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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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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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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전두환(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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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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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유공자 : 기타 공훈 및 국가원수


미합중국 제33대 대통령
해리 S. 트루먼
Harry S. Truman
출생
사망
1972년 12월 26일 (향년 88세)
재임기간
제34대 부통령
제33대 대통령
서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84px-Harry_S_Truman_Signature.svg.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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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존 엔더슨 트루먼 (1851 ~ 1914)
어머니 마사 엘런 영 트루먼 (1852 ~ 1947)
배우자
베스 트루먼 (1885 ~ 1982)
자녀
마가렛 트루먼 (1924 ~ 2008)
학력
인디펜던스 고등학교[2] (졸업)
스폴딩 상과대학교[3] (중퇴)
캔자스시티 대학교 법학대학원[4] (중퇴)
종교
최종 계급
신장
172cm[5]
정당
상훈
제1차 세계대전 승리 메달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64)
의회 명예 황금 훈장 (1984)
약력
미주리 주방위군 (1905~1911)
미국 육군 소령 (1917~1919)
미국 육군 예비군 대령 (1920~1953)
미주리 제1구 연방 상원의원 (1935~1941)
미국 제34대 부통령 (1945~1945)
미국 제33대 대통령 (1945~1953)
백악관 공식 초상화

1. 개요2. 이름3. 생애
3.1. 어린 시절3.2. 제1차 세계 대전3.3. 평범한 정치인, 부통령을 거쳐 대통령이 되다3.4. 대통령 제1임기(1945.4.~1949.1.)3.5. 대통령 제2임기(1949.1.~1953.1.)
3.5.1. 해군과의 불화
4. 평가
4.1. 서방세계의 평가4.2. 한국 내의 평가4.3. 일본 내의 평가4.4. 대만 내의 평가4.5. 당시 공산진영의 평가
5. 선거 이력6. 어록7. 기타8. 대중매체에서의 트루먼9. 관련 문서


제33대 미국 대통령 취임 선서

1. 개요[편집]

The buck stops here![6]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대통령 재임 중 그의 책상 위에 놓인 명패에 적힌 글.
미국의 제33대 대통령. 그의 전임자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4선으로 취임한지 한 달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제2차 세계 대전 막바지, 부통령이 된지 82일만에 대통령이 되었다.

재임 당시에는 미국사에서 손꼽히는 대통령인 전임자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전쟁 영웅인 후임자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카리스마에 가려 평범한 대통령이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서 냉전기로 이어지는 급격한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냉철한 판단력으로 전후 질서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 평가받으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평가가 올라가고 있는 대표적인 대통령이다. 한국인들에겐 6.25 전쟁 당시 미군파병해준 대통령으로 의미가 남다른 인물이기도 하다.

이전까지 대통령이 한 명도 나오지 않았던 시골 미주리 주 출신에, 미국 역사상 현재까진 최후의 고졸 대통령이다. 앤드루 잭슨과 비슷한 아웃사이더 출신. 그 외 초임 '러닝메이트'가 아닌 후임자 부통령, 대통령직 승계, 재임 당시의 낮은 인기 등 제럴드 포드와도 흥미로운 공통점들이 많다. 실제 중서부 출신은 이 둘밖에 없다. 다만 트루먼은 제럴드 포드와 달리 재선에도 성공했고, 굵직한 정치적 결단들을 통해 미국 역사, 더 나아가 세계사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는 차이가 있다.

2. 이름[편집]

퍼스트 네임인 해리는 해리 S. 트루먼의 외삼촌이자 어머니 마사 엘런 영 트루먼(Martha Ellen Young Truman)의 오빠인 해리슨 "해리" 영(Harrison "Harry" Young)에게서 따왔다. 외삼촌은 해리슨이 정식 이름이고 해리는 애칭이었지만, 해리 S. 트루먼은 해리 자체가 정식 이름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84px-Harry_S_Truman_Signature.svg.png
트루먼 대통령의 친필 서명. 미들네임 S 뒤의 점이 선명하다.

트루먼의 미들네임은 그냥 S.이다. 그의 친할아버지 앤더슨 십 트루먼(Anderson Shipp Truman)과 외할아버지 솔로몬 영(Solomon Young)의 이름을 동시에 따왔기 때문이다.[7] 일반적으로 미들네임이 알파벳 한 글자인 경우 구두점을 찍지 않지만, 트루먼 본인은 공문서나 조약 등에 서명할 때는 분명히 'Harry S. Truman'이라고 적었으며 자서전에도 미들네임 뒤에 점을 찍어 본인의 이름을 표기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표기할 때에도 그를 존중하여 S 뒤에 점을 찍어 표기한다.

이름을 두고 트루먼은 "할아버지가 내 출생신고를 하면서 서류 위에 국수 한가닥을 흘렸어."라고 농담하거나, 트루먼의 대통령 취임식 선서를 진행한 할런 F. 스톤(Harlan Fiske Stone) 연방 대법원장은 트루먼의 풀네임을 오해하여 그에게 "나 해리 십 트루먼은(I Harry Shipp Truman)"이라고 말하게 시켰는데 트루먼 본인은 알아서 "나 해리 S. 트루먼은(I Harry S. Truman)"으로 고쳐서 선서한 일화가 있다.

3. 생애[편집]

3.1. 어린 시절[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arry-s-truman-79-26.jpg
1897년 사진.

미주리 주 라마 출신이다. 어렸을 때부터 지독한 책벌레였다고 한다. 안경을 쓰게 된 것도 너무 을 많이 읽어 시력이 나빠져서 근시가 되어 버렸는데 역사책을 제일 좋아했다고 한다. 원래 본인은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가고 싶어했지만 지독한 근시 때문에 진학을 하지 못했다. 덕분에 우드로 윌슨과 함께 안경이 두드러지는 대통령이 되었다.[8]

3.2. 제1차 세계 대전[편집]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젊은 시절에는 여러 직업을 전전했는데 군 복무도 2차례 했었다. 먼저 1905년부터 1911년까지 6년간 미주리주 주방위군 육군사병으로 자원 입대하여 포병 상병으로 제대했고, 2번째로 1917년~1919년의 제1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하자 트루먼은 지독한 근시 때문에 군 복무를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합중국 육군 신체검사에서 시각검사판을 통째로 외워서 통과하였다.[9] 이렇게 자원 입대하여 프랑스 전선에서 육군 포병 장교로 복무하였으며 대위까지 승진하였다. 육군 복무 경력은 두 기간을 합쳐 8년에 달한다. 그리고 트루먼의 부대는 종전이 선언되는 그날까지 독일 제국군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1차대전의 마지막 교전에 참전한 부대들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한 게 그라는 걸 생각해보면 트루먼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마지막 사건을 장식한 유일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3.3. 평범한 정치인, 부통령을 거쳐 대통령이 되다[편집]

I felt like the moon, the stars, and all the planets had fallen on me.
달과 별, 그리고 모든 행성들이 내게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전임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남긴 말.
종전 후 미국으로 돌아와 소꿉친구였던 베스 윌리스와 결혼을 하고 양복점을 경영했지만 얼마 못 가서 말아먹었다.(...) 이후 30대에 캔자스시티 법률학교를 졸업하여[10] 38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1922년부터 1934년까지 지역 판사(겸 서기)로 일했으며, 1934년 미주리주 연방 상원의원이 되었다. 이후 계속 재선해서 2차대전 당시엔 미국 연방 상원의 국방사문위원회, 일명 트루먼 위원회의 의장으로 주로 군납비리에 대해 군대와 산업계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활동을 펼쳐 당시 물가 기준으로 약 150억 달러의 국고를 보존할 수 있었고 미군에 납품되는 물자, 병기에 대한 엄격한 기준을 확립했고 이러한 업적은 오늘날까지 미군과 군수산업계에 영향을 줬다고 한다.

다만 상원의원 활동 때에도 그렇게 활발한 타입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일을 못하지도 않는 무난한 의원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44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부통령이 되었다. 부통령이 된 과정이 좀 무섭다. 전임 부통령이었던 헨리 A. 월리스가 루스벨트와 사이가 멀어지면서 자연스레 4선 선거(1944)에서는 부통령을 바꾸자는 논의가 일어났는데, 이 때 가장 가능성이 낮은 후보가 트루먼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트루먼이 대통령이 된 것이 예상치 못한 사건은 아니었다. 1944년 당시 루스벨트의 건강상태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은 미 정가 고위층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던 사실이었다. 따라서 194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부통령이 누가 되느냐가 굉장히 중요했다. 당시 민주당 중진들은 이런 사정을 고려해서 트루먼을 뽑은 것이다. 후보자들 중에서 가장 만만하고 능력도 없어보였기 때문에 루스벨트 사후 자기들이 잘 이용해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루스벨트가 트루먼을 부통령직에 앉히는데 동의한 까닭은 좀 다르다. 그는 자신이 4선을 꽉 채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후계자를 선택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그가 트루먼을 선택하는 데 동의한 이유는 부통령 후보자들 중에서 뉴딜 정책을 옹호하는 유일한 후보자였기 때문이었다.[11] 하지만 그는 월리스가 스스로 자력으로 치고 나온다면 그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고 보았고, 트루먼에 그의 의중이 있다는 것은 월리스를 경계하는 정객들에게 더욱 과대포장된 감이 있었다. 여하간 모든 것은 정객들의 계산에 들었고, 루스벨트도 크게 마음에 안 들진 않았고, 월리스만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다.[12]

그리고 과연, 3개월만인 1945년 4월, 얄타 회담 직후 루스벨트가 뇌일혈로 죽자 지도력을 검증받지 못한 상태로 대통령이 되었다. 참고로 트루먼은 이 소식을 하원의원들과 술마시다 받았다고 한다.[13] 물론 여기서 술마셨다는 것은 놀러가서 마신건 아니고 민주당 의원들과의 공식 미팅에 정부 대표 자격으로 참석한 자리이긴 했다. 그리고 미팅 중에 급한 소식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는 투덜거리면서 백악관에 들어갔더니 영부인인 엘리너 루스벨트의 첫 마디가 대통령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였다고 한다.

엘리너의 회고에 따르면 소식을 듣고 한참을 침묵하던 트루먼은 "제가 부인을 위해 무엇을 해 드려야 할까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앨리너는 "아니요. 제가 당신께 무엇을 해드려야 할까요? 앞으로 골치 아플 일이 많으실 테니까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만큼 루스벨트가 남겨놓은 과제가 많았다는 소리다.[14] 그래서 트루먼은 대통령 취임 직전에 "달, 별, 그리고 모든 행성이 내게 떨어지는 기분이다."(I felt like the moon, the stars, and all the planets had fallen on me)라고 소감을 밝혔다.

3.4. 대통령 제1임기(1945.4.~1949.1.)[편집]

…(전략) 한 때 무능하고 유약하다 폄하되었던 평화의 연합체는, 와 군부의 폭정보다 훨씬 더 강력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ㅡ 1945년 5월 8일 유럽전선 승리를 발표하며.

지도력을 검증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대단히 중요한 문제들을 결정해야 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맨해튼 프로젝트의 보고를 받고 일본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를 지시했다. 이 때문에 트루먼을 비판하는 표현으로 'give 'em hell, harry(엿 먹여줘, 해리)'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1975년에는 동명의 영화도 제작되었다.(...) 그런데 트루먼은 사실 맨하탄 프로젝트를 취임 이후에 처음 보고받았다. 원래 부통령으로써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해야 했지만, 루스벨트 생전에는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가 트루먼의 프로젝트 접근을 의도적으로 차단했기 때문이다.

종전 후에는 사회주의 권역의 확산 저지 문제와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서유럽 경제의 복구 등 많은 문제가 있었다. 트루먼은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여 공산화 방지를 천명했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렵 대륙에 경제 원조를 하는 마셜 플랜을 세워 유럽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부흥을 지원했다. 이스라엘의 건국에 지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마셜 플랜 등에 대한 당시 대중들의 여론이 곱지만은 않아서 1948년 재선에서 트루먼의 재선 가능성은 불투명했다. 1944년 이미 FDR과의 대결에서 상당한 득표력을 보인 미국 공화당토마스 E. 듀이 후보가 다시 대선 레이스를 준비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여권이 둘도 아닌 셋으로 찢어졌다. 전 부통령이었던 월리스는 진보당을 차려 출마했고, 특히 남북전쟁 이래 민주당의 텃밭이었던 남부는 주권민주당(딕시크랫)이란 이름으로 따로 출마해 실제 4개 주에서 승리해 39명의 선거인단[15]을 확보하는 이변을 일으키게 된다. 이는 FDR 시기까진 그래도 뉴딜 동맹에 붙어있던 남부 보수파들이, 트루먼 이후 두드러지기 시작한 인종적 민권운동에 반감을 가진게 컸다.[16]

실제 트루먼 대통령은 민권운동을 지지했다. 그는 1945년 "우리는 새로운 세계, 훨씬 나은 세계, 즉 인간의 영원한 존엄성이 존중되는 세계를 건설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발언하며, 비록 사회적인 평등은 아닐지라도 정치적인 평등은 신봉했으며, 흑인 도시로의 점증하는 중요성을 인정했다. 남부에서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린치와 기타 형태의 민중의 힘이 1946년에 알려지게 되자, 그는 인종 및 종교에 입각한 흑백 차별대우를 조사하기 위한 민권위원회 위원들을 임명했다. 그 이듬해에 발표된 보고서는 미국 생활에 있어서의 흑인들의 2급 지위를 상세히 기록했다. 보고서는 여ㆍ 모든 미국민들에게 보장되어 있는 권리를 연방 정부가 국민들에게 확보해주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10개항 민권계획을 의회에 송부함으로써 이에 응답했다. 트루먼 대통령의 보다 강력한 민권옹호 자세에 성난 남부 민주당원들이 1948년 민주당을 떠났을 때, 트루먼 대통령은 연방 정부 고용분야에서 흑백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내리고, 군대 내에서의 평등한 대우를 명령하고, 그리고 군대 내의 흑백 인종차별을 끝내는 방향의 일을 하기 위한 위원회 위원들을 임명했다. 군대 내에서의 (흑인에 대한) 마지막 제한은 한국전쟁 중에 끝났다. 민권 운동의 기원.

다시 선거 얘기로 돌아와서, 16년만의 정권교체 가능성을 벼르던 공화당은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다며 그야말로 약이 바짝 오른 상황. 실제 트루먼은 이런 엄청나게 불리한 판세를 어떻게든 해결해보기 위해 당시 전쟁영웅으로 인기가 하늘 끝까지 치솟아있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부통령 후보로 추대하려고 했었으나 아이젠하워가 '군인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아야 한다'라는 이유로 거절하면서 실패했고[17], 대통령 선거날 자신의 패배를 예상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나 아침에 일어나자 박빙의 차로 자신이 이겼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나 당초 공화당의 기대와 달리 결과는 반대였고, 이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대선 당시 라이벌이던 듀이가 낮아보이던 트루먼의 지지율과 자신의 인기를 과신해 미리 각료를 구성하고 뱃놀이나 즐기는 등 선거 유세 기간을 흥청망청 보낸게 컸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 선거 2주 전인 10월 중순 시행된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듀이는 5% 이상으로 이기고 있었다. 그런데 2주일 사이에 표심이 뒤바뀌어버린 것. 물론 후대 연구자들은 듀이가 우세했다는 내용을 담은 당시 <갤럽>의 여론조사 자체가 오류가 많은 조사였다고 보기도 한다. 전후 미국은 농촌보다 도시화가 가속화되었는데, 표본에서 농촌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아서 그 결과 듀이의 지지율이 과대평가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갤럽 외에도 수많은 언론들과 여론조사들이 듀이의 승리를 거의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대놓고 한 잡지는 듀이에게 '차기 대통령'이라는 표현을 쓰기까지 했고, 유명 정치평론가들은 듀이의 당선을 기정사실화하고 차기 듀이 내각의 장관은 누가 될까를 예측하고 있었으며 대선 승자를 예측하는 도박에서는 트루먼 승리 진영의 배당률이 15배까지 올라갔던 상태였다. 이는 개표방송 초반까지도 이어져(...) 초반 트루먼이 앞서가자, 초반이라 트루먼 강세지역의 개표가 먼저 되어서 그럴 뿐이고 개표가 진행되면 듀이가 역전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여하간 1936년 루스벨트 당선을 예측하며 현대적 여론조사의 효시가 된 <갤럽>은 12년만에 이 사건으로 체면을 구긴다.[18] 그리고 이 선거에서 <갤럽>이 행한 잘못된 여론 지지율 조사방식은 이후 통계학개론 강의 등에서 적절한 표본집단 선정의 중요성을 보여 주는 사례로 두고두고 인용된다.

파일:external/blogs4brownback.files.wordpress.com/dewey-defeats-truman.jpg
대통령 당선 후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의 오보를 들고 웃는 트루먼.

하지만 당시 선거에서 언론에 하이라이트로 잡힌 장면은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이라는 신문이 앞서서 '듀이가 트루먼을 이겼다'고 설레발을 친 게 하루아침에 오보가 되어버린 사건이었다. 원래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은 공화당에 우호적이었고 트루먼과 민주당에게 적대적인 신문이었기 때문에 민주당 후보인 트루먼의 패배를 아예 기정사실화하고 헤드라인을 저렇게 박아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트루먼은 당선된 이후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을 비웃듯이 저런 제스처를 취한 것이다. 이 일화는 신문 보도의 정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는 유명한 이야기로 손꼽히며, 그와 함께 트루먼이 신문을 번쩍 치켜들고 웃고 있는 위 사진도 미국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장면 중 하나로 뽑힌다. 어쨌든 이런 역전극을 통해 트루먼은 대통령에 재선될 수 있었다. 194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대한 이야기.

그로부터 59년 뒤인 2007년, 시카고 트리뷴은 망하지 않고 자신들의 실수를 덤덤하게 회고했다. # 사실 당시 시카고 트리뷴만 이런 실수를 했던 건 아니고, 라이프지를 비롯한 여러 언론도 듀이를 '차기 대통령'이라고 표기한 사진 등을 내놓았지만 상기한 사진의 임팩트가 워낙 쎄다보니 시카고 트리뷴만 더 부각된 측면도 있다.

3.5. 대통령 제2임기(1949.1.~1953.1.)[편집]

나는 가 대통령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아서 짤랐다. 그가 멍청한 개새끼라서 짜른게 아니다. 물론 그가 그렇긴 했는데, 그게 불법은 아니니까. 만약 그게 불법이었으면, 장군들의 절반 혹은 3/4 정도는 다 감옥에 있어야 할 것이다. (I fired him because he wouldn't respect the authority of the president. I didn't fire him because he was a dumb son a bitch. Although he was, but that’s not against the laws for generals. If it was, half to three-quarters of them would be in jail.)
- 1973년 12월 3일 타임지 기사 중 트루먼이 1960년에 했다는 발언을 인용하며

트루먼의 대통령 제2임기에서 가장 중요했던 외교적 사건은 역시 6.25 전쟁일 것이다. 그리고 밀리터리 쪽에선 이때 벌어진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원수와의 마찰 일화도 나름 유명하다. 애시당초 둘은 성격이나 정치사상부터가 달랐는데, 거기에 트루먼은 군인인데 쇼맨십이 강한 맥아더의 행동을 무척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대통령 말 안 듣고 혼자 설쳐대는 맥아더를 보고 누가 대통령인지 모르겠다고 혀를 찼을 정도니... 그래도 군사적 능력을 인정해서 딱히 제재를 가하려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1950년 10월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6.25 전쟁 개입으로 맥아더가 "이 필요합니다"라고 하자 트루먼은 "이 자식 안 되겠어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그냥 핵 한 발이 아니라, 만주중국 본토, 한반도에 수십 여발...[19] 정신나갔나 싶기도 할테지만, 맥아더의 구상은 한반도 부근을 핵지대로 초토화시켜서 방사능 지역을 만들어 아예 중공군이 넘어올 생각도 못하게 하자는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핵 맞고 희생될 수많은 사람들과 거주지가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반평생 떠돌아다닐 민간인들 생각하면 맥아더가 너무 막 나간 측면이 있는건 사실이지만...[20][21] 사실 이 당시 사령관 맥아더의 진짜 핵심적인 문제는 중공군을 과소평가하다 밀릴 것 같으니 핵만 부르짖은, 즉 핵 외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전략 부재였다고 볼 수 있다.

하여튼 이런 맥아더를 보자 트루먼은 평소의 악감정에 더해 또다시 세계대전이 발발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꼈고[22] 결국 맥아더를 해임, 매튜 B. 리지웨이 중장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트루먼은 단순한 서방세계의 구원자가 아니라 좁게는 자국민을, 좀 더 넒게는 한반도를 파멸의 위협에서 구해낸 숨은 공로자라고 볼 수도 있다. 2차 세계대전의 종지부를 찍은 것과 6.25 전쟁의 개입으로 한국의 현대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여담으로 미국에서는 6.25 전쟁을 '트루먼의 전쟁(Truman's war)'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외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가 트루먼의 두 번째 임기에 발족했다.

3.5.1. 해군과의 불화[편집]

2차 대전이 끝난 후, 그의 친공군적 성향[23] 때문에 타군, 특히 해군이 두려움에 떨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실제 미국 국방부는 전쟁부(육군부)/해군부로 나뉜 것을 통솔하는 '부 위의 부'로서 창설되었는데, 초대 장관이 해군장관 출신 제임스 포레스탈이긴 했지만 별로 쓸모가 없었다. 되려 트루먼의 공군 위주 성향과 타군에서 "왜 미군은 해군에만 그렇게 돈을 퍼부어대냐"고 징징대는 영향으로 인해 극단적으로는 "어차피 2차 대전 만큼 무식한 전쟁이 나지도 않을텐데 해군 예산 확 줄여도 되지 않을까?"[24][25]라는 의견까지 나올 정도였다. 애초에 포레스탈 장관은 해군장관 시절부터 육군/해군부를 통합하는 안에 기겁하던 것을 초대 국방장관으로 내정하여 겨우 진정시켰던 것이고, 트루먼이 하도 공군을 좋아하며 해군을 등한시하자 1948년 대선에서 제임스 듀이 공화당 대선후보와 비밀리에 짝짜꿍을 했다가 선거 몇주 전 그 일이 들통나서 트루먼이 재선 후 2기 내각을 구성할 때 해임해버렸다.(...)

제2대 루이스 존슨 국방장관은 육군 예비역 법무대위 출신으로, 트루먼의 성격에 딱 맞는 성향의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가 해군이 핵무기 운용이 가능한 크고 아름다운 폭격기를 운용하기 위해 기획했던 초거대 항공모함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함을 건조 시작 5일만에 취소시켜버리자, 급기야 참고 참아왔던 해군 제독들이 폭발하고 만다. 오늘날에도 제독들의 반란으로 회자되고 있는 사건으로, 존 설리번 해군장관과 해군참모총장이던 해군대장 루이스 덴펠드 제독, 해군소장 알레이 버크 제독 등 수많은 제독들이 불명예 제대까지 각오하고 국방부에 항명했으며, 5월에는 포레스탈 前 장관이 베데스다 해군병원에서 투신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26] 그러자 존슨 장관은 해군에게 염장지르듯이 "앞으로 상륙작전 같은거 없을거니 해병대 필요 없다. 해군이 할 일은 공군이 하면 되니까 해군도 필요 없다." 같은 말을 해버렸다. 참고로 1949년은 소련이 핵개발에 성공한 게 하반기에 세계에 알려지자 핵무기 무턱대고 쓰다간 인류멸망이 온다는 공포 속에 재래식 무기의 중요성이 다시 조명되던 참이었고 루이스 존슨 장관이 저 말을 한건 12월이었다.[27]

사태가 악화되던 1950년 6월 말에 6.25 전쟁이 벌어졌고, 미군이 참전하여 해군인천 상륙작전으로 대표되는 해병대, 그리고 무엇보다 해군/해병 항공대의 맹활약을 통해 그런 해군 무용론은 사그라들었지만 오랫동안 이들의 갈등은 남아있었고, 베트남 전쟁 등을 거쳐서야 그 갈등이 조금씩 중화되었다. 당연하지만 소련의 핵개발이니 6.25 전쟁이니 하는 마당에 집안싸움까지 벌어지자 트루먼은 국방부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존슨 장관의 후임으로 육군원수 조지 C. 마셜 장군을 임명하는 초강수를 두어야 했다. 물론 마셜 장군이 현역 군인 신분[28]으로 국무장관에 재직하며 마셜 플랜을 실행했던 경력이 있고, 국방부와 군부에서 명망이 높은 먼치킨이기는 했지만, 일각에선 문민통제를 위반하는 인선이라고 비판도 나왔다. 하지만 국방부가 더욱 혼란해질 것을 걱정한 상원에서 마셜 장군의 국방장관 임명을 특례로 승인했다.

마셜 장군은 건강 문제로 짧게 재임하고 물러나긴 했지만 6.25 전쟁과 역시 육군 원수 출신인 아이젠하워 장군의 백악관행이 겹치며 마찰은 점점 중화되었고, 오늘날 미 국방부는 예산 편성만 보면 여전히 해방부이긴 하지만 각 군별로 균형은 비교적 잘 맞게 배정되어 있으며 협력체계도 유기적으로 돌아간다.

훗날 니미츠급 항공모함 8번함 CVN-75가 이 대통령의 이름을 땄는데, 하필이면 이 배의 원래 이름이 바로 취소시킨 항모 이름과 같은 유나이티드 스테이츠.[29] 그래서 미 해군에서는 한때 '트루먼이 유나이티드 스테이츠를 두 번 죽였다'고 수근거리기도 했다고 한다.

4. 평가[편집]

4.1. 서방세계의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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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2월 촬영된 사진.

미국 대통령 인기 순위 조사나 업적 평가를 하면 보통은 10위권 내에 들며 우수한 대통령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순위에서는 5위에서 9위 사이를 오르내리고 있으며, 평균 7위로,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대통령이다. 2017년 CBS에서 91명의 역사학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6위로 순위가 책정되기도 했다.#

전임자 루스벨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지도자로서의 자질이나 지도력을 검증받지 못한 채 갑작스레 대통령이 되었지만, 대통령 자리에 오른 후 제2차 세계대전 종결과 전후 질서 확립, 그리고 뒤이어 나타난 소련 공산주의의 공격적인 팽창에 대응하여 냉철한 판단력으로 여러 중요한 결정을 내리면서 침착하게 세계 질서를 이끌었고, 냉전과 6.25 전쟁을 주도하면서 미국의 국제적 위상을 세계의 지도국가로 굳힌 점이 높이 평가받고 있다. 특히 냉전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고 소련이 스스로 무너진 이후 트루먼의 정책이 냉전의 평화로운 종결과 냉전 후 미국의 헤게모니에 큰 기여를 했다는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다만 재임 당시엔 그런 업적들이 묻히는 경향이 있었고, 언변이 정치인치고 능숙한 편도 아니라서 재선을 위한 선거유세를 할 때에는 야유를 받는 굴욕까지 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기차를 타고 소도시, 지역 마을을 돌았다. 서유럽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유럽에 거의 돈을 퍼붓다시피 한 마셜 플랜은 지금은 냉전을 승리로 이끈 결정적 장면 중 하나로 교과서에서도 제법 거론되지만 이때만 해도 서유럽 돈 퍼주기라고 욕도 많이 먹었다. 퇴임 후 고향 미주리로 돌아갈 때도 굳이 뒤에서 욕설을 퍼부은 안티들도 있었다고 하니.. 그가 3선에 나서지 않고 한달반 일찍 퇴임한 것도 어찌보면 납득이 가는 대목이다.[30]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면, 정직하고 성실한 태도나 위에 나온 그의 좌우명인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에 따른 강건한 책임의식은 그가 높이 평가받는 요인 중 하나. '재임 중엔 욕을 꽤 먹었지만 퇴임 후 재평가받은' 전형적인 케이스. 그의 미들네임 S를 따서 3S라고도 한다. Stubbornness(고집), Sympathy(동정심), Stoicism(인내[31]).

영국의 윈스턴 처칠도 그를 좋아했으며 철의 장막도 처칠이 트루먼의 모교(인디펜던스 고등학교[32])를 찾아가서 한 연설에서 나온 말이다.[33] 처칠은 처음에는 FDR 대신 대통령이 된 그를 얕잡아보고 못 미더워했으나 나중에는 "다른 누구보다도 서구 문명을 지켜내는데 공을 세웠다"며 트루먼을 극찬했다. 또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도 처음에는 프랭클린 루스벨트만큼 트루먼이 중국에 관심을 줄지 우려했지만 나중에 가선 그의 기질을 평가한다.

CNN래리 킹은 그를 "매혹적인 언변가는 아니었지만, 자신을 정확히 표현할 줄 알았던 탁월한 커뮤니케이터"라고 평가했고, 트루먼 정부의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트루먼에게는 리더의 최대 걸림돌인 교만이 없었다. 그와 그의 일 사이에는 한 번도 사적인 자존심이 끼어든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1972년 12월에 그가 88세로 사망했을 때 칼럼리스트 메리 맥그로리는 트루먼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영웅도 예술가도 체스 선수도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솔직하고 실수도 하고 어떨 때는 예기치 않은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인간 그 자체였다. 그는 평범한 미국인이 위대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는 대통령도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4.2. 한국 내의 평가[편집]

사실 트루먼은 일제에 윈자폭탄을 투하하고, 한국전쟁에 파병을 결정해 준 한국사에 매우 중요한 대통령임에도 맥아더에 묻혀서인지 생각보다 인지도는 낮은 편이다. 하지만 아는 사람들은 그가 한국전쟁에 미군을 파병시켜줘 고마움을 느끼는게 보통이다. 다만 이런 평가가 대세가 된 1990년대 이후와 달리 이전엔 좌우 진영 모두에서 일부 불만섞인 목소리도 듣던 대통령이었다.

요는 좌에서는 공산권의 확산을 막는 과정에서 펼쳐진 민족운동 탄압 이미지로 욕을 먹었고, 우도 김일성을 자극한 애치슨 라인 설정과 맥아더의 주장대로 산둥반도와 만주에 핵을 쐈으면 6.25 전쟁을 북진통일로 마무리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희망고문이 섞인 비난이 자주 들리던 레퍼토리였다. 심지어 맥아더가 6.25에서 승리하면 맥아더의 인기가 높아져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그에게 패배할 것을 우려해 맥아더를 자르고 본인도 다음 대선에 출마하지 않은 것이라는 원색적인 미국발 음모론까지 있었다.[34]

물론 이때도 절대다수에게 비난받던 정도는 아니었고, 교민들 사이에서는 소식을 듣자마자 "개자식들, 당장 파병해!"라면서 미군을 한국에 즉각 파병해준 그를 은인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 트루먼이 사망하자 1972년 12월 28일을 애도일로 선포하고 하루 동안 조기를 게양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 그의 성 트루먼(Truman=True+Man)을 한역하여, 정감록에 나오는 바다를 건너와 백성들을 구하는 진인(眞人)이 바로 이 사람이라는 드립성 주장도 있었을 정도.

파병 당시 정확한 인용은 다음의 대목으로, 군통수권자로서 의회 승인과 관계 없이 미군을 파병했다.
“이 곳은 극동의 그리스다. 우리가 강경한 조치를 취해야 다음 단계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35]
"한국에서 미국의 행동은 악당들의 기습(Bunch of bandits)을 유엔이 격퇴시키는 것을 도우려고 취해진 것"

채명신 장군의 회고에 따르면, 채명신은 퇴임 후의 트루먼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채명신과의 만남에서 트루먼은 손수 커피를 끓여주며 채명신을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채명신이 한국민과 한국군의 일원으로서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의사를 전하자 본인 역시 승전군인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받으면서 당시 백악관의 상황과 결정이 상세히 기록된 자신의 일기를 직접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수첩에는 본인이 군통수권자의 직권으로 미군을 파병한 흔적이 부대별로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고는 문득 채명신에게 "내가 맥아더를 경질한 것을 한국인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한국인들의 생각을 여과없이 듣고 싶군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채명신은 당시 트루먼과 맥아더의 정치적 관계[36]를 고려해서 “한국민들은 맥아더의 해임 이유를 모르고 그가 그저 인천상륙작전을 이끈 훌륭한 장군이라 믿지만 저는 압록강 전선에서의 후퇴에 분명 맥아더의 판단 착오[37]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하였고, 공과 과에 대한 평가를 적절히 섞은 채명신의 답변을 들은 트루먼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실 그의 화려한 명성 뒤엔 작전상 중대한 과오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정치가로서의 본분에 충실했던 트루먼은 궁극적인 목표[38]의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관철을 위해 당시 상황의 균형[39]을 먼저 선택하는,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원론적인 육참골단의 전략을 내세운 것이다.

종종 극단적 매카시스트라고 불릴 정도로 이데올로기에 충실했던 군인 맥아더는 극동에서의 확전을 불사하고도 공산주의 사상의 궤멸을 목표로 삼아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고 판단한 반면, 트루먼은 이념적, 외교적 이해관계를 연결적으로 분석하는 정치가적인 성향을 토대로 제한전쟁의 성격을 가지는 전쟁은 시작된 곳에서 결론을 맺어야 하고, 재확전과 경쟁적 핵무장이 이루어지기 전에 얼른 전쟁을 종결지어야 국제정치적으로도, 이데올로기적 균형을 위해서도 안전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국내에서는 1990년대부터 여러 연구를 통해 이러한 업적이 재평가되어 이제는 한국전쟁에 참전을 결정한 은인으로 점차 알려지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맥아더의 여러 전략적 전술적인 실수[40]와 지나친 확증편향[41]이 다방면에서 객관적으로 연구되는 측면도 있고 냉전 초기의 트루먼의 전략적 결정이 가지는 국제정치적 가치가 평가되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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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시 임진각에 트루먼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한국에 현존하는 유일한 외국 국가원수 동상이다. 맥아더 동상도 논란이 되는 와중에 트루먼의 동상이 논란이 되지 않는 이유는 강경파의 경우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군의 남한 파병을 최종승인한 미국 대통령'이라는 점을, 온건파의 경우 맥아더를 경질해서 핵전쟁을 막은 점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정치 성향이 어찌되었든 확실하게 인정할만한 업적이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맥아더만큼 논란이 되지 않는 것이다.

4.3. 일본 내의 평가[편집]

트루먼을 향한 일본의 평가는 참으로 묘하다. 일본 우익들에겐 그들 기준 위대하던 일제를 패망시키고 신성시하던 천황까지 그저 상징적인 존재로 권한을 완전히 끌어내린 불구대천의 원수 수준이고, 좌익들에게도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원자폭탄이라는 희대의 수단을 사용하여 일본 열도를 뒤흔들고 많은 인명을 살상한 원흉으로 평가되는 측면이 있다. 거기에 더해 일본 미군정을 통해서 전후 일본에 제재를 가한 대통령이라고 싫어하기도 한다.[42]일본군 입장에서도 보면 국방군을 현재의 방위급 자위대로 격하시킨 주요 인사로 지목되는 편.

그러나 사실 트루먼이 마음만 먹었으면 몰락 작전을 강행해서 일본을 지구상에서 완전히 지워버릴 수도 있었을 테니, 일본인들 입장에선 원자폭탄 투하 정도로나마 감지덕지해야 할지도 모른다.[43] 게다가 일본이 간과하는 사실 중 하나는 트루먼이 한국전쟁에 참전을 결정한 덕분에 일본이 경제부활을 이뤄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초기 맥아더가 이끈 일본 미군정의 정책 방향은 일본이 다시 군사강국이 되지 못하게 농업 위주의 중립국가로 전환하는 것이었는데, 한국전쟁이 터지고 미군이 상당수 군수물자를 일본에서 발주한 덕분에 이 계획은 전면 수정되고 무너진 일본 경제도 다시 부상할 수 있었던 것. 무엇보다도 먼저 선빵을 날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국가가 어느 나라이며 미국이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는지[44] 생각해 보면 일본의 피해자 행세라는 시선을 거두기 어렵다.

4.4. 대만 내의 평가[편집]

대만에서의 평가 역시 긍정적이다. 당시 중국의 마오쩌둥은 대만을 끝장낼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 대만상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터지며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자, 트루먼은 많은 각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만 해협에 미 제 7함대 소속의 항모전단을 파견해 중국의 대만 상륙을 저지시켰다. 게다가 대만에 대한 경제적ㆍ군사적 지원, 그리고 미군을 주둔시키며 대만에 대한 중국의 야욕을 차단시켰다. 오늘날 대만-미국의 관계를 만든 사람이다.

4.5. 당시 공산진영의 평가[편집]

북한의 입장에서는 김일성과 간접적으로 대적한 원흉이자 6.25 전쟁 때 UN군을 파병하여 자신들의 남침을 좌절시킨 원흉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동시에 남한 및 한반도 전체 공산화를 방해하고 좌절시킨 원흉으로도 평가한다. 무엇보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현재까지도 분단의 원흉으로 부르는 철천지 원쑤 미제의 대통령이기도 하였기에.. 하지만 1949년 남한에 있는 주한미군 일부를 본국으로 철수시켰을 때는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미국군이라는 골칫거리가 없어지면 남침을 하기 더 쉽기에 어찌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당시 소련이었던 러시아에서도 평가가 그리 좋지는 않다. 종전 직전까지만 했어도 소련의 수장이었던 이오시프 스탈린과 머리를 맞대고 추축국 소탕에 협력하기도 하였으나, 사실 트루먼 자체가 스탈린에 그닥 호의적인 인물은 아니라서 종전 이후 냉전기가 오고 한반도 문제까지 겹치면서 여러모로 소련과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했기 때문.

중국의 입장에서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및 마오쩌둥 정권 수립 이후 1950년 6.25 전쟁 때 중국군 인해전술을 무력화한 계기로 한동안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의외로 많은 중국인들은 그를 과거 중화민국 시절 2차 세계대전에서 같은 연합국으로써 추축국 일본을 무찌른 영웅 동료 정도로 생각하고 있으며, 특히 해리 트루먼이 일본원자폭탄을 투하한 것을 두고 워누(왜노)들의 자존심을 완전히 꺾어버린 대통령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심지어 일본 열도를 아예 지구상에서 없애버리는 몰락 작전이 진짜로 실행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아쉬워하는 중국내 극단주의자들도 있다.(...) 중국내 반미 감정과는 별개로 트루먼에 대해서는 이례적으로 호평하는 기류가 있다.[45]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당선 여부
비고
1934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787,110 (59.55%)
당선 (1위)
초선
1940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930,775 (51.17%)
당선 (1위)
재선
1944
25,612,916 (53.39%, 432명)
당선 (1위)
초선[47]
1948
24,179,347 (49.55%, 303명)
당선 (1위)
재선

6. 어록[편집]

"딘, 우리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 개자식들을 막아야 하오. 그게 전부입니다."
“Dean, we’ve got to stop the sons of bitches, no matter what, and that’s all there is to it.”

7. 기타[편집]

  • 파일:external/media.liveauctiongroup.net/10836962_1.jpg
    로렌 바콜과 피아노를 치는 트루먼.
    의외로 피아노가 취미였다. 실력도 제법 괜찮았던 듯. 트루먼이 부통령 시절 유명한 할리우드 여배우인 로렌 바콜이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그녀를 피아노 위에 앉혀 놓고 피아노를 치는 위 사진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 사진을 본 트루먼의 친구이자 동료가 "자네 혹시 그 사진보고 부인이 뭐라고 안하네?"라고 묻자 트루먼은 "아내가 '당신 피아노를 치는 거예요? 아니면 그 여자랑 노는 거예요?'라고 묻던데?"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영어로는 (피아노 등을) 연주하는 거나 노는 거나 둘 다 to play다. 이를 이용해 트루먼이 말장난을 한 것이다.
  • 소꿉친구결혼해서 백년해로한 인물인데 영부인 베스 트루먼을 6세 때 교회에서 처음 만났다고 하며 그 이후 고등학교에 가서 사귀었는데 둘의 결혼은 트루먼이 그럭저럭 안정을 찾은 1919년(35세)에야 이루어졌다. 결혼 전인 1910년부터 1959년까지 부부는 매번 편지를 교환하곤 했는데, 이 편지를 따로 묶은 서간첩인 <Dear Bess>(베스에게)가 따로 책으로 나왔을 정도이다. 이 서간첩은 576페이지에 이른다고 한다. 이 부부 사이에 자녀는 딸인 마거릿뿐이었지만 트루먼이 만난 지 84년만인 1972년 사망할 때까지 글자 그대로 백년해로했다. 베스 트루먼은 남편이 죽은 지 딱 10년 뒤인 1982년 영면했다. 덧붙여 베스 트루먼은 2020년 기준 역대 미국 영부인 중 가장 장수한 영부인이다(97세 247일).
  • 20세기 유일한 또 아직까진 미국 최후의 고졸 대통령인데, 21세기에도 이 기록은 쉽게 깨지진 않을 것 같다.[48]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근대 이후로 미국 대통령들은 거의 다 명문대 출신들이었다.
  • 독서는 죽을 때까지도 즐겨서 은퇴 후 70대에 들어서도 어떤 기자가 트루먼의 자택을 찾자 책이 수북이 쌓여있었으며, 기자가 "대통령님께서는 주무시려고 책들을 읽으시는 겁니까?"라고 묻자 "아니오. 깨어 있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 현역 시절 스트레스가 많아 그랬는지, 개새끼!(Son of a bitch!)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고 한다.[49] 실제 역대 미국 대통령 중 한성깔하기로 손에 꼽히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맥아더를 해임하고 나서도 "난 딱히 맥아더가 멍청한 개새끼라서 해임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가 대통령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아서 그를 해임한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고. 35대 대통령인 존 F. 케네디와 논쟁을 하다가도 이 욕을 사용한 적이 있다. 그 후 케네디는 이렇게 말했다.
    전 트루먼 대통령께서 저에게 개새끼라고 부른 것에 대해 사과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전 제가 개새끼인 것에 대해 사과할 생각입니다.
    또한 케네디가 대통령 선거를 할 무렵 지원유세를 하기도 했는데, 연설하러 온 곳에 공화당원들이 온 것을 보고 별안간 "지옥에나 떨어져라!(Go to hell!)"라고 욕설을 내뱉어서 케네디가 트루먼에게 직접 '자제 좀 해주세염'이라고 편지까지 보내기도 했다. 트루먼은 처음에는 조지프 케네디를 싫어해서 그의 아들인 존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케네디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었다고 한다.
  • 그의 성질머리를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로, 1950년 12월, 워싱턴에서 열린 외동딸 마거릿 트루먼의 공연에 대해 음악평론가 폴 흄은 "노래는 잘 못하며 전문 성악가로 남기는 힘들 것이다"라는 혹평을 내렸다. 그러자 트루먼은 흄에게 다음과 같은 격한 내용의 편지를 썼다.
    "방금 당신(풀 흄)의 형편없는 평론을 봤소. 나는 한 번도 당신을 만난 적 없지만, 만약 만나게 된다면 당신의 새로운 코가 필요할 것이며, 눈에 멍이 들 줄 아시오."
    이 사실을 알게 된 딸 마거릿은 아버지에게 정치적으로 어렵게 될 것이라며 우려했지만 트루먼은 되려 "국민들의 80%는 내 편일 테니 넌 너무 걱정마라"고 여유있게 넘겼다고 한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백악관에 많은 편지가 도착했는데, 트루먼의 장담대로 대부분은 트루먼의 행동을 지지했으며, 특히 여성들한테서 "제 남편도 우리 딸을 대통령님이 하신 것처럼 지켜줬으면 좋겠어요"란 내용이었다고. 혹은 미국인답게 American Bad Ass의 전형인 간지남으로 평가받기도 하고, 서민층에서는 '인간미가 느껴져서 좋다'라는 평가를 내렸다고. 그러나 일국의 대통령이 하기에는 부적합한 행동들 때문에 그의 비판자들은 '도량이 좁고 비천한 인물'로 혹평하기도 했다.
    참고로 딸 마거릿은 그 평론가의 평론처럼 성악가로서는 별 활약을 보이지 못했지만, 훗날 미스터리 작가로 꽤나 성공했다고 한다.[50]
  • 트루먼의 자서전은 오늘날 2차 대전 말기와 냉전에 관한 정책적 결정 연구에 중요 자료 중 하나로 남아있는데, 자서전답지 않게 의외로 진솔하고 호방한 점이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그가 그렇게 싫어했던 맥아더에 대해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이다.
  • 많이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암살 위기를 겪기도 했었다. 1950년 푸에르토리코의 민족주의자인 오스카 코아조와 그라젤리오 트레솔라에게 워싱턴의 블레어하우스[51]에서 암살당할 뻔했으나 경호원들의 대응으로 토레솔라는 사살되고 코아조는 체포되었다. 다음 날 어떤 기자가 트루먼에게 "만일 대통령님께서 암살범들과 맞닥뜨렸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란 질문을 던지자 트루먼은 주저없이 "그 자의 손에서 총을 빼앗아 목구멍에 처박은 후 방아쇠를 당길 거요(I would have taken the gun from him, shoved it up his gullet and pulled the trigger.)."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체포된 코아조는 1979년 지미 카터 대통령에 의해 사면되었고 이후 푸에르토리코에서 1994년 80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 "당신 이웃이 일자리를 잃으면 불황이고, 당신이 일자리를 잃으면 공황이다."(It's a recession when your neighbor loses his job; it's a depression when you lose yours)라는 말을 한 대통령으로도 나름 유명하다. 정작 한국에서는 레이건의 어록으로 아는 사람도 있는데, 트루먼이 원조다. 레이건은 선거운동 중에 트루먼의 이 말에 정적 카터를 까는 표현을 추가했을 뿐이다.
  • KKK 멤버였던 적도 있었는데, 본인 스스로도 이 사실을 상당히 부끄러워 했다고 한다. 본인 말로는 1924년에 미주리주 잭슨 카운티의 판사 재선에 성공하게 되면서, 당시 잭슨 카운티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KKK의 제안을 받아 한 번 참석했던 적이 있다고 한다. 일단 10달러를 주고 가입했다고는 하나, 공개적으로 활동하진 않았다고 하며, 본인 스스로 당시 이야기를 말하는걸 꺼렸다고 한다. 이후 인종차별 철폐를 위해 노력한 대통령이라 더 묘한 부분.
  • 부통령이 되기 전에는 "백인 하딩'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부정부패에 연루되었다는 의혹 때문인데, 하딩의 one drop rule에 따르면 흑인인 연고로 인해 저런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근데 하딩 흑인설도 이미 망한 떡밥이라..
  •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베트남호치민으로부터 "독립 후 당신들과 친구가 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고 한다. 허나 당시 호치민은 트루먼에게 낯선 인사라 트루먼은 크게 신경쓰진 않았다고 한다.
  • 대통령 재임 시절 예산위원장을 만나면 늘 직접 나와서 악수로 맞아주었다. 그래서 "늘 뵙는건데 이렇게 직접 나오셔서 악수로 맞아주실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예산위원장이 말하자 트루먼 대통령 왈, "아니오, 언론을 모르셔서 그런데 내가 이렇게 나와서 맞아주지 않으면 신문에 '대통령이 예산위원장에게 화났다'라고 나올 거요."
  • 후임자인 아이젠하워에 대해서는 그가 당선되기 전에 “아이젠하워는 이 자리에 앉을 거야. 그리고 이렇게 말하겠지. 이걸 해라! 저걸 해라!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라고 단언했다고 한다.[52]
  • 리처드 닉슨에 대해서도 평가한 적이 있었는데, (트루먼이 강탈하였던 오키나와1972년 사토 에이사쿠에게 반환하였다는) 닉슨을 뽑는 인간은 지옥에나 떨어지라고 공개적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이후 닉슨이 재기하여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고 가는데 후일..
  • 대통령 재임 당시 백악관에서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겪기도 했다. 화장실 다녀온 사이에 만년필이 엉뚱한 곳으로 가있거나, 잠을 자려고 할때 옆에서 사람이 혼잣말 하는게 들린다던가, 에이브러햄 링컨 귀신을 마주쳤다던가 하는 일이 일어났는데 한성깔 하시는 분 답게 백악관 내부를 모두 불도저로 밀어버렸고, 그후에는 귀신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53] 사실 과학적으로 귀신 이야기가 말이 안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백악관의 보수공사를 위한 예산을 타내려고 귀신 이야기를 꺼냈을 가능성이 크다. 그냥 다짜고짜 보수공사 얘기를 꺼낸다면 치적 쌓기용 혈세낭비 운운하는 소리가 나왔을 테니까, 귀신 핑계를 댄 것이다. 2층에 놓아둔 피아노 다리가 바닥을 뚫고 1층 천장에 삐죽이 나왔을 정도였으니, 폴터가이스트 핑계로 일부를 밀어내고 재건하지 않았다면, 백악관 전체가 무너지는 참사가 났을지도 모른다. 이 때 백악관은 외벽만 남기고 내부는 싸그리 철거한 뒤, 철근 콘크리트로 다시 만들었다.

8. 대중매체에서의 트루먼[편집]

  • 데이빗 맥클로우(HBO에서 방영된 미니시리즈 <존 애덤스>의 원작자)가 쓴 트루먼 전기는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전기를 원작으로 게리 시나이즈[54] 주연으로 TV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포스터 오른쪽 밑부분은 항목 상단에도 있는 트루먼이 시카고트리뷴의 오보를 들고 있는 모습을 재현해 낸 것.
  • 1977년 더글라스 맥아더의 전기영화 <맥아더>에서는, 6.25 전쟁의 수행 방식을 둘러싸고 맥아더(그레고리 펙)와 대립하는 모습이 부각되어 나온다. 이건 실제 역사이긴 하지만, 영화의 주인공이 맥아더인 관계로 트루먼은 맥아더의 승리에 열폭하거나 사사건건 발목잡는 인물처럼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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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50주년을 맞아 일본, 캐나다가 공동 제작한 TV영화 <히로시마>에서는 케네스 웰시가 트루먼 역을 맡아 매우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주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갑작스런 사망 직후 대통령직을 승계하고, 이후 원자폭탄 투하에 이르는 과정을 잘 재현한 작품.
  • 스웨덴 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선 주인공인 알란 엠마누엘 칼손과도 친분을 쌓는다. 영화 버전에도 당연히 등장하는데 실제 나이보다 좀 젊은 인상에 뭐랄까 좀 허영에 찬 인간으로 등장한다. 하원 의원이 아니라 칼손과 술을 마시다가 루스벨트의 죽음을 듣고 칼손에게 미합중국 대통령에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라며 자신의 라이터를 주곤 퇴장하는데 원작 소설에서의 후일의 행보는 다 편집됐다. 영화 버전 자체가 소설에 비해서는 고증을 많이 포기한 부분이 많아서..
  • 앤디 앤드루스가 쓴 "우화의 탈을 쓴 자기계발서"인 <폰더 씨의 위대한 하루>에서 천사장, 링컨 대통령, 솔로몬 왕보다 더 먼저 등장한 트루먼은, 주인공이자 60년 뒤의 미래에서 타임슬립해 온 40대 백수인 데이비드 폰더에게 자기의 좌우명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55]에 바탕한 충고를 해주어 책임감을 북돋워준다.
  • 퓨처라마에서 머리가 아니라 몸이 나온 몇 안 되는 미국 대통령 중 하나인데 로스웰에서 어떤 외계인이 발견되자[56] 이 외계인을 51구역으로 보내고, 때문에 거기서 찍던 달착륙 조작영상을 못찍게 되자 NASA를 만들고 진짜로 달에 사람을 보내라고 지시한다. 이후 조이드버그를 구출하러 온 프라이와 릴라를 보고 루즈벨트의 유령 맙소사를 외치며 기겁한다. 게다가 구출 과정에서 조이드버그의 방광을 얼굴에 맞는 굴욕을 당한다.
  • 나치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대체역사게임 울펜슈타인 시리즈에서는 마지막 미국 대통령으로 등장한다. 신문기사에서 더는 인명피해를 초래할 수 없어서 항복했다고 한다. 생사는 불분명하나 로스웰 UFO 추락사건이 패색이 짙은 연합국을 돕기 위해 다트 이슈드라는 비밀결사 집단에서 미국측에 기술을 전수해주려는 눈속임으로 보아 정황상 미국 저항군측 지도자가 이 사람으로 추정된다. 최신작 뉴 콜로서스 기준 미국이 나치에게서 해방된 만큼 고전시간대의 FDR 포지션을 트루먼이 이어받을 듯 하다.
  • 아버지의 깃발에 등장한다. 아이라 헤이즈, 존 브래들리, 레니 개그넌과 악수를 나누며 모금 활동을 독려한다. 배우[57]가 꽤 싱크로율이 좋은 편이다. 캐스팅을 제법 잘한 편.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팻-맨' 움짤에서 성부 포지션에 해당한다.[59]

9. 관련 문서[편집]

[1] 그전과 같다면 그의 임기는 한달 보름 뒤인 3월 4일에 끝나야 했다. 그러나 그의 임기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이는 1933년 2월 6일에 발효된 수정헌법 20조에 따라 조지 워싱턴이 퇴임 이래(1797~1933) 136년간 계속 같은 날(3월 4일)로 유지되던 대통령, 부통령의 취임식은 이로서 모두 1월 20일 정오가 되면서 그도 마찬가지로 부통령 취임을 1월 20일에 했기 때문이다. 존 낸스 가너가 수정헌법 20조에 따라 1941년 1월 20일 퇴임하면서 루스벨트의 2, 3선 러닝메이트 헨리 A. 월리스와 트루먼 모두는 1월 20일에 취임하고, 퇴임했다. 즉, 트루먼 이후로 모든 미국 대통령들은 1월 20일에 취임과 퇴임을 하게 되었다.[2] 현재 명칭은 William Chrisman High School.[3] Spalding's Commercial College.[4]미주리 대학교 캔자스시티 캠퍼스 법학대학원,[5] 젊은 시절의 키는 175cm[6] 직역하면 “모든 책임은 여기(집무실 책상)에서 멈춘다.”. 트루먼의 좌우명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소설이나 영화에서도 자주 인용되는 표현이다.[7] 이런 식으로 알파벳 한 글자를 그대로 미들네임으로 하는 건 스카치 아이리시(아일랜드 섬의 얼스터(영국의 일부로 남아 있는 북아일랜드 및 그 주변 지역)에 정착한 스코틀랜드계 주민. 현재도 북아일랜드의 개신교도들 상당수가 스코틀랜드에서 이주한 사람의 후손이다. 이들 중 일부가 다시 미국에 이주해서 상당수가 정착돼 있는데 이들을 Scotch-Irish American이라고 한다. 해리 트루먼도 Scotch-Irish American이다. 참고로 스카치 아이리시라는 표현은 영국과 아일랜드에서는 구닥다리 표현이라 쓰이지 않고 대신 Ulster Scots라고 부른다. 현대 영국과 아일랜드에서는 Scotch를 스코틀랜드와 관계된 먹을거리에 한정해서 쓰는 경우가 많고 스코틀랜드계 사람을 가리키는 경우는 드물어졌다. 반면 미국에서는 옛 용법이 남아 Scot(s)나 Scottish와 동일한 의미로 쓰는 경우가 아직도 많다) 사이에 흔한 관행이라고 한다.[8] 물론 미국의 거의 모든 대통령은 한번씩 안경을 써본 경력이 있다. 하지만 대중적 공식 이미지로서 쓴 이미지가 남은 대통령은 윌슨과 트루먼 정도. 거기에 더 더해도 의 루즈벨트 정도 뿐이다. 참고로 안경은 1500년대(16세기)에 나타났다.[9] 심지어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존 F 케네디가 군대에 갈 수 없는데도 가문빨미합중국 해군장교로 입대했다. 단, 이때는 분위기가 제1차 세계대전과는 좀 달랐다.[10] 이후 법대 야간 코스를 시작했지만 중도에 포기했다.[11] 실제로 트루먼은 재임기간 뉴딜을 한층 강화한 "페어 딜(Fair deal)"로 사회보장정책과 완전고용을 완수하였다.[12] 흥미로운 건 월리스는 전시 각료감이었는지 맨하탄 프로젝트에 깊게 관여했고, 또 민주당 내에서 대단히 진보적이었으며 소련에도 가장 우호적인 정치인이었다. 이 때문에 냉전기에 월리스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냉전의 불안감이 줄어들었을 것이란 옹호론과, 미국이 소련에게 끌려다니는 호구가 되었을 것이라는 비판론이 있다.[13] 요나스 요나손의 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서 이 일화에 관한 에피소드가 있다.[14] 크게 유럽 전선과 태평양 전선의 전후 처리만 봐도 알 수 있다.[15] 앨라배마,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사우스캐롤라이나, 그 외 테네시에서 불충실한 선거인단 1명이 나왔다,[16] 사실 FDR 시기도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 등이 이쪽으로 유명세를 떨치긴 했지만, 뉴딜 시기 민권운동은 노동 분야가 더 돋보였다.[17] 사실 저 때 공화당 역시 아이젠하워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려 시도했었다. 정치 성향과는 상관없이 저 당시에는 아직 아이젠하워가 정계 진출 의지가 없었다는 이야기.[18] 여론조사와 별도로 선거인단 제도에서도 트루먼은 우세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다수의 언론은 듀이의 승리를 예측했다. 트루먼은 전국적으로는 듀이보다 4.5%를 더 득표했지만, 78석이 걸린 오하이오, 일리노이, 캘리포니아에서 1%도 안되는 격차로 간신히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캘리포니아에서는 월리스가 유독 4.7%를 득표한 상황이었다. 이 세 주의 격차였던 2만9천표만 뒤바뀌었어도 대선은 전혀 다른 결과로 끝났을 것이다.[19] 정확하게 만주에 20여발, 압록강 이남에서 충주를 섹터로 하는 지역에 12발으로 총 32발, 그외 한반도 동서해안 전체에 반감기 50~100년에 이르는 방사성 코발트로 도배하는 계획이었다.[20] 말 그대로 전후 문제는 고려않고 순전히 '이기기 위한' 계획이였던 것. 이 계획이 합리적인가 아닌가는 미국을 대입해보면 간단하다. 적 막겠답시고 미국 국경선 일대를 모조리 핵 투하한다면 당시 미국인들은 가만있었을까..?[21] 다만 당시까지만 해도 방사능 피폭에 대해 잘 알려져있지는 않았다. [22] 맥아더의 주장대로 핵을 투하시켰다면 이미 진영 대결 양상이 되어버린 한국전쟁은 그 규모가 커져 바로 제3차 세계대전 발발로 갔을 확률도 높았다. 게다가 당시는 이미 소련도 핵개발 성공했다고 큰소리치던 상태라 3차 세계대전 나면 지구가 두쪽날 각오를 해야 될 판국이었다.[23] 미 공군은 1947년 육군 항공대가 독립하여 창설되었다.[24] 일본은 망했고, 영국은 쇠퇴한데다 동맹국이고, 러시아해군력이란 볼품 없으니.[25] 당시 미 해군 예산만으로 타국가의 모든 국방비를 합한 것보다 많았는데 그 유지비용이 어마어마해서다. 지금도 공군과 육군 예산을 더해도 해군이 더 쓴다.[26] 이후 포레스탈 장관의 헌신을 기리고 명복을 비는 차원에서 포레스탈급 항공모함이 명명되었다.[27] 물론 타당성 여부를 떠나 항모 안만들어준다고 항명까지 해대는 해군 자체의 기를 죽이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28] 미군의 각군 원수 계급 진급자는 종신 복무가 보장된다. 이 때문에 트루먼의 후임 대통령인 육군원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도 출마 후 전역, 대통령 퇴임 후 예비역 재소집이라는 방식으로 대통령에 재직했다.[29] 대통령이나 유명 인사의 이름을 붙이자는 정책 때문에 개명당했다고. 참고로 이 '유나이티드 스테이츠'라는 이름은 1대함을 빼고는 모조리 저런 식으로 취소당하는 비운을 맞았다.[30] 트루먼의 재임시기에 대통령의 3선 금지 조항이 헌법에 성문화되었으나 현직 대통령인 트루먼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조항이었기 때문에 3선 도전이 원칙적으로는 가능했다. 현재도 이건 마찬가지라 2선까지 해야 하는데 1선만 하고 물러났으면(혹은 재선에 실패했다면) 정치판 속성상 현실적으로 어려울 뿐이지, 이론적으론 나중에 다시 도전해서 한번 더 할 수 있긴 하다.[31] 스토아 철학이란 의미인데, 흔히 극기, 인내로 번역된다.[32] 현재로는 윌리엄 크리스맨 고등학교.[33] 철의 장막 항목에 있는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 연단에서 연설하는 처칠 뒤에 트루먼이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34] 수정헌법에서 3선 금지 조항이 나온 게 1951년이라 트루먼이 원했다면 3선에 나설 수도 있었지만 나가지 않았다. 실제 맥아더가 대선에 관심이 있었는지와는 별개로 대신 나온게 또다른 전쟁영웅 아이젠하워라 별 반향은 없었지만.[35] 즉, 제3차 세계 대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곳이므로 미리 막는다는 뜻이다.[36] 당시의 결정을 두고 그의 정치적 라이벌로 성장한 맥아더를 제거하려는 방편이었다는 비난도 있었다.[37] 중공군을 향한 지나친 과소평가, 원폭 투하 이외의 대안 부재 등.[38]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동시에 서방진영의 이익 확보.[39] 공산주의 확산 저지.[40] 예스맨인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의 말만 듣다가 졸전한 사례 등. 다만 알몬드는 미군 입장에서는 똥별이었을지 몰라도 10만명 이상을 살린 흥남 철수의 구세주이다.[41] 군정 당시 본인의 의지에서 비롯된 철저한 한국 권한 배제 등.[42] 웃긴건 정작 그 일본 미군정을 이끈 장본인인 맥아더는 일본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다는 것. 트루먼을 평가절하하기 위해 맥아더를 고의적으로 고평가하는 극단적 보수주의자들도 존재한다.[43] 애초에 원자폭탄 투하 자체가 옥쇄를 각오하던 일본 꼴통 수뇌부들을 자극하기 위한 일종의 위협용 성격도 있긴 했다. 하여튼 덕분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외치면서 전쟁이 더 빨리 끝난건 사실인데, 때문에 당시 일제 시절을 산 사람들도 이 시절을 지독히 싫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왜냐하면 전후 사정이 다 밝혀지면서 이들이 생각했던 일제가 오히려 전범에 가까운 짓을 너무 많이 저지른게 드러났고, 국토도 안전할 거라고 큰소리치더니 현실은 오히려 초토화되었기 때문. 가족들 죽어나가는데 수뇌부들이 이뻐보일리 없다.[44] 사상자 40만여명[45] 만약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하지 않고 일본에 대한 전면 상륙 침공을 실행했다면 연합군뿐만이 아니라 일본군 점령지, 또는 식민지 주민들이 더 많이 희생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며, 이는 원폭 투하가 '최선은 아니어도 차악'이라는 논리의 근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원폭 투하가 역사상의 비극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46] 대통령 후보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47] 1945. 4. 12. 전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병사로 대통령직 승계[48] 19세기의 경우 그로버 클리블랜드가 고졸이다. 흥미롭게도 그 역시 민주당 출신이며 변호사를 땄다. 또 밀러드 필모어가 고졸 출신 대통령인데 트루먼은 그를 신랄하게 깠다. 항목 참조.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시절엔 에이브러햄 링컨처럼 아예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케이스도 있긴 했다.[49] 지금도 심한 욕설이지만 이때 당시는 정말 쌍욕 중의 쌍욕이었다. 이 당시에는 '제기랄!'이라고 번역되는 "Damn!"도 욕설로 간주되던 시절이었으니 이건 대통령이 "개새끼"란 육두문자를 쓴 것이나 마찬가지 수준이었다.[50] 마거릿 트루먼이 쓴 추리소설 가운데 한글로 번역된 것이 하나 있다. '스미소니언 박물관 살인사건'(원제: Murder in the Smithsonian)인데, 1987년에 출판된 것이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중고책으로도 구하기 어렵다. 저자명의 국문 표기는 '마가렛 투루먼'으로 되어 있다.[51] 당시 백악관은 수리중이었다.[52] 실제 아이젠하워는 재임중에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아이젠하워가 국민들의 지지속에 상당히 권력이 강했던 대통령임을 생각해보면 대통령이란 자리가 얼마나 어려움고 막중한 자리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발언.[53] 이전에 링컨의 유령을 만났다는 이들의 일화는 대개 평범했다. 처칠은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걸었고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과 그 보좌관들은 보고 놀라고 빌헬미나 여왕(네덜란드의 여왕)은 아예 기절했다.[54] 포레스트 검프에서 댄 중위 역, CSI : NY맥 테일러를 연기한 배우다.[55] 국내 번역판에서는 직역하여 '공은 여기서 멈춘다' 라고 번역되었다.[56] 극비리에 공군 기지를 방문하기 위해 수송기 안 통조림 상자 속에 숨어서 왔다.[57] 데이비드 패트릭 켈리, 이후 존 윅 시리즈에서 ‘청소부’란 이름의 시체처리업자인 찰리역으로 나온 배우.[58] 트루먼이→도루만이→돌멩이.(...)[59] 성자는 커티스 르메이, 성령은 맨해튼 프로젝트를 상징하는 원자폭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