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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31대 대통령
허버트 클라크 후버
Herbert Clark Hoover
출생
미국 아이오와 주 웨스트 브랜치
사망
1964년 10월 20일 (향년 90세)
재임기간
제3대 상무장관
제31대 대통령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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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제시 클라크 후버(1846 ~ 1880)
어머니 헐다 후버 (1848 ~ 1884)
배우자
루 헨리 후버(1874 ~ 1944, 1899년 결혼)
자녀
허버트 찰스 후버(1903 ~ 1969)
알란 헨리 후버(1907 ~ 1993)
학력
종교
신장
183cm
정당
약력
제3대 미국 상무부 장관 (1921~1928)
미국 식량청 청장 (1917)
1차 세계대전 연합국 구제활동 책임자 (1914)
미국 제31대 대통령

1. 개요2. 생애
2.1. 유능한 행정가2.2. 정치인 생활2.3. 대통령 취임과 세계 대공황2.4. 퇴임 후
3. 평가4. 여담
4.1. 그래도 이름은 남겼다?

제31대 미국 대통령 취임 선서

1. 개요[편집]

빈곤의 종식이 눈 앞으로 다가왔다.

- 세계 대공황 발발 1년 전인 1928년

미국의 제31대 대통령, 역대 미국 대통령 중 미시시피 강 서부 지역에서 태어난 최초의 인물이다.

대공황 시기 대통령이라 경제위기를 초래한 주범으로 비판받기도 하나, 후버 입장에선 예전부터 쌓인 문제가 하필 후버가 취임하자마자 대공황이 되어 터진 셈이니 좀 억울한 측면도 있긴 하다. 물론 이후 뒷수습을 제대로 못해 사태를 더 악화시킨 점은 후버의 책임으로 평가 받는다.

2. 생애[편집]

2.1. 유능한 행정가[편집]

아이오와 출신으로, 최초의 서부 출신 대통령이다.[1] 8세에 고아가 되어 오리건주로 이동해 퀘이커교도인 삼촌 슬하에서 자랐으며 캘리포니아스탠퍼드 대학교에 진학하여[2] 지질학, 광산공학을 전공, 관련 학위를 취득한 이후 1897년 호주의 영국계 광산기업에 취직하여 2010년대 후반 기준으로 대략 15만 달러의 봉급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능력을 인정받았는지 1년 만에 중간관리직으로 승진하였고, 이후 미국으로 돌아와 결혼을 한 다음에 광산기사와 국제사업가로 세계를 돌면서[3] 놀라운 활약을 펼쳐 30대엔 이미 큰 부자가 되었다. 그 이전인 20대 후반에는 남아공, 호주, 중국 등을 돌면서 큰 사업을 꾸렸는데, 어찌나 바삐 돌아다녔는지 청혼호주에 있을 때 아내에게 국제전보를 보내서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벌어졌을 때 영국 런던에 머물던 중 연합국 구제활동의 책임자로 발탁되었고, 벨기에 구제위원회 의장직을 맡아 전쟁 중 대규모의 식량분배 계획을 관리하고 활발한 구호활동을 펼쳤으며 구호자금을 모집하는 일을 담당했다. 그러던 중 1917년 4월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자 미국 식량청 청장이 되어 미국의 식량 생산을 촉진하고 분배하는 일을 주도했고, 1918년에 다시 유럽으로 가서 사재까지 털어 가며 적극적으로 구호활동에 매진했다. 이 덕에 미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위대한 인도주의자라고 칭송받았다.

2.2. 정치인 생활[편집]

2년 뒤인 1920년, 워런 G. 하딩공화당 행정부가 들어서자 그 내각에서 상무장관이 되었으며 세인트로렌스 해로를 개척하고 당시 최대 규모 공사인 볼더 댐 공사를 지정하는 등 행정 분야에서 뛰어난 수완과 능력을 발휘하여[4] 캘빈 쿨리지 행정부에서도 중용되다가, 마침내 1928년 대선에서 자타공인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상대 후보로 나선 민주당앨 스미스금주법 + 가톨릭 내력 등으로[5] 가뿐히 따돌리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6] 그는 대통령 선거에서 "모든 냄비에 닭고기를, 모든 차고에 자가용을!(A chicken in every pot, a car in every garage!)"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고, 덕분인지 큰 압승을 거두었다. 미국판 이팝에 고깃국 이 선거에서 후버는 텍사스를 처음으로 차지한 공화당 후보도 되었다.[7]

1929년 3월 그가 취임할 때 언론이나 국민들의 기대 역시 대단했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그는 단순한 경제적 성장만이 아니라 우드로 윌슨 이래 중단된 개혁정책 역시 성공시켜 보이겠다고 자신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2.3. 대통령 취임과 세계 대공황[편집]

"What the hell has Hoover got to do with it? Besides, I had a better year than he did."
"내가 요구한 연봉이 허버트 후버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이오? 게다가, 내 올해 성적은 그 자보다 낫소."
베이브 루스, 1930년에 연봉 8만 달러가 너무 많지 않냐는 비난에 응답하면서. 당시 미국 대통령 허버트 후버의 연봉이 7만 5천 달러였고, 미국은 막 대공황의 불황으로 접어든 상태였다.#

1929년 10월 24일 주식 시장이 붕괴하면서 이른바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사실 이 대공황은 후버만의 잘못은 결코 아니었고, 경제 방향적으로 감이 없던 전전임 하딩과 전임 쿨리지 행정부 시절부터 오랫동안 쌓였던 것이 후버의 대에 터진 것이었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하딩 때부터 후버 초기까지 재무장관으로 재임한 앤드루 맬런은 대대적인 감세 정책을 시행했는데, 이로 인해 여유자금이 생긴 기업들 사이에 재테크 열풍이 불면서 주식시장에 돈이 몰려 활황을 가져왔지만, 주식이 영원히 오를 수는 없었던 데다 주식시장의 거품이 과열되는 와중에도 이를 연착륙시킬 대책은 미비해서 사실상 거품은 방치되었는데[8], 결국 그것이 후버 대에 터져버리고 만 것이었다. 후버로서는 자기만 모든 사태의 주범인냥 욕먹는 점이 억울할 법도 한 부분이다.

하지만 후버 정권은 이에 대한 후속 대책에서 무능함을 보여주는데, 주식시장에 투자한 개인이나 기업이 한둘이 아닌 만큼 수많은 기업, 개인들이 파산의 길로 접어들었고 은행도 동시에 타격을 받았으며 공장은 문을 닫아 주식에 투자하지 않았던 노동자들도 실업자가 되어 상인과 농민들도 수입이 크게 줄어든 판국에, 후버와 그의 참모들은 이런 상황을 시장과 세월이 해결해줄 것이라는 낙관론만 펴며 사실상 방치했다.[9] 후버가 나서서 "이 불경기는 2개월이면 끝날 것입니다."라고 장담했지만 그의 장담과는 달리 경제 상황은 2개월은 커녕 2년 이상이 넘도록 계속 악화되기만 할 뿐이었다. 당시에는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고 주장하는 세이의 법칙이 정설이었고(즉 1차대전이 끝난 시점까지도 공산품 수요가 생산을 앞지르고 있었다 봐도 좋았다. 후버는 본격적으로 폭발한 생산력이 수요를 초월하는 사태에 1번 타자로 나서야 했고.), 더 나아가서 대공황이라는 단어는 당시 경제학의 이론에서는 성립이 될 수가 없는 개념이었다. 더군다나 아직 케인스 학파가 학계에 모습을 드러내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유효수요’라는 개념 역시도 상상할 수가 없었다.

파일:external/ephemeralnewyork.files.wordpress.com/centralparkhooverv.jpg

1930년 1월의 후버 마을. 이곳은 뉴욕센트럴 파크다.

결국 공황이 수습될 것이라고 했던 후버의 장담과는 반대로 12월에는 오히려 실업자가 1백만 명을 돌파했고, 임기 3년째가 된 1932년에는 1,300만 명을 돌파하고 말았다. 자연히 실업자들로 이루어진 빈민층이 거리를 메웠고, 이런 사람들이 모여 판자집을 세웠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후버마을(Hooverville, 후버빌)'이라고 이름 붙였을 정도다. [10]

이 와중에 후버는 그간 쌓아 온 평판을 제대로 땅바닥에 내던지는 일을 저지르고 마는데, 바로 보너스 군대(Bonus Army) 사건이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제대 군인들이 혹독한 불경기를 겪게 되자 1945년에 지급 예정이었던 군인연금 보너스를 미리 달라고 요구하면서 시작된 이 사태는, 제대 군인과 그 가족들이 포함된 2만5천여 명의 인파가 워싱턴 D.C 남서부의 아나코스티아 강변으로 모여들어 쓰레기장에서 주어온 잡동사니로 판자집을 만들어 야영지를 세우고 농성을 벌이는 상황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헌데 당시 언론과 정부는 이들을 공산주의자들의 폭동, 체제를 위협하는 빨갱이들이라고 매도하였다.[11] 이에 후버는 더글러스 맥아더 당시 육군 참모총장에게 진압 명령을 내렸고, 맥아더는 그의 부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지 S. 패튼 소령의 휘하에 있는 제3기병대에 명령해 탱크를 선두로 보병 1개 연대와 기병을 착검돌격시켜 보너스 군대가 머물던 판자촌을 쓸어버렸다. 전차 6대를 이끌고 판자촌을 향해 '돌격 앞으로'를 외친 것이다. 전쟁의 미친 개로 불리던 패튼[12]이 시위 진압에 동원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막장이다. 전술했듯 맥아더는 정부의 프로파간다를 충실히 따라 보너스 군대는 공산혁명을 추진하려 하고 실제 퇴역병은 1할밖에 안될 거라고 주장했지만, 나중에 조사한 결과 보너스 군대의 95%가 실제 퇴역병과 그 가족이었다고 밝혀졌다. 어쨌든 이 여파로 5명 이상의 사망자와 100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진압군 측에서도 60여명의 부상자가 났다.

후버는 사태가 이 지경이 되기 전에 공격 중지 명령을 내리고 평화적 해산을 맥아더에게 주문했지만, 맥아더는 명령을 무시하고 시위대를 몰아낸 다음 판자촌을 싸그리 불태우며 말 그대로 쓸어버렸다.[13] 강제 해산된 보너스 군대는 겨울 내내 전국 각지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이 사건의 여파로 맥아더는 예편되고 한직인 필리핀 군사고문으로 가게 된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다시 현역으로 복귀해 우리가 잘 아는 활약을 펼치게 된다.

FDR이 취임하자 이들이 다시 워싱턴에 집결했는데, 루즈벨트는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를 보내 이들을 위로하고 당장 지급 대신[14] 뉴딜 사업에 이들을 합류시켜 일자리를 제공한다. 덕분에 세간에선 '후버는 군대를 보냈고 루스벨트는 아내를 보냈다'며 비교대상이 되기도 했다. 보너스 원정대(Bonus Expeditionary Force)에 대한 이야기.

여하간 후버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국가의 군 통수권자로써 맥아더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것은 당연히 비판거리가 되었고, 오히려 여론은 후버를 ‘퇴역군인의 생활에 대해 무감각한’ 대통령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접한 후버의 대선후보 적수였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당시 하버드 법대 교수이자 훗날 연방 대법원장을 지내는 펠릭스 프랑크푸르터에게 씨익 웃으며 "그렇군요, 펠릭스. 이번 선거는 저를 선택할 겁니다."라 말했다고 한다.

결국 언론과 대중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취임한 대통령이 그 언론과 대중에게 나라 경제를 거덜낸 원흉으로 취급받고, 퇴역군인 무력 진압 탓에 대통령으로서의 위신마저 땅에 떨어지게 되자 후버는 뒤늦게나마 일부에서 여러 조치를 취한다. 엄청난 국가 예산을 풀어 부도 직전의 기업에게 나누어 주고 소득세를 인하했으며, 일자리 제공을 위해 공공근로사업을 발주시켰다. 그래서 일부 경제학자들은 이때의 조치가 루스벨트 때에 빛을 보았다라는 시각도 보이지만 솔직히 타이밍도 많이 늦었고, 부화뇌동스럽기도 했다.

조치를 취하긴 했어도 계속 경기악화가 이어진지라 결국 1932년 대선에서 자신이 당선될 때보다 더한 관광을 당하며 루스벨트에게 백악관 자리를 내주고 만다. 그리고 이후 공화당은 20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을 야당으로 보내게 되며, 1994년 공화당 혁명 이전까지 쭉 하원 다수당이 되는데 난관[15]을 겪었다.

파일:Davidson-Sorkin-Transition-From-Hoover-to-FDR.jpg

1933년 대통령 취임식 직전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악수하는 모습.

2.4. 퇴임 후[편집]

파일:허버트 후버_1963.png

후버는 ‘대공황을 초래한 대통령’으로 불명예스럽게 물러났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정권 때는 저술 활동을 하며 조용히 살았다. 사실 루스벨트에게 참패한게 은근히 분했는지, 집필 당시 뉴욕의 한 호텔에서 손님이 화가 난 듯 뭔가 휘갈기고 있는 후버를 보고 뭐하고 있느냐고 묻자 "루스벨트에 관한 (디스하는) 책을 더욱 더 매섭게 만들고 있소."라고 대답했다고. 루스벨트 외에도 자기 정적들 까는 책들을 꽤 저술했다고 한다.

그래도 행정 능력은 있고 본인도 행정부 일은 하고 싶었는지, 훗날 해리 S 트루먼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후 유럽전쟁물자 수급계획을 조직하는 일을 맡아 38개국을 돌며 그 일을 수행하기도 했으며, 정부행정분야 조직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되는 등[16] 민주당 트루먼 정권에서도 중용되었고 공화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역시 후버를 중용했다.

이렇게 계속 공직 생활을 하면서 1964년 90세까지 장수했다. 역대 대통령 중 2번째로 오랜기간 '전직 대통령'으로 살았던(31년 7개월) 인물이다. 두번째인 이유는 지미 카터가 2012년 부로 후버의 기록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이 외 존 애덤스 이후 90세를 산 대통령에도 해당하며 6번째 장수 대통령이기도 했다.

후버의 장례식은 린든 B. 존슨 대통령을 비롯한 여러 정부 주요 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국장으로 나름 성대하게 치루어 졌으며, 그는 펜실베이니아 주에 있는 자신의 집 근처에 묻혔다.

3. 평가[편집]

대공황의 여파 덕분에 당연히 후대 역사가들의 평가도 박한 편이다. 업적 평가를 하면 대부분 중하위권 순위를 차지하고 있다. 다만 이 여파가 너무 쎄다보니 다른 공적들이 무시당하는 경향은 있는데, 분명 후버는 '위대한 엔지니어'라는 별명도 붙었을 정도로 행정업무에 있어서 대단히 유능한 능력자였다. 그렇기에 많은 기대를 받고 백악관에 입성했던 것. 허나 그가 대공황이라는 경제적 대위기를 맞아 대처했던 행동은 그다지 훌륭하지 못했다. 물론 당시엔 유효수요 이론도 없었고 세이의 법칙이 정설처럼 통하던 시절이니 그로선 억울한 점도 있겠지만, 사태가 악화되고 있는데도 손놓고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했다는 점은 분명 비판받을 대목.

결국 국가를 이끄는 지도자, 특히 위기 때의 지도자보다는 행정관료가 더 적합한 인물이었던 듯 하다.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도 능력은 있지만 위기에는 적합치 않은 지도자라고 평했다. 그림을 보면 ‘봄이 왔는데도 스키를 타려’ 하는 모습인데다, 심지어 봄이라는 계절을 탓하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대공황 시기 그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또한 지도자가 아무리 수완이 있어도 시대를 잘못 만나거나 위기 상황에 잘못 대처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준 대통령이라고도 볼 수 있다.

루스벨트를 비판하긴 했지만 사실 후버는 전임 쿨리지처럼 대놓고 자유방임주의자는 아니었다. 당장 1929년 그가 주장한 첫 법률은 수입농산물에 특별 관세를 부여하는 법이었다. 그리고 대공황이 터지자 같은 시기 주장된 공산품 관세를 평균 59%, 최대 400%까지 올리는 일명 ‘스무트 홀리 관세법’(Smoot-Hawley Tariff Act)이 1930년 6월에 통과되었다. '관세인상을 가정상비약으로 여기는 미국 공화당의 전통'이라는 비판도 있는데, 아이러니하지만 실제로 오랜 역사 동안 관세를 지지하는 보호무역 중상주의 정당이 공화당이었고, 거꾸로 관세를 반대하는 자유무역 기조 정당이 민주당이었다. 사실 19세기~20세기 초반만 해도 양당의 성향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고 계파도 짬뽕이었기에 이런 흐름은 1930년대까지도 이례적이진 않았다.

한편, 이 관세법은 한국경제신문 등이 즐겨 인용하는 자유방임주의 경제학자들에겐 신나게 까이는 정책 가운데 하나로, 심지어는 금본위제 붕괴와 제2차 세계대전도 이 법으로 인한 세계 무역 감소가 원인이라는 상당히 과격한 주장도 있다. 그들이 후버를 비판하는 논지는 후버가 관세에 거부권을 상정하지 않았다는 점. 예를 들어 "대공황이라면 흔히 1929년 10월29일의 주가 대폭락을 떠올린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다우지수는 이듬해 봄 완연한 회복세를 보였고 투자와 소비 지표도 더 이상 나빠지지 않았다. 오죽하면 허버트 후버 대통령이 그해 5월 ‘공황 종료’를 선언했겠는가. 하지만 한 달 뒤다. 스무트-홀리 법으로 모든 게 망가지고 말았다....경제사가 존 스틸 고든은 대공황은 1929년 주가 대폭락이 아니라 1930년 6월17일 스무트-홀리 법에서 시작됐다고 단언한다."#라는 주장도 있다.

허나 이에 대해선 워낙 자유방임주의자들의 정신승리성 의견이라 반박 의견도 만만치 않은데, 당장 해당 법은 수입 관세를 약 40% 인상했다. 하지만 당시 미국의 순수출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6%이니, 이는 미국의 GNP 대비 고작 2.4%의 세율 인상인 셈이다. 미국이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가 아닌 이상, 경제 블록화 때문에 국내 경제가 마비되었다는 것은 억측에 불과하다는 것. 폴 크루그먼은 이 떡밥이 끝난 게 언제인데 지금도 인용하냐고 디스하기까지 했다.

러시아 대통령을 지낸 보리스 옐친과 생김새나 행보가 비슷하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고전적인 비유를 하면 '치세에는 능신, 난세에는 암군'에 가까운 유형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 점에선 고르바초프 아닌가

4. 여담[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erbert_Hoover_and_King_Tut.jpg

애견 킹 투트(King Tut, 저먼 셰퍼드)와 같이 찍은 사진. 킹 투트는 이집트파라오로 유명한 투탕카멘에서 따 온 이름이다. 조금 차가운 이미지라 이 투트와의 사진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개인적 취미는 낚시였다고 한다. 그래서 낚시에 대한 책도 낸 바 있으며 비공식적으로도 낚시를 예찬하거나 낚시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한 말이 많이 남아 있다.

하루는 메인 주 출신 의원들이 관내 하천에서 잡은 싱싱한 물고기를 대통령에게 직접 선물하려 했는데, 이게 잘못 전해졌는지 백악관 조리실에 먼저 전달되어 버려서 대통령이 보기도 전에 생선요리가 될 뻔 했다. 경호실장 에드워드 스탈링이 이를 발견했을 때는 손질이 시작되어 물고기의 머리가 이미 잘린 뒤라 대통령 경호실장이 직접 잘린 물고기의 머리를 꿰맸다. 이 때의 일을 스탈링은 "메인 주는 이후 3년간 민주당 편을 안 들었습니다."(?)라고 회상했다. 후버는 공화당이다. 민감할 수 있었을 사건을 잘 수습한 셈.[17]

소심한 면이 있었는지 백악관에 있을 때는 백악관 직원들과 말하는 것이나 마주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이는 그의 부인도 마찬가지였는데, 영부인은 아예 백악관 직원들과 말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음식을 내오거나 거두어가라는 등의 수신호를 개발했을 정도였다. 후버가 백악관에 있을 때는 아예 백악관 직원들이 대통령 내외를 마주치면 알아서 피하거나 숨는 일도 있었다고. 대통령 부처도 남이 자신들의 대화를 듣는 것을 싫어했는지 영어가 아니라 중국어(그 가운데 만다린)로 대화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선거운동 때에도 자신을 내세우는 데 대단히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캘빈 쿨리지가 대통령이던 시절 쿨리지가 백악관에 걸린 6대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의 초상화를 보고는 당시 상무장관 후버를 불러서 "저 초상화의 머리가 너무 빛나지 않소?"라고 물었다. 후버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쿨리지 대통령은 사다리를 가져와서 직접 애덤스의 초상화 위로 올라가 머리에 검정 칠을 해놓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후 후버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애덤스의 증손자인 찰스 프랜시스 애덤스가 해군장관이 되었는데, 그 장관이 증조할아버지의 초상화를 보고 기겁해 결국 그 사건에 대해 후버가 사과해야만 했다. 이 일화로 보면 후버는 아무래도 전임 대통령의 잘못을 덤터기쓰는 운명을 타고 났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백악관에 에어컨을 설치한 것이 후버 시기다. 1929년에 3만 달러라는 거금을 들여서 백악관 전체에 에어컨을 깔았다. 대공황 시기엔 예산 낭비 소리 들을수도 있었을테니 어찌보면 시기도 적절했다.

나름 훈훈한 일화도 있는데, 감옥에 있는 아버지를 크리스마스에 집으로 보내 달라는 청원을 하러 우여곡절 끝에 먼 길을 거쳐 백악관에 무단 침입한 아이와 그 어머니를 직접 만난 일이 있다. 후버 대통령의 배려로 마침내 크리스마스 이브에 아버지는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고. 이 이야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폴란드가 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릴 때, 당시 총리였던 파데레프스키가 백방으로 주변 유럽국가들에게 식량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을 때, 지원요청을 받지도 않은 미국에서 전 폴란드 국민이 1년 동안 먹을 수 있는 2백만 톤의 식량을 원조한 적이 있었다. 당시 미국 식량 구호국(ARA) 초대 국장이었던 허버트 후버의 도움이었는데, 1892년 허버트 후버가 스탠퍼드 학생이던 시절, 유명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파데레프스키가 미국에 방문한 것을 알고 그를 음악회에 초대했었다. 그러나 음악회 티켓은 팔리지 않았고 후버는 파데레프스키에게 약속한 금액 2,000달러 중 1,600달러만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파데레프스키는 재능있는 학생을 위한 장학금 차원에서 그 1,600달러도 받지 않았는데, 이때의 인연으로 구호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나홀로집에 2에서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묵었다 나온다.

4.1. 그래도 이름은 남겼다?[편집]

이런 안습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은 현재 미국 몇 곳에 남아 있다. 대표적으로 라스베이거스 근처 콜로라도 강에 있는 미국 최대의 댐인 후버 댐(높이 221m, 저수량 320억m3). 그가 재임 중이던 1931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936년 완공되어 원래는 '볼더 댐'이라고 불렸다. 그러다 1949년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사막 위의 천국이라는 네바다라스베이거스LA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댐이다.

참고로 아직 후버 댐 최중심부의 시멘트는 다 마르지 않았다는 말이 있으며, 지금 당장 인류가 모두 사라져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 버틸 발전소이자, 가장 오래 버틸 구조물 가운데 하나라고도 알려져 있다. 이 소재를 다룬 다큐멘터리인 "인류 멸망 그 후(Life After People)"에 따르면 이 거대한 발전소가 작동을 중단하게 되는 원인은 배수파이프를 침범한 홍합 등의 수중 생명체 때문일 거라고.

그가 1919년에 5만 달러로 설립한 후버 도서관에서 비롯된 후버 연구소(Hoover Institution)는 설립 2년 만에 8만 부의 장서를 확보하였으며, 1921년~1923년의 소련 기근 지원 등을 비롯해[18] 현재까지 폭넓은 국제적 연구 및 학술활동을 보이는 미국의 대표적 싱크 탱크로 남아있다. 아무래도 친공화당 성향이 있지만 절대적이진 않다고 한다.

후버볼[19]은 백악관 관리들의 체력 증진을 위해 고안된 것으로, 후버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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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세기 남북전쟁 이래 이어지는 오하이오 출신 공화당 대통령의 맥을 끊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를 제외하면 서부 출신 공화당 대통령은 리처드 닉슨(캘리포니아 출신) 정도고, 굳이 더 따진다면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낸 일리노이 출신 로널드 레이건 정도가 있다.[2] 1891년. 스탠퍼드가 설립된 해에 들어간 것이다. 스탠퍼드는 개교한 해에는 수업료를 받지 않아서 학교를 공짜로 다녔다.[3] 청나라 황제의 광산업 자문관으로 일하기 위해서 신혼여행을 청나라로 갔다. 그런데 하필 톈진에 머무르던 때에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서 거류민들과 함께 고생해야 했다.[4] 정작 후일 후버 댐이 되는 이 댐의 공사는 1931년에야 시작되었다.[5] 앨 스미스는 뉴욕 주지사를 4차례나 재임한 인기 있는 정치인이었으나, 미국 최초의 가톨릭 신자 대선후보라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개신교가 압도적인 우세를 점한 미국에서 가톨릭 교도라는 것은 상당히 불리한 요소라서 2021년 지금까지도 미국 대통령 중 공식적 가톨릭 교도는 존 F. 케네디, 조 바이든 2명뿐이다.[6] 허나 앨 스미스 입장에선 이때 대통령이 되지 않은 것이 신의 한수가 되어, 미 역사상 가장 행복한 낙선자(...)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그래서 대공황이 터지자 후버를 동정하며, 그가 (하딩 대신) 1921년이나 (루스벨트 대신) 1937년에 취임했으면 위대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라고 위로하기도 했다.[7] 지금 미국 정치 구도를 보면 의아할테지만, 이때만 해도 남부는 민주당 텃밭이었다. 상대 후보인 앨 스미스가 맨하탄에서 태어나 평생 뉴욕에서 자라났는데도 대선에서는 남부 5개 주와 북부 매사추세츠에서만 승리하였던 것도, 남부가 민주당의 마지막 표밭이었기 때문이다.[8] 사실 앤드루 맬런도 주식시장의 거품에 대해 우려는 하고 있었지만 너무 늦게 대응했다. 게다가 그 처방이랍시고 나온 구조조정 작업은 뭔가 현 상황의 타개책이랑 핀트도 잘 안맞았고 오히려 미국 경기까지 후퇴시켰다.[9]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 시기에는 기존의 경제 이론들이 죄다 그런 식이었다. 미국 경제 대공황의 원인은 여전히 갑론을박이 있지만, 어쨌든 발생 직전에도 과열되어있던 주식 시장을 보면 이미 전조는 충분히 드러난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허나 후버 행정부는 경기 과열을 예측하고 있었음에도 초기의 몇몇 땜질 정책이 이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고, 이는 결국 경제 대공황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불러오고 만다.[10] 이 후버 시리즈가 좀 있는데 예를 들면 후버 모포(Hoover blanket, 신문지 덮고 잠자기), 후버 깃발(Hoover flag, 텅빈 주머니를 바깥으로 꺼내놓은 상태), 후버 가죽(Hoover leather, 밑창 떨어진 신발을 종이로 땜빵해서 신고 다니기), 후버 차(Hoover wagon, 기름값이 없어서 엔진 때놓고 말이 끌고 있는 자동차)등이 있었다. [11] 이 공산주의 드립은 정말 심심하면 튀어나왔는데, 대공황 당시 일자리를 찾아 캘리포니아 등지로 간 가난한 사람들(이른바 '오키(Okie)'라고 한다)에게도 써먹었다. 일은 엄청나게 시키면서 임금은 쥐꼬리만큼 주는 데 화가 나서 대항했는데, 이를 공산주의자들의 난동으로 몰아간 것. <분노의 포도> 후반부에 생생하게 묘사된다. 그리고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매카시즘 열풍때 최정점을 찍는다.[12] 가장 유명한 일화로는 조 안젤로(Joe Angelo)라는 병사의 일화가 있다. 그는 1차 세계대전 때 패튼의 목숨을 구해준 업적 등으로 인해 패튼에게 "용감하다"라고 칭찬받은 군인이었지만, 민간인으로 돌아온 뒤 대공황 때문에 일을 할 수가 없어 보너스 군대에 참가했다. 그가 개인적으로 패튼을 설득하러 갔을 때 패튼은 "난 이 새끼 모르니까 당장 쫓아내라"며 문전박대했다. 패튼은 후에 "내가 그 새끼 전쟁 이후에 돈도 대주고 얼마나 잘 해줬는데 뒤통수 친다"하고 투덜거렸다고 한다.[13] 후버 입장에선 빡칠만한 일인데, 정작 맥아더는 후버를 나쁘게 보진 않았는지 노년 대담에서 "그래도 후버는 나쁘지 않았지" 라고 말했다고 한다. 강경 진압하게 냅둬서 그럴수도[14] 루스벨트도 보너스 지급은 정해진 기간에 줘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다만 뉴딜 정책에 퇴역군인들을 참여시켜 불만을 누그려뜨렸는데, 1935년 이들이 일하던 지역에 허리케인이 강타해 많은 퇴역군인들이 피해를 입자, 다시 한번 미국 사회에서 동정론이 일어 1936년 의회 주도로 조기 지급이 이뤄지긴 한다.[15] 1932년 후버의 퇴임 이후 부터 1994년 공화당 혁명까지 62년, 서른번이 넘는 하원 선거 동안 2차 대전 직후의 피로감이 표출된 1946년과 한국전쟁으로 대두된 반공주의와 인기 있는 새 대통령 아이젠하워 덕을 본 1952년을 제외하고선 공화당이 하원 다수당이 된적은 없었다. 뉴트 깅리치의 뒤집기 이전까지 공화당은 다수당을 노리기는 커녕 민주당이 단독으로 법안을 상정할 수 있는 기준선인 260석을 막는데 급급했을 정도. 대통령 선거에서는 압승을 거두었던 1972년의 닉슨과 1984년의 레이건도 공화당이 하원 과반을 차지하게 하는데는 실패했다.[16] 통칭 '후버 위원회'였다. 1947년부터 그가 은퇴하고도 2년 후인 1957년까지 10년 동안 운영되었으며, 주요 업무는 2차 대전 후 지나치게 방만해진 조직들을 효과적으로 개혁하는 것이다.[17] 사실 이런 거 없어도 메인 주 및 뉴잉글랜드 주들은 당시 전통적인 공화당 표밭이었지만. 물론 오늘날에는 아니다.[18] 이 때만 해도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19] 배구테니스를 합쳐서 만든 스포츠. 3인이 플레이를 하며 상대가 던진 공을 받지 못하면 실점하는 것으로 4파운드 공을 사용했지만, 운동효과를 올리기 위해 현재 6파운드를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