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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鄕擧里選制
1. 개요2. 역사3. 제도의 구조4. 문제점5. 여담

1. 개요[편집]

한나라(전한, 후한) 시기에 보편화 되었던 관료 임용 제도.

2. 역사[편집]

서한 초기의 관리 임용 제도는 임자제(任子制)였다. 이 제도는 관록 2천 석 이상의 관리가 3년간 근무하면 자신의 형제나 아들을 1명 추천하여 낭관으로 올릴 수 있는 제도였다. 동시에 한문제는 여러 차례 각지의 고을에 현명한 인재를 추천하도록 칙령을 내리고 있었는데, 임자제도가 폐지되고 이러한 추천칙령이 상설화된 것이 향거리선이다.

원광(元光) 원년(기원전 134년), 한무제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실행했다. 후한에서도 그대로 시행되었으나, 수재(秀才)의 명칭이 광무제 유수(劉秀)의 이름을 피휘하였으므로 무재가 된다.

향거리선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유교 원리를 지방에까지 전파시켜 유교적 도덕규범에 따른 관리 선발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그래서 인재 천거의 기준은 유교적 도덕률에 있었고, 중앙집권적 시스템이 완성되지 못 한 상황에서 지방 인물들을 중앙정계에 진출하게 만들어서 지방과 중앙의 결속을 다지는 형태였다.

후한 말기 전란으로 사회체계가 붕괴되면서 동시에 최소 초한전쟁 이후부터 후한 시기까지 유지되던 지방의 토착세력들이 몰락, 혹은 지방군벌로 독립하면서 향거리선제는 붕괴된다.

후한말의 혼란기에도 형식적으로는 향거리선제가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예로 유비원담을 무재로 천거했다는 일화가 있다. 당연히 중앙정부가 마비 상태라 반영될 리가 없었으므로 원담의 아버지 원소와의 관계 형성을 위한 형식적인 절차였을 것이다. 이 시기의 군벌들은 부하들에게 벼슬을 주면서 조정에 상표하는 형식을 거쳐 임명했는데, 이것도 그냥 거의 말로만 상표해서 보고했다 치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다.

향거리선제처럼 제도화된 것은 아니라 해도 인재를 천거하는 전통은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사례가 순욱의 인재 피라미드.

위나라에 들어 추천의 권한을 중정에게 몰아주는 구품중정제, 혹은 구품관인법이 제정되면서 향거리선은 폐지되었다. 촉한과 동오는 확실하지 않은데, 양국 모두 후한의 제도를 본받았으므로 향거리선이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오나라에서는 세습령병제(世襲領兵制)의 영향으로 마치 봉건제를 연상케 하는 관직 세습이 일반화되었다.

3. 제도의 구조[편집]

매년 각 주(州)에서 수재(秀才)[1] 1명, 각 군국(郡國)에서 효렴(孝廉) 1명씩을 추천해 관리로 삼았다.

효렴에 천거되면 중앙으로 파견되어 낭관(郞官)이 된다. 낭관은 궁궐 안에서 숙직을 서면서 조정의 실무를 익히다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지방관이나 조정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보통 낭관을 거친 다음에 현(縣)의 관리나 승(丞)과 같은 보좌관으로 임명했다.

효렴은 태수가 1년에 1명만 추천할 수 있고 그 이상은 불가능했다. 효렴으로 추천되어 관직에 오른 자가 사고를 치면 그 사람을 추천한 사람까지 같이 벌을 받는 연좌제가 적용되었다. 행여 추천받은 자가 난을 일으키기라도 하면 추천한 자까지 같이 삼족을 멸했다. 때문에 태수는 효렴을 추천할 때 굉장히 신중을 기해야만 했고 1년에 1명씩 효렴을 추천하는 권한을 사용하지 않는 태수도 있었다.

이렇듯 효렴으로 천거되기가 의외로 어려웠기에 추천을 해준 사람과 추천을 받은 사람 사이에서는 끈끈한 인맥이 형성되었다. 그 때문인지 손견이 세상을 떠나자 과거에 손견이 효렴으로 추천해줬던 환계가 목숨 걸고 유표에게 찾아가 손견의 시체를 찾아왔다.

4. 문제점[편집]

간단히 말해서 천거제의 단점을 골고루 다 가지고 있었다.
  • 한정된 풀에서 편향적으로 선발된다.
    천거를 받을 사람은 군의 태수나 국의 국상, 그리고 지방의 유력자들의 협의로 결정했다. 그래서 지방에서 세력이 강한 호족들이 관리로 대거 등용되는 폐단이 발생했다. 말이 좋아 향론이지, 기본적으로 향촌에서 평이 좋은 사람이 기준이고, 그나마도 실제로 여론은 향촌 전체의 여론이 아니라 지역 유지들의 여론이다. 덕분에 이름은 천거제이지만 실제로는 세습제와 그다지 차이도 없이 운영되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론적으로는 지방 유력자들이 중앙권력으로 진출해 중앙권력도 장악하는 것도 가능성하지만, 중앙에서는 중앙대로 권력 다툼이 벌어졌기에 지방세력은 권력을 장악하지 못 하고 오히려 이 싸움에 말려드는 형태가 되었다.
  • 기준이 워낙에 애매모호하고 즉실성이 없다.
    효렴은 말 그대로 효성이 지극하고 청렴하다는 의미, 수재는 유능하다는 것이고, 현량은 현명하다는 뜻이다. 인물을 이런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가, 그리고 효성 지극하고 사람 착하면 국정도 잘 수행할 수 있는가? 유능한 인물이라도 악평을 얻으면 여론이 나빠져 관직에 오를 수 없고, 무능해도 사람이 좋으면 관직에 오를 수 있었으니 천거된 인물의 능력이 완전히 랜덤이었다. 이런 시스템은 그나마 치세에는 먹힐지라도 난세에서는 말 같지도 않아서, 조조가 내세운 인재 등용의 내용은 불효불인 유재시거, 불효자라도 좋고 인품 안 좋아도 좋으니까 능력 있으면 쓰겠다였다.

이 2가지 문제점이 조합된 결과 어떤 말이 나오느냐면,
수재로 천거된 사람이 글을 읽지 못 하고, 효성이 지극하다고 천거된 이가 부모와 별거하고, 청렴결백하다고 선발된 이는 진흙처럼 때가 묻고, 계략이 많고 용맹하다는 장수는 닭처럼 겁이 많다.
- 포박자 심거편
이미 어진 자와 비루한 자를 분명히 가려낼 수 없고, 또한 귀족들의 위풍이나 지시에 따르며 권세가의 촉탁에 위협되어 찾아오는 자가 문 앞에 가득하고 예물이 폭주했다.
- 왕부의 잠부론
마지막으로 연좌제로 인해 천거를 해주는 것이 곧 '인맥'을 만드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게 개인적인 관계라면 적당히 의리 이야기로 그치고 말겠지만, 천거 피라미드의 규모가 커지고 특정 가문이나 집단과 연계되면 아예 대규모 '파벌'이 되어버린다. 원소, 원술의 원씨 가문이 극단적인 사례다.

5. 여담[편집]

향거리선제가 담당하는 것은 중앙관직이고, 지방관직은 세습을 하거나 지방의 아전 수준에서는 돈을 주고 임명되었다. 애초에 향거리선제 이전의 관직 임용 제도의 세 가지 형태 분류가 세습, 관직 매매, 천거였다. 이것이 한대 이후로는 천거제가 향거리선제가 되어 중앙관직 임명 제도가 되었고 나머지 2가지 형태가 지방 하급 관리 임명 시스템이 된 것이다.

조선에서 조광조가 실행하려 한 현량과 제도가 이와 비슷하다.
[1] 후한에서는 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