུ་བརྟན་པས་ཕྱོགས་ཀུན་བྱམས་བརྩེས་སྐྱོང།
Dorje Khamsu Ten Pey ü-Phang Gung la Regh
도제 캄쑤 땐빼 쵹뀐 잠째 꾱
금강계의 견고함으로 시방(十方)을 사랑과 자비로 보살피신다네.

གནམ་བསྐོས་དགའ་བ་བརྒྱ་ལྡན་དབུ་འཕང་དགུང་ལ་རེག
Namkö Gawa Gyaden
남꾀 가와 갸댄 우팡 궁라 렉
하늘이 내려준 만 가지 환희의 위상이 중앙에 솟았네.

ཕུན་ཚོགས་སྡེ་བཞིའི་མངའ་ཐང་རྒྱས།
Phutsong Dezhii Nga-Thang Gye
퓐촉 데시 응아탕 걔
원만한 4가지 덕(德)의 위력이 늘어가고

བོད་ལྗོང~ས་ཆོལ་ཁ་གསུམ་གྱི་ཁྱོན་ལ་བདེ་སྐྱིད་རྫོགས་ལྡན་གསར་པས་ཁྱབ།
Bhod Jong Chul Kha Sum Gyi Khyön La Dekyi Dzogden Sarpe Khyap
뵈종 쵤카 쑴기 쾬라 데끼 족댄 싸르빼 캽
티베트 삼방(三方)[8], 모든 땅에 즐거움과 기쁨이 새로이 퍼지리.

ཆོས་སྲིད་ཀྱི་དཔལ་ཡོན་དར།
Chösi Kyi Pel Yon Dhar
최씨끼 뺄 욘다르
불교와 세간의 훌륭한 덕이 성행하고

ཐུབ་བསྟན་ཕྱོགས་བཅུར་རྒྱས་པས་འཛམ་གླིང་ཡངས་པའི་སྐྱེ་རྒུ་ཞི་བདའི་དཔལ་ལ་སྦྱོར།
Thubten Chog Chur Gyepe Dzamling Yangpae Kyegu Zhidae Pel La Jör.
툽땐 쵹쥴 게빼 잠링 양빼 게구 시데 뺄라 죠르
불법이 시방에 퍼지어 세상에 광대한 중생의 행복에 기여하기를

བོད་ལྗོངས་བསྟན་འགྲོའི་དགེ་མཚན་ཉི་འོད་ཀྱིས།
Bhöd Jong Tendrö Getzen Nyi-ö-Kyi
뵈종 땐되 게챈 니외 끼
티베트 땅의 불교와 중생의 선상(善相) 태양에서

བཀྲ་ཤིས་འོད་སྣང་འབུམ་དུ་འཕྲོ་བའི་གཟིས།
Trashi O-Nang Bumdutrowae Zi
따시 외낭 붐두 토외 시
쏟아지는 상서로운 무량 광명의 위력으로

ནག་ཕྱོགས་མུན་པའི་གཡུལ་ལས་རྒྱལ་གྱུར་ཅིག།
Nag Chog Munpae Yul Ley Gyal Gyur Chig
낙쵹 뮌배 율래 갤규르 찍
암흑어두운 싸움에서 승리가 있기를…

4. 판첸 라마 문제[편집]

판첸 라마는 달라이 라마와 같은 겔룩파의 중요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이자 티베트의 종교적 서열 2위이다. 대대로 판첸 라마는 달라이 라마의 환생자를 인정하는 역할을 맡아 왔다. 그리고 현재의 달라이 라마 14세 이후의 달라이 라마 15세를 인정하는 역할이 바로 판첸 라마 11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판첸 라마 10세 롭상 틴래 휜둡 최끼 걜첸(Lobsang Trinlas Lhundrub Chos kyi Gyaltsen, 1938년생)은 달라이 라마 14세가 티베트를 탈출한 후에도 중국과의 협조 노선을 택해 티베트에 머물렀다. 문화대혁명 때는 그가 주지를 맡고 있었던 티베트 제2도시인 시가체의 타쉬룬포(Tashilhunpo) 사원이 파괴되었으며, 그 당시 투옥되어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말년에는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위원장이 되어 티베트인의 권리 향상에 힘썼으나, 1989년 1월 28일 티베트 사원 방문 중 급사했다(향년 50세). 중국에 의한 암살설도 있었으나 일단 달라이 라마 14세의 말에 따르면 심장 발작이 사인이라 한다.[9]

판첸 라마 10세 사후에 달라이 라마 14세와 티베트 망명 정부는 환생자를 찾기 시작하여, 1995년 5월 14일, 겐뒨 최끼 니마(Gedhun Choekyi Nyima, 1989년생, 현재 32세)라는 6세의 남자 아이를 판첸 라마의 환생자로 인정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티베트 망명정부의 환생자 인정을 승인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환생자를 찾았다. 달라이 라마 14세에 의한 신 판첸 라마 인정 포고로부터 3일 뒤, 중국 정부는 겐뒨 최끼 니마와 그의 부모 및 형을 연행해 버리고 대신 6세의 소년 기트 노르브(Qoigyijabu, 1990년 2월생, 현재 31세)를 새로운 판첸 라마로 즉위시켰다. 기트 노르브의 부모는 모두 중국 공산당 당원이다.

중국 정부는 겐뒨 최끼 니마와 그 가족의 실종에 대한 의혹을 부정했으나, 1996년 5월 28일에 연행했음을 인정했다. 겐뒨 최끼 니마와 그 가족은 중국령 내에 생존하고 있다는 정보는 있으나 여전히 생사불명이다. 중국 측은 그가 안전한 곳에 편안히 살고 있으며 자신이 판첸 라마와 같은 지위에 오르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하지만 진실은 공산당만이 알 듯. 암살당했다는 설도 있지만 이는 루머로 판명되었다.

2010년 3월, 중국 측에서 세운 판첸 라마 11세 최끼걜첸[10]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위원으로 정식 데뷔했다. 즉, 정치판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중국이 만들어 놓은 판첸 라마이니 만큼, 앞으로는 그가 친중국적인 입장을 대변하게 될 것이다.[11]

5. 티베트 독립 문제는 과장되었다?[편집]

물론 어떤 의견이든 반대되는 의견이 존재는 하는 법이니 이런 의견이 나오기도 한다. 이에 대한 반박은 아래 문단에 있다.

티베트 독립에 대한 반발 여론이 존재한다. 국내에는 대표적으로 2011년 출판된 정호영의 저서 <인도는 울퉁불퉁하다>[12]와 2008년 <민중의 소리>[13]에 기고한 김도균의 <티베트 독립은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은 티베트 독립을 반대하는데 그 논지는 다음과 같다.
  1. 티베트중국에 점령되기 이전에 노예제 사회였고 사지를 절단하는 고문이 자행되던 곳으로, 절대 다수의 티베트인들은 어떠한 자유도 누리지 못했으며, 소수의 기득권자들로부터 50%나 되는 고리를 물고 돈을 빌려 살던 빈민이었다. 1951년 이전까지 티베트 사회는 관가(官家), 세속 귀족(貴族), 불교사원의 라마승(활불 포함)등으로 형성된 3대 영주가 정치, 종교, 경제의 핵심 축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티베트 전체 인구의 5%에 밖에 안 되는 소수였지만 티베트의 방대한 토지, 목장, 산림, 산천과 주요 목축을 장악하고 있었다. 티베트의 농노는 크게 ‘차파’(差巴), ‘퇴용’(堆穷), ‘낭생’(朗生)으로 구분되는데 이들은 티베트 전체인구의 90%를 초과하고 있었으며 이중 최하층 노예 등급(농노 이하의 비자유민)으로 다시 분류되는 낭생은 5%의 인구비율을 보였다. 이들에게는 토지의 소유권이 없었으며 인신의 자유와 혼인의 문제 또한 자율권이 허락되지 않았다. 교육이나 의료 혜택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또한 이들의 이러한 처지와 신분은 대대로 세습되었다.[14]
  2. 중국티베트를 다스리고 나서 티베트인들의 생활수준은 급격히 향상되었다. 이는 일제에 대한 조선의 근대화가 있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무관하다. 애초 사회주의 국가는 민족제일이라던지 민족 우월이라는 개념을 등한시한다.[15] 단지 인민의 생활상 자유를 위해 국가 편입을 하고 구제해줄 뿐이지, 식민지화하겠다는 제국주의적 이념이 담지되진 않다.
  3. 티베트인들은 현재까지도 자신들의 고유 언어를 사용하며, 자체 TV 방송까지 할 정도로 자유를 누린다.
  4. 인도로 망명한 티베트 망명 정부중국의 악행을 과대포장하여 거짓말을 했다. 물론 중국군에 의한 티베트인들의 학살이 있기는 있었지만, 자세한 자료가 없으니 확실히 알 수가 없다.
  5. 티베트 망명 정부에서 일하는 티베트 불교 승려들은 인도 정부로부터 세금을 면제받고, 가난한 인도인들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부유하다.
  6. 달라이 라마미국CIA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았다. 티베트 인권 문제 거론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음모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달라이 라마에게 1989년 노벨평화상을 준 이유도 중국천안문 6.4 항쟁을 비난하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있다.
  7. 티베트를 침공한 중국군은 소수였다. 또한, 군사력에서 절대 열세였던 티베트인들이 달라이 라마의 권고에 따라 중국군과의 저항을 중단한 것은 현명한 일이었다. 그러니 티베트인들더러 무기를 들고 중국과 맞서 싸우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8. 현재 티베트 독립을 운운하는 자들은 순수한 티베트 민중이 아니라 중국에 의해 기득권을 빼앗긴 티베트의 봉건 지배층들이다. 과연 일반 티베트 민중이 독립을 원할까?

5.1. 반론[편집]

1번에 대한 반론: 위 첫 문장에서 '티베트'를 '조선'으로, '중국'을 '일본'로 바꾸어서 읽어 보자. 구한 말 한국은 분명히 전근대적인 사회체제 아래에서 폭압적인 수탈과 착취가 횡행했으며[16] 신분제와 노비 제도가 남아 있었고 [17]대다수의 백성들은 빈농 상태를 면하지 못하던 후진국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일제의 강점을 정당화시켜 준다고 할 수는 없다. 티베트 내부의 문제를 외세가 해결해 주겠다는 발상은 오만한 것이라는 반론이 있다.[18]

2번에 대한 반론: 1970년대~1980년대까지는 확실히 특권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비교적 많은 지원을 받기는 했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에선 딱히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제는 가장 가난한 지역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3번에 대한 반론: 지금 중국 치하에서 티벳은 자신들의 언어와 글자를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지만, 이는 티벳이 자유롭다는 것과는 별개다. 예시로 1920년대부터 중일전쟁 이전까지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글자를 사용하고 방송국에서도 한국어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문화 통치를 받았으니, 일제강점기는 자유롭다고 할 수는 없다. 또 티베트에서 11살에 망명한 티베트인 승려 푼촉 최중(Puntsog Chojung)은 "우리 지방은 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처음 3년간만 티베트어를 배우고 나머지는 중국어를 배웠다. 수업은 중국어로 진행되었고, 단지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집에서 이야기할 때만 티베트어를 썼다. 간혹 티베트의 다른 지방에서 친척이나 순례자가 왔는데 사투리의 차이로 말이 통하지 않을 때는, 중국어가 공용어로서 사용되었다.[19]" 라고 할 정도이니 중국 정부가 얼마나 티베트어 교육에 무관심한지는 자명한 일이다. 그리고 말로는 그냥 종교탄압 정도였다는데 티베트나 위구르 지역은 종교 자체가 사실상 자국의 전통을 상징하고 문화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을 탄압하는 것은 결국 티베트의 문화를 말살시키는 목적이나 다름이 없다. 게다가 다른 이민족 자치주들과 마찬가지로 티베트에도 한족들을 대거 이동시켜 거주하게 했는데 이 역시도 티베트 민족의 정통성을 서서히 없애기 위한 민족 말살 정책 중에 하나였다. 티베트인들이 워낙 민족성이 강해 지금까지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지 언젠가는 만주족이나 내몽골몽골족처럼 한족에 동화되어 사라져 갈 수 밖에 없다.

4번에 대한 반론: 티베트 전쟁 내내 중국이 보인 잔학무도함은 너무나 심각해서 침공 이후 역시 사상자의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언제나 그랬듯 중국에서 일부러 축소시켜 숨기는 거지만 티베트인들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다. 난징 대학살을 당한 중국이 자신들 역시 티베트인들에게 똑같이 자행하고 있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수년동안 티베트 공산당 지도자였고 티베트 민족정치자문의원회의 부회장이라는 중책에 있던 푼촉 왕걀마저 중국군이 저지르는 잔학 행위에 항의했다가 티베트인의 자유 투쟁에 동정을 표했다는 명목으로 투옥되었을 정도였으며, 중국군 내부에서도 삼대기율 팔항주의를 무시하는게 말이 되냐면서 항의한 사례들이 있다. 거기에다가 당시 라싸에 주둔했던 중국 인민해방군 포병대 지휘관이었던 청호칭 대령은, 동료들이 저지르는 끔찍한 학살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티베트군으로 전향해 버렸다. 청호칭 대령은 한국전쟁에 참가하여 미군과 싸웠고, 티베트로 파견되어 군인으로 몇 년을 더 복무했다가 티베트 저항군에 가담하여 예전의 동료들과 싸웠다. 나중에 그는 티베트 동부 지방인 캄과 암도에서 일어난 티베트 저항군과 중국군과의 전투로 인해 약 4만 명의 티베트인들이 죽었으며, 중국군 수뇌부에서 더 이상 티베트인들의 봉기를 막기 위해서 티베트인들에게 주는 식량 배급을 줄이고 통제를 강화하고 더 긴 시간 동안 노동을 시켜야 한다고 작성한 기록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그는 롭상 타시라는 티베트식 이름도 얻었는데, 중국군의 탱크와 비행기가 티베트 민간인을 노리고, 티베트 마을들이 중국군 폭격기에게 폭격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청호칭 대령은 인도에서 티베트 난민으로 여러 해를 살았다. 티베탄 리뷰 1979년 10월 호에 그와의 인터뷰가 남아 있다. 제목은 "티베트 자유를 위해 싸운 중국군 대령(A Chinese Colonel Who Fought for tibet's Freedom)." 또한 1989년 3월, 티베트의 수도라싸에서 벌어진 티베트인들의 봉기를 진압할 때 벌인 중국군의 학살에 관해 중국 공산당의 간부가 증언한 내용도 있다.
티베트인 청년이 중국인민무장경찰에게 돌 2개를 던졌다. 부소대장이 물었다. "저놈을 패야 하지 않습니까?" 돌멩이 하나를 다리에 맞은 부대대장이 명령을 내렸다. "패라!" 그러자 부소대장은 무장경찰 3명을 이끌고 돌을 던진 티베트인을 쫓아갔다. 티베트인들은 일반 티베트 가족이 사는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중국인민무장경찰은 문을 차고 들어가 모든 거주자를 사격으로 싹슬이했다. 가족 6명이 모두 죽었다. 가족 중 막내는 겨우 11세였다. 그러나 돌을 던진 티베트인은 벽을 타고 올라가 도망쳤다. 무장경찰은 그의 뒤를 쫓아가 다리에 총상을 입혔다. 그러자 한 무장경찰이 부리나케 달려가서 자신의 총을 들어 티베트인의 머리에 대고 발사했다. 그런데 소총이 갑자기 오발되어 그 뒤에 있던 무장경찰 하나가 목에 총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병사가 죽는 것을 보고 분노한 부소대장은 돌을 던졌던 티베트인의 머리를 때렸고, 티베트인 청년의 머리가 깨져 뇌가 밖으로 쏟아졌다. 이 티베트인 청년이 중국인민무장경찰에게 총으로 구타당했을 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자신의 집 문간에 서있던 한 티베트인 가족 6명이 '살인자! 살인자!'라고 외쳤다. 부소대장은 경기관총을 들더니 가족을 향해 기관총을 쏘아대 모두 죽여 버리고 말았다.

이 사건들은 <Amnesty International, Urgent Actiom 8/3/1989, PRC 'Fear of MassArrests/Torture/Summary Execution in Tibet'>(앞의 글)에 인용되었다. '1989년 3월 5일과 그 이후로 라싸에서 벌어진 사건에 관한 직접목격증언(Eye Witness Accounts Of Events in Lhasa, Tibet, on and after March 5th 1989)'앞의 글. <가디언>(1989년 3월 7일자)라싸 휩쓴 유혈 폭동(Bloody Rioting Sweeps Lhasa). 두 티베트인 가족의 몰살이 관련된 돌멩이 투척 사건은 홍콩의 잡지인 <홍콩제밍(Hong Kong Cheng Ming)> NO. 139, P.24, 1989년 3월 1일자에도 실려 있다. 방문자, 티베트인 학살에서 256명 사망 주장(Visitor Claims 256 Deaths in Tibetan Massacre) <Reference News> columm 라싸의 학살(Massacre in Lhasa), Huang Min. 이 글의 필자인 황민은 베이징에서 중국 공산당 간부와 만난 뒤, 상기 사건에 관한 진술을 들었다고 고백했다. 이 간부는 1989년 3월의 라싸 학살 사태에 발생한 티베트인 사망자가 256명이라는 수치 정보도 흘렸다. 시위자가 돌을 던지자 총으로 쏴 죽였는데, 이들이야 당연히 그렇다고 쳐도, 전혀 상관없는 일가족까지 총살해 버린 것이 중국인민무장경찰이다.

5번에 대한 반론: 티베트 망명 정부의 티베트 승려들이 자동차를 타고 잘 산다고 그들의 독립 주장에 정당성이 없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 동포들이 보내준 돈으로 (상대적으로) 유복한 삶을 누리며 미국에서 일본조선에 저지르는 악행을 폭로, 독립운동을 했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보면서 "저들은 저렇게 잘 사는데 무슨 독립을 하겠다는 거냐?"라고 꼬투리를 잡는 것과 같은 셈이다. 또 망명 정부와 티베트 승려들이 인도 정부에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 이들은 망명인이라는 신분이다. 이들은 어느 정도 세금에 감면을 받는 면도 없지는 않지만, 인도 정부의 보호를 받고 인도에서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이상 세금을 꼬박꼬박 내고 있다. 또 인도 내의 티베트 사원의 경우 사원의 사무원이나 청소원 등은 인도인들을 우선으로 고용하여 오히려 인도인들의 일자리를 만들어 주고 있는 상황이다.

6번에 대한 반론: 장개석 총통의 중국 국민당으로부터 자금과 무기를 지원받아 일본에 맞서 독립운동을 벌였던 김구이봉창, 윤봉길 등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도 모두 중화민국의 앞잡이나 첩자라는 말이 된다. 이분들은 한국의 독립을 최우선으로 생각했지 중화민국의 첩자는 아니었다. 이런 논리라면,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미국 정보 기관인 OSS[20]으로부터 군사 훈련을 받고 대일 항전에 나섰던 한국인 독립운동가들도 모두 미국의 스파이라는 말이 된다. 무엇보다 저런 식의 논리는 티베트인들을 가리켜 "너희는 미국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서 중국을 물어뜯고 있으니, 순수하지 못하다."라는 뉘앙스가 담겨져 있다. 달라이 라마의 노벨평화상 수상에 대한 태클은 트집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달라이 라마가 평화상을 받은 것은 비폭력 노선을 견지해서인 거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7번에 대한 반론: 인도로 파견된 중국군이 매우 적은 수였을 거라고 말한 내용은 <인도는 울퉁불퉁하다>에 실려있다. 그러나 그 말의 출처는 저자인 정호영 본인이 직접 발로 뛰면서 취재하거나 구체적인 사료를 제시하며 주장한 게 아니라, 미국의 저술가인 마이클 파렌티의 말에서 "아마 티벳에 진주한 중국군은 소수였을 것이다."라는 극히 추상적이고 단순한 주장을 그대로 베껴온 것인데, 마이클 파렌티는 스스로도 확실치 않다고 명시하였다.

1950년 10월 약 2만 명 가량으로 추정되는 중국군이 티베트 동부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티베트 저항군의 격렬한 반격에 부딪치자, 1957년 중국은 탱크와 포병과 항공기까지 포함된 15만 명의 대군을 집결시켜 다시 티베트를 침공한다. 그렇다면 전부 합쳐 누적 17만 이상의 군대가 동원된 셈인데, 1950년대에 시작된 티베트와 중국의 전쟁은 약 20년 넘게 계속되었을 정도고, 가장 큰 전투는 티베트군과 중국군을 합쳐 10만 단위의 병력이 참가했을 정도다. 티베트인들은 1970년 무렵까지 CIA의 지원을 받아 중국군의 침공에 게릴라전으로 맞서 끈질기게 저항했다.CIA 티베트 프로그램 티베트인들의 무장 항쟁이 사라진 이유는 달라이 라마의 저항 중단 권고가 아닌, 1973년 들어서 미국중국과 정식으로 국교 수립을 하자, 그에 따라 중국과의 대립 정책을 포기하는 바람에 더 이상 티베트 저항군에게 도움을 줄 수가 없게 된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그에 따라 티베트 전사들은 중국군과 계속 싸우다 전사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인도로 망명하게 되었다.[21] 현재 인도에 망명 중인 생존 게릴라들과 그 후손 등은 현재 게릴라 부대를 친목 모임의 형태로 유지하고 있으며, 종종 티베트 독립운동에 관련된 시위나 행동을 할때 부대의 군기를 게양하고 있다.

8번에 대한 반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나섰던 독립운동가들 중에서 정말 못 먹고 못 살았던 일반 서민들이 많았는가 아니면 어느 정도 먹고 살만 했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고급 학문을 익히고 배웠던 지식인들이 많았는가를 비교하면 당연히 후자다. 위의 논리대로라면 일제강점기의 한국 독립투사들 중에서 부유한 집안의 지식인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싸웠던 불순분자라고 보기도 힘든 것이 독립운동을 한 사회주의 계열의 사람들 중에서는 부유한 집안 출신이 대부분이다. 원래 먹고 살아야 반정부운동 같은 것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일단 국민들이 배고픔을 극복해야 이런저런 사회와 정치문제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거지, 굶어죽기 일보 직전의 서민들에겐 정치니 국제관계니 그딴 거 생각할 여력도 없다. 또, 기득권층인 왕실이나 양반 계층에서도 자기 사비를 들이고, 집안 식구들을 거지로 만들면서까지 일제에 맞서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

6. 티베트 독립운동의 현재[편집]

2008 베이징 올림픽 직전 벌어진 티베트인들의 대규모 항쟁은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던 티베트 독립운동을 다시 불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티베트인들의 대규모 봉기에 맞서 중국 정부가 군대를 동원해 무차별 유혈 진압에 나서자 국제 여론은 유례없이 악화되어 올림픽 보이콧 협박까지 받았다. 물론 중국이 그런 협박에 굴할 나라도 아니고, 그들의 보이콧도 립서비스에 불과했다.

올림픽 성화 봉송 과정에서 티베트 지지 시위자들에 의해 성화 봉송 주자들이 습격당하는 일이 벌어졌고, 어느 성화 봉송 주자가 자신의 옷 소매 속에 티베트 국기(설산사자기)를 숨기고 있다가 성화와 같이 찍은 사진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는 가장 강력한 시위가 있었는데, 티베트 망명자부터 시작해 심지어 프랑스 의회 하원의원들까지 나서 시위에 참여했으며 결국 프랑스 경찰은 성화를 끄고 이들을 교도소로 보내기까지 했다.

한국에서도 티베트 독립 지지자들이 성화가 서울에 도착하던 날 덕수궁 앞에서 시위를 하려 하였으나, 이에 반발하는 재한 중국인들과 오히려 충돌을 일으켜 시위자들은 물론 지나가던 무고한 시민들을 구타하고 돌, 금속너트, 스패너 등을 던져 한때 외교 문제가 될 뻔했다. 이 사건에 대해 경찰공무원은 조치를 취하지 않고 중국인들에게 폭행당하던 시민이 저항하자 오히려 저항하는 시민을 제지하고 폭행하던 중국인을 보호하는 등의 행태를 보여 중국 공안이냐고 욕 먹었고, 정부 역시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아 국민들로부터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에서도 티베트 독립 지지자들이 적극적으로 시위를 하며, 특히 도쿄에 도착하던 날 고쿄 앞에서 시위를 한 사실이 있다. 일본에서는 다른 국가들과 달리 티베트 지지 시위자들이 별 문제없이 무사히 시위를 마쳤다. 일부 극우세력은 티베트 독립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지원하기도 하는데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관점 때문이다. 이를 보고 대만의 국민당 지지자들 중 일부는 이를 타국의 독립운동에 찬성하는 주제에, 자국의 독립운동은 탄압하는 이중잣대라고 비난하며, 일본으로 가서 류큐 독립 운동 지지 시위를 하자고 기부금을 모았지만 단체의 사이트가 증발해버렸다.

티베트 독립의 가능성, 특히 달라이 라마 14세가 주창하는 비폭력 독립운동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 중국의 통치 기간이 점점 길어지고, 국제 사회가 티베트 독립운동을 직접 돕는 등의 공세적인 정책보다는 중국의 현 세력권을 인정하고 대신 팽창을 막는 쪽으로 돌아서고 있기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이에 '중도 정책'이라는 완전한 독립이 아니라 자치권 확대를 요구하자는 정책을 제시했고, 티베트 망명 정부가 이를 망명 티베트인들을 대상으로 한 투표에 부쳐 보기도 했으나, 아직도 티베트 망명 정부 안에서 무장 독립운동 노선과 비폭력 노선 간의 노선 갈등이 크다. 현재 티베트인들은 달라이 라마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양 측이 갈라설 정도는 아니며 일단은 무장 독립운동 노선이 달라이 라마에게 한 수 접고 들어간다. 물론 중국 정부는 자치권 확대든 비폭력 노선이든 간에 달라이 라마 14세를 인정할 생각은 전혀 없는 상태.

티베트 불교 카규파의 수장이자 티베트의 서열 3위인 카르마파 라마 17세는 중국의 탄압에 견디다 못해 지난 1999년 14살의 나이에 인도로 망명했는데, 달라이 라마와 함께 지내고 있다. 달라이 라마 14세가 나이가 많으니만큼, 그의 사후 리더십 공백을 우려하는 망명 티베트인들은 달라이 라마 14세가 어서 후계자를 지명하길 바라고 있으며, 현재는 후계자로 카르마파 라마 17세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다만 달라이 라마 14세는 자신의 사후 달라이 라마는 더이상 전생치 않고 공화정이 될 것을 천명하였으며 중국 공산당은 무신론인 주제에 달라이 라마의 환생을 이용하여 자파가 조종하는 달라이 라마를 내세우려 하는 상황이다. 그와 별도로 카르마파 라마 17세가 과거의 라마들처럼 실권을 잡지는 못할 전망이며, 해방 이후를 생각한 것일 가능성이 크지만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망명 정부 내에서도 민주화를 추진 중에 있다.

시간이 갈수록 티베트 지역에 대한 한족의 이주정책, 티베트인에 대한 음양으로의 강제적인 동화, 종교 활동 억압이 강해지고 있고, 티베트와 칭하이성을 잇는 칭짱철도(靑藏鐵路)가 깔리면서 점점 티베트 고유의 독자성이 퇴색되어 가고 있다. 신장 위구르 지역처럼 한족들이 대거 이주해 와 경제+정치적 주도권을 잡았으며, 대도시권을 위주로 티베트인들의 친중국화, 세속주의 성향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국제적으로도 최강대국 미국 역시 중국 내의 독립운동과 같은 민감한 사안에서는 중국의 눈치를 보는 현실이기에 외교적 고립에 처해 있는 상황이다. 그나마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여파로 친중 성향 티베트인들조차 중국 정부에 등을 돌리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지만 티베트 독립운동에 힘을 실어주기에는 부족한 수준이다.

언젠가부터 티베트인들은 승려는 물론이고, 일반인들까지, 심지어 젊은이들과 청소년들까지도 분신자살로 중국의 통치지배에 항거하고 있다. 티베트 불교와 티베트인들의 영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는 비폭력을 가르치기에, 무장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분신자살로 항거한다고. 소년부터 아이 엄마까지…끊임없는 티베트인 분신.

오늘날의 티베트 망명 정부는 분리독립만을 고집하지 않고 실질적인 자치권을 얻는 수준까지 양보했다. 중국 정부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티베트 공산당에 의해 지배되는 허울뿐인 자치구의 현실이 티베트인들을 분노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국가 무신론 성향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성향의 맞추어 달라이 라마 14세가 티베트 망명 정부에서 모범적으로 제정 분리를 시행하는데도 불구, 자치권 요구마저도 거부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 14세 자체가 미국의 조종을 받는 첩자라고 주장하면서, 그와 티베트 망명 정부와의 어떠한 협상도 하지 않고 있다. 티베트 연구가들의 말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현(現) 달라이 라마가 늙어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고 한다. 달라이 라마가 최고의 지도력을 보유하고 있기에 아직 주류 세력은 아니지만, 아예 달라이 라마 14세의 비무장 노선을 비판하면서 무장독립운동을 부르짖는 독립운동가들도 있다고 한다.

현재 중국 정부는 위구르에 비해선 티베트에는 정부의 입김이 세긴 하지만 티베트 출신 뤄쌍장춘이나 바이마츠린 등에게 자치를 맡기고 있으며 이슬람[22] 회족들의 노력이 있으나 지금도 이슬람에 대해 호의적은 아니다.[23] 불교는 비교적 탄압이 적은 편이긴 하나 중국은 현재 국가 무신론을 내세우는 국가이니만큼 비교적 적을 뿐이지 종교탄압에서 완전히 벗어나긴 힘들며 분리주의 운동이 아닌 자치권 확대 요구도 묵살하고 있다.

실제로 티베트 독립운동은 위구르족과 함께 중국 소수민족 중 가장 활발한 독립운동이다. 당장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티베트 승려 분신사건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티베트의 독립이 어렵기에 티베트인들은 대부분 독립보다 자치를 더 원한다. 격하게 시위하는 사람들조차 "마음 같아서는 독립을 원하지만, 현실적으로 자치를 원한다.", "자치권만 준다면 중국 정부를 얼마든지 따를 수 있다."고 하고 있다. 이들이 원하는 자치도 지금 중국의 자치 방식에서 좀더 유연해져서, 티베트 출신 공산당원도 티베트 자치구의 지도원으로 될수 있는 방식이다. 결국 근본적인 원인은 중국 정부의 강압적인 통치와 티베트인들에 대한 의심과 탄압이기 때문에 중국 인권 상황이 개선이 되고, 티베트를 향한 중국 정부의 시선이 개선이 되면 티베트인들은 자치권을 얻는 대가로 독립운동을 중단하고 중국의 일부로 남는 선에서 중국과 타협할 수도 있다. 사실 중국에 민주 정부가 들어선다 해도 전략적 요충지이자 자원의 보고인 티베트를 포기할 리도 없다. 물론 티베트인 입장에서는 이것도 중국 공산당의 폭압보다는 훨씬 낫겠지만.

사실 중국이 홍콩, 마카오, 좡족, 후이족 같은 소수민족 자치구랑은 달리 티베트, 위구르엔 조금의 자치권조차 허용하지 않는 건 역사적으로 앞의 지역들은 황하에서 발원한 중국문명이 수백, 수천년간 그 영토와 인구, 문화적 영향력을 확장 팽창하면서 확고불변한 한족의 영역으로 굳혔다고 말할 수 있는 논리와 명분을 갖췄다고 할 수 있는데 반해 현재 위구르족과 티베트인이 거주하는 타림분지와 티베트 고원 지역들은 중국사에서 원, 청나라시대를 제외하곤[24] 한족의 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론적기반이 빈약하고[25] 인구비율도 중국정부가 엄청나게 한족을 이주시켰어도 여전히 대다수라곤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만약에 중국붕괴론같이 본격적으로 흔들릴 경우 위구르같은 무장투쟁을 펼치는곳은 길게 말할거도없고 비폭력노선에 사실상 자포자기 상태로 자치권만 인정해주면 중국의 일부로 남겠다는 티베트도 어떻게 나올진 알 수 없기에 중국정부가 이렇게 강경하게 독립운동의 싹을 제거하는 거다.[26]

2008년 티베트 소요 사태로 티베트 내 반중감정이 고조되고 독립 문제가 이슈화됐을 당시, 티베트 망명 의회가 독립에 관한 여론조사를 하였는데 티베트인의 30%가 중국으로부터 완전 독립을 지지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

미국은 공식석상에서는 티베트 독립을 당연히 반대하지만 은밀히 망명 정부를 도와주고 있다.# 또한 티베트 자치구 방문을 막는 중국 관료들에게 미국 입국을 금지하였다.# 같이 미국인의 자유로운 티베트 방문권을 보장하는 '티베트 상호여행법(Reciprocal Access to Tibet Act, H.R. 1872)’에 상하원 통과후 서명하였다. 2020년 1월에는 티베트 정책·지지 법안을 찬성 392표, 반대 22표로 통과시켰다.#

폼페이오 장관은 25년간 실종 상태인 판첸 라마 문제를 내세워 중국을 압박했다.#

이에 대해 자오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 1995년 달라이 라마가 판첸 라마의 환생자로 지명한 겐둔 치아키 니마와 관련해 “그는 어렸을 때 무상 교육을 받았고 대학 입학 시험을 통과했으며, 지금은 직업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외교관과 언론인, 관광객의 티베트 지역 방문을 중국이 막는 것과 관련, 이에 관여한 중국 관리들의 비자를 제한한다고 밝혔다.# 중국도 맞대응했다.#

지난 14일(현지시간) 티베트 정책조정관으로 임명된 로버트 데스트로 미국 국무부 차관보가 임명 직후 티베트 망명정부 수반을 만난 것으로 확인됐다.

대통령을 포함한 미국의 관리들이 티베트의 영적인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를 백악관 등에서 만난 적은 있지만 망명정부 수반을 만난 것은 티베트 망명정부 수립 60년 만에 처음이다.

미국이 신중을 기하던 그간의 관행을 깨고 티베트 망명정부 수반을 만난 것은 트럼프 행정부가 대선을 2주 앞두고 중국에 대한 압박의 강도를 최대한 끌어 올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로이터통신은 로버트 데스트로 티베트 정책조정관이 티베트 망명정부 책임자인 롭상 상가이(Lobsang Sangay)를 국무부에서 만났다고 보도했다.

인도 다람살라에 있는 티베트 망명정부도 16일자 발표를 통해 티베트 중앙 행정부의 싱가이 수반이 국무부에 공식 초청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역사적인 날짜라고 평가했다.

싱가이 수반도 "이것은 미국이 티베트 정부와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를 인정하는 것"이라며 “미국 정부의 건전한 정치적 제스쳐의 한 부분이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싱가이 수반은 데스트로 조정관이 향후 몇 달 내에 미 상원을 통해 새로운 티베트 정책법 및 지원법을 조속히 통과시키는 데 동의했다고 덧붙였다.

미국 고위 관료가 티베트 망명정부 수반을 만난 사실이 알려지자 중국은 "티베트를 건들지 말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자오리젠 외교부 대변인은 20일 정례 브리핑에서 "미국에 엄정한 교섭을 제기했다"며 "이는 순전히 정치적 목적으로 중국의 내정을 간섭하고 티베트의 발전과 안정을 파괴하려는데 있다"고 비난했다.

7. 대한민국의 입장[편집]

대한민국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티베트 독립운동에 대해 입장을 표명한 적은 없었다. 중국과의 관계를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인 대한민국 정부는 중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27]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티베트 독립운동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는 것은 근시일 내에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중국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것도 아니고 방관하는 것에 가깝다. 한국인들 중에서는 중국의 티베트 독립탄압이 과거 일제가 한국 독립을 탄압했던 것과 겹쳐 보이기 때문인지 티베트에 동정심을 느끼고 티베트의 인권 향상을 요구하며, 기존의 반중 감정과도 결합해 중국을 규탄하는 반응이 많다.[28]

2008 베이징 올림픽 성화가 한국을 통과할 때는 티베트 독립 지지단체가 중국인 유학생 무리에 폭행당하는 사태가 있기도 했다.## 한때 한국 불교계가 달라이 라마의 방한이 성사되도록 탄원서도 내보고 서명도 받아봤지만 외교통상부에서 비자 발급을 거부하여 무산되었다. 당연히 주한 티베트 대사관도 존재하지 않으며, 일본 도쿄의 티베트 임시 대사관이 처리하고 있다.

8. 관련 문서[편집]

[1] 참고로 설산사자기는 청나라가 멸망하고 잠시 중국이 혼란스러웠던 1912년에 채택되었으며, 여기에 일본의 티베트 연구 승려였던 아오키 분쿄(달라이 라마 13세의 고문을 맡기도 했다)가 참여했다.[2] 불교를 믿지 않는 이들에 대한 관용과 열린 마음을 나타내려고 일부러 열어둔 것인데 남이 굳이 그 마음을 막아버리는 것은 대단한 실례다는 이유 및, 근데 솔직히 이미지 짤린 걸로 오해할 만하다. 또한 불교를 믿지 않는 외부인들에 대한 열린 마음을 표현해야 하므로 게양할 때는 반드시 테두리가 없는 부분이 바깥으로 나오도록 걸어야 한다.[3] 프리 티베트. 티베트 독립운동의 구호다.[4] 물론 마오쩌둥은 문제가 터질 것을 알았기에 이를 공식적으로 하지 말라고 지시했으나 지역 공산당원들은 마오쩌둥을 따르지 않았다. 물론 마오쩌둥은 당분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지 언젠가는 할 생각이었다.[5] 미국은 대륙 중국과 국교를 맺으면서 중화민국(대만)과 국교를 끊었지만 그 후에도 계속 대만을 보호하고 있다.[6] 약칭 '걜루'(Gyallu)라고 불리는 티베트 국가는 티베트 망명 정부에서 사용되는 국가로, 현 달라이 라마 14세의 스승이었던 트리쟝 린뽀체가 작사하였다. 곡은 오래 전부터 사용되던 종교의식 곡에서 나왔기에 작곡가는 불분명하다. 중국이 진주하기 전의 국가는, 곡은 동일하나 가사는 장수를 바라는 노래로 영국의 국가 God save the Queen과 비슷한 느낌의 가사였다.[7] 티베트의 특별한 수호본존인 관세음보살을 이른다.[8] 티베트를 이루는 세 지방, 위짱(Ü-Tsang), 캄(Kham), 암도(Amdo)를 가리킨다.[9] 어린이 과학잡지 과학소년 1995년 10월호에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에 대한 기사가 나온 적이 있는데 어린이들이 읽기에는 어려운 내용의 기사이긴 하지만 판첸 라마 10세(본 기사에서는 그냥 판첸 라마)에 대해서 마치 중국에 협조해서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민중들을 매몰차게 배신하고 중국 정부를 충실하게 쭉 따르고 꼭두각시 역할을 이행하고 있는 것처럼, 기사가 쓰여진 1995년 당시에도 여전히 살아 있으며 달라이 라마가 대인배적으로 그를 인정한 것처럼 묘사해놨다(...).고인드립 쩌네 참고로 이 기사를 쓴 이억주 기자(훗날 과학소년 편집장이 되고 과학소년의 경쟁잡지인 어린이 과학동아의 창간인이기도 하다)는 과학잡지 기자니깐 당연하지만 물리학 전공을 한 분(...). 물론 편집장이 되었을 때는 '미스터 리의 미스터리 세계'라는 개인 코너를 통해 세계 불가사의 문명들에 대해 쓰는 등 역사 등 인문학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은 듯 하나 티베트에 대해서는 그 당시에 막연하게 기사를 쓴 듯하다.[10] 혹은 걜첸 노르부[11] 만약 티베트가 독립한다면 티베트 불교가 친중파와 반중파로 갈라져 서로 대립할 가능성이 있는데, 그 중 친중파는 기트 노르브를 구심점으로 삼을 가능성이 높다.[12] 이름부터 느껴지지만 주로 인도의 사회문제를 다룬 책으로, 티베트와는 한 파트를 제외하곤 하등 상관없는 책이다. 저자가 특별히 티베트에 관해 자세히 알고 쓴 책도 아니다.[13] NL 계열의 언론으로, NL계열이 흔히 그렇듯 미국일본에 대한 반감으로 중국에 대해서 호의적인 면이 있다.[14]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72341[15] 선전물에서 민족 개념을 쓰긴 하나, 이는 대중추수를 위한 표현이지 이념적 표지랑은 다르다.[16] 다만 조선의 수탈과 착취가 동시대 일본보다 가혹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조선의 세율은 중국+일본보다 낮은 편이었고, 농민에 대한 학대또한 금지하는 법률을 만드는 등 일본보다 낫다고 볼 여지가 존재한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수탈과 착취가 없었다고 할 순 없다.[17] 티베트와 달리 대한제국의 경우 광무 개혁 때 신분제 자체는 폐지되었지만 문화적으로는 존재했다. 그런데 대한제국의 노비는 비공식적으로 일제 강점기까지 존재했기 때문에 이 경우는 중국 공산당보다 일제가 명분 면에서 밀리는 편이긴 하다. 물론 일제나 중공 모두 명분이 없는 것은 맞다.[18] 사실 한 국가의 인권이나 후진적인 면모에 다른 나라가 개입하는 경우는 존재한다. 그러나 중국의 티베트 지배나 일본의 조선 지배는 해당 국가들의 후진적인 문제점(청나라에까지 존재했던 중국의 노예제, 중국 공산당의 야만적인 폭력성/에도 시대부터 1930년대까지 존재했던 일본의 마비키, 가라유키상, 익찬 체제, 부라쿠민 문제 등)들을 보면 중국과 일본의 제국주의적 발상 또한 오만하다고 볼 만한 면모가 존재한다.[19] 현재 인도에 살고 있는 티베트인들은, 수도 라싸의 말을 표준어로서 배우고 사용한다.[20] CIA의 전신이다.[21] 망명한 티베트 게릴라들이 인도 국경을 넘을 때 검이나 활 같은 고전무기는 일부 소지가 허가되었지만, 총이나 폭탄 같은 화기는 모두 인도 정부에 넘겨주었다.[22] 중국은 다른 종교에 비해 특히 이슬람을 좋아하지 않아서 같은 민족이여도 이슬람 인구를 분리해 다른 민족으로 등록하기도 했으며 종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말살을 시도한 적도 있다.[23] 중공 급의 극단적인 법제화 된 탄압이 없지만 무슬림 다수 민족이나 무슬림 한족과 갈등이 있는 것은 타 중화권도 마찬가지인데 현재 판치고 있는 이슬람 극단주의에 대한 혐오와 과거 역사적인 갈등이 섞여서 타 중화권이나 해외 한족들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이슬람에 호의적이지 않은 이들이 의외로 적지 않은 편이다.[24] 그것도 매시대 어느 정도 중계무역지로서의 성격과 다른 세력과의 뺏고 빼앗기는 패권싸움으로 인해 실제 행사하는 통치력이 상당히 취약했던걸 모두 반영한 거다. 더군다나 원, 청은 이민족 정권이라서 한족도 지배받던 처지였고.[25] 근데 아이러니하게 현대에 와서 중국공산당이 그 빈약한 이론적기반을 채우기 위해 과거 청왕조의 대의각미록 같은 본래 만주족의 중원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서적을 변방의 소수민족 지배를 합리화시키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의 뿌리로 쓰고 있다. 기존 영토에서 거의 2배 확장에 이론적 기반까지 역시 중국의 산타클로스 만주족[26] 티베트 독립운동 및 위구르 독립운동과 맥락의 차이가 있지만 중국이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까지의 기간에 시행된 역사공정(일례로 한국사이자 한민족 역사인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발해, 고려를 중국 역사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역사 관련 정책 동북공정)을 시작으로 시진핑 주석 집권 이후 한국 문화에 대한 예속화 정책을 시도하여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였다는 자국 내의 선전을 정당화하는 동시에 한국과 북한을 자국의 일부로 완전히 편입시키려고 하는 것도 지금은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한데다 중국 정부의 정책에 협조하고 순응하는 편이지만 대한민국 주도 통일이 이루어질 경우 중국 조선족들이 분리주의 및 통일한국에 합류하는 독립운동을 시도할 가능성을 미리 차단해두는 것이 주요 목표이자 중화민족이라는 정치적 슬로건 유지 및 중국 분열 방지를 위한 정책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27] 주한미군 THAAD 배치 논란에 중국이 한한령으로 보복에 나섰듯이 중국은 한국이 심기를 거스르면 격렬히 반발하고 경제적 혹은 정치적이나 군사적인 제재를 가하여 관련업계에 큰 피해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전략을 외국에선 개집 전략(doghouse approach)이라고 비꼬았다. 심기 거슬리면 개 패듯이 패서 잘못을 인정하게 한 뒤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하여 상대가 고마워하길 바라는 전략이나 한국의 반중 감정도 커졌다.[28] 다만 이게 너무 과해서 중국 정부의 티베트 탄압을 빌미로 난징 대학살같은 전쟁범죄도 정당화하는 극단적인 혐중 부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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