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제2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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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제국
Empire Français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pn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56px-Coat_of_Arms_Second_French_Empire_%281852%E2%80%931870%29.svg.png
국기[1]
국장
1852년 ~ 1870년
국가
위치
오늘날의 프랑스알제리
전세계 일부 식민지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 입헌군주제
국가원수
주요사건
(1851년 쿠데타)
1852년 건국
1866년 병인양요
1870년
보불전쟁 발발 및 패배→멸망
통화
성립 이전
멸망 이후

1. 개요2. 역사3. 정치4. 성과


1. 개요[편집]

나폴레옹 3세가 1852년 건국한 제국이다. 1870년에 보불전쟁으로 붕괴했다. 역사상 프랑스의 마지막 제정(군주정)이다. 프랑스 제2제국이 무너지고 현재까지 프랑스는 공화국이다.

2. 역사[편집]

1848년 2월, 2월 혁명으로 새로 정착한 임시정부는 1848년 12월부터 첫 대통령을 뽑는다.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안정과 가족, 가톨릭교의 보호 등을 내세우며 이 선거에서 74,2%라는 압도적인 우위로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초기에는 공화정에 여러번 충성을 맹세하는 등 공화정에 호의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1851년 자신만의 정치를 도입하고자 친위쿠데타로 프랑스 제2공화국을 붕괴시키고[2] 황제로 즉위한 뒤 경제적인 번영을 목표로 내세운 독재 정치를 펼쳤다.

정치에 있어서는 철권 통치로 일관하였지만, 경제적 번영과 더불어 프랑스의 국제적 지위 향상을 약속하면서 대중들의 불만을 잠재우고자 했던 것. 이에 발맞춰서 식민지 정책에 소극적이었던 기존 정부와 달리 나폴레옹 3세는 적극적으로 해외 식민지를 개척해나간다. 여기에 전부터 경제적으로 주도적인 세력이 추진하던 각종 토목공사를 일으켜서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한편으로 파리를 재개발하는 작업에도 착수했다. 이것 자체는 보이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겠지만 전반적인 경제 상황에서 그런 기조를 드러내는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이것이 절정에 이른 것이 바로 1855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 박람회.

하지만 멕시코에 친프랑스적인 정부를 내세우려다 막시밀리아노 1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부터 7주 전쟁 당시 어설프게 간을 보다가 프로이센의 부상을 방관하는 것과 같이 어설프기 짝이 없는 외교정책도 연달아 실패로 끝나면서 황제에 대한 지지는 날이 갈수록 무섭게 떨어진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 외교정책이 제국과 황제 자신의 파멸을 불러온다. 1870년 스페인의 보르본 왕조가 축출되자 스페인은 호엔촐레른 가문에게 왕위자리를 제의한다. 이에 발끈한 나폴레옹 3세는 빌헬름 1세에게 항의했고 이것이 노련한 비스마르크의 손을 거치면서 엠스 전보 사건으로 조작되고 양국 사이의 전면전이 발발한 것. 기존에 나폴레옹 본인이 하도 온 유럽에서 무슨 일만 터졌다 하면 나댔던 탓(...)에 모든 유럽이 프로이센을 지지하거나 프로이센에게 우호적인 중립을 유지했다.[3] 프랑스는 시종일관 프로이센에게 쳐발리다가끌려다녔고 나폴레옹 3세 본인은 프랑스 군이 참패한 스당 전투에서 포로로 잡히는 굴욕을 당한다. 황제가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에 파리 시민들은 분노해서 혁명을 일으켰다. 이렇게 제2제정은 무너지고 프랑스 제3공화국이 수립된다.

3. 정치[편집]

전기에는 전제군주제, 후기에는 입헌군주제라고 정리할 수 있다.

보통선거를 존속시킴으로써 최소한의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제2제정의 초기 정치체제는 실질적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매우 멀었다. 행정권과 사법권은 황제의 손안에 놓여있었으며, 헌법상 독립된 입법권 역시 정부라 쓰고 황제라 읽는다가 추천한 사람들만이 의원 선거에 나설수 있었으므로 사실상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집회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같은 것들이 있을 리가 없었다. 언론에게 검열 및 폐간과 같은 탄압은 기본이였고, 빅토르 위고와 같은 체제 반대파들은 추방 및 투옥된다.

1850년대까지는 이러한 철권통치가 지속되었지만, 1860년대 이후 외교 정책에서의 실책으로 황제의 권위가 손상되자 나폴레옹 역시 의회와 대중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고, 조금씩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언론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되기 시작했고, 의회도 입법부로서의 독립성을 되찾기 시작해 제2제정 말기에는 황제보다도 더 실권을 많이 쥐고 있었다. 또한 노동운동도 제정 후반기에 들어가면 활발해지기 시작해서 1864년 전국적인 파업이 일어났고, 정부가 이에 굴복해 노동조합의 결성 및 파업을 실시할 권리를 인정해준다. 한편 이 시기 영국에서 인터내셔널이 설립되면서 프랑스에도 공산주의 운동이 거세졌고, 이는 파리 코뮌으로 연결된다.

4. 성과[편집]

나폴레옹 3세의 성격상 쓸데없이 좌충우돌하면서 국력을 낭비한 모습이 크기는 하지만 몇 가지 중요한 업적들도 존재한다.
  • 오스만 남작오스만 제국과는 상관없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파리 개조 사업을 통해 파리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근대적이면서도 도회적이고 세련된 도시로 재탄생하게 된다. 오늘날 파리의 개선문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13개의 도로에 따라 파리의 행정 구역이 보기 좋게 나누어지는데, 이것이 나폴레옹 3세와 오스만 남작의 계획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관뿐만 아니라 도로폭이 좁아서 한 번 바리케이드가 설치되면 난공불락이었던 대중들의 시위를 막으려는 이유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돈없는 세입자들이 쫓겨나서 빈민촌을 파리 외곽에 형성한 게 사회문제로 부상하기도 했다.
  • 극빈층 노동자를 지원하기 위한 복지 정책을 펼쳤다. 가령 위생시설을 갖춘 노동자 주택 건설과 같이 사회 복지 정책의 시초를 보여주었다.
  • 베트남을 식민지화하고 이탈리아 왕국으로부터 이탈리아 통일 전쟁을 도운 대가로 니스사보이 영토를 획득했다. 그러나 보불전쟁으로 인해 프로이센에 알자스-로렌을 뜯긴 임팩트가 너무 큰 덕에 아무도 이걸 기억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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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Imperial_Standard_of_Napol%C3%A9on_III.svg.png 황제기도 쓰였다[2] 제2공화국의 대통령은 단임제였기에 나폴레옹은 대통령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아예 판을 뒤집어버린 것이다.[3] 나폴레옹은 바이에른 왕국오스트리아 제국이 자기편을 들어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민족주의에 편승한 바이에른이 프로이센 편을 들었으며, 7주 전쟁에서의 관대한 프로이센의 전후처리에 감동받은 오스트리아도 중립으로 남아주면서 산통이 다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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