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 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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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회의보(Courrier de la Conférence de la paix)》1907년 7월 5일자 기사

1. 소개2. 배경3. 헤이그까지의 여정4. 만국평화회의 입장 실패5. 고종의 장기집권 비판6. 이준의 순국7. 헤이그 특사의 이후 행보8. 실패의 이유와 평가

1. 소개[편집]

1907년대한제국 황제 고종제2차 한일협약의 부당함과 일본 제국의 침략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고종이 비밀리에 네덜란드 헤이그(Den Haag-덴 하흐[1]) 시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보낸 3명의 특사들을 가리킨다. 그 3명은 이준, 이상설, 이위종. 여기에 일제의 특사인 척 연막 작전을 펴던 미국인 호머 헐버트까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합세했다.

2. 배경[편집]

1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것은 1899년이다. 1903년 고종은 2차 만국평화회의와 1864년에 창설된 국제 적십자 위원에 가입하고 싶다는 서한을 네덜란드로 보낸다. 이듬해인 1904년, 주 러시아 대한제국 공사 이범진[2]은 러시아 외무 대신 람스도르프의 언질로 한국이 2차 만국평화회의 초청국 명단에 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회담은 러시아 니콜라이 2세가 제안한 것이었고 러시아는 한국에서 일본을 한창 견제하다 못해 같은 해 러일전쟁까지 치르게 됐으므로 한국이 초청국 명단에 들어간 것은 다분히 일본을 견제하려는 러시아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한국이 정식 초청장을 받지 못했다고도 하는데, 이범진이 1905년 10월 이미 람스도르프에게 정식 초청장을 받았다고 한다.

3. 헤이그까지의 여정[편집]

고종이 처음에 헤이그에 파견하려고 했던 인물은 이용익이었다.# 원래 보부상 출신에 발이 빨라 하루에 천 리를 걷는다는 둥, 축지법을 쓴다는 둥의 소문이 붙은 인물로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와 민영익 사이의 연락을 담당해 출세했지만 이내 경제 관료로서 엄청난 수완을 발휘했던 고종의 심복 중의 심복이었다. 이용익은 1905년 11월 고종의 밀명을 받아 출국했는데, 중국 상하이와 연해주 등을 오가며 논의하던 도중 김현토라는 인물에게 살해당한다.[3]

두 번째 특사 파견 움직임은 상동파라고 불렸던 상동교회 인사들을 중심으로 기획됐다. <대한매일신보> 양기탁이회영에게 2차 만국평화회의 개최 사실을 알렸고, 이회영은 전덕기를 비롯한 상동교회 인사들과 특사 파견을 논의했다. 이회영은 대한자강회의 후신격인 대한협회에서 만난 내시 안호영을 통해 고종에게 이상설, 이준, 이위종으로 구성된 특사 밀파 계획을 전달했다. 이때 이준은 상동교회 청년회 회장이었다. 당시 고종은 말 그대로 황궁에 유폐당한 상태여서, 누구를 만나 무슨 말을 했는지 통감부가 모두 감시하고 있었다. 특사 일행의 동정은 실로 치밀했는데, 고종은 위임장에 4월 20일자로 수결(사인)하고 옥새만 찍어서 보냈다. 문자 그대로 백지 위임장이었다. 첩보 영화 수준의 작전을 통해 위임장을 받은 이준은 이상설과 이위종을 각각 다른 곳에서 만나 합류하는 방식으로 일본의 감시를 피하고자 했다. 거기다 고종의 친서를 소지한 헐버트가 일본으로 이동하며 기만 작전까지 펼쳤다.

이준은 前 평리원 검사로서 문자 그대로 검사, 즉 법률가였다. 법관 양성소를 1회 졸업하고 한성 재판소 검사보가 되어 법무 대신 이하영[4]을 탄핵했는데, 오히려 역으로 본인이 해임당하고 만 적이 있다. 을미사변 후 일본으로 망명해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이상설은 당시 용정에서 서전서숙이라는 학교를 운영했지만 일제가 문을 닫아버린 상황이었다. 망명 전에 유학자로서 명망이 높아 27세에 성균관장 겸 박사[5]를 지냈을 정도였고 조선에서 처음으로 만국 공법을 공부한 국제 정치, 국제법 전문가이기도 했다. 특히 이상설은 당시 의정부 참찬이었다. 즉, 을사조약 체결 당시 의정부 회의를 담당하는 실무 관료였으며, 어떤 위법한 절차가 있었는지 증언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이위종은 주 러시아 대한제국 공사로서 을사조약 이후에도 러시아에서 버티고 있던 이범진의 아들로 당시 만 23세, 그야말로 홍안의 소년이었다. 그러나 7개 국어를 구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에 능통해 이위종이야말로 헤이그 특사가 그나마 여론전이라도 할 수 있게 한 신의 한 수가 됐다.

이준이 서울에서 출발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과 합류했고, 이준과 이상설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이범진을 찾아갔다. 6월 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특사 일행은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내는 고종의 친서를 소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여기서 열흘가량 소요하며 활동에 필요한 외교 서류들을 준비하는 한편 니콜라이 2세를 만나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1906년에는 이미 러일 협약이 한창 진행 중이었고, 처음 이범진에게 만국 평화 회의 초청 사실을 알렸던 1904년과는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결국 이들은 니콜라이 2세를 알현하지 못했으며, 고종의 친서만 외무부에 접수할 수 있었다. 이들은 이범진의 주재로 러시아 호위병의 호위를 받아가며 베를린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했다.

4. 만국평화회의 입장 실패[편집]

만국평화회의는 6월 15일에 시작됐다. 이보다 열흘쯤 늦은 6월 24일 ~ 25일경에 헤이그에 도착한 특사는 호텔에 숙소를 정하고 숙소에 국기를 계양한 뒤 공식 활동에 돌입했다. 일본은 헤이그에서 특사들이 회의장 입장을 요구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특사가 파견됐음을 알아챈다. 이들은 한국에서 헐버트를 감시했는데 헐버트가 일본까지 이동하며 일본의 눈길을 끄는 동안 특사 셋이 러시아를 거쳐 헤이그로 간 거였다. 여기에 헐버트 역시 비슷한 시기에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프랑스 파리를 거쳐 헤이그에 도착했다. 당시 조선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는 헤이그에서 특사가 목격됐다는 전보를 받고 노발대발하며 고종에게 찾아가 따졌다.[6]

헤이그에 간 것까진 좋았는데 대한제국 사절단의 만국 평화 회의 회의장 입장은 거절된다. 그래서 그들은 만국 평화 회의 의장인 러시아의 넬리도프 백작에게까지 찾아가 일본의 국권 침탈을 설명하고, 의장 직권으로 참석시켜줄 것을 요구했다. 넬리도프 백작은 개인적으로는 이들을 동정했으나 이미 러시아 본국에서 대한제국 특사들은 절대 받아들이지 말라는 밀명을 내려놓은 상황이었던 터라 결국 유야무야 말을 돌리면서 이들의 회의 참석을 거절했다.[7] 미국, 프랑스, 중국, 독일 등 열강 대표단에게도 회의 참석 협조를 요청했지만 소용 없었다.

7월 5일, 특사의 정사인 이상설이 회의장에 나가 호소문을 발표했다.
우리들은 삼가 황제의 뜻을 받들고 귀국 총통과 대표에게 눈물로써 고하나니 우리 한국이 1884년에 자주 독립국이 된 것은 공인된 사실이고 이로써 각국과 수교를 계속해 온 것이다. 그러나 1905년 11월 17일 이후 일본이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압박하여 각국에 대한 국제 교섭의 권리를 강탈하였다.

현재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해 취하는 사례를 두세 개 열거해보면,
  • 모든 정무를 우리 황제의 승인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시행하는 것
  • 일본이 육해군의 세력을 믿고 한국을 압박하는 것
  • 일본이 한국의 모든 법률과 풍속을 파괴하는 것

등이니 총통께서는 정의에 근거하여 처단하라.

한국은 자주국인데 어째서 일본이 한국의 국제 교섭에 간여하여 우리나라 황제의 명을 받든 사절단이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가?
귀국 총통 및 대표는 위기에 빠진 약소국을 돕고 조력을 베풀어 우리 사절단을 만국 평화 회의에 참석시키고 모든 호소를 허용하기를 간절히 바란다.[8]

같은 날 <만국평화회의보>를 발행하던 영국 출신 언론인 윌리엄 스테드와 이위종의 인터뷰가 있었다.[9][10] 윌리엄 스테드는 6월 30일 이미 <만국평화회의보>에 사설로 헤이그 특사의 입장을 옹호하는 주장을 싣기도 했다. 이날 이위종은 매우 직설적이고 공격적으로, 국제 정치의 핵심을 꿰뚫는 거침없는 발언을 보여준다.
스테드: 여기서 뭘 하십니까? 왜 이 평화 회의에 파문을 던지려 하십니까?
이위종: 저는 아주 먼 나라에서 왔습니다. 이곳에 온 목적은 법과 정의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각국 대표단들은 무엇을 하는 겁니까.
스테드: 그들은 세계의 평화와 정의를 구현하려는 목적으로 조약을 맺게 됩니다.
이위종: 조약이라구요? 그렇다면 소위 1905년 조약(을사조약)은 조약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황제의 허가를 받지 않은 채 체결된 하나의 협약일 뿐입니다. 한국의 이 조약은 무효입니다.
스테드: 하지만 일본은 힘이 있다는 걸 잊으셨군요.
이위종: 그렇다면 당신들의 정의는 겉치레에 불과할 뿐이며 기독교 신앙은 위선일 뿐입니다. 왜 한국이 희생되어야 합니까? 일본이 힘이 있기 때문인가요?
이곳에서 정의와 법과 권리에 대해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왜 차라리 솔직하게 총, 칼이 당신들의 유일한 법전이며 강한 자는 처벌받지 않는다고 고백하지 못하는 겁니까?

이 인터뷰는 이 문서 맨 위에도 있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특사 세 사람의 사진과 함께 <만국평화회의보>에 보도된다. 상황이 이리 되자 특사들은 언론전으로 방향을 돌렸다. 7월 9일 각국 신문 기자단이 주최한 국제 협회에 귀빈으로 초대받아 연설할 기회를 얻은 것. 당시 회의장 주변에는 150명 이상의 언론인과 시민 운동가들이 몰려든 상태였다고 한다. 미국 공사, 유럽 공사, 러시아 공사를 역임한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이 합류한 것이 여기서 신의 한 수가 됐다. 이위종은 아버지를 따라 미국, 러시아에서 성장해 영어, 러시아어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 초급 장교 훈련을 받은 바 있어 국제 외교가에서 공식 언어로 통하던 프랑스어도 구사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인들 중 서양 3개국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이위종 뿐이었다. 이 자리에서 이위종은 세계 각국의 기자들을 상대로 한국의 호소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해 을사 조약의 부당함과 일본의 조선 침략을 규탄했다. 이 연설문 전문은 스테드에 의해 <만국평화회의보>에 게재되고, 기자단 사이에서는 즉석에서 만장일치로 한국을 동정한다는 결의문을 통과시키는 등 언론인들과 운동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게다가 서구 언론은 이위종을 '조선의 프린스' 쯤으로 보도했다. 이위종이 전주 이씨였기 때문인데, 사실 이위종은 '낙동염라' 이경하의 손자로 광평대군파였다.[11] 오지게 먼 친척
일본인들은 항상 큰 목소리로 얘기합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일본의 국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계 문명인으로서의 일을 하는 것이며, 개방 정책을 유지하며 모든 국가에 동등한 기회를 보장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그들은 변합니다. 놀랍게도 원통하게도 그들은 모든 나라에 대한 정의롭고 평등한 기회 대신 추하게, 불의하게, 비인도적으로, 자기 욕심대로, 결정적로 야만적인 정책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중략) 이들에 따르면 을사조약은 우호적으로 체결되었지만, 우의와 형제애를 말하면서 그 뒤통수를 치는 일본의 강도보다도 더 비열한 짓이었습니다. (중략) 한국인들은 아직 조직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토록 무자비하고 비인도적인 일본의 침략이 종말을 고하기 위하여 하나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일본은 반일 정신으로 무장한 2천만 한국인들을 모두 죽여 없애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출처

연설에 대한 반응만큼은 만족스러웠다. 이위종의 위 연설이 헤이그에서 발행되던 《Haagsche Couront》에 게재되는 등 각국 언론들의 주목을 받고, 대한제국을 지지하는 성명서가 만장일치로 채택되긴 했으나 상황이 달라지진 않았다. 당시는 국제연합(UN)이 없던 시절이라[12] 힘의 논리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어 측은한 반응을 보일 뿐 거기까지였고, 심지어 이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지지한 것처럼 보였던 영국인 윌리엄 스테드 역시 일본을 비난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1904년의 영일동맹 때문). 게다가 이때, 이들이 친조선파 언론인이라 생각해 가능한 한 모든 정보를 알려줬던 일본 특파원은 직함이 언론인이었을 뿐 실은 일본 대사의 첩보 요원 노릇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행동은 실시간으로 일본에 유리하게 왜곡되어 조선에 전달되었다.

또한 일본은 조선이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을 때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서양과의 교류를 활성화하고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며 스스로 서구의 강대국들과 나란히 할 정도로 국력을 증강했고 이를 통해서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을 통감정치를 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그에 비하면 조선은 일본에 비해서 쇄국정책으로 인해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에 가서야 서양과 뒤늦게 본격적인 교류를 하면서 국력을 증강하려고 하였지만 이미 서양과의 교류를 선점한 일본에 비해서 서양의 강대국들과 그리 밀접한 관계를 갖지 못하였고 결국에는 일본에 의해서 을사조약 강제체결까지 당하게 되는 수난도 겪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그 당시 조선의 국력은 약하였고 이미 서양을 상대로 선점교류하며 국력을 증강한 일본이 앞서갔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서양의 강대국들 조차도 자신들과 뒤늦게 교류하고 일본의 통치를 받게 된 조선보다는 자신들을 선점적으로 대면하고 밀접한 관계를 통해서 서양과 나란히 국력을 증강하였던 일본의 편을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막대한 재력(財力)을 가지고있는 일본의 존재 또한 무시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5. 고종의 장기집권 비판[편집]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이 당시 이위종은 연설에서 일본제국뿐 아니라 고종의 만행도 고발했었다.
장기집권으로 인한 부패, 과도한 세금징수와 가혹한 행정에 허덕여왔던 한국 국민과 정부는 애원과 희망으로 일본인들을 환영하였다. 그 당시 한국인들은 일본이 부패한 정부 관리들을 엄격히 처벌해 주고, 일반 백성에게는 정의감을 북돋워 주고, 정부 당국의 정치․행정에 대해 진실한 조언자가 되고, 한국민들의 개혁운동을 잘 인도해 줄 것으로 확신하였다. 일본인들은 거듭하여 그들의 한국 진출은 그들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문명국들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문호개방과 모든 백성을 위한 기회균등의 보존을 공고히 하기위함이라고 극구 강조하였다

이위종
오영섭. (2007). 이위종의 생애와 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9, 15-16
이위종은 미국과 프랑스에서 근대교육을 받은 경력이 있으며, 근대사상의 조류들이 유행하는 시기에 청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철저한 근왕주의자인 이범진보다 정치사상 면에서 진보된 모습을 보였다. 그는 1896년 7월 한국을 떠날 때만 해도 부친의 영향으로 나이 어린 야무진 군권주의자의 면모를 지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1907년 7월 헤이그 국제협회에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연설을 했을 때에 대한제국의 장기집권으로 인한 부패, 과도한 세금징수, 가혹한 행정 등으로 인해 인민이 고생하고 있음을 인정했을 뿐더러 그러한 정치를 ‘구체제하 정부의 잔혹한 정치’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이는 이위종이 고종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고종의 통치에 대해서 깊은 불만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1919년 8월에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국민들만이 미국인들처럼 사리사욕을 쫓지 않고 박해받는 자들의 자유를 위해 진정으로 투쟁할 수 있다”며 미국의 자본주의체제를 비판하고 사회주의를 적극 지지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는 이위종의 정치사상이 군권주의에서 민주주의를 거쳐 사회주의로 전환해 갔음을 나타내 준다고 생각한다

오영섭. (2007). 이위종의 생애와 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9, 43-44

6. 이준의 순국[편집]

7월 14일, 별다른 진전이 없는 상황에서 이준은 투숙하던 헤이그의 호텔에서 사망했다. # 동영상 초반에 호텔방 이것을 보고 후에 변절한 황성신문장지연이 위암문고에서 "할복 자살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자 내장을 꺼내 던졌다더라."고 기술했다. 장지연 자신의 변절 행위가 민망해서 그랬나

이준의 사인에 대해선 이런 저런 추측들이 많이 있었으나 헤이그의 문서 보관소, 사망 당시의 신문 등을 살펴보아도 사망 사실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 정확한 원인은 나와 있지 않다. 실패로 인한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홧병에 걸려 병사했다는 설이 강하나 정설은 아니다.

당시 현지의 한 언론은 이준이 뺨 종기를 앓았으며, 종기 처치 도중 상태가 악화되어 사망한 것으로 보도했다고 한다는데 출처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1907년 7월 16일 네덜란드 현지 신문인 뉴 코란트 신문에서 "장례연설은 없었고 아주 조용하고 침묵한 분위기속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 그때 같이 왔던 한국 사람이 큰 소리로 통곡하면서 울기 시작했고 자기의 삶을 앗아간 것처럼 심하게 통곡을 하였다."라고 보도했으며, 1907년 7월 16일 미국 뉴욕 타임즈 신문에서는 "이준의 장례식 후 그의 죽음이 자살이라는 소식이 퍼지기 시작했다."라고 보도했다.출처

일본의 첩보문서에 의하면 이준의 얼굴에 난 종기를 조사해보니 이준이 단독이라는 병을 앓았고 그로인해 사망한걸로 보인다면서 세간에 자살설이 돌고 있지만 단독으로 인해 사망한 사실이 알려질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단독은 연쇄상구균이나 포도상구균으로 인해 피부에 감염되는 질환인데 세균에 감염되면 2일정도가 지난후에 고열과 오한 및 두통과 피로감을 동반하는 증세가 나타난다고 한다. 치료는 페니실린, 에리스로마이신같은 항생제를 투여하는데 이준이 사망한 당시는 페니실린이 개발되기 30년도 전의 일이다. 현지언론에서 뺨의 종기를 거론한것이 이 단독의 증세를 말한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또 하나의 유력한 설은 감기로 인한 사망이다. 이준을 포함한 특사 3인이 회의장 앞에서 입장을 요구할 때 헤이그에 큰 비가 내렸는데, 이때 이준이 고뿔이 걸려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했다는 것. 이런 설들을 종합한다면 이준이 감기에 걸린 가운데 몸을 돌보지 않고 외교전을 펼쳤고 면역력이 약해진 가운데 세균에 감염되어 단독에 걸렸고 사망했을것이란 추정이 가능할수도 있다.

또는 이준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본 측에서 독살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당시의 정황을 본다면 일본이 이준을 독살했을 가능성은 희박해보인다. 왜냐하면 7월 10일 헤이그에 도착한 헐버트가 미국으로 가서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하룻만에 헤이그를 떠났고, 이위종은 러시아에서 아내의 위독소식을 전해듣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장외외교전도 중단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7월 10일부터 이준이 사망하는 7월 14일까지 이준의 행적이 묘연한걸로 보면, 일단 만국평화회의가 이후로도 3개월이나 더 기간이 남았기 때문에 이준은 잠시 대기하면서 헐버트의 미국외교의 성과와 이위종의 복귀를 기다리며 대기하다가 병세가 악화되었을거란 추측이 가능하다. 이런 상황이라면 굳이 일본이 이준을 독살할만한 동기는 떨어져보이는 상황이며, 자칫 잘못했다가 이준의 죽음에 일본이 관여했다는 조금의 의심이라도 나온다면 국제여론이 악화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도박을 하진 않았을거란 지적도 있다. 일본의 이준 감시기록에 사망당시 이준의 얼굴에 난 종기를 조사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면 일본 또한 이준의 자살설 혹은 일본에 의한 독살설이 퍼지는것을 우려했을거란 추정도 나온다.

여하튼 결국 지금에 와서는 국사 교과서에서도 호텔에서 "이준 열사는 헤이그에서 순국했다."고만 밝히고 있으며 정확한 사인을 적지 못하고 있다. 죽음의 원인이 어떻게 됐든, 조국의 주권을 항변하기 위해 조국에서 이역만리 떨어진 외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도중 객사한 것이니 열사의 순국이라 불리는 데 부족함은 없을 것이다.

이준 열사의 유해는 헤이그 교외의 뉴 아이큰다우(Nieuw Eykendunen) 공동 묘지에 가매장되었으며, 미국 일정을 마치고 헤이그로 돌아온 이상설과 이위종은 이준 열사의 유해를 뉴브다이컨 묘지로 이장했다. 이준의 유해는 56년이 흐른 뒤인 1963년에야 서울 수유리에 이장되었다.

파일:external/www.yijunpeacemuseum.com/01_01_img.jpg
이준열사가 순국했던 호텔 자리는 1995년부터 '이준 평화 박물관(YI JUN PEACE MUSEUM)'이 건립되어 있다. 현지 교포 이기항의 노력으로 매입되어 유지, 관리 중이며, 헤이그 특사 관련 유물들이 다수 전시되어 있다. 프랑스 파리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 위원부 청사와 더불어 유럽에서 드문 한국 항일 유적지이다.#

7. 헤이그 특사의 이후 행보[편집]

이준 열사의 순국 이후 남은 이상설과 이위종은 외교 행보를 이어나간 것이 최근 확인되었는데 흥사단 측에서 발굴한 앨리스 아일랜드의 출입국 기록에서 이상설과 이위종의 기록을 찾아낸 것.

미국으로 떠나기 전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를 가졌다. 이 인터뷰 내용을 싣은 1907년 7월 25일자 <알게마이네 차이통>의 기사가 2019년 3월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내가 살해당해도 나를 위해서 아무런 신경을 쓰지 마라. 너희들은 특명을 다하라. 대한제국의 독립주권을 찾아라."는 고종황제의 마지막 전언을 같이 싣고 "이위종 왕자는 미국에 가서 일본의 한국탄압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알리고 미국의 주요 도시들을 방문하고자 한다고 말했다"면서 "그리고 나서 몇 주 후에 런던으로 돌아와 런던에 회사를 차리고, 대한제국에서 펼치는 일본의 식민정치에 대항하는 일을 할 것이라고 했다"고 전했다. 또, "헤이그에서 그들의 임무가 실패했더라도, 그들에 대해 뭐라 말하지 못할 것"이라며 "특히 대영제국, 프랑스, 독일, 미국의 대표사절단은 한국의 상황에 깊은 동정심을 표했고 도움을 줄 것을 확인했다"고 적었다. 인터뷰 말미에 대표단은, '고종의 강제퇴위는 일본의 돈과 한국인 변절자들이 만든 것'이라 했다"고 전했다.

기록에 의하면 이상설과 이위종은 사우샘프턴에서 마제스틱호를 타고 1907년 8월 1일 미국 뉴욕항에 도착했으며 입국 심사에서 자신들을 고종 황제의 특사로 소개하고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기 위해 왔다고 말한 것이 확인된 것.

이후 이상설과 이위종은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이동한 것이 확인되는데 루즈벨트를 만나 친서를 전달하는 건 실패로 돌아간걸로 보인다.

8. 실패의 이유와 평가[편집]

우선 헤이그 특사 파견 전인 1905년에도 고종은 미국에 헐버트를 파견해 도움을 요청하지만[13] 이미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은 미국은 대한제국을 도와주려 하지 않았고, 결국 을사조약은 체결되었다. 고종은 1907년 만국평화회의에 다시 한 번 외교적 수단을 동원한 것이었다.
고종과 밀사들은 이번만큼은 서양 여러 나라들의 공개적인 회담이기에 이를 공론화하기만 하면, 열강들이 그냥 지나칠 리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이미 손을 써서 영국과 1차 영일동맹을 맺고, 미국과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다. 그리고 러시아와 청나라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패하여 영향력이 줄어든 상태. 특히 러시아는 외교적 수단으로라도 일본을 계속 견제하려 했지만, 만국 평화 회의 참석을 제안했던 1904년과 1907년에 이르러선 러일간 외교적 합의가 이뤄지며 상황이 일변했다.

이 만국 평화 회의에는 공식적으로 한국의 자리가 있었다. 그것도 47개국 가운데 12번째로. 그리고 회담 내내 "참석국은 47개국"이라고 언급되었다. 대한제국 특사가 참석하지 못한 원인은 흔히 알려진 외교권 박탈에 따른 무시나 초청장의 부재가 아니라, 일본의 방해와 대표성의 부실 때문(…). 의장 넬리도프는 본국으로부터 대한제국 특사들이 협조를 요청하면 정중히 거절할 것이라는 훈령을 받은 상태였다. 이들은 부의장이었던 네덜란드의 보폴트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으며, 보폴트는 네덜란드 정부와 상의하도록 주선했다. 주최국이었던 네덜란드도 대한제국의 회의 참석에는 이의를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나중에 일본 대표가 네덜란드 정부에 일본 국가 명의로 '조선'은 일본의 속령 지역이니만큼 귀국(네덜란드)께서는 조선 대표의 회의 참가를 불허해주시기를 바랍니다[14]라고 은밀히 압박을 놓았기 때문이다. 국제사회 대부분이 을사조약을 인정하고 자국의 대한제국 주재 영사관을 철수시킨 마당에 대한제국을 변호해줄 강대국은 있을 리 없었다.

이 점에 있어서 고종이 국제 정세도 모르고 안일하게 행동했다고 비판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미 나라의 군사력은 거의 궤멸 상태고(이 사건 이후로 정미 7조약으로 군대는 완전히 해산) 황제는 일제의 감시 아래 손발이 다 묶인 상황이었는데 사실 할 수 있는 카드는 외교적인 수단밖에 없었다. 고종으로서는 나름 최선을 다한 것이다. 일본이 조직적으로 방해하는 상황에서 달리 해볼 수 있는 방법은 그때 상황에서는 전혀 없었다. 헤이그 특사는 고종에게 있어서 최후의 몸부림이었다. 나름대로 큰 위험을 감수하고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는 최후의 저항을 선택한 것은 '업적'으로까지 평가받지는 못할지언정 안일했다고 비판받을 일은 아니다.

여하튼 이 사건을 계기로 이토 히로부미이완용, 송병준과 작당해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고, 순종이 즉위하게 된다.

아키야마 요시후루도 이 헤이그 회의에 참석했는데, 이때 한국의 헤이그 특사들을 저지했을 것이란 추정이 있다. 그런데 그는 정작 회의에서 열심히 졸고 있었다고.

즉 헤이그 특사 당시 주변국과 열강들의 상황을 보면
  • 청나라 - 청일전쟁으로 한반도 이해관계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 러시아 - 마찬가지로 러일전쟁에서 패배해 대한제국서 손을 떼어 도움을 줄수 없었다.
  • 영국 - 영일동맹으로 러일전쟁때 일본의 편을 들어줬고 일본의 동맹국으로써 당연히 대한제국의 도움을 외면했다. 또 영일동맹을 맺을때 인도는 영국이, 한반도는 일본이 지배하기로 합의한 상황.
  • 프랑스 - 19세기 후반부터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긴밀한 협약을 맺었으며 과거 삼국간섭으로 일본을 엿먹인 전적이 있긴했지만 러일전쟁후 외교관계에서는 가급적 일본의 우방국을 유지했기에 대한제국의 도움을 외면했다.
  • 미국 - 러일전쟁때도 영국과 함께 일본에 막대한 금융지원을 했었고 결정적인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의 편을 들어줬다. 밀약을 맺으며, 필리핀은 미국이, 한반도는 일본이 지배하기로 합의한 상황.
  • 독일 - 영프를 견제하기 위한 삼국동맹 당사국이였으며 영일동맹을 의식하여 1902년 빌헬름 2세가 고종의 친서를 받고 고종한테 답장을 써주기도 했지만... 아시아에서 칭다오와 뉴기니 신경쓰기도 바쁜 당시 독일이 영국, 일본과 직접적으로 충돌 하면서 까지 대한제국에 도움을 줄수는 없었다.
  • 오스트리아-헝가리 - 독일과 같은 삼국동맹 당사국중 하나였지만 발칸반도 식민지로 러시아와 다투기 바빴으며 마찬가지로 일본과 척을 지면서까지 아시아에서 대한제국을 두둔할 생각은 없었다.
  • 이탈리아 - 이탈리아도 삼국동맹 당사국이였지만 20세기 초부터 점점 영프와 밀월한 관계를 구축하기 시작했으며 아시아와 대한제국에 그다지 이해관계가 없었던 이탈리아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 한자로는 해아(海牙)라고 한다. '잘왔군 타령'에서 화자2가 해아 일로 나왔다고 하는데, 헤이그를 기리키는 말이다[2]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했으므로 당연히 이범진의 지위도 무력해진 상황이었지만, 이범진은 본국의 호출도 씹고 경술국치까지 버티며 공사관 업무를 지속했다. 경술국치 후엔 결국 자결하지만...[3] <대한계년사> 중 김현토 관련 내용. 다만 대한계년사를 지은 정교는 당시 연해주에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기록을 그대로 신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김현토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한국어 강사, 통역 역할을 한 적이 있는 것은 사실로 보이며, 김현토의 이용익 암살은 양쪽의 파벌 차이 때문이었다.[4] 찹쌀떡 장수가 외무 대신이 된 것으로 유명했던 바로 그 친일파 이하영이다.[5] 과거의 성균관 대사성.[6] 일설에 의하면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얼굴이 벌개져서 고종에게 "조선이 이렇게 비열한 방식으로 국제 사회에서 일본을 난처하게 만드느니, 차라리 일본한테 전쟁을 선포하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출처: 이순신과 이완용/ 허준 지음/ 카푸치노문고[7] 일제의 견제가 없었더라도 들어갈 확률이 희박했다. 일본과의 을사조약으로 인해 대표가 일본이나 마찬가지기 때문.[8] 박은식 <한국통사>, 위키피디아에서 재인용.#[9] 이 문서를 읽는 이들에겐 듣보잡이겠지만, 최초로 신문과 잡지의 보도에 삽화를 삽입하는 보도 기법과 현재 모든 기자들이 조사를 위해 반드시 하게되는 '인터뷰 기사' 형식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등 오늘날 전세계에서 활동하는 기자들에게 지침표를 마련한 인물. 이후 다른나라에 가기 위해 배를 탔는데 불행히도 그배가 타이타닉호여서 그곳에서 탈출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참조[10] 2020년 2월 23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자세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영국의 아동매춘에 대한 실태를 폭로하여 법 개정을 요구하는 등 여러모로 정의로운 행보를 보여준 기자였다고 한다. 노벨상 후보까지 거론되었다고. 게다가 타이타닉호엔 일등석으로 탑승한 승객이어서 충분히 탈출할 수 있었으나, 이를 다른사람에게 양보해주었다고 한다.[11] 이준 역시 이성계의 형인 완풍대군 이원계의 후손으로, 전주 이씨다. 이상설은 경주 이씨.[12] 유엔은 2차 대전 이후 창설되었다.[13] "왜 하필이면 수많은 나라 중에서 미국이냐?"는 물음에 대한 답은, 고종이 1882년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의 제1항 '거중조정' 항목을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거중조정이란 현재의 상호 방위 조약처럼 상대국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도와주겠다는 선의의 조항이었다. 바보처럼 고종이 이 조항을 믿어버렸다는 비판이 있다. 하지만 옹호해보자면 청일전쟁 당시 평화를 주선한 데 힘쓴 것도 미국이었고, 고종 입장에선 이거 외엔 선택지가 더 없었다. 자국 역량으로는 일본에 맞설 수 없으니, 부작용이 크고 성공률이 낮긴 하지만 뭘 해도 안 될 상황에서는 해볼만 하다고 여겼을 것이다.[14] 비슷한 상황이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해 중화민국의 국제무대 진출을 막는 방식으로 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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