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키신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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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제56대 국무장관
본명
헨리 앨프리드 키신저 (Henry Alfred Kissinger)
출생
1923년 5월 27일 (94세), 독일 바이에른 주 퓌르트
국적
직업
학력
배우자
앤 플라이셔 (1949~1964)
낸시 키신저 (1974~)
종교
신체
175cm
정당
서명
1. 개요2. 생애3. Realpolitik4. 비판
4.1. 남미4.2. 베트남4.3. 대한민국4.4. 캄보디아
5. 저서
5.1. 책
6. 매체
6.1. 책6.2. 게임6.3. 영화6.4. 애니메이션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America has no permanent friends or enemies, only interests.
미국에게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오직 국익만이 존재할 뿐이다.[1]

포린 폴리시 선정 지난 50년간 가장 영향력 있는 미 국무장관 순위 1위 #
20세기의 마키아벨리.[2].

미국의 국제정치학자, 외교관, 행정가. 리처드 닉슨 대통령 밑에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각료급. 한국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에 해당)과 국무장관을 지낸 사람이다. 이 두 자리는 보통 서로 다른 관료들이 맡게 되어 있지만, 키신저는 이 둘을 자기가 번갈아 맡게 됐다.[3] 쉽게 말해 외교 정책의 전권자. 닉슨 행정부 시기, 미소 '전략무기 제한협정'(SALT), 중국과의 관계 개선 등을 통해 공산진영과의 데탕트(Detente: 긴장완화)를 성사시킨 주역으로 유명하다.

한스 모겐소케네스 월츠와 같은 대가는 아니었지만 수준급의 학자였고, 그런 실력과 지식을 바탕으로 현실 국제정치에서 역사에 남을 성과를 달성했다. 국제정치학 전공자들 중에서 일종의 덕업일치를 이룬 대표적 인물. 부시 행정부에서 같은 코스(백악관 안보보좌관->국무장관)를 걸었던 콘돌리자 라이스의 선배격. 폴리페서들의 롤모델

칠레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정권 지원 문제에 관한 것 때문에 거센 비판을 받고 있다. 당시 헨리 키신저의 악행이 세계기록유산에 공식적으로 등재되기까지 할 정도이기 때문에(그것도 한두개가 아니다.)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키신저를 냉전기 미국이 저지른 온갖 더러운 행위의 배후로 지목하며, 그를 전쟁 범죄자로서(인본주의자 입장에서) 국제법정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데?[4][5][6]

2. 생애[편집]

1923년 독일 바이에른에서 유태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본 이름은 독일식인 '하인츠 알프레트 키싱거(Heinz Alfred Kissinger)'였고, 헨리 키신저는 미국 이민 후 영어식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젊은 시절의 모습. 1950년 하버드대 졸업 사진이다
1938년 나치의 유태인 박해를 피해 가족 전체가 미국으로 이민했고, 고등학교 졸업 후 뉴욕 시립 대학교에 입학하여 회계학을 파트타임 학생으로써 공부했다. 1943년 초반에 미국 군대에 입대함으로 학업이 중단되었다. 이때 훈련을 받으면서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고 2차 세계대전에 미국 군인으로 참전했다. 미국으로 귀국해서는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했다. 정치학을 전공한 그는 1950년 학사 학위를 최우수(summa cum laude) 성적으로 취득했다. 그후 동 대학에서 1951년에는 정치학 석사, 1954년에는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박사 학위 취득 후 동 대학에서 국제정치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정부 관련 일을 했다. 1957년에 <핵무기와 외교>라는 저서에서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대량보복전략'을 비판하여 학자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7] 아울러 그는 19세기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오스트리아메테르니히가 주도했던 '빈 체제'에 정통했는데[8], 이는 훗날 자신이 외교관으로 재직할 때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69년 리처드 닉슨이 미국 대통령이 되자 국가안보보좌관에 발탁되었다. 이 당시 키신저의 업적중의 하나가 베트남전을 종식(정확히는 평화협상 체결)시킨 것이었다. 당시 북베트남이 전략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고 미국과의 협상을 거부했는데, 미국으로서는 아무리 전술적인 승리를 거두어도 답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닉슨 행정부는 핵전쟁으로 페이크를 걸면서 소련을 위협함으로서 소련을 움직여 북베트남을 협상장으로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허세와 쇼를 적절히 섞은 전략을 미치광이 전략이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미국은 모양새를 어느정도 유지하고 베트남전에서 발빼는데 성공했다. 물론 덕분에 남베트남은 포드 년간에 망하고 말았지만.

1971년 7월, 미국 최고위급 인사 중에서는 역사상 최초로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극비 방문했다.[9] 자세한 기사는 여기 참조. 미국측 비밀 특사로써 저우언라이마오쩌둥을 만나 미중 양국의 관계 개선방안을 논의했고, 이듬해 닉슨의 중국 방문을 성사시켰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키신저는 오늘날까지 미국에서 대표적인 친중 인사로 손꼽힌다. 반대로 대만에서는 천하의 개쌍놈 취급받고 있겠지
마오쩌둥과 함께. 뒤쪽에는 저우언라이가 보인다
1973년 닉슨이 재선되자 백악관 안보보좌관 직책에 국무장관까지 겸임했다.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에게서 대통령직을 승계한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서도 두 직책을 계속 지키다가, 1975년에야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10]에게 물려주고 국무장관 직에만 전념한다. 1977년 지미 카터의 대통령 취임 이후 공직을 떠났고, 40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 외교계의 원로대접을 받으며 여생을 보내는 중이다.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은 김대중 납치 사건 때 헨리 키신저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것을 계기로 그와 개인적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키신저는 김대중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자기처럼 예정된 일이었다며 축복하였고, 당시 국내 언론은 키신저를 평화의 전도사처럼 소개하였다. 물론 키신저는 결코 선의의 평화주의자가 아니며, 타국 정치에 대한 개입이나 독재에 대한 옹호도 서슴지 않은 냉혹한 현실주의자였다. 오히려 유신정권 때 한국에 개입하여 정권교체를 하자는 주장을 거부했었는데 김대중과 친해진 게 아이러니.

국제정치학의 관점에서 볼 때 키신저는 전형적인 고전적 현실주의자이다. 그는 학자로서도 한스 모겐소와 케네스 월츠 사이의 가장 중요한 현실주의 학파 국제정치학자 중 한 명이다. 이들은 도덕을, 승자의 정의이자 포장된 권력 유지 이념으로 보기 때문에 국제정치에서 합의 가능한 도덕이 존재하는가에 대해 굉장히 회의적이다. 그들에게 국제정치의 유일한 정의는 권력(power)과 국익(national interest)이다. 따라서 키신저의 냉정하고 교활한 국익 추구는 현실주의 국제정치학파의 입장에서는 이견 없이 합리적인 것이다. 현실주의자들의 입장은 간단하다. 일견 비도덕적이고 냉혈하게 보이는 행동들이 도덕적 행동들보다 차라리 평화를 지키는데 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타국에 대한 내정간섭이나 독재에 대한 옹호로도, 중국과의 핑퐁외교와 같은 유연한 정책으로도 드러날 수 있다. 따라서 키신저의 도덕성에 대한 공격은 현실주의 학파 전체에 대한 공격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들은 이미 이 문제에 관해서는 학파 발생시기부터 자유주의 학파와 죽어라고 싸우느라 이골이 난 사람들이다(…).

키신저가 네오콘의 스승이라는 공격이 있다. 그런데, 키신저는 네오콘을 싫어했다. 심지어 전향한 놈들이라고 깠다[11]. 또한, 1960년대 미국의 트로츠키파 학생운동권이 이후 대거 네오콘으로 전향한 것을 두고 신뢰할 수 없는 인물들이라 평가했다. 또한 키신저는 국무장관 시절 파격적으로 친중 노선을 주도했던 사람이다. 현실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네오콘의 사상은 이상주의적이기 짝이 없는 순진한 발상이다. 미어샤이머를 비롯한 다수의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들이 뉴욕 타임즈에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광고를 냈다. '국가간 상호 협력으로 평화 유지가 가능하다'고 믿는 자유주의자들이 보기에는 네오콘의 주장은 너무나 일방적이다. 이는 네오콘 자체가 국제정치학의 학파들처럼 깊은 학문적 뿌리를 가졌다기보다는 그냥 여기저기서 자기 입맛에 맞는 개념만 끌어다가 만든 키메라에 가깝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의외로 NLL이 국제법상 문제가 있다고 발언했었던 것이 알려지기도 했다. #

도널드 트럼프에게 모든 공약을 지킬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트럼프가 친러적인 사람을 국무장관으로 한건 훌륭한 선택이라고하였다. 그리고 이 기사에 따르면 키신저가 닉슨이 중국을 이용해 소련을 견제한거처럼 훗날 강해지는 중국을 상대로 러시아를 이용해야한다고 예견했었다고한다 #

3. Realpolitik[편집]

키신저의 외교, 정치관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바로 현실정치(Realpolitik) 이다. 이념이나 도덕보다는 현실적 권력에 따라서 정치, 외교를 수행해야 한다는 이론으로, 르네상스 시대의 군주론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20세기 초 유럽과 전 세계에 민족자결주의를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를 퍼트리려고 한 윌슨주의(Wilsonianism)이 이상정치(Ideapolitik)에 가깝다면[12] ,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이든 상관 없다고 말하는 키신저의 주장은 현실정치에 해당한다. 키신저 본인은 자신이 Ideapolitik과 Realpolitik의 균형을 맞추려고 했다고 해명한다.

4. 비판[편집]

우리가 정의로운 세상에서 살고 있다면, 키신저는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언론인이자 비평가 크리스토퍼 히친스, <<헨리 키신저의 재판>
전쟁범죄. 인권 탄압. 학살. 내정개입. 납치. 암살. 고문

존 루이스 개디스의 『냉전의 역사』에서는 키신저를 디스하는 내용이 많다.이름부터 개디스니까 키신저의 정책은 MAD에 의거해 미소 냉전이 끝없이 계속되는 상황을 가정하여 수립된 것이었는데, 이는 베트남전과 중소분쟁 이후 다원화되어가는 시대상을 무시한 단편적인 결론이었다는 게 골자. 그래서 이 책에서는 SDI를 계획한 로널드 레이건을 빤다. 이런 비판과는 별개로 키신저는 "책 내용에 대해 전부 동의하지는 않지만 훌륭한 책."이라는 평을 했다. 이것도 사실 옛날 얘기다. 1941년생 할배가 학계 내에서 탑으로 군림하고 있으면, 젊고 새로운 인재 풀이 없다던가 그 학계에 뭔가 문제가 있는 거다. 원로로서 대우해 준다는 것과 진짜 그 이후로 개디스를 학문적으로 뛰어넘은 학자들이 없다는 건 완전히 다른 소리고, 실제로 그렇지도 않다. 당장 하술된 토니 주트만 하더라도 '기승전미국만세나 외치며 자국을 미화하고 유럽의 복잡한 이념과 정치를 깊이 있게 공부하지 않는다. 미국에서나 팔릴 법한 학자이다.'라며 개디스를 가루가 되도록 깐 바가 있다.

미국을 지지해주기만 하면 독재정권도 옹호하고 지원했다. 이런 모습은 미국이 민주주의의 편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냉전이 지속되면서 자본민주진영vs공산독재진영이라는 레토릭과는 달리 수많은 독재정권이 친미정책을 피며 정권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는 독재를 겪은 나라들에서 반미주의가 퍼지는 데 영향을 끼치게 된다.

4.1. 남미[편집]

키신저를 깔 때 쓰이는 단골소재이자 악행.

가장 유명한 것은 칠레이다. 그는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을 무너트리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독재정권을 지원했다는데 분명한 책임이 있다. 이미 닉슨 시절부터 그가 칠레 군부를 지원할 의도가 있었음을 CIA 문서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후 칠레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반공 전선" 운운 하며 환영했다.
그러나 민주정권이 들어서고 피노체트의 실상이 드러나자, 그는 칠레에 대한 언급을 자제했다. 모임에서 누군가가 칠레에 대해 말할려고 하면 그의 보좌관들이 막아 서는 일도 종종 있었다. 나중에 칠레에서 피노체트 정권에 대한 증인으로 소환 요구를 하자, "내가 이걸 해도 될 지 모르겠습니다." 라면서 병을 핑계로 출석을 거부했다.[13] 그는 이에 대해 여러차례 자신의 책에서 변명했다. "그때 당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였다. 칠레 국민에게 유감을 표시한다."

1976년 아르헨티나의 군부 쿠데타도 묵인 혹은 지원해서 이사벨 페론 정부가 붕괴되었다. 또한, 키신저는 남미 최악의 정치 탄압인 콘도르 작전(Operacion Condor)을 조장했고, 브라질과 우루과이, 볼리비아, 파라과이의 독재정권이 민주주의를 탄압하는것에 대해서도 묵인하였다. 콘도르 작전에 참여한 국가는 아르헨티나, 칠레, 우루과이, 파라과이, 볼리비아, 브라질 등이며 이 과정에서 막대한 사상자가 나왔다.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진 '더러운 전쟁(Guerra Sucia)'을 통해서만 최소 1만에서 최대 3만이 사망했고, 1만여명이 실종되었다. 1992년 발견된 '공포의 문서'에서는 이 과정에서 5만명이 살해, 3만이 행방불명, 4만이 투옥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탄압은 1980년대 초중반까지 이어지다가 중남미 전역이 민주주의의 길로 접어들면서 끝이 났지만 그럼에도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미국이 남미에서 독재정권을 오히려 옹호해준꼴이 되었으니 비웃음거리가 된건 덤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남미 군사독재정권들의 행태가 수록된 기록물들이 세계기록유산에도 당당히 수록되는 영광(?)까지 안았으니 정말로 빼도박도 못한 일이 되었다 브라질, 칠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에서 2000년대 초중반에 걸쳐서 1960년대부터 80년대 초중반까지의 군사독재정권의 행적에 대한 기록물들을 유네스코에 신청해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는데[14] 미국에 대한 기록물들도 상당수 들어있다.

2000년대에 기밀해제된 미국 정보 문서에 의하면, 키신저는 남미지역의 쿠데타에 대해서 쿠데타 당일에도 해당 정보를 보고받았다. 이는 콘도르 작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중남미 국가들은 헨리 키신저에 대해서 치를 떨고 있으며, 키신저는 냉전 이후로 중남미 국가들을 전혀 방문하지 못하고 있다. 냉전사의 권위자인 역사학자 토니 주트는 이를 두고 "소위 현실주의자라고 자뻑하는 인간들이 실제로는 자신들의 근시안적인 착각과 음모에 심취하여 장기적인 판을 말아먹는다"며 키신저의 중남미 정책과 그의 대외관 자체를 신랄하게 깠다. 미국의 내정간섭에 진절머리난 중남미권 대부분이 2000년대 이후 좌파/친중/친러 진영으로 돌아선 걸 보면, 꽤나 타당한 평가이다.[15] 토니 주트는 키신저가 메테르니히를 자주 참고했음을 지적하며, 중남미 정책 뿐만 아니라 그의 경력 전반을 조롱한다. "키신저는 (그의 학창시절 연구주제인) 자기가 닉슨이라는 품격 떨어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보필하는 메테르니히라는 착각과 허영에 빠져 있었다. 막상 자신의 직업은 전제군주의 가신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의 국무부 직원이며, 헌법과 여론의 구속을 받는다는 사실은 망각했다"라며, 그는 키신저와 닉슨이 구축한 비밀스럽고 독단적인 대외 정책 수렴 과정을 혹독하게 비판한다. 국무부, 국방부, 의회의 적법한 절차를 무시하며 밀실정치로 이루어지는 대외 정책 결정이, 미국의 민주주의와 장기적인 대외 정책 방향성을 훼손했다는 것이다. [16]

4.2. 베트남[편집]

키신저는 베트남전을 종식시킨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그는 협정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기위해 북폭(폭격)을 확대하는 무리수를 저질렀으며, 출구전략을 만드는 과정에서 핵협박을 했다. 이 때문에 공동수상자로 지명된 베트남 정치가 레둑토는 노벨상을 거부하였다. 그가 노벨상을 수상한 후 이 협정은 3년만에 월맹에 의해 파기되었으며 월남은 월맹의 공격으로 패망하였다. 게다가 협상 파트너였던 레둑토는 수상을 거부하면서 "나는 전시 지도자 중 하나이고, 내 목적은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지, 평화를 이룩하려는게 아니었으니 이 상을 받을 이유가 없다"라는 냉철하면서도 솔직한 발언을 했다. 이와 비교되면서 더욱 능구렁이 위선자 이미지가 박혀버렸다.

4.3. 대한민국[편집]

10월 유신 선포 이후 키신저의 국무장관 집무실에서 열린 참모회의에서 적극적으로 한국에 개입해 박정희정권을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한 필립 하비브 주한 미 대사의 발언에 대해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한국에) 설득하는 것보다 중요한 과제는 현재 상황에서 우리의 국익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일"이라며 거부했다.[17][18]

최근 북한 김정은ICBM 발사 등을 하며 미국에게 핵보유국으로 인정받고 북미 평화협정을 체결하려 드는 속셈을 보이자 간만에 등장해 주한미군 철수를 언급하기도 했는데 월남전 때랑 똑같은 상황을 연출하려 드는 거 아닌가 의심을 받는중. 아닌게 아니라 똑같은 상황이 맞다.어? 1960년대의 그 키신저가 아직도 살아있다고? 그것도 저술활동까지 하면서?

60년대 주한미국 대사관의 문정관이었고 고미술품 수집가이자 문화재 도둑인 그레고리 핸더슨이 한국의 국보급 문화재 143점을 외교행랑을 이용하여 미국으로 대량밀반출 했었는데,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키신저가 장물운반처벌을 규정한 미국 연방법 조항을 한국에 모르게 하라는 지침을 주한미국대사관에 하달했었다.링크

4.4. 캄보디아[편집]

베트남전이 고착상태로 빠져들고 점점 전황이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닉슨정부는 적의 보급로(호치민 루트)를 차단하고자 69년부터 본격적으로 캄보디아라오스의 동부 베트남 접경지역을 폭격하기로 결정한다.

캄보디아가 정신나갔다고 자국 영토를 폭격하는걸 좋아할리 없었을테고, 여기에 (꽤나 공산권과 사이가 좋았던) 시하누크 국왕은 길길이 뛰며 미국을 비난했으나 그게 해가 바뀌어 70년이 되자 상황이 뒤바뀌었다. 바로 친미성향의 론 놀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시하누크를 축출해 버린것.[19][20] 이때 키신저는 캄보디아에 친미정부가 들어서는것에 환영하는 입장이었으며 묵인하는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지원까지 해줬을거란 의혹을 사고 있다.

미국을 사실상의 빽으로 업고 쿠데타를 성공한 론 놀 정부는 곧바로 미국의 폭격을 용인하는 쪽으로 180도 선회했으며[21] 미국은 거칠거 없으니 신나게 베트남전이 종전을 맞기까지 스봐이 리응과 껌퐁 참 지역을 수시로 폭격, 이에 대해서 미국이 얼마나 원래 목적인 "적 보급로 차단"을 수행했는지 여부는 불투명하나 무차별 폭격으로 수많은[22] 캄보디아 양민들이 학살되었으며 이는 국민들이 미국과 캄보디아 정부에 극심한 반감을 가지기에 아~주 좋은 빌미가 되었고 그 결과는...[23]

참고로 키신저가 물러난 이후인 카터 정부는 더 문제였는데, 베트남 캄보디아 전쟁이 벌어지자 미국이 은근히 크메르 루주를 지원했다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24]. 이건 정말로 완벽한 뻘짓이었는데, 우선 크메르 루즈도 공산주의쪽인 것은 마찬가지였고 미국 정가는 이들과 베트남 공산정권의 차이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25]. 즉, 미국이 크메르 루즈를 지원한 것은 순전히 자신들을 약올린 베트남을 엿먹이기 위한 목적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크메르 루즈는 정말 막장 집단이었다는 것이 문제다. 이 때문에 캄보디아에서 미국의 평가는 최악이다. 위의 중남미의 경우 처럼 실제로 현지 상황과 현지의 외교적 조류와 역사, 세세한 집단 간 역학 관계는 하나도 제대로 모르면서 대충 자국의 색안경에만 보이는 편견과 눈 앞의 이익만 따라가다 미국의 대외 정책 역사에 씻을 수도 없는 진득한 오점만 하나 거하게 싸지른 경우로, 이 역시 위의 중남미의 경우 처럼 '현실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지적 게으름과 근시안적 사고방식'이란 비판이 딱 들어맞는 경우이다.

5. 저서[편집]

5.1.[편집]

  • 회복된 세계(A World Restored):키신저의 박사논문을 토대로 빈 체제에 대해 다룬 저서. 북앤피플[26]출판사에서 번역, 출간되어있다.노인층을 대상으로 한 책을 많이 출판하는 출판사다보니 매우 큰 글씨의 조판을 자랑한다.
  • Diplomacy: 키신저의 저작 중에서는 빈 체제부터 냉전까지의 외교사를 총망라해 가장 학술적으로 유명하다.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안에서 번역을 완료해 교정 중이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2017년 현재까지도 출판이 되지 않았다. 덕분에 이 책을 국제정치학 강의교재로 쓰는 대학교 학생들은 영어실력이 급상승한다 카더라. 다크서클은 덤. 키신저와 친분이 있는 서울 소재 모 대학 교수가 번역본 출간을 극구 만류한다는 일설이 있다. 그 교수님 지금은 퇴임하신분인가.. 실제로 한 출판사에서 <Diplomacy>의 번역서 출간을 계획했으나, 해당 출판사의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번역본 출간 작업이 백지화되었다.[27]
  • 헨리 키신저의 중국 이야기(On China): 2012년 민음사에서 출판됐다. 자신이 저우언라이, 마오쩌둥과 만나 핑퐁 외교를 전담했던 얘기를 다룬 것같지만 훼이크고 걍 중국 현대사를 외교사 위주로 구성해 집필한 것이다.
  • 세계 질서(World Order): 2016년 7월 민음사에서 출간했지만 번역이 개판이라 비판을 받았고 이 때문에 최형익 교수가 감수한 감수본이 새로 나왔다.

6. 매체[편집]

6.1.[편집]

니얼 퍼거슨이 그에 대한 일대기를 집필했다. 제목은 키신저, 이상주의자이다. (Ferguson, Niall, Kissinger. Volume 1, The idealist, New York : Penguin Books, 2015.)

6.2. 게임[편집]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선 성전기사단의 일원으로 피노체트, 앱스테르고 사와 서로 짜고 쿠데타를 도와 줬다는 설정으로 나온다.
트로피코 4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크레인 대사는 키신저를 모델로 한 듯. 다만 캐리커처는 다른 인물의 것이다.

6.3. 영화[편집]

왓치맨(영화)에 등장. 소련이 곧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할 것을 보고하며 매우 음험한 인상으로 등장하지만 비중은 별로 없으며 대체역사물로서의 특징을 살리기 위한 역할에 그쳤다. 로버트 위스든이 분한 닉슨과 거의 커플 수준으로 붙어다니고 "대담한 행동! 헨리, 그게 필요해 저 개새끼들이 우릴 얕봐선 안돼!"라고 흥분한 닉슨에게 "예, 모두가 빡돈 리처드 닉슨을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속삭이며 웬지 모르게 흑막같은 느낌도 준다.
막판엔 초토화된 뉴욕을 보고 흥분한 닉슨이 "세상에 헨리! 어째서 소련놈들의 선제공격을 우리가 알아내지 못했지?"라고 외치자 "대통령님, 방금 공격은 소련이 아니라 닥터 맨하탄이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끝이다.

올리버 스톤 감독이 제작한 리처드 닉슨의 전기 영화인 <닉슨>에서도 등장한다.

6.4. 애니메이션[편집]

퓨처라마에서 DOOP가 아무런 이득도 없는 행성을 점령하기 위한 기획으로 리처드 닉슨은 헨리 키신저에게 협상을 맡기지만 이 협상은 사실 행성 지도층을 날리기 위한 것이라는게 밝혀지게 된다.

심슨 시즌 5 에피소드 10에서 잠깐 등장한다. 안경을 변기에 빠트렸는데, 그걸 호머가 가져갔다(...) 헨리는 결국 안경없이 길을 나서다가 부딪쳤다고.

7. 둘러보기[편집]

리처드 닉슨, 헨리 키신저
1973 - 존 시리카[28]
< 1973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
1972 - 수상자 없음
헨리 키신저, 레 둑 토
[1] 그가 새로 만든 말은 아니고, 영국 수상이었던 헨리 템플의 격언을 미국에 맞춰 어레인지한 것이다.[2] 정치적 승리를 위해선 도덕성과 수단은 중요하지 않다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실천했다[3] 후술하겠지만 1973~1975년에는 두 직책을 혼자 겸임하기도 했다.[4] 알다시피 노벨 평화상 수상자 가운데는 역설적으로 국제법정에 서야 할 자들도 많다(...) 아웅산수지라든지죽어라 싸우다 화해했다고 주는 상도 꽤 되고.[5] 노벨 평화상의 경우 정말 평화나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노력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정치적 행적에 의해 수여되는 경우도 많다. 사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정치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요컨대, 수만 명이 죽는 전장에서 수백 명을 구해낸 사람에게 줄 수도 있지만, 전쟁질 해서 수만 명을 죽이다가 전쟁 그만둔 사람에게 수십만 명 안 죽였으니 참 잘했다고 줄 수도 있다는 것.노벨 정치상[6] 문제는 아래에 기술된 바와는 달리, 기존의 베트남전쟁이 이미 프랑스에서 평화 협상 진행 중이었음에도, 공산주의 세력 억제와 키신저 개인의 권력 획득 및 유지라는 이유로 당시 대통령 후보인 닉슨과 개인적인 줄다리기를 하면서 남베트남에 미국의 지원을 다짐시켜주어 전쟁을 2차전으로 끌어들여 수많은 전쟁사상자를 냈다는 것이다. 또한, 그 후의 평화협상 내용은 기존 전쟁의 평화협상 내용과 거의 비슷하다고 그의 전직 동료들이 확인시켜준다.[7] 한가지 재밌는 사실은, 키신저의 핵무기와 외교를 고평가한 세력이 다름아닌 소련 군부였다는 것이다. 당시 소련군부는 핵무기 만능주의를 맹신한 흐루쇼프가 백만 단위의 병력을 감축하고 함대 건설 프로젝트를 취소하고 남은 자원을 미사일과 핵무기에만 쏟아붓자 이에 크게 반발하며 핵보복에 집착은 결국 멸망과 백기투항 두개의 선택지만 남겨 놓을 것이라면서 그 근거로 키신저의 저서를 들었다.[8] 키신저의 박사학위논문 『회복된 세계(A World Restored: Metternich, Castlereagh and the Problems of Peace, 1812-1822)』가 바로 빈 체제를 다룬 논문이었다.[9] 불과 48시간 동안 베이징에 있으면서 당연하겠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저우언라이마오쩌둥을 만나는데 썼다. 처음에는 베트남, 인도 등을 순방하다 파키스탄에 도착했는데 환영 만찬 후 난데없이 복통이 났다며 닷새정도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자취를 감춘 동안 그는 수행원 몇 명만 데리고 이슬라마바드에서 전용기를 타고 베이징으로 향했는데 비밀리에 방문하는 것을 당연히 숨겨야겠기에 꾸며냈던 트릭이었던 것.[10] 예비역 공군중장 출신의 인물이다. 10여년 후 조지 허버트 부시에 의해 다시 백악관 안보보좌관으로 임명되어, 1991년 걸프전 승리에 공헌했다.[11] 로버트 W.메리 저 "모래의 제국"[12] 물론 ...[13]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키신저 재판 출처.[14] 파라과이:공포의 문서, 칠레 인권 문헌 자료, 아르헨티나 인권자료집 1976-1983; 브라질 군사 정권의 정보 및 반정보 네트워크 기록물군[15] 다만 이건 1980년대와 90년대에 걸쳐 국제통화기금이 중남미 채무탕감과 재조정을 무기로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정작 빈민층 복지예산같은것을 삭감하는것을 강요하는 행태를 많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절차상 민주주의는 이루워졌지만 경제적인 불평등이 오히려 심화되면서 반감이 심해지게 된것[16] 여담으로 이와 비슷한 밀실정치식 정책 결정은 주로 당대의 적국인 소련에서 이뤄졌다. 지하운동을 하던 비밀결사 시절의 버릇이, 스탈린 시기에 그대로 국정 운영 방식으로 정착되어버린 것.[17] 한마디로 독재고 나발이고 일단 우리 이익이 먼저. 그러나 외교적으로 보면 실리와 명분 국익을 모두 잡은 선택이었다. 미국 입장에선 당장 4.19같은 대규모 민중시위가 일어난다면 모를까 개입할 명분도 없고, 개입하면 그건 그것대로 얄짤 없는 내정간섭이다. 오히려 말년의 카다피처럼 적당히 이용해먹다가 버리는게 이득이다.[18] 실제로 개입하지 않는 편이 우리나라에도 이로웠다. 유신의 폐해성은 차치하고라도, '타국의 간섭에 의해 얻은 민주주의'가 과연 민주주의로서의 가치가 있을지에 의문이 제기될 수 밖에 없고, 물론 궤가 다르긴 하지만 과거 중국 왕조의 개입과 구한말 일본의 개입과 성격이 같은 형식의 내정간섭이 재현되는 사태였을 것이었다. 독재정권의 출현은 그 국가 내부의 문제이고, 그 국가 자체적으로 해결했을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1년 후 모 대머리 장군님에 의해 속편이 제작되었다.[19] 당시 캄보디아는 프랑스로부터 독립한지 20년이 채 지나지 않았으며 여전히 시하누크는 곧 국민들을 단결시키는 민족의 아이콘이었다[20] 시하누크는 이때부터 크메르루즈에 가담하는등 길고도 파란만장한 망명생활을 하다가 결국 다시 왕위로 돌아와 2004년에 현재의 왕인 시하모니에게 왕위를 물려주기까지 통치했으며 지금도 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21] 다만 여기엔 왕당파 잔당과 국지적으로 활동하던 게릴라(후에 크메르루즈의 전신이 된다)들을 소탕하기 위한 론 놀 나름의 명분도 있었던걸로 보인다.[22] 베트남 접경지역인 캄보디아 남동부 스봐이 리응 지역에서 최소 4만명 이상 사망 - 크메르루즈 학살 통계 L'Harmattan, 1995[23] 키신저 나름의 현실주의 철학이 돋보이는 부분이 또 정작 75년에 론 놀 정부가 크메르루즈에게 털리고 캄보디아가 공산화 됐을땐 (워터게이트가 터져서 정권이 바뀌긴 했지만) 그냥 신경 꺼버렸다(...)[24] 백악관 안보보좌관 브레진스키가 '중국과 태국에 폴포트를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라고 말한 것이나, 동남아 국가들에 무기를 대줘서 이 무기가 크메르 루즈에게 흘러들어가게 했다거나 하는 일들이 줄줄이 드러났다.[25] 실제로는 베트남쪽은 친소에 더 가까웠고, 크메르 루즈는 친중에 더 가까우면서 소련을 수정주의 취급했다는 등의 정치이론적 차이가 존재했다. 도덕성이나 막장성의 차이는 더 말할 필요도 없고. 예나 지금이나 미국은 이렇게 공산주의자라고 해서 다 같은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이슬람주의자라 해서 다 같은 이슬람주의자가 아니란 사실을 파악하는 걸 지독하게 못한다[26] 기파랑과 함께 자유경제원 쪽 책을 출판하는 성향의 출판사이다.[27] 더 정확히는, 저 출판사의 대표가 국민의 당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등, 정계에 진출하면서 번역본 출간 사업이 무기한 보류되고 있다고 보면 된다.[28] 워터게이트 사건의 담당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