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차이콥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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Пётр Чайковский [1]
표트르 차이콥스키|Pyotr Tchaikovsky
본명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Пётр Ильи́ч Чайко́вский (러시아어)
Pyotr Ilyich Tchaikovsky(영어)
국적
출생
러시아 제국 뱟카현 사라풀군 캄스코봇킨스크[2]
사망
1893년 11월 6일 (향년 53세)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직업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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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상트페테르부르크 티흐빈 묘지[3]
학력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1862년~1865년)
사조
활동 기간
신체
188cm
종교
부모
아버지 일리아 페트로비치 차이콥스키 (1795-1880)
어머니 알렉산드리아 아시에르 (?-1854)
배우자
안토니나 밀류코바 (1877년 결혼)
1. 개요2. 이름 표기3. 생애
3.1. 초기3.2. 중기3.3. 말년
4. 능력과 평가5. 차이콥스키의 주요 작품
5.1. 교향곡5.2. 관현악5.3. 협주곡5.4. 실내악5.5. 피아노5.6. 발레5.7. 오페라5.8. 합창5.9. 가곡
6. 바깥 고리


1. 개요[편집]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는 러시아 제국작곡가이며, 러시아의 위대한 천재 작곡가이자 러시아 클래식 음악의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계획에 없던 음악가로서의 인생은, 갖은 역경과 시련을 거쳐 이제는 불멸명성을 남겨 주었다.

2. 이름 표기[편집]

러시아어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표기는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인데, 2005년에 외래어 표기법에 러시아어 한글 표기법이 추가되기 전까지는 죄다 '차이코프스키'로 써서 오히려 '차이콥스키'가 어색할 지경이다.

차이콥스키라는 성은 러시아어우크라이나어로 '갈매기'를 의미하는 '차이카(Чайка)'가 어원이며, 차이콥스키의 부계는 우크라이나인 혈통이었다. 참고로 근현대 작곡가인 보리스 차이콥스키(Борис Александрович Чайковский, 1925년 9월 10일 ~ 1996년 2월 7일)와는 가족관계가 아니다.

강세를 살린 러시아어 발음은 [pʲɵtr ɪlʲˈjitɕ tɕɪjˈkofskʲɪj](표트르 일리이치[4] 치이코프스키이)이다. 직접 들어보자. 이는 차이콥스키(Чайко́вский)의 철자 중 가운데 알파벳 'о'에 강세가 있어 '오'로 발음하고, 대신 앞 а의 발음이 '이[ɪ]'로 약화되는 현상 때문.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а를 и로 발음하는 경우는 연자음인 ч, ш 뒤에 위치하고 강세가 없는 경우에만 한정한다. 대표적인 예로 시계를 뜻하는 'Часы́(Časý)'는 'ы'에 강세가 있어 [t͡ɕɪˈsɨ]로 발음한다.

그의 이름의 로마자 표기로는 영어식인 Pyotr Ilyich Tschaikovsky가 많이 알려져 있다. 굳이 'Ch'가 아닌 'Tch'라는 다중자음을 쓰는 이유는 본인이 P. Tschaïkowsky / Pierre Tschaïkowsky와 같은 식의 프랑스어 철자를 따른 서명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차갑석(車岬晳)이라는 음차한 이름도 있었으며 해방 직후까지 이 음차한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링크.

3. 생애[편집]

3.1. 초기[편집]

파일:external/www.musicwithease.com/tchaikovsky-1874.jpg
젊은 시절의 차이콥스키

러시아의 우랄 지방 캄스코봇킨스크에서 출생. 아버지는 광산 감독관으로 우랄 지방 곳곳의 광산을 전전했고, 그 때문에 가족들도 아버지를 따라서 이곳 저곳으로 이사하면서 살았다. 프랑스인 가정교사의 교육으로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지만, 아버지나 어머니는 차이콥스키가 별로 음악적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아버지가 법률가로 키우려고 했다.

1850년상트페테르부르크의 법률 학교에 입학하여 가족과 떨어져 살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법률학교 내 합창단에 들어가서 음악 공부도 이어 나갔다.

1859년에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법무성의 1등 서기관으로 근무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을 끊지 못하던 중 1860년에 안톤 루빈시테인(Антон Рубинштейн, 1829년 11월 28일 ~ 1894년 11월 20일)과 니콜라이 루빈시테인(Николай Рубинштейн, 1835년 6월 2일 ~ 1881년 3월 23일) 형제가 주재한 음악교실에 입학했고, 그것이 1862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으로 승격되어 1기 학생이 됐다. 초반에는 안톤 루빈슈타인과 절친한 사이였지만 음악적 노선의 갈등으로 결국 안톤 루빈시테인과 불화를 일으킨다. 루빈시테인 형제는 서유럽의 음악을 중시하고 소위 러시아 국민악파라 불리는 "러시아 5인조"의 음악을 수준이 낮다고 절하했다. 그런데 차이콥스키가 이 "5인조"의 음악적 성향에 접근한 작품인 "폭풍우"라는 관현악곡을 작곡하자 루빈슈타인이 격노했으며, 이것이 불화의 요인이 되었다.

결국 차이콥스키는 안톤 루빈시테인의 동생인 니콜라이 루빈시테인이 설립한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가 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난다. 차이콥스키는 예전에 만난 적이 있었던 밀리 발라키레프의 소개로 국민악파인 "러시아 5인조"와 친분을 나누지만 차이콥스키의 음악적 성향이 리스트바그너의 영향을 받아 서유럽 쪽으로 기울면서, 자신과 코드가 맞지 않았던 국민악파와 결별하게 된다.

3.2. 중기[편집]

1874년에는 차이콥스키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피아노 협주곡 제1번 B♭단조"를 작곡했다. 당초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에게 연주를 의뢰했으나 니콜라이는 이 작품이 난해하고 연주 불가능한 곡이라며 거절했다. 결국 한스 폰 뷜로의 지휘로 보스턴에서 다른 피아니스트와의 협연으로 초연되었지만 당대의 평가는 니콜라이의 평가와 썩 다르지는 않았다.

이후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서 1878년까지 근무하며 작곡활동을 병행하다가 러시아 철도왕의 미망인 나데즈다 폰 메크 부인의 후원을 받게 되면서 교수직을 사임하고 작곡에만 전념하게 된다. 폰 메크 부인은 약 15년동안 차이콥스키를 후원해 주었지만 두 사람이 서로를 실제로 본 것은 오직 2~3번뿐이라고 한다.

이는 폰 메크 부인이 차이콥스키를 후원하기로 했을 때 서로 한 약속 때문이었다. 또한 차이콥스키는 폰 메크 부인과 약 15년간 1,200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 받으며 플라토닉한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 그러다가 1890년에 폰 메크 부인은 파산을 이유로 더 이상 차이콥스키를 후원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일설에 따르면 폰 메크 부인의 재정적 불안은 작은 이유 중 하나일 뿐이며, 실제로는 차이콥스키와의 관계를 중단하라는 폰 메크 부인의 가족들의 압박과 폰 메크 부인이 차이콥스키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게된 것이 후원을 중단한 결정적 이유였다고 한다. 폰 메크 부인의 일방적인 결별 선언에 차이콥스키는 극심한 괴로움에 휩싸이게 되었고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차이콥스키가 아무리 편지를 보내도 폰 메크 부인은 더이상 답장을 보내지 않았으니 사실상 둘의 관계는 끝난 것이다. 이 때문에 차이콥스키는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폰 메크 부인에 대해 강한 애증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임종 직전에도 폰 메크 부인의 이름을 부르며 '저주받을 여자'라고 외쳤다고 한다.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여성과의 연애나 결혼은 생각하지도 않았던 그는 9살이나 어리고 음악원 제자였던 안토니나 미류코바의 열성적인 구애에 시달리다가 미류로바가 결혼해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협박까지 한 탓에 결국 마음에 없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마음에도 없는 결혼인 탓에 결혼 생활은 행복할 리가 없었고, 차이콥스키가 석달을 못 버티고 도망쳐 버리면서 결혼생활은 파탄으로 끝났다.

말이 좋아서 파탄이 되었다지 그렇게 간단하게 끝난 것도 아니었다. 차이콥스키는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고 이혼할 것을 주장하면서도, 아내의 성관계 요구에는 부들부들 떨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미류코바는 결혼을 지속할 것을 원했기 때문에 법적으로 이혼하지는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아내가 자신의 동성애 사실을 폭로할 것이라고 두려워한 차이콥스키가 이혼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결국 이 복잡한 결혼관계는 차이콥스키가 숨지면서 끝났다. 이 결혼 사건은 그의 음악의 분위기까지 바꿀 정도로 중대한 사건이었다. 결국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게 된 그는 신경쇠약으로 이어진 후 유럽으로 도피성 요양여행을 떠났고, 이탈리아에 이르러서야 겨우 심신을 회복할 수 있었다. [5]

3.3. 말년[편집]

1878년에 귀국한 차이콥스키는 명작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했고 1888년에는 발레음악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완성했다. 이 때에 이르러 차이콥스키는 세계적인 음악가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1890년 그간 차이콥스키를 후원하던 폰 메크 부인이 갑자기 후원을 중단하면서 차이콥스키는 후원이 끊긴 후에도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었으나 폰 메크 부인과의 교류가 끊기게 되면서 큰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차이콥스키는 미국 여행후, 오페라 "욜란타"와 발레음악 "호두까기 인형"을 작곡했다.

그의 생애 마지막 해가 된 1893년,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작품 중 최후 걸작이 된 "교향곡 제6번 비창"을 작곡했다. 그리고 그 해 11월 6일, 의문의 죽음으로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공식적으로는 끓이지 않은 물을 들이켜서 콜레라로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무슨 그런 엉터리같은 소리를 하느냐는 비난이 적지 않았다. 당시 콜레라는 불치병이나 다름없었기에 만일 이걸로 사망했다면 진즉 격리되었을 테지만 그의 장례식에는 무려 6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모였으며 러시아 모스크바 정교회 주교를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이 장례식 미사까지 했고 음악 동료, 친구들, 지인들, 친척들도 죄다 참석했다.

그래서 지인들은 콜레라로 사망했다는 당국의 발표에 대해서 장례식에서 무척 기분 나빠 했고 "이래놓고도 콜레라라고 허풍을 치네요?"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더불어 장례식 끝나고 콜레라가 유행했다는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꽤 부유하게 살았으며, 활동 영역도 부유층, 귀족층이었다. 이들은 깨끗한 물을 마셨는데 당시 콜레라는 지저분한 물을 마시는 빈민층이 걸리는 병이었다.

그런 그가 콜레라로 사망했다니? 심지어 장례식에 모인 지인이나 친지 중 그의 유해에 키스를 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직접 접촉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는데 그들 중 아무도 콜레라에 걸린 사람은 없어서 지인들이나 당시 친척들도 어이없어했다. 러시아 5인조 중의 한 명이자 그의 절친한 지인이었던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역시 이 일에 대해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비꼬았다 한다.

일각에서는 차이콥스키가 당대의 실권자인 스텐본크 - 페르머 공작의 조카와 동성애 관계를 맺었고, 이것을 알아차린 공작에 의해서 자살을 강요당해서 사망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또한 다른 주장으로는 공작이 황제에게 차이콥스키를 고소했으며 정교회 국가인 러시아에서 동성애는 서훈 취소와 경력 삭제를 포함한 공민권 박탈과 시베리아 유형(4 ~ 5년)에 처해질 중죄였기 때문에[6] 이 고소장을 넘겨 받은 검찰 부총장이자 차이콥스키와 법률학교 동창인 니콜라이 야코비가 동창들과 소규모 비밀 명예 재판을 연 다음 독극물에 의한 음독 자살을 종용했다는 설인데, 증거도 여럿 있다.

동성애는 차이콥스키의 업적과 인지도 등을 감안한다 해도 중형을 선고 받을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의 명예를 크게 실추시킬 우려와 더불어 동성애자로서 죽는다면 장례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콜레라의 증거로 언급되는 쌀뜨물 같은 설사가 비소를 먹은 경우에도 나타나는 증상이기 때문이다.

이를 입증하고자 1979년소련 문화부에서 부검을 실시한 결과, 실제로 그의 몸에서 비소가 나왔다.

4. 능력과 평가[편집]

역대 가장 인기 있는 러시아 작곡가. 그의 음악은 항상 대중들에게 큰 매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이 심오한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그것의 선율적이고 마음을 열어 주는 멜로디, 인상적인 하모니, 그리고 다채롭고 그림 같은 오케스트레이션 덕분이다.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러시아 고전주의 음악을 완성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그의 음악에 대해서는 당대에 평가가 엇갈렸다. 서유럽에서는 그의 음악을 대중적이라고 평가절하했고, 러시아에서는 민족주의적인 경향과 거리가 있다고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의 음악은 듣는 이들이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깊은 울림을 가진 것으로 오늘날에 클래식 애호가들의 깊은 사랑을 받는 작곡가가 되었다. 물론 듣기에 쉽다는거지 바이올린 파트가 어렵기로 유명하다. 심지어 발레곡들에도 어려운 바이올린 솔로가 한두개씩 들어있는데 아직도 오케스트라 오디션에서 많이 연주된다.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아름다운 음율(멜로디)감은 후배 프로코피예프가 제일 부러워했다고 한다. 참고로 프로코피예프는 타악기적인 강철같은 피아니즘 그리고 20세기에 활동한 작곡가라 작품이 어렵고 난해하기만 할 것 같은데, 피아노곡의 난이도가 높은 것은 사실이나 동 시대 작곡가들 사이에서는 나름대로 가장 멜로디가 유려하고 듣기 편한 작곡가 중 한명이다.

피아노, 바이올린의 연주기법에 있어서 당대 음악가들을 능가하는 진보를 이뤘는데 이 때문에 그의 피아노, 바이올린 협주곡들은 난해하고 음악형식에 맞지 않는다는 평가를 당대에 받았다. 다양한 작품들을 남겼는데 "예브게니 오네긴" 같은 오페라, "백조의 호수" 같은 발레음악 등의 무대음악부터 6곡의 교향곡, 다양한 표제음악적 성격의 교향시와 관현악곡들, 피아노 음악과 실내악곡 등에서 여러 걸작들을 남겼다.

차이코프스키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은 단연 아름다운 멜로디에 있다. 세계 음악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3인인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을 제외하면 슈베르트, 쇼팽과 더불어 멜로디를 뽑아내는 능력 하나만큼은 본좌로 평가받는다. 물론 멜로디에만 치중한 나머지 다른 음악적 구조가 허술하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교향곡, 피아노, 실내악, 협주곡 전 장르를 아울어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선율들이 쉴새없이 흘러나오며 특히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사람의 머리속에서 어떻게 이런 천국같이 아름다운 멜로디가 나올 수 있는지 생각하게 만들 정도, 정작 본인은 고독감과 깊은 우울감으로 평생을 살았던 것을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한 부분. 한국에서 차이코프스키가 유독 인기 많은 작곡가인 점도 이런점이 적게나마 작용했다고 보면 된다. 대중들도 이름은 들어봤을 법한 비슷한 시대의 작곡가인 브람스의 경우는 의외로 낭만주의 낭만적 멜로디보다 음악의 견고한 짜임새와(특히 관현악곡) 오케스트레이션, 구조적 완성도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멜로디 자체의 대중성은 차이코프스키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다. 슈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음악에 별 관심없는 사람이 슈만의 이름은 다 알아도 슈만의 음악은 기껏 알아봐야 트로이메라이 정도 밖에 안 된다. 오히려 슈만, 브람스같이 독일 고전주의를 계승한 낭만주의 거장들보다 폴란드의 쇼팽, 보헤미아의 드보르작이 멜로디 뽑기에 있어서는 훨씬 더 대중적으로 다가오는 작곡가들이다.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차이콥스키는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 등과 함께 한국에서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전문가들의 견해는 차이콥스키의 음악에 보이는 정서와 한국인들의 정서가 맞아 떨어져서라는 분석을 하기도 하는데, 어쨌든 피아노 협주곡 1번이나 바이올린 협주곡, 교향곡 6번 비창이 한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클래식 음악의 상위권에 늘 오르는 것을 보면, 나름 설득력이 있는 평이다.

한편, 대중음악 분야에서는 마이클 잭슨이 가장 존경하는 작곡가로 차이콥스키를 뽑기도 했다. 그는 본인의 앨범을 발매하며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천 년 후에도 연주될 것이다. 나의 음악도 그렇기를 희망한다."며 그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냈다.

5. 차이콥스키의 주요 작품[편집]

▲ 발레곡 《호두까기 인형》(Nutcracker) 中 〈행진곡〉(March)

5.1. 교향곡[편집]

5.2. 관현악[편집]

  • 이탈리아 기상곡 A장조 Op.45
  • 슬라브 행진곡 Op.31
  • 교향적 발라드(교향시) 보예보다 Op.78
  • 폭풍 서곡 Op. posth. 76
  • 현을 위한 세레나데 C장조 Op.48[7]
  • 관현악 모음곡 1번 D단조 Op.43
  • 관현악 모음곡 2번 C장조 Op.53
  • 관현악 모음곡 3번 G장조 Op.55
  • 관현악 모음곡 4번 G장조 '모차르티아나' Op.61
  •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Op.32

5.3. 협주곡[편집]

5.4. 실내악[편집]

  • 현악 4중주 1번 D장조 Op.11 : 특히 2악장 '안단테 칸타빌레'가 유명.
  • 현악 4중주 2번 F장조 Op.22
  • 현악 4중주 3번 E플랫 단조 Op.30
  • 피아노 3중주 A단조 Op.50
  • 현악 6중주 D단조 '피렌체의 추억' Op.70
  • 소중했던 곳의 추억 Op.42 : 3번곡 '멜로디'가 유명.
  • 아다지오 몰토 E플랫 장조(현악4중주&하프)

5.5. 피아노[편집]

  • 사계 Op.37a : 6월 '뱃노래'와 11월 '3두마차'가 잘 알려짐
  • 하스팔의 추억 Op.2
  • 6개의 소품 Op.19
  • 피아노소나타 (1번) G장조 Op.37
  • 피아노소나타 2번 C샤프 단조 Op. posth. 80
  • 어린이들의 앨범 Op.39
  • 18개의 소품 Op.72
  • 둠카 Op.59

5.6. 발레[편집]

5.7. 오페라[편집]

5.8. 합창[편집]

  • 칸타타 모스크바
  • 밤샘 기도 Op.52
  • 성 요한 크리소스톰의 성찬식 Op. 41 [8]

5.9. 가곡[편집]

  • 6개의 로맨스 Op.6 : 괴테의 시를 붙인 마지막 곡 '오직 그리움 아는 이만이'로 유명.
  • 6개의 노래 Op.16
  • 6개의 노래 Op.25
  • 6개의 노래 Op.27
  • 6개의 노래 Op.28
  • 6개의 노래 Op.38
  • 7개의 노래 Op.47
  • 16개의 아이들의 노래 Op.54
  • 6개의 노래 Op.57
  • 12개의 노래 Op.60
  • 6개의 노래 Op.63
  • 6개의 노래 Op.73

6. 바깥 고리[편집]

[1] 차이콥스키가 살아있을 적의 러시아어 표기로는 Петръ (Ильичъ) Чайковскій.[2]우드무르티야 공화국 봇킨스크[3]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도 이 곳에 묻혀 있다.[4] 부칭인 일리치(Ильи́ч, Ilʹíč) 역시 외래어 표기법상으로는 '일리이치'로 적어야 함이 옳지만, 일린(Ильи́н, Ilʹín)과 더불어 국립국어원의 규정용례상에는 잘못된 표기로 굳어져 있다.[5] 이 때 작곡한 곡이 현악 6중주 op.70 '피렌체의 추억'인데, 매우 격정적이고 우울한 곡이다. 제목을 보면 피렌체를 가서 본 아름다운 것을 떠올리고 작곡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반대로 복잡한 결혼을 뒤로 하고 이탈리아에 도피성 여행을 간 차이콥스키의 심란하고 복잡한 마음이 표현된 곡이다.[6] 출처 : https://www.calvertjournal.com/features/show/9567/being-lgbtq-secret-histories-lgbtq-life-in-pre-revolutionary-russia, 영문위키, 러문위키 러시아의 LGBT 항목.[7] 이 곡은 공포 게임 디 이블 위딘 2의 악당인 스테파노 발렌티니의 테마곡에도 일부 삽입되었다.[8] 위의 동영상이 이곡의 제 6곡 'Hymn of the Cherubi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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