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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4대 명필
사자관체 석봉 한호
인수체 자암 김구

韓石峯
(1543~1605)
석봉 천자문의 일부

1. 개요2. 일화3. "한석봉"의 실상4. 평가5. 대중매체에서 한석봉

1. 개요[편집]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명필

조선서예가, 문신(신하)

원래 이름은 한호(韓濩). 본관은 삼화(三和), 자는 경홍(景洪). 호가 석봉(石峯)·청사(淸沙)이다. 조선 서예계에서 추사 김정희와 함께 가장 유명한 서예가.[1] 대중 인지도야 한석봉이 제일 높다.

2. 일화[편집]

의외로 생활의 달인들에게 데꿀멍하는 일화가 많다. 한석봉에 대한 이런 이야기는 모두 19세기말 이원명(李源命)이 지은 야담집인 동야휘집(東野彙輯)이 출처다.

우선 어둠 속에서도 고른 두께로 을 썰었던 그의 어머니와 펼친 세기의 대결이 있다.
한석봉의 어머니는 떡장수를 해서 한석봉을 글씨 공부를 10년간 시킨다. 출가하여 공부하던 석봉은 모친이 보고 싶어서 집으로 돌아온다. 모친은 호롱불을 끄고 자신은 떡을 썰고 석봉은 글씨를 쓰게 한다. 불을 켜 보니 모친은 떡은 보기 좋게 썰어져 있었으나 석봉의 글씨는 엉망이었다. 모친은 석봉을 야단쳐서 다시 산으로 보냈다. 결국 석봉은 10년 동안 공부를 해서 조선의 명필이 되었다.

용 이야기도 있다.
석봉은 박연폭포 아래에서 글씨 공부를 했다. 10년을 두고 하루도 빠짐없이 박연폭포의 바위에 글씨를 썼다. 마침 박연폭포 연못에는 용이 한 마리 살았는데, 여의주를 얻어 승천할 즈음이었다. 그러나 석봉의 글씨쓰는 먹물 때문에 승천하지 못했다. 용은 할 수 없이 석봉에게 하룻 동안만 글을 쓰지 말아 달라고 요청한다. 석봉이 거절하자 붓에 조화를 부려 신필이 되게 해준 후 승천했다. 하산한 석봉은 그 붓으로 신필이 되었다.

또 기름 장수 이야기가 있다.
어느날 한석봉이 길을 가는데 누각에 사는 기름장수에게 기름 사러온 꼬마가 있었더란다. 그런데 그 기름 장수가 하는 말이, "꼬마야 호리병을 내려 놓으렴"이라고 하고, 보지도 않고 으로 기름을 부어서 흘리지 않게 호리병에 넣고, 엽전은 던진 걸 손으로 받았단다.
이걸 보고 "아 아직 멀었구나"라고 정진한 한석봉은 몇년 뒤 그 곳에 다시 가게 되자 똑같은 꼬마가 다시 누각에 사는 기름장수에게 기름을 사러왔다고 한다.
'이번에도 호리병을 내려놓으라 하고 손으로 붓겠지'라고 생각했지만, 호리병 입구 위에 엽전을 올려두고 로 기름을 부었단다. 엽전도 발로 받고.
그 후 다시 그곳을 찾으니 누각은 흔적도 없었다는 야사.

야사 중에는 개성의 문인인 차천로와 '드림팀'을 짜서 중국 사신을 역관광시킨 이야기도 있다.
중국에서 문사로 유명한 주지번이 사신으로 와서 함께 글을 써보며 연회를 즐기는데, 주지번이 오언율시의 백운, 그러니까 글자 100개로 쓴 글을 보여주고 이 글자로 운을 맞춰서 하룻밤 안에 시를 써 보라고 말했다. 당시 사신을 맞이하던 관료들도 혼자서는 하룻밤 안에 글을 쓸 엄두가 나지 않고, 여러 명이 나눠서 쓰자니 글의 앞뒤가 맞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며 우려했다. 결국 이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차천로 밖에 없다며 그가 쓰기로 했는데, 이 때 차천로가 시를 쓰면서 내건 조건이 1. 술 한동이 2. 글을 쓸 병풍 3. 한석봉이 글을 쓸 것이었다. 이를 준비하자 차천로는 술 한동이를 마시면서 시를 즉석에서 읊고 이를 한석봉이 일필휘지로 받아 적었는데 그 광경이 참으로 장관이었다. 다음날 주지번이 글을 받아서 읽어보는데 글에 감탄한 나머지 쥐고 있던 부채를 부러뜨렸다고.한다.

3. "한석봉"의 실상[편집]

하지만 글씨로 얻은 이름값에 비해 벼슬로서는 그리 잘 나간 편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글씨 잘 썼기 때문이다. 예술가에게 행정을 맡기는 선조 클라스

진사시만 겨우 합격[2]해서 사자관(寫字官: 공문서의 글씨를 깨끗하게 정리하는 하급관리)에 머물렀으며 선조가 그 글씨를 아껴 별제라는 관직을 제수했지만 대과에 합격하지 못한 자가 관직에 오르는 것은 부당하다며 참으로 야멸차게 까였다.

예컨대 사헌부에서
"와서 별제(瓦署別提) 한호(韓護)는 용심(用心)이 거칠고 비루한 데다 몸가짐이나 일 처리하는 것이 이서(吏胥:이방)와 같아, 의관(衣冠)을 갖춘 사람들이 그와 동렬(同列)이 되기를 부끄러워하니 체직시키소서”

라는 상소를 올리는데 자세한 비위 사실이나 능력 문제는 없고 그냥 사람 자체가 찌질하다는 수준이다.

하지만 서예 솜씨만은 명나라에 알려질 정도로 뛰어나 임진왜란중국 관리에 대한 접대(쉽게 말해 한석봉이 하나 필사해 주는 것.)에 자주 동원되었으며 그 공로로 왜란 후 선조가 경기도 가평군수로 보냈지만 글 쓰는 것과 지방행정은 엄연히 다른 데다 왜란 직후의 피폐한 형편까지 겹쳐 가평을 말아먹은 죄로 탄핵되어 강원도(북한) 통천 현감으로 좌천되었다. 비슷한 예로 김홍도도 그림만 그리다가 연풍현감[3] 맡고 대차게 말아먹은 적이 있었다.

이때부터 삐딱선을 타서 임진왜란 공신의 교서와 녹권을 개판으로 휘갈기다가 1604년에 파직당한 뒤 다음 해인 1605년에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애초에 가평에 보낸 것도 물 맑고 산 좋고(통천 역시 관동팔경이 있던 곳이다.) 한양에서 가까운 곳에서 글이나 쓰며 지내다 문서 작성할 일 있으면 퀵 타고 달려오라는 것이었는데 가뜩이나 잔읍[4]상태이던 곳을 말아먹었으니 뭔가 실수 안 하나하며 살펴보던 사헌부에서 득달같이 몰아친 것. 관료로서는 재능이 영 없었던 것 같다.

웹툰 트라우마 290화에서도 이런 한석봉의 낙하산 과정을 풍자한 것으로 추정되는 묘사가 나왔다. #

4. 평가[편집]

명나라의 주지번(朱之蕃)은 한호를 가리켜 “왕희지(王羲之) 및 안진경(顔眞卿)과 우열을 가리기가 매우 어렵다”라고 했을 만큼 호평하였고, 또 당대에는 한호 이전 송설체의 대가 안평대군과 맞먹는다는 평가 또한 있었다.[5] 반면 김생(金生, 711∼?), 탄연(坦然, 1070∼1159), 최우(崔瑀, ?∼1249)[6], 유신(柳伸, ?∼1104) 등 신품 4현에 비해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도 있긴 했다.

송도삼절의 한명인 간이당(簡易堂) 최립(崔笠)과는 이종 육촌으로, 그의 문집 《간이집》(簡易集)에는 최립이 한호의 서첩(書帖)에 써준 서문[7]이 있는데, 한호의 서풍에 대해서 흥미로운 이야가 실려있다. 그 글에 의하면, 최립의 고조인 최로[8][9]세조 때 글씨를 잘 써서 절충장군(折衝將軍)의 품계에 상호군(上護軍)의 관직에 해당하는 녹식을 받았고[10], 족조(族祖)인 직강공 최영(崔永) 부자[11][12]와 아버지 최자양이 과거시험장에서 글씨가 뛰어나다는 칭송이 자자했는데 석봉이 이 직강공의 외손자로 외가의 필체를 이어받은 것 같다는 집안 자랑이 나와 있다. 어머니가 글쓰기를 엄히 가르쳤다는 설화가 나올 만 한 것이다 뒤에는 대놓고 아예 '한호가 유학자 집안이긴 한데 명필은 없었음.'이라고 적었다. 집안자랑 겸 한씨 디스 나름 한호의 서체의 원류가 무엇인가를 참조하는 중요한 서술이긴 한데, 문제는 최립이 지목한 최로, 최영 부자, 최자양의 글씨가 남아있지 않으니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것.[13]

정교한 글씨체로 조선의 사자관체를 확립했다는 평을 듣고 있으나 예술적인 면에서는 좀 부족하다는 평을 듣는데 선조는 "비록 액자(額字)[14]에는 능하지만, 초서해서는 부족하다"[15]고 평했고, 김정희도 "글씨를 워낙 많이 써 그 공력이 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뒤엎을 정도지만 동기창[16]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평했다.

사실 이 쪽 업계에서는 쓴 사람의 인물평도 나름대로 하나의 평가 요소이다 특히 가격형성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안중근의사의 글씨는 높이 쳐 주고 거래도 함부로 할 수 없으나 이완용은 글씨 잘 쓴다고 당대에 명성이 자자해도 그의 글씨는 다들 거들떠도 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17] 대중들에게는 떡 관련 설화 때문에 서예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지만, 그 점에서 한석봉은 메리트가 적다. 게다가 석봉체로 불리는 그의 글씨는 지나칠 정도로 '정석'이기 때문에 찍어낸 듯한 활자체 같다는 것도 문제다. 개성이 없어 '재미 없다'는 것이 중평이며, 오랜 사자관 생활로 인해서 공문서에 특화된 서체다보니 예술적인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평가가 높지 않은 편이다.[18]

5. 대중매체에서 한석봉[편집]

KT의 "올레" 광고에 등장했다. 올레 버전의 한석봉은 어두운데도 떡을 세 줄이나 자르는 실력을 보여줘 서예가가 아닌 떡집을 개업한다는 내용.

불멸의 이순신에서 술집 주인이 술값을 요구하자 글씨를 써서 획 던져 주고 가는 장면이 있다는 소리도…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미다스의 손. 여기서는 짓궂은 성격이지만 일단 류성룡과 비슷한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나온다. 배우는 박동빈.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의 명곡 '석봉아'는 가사의 화자가 석봉의 어머니다. 후렴에 연달아 '석봉아'를 후크송처럼 반복하는데 붕가붕가 레코드의 자체 인터뷰글에서는 조까를로스의 옛 이름으로 보이는 '조가락로'라는 인물과 석봉의 교류가 있었다는 기록에 근거해 옛 친구를 그리워하는 내용이라고 해석했다.

앨범 발매 공연에서는 김간지가 폭풍랩 뒤에 완벽한 궁서체!라며 두루마리를 펼치는 장면도 있었다. 그때의 랩 가사는(앨범에 들지는 않았다.) '붕가붕가 레코드의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에 기록되어 있다.

시키면 한다! 약간 위험한 방송에서도 한석봉과 어머니를 직접 따라해봤는데, 결과는 양쪽 다(...) 좋지 않았다. 해본 결과 한석봉은 글씨가 삐뚤어지고, 어머니의 가래떡도 썰다 말듯이 이상해졌다.

[1] 다만 애초에 쌍벽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 김정희는 삶 자체가 예술가의 삶이다. 자신의 미학이론을 정립하기도 했으며 하나의 화파를 이룬 반면에, 한석봉은 문인 중에 글씨로 유명한 일화가 있는 사람 중 하나일 뿐이다. 그 이유는 글씨 자체로 높은 미적경지에 다다르지 못했다는 평이기 때문이다. 그런 평가는 당대에도 그렇다.[2] 물론 과거라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니 이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3] 오늘날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이다.[4] 동네가 사실상 슬럼화되는 것을 말한다.[5] 안평대군, 한호 외에 성종~중종 대의 문신 신자건(愼自健)을 더해 '조선시대 송설체 3대가'로 꼽히기도 한다.[6] 무신정권의 집권자인 그 최우 맞다.[7] 〈한경홍서첩서〉(韓景洪書帖序)라는 제목이다.[8] 최윤덕의 큰 동생 최윤복(崔潤福)의 손자다.[9] 통천최씨 세보에 의하면 최로는 최립의 고조부가 아니라 5대조로 1대 차이가 있다.[10] 계유정난 때 사망하였으며 단종의 능인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었다.[11] 한국어 위키의 '최립' 항목에는 최영이 증조부로 되어 있지만, 최립은 <한경홍서첩서>에서 분명히 족조(族祖)라고 적고 있다. '족조'는 저자 본인의 할아버지가 아니라 저자 본인 '집안의 할아버지', 보다 더 정확히는 상을 당했을 때 상복을 입지 않아도 되는 촌수의 할아버지를 의미한다.[12] 실제로 한국어 위키 '최로' 항목에는 최로→최유지→최상→최세영→최자양→최립의 가계로 되어 있으며, 최영은 최유지의 아들, 즉 최상과 형제 간으로 되어 있다. 실제로 최립의 형제인 명곡 최석정이 지은 묘갈 〈형조참판간이최공묘갈명〉(刑曹參判簡易崔公墓碣銘)에 의하면 '아버지 최자양, 할아버지 최세영, 증조 최상'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사전 DB에도 이 설을 따르고 있으므로 확실히 최영과 최립은 직계 조손 관계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13] 한국어 위키 '최로' 항목에는 최영의 아들은 최담(崔湛)이라고 되어 있으며, 이것은 이정구(李廷龜)가 쓴 한호의 묘갈명에 '최담의 딸에게 장가 들었다.'는 것을 참고한 듯 한데, 정작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가 쓴 《간이집》 해제(한국고전종합DB 해제 참조.)에는 최영과 최담의 항렬 관계는 알 수 없다고 되어 있다. 통천최씨 세보를 직접 살펴보아야 할것 같다.[14] 현판. 흔히 말하는 額子가 아니다!![15] 한석봉을 총애하던 선조 자신도 당대의 명필로 유명해서 명나라 관리들이 선조가 쓴 해서나 초서 글씨를 좀 얻어 갔다. 즉, 결국 자기가 더 낫다는 소리.[16] 명의 관리. 예술적인 재능은 매우 뛰어났으나 인간 쓰레기로 백성들이 그 집을 태우고 가산을 적몰한다.[17] 그래서 동기창도 사실은 호불호가 매우 많이 갈리는 서예가. 사실 인품만 봐서는 이완용과 비슷한 취급을 받아 마땅할 사람이지만 이쪽은 워낙 실력이 킹왕짱이다보니 후대의 작가들에게 영향을 크게 준 탓에 그나마 '호불호가 갈리는 작가' 취급이라도 받는 것.[18] 물론 서예를 배웠던 사람은 알겠지만, 활자체 같이 쓰기도 참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