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클린 D. 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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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
Franklin Delano Roosevelt
출생
미국 뉴욕 주 하이드파크
사망
1945년 4월 12일 (향년 63세)
미국 조지아 주 웜 스프링스
재임기간
제44대 뉴욕 주지사
제32대 대통령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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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제임스 루스벨트(1828 ~ 1900)
어머니 사라 앤 댈러노(1854 ~ 1941)
형제자매
배우자
엘리너 루스벨트 (1884 ~ 1962, 1905년 결혼)
자녀
장녀 :안나 루스벨트 할스테드(1906 ~ 1975) : 2남 1녀
장남 :제임스 루스벨트(1907 ~ 1991) : 4남 4녀
차남 :앨리엇 루스벨트(1910 ~ 1990) : 4남 1녀
3남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 주니어(1914 ~ 1988) : 3남 2녀
4남 :존 애스핀월 루스벨트(1916 ~ 1981) : 1남 3녀
학력
그로튼 스쿨 (졸업)
하버드 대학교 (사학 / B.A.)
컬럼비아 법학대학원 (사후 J.D)[1]
종교
신장
188cm
정당
주요 경력
뉴욕 주 상원의원
해군 차관[2]
제29대 미국 부통령 민주당 대선 후보
제44대 뉴욕 주지사
제32대 미국 대통령
백악관 공식 초상화

1. 개요2. 생애
2.1. 성장과 젊은 시절2.2. 장애와 시련 그리고 재기2.3. 전시 대통령과 4선2.4. 승리를 눈앞에 두고…
3. 평가4. 선거 이력5. 기타
5.1. 가족 관계5.2. 애완견 팔라(Fala)5.3. 우표 덕질5.4. 그 외
6. 관련 어록7. 현대 매체에서

제32대 미국 대통령 취임 선서[3]

1. 개요[편집]

미국의 제32대 대통령.

미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하게 대통령 임기를 4선 이상 지내며, 동시대 나치 독일 총통을 지내던 아돌프 히틀러보다도 더 오래 집권한 인물이다.[4]

본명은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5]이며, 줄여서 FDR이라고도 한다. 20세기를 이끈 정치 거물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인물이자, 대공황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두 차례의 국난을 안정적으로 극복하여 미국을 지금의 세계 최강대국으로 성장시키는 데 많은 기여를 한 대통령이다.

2. 생애[편집]

2.1. 성장과 젊은 시절[편집]

파일:RvKf4Sp.gif
1882년 1월 30일, 뉴욕 주 하이드파크에서 태어났다. FDR의 아버지는 지역 사회의 나름 유복한 지주이자 델러웨어 앤 허드슨 철도의 부사장이었고, 매우 유복하게 자랐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FDR은 학교를 다니지 않고 가정교육여행으로 견문을 쌓다가 14살 때 기숙학교에 입학했다. 그후 하버드에 입학하여 3년간 사학을 전공했고 컬럼비아 대학교 로스쿨에서 법률을 공부한 후 뉴욕주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뉴욕의 법률회사에 취직했다. 학창 시절은 큰 재미없이 보낸 듯 하다. 어려서부터 귀공자처럼 혼자 자라서 그런지 친구는 별로 없었다고. 다만 본인은 공부만 파는 체질은 아니었고 운동과 밖에 돌아다니는 옥외활동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1905년 3월 17일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조카이자 자기에겐 먼 친척뻘(13촌)인 엘리너 루스벨트와 결혼하였다.
그러다 1910년 공화당 최강세 지역인 더치스 카운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뉴욕주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한 후, 1913~1918년까진 제1차 세계대전도 겪으며 제프 대니얼스 해군 장관 아래에서 해군부 차관보를 역임한다. 이 때의 인연으로 그는 대통령 임기 내내 미합중국 해군에 굉장히 호의적이었다.

이때부터 루스벨트는 대니얼스 전 장관을 '보스'로 모셨는데, 이때 대니얼스는 루스벨트가 자기를 깐 적도 있지만 대인배스럽게 계속 그를 후원해주었다고 한다. 이래선지 혹자는 대니얼스를 둔 루스벨트가 천운의 소유자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이후 대통령이 된 루스벨트는 2차 세계대전 직전에 대니얼스를 멕시코 대사로 보내기도 한다. 또 이때 루스벨트는 '루이 하우'라는 비서 겸 동료를 얻게 되는데, 이 사람은 이후 루스벨트의 킹메이커로 많은 정치적 조언을 해주게 된다. 해군차관보 시절 해군에서 일하는 일반 노동자들과 루스벨트가 친분을 맺게 해 이들을 루스벨트의 지지그룹으로 만든 것도 루이 하우의 작품이라는 말이 있다. 출처.

2.2. 장애와 시련 그리고 재기[편집]

1920년 오하이오 주지사 제임스 콕스와 러닝메이트로 민주당 부통령 후보에 지명되지만 당시 윌슨 대통령의 국제연맹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이를 강력히 지지하는 정강을 채택하여 유권자들의 지지를 잃어 워런 G. 하딩의 공화당에 참패하여 낙선한다.

더구나 1921년 8월, 캐나다 캄포벨로의 별장에서 쉬다가 찬물에 빠져 소아마비진단을 받았으며, [6] 이 질환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통증에 시달린다. 이후 몇 년간 뼈를 깎는 재활훈련 끝에[7] 완벽하진 않아도 부축없이 겨우 걸을 정도가 되자 사람들은 그의 의지에 찬사를 보냈고 이에 힘입어 다시 정계로 복귀했다.

어느 정도 병세가 회복되자 1924년 뉴욕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가했는데 이 때 버팀목에 의지하여 연단까지 스스로 올라가 군중들을 감동시켰고 뉴욕 주지사 앨프리드 스미스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연설을 했다. 여기서 얻은 별명이 '뉴욕 주지사의 행복한 전사'였다.[8] 그 후 1928년 정계에 완전히 복귀하여 민주당의 뉴욕 주지사 후보가 되어 당선되었고 1930년에 큰 표 차이로 재선되었다. 이 때부터 혁신 정책을 실행했는데, 대공황 시대를 맞아 주(州) 차원의 구호 프로그램인 산업보험, 자연보호 관련 일자리 창출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화로에 앉아 라디오로 연설을 한 이른바 노변담화(Fireside chat)를 실시한 것도 바로 이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나 많은 도움이 필요했다. 일반 대중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병세는 훨씬 심각했지만 의도적으로 숨긴 감이 많았다. 훗날 대통령이 되어서도 하반신 치료를 계속 지속했으며 비공식 석상에서는 여전히 휠체어를 타고 움직여야 했다.

파일:external/thepresidentialpool.files.wordpress.com/fdr-chair.jpg

뉴욕 하이드파크 자택에서 애견 팔라, 저택 관리자의 손녀와 함께. 참고로 이 사진에서는 다리가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반신이 찍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위 사진은 루스벨트가 휠체어를 타고 찍은 몇 안 되는 사진 중 하나다.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기자들이 대통령이 휠체어 탄 모습을 보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자동차나 열차에서 내리거나 걸으면서 힘겨워하는 모습을 찍지 말아달라는 일종의 보도지침 역시 기자들이 자발적으로 지켜주었다. 백악관 출입기자로 처음 발령받은 신참 기자가 대통령이 휠체어 탄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서 사진을 찍으려하자 동료기자들이 밀쳐서 카메라를 떨어뜨린 일화도 있다고 한다. 그의 장애는 잘(?) 숨겨졌는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맞아주었다고 기억한 방문객이나 지인이 많았고[9], 그가 죽고 나서야 대통령이 장애가 있었다는 사실을 안 국민들도 많았을 정도였다.[10]

2.3. 전시 대통령과 4선[편집]

파일:external/www.achievement.org/tel0-056.jpg

1932년 1월 대통령직에 도전하겠다고 발표했고 민주당의 지명을 받아 민주당 후보가 되었다. 그 결과 당시 대공황의 원흉으로 지탄받던 현직 대통령 허버트 후버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루스벨트가 당선될 당시인 1933년 3월의 시사 잡지 뉴요커 표지. 왼쪽이 허버트 후버이며, 오른쪽이 루스벨트이다.

1933년 2월 즈음 취임을 앞두고 마이애미에서 암살 위기를 겪기도 했다. 범인은 시카고 마피아의 사주를 받은 주세페 잔가라(Giuseppe Zangara). 다만 잔가라의 총알은 FDR에게서 빗겨가 그 옆에 있던 시카고 시장 앤턴 서맥의 가슴에 맞았고 결국 시장은 병원에서 사망했다. 참고로 이 암살사건에 대한 설이 몇 개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 사건의 목표가 애초에 루스벨트가 아닌 서맥이라는 것이다. 서맥 시장의 전횡(?)에 화가 난 시카고 마피아들이 잔가라를 미끼로 하여 루스벨트를 암살할 것처럼 액션을 취하면서, 실제로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서맥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당시 잔가라의 총과 서맥이 맞은 총탄 구경이 각각 다르다는 것이 내세워지기도 한다. 물론 지금에 와선 믿거나말거나 수준이라 어느 설을 신뢰할진 알아서 판단하자. 대체역사 소재

여하간, 한 달 뒤 그가 1933년 3월 4일 대통령에 취임할 때 했던 말은 엄청난 유명세를 탔다.
"So, first of all, let me assert my firm belief that the only thing we have to fear is...fear itself."(후략)
"우선, 제 확고한 신념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다."(후략)
노동자의 선택, 루스벨트.
-1936년 대선 포스터.#

대통령이 된 후 루스벨트는 당시 대공황에 빠져있던 미국경제를 살리기 위해 취임하자마자 일단 은행의 파산을 막기 위해 은행을 휴업시켰고, 공공사업 확대와 실업자 구제, 복지 확충과 금융 개혁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뉴딜(New Deal) 정책을 수립하기에 이른다.[11] 예를 들어 테네시 계곡 개발공사(TVA)로 대표되는 대대적인 공사 사업으로 일자리를 실업자들에게 제공하고, 당시 방임적인 기업정책을 수정하여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한 법인 와그너법의 제정과 오늘날 미국의 사회복지 체계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는 사회복지법 제정 등이 이때 이뤄졌다. 당시로써는 최대 규모이자 과감했던 이런 정책들의 시행으로 그의 집권기간 실업률은 줄고 국민소득은 올라가는 등 경제 상황이 빠르게 호전된다. 그리고 이런 공적에 힘입어 그는 1936년 대선에서 상대편 공화당 후보인 알프 랜든(Alf Landon)을 압승하며 재선에 성공한다.

이때 한 매디슨 스퀘어 가든 연설이 폭풍 간지다.


For twelve years, our nation was afflicted with hear-nothing, see-nothing, do-nothing Government. The Nation looked to Government but the Government looked away.
12년 동안 우리 국민은 듣지 않고, 보지 않고, 일하지 않는 정부로 인해 고통받았습니다. 국민은 정부를 바라보았지만 정부는 국민을 외면했습니다.

Nine mocking years with the golden calf and three long years of the scourge! Nine crazy years at the ticker and three long years in the breadlines! Nine mad years of mirage and three long years of despair!
9년의 금송아지 환락[12]과 3년의 기나긴 천벌! 9년의 주식 광란과 3년의 기나긴 배급줄! 9년의 신기루 환상과 3년의 기나긴 절망!

Powerful influences strive today to restore that kind of government with its doctrine that that Government is best which is most indifferent.
오늘날 강력한 세력가들은 무관심한 정부가 최선의 정부라는 자신들의 교리를 앞세워 그러한 정부를 회복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For nearly four years you have had an Administration which instead of twirling its thumbs has rolled up its sleeves. We will keep our sleeves rolled up.
지난 4년간 여러분은 손가락을 휘두르는 대신 소매를 걷어붙이는 정부와 함께 하였습니다. 우리는 계속 소매를 걷어붙이겠습니다.

We had to struggle with the old enemies of peace—business and financial monopoly, speculation, reckless banking, class antagonism, sectionalism, war profiteering.
우리는 평화의 오랜 적들과 투쟁해야 했습니다 - 산업과 금융독점, 투기, 무절제한 은행업, 계급간 대립, 파벌주의, 전쟁으로 부당 이득을 챙기는 이들.

They had begun to consider the Government of the United States as a mere appendage to their own affairs. We know now that Government by organized money is just as dangerous as Government by organized mob.
그들은 미국 정부를 자신들의 사업을 돕는 조력자 정도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조직적 자금에 의한 정부는 조직적 폭력배에 의한 정부만큼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Never before in all our history have these forces been so united against one candidate as they stand today. They are unanimous in their hate for me and I welcome their hatred.
우리들의 역사상 한 번도 이 세력들이 한 명의 후보에게 이토록 대항해 힘을 모은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만장일치로 저를 증오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의 증오를 환영합니다.
ㅡ 1936년 10월 31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 연설. 편집 영상.

한편, 이 1936년 대통령 선거는 선거 여론조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유명한 선례가 되기도 했다. 당시 잡지사인 리터러리 다이제스트(The Literary Digest)는 대규모 전화 여론조사 및 독자들에 대한 우편 설문을 통해서 랜든이 선거에서 이길 것[13]이라고 발표했는데 결과는 정반대로 루즈벨트의 압승. 그것도 미국 대통령 선거 역사상 2번째로 높은 전국 득표율인 60.8%(1위는 1964년 린든 존슨의 61.1%)를 기록하며 개망신을 당한 것이다. 상하원 선거도 상원 76석, 하원 총 435석 중 334석을 쓸어담는 그야말로 압승.[14]

사실 리터러리 다이제스트는 이전에 여러 번 선거 예측에 성공한 선례가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처참할 정도의 오판을 한 이유는 리터더리 다이제스트의 조사 방법 때문이었다. 뭔 소린가 하면 위에서 언급한 전화 및 우편 설문은 그 표본의 대표성이 크게 떨어졌다. 당시 리터러리 다이제스트의 독자는 잡지를 사서 읽을 정도가 되는 중산층 이상 계층이 주를 차지했고, 당시에는 꽤 고가품이었던 전화기를 집에 설치할 정도의 계층 역시 중산층 이상이 다수였다. 때문에 표본은 편파성을 띄게 되었고, 결국 잘못된 결과를 도출한 것. 그리고 이 실패로 인해 다이제스트는 신뢰성에 큰 타격을 입고 2년 후인 1938년 폐간하고 만다. 반면 조지 갤럽이란 언론인은 무작위 표본 추출을 통한 조사를 통해서 루스벨트의 승리를 예측했고 이것이 맞아 떨어지면서 유명세를 타는데,[15] 이 성공으로 갤럽은 독자적인 여론 조사기관을 만들었고 이게 바로 현대의 그 갤럽이다.[16]

그렇게 루스벨트는 집권 2기에 들어섰으나, 1937~1938년엔 뉴딜정책의 효력이 떨어졌는지 다시 불경기가 찾아왔고, 외교적으론 파시즘의 도래로 전운이 감돌던 유럽 지역에 적극 개입할 것인지 여부를 두고 고심하게 되었다. 당시의 불경기에 대해선 경제 주기상 자연스레 찾아오는 일시적 패턴이란 설도 있고, 현대에 와선 고전학파들의 분석과 달리 3년간의 호황이 지속되자 재정지출을 잠시 줄였더니 오히려 일어난 참사였다는 분석도 나온다.[17] 그래도 1939년 다시 불황을 극복하고 루즈벨트는 주당 44시간 노동을 확립한 공정노동표준법을 제정했는데, 이 법은 시급 25센트 이상의 최저임금을 보장하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1940년, 루스벨트는 조지 워싱턴 이래로 (명문화되진 않았지만) 지켜져오던 3선 금지의 룰을 깨고 대통령 선거에 3번째로 출마한다. 물론 이런 그의 행동은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에서도 반발이 있었고, 실제로 민주당 내에서 그의 3선을 반대하는 포스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허나 전쟁의 여파가 미국에도 서서히 드리워지는 상황 속에서 미국인들은 그를 다시 지지했고 지난 선거보단 낮았지만 여전히 넉넉한 표차로 공화당 후보인 웬델 윌키(Wendell Willkie)를 누르고 3선에 성공한다. 실제로 미국은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진 후 1941년 공식 참전 선언을 할 때까지 개전 후 약 2년 정도 중립을 유지했는데 1940년이 딱 그 사이였던 것.

그의 3기 임기가 시작되던 무렵인 1940년경에는 미국의 1차대전 참전이 '잘못'이었다는 여론이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미국인들도 미국이 전쟁에 참전할 것을 지각하고 있었다는 정황이기도 하다.[18] 또한 루스벨트 본인도 세 번째 취임 때 4가지 자유라는 연설에서 부분적으로 전쟁을 예고하기도 했다. 여기서 밝힌 4가지 자유란 '표현과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인데, 여기서 말하는 '공포'란 다름아닌 전쟁을 의미. 물론 방법적으론 세계적 규모의 군축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여튼 서서히 미국도 전쟁에 참전할 준비를 하게 된다.[19]

결국 1941년 일본제국진주만 공습 이후 루스벨트는 일본제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을 선언한다. 이른바 태평양 전쟁의 시작이었다.


1941년 12월 8일 루스벨트 대통령 대일 선전포고 연설 영상. 앞 부분을 따서 '치욕의 날 연설(Day of Infamy Speech)'이라고 불린다. (40초부터)
Yesterday, December 7, 1941 - a date which will live in infamy -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was suddenly and deliberately attacked by naval and air forces of the Empire of Japan.
앞으로 치욕의 날로 기억될 1941년 12월 7일인 어제, 미합중국은 일본 해군과 항공대로부터 고의적이고 기습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The United States was at peace with that nation, and, at the solicitation of Japan, was still in conversation with its government and its Emperor looking toward the maintenance of peace in the Pacific.
미국은 일본 제국과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일본의 요청으로, 그들의 정부황제를 상대로 함께 태평양에서의 평화유지를 목표로 하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Indeed, one hour after Japanese air squadrons had commenced bombing in the American island of Oahu, the Japanese Ambassador to the United States and his colleague delivered to our Secretary of State a formal reply to a recent American message. And, while this reply stated that it seemed useless to continue the existing diplomatic negotiations, it contained no threat or hint of war or of armed attack.
사실, 일본 비행 편대들이 미국 오아후 섬에 폭격을 개시한 지 한 시간 후, 주미 일본 대사와 그의 동료는 우리의 국무 장관에게 미국 정부의 최근 서한에 대한 공식답변을 제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답변서는 외교 협상을 지속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었지만, 군사적 공격 혹은 전쟁과 관련된 협박이나 암시는 포함하고 있지 않았습니다.[20]
It will be recorded that the distance of Hawaii from Japan makes it obvious that the attack was deliberately planned many days or even weeks ago. During the intervening time the Japanese Government has deliberately sought to deceive the United States by false statements and expressions of hope for continued peace.
하와이에서 일본까지의 거리를 고려한다면 공격은 수일 혹은 심지어 수주 전부터 고의적으로 계획되었음이 명백합니다. 그 준비 기간 동안 일본 정부는 평화유지를 희망하는 표현과 진술로 고의적으로 미국 정부를 기만하였습니다.

The attack yesterday on the Hawaiian Islands has caused severe damage to American naval and military forces. I regret to tell you that very many American lives have been lost. In addition, American ships have been reported torpedoed on the high seas between San Francisco and Honolulu.
하와이 제도에 대한 어제의 공격은 미국 해군과 군사력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매우 많은 미국 국민들이 희생되었음을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덧붙여, 샌프란시스코호놀룰루 사이의 공해상에서 미국 군함들이 어뢰 공격을 받았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Yesterday the Japanese Government also launched an attack against Malaya.
어제 일본 정부는 또한 말레이반도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Last night Japanese forces attacked Hong Kong.
어제 밤 일본군홍콩을 공격하였습니다.

Last night Japanese forces attacked Guam.
어제 밤 일본군을 공격하였습니다.

Last night Japanese forces attacked the Philippine Islands.
어제 밤 일본군필리핀 군도를 공격하였습니다.

Last night the Japanese attacked Wake Island.
어제 밤 일본군웨이크 섬을 공격하였습니다.

And this morning the Japanese attacked Midway Island.
그리고 오늘 아침 일본군미드웨이 군도(群島)를 공격하였습니다.[21]

Japan has therefore undertaken a surprise offensive extending throughout the Pacific area. The facts of yesterday and today speak for themselves.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 have already formed their opinions and well understand the implications to the very life and safety of our nation. As Commander-in-Chief of the Army and Navy I have directed that all measures be taken for our defense, that always will our whole nation remember the character of the onslaught against us.
그러므로 일본은 태평양 전역에 걸쳐 기습 공격을 감행한 것입니다. 어제와 오늘 벌어진 일들이 이를 스스로 증명합니다. 미국 국민들은 이미 뜻을 굳혔고 우리나라의 생명과 안전에 초래된 결과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22] 미국 육군과 해군의 통수권자로서 본인은 국가 방위를 위한 모든 조치를 지시하였으며, 이 조치는 모든 국민이 우리에게 가해진 침략의 성격을 기억하도록 할 것입니다. (박수갈채)

No matter how long it may take us to overcome this premeditated invasion, the American people, in their righteous might, will win through to absolute victory.
우리가 이 계획적 침공을 격퇴하는 데에 얼마의 시간이 걸리든, 미국 국민들은 정의로운 힘을 모아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박수갈채)

I believe that I interpret the will of the Congress and of the people when I assert that we will not only defend ourselves to the uttermost but will make it very certain that this form of treachery shall never again endanger us.
최선을 다해 우리 자신의 방위를 위해 노력해야 할 뿐 아니라 이러한 식의 배신 행위가 앞으로 다시는 우리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는 나의 주장은 의회와 국민 모두의 뜻을 반영한 것이라고 믿는 바입니다. (박수갈채)

Hostilities exist. There is no blinking at the fact that our people, our territory and our interests are in grave danger.
이제 침략의 위협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우리 국민, 우리 영토, 우리의 이익이 심각한 위험 사태에 처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With confidence in our armed forces, with the unbounding determination of our people, we will gain the inevitable triumph. So help us God.
우리 군대에 대한 신뢰와 우리 국민의 결연한 의지로써, 우리는 기필코 승리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신의 가호를 빕니다. (박수갈채)

I ask that the Congress declare that since the unprovoked and dastardly attack by Japan on Sunday, December 7, 1941, a state of war has existed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the Japanese Empire.
본인은 1941년 12월 7일 일요일에 일본의 일방적이고 신의 없는 공격이 개시된 시점에서, 미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전쟁 상태가 시작되었음을 의회에서 선언해 줄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23] (박수갈채)

직후 미국나치 독일이탈리아 왕국의 선전포고도 받으며 동시에 2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치르게 된다.[24]

이렇게 전쟁을 지도하던 와중에 1944년에 공화당에서는 토마스 E. 듀이[25]가 대권에 도전하나 여기서도 또 승리하여 마침내 대통령에 4번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듀이는 루스벨트에게 있어서 제일 위협적인 상대였던 것도 사실. 훗날 해리 S. 트루먼에게 역전패를 당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때 FDR 4선 저지를 위해 반대진영에서 내놓았던 논리 중 하나가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알고 있었음에도 전쟁에 개입하기 위해서 일부러 모른 척 했다."라는 음모론이었다. 그러나 당시 분위기상 그런 것이 먹힐 리가 없었고 결국 4선 저지는 실패.

다만 3선과 달리 4선은 당시 내부적으로도 논란이 많았다. 3선은 미국 내에 루스벨트만한 대안이 없는 상황인데다 외부 분위기도 별로 좋지 않아서 일단 대통령으로 뽑고 나중에 생각해 보자는 인식이 강했으나, 4선 당시에는 이야기가 달라서 이미 일본도 독일도 망해가는 상황이라 전쟁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고, 어차피 전쟁은 공화당이 재집권해도 계속 수행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굳이 루스벨트가 4번이나 대통령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 루스벨트는 이미 건강 상태가 매우 안 좋은 상황이었는데[26] 자칫 사망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후계자가 없다면 나라가 흔들릴 수도 있었다. 물론 트루먼이라는 유능한 후계자의 등장으로 큰 문제 없이 넘어가긴 했지만 말이다. 결국 이 문제는 루스벨트 사후에도 논란이 되면서 1951년 수정헌법 개정에 따라 미국 대통령의 3선 이상 연임을 무조건 금지하게 된다.

1945년 2월이 되어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영국윈스턴 처칠, 소련이오시프 스탈린과 전후처리를 논의하기 위해 얄타 회담을 가지기도 했고, 국제연합의 창설모임을 4월 25일 가지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의회에 제출한다.

2.4. 승리를 눈앞에 두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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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타에 모인 20세기를 풍미한 세 정객들. 윈스턴 처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이오시프 스탈린.

1945년 3월 말, 루스벨트는 휴식을 위해 웜스프링스의 별장에 있었다. 그리고 4월 12일 여기서 애견 팔라와 산책을 하고 벽난로 앞에서 자신의 안락의자에 앉아 비서와 농담을 하면서 테이블의 여러 서류들을 검토하고 있었다. 이 모습을 옆에서 한 화가가 그리고 있었는데, 오후 1시 15분 뇌출혈로 루즈벨트는 갑자기 "뒷머리가 너무 아프군"이란 말을 남기고 의자에서 굴러떨어져 쓰러졌다.[27]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1945년 4월 12일 오후 3시 35분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이미 얄타 회담 당시 루스벨트를 찍은 영상들을 보면 이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은걸 알 수 있다. 얼굴은 수척한데다 악수도 몹시 힘들어하던 상태였다. 사망 하루 전 찍힌 마지막 사진인데, 상태가 매우 안 좋아보임이 한 눈에 보인다.

한편, 루스벨트의 사망에 아돌프 히틀러는 잠시 동안 들떠서, 멸망 직전 러시아 옐리자베타 여제의 사망으로 기사회생한 프리드리히 2세전례를 재현하길 꿈꾸지만… 현실은 시궁창.[28] 후임은 당시 부통령이었던 해리 S. 트루먼이 맡았다. 이 때 트루먼은 영부인 엘리너의 전화를 통해 대통령의 부고를 접했는데 엘리너가 "트루먼씨, 대통령께서 돌아가셨어요."라고 말하자 한참을 침묵하던 트루먼은 "제가 부인을 위해 무엇을 해 드려야 할까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앨리너는 "아니요. 제가 당신을 위해 뭘 해드려야 할까요? 앞으로 골치 아프실 일이 많으실 테니까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만큼 루스벨트가 남겨 놓은 과제가 많았다는 소리다. 그래서 트루먼은 대통령 취임 직전에 "달, 별, 그리고 모든 유성이 나에게 떨어지는 기분이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의 부고를 접한 윈스턴 처칠 총리는 눈물을 흘리며 당시 미국의 라디오 특파원으로 있던 에드워드 머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언젠가 이 세상과 역사는 당신네 대통령에게 큰 신세를 졌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

3. 평가[편집]

FDR은 장애를 극복하고 대통령이 되어 수렁에 빠진 미국 경제를 살려내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위대했던 미국 대통령들 중 한 명으로 손꼽히며 지금도 많은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미국은 FDR의 집권기를 거치며 명실상부한 세계 제1의 초강대국이 되는데, 사실 미국의 국력은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기존 세계 제1의 세력이었던 대영제국을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과도 견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으나, 국제 인지도나 외교, 금융 등의 몇몇 분야에선 여전히 서유럽의 영향력이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대공황제2차 세계 대전을 기점으로 미국은 모든 분야에서 서유럽을 앞지르게 되었고[29], 종전 후에는 명실상부한 세계 제1의 초강대국으로 군림하게 된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 교과서에도 자주 나오는, 상기된 얄타 회담 당시 정중앙에 앉은 루스벨트의 모습이다. 우 처칠 좌 스탈린을 이끄는 세계 외교 무대의 수장 루스벨트 사실 미국인뿐만 아니라 유럽인, 더 나아가 인류 입장에서도 그나마 다행인 것이, 만약 루스벨트의 경제 회복이 없었다면 미국은 고립주의 노선으로 전쟁에 참전하지 않거나 참전이 늦어졌을지도 모르고, 그랬다면 당시 나치일제에 의한 연합군의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을 것이다.[30] 이후 유엔 창설 등을 준비하며 전후 국제 질서의 틀을 구축하는 데도 노력했다.

한편, 루즈벨트의 안티들은 뉴딜 정책의 성과가 생각만큼 크진 않으며, 불황 탈출도 전쟁 특수가 한몫했다는 지금도 논란이 분분한 논리와 함께 자유시장경제를 왜곡했다는 비판도 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바로 개입하지 않아 유럽이 초토화되고, 유대인들도 홀로코스트를 당하는 등 너무 수수방관한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31] 그 외 소련의 힘을 과대평가해 스탈린에게 많은 부분을 양보해줘 이후 냉전 체제의 빌미를 줬다는 시각도 있다.[32][33] 이런 점을 들어 매카시즘으로 유명한 조지프 매카시 같은 그 시절 미국내 극우파 인사는 루스벨트와 후임 트루먼 정권을 싸잡아 '반역의 20년 정권'이라고 몰아세우기도 했다. 이외 행정명령 9066호에 서명하여 2차 세계대전 당시 엄연히 미국적자였던 독일, 이태리, 일본계 미국인 같은 적국 출신 자국 이주민들을 강제 수용한 것도 그의 오점으로 꼽히는데, 다만 루스벨트 시절은 인권 운동가로 유명했던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 등의 활약으로 인종주의는 오히려 어느 정도 해소되던 시기였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4선을 하며 민주주의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장기 집권의 씨앗을 낳을 뻔한 점도 비판을 받는다. 이전까진 명문화되어 있지 않아도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2선을 하고 물러났기 때문에 알아서들 2선까지만 하고 말았는데, 루스벨트가 관례를 깨고 4선을 해서 그의 사후 3선 이상을 금지하는 헌법 조항이 명문화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34] 결국 4기 도중 루스벨트는 사망하는데 이렇게 건강이 안 좋은 상태에서까지 집권한 것이 제2차 세계 대전 등의 어떤 책임감 때문인지 권력욕 때문인지 아님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본인만이 알 일. 물론 루스벨트 본인은 드골이 독재자가 될 인격을 갖추고 있기에 민주주의에 걸맞는 지도자가 아니라고 평가하는 등 민주주의에 대한 어떤 신념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리버럴 진영에서는 뉴딜 정책이 가축 대량 살처분 같은 부작용도 일부 남겼지만, 이때 추진한 여러 정책 중 상당수는 이후 서구권에서 수십 년간 이어진 자본주의 황금기를 만드는 토대가 되었고, 실제 뉴딜 정책 이후 경제학계의 주류로 올라선 케인지언들만 봐도 알 수 있듯 세계 경제학의 기조 자체를 바꾸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이는 지금도 많은 좌우 인사들이 공감하고 있는 부분으로, 이후 아이젠하워 등 공화당 정부도 뉴딜 정책 당시 수립된 다수의 정책들을 계승했고, 지금도 사회보장제도 등의 형태로 남아 있다.[35] 또 루스벨트 행정부 2기(1937~1938) 경기 침체의 경우, 뉴딜 정책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견해와 오히려 재정 지출 감소 때문에 즉 뉴딜 정책을 지속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정반대의 견해(크루그먼)가 대립한다. 게다가 이 때의 경기 침체란 것도 상대적인 것으로 대공황 시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사실 뉴딜 정책이 갖는 중요한 의의는 정책의 호불호를 떠나, 미국이 방임주의로 대공황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지만, 다른 지역이 파시즘을 대안으로 선택하던 시절 대중들에게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사회 내 극단주의자들의 성장을 억제하고 큰 틀에서의 기존 체제를 지켜낸 점이라고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다. 실제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뉴딜이 사회주의 정책이라는 일부의 시각과 달리 실제론 되레 사회주의로부터 자본주의를 수호한 수정자본주의식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돈지랄 정책이라고 폄하하는 이도 있지만 사실 정부의 돈지랄 끝판왕은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이다. 그리고 전쟁은 대개 특수보단 경제 파탄내는 지름길로 간 케이스가 훨씬 많다.

프레드 그린슈타인 프린스턴대 교수는 FDR을 현대적 미국 대통령의 출현으로 규정하면서, 이때부터 의회가 이끌던 미국의 정책 주도권에서 연방정부의 영향력이 급격히 확대되기 시작했다고 봤다. 또 FDR을 뛰어난 웅변술과 천재적인 정치 감각을 가지고 대중들에게 기존 정치 체제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켜준 거장으로 고평가하면서도, 상기했듯 분석보단 직관을 더 중시한 정치인이었다는 점과 조직관리에서 정보를 독점하고 같은 일도 꼭 2부서 이상으로 나누어 처리하게 하는 관료 사회의 경쟁 시스템을 도입해 불필요한 비효율성을 낸 점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봤다.

하여튼 이렇게 다양한 평을 남긴 대통령이지만, 결과적으로 대공황을 극복하고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오늘날 초강대국 미국의 기반을 마련한 대통령이었다는 것에는 대부분이 공감하기에, FDR은 오늘날에도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통령 업적 평가나 인기 순위를 조사하면 조지 워싱턴이나 에이브러햄 링컨 등과 함께 세 손가락 내로 드는 경우가 많은데, 2010년 시에나 대학의 업적 평가에선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2000년대 한 조사에선 지도력, 인사, 위기 대응 등 다른 분야는 수위권인데, 도덕성에서 상대적으로 처지는 15위를 차지해 종합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한편, 루즈벨트의 집권은 공화당민주당의 정치 성향 및 지지 기반이 서로 바뀌는 중요한 분기점 중 하나로 거론되기도 한다. 루즈벨트가 일명 '뉴딜 동맹'이라 하여 계층적으로는 노동자-소수인종-유태인-이민자-농민, 지역적으로는 북동부 공업지대를 확보하면서 이후 이들은 민주당의 든든한 지지기반이 된다. 반면 공화당은 링컨 이후 강력한 지지기반이었던 흑인 집단의 지지를 상실하고 만다.[36] 정치적 성향 또한 뉴딜 정책을 계기로 민주당은 시장 개입 및 복지 정책의 확대에 관심을 기울이고 리버럴 성향이 강해진 반면, 공화당은 보다 자유방임주의에 근거한 시장친화적 성향으로 바뀌게 된다.

4.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당선 여부
비고
1910
뉴욕 주 상원의원 선거
뉴욕 26구
15,708 (51.88%)
당선 (1위)
초선
1912
뉴욕 주 상원의원 선거
15,590 (48.45%)
당선 (1위)
재선
1920
9,139,661 (34.15%, 127명)
낙선 (2위)
1928
미국 주지사 선거
뉴욕
2,130,193 (48.96%)
당선 (1위)
초선
1930
미국 주지사 선거
1,770,342 (56.49%)
당선 (1위)
재선
1932
미합중국
22,821,277 (57.41%, 472명)
당선 (1위)
초선
1936
27,752,648 (60.80%, 523명)
당선 (1위)
재선
1940
27,313,945 (54.74%, 449명)
당선 (1위)
3선
1944
25,612,916 (53.39%, 432명)
당선 (1위)
4선[38]

5. 기타[편집]

5.1. 가족 관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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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DR의 부인인 '안나 엘리너 루스벨트'의 젊은 시절 사진. 1884~1962년.

안나 엘리너 루스벨트는 반신불구가 된 남편을 대신해 영부인 활동도 활발하게 했고, 1945년부터 1951년까지 국제연합대사를 지내면서 1946년에는 국제연합인권위원회의 의장으로 선출되기도 하는 등 인권과 평화 활동 측면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미국 내에서도 공연장을 구하지 못해 애먹던 흑인 가수들에게 링컨 기념관 공연을 성사시켜주는 등 인종차별철폐를 위해 힘썼다. 미국인들이 가장 높이 평가하는 대통령 영부인으로도 손꼽힌다.

근데 부부 사이가 항상 좋았던 것은 아니라, 대통령이 되기 전엔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부인 엘리너의 비서인 루시 머서와 추문을 일으켜 이혼 직전까지 가기도 했었다. 실제 루스벨트는 엘리너와 이혼하고 루시와 재혼할 생각이었으나, 극구반대하는 어머니와 정치인생에 결코 도움될게 없다는 하우의 설득으로 루시와 만나지 않겠다는 다짐 속에 엘리너와 겨우 화해했고, 이후 루시도 다른 사업가와 결혼했다. 하지만 훗날 대통령이 되어서도 밀회를 즐겼다는 카더라가 있으며, 훗날 루스벨트의 임종을 지켜보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도 FDR 역시 그녀를 정치적 동반자로 아꼈는지, 엘리너의 저서 '내가 기억하는 것들'에 의하면 FDR은 보좌진들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있을 경우 식사 자리에서 자신에게 의견을 구했는데, 이때 FDR의 견해와 반대되는 견해를 심지어 약간은 짜증섞인 어조로 그녀가 말해도 빙그레 웃으며 자기 할 말만 하던 양반이, 다음 날 공식 석상에선 그녀의 의견을 마치 원래부터 자기 의견이었던냥 그대로 말해 당황하기도 했다고 한다.

자식으로는 엘리너와의 사이에서 슬하 4남 1녀를 뒀다. 이중 고명딸인 안나 루스벨트 할스테드(Anna Roosevelt Halsted. Halsted는 결혼 후의 성)는 부모를 도와서 퍼스트 레이디 직책을 대행하기도 했다.

한편, FDR은 미국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12촌 동생이다. 그냥 남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프랭클린은 상술되어있듯 시어도어의 조카딸(질녀) 앨리너와 1905년에 결혼했다. 때문인지 프랭클린과 시어도어가 서로 숙부와 조카뻘이라고 잘못 알려진 경우도 있지만 둘은 촌수가 먼 같은 항렬의 형제로, 근친이 아니라 사실상 남남이라고 봐도 무방하긴 하다. 시어도어와 프랭클린의 나이차는 23년으로 오히려 12촌이라는 촌수를 감안하면 평범한 편. 12촌 형제면 노인과 아기 수준으로 나이차가 많이 나는 경우도 있고, 남매간에는 서로 결혼도 가능한 촌수이다.

둘은 당적도 달랐지만[39] 사적으론 꽤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프랭클린은 시어도어 관련 서적도 읽어볼만큼 그를 존경하면서도 언젠가는 넘어야할 라이벌로 여겼다고. 그리고 실제로 넘어섰다. 사실 시어도어 루스벨트도 미국 대통령 중 꽤 비중있는 인물이지만, 그럼에도 대중들은 루스벨트라 하면 주로 존재감이 더 높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시어도어 루스벨트보다 많이 떠올리는 편이다.

한편, 시어도어는 일본 문화에 심취한 소위 원조 와패니즈가쓰라-태프트 밀약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일본의 아시아 침략의 길을 열어놓은 반면, 프랭클린은 무기 대여법과 대일 석유 금수 조치를 통해 일제의 침략 전쟁에 제동을 걸었고 결국엔 태평양 전쟁으로 폭망시켰다는 점도 재미있는 점.

이런 대조적 행보로 인해 일본 우익들은 지금도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일본 제국의 전성기를 만들어줬다고 좋아하는 반면,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 제국을 침몰시킨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특히 후임 대통령으로 일본에 원폭을 투하한[40] 장본인인 해리 S. 트루먼은 철천지 원수마냥 취급하기도 한다. 그러게 누가 먼저 선전포고도 안하고 통수치랬니[41]

5.2. 애완견 팔라(Fala)[편집]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백악관에서 개를 길렀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FDR은 그 중에서도 대단한 애견가로 알려져있다. 평생 동안 많은 개를 길렀는데 대통령 재직 중에도 8마리의 개를 백악관에서 길렀다. 가장 유명한 개가 스코티시 테리어 종인 팔라. 친척인 마가렛 서클레이로부터 받은 개였는데 백악관에서 길렀던 개들 중 루스벨트가 제일 아낀 개로 알려져 있다. 이 개의 밥도 손수 챙겼으며, 사적 외출은 물론 공식 행사나 외국으로 출국할 때에도 이 개를 항상 데리고 다녔다.

한 번은 알류산 열도의 한 섬을 방문했다가 팔라가 없어져서 그 섬으로 사람들을 동원해 개를 찾아냈다. 이를 가지고 공화당에서 "개 하나 찾으려고 군함을 보냈다", "예산을 낭비했다"고 비난했는데, 이에 대응하여 1944년 9월 워싱턴 D.C.의 팀스텀스 노동조합 앞에서 이른바 '팔라 연설'을 했다. 그 연설의 일부만 인용하면,
…(전략)…"아시다시피 팔라는 스코틀랜드산이죠. 스코틀랜드 출신으로서, 의회 안팎에서 소설을 쓰는 공화당 사람들이 제가 자기(팔라)를 알류산열도에 남겨놓았고 다시 자기를 찾기 위해 납세자들로부터 2백만 달러에서 3백만 달러, 혹은 8백만 달러에서 2천만 달러의 부담을 지우면서 구축함을 보냈다고 하는 이야기를 지어냈다는 걸 알고 (팔라가) 지금까지도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있습니다...(중략)...전 저 자신에 대해서는 제가 오래되고 벌레가 갉아먹은 같은 온전치 못한 사람인데도 꼭 필요한 사람으로 행세했다는 거짓말과 같은 악의적 거짓말에 익숙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 개에 대한 중상에 분노해하고, 제 개에 대한 모략에 반대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설의 주요 논지는 본인은 욕해도 좋지만 팔라를 욕하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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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벨트 기념관에 있는 루스벨트와 팔라 상.

그러나 이 연설을 한 이듬해 루스벨트가 사망하자 원래 주인인 마가렛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장례식 도중 장송곡에 맞추어 낑낑대다가 루스벨트의 관이 땅 속으로 내려지자 잔디밭 위를 구르며 재롱을 부렸다고 한다. 이후 루스벨트의 영부인 앨리너와 살다가 7년 뒤인 1952년 4월 5일 죽었다. 이 날은 팔라의 12번째 생일이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루스벨트 내외의 무덤 바로 옆에 묻혀 있으며 워싱턴에 있는 루스벨트 기념관 앞의 루스벨트 동상 옆에 함께 조각되어 있다. 지금도 루스벨트를 캐리커처하면 팔라가 함께 그려질 정도로 루스벨트와 뗄 수 없는 동물로 남아 있다. 그야말로 충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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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벨트 내외와 팔라의 무덤. 루스벨트 부부 묘 뒷편에 보이는 조그만 기둥이 팔라가 묻힌 곳이다.

5.3. 우표 덕질[편집]

"난 우표에서 배운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더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942년.
루스벨트는 엄청난 우표 수집광이었다. 재임 중에는 친구이자 우취가, 심지어 당대 최고의 우표덕인 제임스 A. 팔리를 체신부 장관에 앉혀놓고 친구와 함께 전국적인 단위로 우표덕질을 했다. 어머니의 날 기념우표 도안을 직접 해서 우정장관에게 전달한다든가, 시쇄에 반드시 친필 서명을 남긴다든가 하는 식. 1939 뉴욕 엑스포 기념우표는 압권인데, 당대까지는 전지 하나에는 우표 디자인 최대 2개만 사용한다는 것이 세계적인 불문율이었다. 그러나 팔리와 루스벨트는 이 금기를 깨고 A0 우표 전지 하나에 1939 뉴욕 엑스포의 각 전시관을 담은 32가지의 디자인을 담아놓은 우표세트를 발매했다.

주영 미국대사였던 조지프 케네디[42]의 아들인 로버트 케네디[43]에게 자신이 모은 우표를 보내주기도 했으며 로버트가 루스벨트에게 감사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 때 루스벨트는 로버트에게 우표들을 보내면서 적은 편지에 "짬 나면 백악관에 한 번 놀러와라. 내가 모은 우표들을 보여주마."라고 쓰기도 했다.

루스벨트는 제임스 할리가 1940년 3선을 한 자신에 대해 비판하면서 사퇴하자 또다른 우덕 라인(...)인 프랭크 코머퍼드 워커를 체신부 장관으로 모셔와서 죽는 날까지 우표 덕질을 했다. 다만 아쉽게도(?) 루스벨트가 죽고 해리 S. 트루먼이 대통령이 되자 우덕 장관들은 짤리고 로버트 해네건이라는 관료가 들어오면서 루스벨트식 우표 발행은 중단된다.

기록에 따르면,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알려지기 직전에도 루스벨트는 대통령 집무실에서 우표 정리를 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우취 오덕질은 단순한 오덕질 수준만은 아니라, 대공황기와 2차대전 중에 국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의 한가지로도 쓰였다.

우표 수집광인 대통령답게 그가 수집한 우표를 보고 있는 도안으로 우표가 여러 번 발매되기도 했는데, 그 중엔 루스벨트가 육손인 도안도 있다.

파일:external/postalmuseum.si.edu/1d_FDR-05.jpg

바로 이 우표인데, 1947년 모나코에서 발행된 것이다. 이 도안은 그 희소성으로 인해 다른 루스벨트 관련 우표보다 가치가 높다고 한다.

5.4. 그 외[편집]

  • 재임기 동안 경제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많았다보니 스트레스를 받아 취임 첫 해와 마지막 해의 인상이 굉장히 달라졌다.[44]
  • 1940년 어느 날, 쿠바의 어떤 12세짜리 꼬마에게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를 쓴 꼬마가 영어가 하도 서툴러서 내용 이해도 힘들었던 것은 논외로 치더라도, 편지 내용이 가관이었다. 그 편지에는 "10달러짜리 지폐를 본 적 없는데, 제가 볼 수 있게 해 줄 수 있나요?"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낸 그 꼬마훗날 쿠바를 완전히 뒤집어 엎어버렸다. 이 편지는 현재 미국국립문서보관소에 전시되어 있다.
  • 한 번은 감기에 걸려서 자리보전을 했는데 워싱턴 포스트가 이를 보도했다. 그런데 기사 제목을 'Roosevelt in Bed with Cold(감기로 자리보전하는 루스벨트)'라고 적었어야 했던 것을 그만 'Roosevelt in Bed with Coed(여대생과 동침한 루스벨트)[45][46]'라고 인쇄해 버렸다. 당연히 백악관은 난리가 났고 워싱턴포스트도 이 오류를 알고 즉각 수정에 나섰다. 이를 안 루스벨트는 워싱턴 포스트에 전화를 걸어서 이렇게 말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인데 초판 100부를 주실 수 없소? 제 친구 모두에게 한 부씩 보내고 싶어서..." 그러나 워싱턴 포스트는 오보를 정정하고 초판은 이미 처분한 뒤였다고. 이 외 자신을 비판적으로 그린 풍자만화들을 수집해서 아예 휴양지나 백악관의 잘 보이는 곳에 붙여놓는 대인배스런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어떤 노골적인 풍자만화를 읽고는 그 만화에 '참 잘했어요' 정도의 의미인 grand라는 표시를 적어 놓았다고.
  • 젊은 시절부터 오크 섬의 보물을 찾기 위해 노력해왔다. 1909년 27세부터 보물인양회사에 합류해 직접 오크섬에 가서 작업을 했었고, 대통령 재직 중에도 꾸준히 관심을 가졌으나 전쟁통에 빠진 세계 정세를 신경쓰느라 직접 가보진 못하고 종종 서신으로 소식을 듣곤 했다고 한다. 서신에 의하면 루스벨트는 그 곳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보물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편, 오크 섬의 보물 주인에 대한 여러가지 설 중엔 안 끼는 데가 없는 프리메이슨 관련 설도 있었는데, 프리메이슨 회원이라는 설도 있는 루스벨트가 찾지 못한 것을 보고 음모론자들은 보물이 프리메이슨과는 무관하거나 아님 프리메이슨도 그 존재를 잊은 것 아니냐고 생각했다고 한다.
  • 뉴딜이 영국의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영향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의외로 뉴딜 정책은 케인스주의로 인해 수립된 정책은 아니다. 당선 직후 루스벨트는 백악관에서 케인스를 직접 만나서 대화도 해봤지만[47], 당시엔 균형재정을 지지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그의 유효수요 위주 경제학에 대해서 "그 양반(케인스)은 정치경제학자라기보다는 수학자 같더구만!(“He must be a mathematician rather than a political economist”)"이라면서 그의 설명을 이해하기 어려워했다고 한다. 뉴딜 정책은 이후 균형재정 목표가 후퇴하면서 진행된 것이었다.# 그러나 정책을 집행하는 도중 케인즈가 루즈벨트에게 몇차례 서한을 보내는 등 자문을 해주기도 했고, 미국 정책을 집행하는 재무부의 관료들 중에서도 케인지언이 있었음을 감안하면 뉴딜 정책은 간접적으로나마 케인즈주의와 접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뉴딜 정책은 수요촉진, 사회보장제도, 인프라투자 등 케인즈주의와 상당히 궁합이 잘 맞는 정책이었고, 뉴딜 정책 이후 케인지언은 경제학계의 주류로 올라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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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스턴 처칠과 죽이 잘 맞았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가장 유명한 일화가 처칠이 목욕한 후 알몸으로 있는데 루스벨트가 이를 보고 피하려고 하자 처칠이 "대영제국의 총리는 미합중국의 대통령께 감추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 실제로 둘이 개인적인 '우정' 같은 감정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서로 긴밀한 관계였던 것은 사실이었다. 20세기를 풍미한 두 거목이 배포가 잘 맞았던 셈. 허나 루스벨트와 처칠과의 관계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일단 처칠은 스스로 둘의 관계를 우정이라고 말하며 친근함을 자주 표현했지만, 루스벨트의 경우에는 처칠에 대해서 "하루에 수백 가지 생각은 하지만 그 중 쓸만한 생각은 열댓 개도 되지 못한다"(...)라고 노골적인 디스를 날린 적도 있다. 그리고 둘은 몇몇 안건에 대해 의견 충돌도 잦았는데, 대표적인게 드골에 대한 인식 차이였다. 처칠은 드골을 프랑스의 유일한 지도자이자 희망이라고 생각하며 지지를 표명했지만, 루스벨트는 드골이 독재자가 될 인격을 갖추고 있기에 민주주의에 걸맞는 지도자가 아니라고 평가하며 사후 프랑스의 지도자 문제에 대해서 처칠과 다른 의견을 냈다.
  • 위의 드골에 대한 그의 인식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드골이 루스벨트와 동석한 자리에서 "하느님은 내게 프랑스 부흥이란 사명을 주셨다."라고 말하자 루스벨트는 혼잣말로 "거 참 이상하군. 난 그런 사명을 내린 적이 없는데..."라고 했다는 개그가 있다.
  • 그래도 프랑스에겐 고마운 대통령인지 파리 지하철 1호선에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이름을 딴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역'이 있으며 거의 모든 역이 프랑스어인데 반해 영어로, 심지어 미국 대통령 이름으로 되어있어 꽤나 이질적인 느낌이 든다.[48] 물론 안내방송은 프랑스어로 읽어준다.
  • 문재인 대통령과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정치적 롤모델로 삼고 있는 인물이라고 한다. 공산주의자란 소리 들으면서도 뉴딜 정책을 펼쳐 대공황을 극복하고 미국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연 대통령으로 높게 평가한다고. 남경필 前 경기도지사도 금수저 출신의 한계를 딛고 서민, 중산층을 위해 노력한 점을 닮고 싶다며 롤모델로 꼽았다.[49] 그 외 '뉴딜'이란 단어를 차용한 공약이나 정책을 내놓는 정치인들도 국내외에서 좌우 가리지 않고 심심찮게 볼 수 있다.
  • 1920년대 시행된 미국의 금주법을 폐지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금주법 자체가 당시 공화당이 주도한 법이다 보니, 당시 자본가들은 루스벨트의 친노동 정책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루스벨트를 지지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했다.
  • 해군 모의 훈련에 참가하였다가 난전에서나 나온다는 아군 오사를 당할 뻔 한 적이 있다.

    정확히는 테헤란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아이오와급 전함 1번함 아이오와 함에 탑승 중 호위 함대의 훈련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플레처급 구축함 USS 윌리엄 D. 포터 함 측에서 모의 사격 훈련을 하다가 실수로 어뢰를 비우지 않고 대항군 역할을 하던 아이오와함을 향해 실탄 어뢰를 발사해버린 것. 이 때 루스벨트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어뢰가 보고 싶다면서 더 잘보이는 자리로 휠체어를 옮겨달라고 했는데, 다행히 어뢰는 전함에게 닿기 전 폭발했고 배가 대서양에 가라앉거나 FDR이 물에 빠져 실종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겨우 어뢰를 회피한 USS아이오와는 이후 포터함 옆으로 와서 16인치포 9문을 전부 겨냥한 채 해명을 요구했다.(...) 이후 구축함 함장을 포함한 전 승무원은 대통령 암살미수라는 엄청난 혐의로 항구에서 전원 체포되었지만, 루스벨트가 이 일은 단순한 실수라며 사면해줘서 처벌 없이 끝났다. 하지만 포터 함의 승조원들은 이후 다른 선박들로부터 '쏘지 마! 우린 공화당원이야!'라는 식의 놀림을 당해야 했다고 한다.
  • 그 개새끼는 우리 개새끼 항목의 원조로 거론되기도 한다. 재임 시절 친미 성향 중남미 독재자인 소모사가 통치하던 니카라과와 외교 관계를 맺었는데, 이를 반대하던 비서관에게 "Somoza may be a son of a bitch, but he's our son of a bitch.(소모사는 개새끼일 수도 있지. 하지만 그 자식은 우리 개새끼야.)"라는 말을 남겼다는 설이 있기 때문. 다만 공식 문서가 없기 때문에 확실하진 않다.
  • 하반신 장애 때문에 티가 많이 나진 않지만, 저래 봬도 역대 미국 대통령 중 5번째로 장신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더 큰 사람도 나오겠지만 에이브러햄 링컨(193cm), 린든 B. 존슨, 도널드 트럼프(192cm), 토머스 제퍼슨(190cm)에 이은 188cm. 다만 키가 같은 대통령은 꽤 있는데 조지 워싱턴,체스터 A. 아서, 조지 H. W. 부시, 빌 클린턴이 그와 같은 장신이다. 이 때문에 한때 유행했던 2차 대전 추축국 지도자와 연합국 지도자의 키 비교 짤방을 보고 장신인 드골을 빼면 승패는 미궁(?)으로 빠진다는 의견도 나왔지만 사실 그 짤방엔 루스벨트가 빠져있었다. 그의 먼 친척인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키가 178cm였다. 당시 미국인 평균을 상회하는 키였지만, 미국 대통령 중에서는 작은 축에 들어간다고 한다.
  • 사우디아라비아의 초대 국왕이였던 이븐 사우드와 개인적으로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사우디는 2차 대전 동안 중립국이였지만 FDR이 집권한 미국의 편의를 많이 봐줬다. 예를 들어 미국에게 석유를 지원한다거나 아님 아예 사우디 동부 Dhahran 지역에 미 공군 기지 건설을 허용해주기도 했다.[50] 또 사우디 항공사 사우디아 항공 역시 1945년 FDR이 이븐 사우드 국왕에게 DC-3 여객기를 선물한 것이 계기가 되어 만들어 진 항공사이다.[51]
  • FDR 사후 공화당에서 제출한 3선 금지 조항이 가결되면서 이후 미국 대통령은 강제적으로 2연임만 가능하게 되었는데, 특이 케이스로는 케네디 암살 이후 그의 2년 미만 임기를 대행하고 나서 다시 대통령 선거에서 이긴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있었다. 대행기간이 2년 미만인 경우에는 임기로 치지 않기 때문에, 린든 존슨은 다음 선거에 나와도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월남전 장기화로 반전여론이 거세지며 존슨 행정부도 타격을 받자 존슨 대통령은 스스로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후 리처드 닉슨이 3선 출마를 금지하는 조항을 없애려고 개헌을 준비하기도 했지만,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하야하며 개헌은 흐지부지된다.
  • 1936년 미국 미시간 주 남동부에 위치한 도시 플린트에서 3천여명의 노조원들이 GM공장을 점거하고 1달 넘게 연좌파업을 한 적이 있는데, 이때 경찰과 용역깡패(구사대)들이 이들을 진압하려하자 루스벨트는 미시건 주지사와 연계해 주방위군을 파견해 노조원들을 지켜주었다고 한다. 루스벨트는 노동자들이 불만을 제기할 권리가 있다고 봤기 때문.
  •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방탄차를 이용한 사람이다. 진주만 공습 이후로 탑승했는데, 재미있는건 미국 대통령 첫 방탄차의 전 주인이 바로 마피아 알 카포네였다는 것. 내막을 보면 알 카포네가 탈세 혐의로 감옥에 들어간 뒤, 대통령 경호를 겸하는 시크릿 서비스에서 그의 방탄차를 압수해두고 있었는데, 돈을 절약하고 싶었는지 어쨌는지[52] 그냥 압수한 걸 대통령 방탄차로 활용해버렸다. 이걸 차 안에서 들은 루스벨트 왈, "카포네 씨도 이해해 주겠지."[53]
  •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에어컨이 백악관 내부에 설치되어 있었으나 루스벨트는 에어컨의 찬바람을 싫어했던 탓에 그의 재임시절에는 백악관의 에어컨을 한 번도 가동하지 않았다고 한다.
  • 당시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자신도 반신불수로 만든 소아마비 박멸을 위해 소아마비 국립재단을 설립했다.
  • 미네소타에서 처음 이겨 본 민주당 후보이다.

6. 관련 어록[편집]

"So, first of all, let me assert my firm belief that The Only Thing We Have to Fear is Fear Itself. Nameless, unreasoning, unjustfied terror which paralyzes needed efforts to convert retreat into advance."
"우선, 제가 굳게 믿고 있는 점을 하나 강조하자면, 그것은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후퇴를 전진으로 반전시키기 위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노력들을 마비시키는 막연하고, 이유 없고, 근거 없는 두려움 말입니다."
"We must remember that any oppression, any injustice, any hatred, is a wedge designed to attack our civilization."
"우리는 그 어떤 억압, 불의, 증오도 우리 문명을 공격하기 위해 의도된 쐐기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I should like to have it said of my first Administration that in it the forces of selfishness and of lust for power met their 'match'. I should like to have it said.. Wait a minute! I should like to have it said of my second Administration that in it, these forces met their 'master'."
"저의 첫 번째 임기를 말하자면, 저 권력을 탐하는 이기적인 세력들이 적수를 만나게 된 시기라고 하겠습니다. (군중 환호 후) 그리고! 저의 2번째 임기는 저 자들이 임자를 만나는 시기가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 1936년 10월 31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 대선 연설.[54]
"The test of our progress is not whether we add more to the abundance of those who have much, It is whether we provide enough for those who have little."
"진보의 시험대는 많이 가진 자에게 더 얹어주고 있느냐가 아니라, 적게 가진 자에게 충분히 보태주고 있느냐이다."
"In the truest sense, freedom cannot be bestowed, it must be achieved."
"가장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는 수여될 수 없으며, 쟁취해야 한다."
"They (who) seek to establish systems of government based on the regimentation of all human beings by a handful of individual rulers...call this a new order. It is not new and it is not order."
"몇몇 개별 통치자로 하여금 모든 인간의 획일화에 기반을 둔 정부 체계를 만들려는 사람들은 이것을 '새 질서'라고 부른다. (허나) 이것은 새롭지 않고, '질서'도 아니다."
"Yesterday, December 7, 1941 - a date which will live in infamy -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was suddenly and deliberately attacked by naval and air forces of the Empire of Japan."
"앞으로 치욕의 날로 기억될 1941년 12월 7일인 어제, 미합중국은 일본 해군과 항공대로부터 고의적이고 기습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We must be the great arsenal of democracy We must apply ourselves to our task with the same resolution, the same sense of urgency, the same spirit of patriotism and sacrifice as we would show were we at war. I believe that the Axis powers are not going to win this war."
"미국은 거대한 민주주의병기창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전쟁과도 같은 비상사태에 있습니다. 전쟁에서 보여주는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가지고 우리의 임무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나는 추축국이 결코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 1940년 12월 29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
"우리만 행복하고 풍요로운 오아시스가 되려 해선, 미국은 결코 존속할 수 없다."
- 독립기념일 연설.
"In politics, nothing happens by accident. If it happens, you can bet it was planned that way."
"정치에 있어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란 건 없다. 만약 우연히 일어났다면 그건 그렇게 계획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7. 현대 매체에서[편집]

  • 파일:external/s2.hubimg.com/129917_f260.jpg
    담배를 꼬나문 루스벨트 사진 중 가장 유명한 사진. 이 사진은 루스벨트를 캐리커처할 때 많이 그려진다. 캐리커처로 그려지거나 하면 강조되는 특징은 안경과 애용했던 아이보리 담배, 그리고 애견 팔라가 함께 그려지곤 한다.
  • 영화 웜 스프링즈(Warm Springs, 2005)는 같은 이름의 온천 요양원에서 재활 치료를 받던 시절과 그 이후 정계로 복귀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전기 영화이다.
  • 2001년 영화 진주만에서는 안젤리나 졸리의 아버지로 유명한 존 보이트가 배역을 맡았다. 일본 폭격을 강력히 주장하는 루스벨트에게 참모들이 일본 폭격은 불가능한 작전이라고 만류하자 스스로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두 팔의 힘만으로 일어나 서서 "내 앞에서 불가능하다는 말은 하지 마시오!"라고 일갈하는 장면은 압권. 다만 영화 자체는 전투씬은 뛰어나나 삼각 로맨스 비중이 상당해 그건 별로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 파일:external/www.multivisionnaire.com/keyart_fdr_243.jpg
    이런 영화도 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무장을 하고 나치 독일 늑대인간을 박멸한다는 내용이다. "나치 늑대인간을 위한 새로운 처리법(뉴딜)!"(...)이라고 써져 있는 것이 압권.
  • 비중있는 정치인이었던만큼 대체역사소설에도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 그가 1932년 취임 직전에 마이애미에서 암살되어 부통령이었던 존 낸스 가너가 승계했다는 가정 아래 쓰여진 높은 성의 사나이가 있다. 필립 K. 딕의 이 작품은 대체역사소설의 효시격으로 알려져있다. 그는 가장 오래 재임한 대통령인만큼 부통령만 해도 가너, 월리스, 트루먼으로 셋이나 된다. 흥미롭게도 이들 셋의 캐릭터는 삼인삼색으로 워낙 뚜렷한데, 자세한 내용은 부통령 문서 참고.
    • 린드버그가 대선에 나와서 미국을 파시즘 국가화한다는[55] 대체역사소설 "The Plot against America"에서는 린드버그에게 선거에서 발리고 은둔하다가 린드버그가 실종된 후[56] 대선에 나와서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다.
    • 해리 터틀도브[57]의 단편 Stlee에서는 아예 초반에 조지아계 러시아 이민 2세인 조지프 스틸리에게 선거에서 참패하여 대통령이 되지 못한다. 참고로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스틸리의 정체는.
    • 해리 터틀도브의 타임라인-191 시리즈에서는 미국 사회당 출신 전쟁성 차관으로 잠깐 나온다. 실질적으로 북부의 핵개발을 진두지휘하는 인물. 이 작품에서는 루스벨트가 그렇게 정치적인 인간이 아니었기에 조지프 대니얼스가 해군성의 거두가 돼서 1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다. 작중 나와서 멕시코와 남부연합령 쿠바에 특수작전을 수행하는 구축함 이름 자체가 조지프 대니엘스호.
    • 해리 터틀도브의 월드 워 연작에서는 외계인의 침공에 맞서서 미국을 수호하는 대통령으로 나온다. 작중 워싱턴이 핵으로 날라가서 미국 전역에서 지하투쟁하는 모습이 인상적, 후반에 부통령 월레스가 외계인의 핵공격으로 마이애미에서 사망하고 얼마 뒤 루스벨트도 급서하여 코델 헐이 대권을 잡는 것으로 묘사된다.
    • 데즈카 오사무아돌프에게 고한다에서도 잠시 나오는데, 일본진주만 공습을 미국이 사전에 알고도 개전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방치했다는 설을 택했다. 짤막한 등장이지만 카리스마가 넘친다. '각하, 일본에 대해 채찍을 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당근을 택하시겠습니까?' 하는 부하의 질문에 물론 채찍 쪽이지.라고 대답하고, 진짜로 일본을 자비없이 후려친다.
    • 네이버 웹소설 갬블링 1945에서 주인공인 선우진이 후원하는 정치인으로 등장한다. 등장시점은 오틴저와 뉴욕 주지사 자리를 놓고 대립하는 상황.(307화 기준) 아무래도 원래 인물이 인물이니만큼 레이,하워드(그 하워드 휴즈 맞다)와 함께 미국에서 주인공을 조력하는 주요 인물로 다루어질 가능성이 크다. 다만 하워드와는 달리 대중적으로 공개된 행보가 많고, 소설의 작가가 고증을 철저히하는 편이라 하워드만큼 비중있게 나오지는 못할듯.
    • 감벽의 함대에서는 악의 화신으로 나서서 찌질거리다가 일본에게 대패하고 홧병으로 급사한다.
    • 몽환의 군함 야마토에서도 주인공의 주적으로 등장. 일본과 휴전협정을 체결하려 하지만 츠지 마사노부가 소련을 침공하자 자신을 속였다며 크게 분노하여 돌아간다. 이후 역사대로 사망하고 트루먼이 승계한다.
  • 위 해피 퓨의 세계관에는 FDR이 암살당하고 36년 대선에서 휴이 롱이 당선되었다. 결과적으로 3년 정도 늦춰졌지만 미국은 소련과 함께 독일의 베를린을 점령하고 2차대전을 끝낸다.
  • 팀 포트리스 2의 역사관에 따르면 세익스헤라클레스라는 작가 겸 발명가가 로켓 발사기랑 2층집은 발명했는데 계단은 발명하지 못해 사람들이 집의 2층에 로켓점프로 다들 올라가고 있던 정신나간 상황에서 역시나 2층에 올라가려고 로켓 점프 를 하다가 사고로 두 다리를 잃었으며 이후 1857년 계단을 발명하기는 했는데 사용법을 숙달하지 못해 포드극장 2층에 올라가려고 로켓점프를 하다가 사망한 에이브러햄 링컨의 계단 설계 노트를 발견하여 제대로 된 계단을 만든 사람으로 나온다.
  •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는 상술한 캄포벨로 별장 사건에서 얻은 소아마비가 악화되어 2달만에 사망했기 때문에 본편에서의 등장은 없다. 하지만 FDR의 사망으로 허버트 후버가 재선되는 바람에 미국은 정치, 경제적으로 쇠퇴기를 겪은데다가 양당제마저 붕괴되었고, 결국 미국은 세계 대공황을 극복하지 못한 채 다음 대선을 기점으로 완전히 분열되어 내전의 길을 걷게 된다.
  • 콜 오브 듀티: WWII의 스토리 모드 인트로 영상에 루스벨트의 음성 기록이 들어갔다. 영상과 음악, 음성이 소름끼칠 정도로 퀄리티가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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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뉴욕 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후에 로스쿨을 중퇴하였다. 그러다가 2008년, 컬럼비아 법학대학원은 그에게 'posthumous(사후) J.D.(법무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J.D 학위는 1960년대 이후 생긴 학위라 루스벨트 재학 시절에는 존재하지 않던 학위다.[2] 우드로 윌슨 대통령 시절[3]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이 이후로도 취임 선서를 3번 더 하게 된다. 시간 상으로는 히틀러보다도 더 오래 집권했다.[4] 당시 미국 헌법에는 대통령의 연임 제한을 따로 명문화 해놓지 않았으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3선을 지내지 않은 것이 관례화 되어 후임자들 또한 모두 단임 혹은 재선만을 하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하지만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대공황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역사적 위기 상황 속에서 종래의 관습을 깨고 4연임이나 하면서 1951년 미국 연방 정부 헌법에 3회 이상 중임을 제한하는 수정 제22조가 신설된다.[5] 원래 이 Roosevelt라는 성은 네덜란드어에서 장미밭(rosefield)을 뜻하는 단어로,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로저벌트, 로저벨트 내지는 스펠링을 감안해 슈와(schwa) 부분을 ㅔ로 보고 로제벨트라고 번역해야 영어발음에 가깝지만, 일제시대부터 해방 전후까지 국내 신문에서 루즈벨트/루스벨트라고 표기하는 바람에 현재 발음이 굳어져버린 경우다.[6] 오늘날에는 이 질병을 소아마비가 아니라 자가면역 질환인길랭-바레 증후군으로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https://news.joins.com/article/2397965[7] 재활의 일환으로 온천이 있는 조지아주의 웜 스프링스(Warm Springs)를 방문하여 온천욕을 경험한 후, 사재를 털어서 온천수를 치료 목적으로 사용하는 요양원을 세우고 다른 소아마비 환자들과 같이 치료를 받았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임기동안 16차례나 찾았을 정도로 애용하였으며 일종의 마음의 고향으로 여긴 듯 하다. 이 요양원은 Roosevelt Warm Springs Institute for Rehabilitation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존재한다.[8] 허나 앨 스미스는 나중에 1936년 대선과 1940년 대선에서 루즈벨트를 지지하지 않고 공화당 후보를 지지한다.[9] 루스벨트는 당연히 자력으로 앉았다가 일어날 수 있는 몸이 아니었기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카리스마 때문에 깊은 인상을 받아서 벌어진 기억의 착각이다. (출처: The Roosevelts: An Intimate History, Ken Burns, PBS 다큐멘터리 6화)[10] 이와 관련해 영화 The American President(국내명 대통령의 연인)에선 비서실장(배우는 마틴 쉰)이 "지금처럼 텔레비전이 있던 시절이라면 루스벨트는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거다."라는 대사를 하기도 했다.[11] 당시 민주당은 행정부와 입법부를 모두 장악했기에 속도감 있게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12] 여기서 금송아지란 출애굽기에 나오는 우상숭배, 나아가 물신숭배를 의미한다.[13] 실제로 루스벨트 당선 확률이 43%이라고 예측했다.[14] 참고로 프랭클린 집권 이후 민주당은 20세기 후반까진 대선 결과와 상관없이 상하원 선거에선 수십년간 주로 우위를 차지한다.[15] 심지어 갤럽은 다이제스트가 루스벨트 당선 확률을 44% 정도로 볼 것이라는 신들린 예측까지 했다. 실제와 단 1%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던 것.[16] 다만 갤럽도 이후 1948년 대통령 선거 때 해리 트루먼의 당선을 예측하지 못해서 타격을 입는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17] 다만 정부의 경기부양을 지지하는 케인즈 학파도 경기가 호황에 들어서면 흑자재정을 실시해야 한다는 입장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적자재정은 정부부채 증가를 의미하기 때문. 결국 출구전략을 어느 시기에 적절히 쓰느냐의 문제.[18] 하지만 진주만 공습 이전까진 여전히 참전 반대 여론이 압도적이었다.[19] 이미 세계대전이 본격적으로 개전하기 전인 38년 나치의 위협이 커져감에 따라 미국인들이 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The War of the Worlds의 라디오를 청취한 청자들이 공황에 빠졌다는 일화로도 잘 알 수 있다. 하물며 1940년에는 거의 전 유럽이 추축국의 손에 떨어진 시기다. 고립주의랍시고 마냥 안심하고만 있지는 않았던 것.[20] 일명 Fourteen Part Message라 불리는 일본의 선전 포고문에는 전쟁을 선포한다는 의미와 관련이 있는 표현(Declare, War against, State of War 등)이 하나도 없었다.[21] 이 모든 것은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났다. [22] 루스벨트 대통령이 생략한 문장.[23] 미국의 헌법상 전쟁 개시 권한은 의회에 있으므로 대통령은 의회에 전쟁 개시를 요청하는 절차를 거친다.[24] 당시 유럽 전선에서 고전중이던 윈스턴 처칠은 히틀러의 뜬금없는 미국 선전포고를 듣고 "이제 우리 연합군이 이겼다. 히틀러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무솔리니의 운명도 결정되었다. 일본인의 경우는 가루가 돼버리겠지." 라며 좋아했으며 독일에선 "총통 각하, 굳이 왜..."라는 반응이었다고 한다.[25] 검사로서 전설적인 마피아 두목인 럭키 루치아노에게 콩밥을 먹인 것으로 유명세를 탄 인물이다. 또한 루스벨트와 지역 기반이 뉴욕으로 같다.[26] 스탈린이 대놓고 오래 못 살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다.[27] 당시에는 고혈압의 이해도가 낮아 혈압 관리가 잘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병원에서 측정한 마지막 혈압이 무려 350/190mmHg이었다.[28] 잠시 베를린 전체가 이젠 살았다는 열광에 휩싸였지만, 후임자 트루먼은 표트르 3세의 삽질을 반복하지 않았다.애초에 표트르 3세가 미친놈이다.[29]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미국으로의 세계 패권 이동. 당장 세계사에서 미국 대통령이 글로벌 리더 역할을 하게 된게 루스벨트 이후부터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역사상 가장 스무스한 패권 교체기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물론 당사국들간 잡음이 적었던 것엔 추축국이라는 공통의 적이 있었던 점도 한 원인이었다.[30] 실제 미국이 참전하기 이전 기준으로 보면, 유럽은 영국을 제외한 다수의 지역이 독일과 동맹국들에 먹혀있었고, 일본 역시 중국 내륙은 진출하지 못했지만 해안가 도시와 만주 지역은 넉넉하게 차지하고 있었고 일부 동남아 지역에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31]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편에 나온 이야기. 하지만 해당 작품의 경우 작가가 너무 공화당빠 아니냔 비판도 있고, 당시 미국 자체가 여론의회가 모두 전쟁 참여에 부정적이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루스벨트는 무기대여법 같은 편법으로 연합국을 돕는 등 최선을 다했다는 반론도 있다. 적어도 학계에선 당시 루즈벨트가 연합국을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지원 방법을 강구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당장 중일전쟁만 해도 루스벨트는 중국에 물자를 대주고 일본의 석유 수출길을 가로막으며 사실상 일본의 중국 철수를 강하게 압박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사태를 초래한 만악의 근원히틀러지 애꿎은 루스벨트가 아니다. 어쨌든 이런 여론을 돌리는 덴 에드워드 머로의 나치-영국 본토 항공전 중계 등 언론이 한몫을 했고, 결정적으로 일본제국삽질이 기폭제를 당겼다.[32] 사실 FDR은 전후 평화 체제의 핵심이 미소관계라고 봤기 때문에 초강대국인 미국이 먼저 손을 한번 내밀어본 것이었다. 또 이 때만 하더라도 소련은 대공황을 극복하고 제2의 경제대국으로 치고 올라와 결코 만만히 볼 나라는 아니었다. 괜히 당시 소련 추종자들이 생긴 게 아닌 것. 또 이런 이면엔 영국을 견제하기 위한 FDR의 의도가 담겨있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FDR은 연합국 안에서도 여전히 제국주의 노선을 고집하는 국가들의 방식은 낡은 것이라며 거부감을 표하기도 했다. 이런 연장선상인지 FDR은 중화민국 등에도 호의적인 편이었다.[33] 여담으로 FDR은 1942년 처칠에게 미국 국무부나 영국 외무부보다 자신이 스탈린을 더 잘 다룰 수 있다는 소신을 밝힌 적도 있는데, 스탈린은 유고 슬라비아의 공산주의자였던 밀로 반질라스에게 '처칠은 사람들이 안볼 때 당신 주머니에서 잔돈만 훔쳐갈 인물이지만, FDR은 더 큰 동전 골라서 훔쳐갈 인물'이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이런 점을 들어 그린슈타인 교수는 FDR을 분석보다 직관을 더 믿은 정치인이었다고 평하기도 했다.[34] 다만 장기 집권한다고 무조건 민주주의 후진국이라고 보긴 애매한 점도 있는 게, 민주주의 선진국으로 평가받는 일부 유럽 국가에서도 (물론 공정한 선거를 통해서) 10~20년 이상씩 장기집권하는 정치 지도자들이 종종 나온다. 대표적인 인물이 스웨덴의 타게 엘란데르나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같은 케이스.[35] 흔히 뉴딜을 댐 건설 같은 경기부양 정책이 다였다고 오인하는 경우도 있는데, 뉴딜은 경기부양책 뿐만 아니라 시장 개혁과 양극화 해소를 위한 부당노동행위금지, 최저임금제도 등 미국 사회보장제도의 근간까지 마련하는 정책이었다. 실제 이때 미국사회의 노동, 복지, 금융 관련 주요 기관과 제도들의 원형이 대거 만들어졌는데, 노동자의 단결권 및 단체교섭권, 실업보험, 은퇴자&장애인 연금, 과당경쟁방지를 위한 공정거래제도, 빈민구제제도 등이 대표적이다. 즉, 뉴딜은 이해당사자 간 합의를 통해 새로운 질서와 제도를 만드는 과정을 본질로 둔, 말 그대로 '새로운 거래'였다.[36] 그래도 이때까진 30%대 지지는 남아있었으나, 1960년대 민주당이 흑인민권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공화당은 이전과 달리 애매한 스탠스를 취하면서 이후부턴 흑인 집단의 지지를 거의 상실하고 만다. 애초에 공화당을 처음 만든 사람들이 링컨같은 연방론자+흑인 노예 해방론자들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아이러니. 하지만 남북 모두에서 세가 줄어든 공화당이 기존 민주당 텃밭이던 남부를 텃밭화하기 위해 일명 남부전략을 펴고, 뉴딜 때까진 그래도 비교적 얌전히 붙어 있던 남부 보수파들이 민주당의 진보 주류화에 공화당 지지로 돌아서면서, 남북전쟁 이후 정확히 100여년만에 양당의 스탠스는 뒤바뀌게 된다.[37] 대통령 후보는 제임스 콕스[38] 1945. 4. 12. 임기 중 병사[39] 시어도어는 공화당, 프랭클린은 민주당원이었다. 실제 시어도어가 대선에 출마했을 당시에도 프랭클린은 우드로 윌슨을 지지했다. 이는 18세기에 루스벨트 집안이 이미 갈라져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온 영향도 있고, 공화당엔 이미 시어도어의 아들들이 진출해있어서 블루 오션을 노린 것 아니냔 추측도 있다.[40] FDR 시절부터 일명 맨해튼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41] 사실 이런 식으로 타국의 역사를 자국 문제와 대입해 감정적으로 재단하는 것은 심도깊은 역사 인식에 방해가 될 수 있다. 현실적으로 보면, 시어도어 시절엔 일본과 친선 관계를 맺는 것이 미국 입장에서 나쁠 게 없었고, 반대로 프랭클린 시절엔 일본의 폭주와 선빵질로 인해 일본과 싸운 것일 뿐이다. 두 지도자 모두 시대적 분위기에 따라 자기들 딴엔 적절한 정책을 펼쳤을 뿐이지 일본에 대한 개인적인 호불호가 의사결정의 절대적인 요인까진 아니었다. 게다가 프랭클린 시대에는 일본이 전체주의 유사 파시즘으로 미쳐 돌아가던 시절이였지만, 시어도어 시대 일본은 당대 트렌드인 제국주의 흐름에 동참한거 이외에는 나름 온건한 헌정보수~리버럴들이 정치를 주도했기에 서방과 딱히 충돌할 이유도 없었다. 즉, 한국이나 일본이나 서로 현재 자기들의 국익 문제나 민족 감정으로 두 대통령을 재단하고 있는데 이러한 판단은 두 대통령에 대한 한쪽에 치우친 판단을 심을 우려가 있다. 실제 한일의 인식과 별개로 미국 내에서 시어도어와 프랭클린은 둘 다 미국식 진보주의의 상징적 인물로 리버럴,좌파들에게 비슷한 존경을 받고 있다. (가령 힐러리, 오바마나 샌더스 등 미국의 리버럴,진보 거물들도 두 대통령 모두에게 존경을 표하며 둘의 진보적 업적을 기리고 있다. 다만 시어도어의 제국주의적 측면은 이쪽도 딱히 옹호하진 않는다.) 반면에 미국의 강경보수파들은 특히 국내 정책에선 둘 다 그들 기준 '사회주의자'라며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즉, 현대 미국 사회에서 둘의 포지션과 위상은 생각보다 크게 다르지 않다.[42] 존 F. 케네디의 아버지다.[43] 존 F. 케네디의 동생이자 후에 법무장관이 된 바로 그 사람이다. 그도 어렸을 때 우표 수집이 취미였다고 한다.[44] 버락 오바마의 경우에도 취임 당시와 퇴임 당시의 인상이 분명하게 차이가 난다.[45] co-education, 즉 '남녀공학'이란 뜻이고, 이 시절에는 대학 같은 고급 교육은 남자가 받는게 당연하다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보니 굳이 '남녀공학'이라 하면 여학생을 뜻했다.[46] e와 l을 왜 헷갈리나 싶겠지만 필기체로 쓰면 두 글자는 필체에 따라 비슷해질 수 있다.[47] 당시 경제학자로 주가를 올리던 케인스가 뉴딜의 논리적 일관성을 보완해줄 수 있다고 봐서 측근이 주선한 자리였다고 한다.[48] 사실 대중교통 종류가 많고 지하철 역 또한 촘촘하게 짓는 일부 서구권 대도시의 경우 이런 식의 역명 명명법이 크게 특이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파리 1존의 경우에는 역 사이 거리가 짧으면 1분이 채 안될 정도로 많은 역이 모여있기에 지명과 전혀 관련없는 역명도 종종 존재한다. 예를 들어 7호선 중에는 스탈린그라드 역도 있다.[49] 그래서인지 미국에선 루스벨트 안티들이 좀 비꼬는 의미로 리무진 리버럴(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강남 좌파)의 선구자격으로 취급하기도 한다.[50] 사우디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병력을 보낸 적은 없었지만, 승세가 확연히 기운 1945년 2월 28일 추축국에 선전포고를 하긴 했다.(...) 그래서 사우디는 형식상으로는 2차대전의 승전국으로 취급받지만, 일부 자료에서는 그냥 중립국으로 표현되어있는 경우도 있다.[51] FDR-이븐 사우드를 시작으로 사우디는 모로코와 함께 지금도 아랍세계에서 친미 성향이 강한 국가로 남아있다. 심지어 지금도 미군은 사우디에 주둔해있다.[52] 구 국군방송(현 국방tv)에서 방영했던 미국 다큐에 의하면 전시 상황으로 긴급히 방탄차를 장만하려고 해도 당시 법적 대통령 관용차 비용을 훌쩍 넘는 터라 도저히 장만할 수 없다보니 꺼내 쓴 거라고...[53] 비슷한 예로 한국 전쟁 당시 켈로 부대가 입은 나치의 무장친위대 위장 군복이 있다. 그 당시 미군은 워낙 급하게 한국에 와서 보급이 상당히 부족했었고, 2차 대전 중에 미군 측이 압수해둔 무장친위대 군복을 켈로부대원에게 지급했다. 이에 북한군과 중국군은 이 군복은 뭔가 하고 의문을 가졌는데, 여차저차해서 이 소식을 들은 (나치와 싸워본) 소련은 이 군복을 단번에 알아보았고, 때문에 왜 독일이 여기 참전했냐며 소련이 항의하기도 했다고 한다.[54] 연설문 일부 번역은 여기에서, 원전문은 여기를 참고할 것.[55] 실제 린드버그는 반전론자 겸 친독인사였으며, 이 때 루스벨트에게 공개적으로 비판받는 것은 물론 군 지위를 박탈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그가 친독화하는 설정은 좀 다르다. 자세한 건 스포일러.[56] 내전 중인 미국에서 화해의 연설을 하고 귀환 도중 실종된다.[57] 미국에서 대체역사소설의 거장으로 인정받는 인물. 수십편의 대체역사소설을 썼는데 국내에는 장편 비잔티움의 첩자, 단편 가지 않은 길, 최후의 신조만이 번역출판되었다.[58] 근면함(Industrious)의 오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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