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주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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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형주의 중요성3. 형주 정복
3.1. 형주 대여의 경과
3.1.1. 노숙은 언제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줬는가3.1.2. 형주의 어느 부분을 빌렸는가
3.1.2.1. 남군3.1.2.2. 무릉3.1.2.3. 장사3.1.2.4. 강하3.1.2.5. 계양3.1.2.6. 영릉3.1.2.7. 양양
3.1.3. 결론
3.2. 형주 대여는 없었다는 주장
3.2.1. 조익의 이십이사차기의 주장
3.3. 연의에서의 묘사
4. 익양대치
4.1. 손권과 유비의 익주 진격4.2. 청니 대치4.3. 유비의 서천 점령4.4. 익양의 대치와 악화되는 결속4.5. 215년, 익양대치 - 노숙제 대 관우뢰4.6. 결말4.7. 연의에서의 모습
5. 번성 공방전
5.1. 발단5.2. 관우, 천하를 진동시키다
5.2.1. 번성 공방전과 7군의 궤멸5.2.2. 조조, 천도(遷都)를 말하다
5.3. 뒤집히는 전세
5.3.1. 서황의 용맹5.3.2. 여몽의 계략
5.3.2.1. 오나라의 준비5.3.2.2. 한편 그동안 관우는5.3.2.3. 여몽의 형주 점령5.3.2.4. 여몽의 심리전
5.3.3. 관우, 최후를 맞다.
5.4. 결과
5.4.1. 연의에서의 묘사
6. 이에 대한 평들
6.1. 역사학자6.2. 누가 어디서 어떻게 잘못했나?
6.2.1. 유비6.2.2. 손권
6.3. 그외 논란 거리
6.3.1. 국경선 연장으로 인한 방비 문제6.3.2. 손권의 선택은 과연 최선이었나?6.3.3. 서주 논란6.3.4. 명분6.3.5. 조조의 형주만이 상업이 발달했고 풍요로운 것이다?6.3.6. 유비가 형주 관리를 더 잘했을 것이다?6.3.7. 관우를 누가, 왜 죽였는가?6.3.8. 과연 관우의 독단으로 북진을 했는가?6.3.9. 관우에게 혼인을 제의한 것이 그릇된 행동인가?6.3.10. 관우가 혼인을 받아들였다면 손권이 뒤치기를 할 일은 없었다?6.3.11. 상관(湘關)의 미곡문제6.3.12. 형주의 상실로 촉한의 천하통일은 좌절되었나?
7. 기타 창작물에서

1. 개요[편집]

적벽대전 이후부터 관우가 죽은 219년까지 형주에서 관우를 비롯한 유비군과, 조인을 필두로 한 조조군 그리고, 손권군이 격돌한 형주의 정벌과정, 익양대치, 관우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상황. 특별한 명칭은 없으나, 이 문서에선 편의상 '형주 공방전'으로 명명한다. 이 전투에서 촉이 패배함에 따라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는 완전히 틀어지고, 촉은 이 시점을 기준으로 서서히 기울게 되었다. 사실상 촉의 운명을 결정지은 전역이라 봐도 무방하다.

2. 형주의 중요성[편집]

나무파일:attachment/형주 공방전/Jingzhoumap.jpg
형주(荆州)는 후베이 성 남쪽 후난성과 경계 지점에 위치한다. 동쪽으로 우한武汉, 서쪽으로 싼샤, 북쪽으로 징먼과 접한다. 양쯔강 유역의 평야지대로 서고동저(西高東低)의 지형이며 호수와 강이 밀집된 지역이다.

중국의 중앙부에 위치해서 서의 익주, 동의 양주, 북의 사주를 모두 바라볼 수 있는 요충지로 유비, 조조, 손권 모두에게 어마어마한 중요성을 지닌 땅이었다. 또한 위가 차지하고 있던 이북 지역을 제외하면 그나마 개발이 잘 돼있던 땅이었다.[1]

제갈량원대한 계획의 기본적인 밑그림은 형주와 서천을 얻어 양쪽에서 동시 북벌로 위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었고, 손권은 강북으로 진출하기 위해 유표 때부터 호시탐탐 강하 등을 노렸을만큼 오랜 시간 탐내온 땅이었다. (합비에서 번번히 진출이 막히자 그 중요성은 더욱더 커지게 된다.) 위의 입장에선 형주를 손아귀에 넣게 되면 유비와 손권의 명줄을 붙잡을 수 있게 되었다. 조조 생애 그 세력이 다른 제후들에 비해 가장 압도적이었던 때가 적벽대전 직전의 형주를 막 손에 넣었을 당시였다.

상업의 요충지였던데다가 영토의 넓이만으로 따져도 한반도 전체를 웃도는 넓이다. 또한 형주를 제외하고 보면 유비는 익주만을, 손권은 양주 각각 한 주만을 가지게 되는 상황이니 둘 모두에게 형주는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땅이었다.[2]

3. 형주 정복[편집]

3.1. 형주 대여의 경과[편집]

  • 이 항목은 형주를 대여했다는 의견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반대의 의견을 보고 싶다면 아래 항목을 봐주세요.

208년, 유표가 죽고 적벽에서 조조가 대패한 뒤, 손권은 주유정보를 시켜 조인을 필두로 서황, 우금, 진교 등이 지키고 있던 강릉을 공격하게 한다. 한편 유비 역시 주유와 함께 조조를 추격하면서 강릉에 도달하였고(선주전) 주유와 함께 강릉을 포위한다.(이통전) 여기서 장비+1천으로 주유의 2천 병사와 교환하여 장비도 공격에 참여(오록), 이렇게 위와 촉의 기록에선 유비군이 강릉공략에 참여한 것으로 나오며 산양공재기 등 몇몇 기록에서는 유비가 주공이라는 기록까지 있다.

여기서 중요한게 바로 유비의 관직이다. 유비의 당시 관직은 영예주목 좌장군으로 심지어 오의 군주인 손권은 당시에 기껏해야 잡호장군 수준인 토로장군이었다. 즉, 당시 진격하던 손유연합군에서 유비는 명목상으로는 최고 위치를 차지하는 총사나 다름이 없고 주유를 비롯한 손권측의 어떤 장수들보다 명목상 절대 우위에 있었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거느리고 있던 군세도 손권측이 간신히 동원한 군세에 그리 뒤지지 않고 이미 중원에서도 명성이 널리 알려진 관우와 장비 같은 명장들을 대동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랬으니 남군공방전에서 유비의 발언권이나 공적 우선권이 결코 작지 않았으리라는 점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어쨌거나 주유는 우선 감녕을 시켜 이릉을 공격하게 하고 이에 놀란 익주를 지키던 습숙이 주유에게 항복한다. 악진전과 문빙전의 기록을 이때로 본다면[3] 관우는 악진, 문빙에 의해 패퇴하였고 이후 남군 바로 위에 위치한 임저현과 상양현의 장이 악진에게 토벌되어 공격받아 격파[4], 병참이 문빙에게 불탔으며 부곡 몇 개가 투항하는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곧이어 이릉에서 1천 명의 군사를 가지고 있던 감녕은 조인이 보낸 5천 명의 군사한테 포위당한다. 여기서 다른 장수들은 모두 군사를 나누어 본진 방어와 감녕 구출 두 가지를 한번에 할 수는 없다고 했지만 여몽능통이 본진을 지키면 10일은 지킬 수 있을 것이라며 그에게 지키게 하고 자신과 주유는 이릉을 구원하러가면 될 것이라고 한다. 거기다가 추가적으로 5백의 군사로 험한 길을 막으면 패주하는 적의 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니 주유는 이 여몽의 계책을 그대로 따른다. 싸우기도 전에 말 얻을 생각이라니 설레발쩌네

과연 일은 여몽의 예상대로 되어 이릉에서 조인을 격파하고 말은 3백필을 얻는 등 기세를 올리고 조인도 사로잡힐 위기에 처하나 유비측에서 출전한 관우가 강릉 북쪽에 퇴로를 차단하자 이통이 군대를 직접 말에서 내려 방책을 걷어내고 주유와 유비의 포위망으로 진입하는 용력에 의해 격파됨에 따라 조인군은 탈출하는데 성공한다.[5]

이처럼 상황은 조인군에게 썩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았지만 진교가 천인이라고 놀랄만한 조인의 용력 등에 힘입어 강릉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거기다가 오나라 내부에서는 정보와 주유가 서로 좌우대독으로 임명되어 비록 모든 일은 주유가 처리했으나 정보는 스스로를 노장이라 생각해서 서로 친하게 지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더욱 심각한 점은 주유는 이 와중에 오른쪽 겨드랑이에 화살을 맞고 치명적인 부상마저 입는다는 것.

그동안 유비는 유표의 장자인 유기를 형주목(荊州牧)으로 상표하고 추대하여 형주 영유의 명분으로 삼는다. 그리고 형주의 네 군을 지키던 태수들인 조범, 한현, 유탁(유도), 김선의 항복을 받아내고 자기 영지로 편입했고 여강뇌서는 부곡 수만 명을 이끌고 투항했다. 재밌는 부분이 양주의 여강 사람들이 유비에게 투항했다는 점인데 실제로 여강(廬江)지역은 손권이 양주의 지배자가 되자 손권에게 반항하다가 도륙당한 지역이었으며 적벽대전 당시에도 두 마음을 품어 구강군과 함께 손유가 토벌한 지역이었다.[6] 어쨌거나 제갈량은 군사중랑장이 되어 영릉, 계양, 장사의 세 군의 부세를 담당하고 학보가 영릉태수, 요립이 장사태수, 조운이 계양태수로 임명되고 손권 쪽은 장사와 무릉 쪽의 일부를 점령한다.[7] 이 와중에 손권이 합비 공방전 1차에서 장제의 계책에 속아 넘어가서 삽질한 것은 덤.

209년, 장장 1년여를 끈 혈전 끝에 주유는 화살을 맞고 상처입은 몸으로도 일어나서 군대를 시찰하고 관리와 병사들을 감찰하는 등 그의 수명을 깎아먹는 분전으로 계속했고 유비 역시.포위망을 굳건히 유지하면서 조인군의 사상자가 많아지자 조인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강릉을 버리고 도망친다. 강릉을 점거하는데 성공한 손권은 주유를 남군 태수로 임명해 강릉에 머물게 하고 정보를 강하 태수로 임명해 사이현에 머물게, 여범을 팽택 태수, 여몽을 심양 현령에 임명한다.

손권 자신은 유비가 상표하는 형식으로 행 거기장군(行 車騎将軍) 서주목(徐州牧)의 지위에 오른고로(劉備表權行車騎將軍,領徐州牧. : 오주전) 이 무렵 유기가 병으로 죽자 부하들은 유비를 형주목으로 추대한다.(群下推先主為荊州牧. : 선주전) 다만, 자치통감의 경우에는 유기가 죽자 손권이 유비에게 형주목의 일을 관장하게 했다고 기록했다. 여기서 권중달 번역본에는 주석을 달아 형주목과 서주목에 대해 영형주목, 영서주목이라고 표현했지만 누구의 주석인지는 추가바람.

사실 적벽대전~남군공방전 당시까지 유비는 사방장군 가운데 하나인 좌장군(左將軍), 손권은 잡호장군 급인 토로장군(討虜將軍)이라 세력의 크기와 장군직의 관위가 맞지 않는 상태였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세력은 유비 쪽이 많이 약한데 관위는 손권보다 훨씬 높았다. 이런 기묘한 상태를 일단 손권을 좌장군보다 우위인 거기장군에 올려 우위에 놓는 형태로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즉, 유비는 이때 유-손 동맹에서 손권의 우위를 인정해준 것이다.

여기서 손권의 본거지인 양주목(揚州牧)이 아니라 가지고도 있지 않은 서주목(徐州牧) 취임은 좀 뜬금없이 보이는데, 이는 손권의 북진(北進) 욕구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이 있다. 물론 정복은 못 했지만

흥미롭게도 손권은 유비가 유기를 형주목으로 취임시키거나, 그 뒤를 이어 유비 자신이 형주목으로 취임하는 것을 거의 방관했다. 손권은 주(州)라는 행정체계와 주목(州牧)의 관직이 가지는 실질적인 업무절차나 상징성을 간과하거나 무시하여 형주목 지위를 단순한 허명 이상으로 파악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손권은 이미 형주의 양양, 신야, 완, 강하를 제외한 형주북부의 여러 군(郡) 태수에 자신의 측근을 임명하여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형주목(荊州牧) 선언에도 크게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유비는 형주목에 취임했으나, 손권은 실질적인 유비의 지배 영역 역시 유비를 '종속 관계'에 가까운 '동맹'으로 파악하여 특별히 경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유비가 손권 주목 시켜주기로 상표했고, 좌장군을 뛰어넘는 거기장군으로까지 상표시켜준 것이 황족이며 황제의 특별한 명(의대조)을 받은 일로 조정에 널리 알려진 유비이니 어쩌면 명분 쪽에서 자신이 유비한테 얻은 것도 많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러나 유비의 생각은 이와는 달랐다. 유비는 이전에 서주에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기존 형주 속관들로부터 추대를 받는 요식절차를 거치는 등. 형주 지배의 명분을 쌓는 행동을 보인다. 유비는 손권이 유비의 형주목 취임을 '동의'했거나 최소한 '묵인'했다는 사실까지도 형주에서 지배권을 넓히고 형주인 신하의 지지를 결집시키는 명분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손권의 실책으로 볼 수 있는데, 형주에서 영토는 넓히면서도 정작 중요한 주목(州牧)의 지위를 유비가 날로 먹는걸 항의 한 마디 없이 지켜만 본 탓에 유비가 형주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명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관직을 높인 것에 이어 주유는 장강 남쪽을 유비에게 주고, 유비는 이렇게 얻은 남안 땅의 유구를 공안(公安)이라 명명하고 군영을 세워 주둔한다. 이는 강표전의 기록인데 애시당초 '유비는 뒤에서 싸움을 관망만하고 주유가 혼자 공략해서 유비에게 땅을 주었다'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강표전의 내용과는 달리 산양공재기, 선주전등에선 유비가 조조 상대로 싸움의 주체인 것이 명백히 드러나고 주유과 함께 남군을 공략했으며 관우가 후일 단도부회에서 주장했듯 '오림의 땅에서 유비군 역시 조인을 상대로 갑옷도 벗지 않고 싸워서' 얻은땅이 남군인데 어찌 한 뼘 땅이라도 유비가 지분이 없었겠는가? 강표전은 애당초 유비군이 이전 기록에서 유비가 뒤에서 관망했다고 주장했다가 손성의 디스를 받는 등 적벽 전후 싸움을 오인들의 공으로만 돌리는 서술을 했는데 여기서 주었다는 것은 더 정확히는 유비가 싸움을 통해 주유가 줘야할 얻은 지분을 받아갔다고 하는게 이치에 맞을 것이다. 선주전 본전에도 4군 점령후 유기가 죽자 유비가 형주목으로서 추대되어 공안을 다스렸다는 얘기뿐이다.

어쨌든 유비가 공안을 차지하자 이제서야 뭔가 좀 불안감을 느꼈는지 손권이 점차 이를 두려워해 여동생 손부인을 시집보내 무력시위 동맹관계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그런데 정작 유비는 이 손부인이 오빠를 닮았고 시중드는 하녀 백여 명이 모두 칼을 가지고 곁에 서있어서 유비는 들어갈 때마다 자신을 죽일까봐 두려워했다고 한다(…) Nice boat. 거기다가 국역 자치통감에는 주를 달아 손권이 28세 유비가 49세인데 자세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동생의 나이가 25세 전후라면 왜 아직까지 시집을 안 갔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는 의미심장한 주석까지 달아두었다. 하자가 있는 제품입니다 호갱님 결과적으로 손권이 여동생인 손부인을 유비에게 시집보낸 것은 그다지 양자의 우호관계를 증진하는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이후 유비는 주유가 남군태수가 되자 경구까지 와서 주유가 준 땅이 적어서, 백성을 안정시키기에 부족하다고 손권에게 요청했다.(강표전)[8]

주유는 이런 유비의 행태에 유비에게 땅을 줬다가는 결국 배신으로 뒷통수를 칠 것이니 호사스런 생활을 누리게 하여 그를 나태하게 만들자고 하였다. 여범도 이런 주유의 의견에 찬동한다. 하지만 노숙은 이런 주유와 여범의 의견에 반대하며 조조의 위력은 실로 대단한 경지며, 우리군의 은총과 신의가 형주에 널리 퍼져 있지 않으니 유비에게 이를 빌려주어 위무토록 하여 조조의 적을 늘리는 한편, 우리 측의 아군을 만드는 것이 상책일 것이라고 진언한다.[9] 거기다 주유의 이 계책은 이미 유비측의 참모인 제갈량이 눈치채고 유비에게 간언하고 유비도 경계하고 있는 상태였다.(방통전)

그런 말들을 듣고 난 손권은 유비와 힘을 합쳐 조조를 막아야하고 유비가 쉽게 굴복될 사람이 아니라 보고 주유의 제안을 거절하고 노숙의 말을 따라 유비에게 토지를 주기로 하고 유비가 떠날 때 서로 화기애애하게 조조를 물리치고 황제를 맞이하고 싶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마지막 연회 때 유비는 주유의 능력으로 볼 때 그는 밑에 없을 것이라는 놀라운 말을 하고 헤어진다.[10] 여기서부터 이미 유비는 손권을 견제의 대상으로만 봤을 가능성이 높지만, 동맹 내에서 자신에게 딴지를 거는 주유에 대한 견제로 볼 수 있는 측면도 있다. 아마 둘 모두일 것이다.

아무튼 위나라에도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줬다는 소식이 들어가는데 이런 엄청난 사실을 들은 조조는 들고 있던 붓을 떨어트리기까지 했으니 일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공안으로 돌아온 유비는 손권과 떠날 때 했던 말과는 달리 유비는 손권을 만나고 돌아온 후 "손거기는 위는 높지만 아래는 낮소, 그의 아래가 되기는 어렵소, 나는 다시 보지 않을것이오"라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한다.[11] 거기다가 나중에 방통에게 주유가 자신을 붙잡아 둘 작정이었다는 소식을 듣고 "주유 녀석 완전히 내 생각을 꿰뚫고 있군! 공명이 위험하다고 했는데 진짜였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러니까 나태하게 지낼 생각은 있었던 건가

그리고 주유손유와 함께 서천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지만 남군을 공략할때부터 부상을 입어 무리를 심하게 했는지[12] 갑자기 픽 쓰러져서 노숙을 후임으로 해달라는 말과 유비를 조심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어버린다. 손권은 주유의 후임으로 노숙을 임명하고 남군 태수로는 정보를 임명한다. 그리고 주유의 뒤를 이은 노숙은 손권에게 '조조의 위력은 실로 대단한 경지이며, 막상 우리가 얻은 형주 (남군) 땅에서 은총과 신의가 널리 퍼져 있지 않으니 조조의 적을 늘리는 한편, 우리 측의 친구를 늘리는 방편으로 유비에게 빌려 위무하게 하자'고 제안한다.(한진춘추)[13] 이로서 손권측은 유비에게 남군의 나머지도 빌려준다.[14]

3.1.1. 노숙은 언제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줬는가[편집]

여기서 문제점은 오에서 형주의 부분들을 유비에게 빌려준 시기다. 자치통감에서는 주유가 죽고 노숙이 권력을 잡은 후에 손권에게 "유비에게 땅을 빌려주어 조조를 함께 막자"라고 주장한 다음 한창태수가 되어 육구로 옮기고 손권은 노숙의 의견에 따라 장사와 예장을 분할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노숙전에는 유비가 경구로와서 땅 좀 더 달라고 요구할 때 "유비에게 땅을 빌려주어 조조를 함께 막자"고 주장하고 손권이 이를 따른 일로 되어있고 건강실록도 이때로 기록하고 있다. 이 문서에서는 노숙전의 기록에 따라 경구로 왔을 때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주고 장사와 예장을 분할한 것으로 작성하였다.

또한 주유의 대에 빌려준 남안을 제외한 강릉의 나머지 부분은 주유가 죽자 정보가 남군태수가 되었으나 형주를 유비에게 빌려준 다음에 다시 강하로 돌아왔다는 기록으로 볼 때 주유가 죽은 다음에 빌려준 것이 확실하다.

3.1.2. 형주의 어느 부분을 빌렸는가[편집]

선주전만을 봤을 때에는 손권이 남군을, 유비가 강남 4군(장사, 무릉, 계양, 영릉)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서와 그 주석에서는 손권이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줬다는 말이 나오고, 또 손권이 실제 강남 4군 일부에 어떤 영향력을 나타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기록과 그런지 아닌지 논쟁거리가 되는 기록이 나온다. 이를 각 군별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자.
3.1.2.1. 남군[편집]
남군의 경우는 209년 주유조인을 물리친 다음에 강릉의 강남쪽을 주자 공안으로 이름을 바꿨다는 기록이 선주전 주석의 강표전에 있고 자치통감에는 남안[15] 땅을 나누어서 유비에게 줬다(周瑜分南岸地以給備)고 기록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땅의 경우 유비 역시 남군 공방전에서 지분이 있었으므로 시혜적으로 빌려줬다 의미가 아니라 원래 유비가 정당히 얻었어야 할 지분으로 볼 수 있다.

남군의 나머지 부분은 위에서 설명했듯이 주유가 죽고 노숙이 뒤를 이은 후 빌려줬다는 것을 정보전, 노숙전에서 관직의 이동으로 알 수 있다. 정보가 남군태수를 지내다가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주자 강하태수를 지낸다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송서 지리지와 진서 지리지에서도 손권과 유비가 형주를 나누면서 남군이 유비에게 속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3.1.2.2. 무릉[편집]
몇몇 오측 기록 때문에 논란이 되는 부분. 황개전에 무릉만이를 무찌르고 그곳의 태수가 되었다는 기록이 시기에 관한 정보도 어디의 태수인지도 안 나와있어 이곳이 무릉이라는 주장이 있으며 수많은 의견이 난무하는 상황. 무릉이 손권 쪽에 들어가게 되면 익양대치 때 손권이 무릉을 요구하지 않은 것도 말이 된다는 의견도 있고 사실은 215년에 장사태수로 임명이라는 의견도 있다. 자세한 것은 황개 문서 참조.

주태전에 주태가 형주를 평정한 이후 잠(岑)에 주둔하였다.는 문구가 있는데 이 잠현 땅은 무릉군에 속하며 남군과의 경계에 있는 상수 서쪽의 땅이다. 사실 이건 유비가 무릉을 점령할때 주둔할때 무릉 일부인 이쪽 땅은 주태가 차지하고 있었는데 호삼성의 의견대로 주유가 공안을 줄 때 같이 줬다고 볼 수도 있다. 이전 버전에선 유수구 전투 이후 기록이라고 적어 놨는데 확인 결과 유수구 전투 이전 기록이다.

사실 선주전 기록만 보면 전혀 문제가 없다. 무릉만의 세력 때문에 양측의 통치력이 모두 미치지 않았다는 설도 있고 유비가 무릉태수 김선을 항복시켰지만 태수를 임명하지 않았으니 문제라는 것인데 물론 선주전에 무릉태수에 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는 것은 사실이나 이 부분은 유비가 직접 무릉을 다스렸기에 무릉태수는 굳이 적지 않았다는 것도 설득력이 있다. 공안이 무릉과 가깝기도 하고 후에 무릉만이들이 유비에게 협력한 것도 유비가 직접 다스려서 그렇다는게 이 설의 근거. 결정적으로 선주전 주석인 헌제춘추에는 유비가 강릉을 얻은 이후에 '관우를 강릉, 장비를 자귀(남군 자귀현)에 주둔시키고, 제갈량은 남군에 의거하게 하고 유비 자신은 잔릉(무릉군 잔릉현)에 주둔했다'는 기록이 있어 무릉엔 유비가 직접 주둔한 것으로 여겨진다.
3.1.2.3. 장사[편집]
장사군은 유비가 장사태수 한현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기에 치소(임상현)는 유비가 장악했다. 그러나 장사군의 전 영역을 유비가 가지고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오주전에 따르면 210년에 손권이 장사군을 분할하여 한창군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손권은 예장군의 일부를 나누어 파양군을 세웠고, 원래 남군태수인 정보를 강하태수로 옮기고 노숙을 한창태수로 삼았다. 자치통감에서는 이 모든 행정구역 조정이 유비에게 땅을 빌려주자는 노숙의 제안을 받아들였기 때문으로 기술하고 있다. (魯肅勸權以荊州借劉備,與共拒曹操,權從之。乃分豫章爲番陽郡,分長沙爲漢昌郡;復以程普領江夏太守,魯肅爲漢昌太守,屯陸口。)

장사군 북쪽 경계는 장강이며, 바로 이웃하여 주유가 주둔한 파구가 있다. 따라서, 손권 역시 장사군의 일부 영역을 가지고 있던 것 같다. 땅을 빌려줬기 때문에 행정구역을 분할했다고 하는 것은 암묵적으로 유비가 갖고 있던 영역과 손권이 갖고 있던 영역을 나누어, 유비가 갖고 있던 영역은 장사군으로 손권이 갖고 있던 영역을 한창군으로 독립시킨 것이 아닐까 싶다.
3.1.2.4. 강하[편집]
익양대치 때 손권쪽으로 분할했다는 말과 연의에서 유비가 손권에게 넘겨주는 것을 보고 유비가 빌렸거나 얻은 땅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조인을 물리친 후에 정보는 강하태수에 임명되어 사이(沙?)현[16]을 다스렸다는 기록이 있고 주유가 죽은 후 잠시 남군태수로 임명되었다가 유비에게 형주를 준 후에는 다시 강하태수로 임명되는 등 자기네가 다스린 지역을 유비군에게 넘겨준 적은 없다. 정보가 죽은 후 하구를 관할하는 것은 손교라는 기록까지 쭉 이어지는 것이 확인 가능. 물론 위나라가 다스리고 있는 문빙이 태수로 있는 강하 쪽은 한 번도 함락 안되니 관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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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위에 네모 친 것이 사이성, 그 오른쪽 아래가 夏口亦沔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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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지도의 서쪽부분. 가운데에 네모 쳐진 것이 하구다.

다만 하구쪽은 강하태수로 유기와 유비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손권이 가지고 있는 강하는 208년에 황조를 죽이고 함락시킨 악현, 사이현을 비롯한 장강 남쪽 지역이다. 사이는 원래 강하군의 치소인 서릉 대신 황조가 거성으로 삼은 곳인데, 손권은 황조를 죽이고 그 성을 함락했다(屠其城). 악현은 황조를 토벌하고 호종이 악현장이 됐다. 이 지역들은 사이현의 하구를 포함한 곳을 빼면 장강 남쪽이다. 거기다가 추가적으로 감녕은 이후에 당구(當口)에 주둔했는데 조일청은 여기에 주석을 달아 당구는 반드시 손교가 다스히던 하구와 가까운 곳이라고 했는데 손교는 정보의 뒤를 이어 하구를 다스렸고 정보는 사이현을 다스렸으니 감녕의 당구는 하구(夏口亦沔口) 주위가 되고 이를 보아 손권은 사이현 주위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유기가 유비와 함께 하구로 갔다는 것에서 유기가 가지고 있던 강하의 땅은 하구와 석양을 비롯한 강북의 강하의 땅이 된다. 여기서 유기가 하구에 주둔했다는 것이 논란이 되어 연의에 따라 손권이 강하를 버렸음을 주장하는 이들은 유기가 황조가 죽은 이후에 하구에 갔음을 보고 하구가 하구(夏口亦沔口)라며 지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손권은 사이성을 버린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수경 면수주를 보면 알 수 있듯 유기와 유비가 간 하구는 양수와 면수를 거쳐 가는 곳이니 아래에 그림에서 揚水, 沔水를 찾아보면 알겠지만 유기가 있는 하구는 사이성에 비해 훨씬 서쪽에 있는 상류의 지역으로 아래 그림에 해당한다. 즉, 사이성이 함락되자 유기는 하구에 주둔하게 된 것.

정리하면, 적벽대전 당시 유비와 유기는 하구를 중심으로 강하군의 서쪽과 남쪽을 지배하고 있었고 본래 강하군 산하인 기춘후국은 손책과 손권의 꾸준한 공격으로 사이현과 함께 동강하군으로 분리된 상태다. 북쪽의 조조는 기존의 안륙현(安陸縣), 남신후국(南新侯國), 208년에 신설한 석양현(石陽縣) 중심으로 유비는 하구성(夏口城), 운두현(雲杜縣), 경릉현(竟陵縣), 하이현(下雉縣), 주현(?縣)을 중심으로 손권은 기춘후국(?春侯國), 사이현(沙羨縣)을 중심으로 강하를 삼분했다. 가장 큰 부분을 먹은 건 유비지만 조조와 손권이 점거한 부분을 합치면 여기에 육박한다.

어쨌든, 유비, 유기가 가지고 있던 강하는 이후 소리없이 손권에게 넘어가는데, 다만 유비가 공안땅을 받은것은 주유가 남군태수가 된 이후이며(강표전) 따라서 형남 4군 평정 당시까지는 유비, 유기가 하구지역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설이 두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이후 유비는 공안땅을 받고 그곳으로 옮긴것으로 보이며 손권은 유비가 옮겨간 이후 하구를 가져간 것으로 보이고 이에 대해선 유비가 땅을 빌리고 하구땅을 손권에게 사실상 넘겨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이에 따르면 기춘후국과 사이현을 중심으로 한 손권측의 동강하군은 이후 기춘군으로 변했고 210년 경 유비가 손권으로부터 남군을 대여받았으며 210년 경 남군태수 정보가 강하태수로 전임했다. 손책 시절 주유가 태수를 역임하고, 손권 시절 정보가 태수를 역임한 동강하군은 210년 당시엔 손권이 기춘군을 설치하면서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보가 태수로 임명된 강하군은 어디일까? 원래 유비가 점거하고 있던 하구쪽 강하군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즉 유비가 남군을 얻으면서 자리를 비워주고 손권이 하구쪽 강하군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냥 계속 유비가 하구를 가지고 있다가 익양대치 당시 유비가 남군을 가져가는 대신 강하를 손권땅으로 넘긴다는 협상을 했다는 것이다. 정확히 동강하군이 기춘군으로 바뀐 시점이 210년경 어느 시점인지 확실하지 않은이상 정보가 우선 (동)강하태수로 부임하고 그 다음 기춘군으로 바뀌었다고 봐도 상관이 없다. 중국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동한의 구군인 강하는 건안 15년(210년) 손권이 정보를 강하태수로 두었는데,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것이 강하군 강남쪽 여러현이었고, 건안 20년(215년)에 오나라와 촉나라의 형주분할안 이후에야 강하 전군을 소유했다'고 되어 있다.(東漢舊郡,建安十五年(210年)孫權以程普為江夏太守,始有江夏郡江南諸縣,建安二十年(215年)吳蜀分荊州後據有江夏全郡) 애시당초 남군 공략 이후 공략에 참여한 유비가 본인의 지분으로 공안을 가져간 것이라면 첫번째 가설은 전혀 성립하지 않는다. 선주전 본전에도 4군 점령후 유기가 죽자 유비가 공안을 다스렸다는 얘기뿐이다. 이때 유비가 강하태수를 누구를 임명했는지는 나오진 않으나 적어도 이렇게 볼 시엔 하구 땅은 익양대치 이전까지 유비의 땅이었다고 보는것이 맞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후 손권은 새로이 축성하여 하구를 새 중심지로 삼았다.
3.1.2.5. 계양[편집]
손권이 거기장군으로 임명되면서 전종의 아버지인 전유가 계양태수로 임명되기는 하지만 자세히 보면 209~219년이기에 익양이후의 사건일 가능성이 없다. 어쨌든 이 지역은 조운이 계양태수가 되면 알 수 있듯 촉이 점령한 과정이 자세한 편.
3.1.2.6. 영릉[편집]
한참 위에서 언급한 호삼성이 쓴 강남 지역을 이미 얻었는데 강한 지역 네 군을 유비가 달라고 요구했다를 빼면 관련 기록이 없기 때문에 여기를 손권이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3.1.2.7. 양양[편집]
원래 이곳은 조조가 점령한 이후 쭉 조조의 땅이었다.

연의에는 제갈량이 진교를 얻고서는 양양도 얻었다고 하지만 연의의 설정오류다. 나중에 유비가 주지도 않았는데 조조 땅으로 나오기 때문.

나중에 220년에 손권이 서쪽으로 오자 조비사마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인을 시켜서 양양과 번성에 불을 지르고 번성으로 오게 하는데 그때 잠시 손권이 진소라는 듣보잡을 이용해 점령했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조인한테 털리고 뺏긴다.

3.1.3. 결론[편집]

손권 쪽은 주유 사후 주유와 강릉을 같이 공격했었던 유비[17]를 강릉에 두어 조조를 막을 생각으로 원래 유비가 얻었던 지분인 공안 이외의 남군땅을 내주어 원래 강하 하구에 위치해 있던 유비가 근거지로 삼게 했다. 적벽대전부터가 유비를 이용해 조조를 막자는 것이었으니 일리가 없는 판단은 아니었다. 이후 형주는 유비의 근거지가 되었지만, 유비쪽은 자기한테 정당한 형주의 지배 권리가 있다고 여겼으므로 조조와 맞서는 것 이외에는 굳이 땅을 오에 줄 생각이 없었다. 한편 손권은 손권대로 실제로는 형주의 일부지역을 후한 조건으로 교환한 것을 가지고 다 빌려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3.2. 형주 대여는 없었다는 주장[편집]

이 주장은 청나라 고증사학의 명사인 조익이 쓴 《이십이사차기》의 주장을 골조로 한다. 조익은 분명히 훌륭한 학자이고 장지동이
《이십이사차기》(二十二史箚記)를 읽는 것으로 정사(正史) 통독을 대신할 수 있다.
라고 평했을 만큼 책 또한 뛰어난 책이지만, 이 내용의 기본 가정이 "오나라의 몇몇 기록은 날조라 믿을 수 없다"인만큼 일단 이것을 적용하게 되면 형주 대여에 관한 기록은 배송지가 주석으로 남긴 오나라쪽의 관련 기록, 오나라의 기록을 보고 쓴 진수의 '삼국지 오서', 또 삼국지를 보고 쓴 사마광의 《자치통감》과 호삼성의 '통감주'의 기록까지 조익이 날조했다고 주장하는 기록들을 다 날려야하기에 쓸 수 있는 사료가 조익이 인정한 《오서》내용과 《위서》와 《촉서》밖에 없게 되는데, 《위서》에 관련 내용이 있을 리 없는지라 결국 남는 것은 조익의 의견밖에 없으므로 항목을 따로 만들어 기술한다.

3.2.1. 조익의 이십이사차기의 주장[편집]

다음 링크는 이십이사차기의 형주 대여 부분을 링크로 달아놓은 것이다. 국내에 정식으로 번역되어서 서점이나 도서관 등지에서 볼 수 있지만 그걸 가져오면 저작권법 위반이기에 유저 번역본을 올린다. 원본 링크 참고로 여기서 게시글을 올린 사람이 노숙전에서 찾을 수 없다는 부분은 노숙전에 주석으로 딸린 오서의 기록으로 관우가 저런 주장을 하고 노숙이 반박하자 아무 말도 못했다는 부분이다. 위치로 치면 노숙전의 후반부. 아마도 당시 참고할 수 있던 김원중의 정사 삼국지 번역본에 주석 번역이 안 실려 있어서 못 찾은 모양이다.
유비가 형주를 빌려줬다는 설은 오나라 사람의 사후 견해로부터 나왔고, 당일의 상황이 아니었다.

원래 빌려준다는 것은, 본래 자기가 소유한 물건을 타인에게 임시로 주는 것이다. 형주는 본래 유표의 땅으로, 손씨가 소유하던 토지가 아니다. 조조가 남으로 내려온 당시, 손씨의 강동 6군은 바야흐로 스스로를 지키기에 급급해 두려워해, 여러 장수가 손권에게 조조를 영접하길 모두 권하나, 손권만이 이를 거부하였다. 때 마침 유비가 제갈량을 파견하여 우호관계를 맺어, 손권은 겨우 유비에 기대 함께 조조를 막고자 생각했던 것이다. 이때는 다만 조조를 막는 것을 원했지, 감히 형주를 바라면서 얻고자 하지는 생각따윈 없던 것이다.

제갈량전을 보면 제갈량이 손권을 설득할 때, 손권이 곧 이르길 "유예주가 아니면 조조에 대적할 수 있는 자가 없소." 라고 한 다음 곧 주유, 정보 등을 파견해 제갈량을 따라 유비에게 이르러, 힘을 모아 조조를 막게 한 것이 보인다.

이것은 유비가 조조를 막는 주체고, 손권 자신은 협력자로 가담하고자 한 것이다. 제갈량이 또한 이르길 "장군께서 예주와 같은 마음으로 조조를 격파할 수 있다면, 형오(荊吳)의 세력은 강해져 정족(鼎足)의 형세를 이룰 겁니다." 라고 하였으니 이는 이때 이미 천하삼분의 설이 존재하고 있어, 손권에게 형주를 취하라 의뢰하고 이를 빌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게 드러난다.[18]

오지를 보면 적벽의 전쟁에서, 주유와 유비는 함께 조조를 격파했고 산양공재기를 보면 화용(華容)의 전투에서 유비는 홀로 조조를 추격했고 촉지를 보면 그 후 조인(曹仁)을 남군에서 포위하며, 유비가 몸소 진중에 있었으니 일찍이 오군의 병력만 단독으로 출진한 적이 없었고 유비는 앉아서 성과를 누린 것이 아니다.

강표전은 '조조를 격파한 이후, 주유가 남군태수가 되었고, 남안의 땅을 분할하여 유비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후 유표의 관리 및 병사들 가운데 북군으로부터 탈주한 자들은 모두 유비에게 몸을 맡겼다. 유비가 받은 땅 만으로는 물자가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손권으로부터 형주의 몇 개 군을 차용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노숙전에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유비가 수도에 방문하여 손권에게 형주를 도독하고 싶다고 요청하였을 때, 노숙은 그에게 형주땅을 빌려주어 공동전선을 펼쳐 조조에 대항하도록 손권에게 권했다.[19] 조조는 손권이 유비에게 토지를 분여하여 지원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는, 마침 편지를 쓰고 있어서 들고 있던 붓을 땅에 집어던져 버렸다. 이후 노숙은 관우와 만나서 형주를 돌려달라고 할 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나라가 경의 가문에게 토지를 빌려준 것은 경의 가문이 멀리서 패주하여 왔으며 그 기업을 잃었기 때문입니다."손권도 또한 노숙에게는 두가지 장점이 있으나, 다만 현덕에게 토지를 빌려주라고 내게 권한 것은 단점이다라고 말했다. 이것들이 형주 대여설의 유래이나, 이 모두 오나라 사람들이 기술한 것이 그 출전이다.[20][21]

조조를 격파한 후, 유비가 경구에 이르러 손권을 만나니, 손권은 여동생을 그에게 시집 보냈고, 주유가 은밀히 상소하여 유비를 경구에 남기길 청하나, 손권은 받아들이지 않고, 영웅을 끌어들여 오랜세월 힘을 합치는 것을 정당하다 여겼으니, 이는 손권이 바야흐로 유비가 형주에 없어, 장막이 되지 않음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조조가 화용의 위험에서 탈출해 기뻐하며 여러 장수에게 이르길 "유비는 나와 동류이나, 다만 계책이 나보다 조금 늦을 뿐이다."라 한 기록이 산양공재기에 있다. 조조가 손꼽는 이는 오직 유비로, 일찍이 손권에겐 언급조차 미치지 않았다.

정욱은 위에 있었으면서도 유비가 오로 들어간 것을 들었는데, 논하는 이 다수가 손권이 반드시 유비를 죽일 거라 여겼지만, 정욱은 "조공께선 천하에 적수가 없어, 손권은 당해낼 수 없습니다. 유비에겐 영웅의 명성이 있어, 손권이 필시 그를 지원하여 자신을 방어할 것입니다."라 하니 이 이야기가 정욱전에 있다. 이는 위나라 사람 또한 오직 유비를 영걸로 손꼽아, 손권은 언급도 하지 않았다는 얘기이다.

이제 병력을 논하면, 제갈량이 처음 손권을 보며 이르길 "예주(豫州-유비)의 군이 비록 장판(長阪)에서 패했으나 지금 전사들 가운데 귀환한 자들과, 관우 휘하의 수군이 정병을 합하여 일만이 되고, 유기가 합한 강하의 전사 또한 최소한 만 명입니다." 또한 손권이 주유 등의 수군을 파견함이 3만 명에 불과했음이 제갈량전에 있다.[22] 즉 유비보다 병력이 10배가 아니었다.[23]

게다가 이 때 유표의 장자 유기는 오히려 강하에 있었고, 조조를 격파한 후 유비는 곧 표를 올려 유기를 형주자사로 삼으려고 상표했었는데 손권은 일찍이 이에 대해 아무런 다른 소리가 없었으니, 형주는 본래 유기의 영토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또한 남으로 4군을 정벌하니 무릉, 장사, 계양, 영릉 모두 항복했다. 유기가 죽고, 많은 신하들이 유비를 형주목으로 추대했음이, 촉지 선주전에 보인다.

유비가 곧 제갈량을 파견해 영릉, 계양, 장사 3군을 거느리게 하고, 그곳에서 조세와 부역를 거둬 군수물자로 올리게 했음이 제갈량전에 보인다.

또한 관우를 양양태수, 탕구장군(蕩寇將軍)으로 삼아, 강북에 주둔하게 한 것이 관우전에 있고, 장비가 의도태수, 정로장군(征虜將軍)으로 삼아, 남군에 있음이, 장비전에 있다. 조운을 편장군(偏將軍), 영계양태수(領桂陽太守)로 삼은것이 조운전에 있다. 이렇게 장수들을 파견해 각지에 주둔케 함은, 오직 유비가 지휘한 것으로, 애초에 손씨에게 아뢰지 않았던 것은 이곳 형주가 본래 손권의 땅이 아니었기에 때문이다. 그렇기에 유비가 필시 손권에게 아뢰지 않았고 손권 또한 와서 유비를 전혀 막지 않았다.

그 후 삼분의 형세가 이미 정해지고, 오나라 사람이 적벽의 전투를 그제서야 떠올리고, 유비는 오의 병력에 기댔어 싸웠다고 여겨 마침내 형주는 응당 오나라가 가져야 할 땅이라 말하였는데, 유비가 이에 근거했기에, 비로소 이때부터 형주를 빌려줬다는 설이 있게 됐다.

본디 조조를 막을 때를 생각하면 유비가 진실로 손권으로부터 도움을 받았으나, 손권 또한 유비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았는가?[24] 손권은 이때 그저 자신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정신이 없었는데, 어찌 이미 형주를 취하려는 뜻이 있었겠는가?

관우가 노숙에게 대답하길 "오림(烏林)의 전투에서, 좌장군(左將軍, 유비)께선 주무시면서도 갑옷을 벗지 않으시고, 힘을 모아 조조를 격파했는데, 어찌 헛되이 수고만 하고 한치의 땅도 없을 수 있겠습니까?"라 말한 것이 노숙전에 있다. 이것이야말로 불변의 결론이다.

그 후, 오 촉이 세 군을 두고 쟁탈하는 형국이 되었으나, 형세가 일변하여 상수를 경계로 화의를 맺고, 장사, 강하, 계양을 나눠 오에 속하게 하고, 남군, 영릉, 무릉은 촉에 속하게 했으니, 가장 공평하고 타당한 것이었다.[25]

그래놓고선 오의 군신들은 관우의 북벌을 노리고, 형주를 습격해 이를 가지고는, 도리어 오로지 형주를 빌려줬다는 설을 날조하여, 그들이 형주를 취한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즉 오의 군신이 간교하게 거짓을 말하나, 형주를 빌려줬다는 명분은 마침내 지금까지 세상에 널리 퍼져 전해져, 모두 한결 같은 이야기를 하게 돼, 견고해져 깰 수 없게 됐고, 오히려 이러한 곡해가 거듭되어 촉에까지 흘러 들어갔으나, 이는 남의 말을 귀로만 듣고 받아들인 견해다.

조익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조조를 강남에서 몰아낸 시발점이 된 적벽대전에 유비의 공은 상당했다. 유비측 참모 제갈량은 손권에서 참전의 당위와 전략적 조언을 주었을 뿐더러 당시 연합군 병력 상당수는 유비의 지휘하에서 전투를 치루었고 이후 형주 각지에서 벌어진 전투의 양상을 보면 유비의 공을 더욱 뚜렷하다. 무릉,영릉,계양, 장사 형남 4군은 명실상부 유비가 독자적으로 탈취한 것이며 손권이 굳이 유비에게 빌려줬다 말할 수 있는 땅은 남군 강릉 지역에 한정 되었을뿐이다. 더군다나 유비는 전임 형주목인 유표의 장자 유기의 후견인이었으므로 형주의 영유권은 유비에게 있음이 타당하다. 거기에 애당초 손권은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유비와 동맹을 맺은것이지 형주에 대해서 딱히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으며 전투가 끝난 이후 유비가 배치한 각 지역의 장수만 봐도 유비의 지배가 공고했고 이후 손권측이 적벽이후 형주 수복에 자신들의 공을 내세워 형주를 빌렸으니 다 내놓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조익 뿐만이 아니라 청대에서는 이에 대해 키배를 흔히 벌였고 이에 대한 내용은 각종 삼국지 선주전 집해들에 수록되어 있다.

3.3. 연의에서의 묘사[편집]

연의에서는 남군에서의 전투에서는 실제 정사에서 유비가 남군공략에 참여한 것과 달리 주유조인금창까지 얻어가며 혼자 피터지게 싸운 것을 제갈량의 계책으로 빈집털이+ 뒷치기하여 날로 먹은 걸로 되어있다. 추가적으로 진교가 촉으로 배신해서 형주(강릉)와 양양(…)마저 계책으로 뺏은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주유의 금창은 터져버린다(…).

노숙이 적벽에서 힘들어 이겨놓고 조인도 힘들게 물리쳤는데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하자 제갈량은 유기를 보여주며 유기가 죽으면 형주를 돌려주겠다고 한다. 형주 네 군은 정사처럼 남군전투 중에 손권군과 함께 조조와 싸우는 도중 유비가 얻은게 아니라 남군을 얻은 이후 유비군이 싸워서 얻은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별 다른 기록이 없는 전투를 만들다보니 여기서 가공인물들이 한 다스가 생겨난다

유기가 죽고나서 노숙이 형주를 돌려달라고 하자 앞서 약속은 가볍게 깨버리며 이번에는 서천(익주)을 얻으면 형주를 돌려주겠다는 변명을 하고, 노숙은 또 그것을 좋다고 받아오며 노숙을 어리숙한 바보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주유가 제안하고 여범이 찬성했지만 손권이 결국 실행하지 않은 미녀 육탄공세의 계책을 손권이 손상향을 유비와 결혼시킬 때 진짜로 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주유는 여기서도 발린다(…).

마지막으로 주유가 서천을 치겠다고 한 것을 연의에서는 서천을 친다는 구실로 유비를 죽이려는 가도멸괵 계책으로 바꿔버리고 그런 주유의 계략이 제갈량에게 간파당하자 홧병으로 터졌던 금창이 악화되어 죽은것으로 나온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냥 주유보다 재갈량이 더 뛰어나다고 보여주기 위한 판타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실제 정사에서 유비 역시 주유와 함께 남군을 공략한 주체임에도 연의에선 오나라 혼자 힘들여 싸웠는데 난데없이 유비측이 나타나 힘 안들이고 낼름 갈취한 것처럼 보이게 서술해서 그냥 통수꾼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했다. 양측 모두 묘하게 쌍으로 깎인것.

4. 익양대치[편집]

4.1. 손권과 유비의 익주 진격[편집]

적벽대전에서 조조는 패배하여 그 기세가 꺾이고, 서로간의 필요성으로 동맹을 맺고 있지만 형주 일부를 빌려주고는 형주는 다 마땅히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손권과 별로 돌려줄 마음도 손권을 도울 마음도 없는 유비의 사이는 배송지의 말마따나 '비록 겉으로는 화목했으나 안으로는 서로 시기하고 방비하니' 얼음장 위를 걷는 듯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장은 조조가 워낙 강대하여 서로가 손을 잡고 있었지만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손권은 이렇게 유비에게 땅을 빌려준 다음에 촉을 칠 계획을 세우고 유비에게 이에 대한 협력을 요구한다. 유비 측에서는 어차피 형주를 넘어서 촉 땅을 다스리지는 못하니 우리 땅이 저절로 될 것이라며 보내자는 쪽과 어쨌든 손권에게 서촉을 줘서는 안된다는 의견으로 나뉘었을 때 은관이 나서 오나라가 촉을 쳐서 안 된다고 주장하자 안 그래도 촉 땅을 가질 계획을 가지고 있던 유비는 여러가지 이유를 들면서 손권에게 거부 의사를 밝힌다. 이런 유비군의 움직임에 손권은 뭔가 낌새를 챘는지 손유를 보내 단독으로 유장을 치려고 하나 유비는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유장은 똑같은 한종실이기에 공격하면 안된다면서 안 들어주면 산속으로 들어가겠다는 소리를 하며 막으니 손권은 그의 생각이 어쨌던 간에 일단은 물러나게 한다.

한편, 211년 조조는 종요에게 명을 내려 한중장로를 공략하라 말한다. 이에 마초는 불안감을 느끼고 관중의 군벌들을 규합, 조조에게 대항한다.

불안하기로는 익주유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장송이 유비를 불러 견제할 계획을 말하자 장송을 사신으로 보내고, 유비는 이에 촉으로 들어와 211년부터 212년까지는 장로를 공격하는 시늉만 하면서 민심을 얻기 위해 인심을 후하게 베풀었다.[26]

한편, 조조군은 이때 마초의 봉기를 물리친 후였다. 한편 청니에서는 관우와 악진이 대치중이었고 손권이 위나라의 공격에 유비에게 SOS친 것을 이용.[27] 유비는 유장에게 군사와 병량을 요청하고 손권을 지원하러 돌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걸 보고 마음이 성급해진 장송의 실수로 내통혐의가 드러나 처형이 되자 유비는 본격적으로 유장과 전쟁을 벌인다. 213년 방통이 전사하자 관우는 그대로 남아 형주를 지키고 제갈량, 조운, 장비가 추가로 파견되었다.[28]

4.2. 청니 대치[편집]

이렇게 손권이 유수구에서 조조와 싸우고 유비가 서촉을 먹을 동안 관우는 청니에 있었다. 당시 유비군은 형주에서 1차로 유비가 방통, 황충, 위연과 수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촉으로 떠나고 그리고 얼마 후 제갈량이 장비, 조운과 함께 수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유비를 원조하기 위해 떠났다. 관우는 2차례에 걸쳐 수만의 병력과 핵심 무장, 참모들을 다 떠나보낸 형주에서 오나라나 주군 유비의 도움 없이 홀로 위군과 대치해야 했다.[29]

4.3. 유비의 서천 점령[편집]

한편, 214년 유비가 갈 곳을 잃은 마초까지 끌어들여 위용을 갖추자 유장은 마침내 항복하여 유비는 서천을 점령한다. 그리고 유장을 형주로 내쫓아 버린다. 신의를 잃어버릴 수 없다며 치는 걸 반대한 인물이 도움을 요청한 유장의 뒷통수를 쳐서 날려버린 다음에 형주로 내쫓아 버린 것. 이런 유비의 움직임에 손권은 유비가 한창 서천에 가 있을 동안 손부인을 시켜 유선을 볼모로 삼기 위해 끌고 오게 하지만 제갈량의 명령을 받은 장비조운에 의해 실패하며 결국 이 사건은 익양대치로 이어진다.

4.4. 익양의 대치와 악화되는 결속[편집]

유비가 유장을 항복시켰다는 말을 들은 손권은 그동안 언제까지 남군을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던 태도를 바꾸어 사자(손권전에선 제갈근)를 보내 형주를 내놓을 것을 요청한다. 이에 유비는 "양주를 얻으면 마땅히 형주를 다스리게 주겠소.(또는 공동으로 하겠소, 함께 지내게 하겠소)"[30]라고 말하였다.(선주전, "須得涼州,當以荊州相與", 자치통감 "乃盡以荊州相與耳")

손권은 이를 듣고 "이는 빌렸으면서 돌려주지 않는 것이며, 공허한 말로 시간을 끌려고 하는 것입니다."라고 외치면서 곧장 요청없이 본인 독단으로 유비가 독자적으로 얻었던 형남 4군 가운데 남쪽 세 군(장사, 영릉, 계양)의 태수를 두었는데 관우는 그들을 바로 내쫓아 버린다. 손권은 몹시 대노하여 장군 여몽에게 선우단, 서충, 손규와 병사 2만 명을 주어 장사, 계양, 영릉을 빼앗게 하며 여대손무 등 장수 10명도 추가적으로 더 보낸다. 이에 여몽이 병사들을 이끌고 이 세 군에 편지를 보내니 장사와 계양은 냅따 항복한다(…).(손권전)

다만 여기서 장사태수 요립은 도망치고 안성현, 유현, 영신현, 다릉현의 관리가 음산성으로 들어가서 저항했으나 이들은 여대에게 즉시 격파되고 여대는 남아서 장사를 지킨다.

이렇게 두 군을 어이없게 뺏겨버린 유비는 몸소 5만 대군을 이끌고 공안으로 내려가고, 관우를 익양으로 파견한다.(선주전) 이런 유비의 움직임에 손권은 노숙에게 1만 군대를 주어 관우와 대치시키게 하고 학보가 지키던 영릉을 공략하던 여몽에게는 영릉은 버리고 빨리 돌아와서 노숙을 도우라고 한다.

여몽이 편지 한 장으로 항복시킨 장사와 계양에 비하면 시간이 많이 걸린 것은 사실이지만 장사를 점령하고 영릉으로 가는 길에 영현에서 학보의 옛 친구 등현지득템한 여몽은 이를 이용해 영릉을 단숨에 점령할 계획을 세운다. 그는 등현지에게 "저항하는 것은 자유지만 이미 유비, 관우도 격파됐다며 지금 원군의 가망은 없다"고 구라를 까며 오히려 오군은 계속해서 원군이 오고 있다고 더블 구라를 까면서 가진 힘의 차이를 보면 함락은 당연하니 항복하라는 것.

이런 등현지의 말을 들은 학보는 항복할 뜻을 전한다. 등현지가 이 사실을 여몽에게 알리자 여몽은 곧바로 네 장수에게 백 명의 병사를 주고 학보가 나오면 성문을 점거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학보가 항복하고 자신의 장수들이 성문을 점령한 것을 확인하자 여몽은 학보의 손을 잡고 같이 배에서 내린 후에 손권이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보여준다. 이걸 보고 유비는 공안에 있고 관우는 익양에 있다는 것을 안 학보는 땅 속으로 숨고 싶어했다.

동시다발적으로 항복 권고를 내리고 성공하거나, 학보의 친구 등현지를 빠르게 확보하는 등의 신속한 움직임을 보면 여몽은 미리미리 상당한 수준으로 첩보전을 준비해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형주 남군을 재패한 여몽은 손하[31]를 남겨 적에 대비하게 하고 자신은 노숙군에 합류한다. 거기다가 반장, 감녕, 손교[32] 등의 군대도 속속 도착한다.

안성현의 장 오탕중랑장 원룡이 관우와 결탁해 반란을 일으키나 노숙과 여대에게 격파되며 사건 종료.[33]

4.5. 215년, 익양대치 - 노숙제 대 관우뢰[편집]

노숙은 강을 사이에 두고 관우를 마주보는 형태로 강의 북쪽에 성을 축조한다.(노숙제, 魯肅堤)[34]

이 때 관우는 3만 명의 병사 중 직접 정예병사 5천 명을 선발하여 상류 10여 리의 얕은 여울에 배치하고 밤을 틈타 냇물을 건너려 하는 움직임을 보이는데 이때 3백 명의 병사를 가지고 있던 감녕이 자신에게 5백명만 증원시켜주면 관우가 자신의 침 뱉는 소리만 듣고도 건너오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본격 감녕 히드라

노숙감녕의 건의를 받아들여 감녕에게 1000명의 군사를 주어 강변에 관우를 감시하는 망루를 세우게 한다.[35] 이에 관우는 강을 건너지 못하고, 땔나무를 엮어 진채를 만든다(관우뢰, 關羽濑) 이런 대치상황 속에서 관우와 노숙은 서로 군사를 백보 밖으로 주둔 시키고, 오직 장군들만이 단도 하나씩만을 지니고 만나 대면하기로 한다. 노숙의 부하들이 관우의 속셈의 무엇일지 모른다며 노숙을 만류하지만 노숙은 서로 진심을 드러내지 않으면 안된다며 위험을 무릅쓰고 관우를 만나러간다.

이 자리에서 관우는 유비도 조조와 싸웠는데 왜 우리의 땅을 뺏느냐고 말하지만 이에 노숙장판파에서 깨진 상태에서 도저히 조조군을 이길 가망이 없이 도망치던 유비를 도와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36]며 대답을 했다. 관우가 이에 답을 못하고 있을때 한 장수[37]가 일어나 "영토란 덕있는 사람에게 속하는 것일뿐. 어찌하여 영원히 소유하려 하시오?"라 노골적으로 말하자 관우가 눈짓으로 그를 물러나게 한다. 결국 분위기는 살벌해지고 회의는 말 그대로 파토가 나게 된다. 당시 양군의 상황은 그 정도로 악화일로였다.
양군의 대군이 대치하여 그야말로 일촉즉발(一觸卽發)의 긴장감이 드높던 그때, 유비에게 놀라운 소식이 전해진다. 조조가 장로의 항복을 받고 한중을 손에 넣었다는 것이다. 훗날 양홍이 말하다시피 '촉한과 이와 입술의 관계'인 한중이 조조에게 굴러떨어지자 유비는 위기감을 느끼고 손권과 협상을 벌여, 이 자리에서 형주를 분할하여 상수를 분할해 강하, 장사, 계양을 손권에게 속하게 하고 자신은 남군, 영릉, 무릉을 갖기로 합의한다. 여몽이 형남을 점령한 이후의 영토 이동으로 보면 영릉을 유비쪽으로 넘기고 유비쪽에 남은 강하 일부를 오에 넘기고 끝내겠다는 것. 아, 그리고 불쌍하게 여몽의 거짓말에 속아 항복한 학보는 영릉군과 함께 유비군에 돌아간다(…)

4.6. 결말[편집]

형식적으로는, 유비나 손권이나 이로서 보유하고 있는 형주 소유권에 관한 문제는 일단락이 된 것이다. 손권은 애당초 협상에서 유리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가지고 있는 영릉군을 돌려주고 맺은 결과니까. 이제부터는 땅을 빌렸느니 돌려주느니 이런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형주를 기반으로 유비가 폭발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손권측에서는 유비를 부려서 조조를 막겠다는 주유 - 노숙의 전략 자체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노숙의 뒤를 이은 대도독 여몽. 한편 유비측에서도 관우는 손권을 결코 좋게 보지 않았다. 이는 또 다른 파국을 낳는 원인이 된다.[38]

4.7. 연의에서의 모습[편집]

유비가 서촉을 점령하자 손권은 장소의 계책을 받아 제갈근의 가족을 가짜로 가두고 형주를 받아오게 한다. 하지만 제갈량은 유비와 짜고 장사, 영릉, 계양 땅을 돌려주기로 말만 하고 실제로는 관우가 모두 다 거절하고 손권이 보낸 관솔도 내쫓는다.

단도회의 대화 자체는 정사나 연의나 흐름은 비슷하다. 다만 이 잔치 자체가 노숙이 관우를 잔치로 불러들여 관우를 설득해서 형주를 얻거나 그렇지 않으면 죽이자는 계획을 세우는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나관중이 관우측에 유리하게 각색했다고 하는데 실제 정사에서도 단도회 자체는 일단 노숙쪽이 먼저 제의하고 관우가 참여한게 맞고 나눈 대화 자체도 의외로 연의에서도 비슷하다. 정사에선 관우가 참가한다고 하자 관우의 부하들이 말리는 장면은 없고 관우가 곧바로 응한것만 나오며, 노숙은 단도회를 제안한 후 관우와 만나려하자 걱정하는 부하들에게 태연하게 걱정할 것 없다고 말한 이후에 단도회에 참석한다. 물론 연의에서도 결론은 협상 결렬인데 여기에 관우가 술에 취한척하며 노숙에게 접근, 큰 칼의 손잡이를 잡으면서 위협해 노숙을 인질로 잡아서 돌아가고 손권은 격노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손권은 형주를 치려고 하지만 조조의 공격한다는 말이 들리자 모든 군사를 합비와 유수로 옮겨 이들을 막기 위해 힘 쓰느라 공격을 못한다. 그리고 여기서도 조조는 정사와는 반대로 부간의 조언에 따라 공격 포기(…)

그리고 조조가 한중을 점령하자 서촉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 했는데 이에 제갈량의 계책으로 인해 정사와 같이 강하, 장사, 계양을 손권에게 넘겨주고 합비를 공격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여몽의 활약으로 점령한 장사, 계양, 영릉? 그딴 거 없다. 그리고 합비에서의 결과는 알다시피 안습.

익양대치 자체는 연의에서는 거의 묘사되지 않지만, 일단 존재하는 기록이기는 하므로 삼국지를 소재로 한 몇몇 경극에서 다루기도 한다. 물론 삼국지 문화의 특성상 오호대장군 올스타 앞에 개관광당하는 오나라같은 묘사가 많다. 안습.

5. 번성 공방전[편집]

5.1. 발단[편집]

216년, 조조는 마침내 위왕(魏王)이 되고 이 무렵 탕거(宕渠)에서 장합장비의 교전이 일어나 장합이 크게 패함으로서 한중 공방전의 서막이 오른다. 218년 법정의 건의로 북진을 한 유비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나선 조조가 대치하였으나 이미 유비가 요충지를 다 거머쥔 상태에서 나오지를 않았고, 219년에 결국 조조가 그런 유비를 끌어내지 못 하고 철수를 하면서 유비는 한중을 손아귀에 쥐게 된다. 계속된 승리에 촉군의 기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했고 이윽고 유비는 한중왕의 자리에 오른다.

한편 형주를 지키는 관우는 병마를 조련시키면서 때를 엿보고 있었다. 그 동안 오나라는 익양대치 후에도 계속해서 형주를 노리고 있었다. 양국의 결속을 위해 부단히 애를 썼던 노숙이 죽자 손권은 여몽의 말을 듣고 서주를 공격하는것은 도박에 가까운 일이라고 판단[39]하여, 상대적으로 형주를 공략하기 쉬울거라 여기고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었고 관우는 이를 방비해서 공안과 남군에 수비 병력을 다수 배치해놓았다. 그러나 관우가 대비를 철저히 하니 당초 예상과 달리 여몽은 관우의 방비를 뚫고 들어갈 방법이 없어 고심하게 된다.

이때 손권은 관우에게 관우의 딸[40]과 자신의 아들의 혼담을 주선하지만 관우는 유비와 손부인과의 일과 익양대치로 감정이 상해있는 상태라 사신을 상대로 모욕적인 언사를 날리고 단박에 거절한다. 이에 손권은 분노하고 오나라 내부에서도 관우를 공격하자는 말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한편, 219년 촉군의 연승으로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때 조인은 관우를 토벌할 목적으로 형주 번성에 진수하고 있었으나 218년 10월 완에서 후음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떠났고 219년 정월에 조인이 완을 함락하고 후음을 참수했다. 이에 관우는 후음과 연계하여 북진을 하는데 이 일은 놀라운 결과를 낳는다.

5.2. 관우, 천하를 진동시키다[편집]

5.2.1. 번성 공방전과 7군의 궤멸[편집]

손오와의 동맹이 수복되고 유비가 한중왕에 오르며 촉의 기세가 치솟는 가운데, 조조 최후의 대규모 원정이었던 한중전 패배로 그 권위가 추락했다. 각지에서 손랑, 허유[41] 등의 반란이 일어나 중원에 혼란이 일자 관우는 그 틈에 형주의 군세를 이끌고 양양, 번성을 차지하기 위해 북진한다. 이에 대해선 조인이 먼저 관우를 치기 위해 번성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조위의 선제공격을 막기 위해 북진한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도 있다.[42] 어쨌거나 조조는 급히 오대장 중 한 명인 우금에게 최정예의 7군을 주어 구원토록 하고 서황을 완에 주둔시켰다.

만총전에 따르면 우선 관우가 양양을 포위하니 만총은 정남장군 조인을 도와 번성에 둔치며 이를 막았다고 한다. 즉 관우의 본영이자 포위망의 시작은 위수 남쪽인 양양부터였다. 당시의 전투에서 위군과 우금, 방덕은 번성에서 북으로 십리 떨어진 곳에 주둔했으며 이렇게 번성 북쪽으로 치고 올라간 관우의 이마에 방덕이 화살을 맞추기도 하는 등 치열하게 싸웠다. 그러나 장장 십여일간 계속된 비에 한수가 범람하였으므로 칠군은 수몰되었고, 수해를 피한 관우는 배[43]에 타서 허우적대거나 제방으로 올라간 위군을 모조리 화살로 쏘아 죽였다.

온회전에는 아예 온회가 관우를 경계하면서 지금 강물은 불어나는데 조자효(조인)가 적지 깊숙이 들어가 고립되어 장래의 위험에 대비하지 못하고 있으며 관우는 용맹하여 전쟁을 잘 하므로, 승기를 잡아 진군해 오면 위험하다며 관우는 용맹하고 전쟁을 잘하므로 이 기세를 타고 들어오면 근심이 될 것이라고 홍수에 대해 걱정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관우가 수몰로 적을 격파하는 것을 계획하고 치고 올라갔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7군이 주둔한 번성 북쪽은 면수와 상당히 떨어져 있는 남양군 등현 북서쪽 인근이다. 즉 관우는 배후에 있는 번성의 공격을 차단하면서 7군과 육전으로 홍수가 날 시기까지 격렬히 싸움을 벌이면서 잡아두다가 홍수가 나자 싸우고 있던 육군을 위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잡아두며 은근히 빼고 배가 운용할 수 있을 정도로 북쪽 육지가 물에 잠긴 타이밍에 면수에 있던 수군을 보내 홍수를 피하지 못한 위군에게 재차 공격을 가했다는 의미가 된다. 방덕전 기록에 따르면 관우는 물을 피해 제방에 올라간 방덕을 비롯한 여러 위군들을 사방에서 큰배로 화살을 쏘아 모조리 쏴 죽이고 일출때부터 아침을 넘어 정오가 지날때까지 온종일 격렬하게 방덕의 군세와 싸웠고 방덕이 가진 화살이 다 떨어졌으므로 도검을 쥐고 단병접전을 벌였으며 결국 방덕이 장수 한명과 오장 두명을 거느리고 조인에게 돌아갈 목적으로 탄 작은 배가 뒤집혀 그를 사로잡았다고 한다.[44] 전술적 운용에서 관우가 천시를 이용해 조인, 우금, 방덕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어쨌거나 우금이 제장들과 함께 고지에 올라 물을 바라보니 회피할 길이 없었고, 관우가 큰 배를 타고 와서 우금 등을 공격하자 마침내 우금은 항복하고 포로가 되었으며, 형주자사 호수와 남향태수 부방도 관우에게 항복하였다. 살아남은 3만 군사[45]도 모조리 포로가 되었다. 여기서 남향군은 본디 형주 남양군의 일부인데 208년에 조조가 형주를 접수하면서 남양의 서쪽을 갈라 새로 만든 군이다. 서쪽으로는 무관, 상용이 있고 동쪽으로는 얼마전 후음이 진압된 이 있다. 남향태수가 잡혔다는 것은 이 지역을 이끌던 행정관과 그 휘하 병력들이 관우에게 사로잡혀 해당 지역이 공백상태에 빠졌다는 얘기가 된다. 즉 조조 치하 형주는 얼마전에 있던 반란 이후 불안정한 상황에서 남쪽의 관우 말고도 서쪽의 상용에서의 공격을 대비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 셈이다. 괜시리 관우가 유봉맹달에게 번성으로 지원을 오라고 한 것이 아닌것이다.

방덕은 항복하려는 동형, 동초 등의 목을 베고 분전했으나 결국 사로잡히게 된다. 관우는 방덕의 형제가 한중에 있다며 자신의 장수가 될 것을 정중하게 권유했지만, 방덕은 끝까지 기개를 잃지 않고 투항을 거부하다 처형된다.(방덕전) 한편 이에 맞추어 허도 인근 예주 양국, 예주 영천군 겹현, 낙양 인근 사례 홍농군 육혼현의 군도, 반 조조세력들이 혹은 멀리서 관우의 관인과 봉호를 받아 그의 일당이 되었다.[46] 또 이 틈을 타 조조의 본거지인 성에선 위풍이 많은 사람이 연루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가 조비에게 진압되었다. 위풍의 난은 사료가 없어서 어떤 성격의 반란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관우 진격 이후 혼란한 틈을 탄 공격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관우는 면수인근에서 여상이 지키는 양양과 조인, 만총이 지키는 번성을 수륙양면으로 모두 포위하였다. 후일 오나라에서 양양까지 당도조차 못하고 후퇴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완벽한 적기로 인식했을지도. 번성은 5,6장 가량 수몰되었는데 이건 무려 15미터에 가까운 높이다. 위나라 최고사령관은 포위당해 위험에 빠졌고, 구원을 보낸 최정예 병력은 폭우로 인해 수몰되었고, 구원군 총사령관은 사로잡혔다. 당시 관우의 이름은 온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당시 관우가 뒤흔든 화화의 기세는 정말로 중원을 뒤흔든 수준이었다.

5.2.2. 조조, 천도(遷都)를 말하다[편집]

당시 조조가 받던 압박감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번성 등이 함락되면 허창과 너무 가까운 위치인걸 생각해 도읍을 옮기는 것을 고려할 정도였다. 이때 사마의와 호군 장제는 조조의 의견에 반대하며 우금은 홍수에 당했을 뿐, 손권을 이용하여 이 어려움을 해결하자고 한다. 유비와 손권의 사이를 정확하게 꿰뚫어 본 말에 조조는 용기를 얻고 손권에게 연락을 취하자 장제전에 의하면 손권은 '즉시' 움직였다고 한다. 동맹의 실상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8월, 조조는 서황을 2차 구원병으로 파견시켰으나 환계전에 따르면 서황은 조인을 구하는데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했다. 그리고 동남방면의 장료를 관우쪽으로 전진배치시킨다. 당시 손권이 합비를 공격하고 있었으나 온회전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 온회는 손권은 걱정할 것이 아니라고 하며 오히려 장료마저 소집될 것을 확신한다. 이것은 물론 오와 밀약을 맺었기 때문에 가능한 조치. 오군이 합비로 올 일은 절대 없다는 확신이 없는 상태였다면 이 조치는 대들보 빼서 기둥으로 쓰는 모양밖에는 안된다. 심지어는 자신마저 서황의 뒤를 이어 남하하기 시작한다. 당시 조조의 상황이 이렇게 급박하였다.

218년 김의, 경기, 위황, 길본의 난이 일어났을때 그들이 호응하고자 했던 인물이 바로 관우라는 점에서[47]조조 입장에선 도저히 편안히 잘 수가 없는 것이었다. 번성이 뚫리면 그 다음은 완까지 일사천리고 만약 한중에서 숨을 가다듬고 있던 유비까지 가세한다면? 그렇게 될 경우 어떤 꼴이 날지 모골이 섬뜩했을 것이다.

급박한 것은 번성의 조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번성은 완전히 물에 잠겨서 도저히 성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48] 군량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 지원군 역시 수몰되었으므로 사기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이에 번성을 버리고 달아나자는 자도 있었으나 어떻게든 이곳을 사수하여야 된다는 만총의 말에 조인은 제장들을 다시 모아 결사의 각오를 말하니 모두가 감격하여 다시 군사들의 사기가 올랐다.

그리고 실제로 조인의 이런 끈질긴 항전, 오군의 침공으로 뒤가 끊길까 하는 염려에 관우는 섣부른 북진을 하지 못하였다. 번성에 발이 묶여 당시 한중공방전과 7군의 패배, 그리고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위기에 봉착한 상태였던 조조에게 대응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주게 되고 만다. 만총의 판단이 적절했던 셈.

5.3. 뒤집히는 전세[편집]

조인을 포위시키고 칠군을 섬멸시킬 때까지 관우는 완벽했고 그 위엄은 온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전세는 눈 깜짝할 사이에 거짓말처럼 바뀌어 버렸다. 가장 눈에 띄는 남자들은 두명이었지만 진짜 관우에게 치명타를 안긴 사람은 따로 있었다.

5.3.1. 서황의 용맹[편집]

조인은 군기를 다독였으나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여전히 성내에 물이 가득차 빠지지 않고 있었다.

한편 관우는 상용에 있는 유봉맹달에게 구원군을 요청했으나 유봉과 맹달은 아직 점령하지 얼마 안 되어 군사를 보낼 여지가 없다면서 군악대를 가지고 싸우고 있는 형국이었고 미방사인이 병량보급에 전력을 다하지 않아 관우는 3만 포로의 식량까지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물러나지 않고 영릉군의 상관에 있던 병량까지 마음대로 취해가면서 포위망을 유지시켜 점령의 의지를 분명히 나타내었다.[49]

10월, 서황이 이끄는 지원군은 다시 조인의 구원을 꾀한다. 서황은 최악에 상황에 처한 조인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용의주도하게 관우를 살피며 전투를 피하고 지원을 기다렸다. 이에 대한 제장들의 불만이 없지 않았으나 그때 의랑 조엄이 그들을 잘 다독여 내분은 피할 수 있었다. 서황이 지원을 기다린것은 겁이 나서가 아니라 서황의 병사들이 대부분 신병이라 관우의 강병을 베겨낼 수 없었기 때문으로, 이후 서황은 참호를 파며 언성의 배후를 끊으려는 듯한 행동을 취했고 촉군은 둔영을 불사르고 후퇴했으며 서황은 언성을 점령하면서 영을 연결시키면서 포위망으로부터 3장 떨어진곳까지 진출하였다. 한편 조조는 직접 서황을 지원할 계획을 세우지만 환계의 조언에 따라 은서주개를 파견하고 12영(營)[50]의 군사들이 서황에게 지원군으로 도착해 전투가 시작되자 서황은 그간의 소극적인 움직임이 무색하리만치 어마어마한 싸움을 보여주었다.

일단 서황은 위두의 둔영을 공격하는 것처럼 소문을 퍼뜨려 적군의 시선을 돌리다가 은밀히 사총을 공격했다. 관우는 사총이 곧 무너지려 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 보기 5천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기다려, 당황하지 마라! 이건 공명의 함정이다![51] 서황은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 서황이 이를 들이쳐 패주시키고, 10겹의 포위망 안까지 깊숙이 추격하여 격파하니 촉군들은 스스로 면수(沔水)에 투신해 죽기도 했다. 여기에 항복했던 호수와 부방도 죽었다. 동시에 번성 내부에서 사기가 오른 주둔군마저[52] 만총 등의 지휘로 양측에서 힘을 합쳐 공격하자 관우는 결국 포위망을 걷어내 버릴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직 위군은 관우를 완전히 몰아낼수 없었다. 조엄전에 따르면 오히려 관우의 군사가 물러난 후, 촉의 수군이 면수를 장악하였고 (번성포위망에 있던 병력이 양양으로 물러간 탓인지) 양양은 완전히 위군과 연락이 끊겨 굳건히 포위되었다. 이 상황에서 위군이 정면에서 관우를 격파하려면 3가지의 단계를 겨쳐야만 했다. 우선 1차적으로 면수의 수군을 격파해야 하며 그 후에는 성공적인 도강 작전을 펼쳐서 건너서 군사를 반대편에 주둔시켜야 하고 그 다음 양양을 포위하고 있는 관우군 주력을 격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군사작전이 상당히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장기적으로는 가만 놔두었을시 양양이 관우의 손아귀에 들어갈 공산이 커지는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서황과 만총이 관우의 번성 포위망을 풀어내고 있을 무렵, 후방에선 동오의 대도독 여몽이 거미줄을 준비하고 있었다.

5.3.2. 여몽의 계략[편집]

5.3.2.1. 오나라의 준비[편집]
당시 여몽은 병을 핑계대어 전선과는 멀리 떨어진 후방에서 요양하고 있었다.[53] 그리고 당시 명성상 애송이나 다름없는 육손[54]을 후임으로 내세워 기만 전술을 사용했다. 후임이 된 육손은 대충 "나 초짜니 잘 봐줘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고 "적국이 패배한 것은 동맹국에는 이로운 일이므로 당신의 승리 소식을 듣고 손뼉을 쳤고, 중원을 석권하는 대업을 이루어 함께 조정을 보좌하고 기강을 유지시키기를 희망했었다.(혼자 싸우시려니 힘드시겠다. 나도 좀 보태주겠음)" 이라며 북벌에 적극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당시 관우의 병력은 4만을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맞 상대하는 위군은 물경 10만이 넘어가는 최정예 병력이었다. 이 상황에서 육손의 연기에 속아 넘어간 관우는 한 시름 돌렸다고 여기고 남군에 주둔시킨 병력을 위군을 상대하기 위해 빼낸다. 여몽이 의도한 그대로였다.

여몽전에 나오는 처음 노숙의 뒤를 이어 부임하자마자 손권에게 말한 것에서 볼 수 있 듯 노숙 등이 유비와 힘을 합칠 것을 주장한 것은 조조의 위협 때문이었는데, 여몽은 형주를 얻어 방어선을 더 굳게 만들 것을 청하면서 처음부터 형주를 공격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관우를 환대하면서 위장술을 펼쳤지만 관우도 경계심을 풀지는 않아 남군등에 병사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관우가 위군을 상대할 때 그는 다시 손권에게 자신이 병을 핑계로 물러나 적을 방심하게 한 후 공격을 하자고 한다. 손권이 이 일을 시의에게 물으니 그 또한 이 계획에 찬성하고 오범마저 이 일이 가능하다고 하는데다가 전종, 육손 또한 관우를 물리칠 수 있는 계책을 진술한터라 손권 역시 이 제안을 승낙하고 손교와 여몽을 좌우 도독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여몽이 정보과 주유의 예시를 들자 그만두고 손교에게 여몽의 뒤를 봐주게만 한다.

한편 관우가 계획대로 남군의 병력을 위군과의 전선으로 보내어 방비가 허술해졌지만 아직 형주를 공격할 명분은 없던 오군이라 적당한 구실만 찾던 중이었다. 하지만 그때 관우는 우금의 포로 때문인지 미방의 수송 때문인지 육손의 편지를 보고 육손이 협조적으로 나설거라 오판했는지 양식이 부족해져 상관(湘關)[55]의 지역의 쌀을 마음대로 취하니 오나라 군대는 이에 지체없이 남군과 공안으로 공격을 가한다.
5.3.2.2. 한편 그동안 관우는[편집]
손권은 마지막에 공격하기 전 조조에게 편지를 보내 관우 공격을 비밀로 해달라고 하고 조조의 신하들은 이를 손권의 말대로 비밀에 부쳐야 한다고 했으나 동소가 나서 이 사실을 번성과 관우의 본진에 편지를 쏘아넣게 하니 번성의 병사들은 용기백배. 아직 번성과 양양과 면수 일대를 점거한 상태였던 관우는 무슨 생각인지 이것을 보고도 주저할 뿐 돌아가지 않는다.

호삼성은 이를 보고
관우는 비록 손권의 편지를 보았으나 스스로 강릉과 공안의 수비가 굳어서 손권이 단시일 안에 뽑아버릴 수 없다고 믿었다. 또한 물의 기세를 통하여 번성에 다가갔는데 이를 풀어놓게 되면 반드시 앞서 세운 공로를 해치게 되어 있었다. 이것이 그가 미루는 이유다.
라고 해석을 하였다.

과연 관우는 오나라의 국경에 둔영의 관측소를 세워둬 언제든지 신호가 오면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성안에 병력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의 생각은 맞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몽이 준비한 비장의 카드는 그의 예상을, 아니 당시 형주사람들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5.3.2.3. 여몽의 형주 점령[편집]
여몽은 정예 병사들을 모두 큰 배 안에 숨겨놓고 흰 옷을 입고 노를 젓게 하고 상인의 복장을 하고 침입하여 관우가 마지막으로 혹시 몰라 남겨둔 강변의 둔후들을 모조리 붙잡아 묶으니[56] 관우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꿈에도 알지 못하였다.

이렇게 관우가 경계를 위해 세워둔 둔들을 들키지 않고 정복한 여몽은 예전에 익양대치에서도 편지 두 장으로 장사, 계양 두 군을 항복시키고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등현지를 이용해 영릉을 얻은 것 처럼 이번에는 기도위로 있다가 손권에게 쫓겨난 우번을 손권에게 억지로 부탁해서 끌고온 후 이용하기로 한다. 우번전에 의하면 우번은 의술에 능했으므로 여몽 본인의 지병 문제도 있긴 했을것이다.

당시 수비 책임자는 남군의 미방과 공안의 사인[57]이었는데 당시 미방은 군량을 태워먹은 죄로 관우에게 심한 꾸짖음을 들었고 이에 두려움을 품고 손권과 내통하고 있었으며 우번이 사인에게 언급한 것처럼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여몽은 우번에게 사인을 설득하게 한다.

이렇게 우번이 만나게 된 사인. 정사 관우전에 따르면 사인은 관우에게 업신여김을 받고 군수물자를 제대로 조달하지 못하는 등의 일로 관우에게 질책을 받은 상황이었는데 우번은 그를 직접 설득하려고 하나 의외로 사인은 공안을 지키면서 우번을 만나주지도 않는다. 우번은 그것을 보고 사인에게 편지를 쓰는데 편지 왈, '우리가 왔는데 척후도 없고 봉화도 오르지 않았으니 내응이 있었다는 거쯤은 알 수 있지 않아? 어차피 여몽 장군이 남군으로 육로를 끊으면 살길이 막히는데 여기서 버텨봐야 니 가족만 망하고 싸워도 살길이 없으니 항복하라고' 사인은 이 편지를 읽고 더 이상 버틸수 없다고 느꼈는지 눈물을 흘리며 항복한다. 우번은 사인의 항복을 확인하자마자 이는 휼병[58]이니 응당 사인을 남군으로 데리고 가야 하며 군사를 남겨 (공안)성을 수비해야 한다고 하니 여몽은 우번의 말 대로 사인을 데리고 미방이 있는 남군으로 간다.

애시당초 상황상 협박편지로 항복한 사인 같은 사람에 비해서 서주부터 유비를 따르고 동생은 유비와 결혼도 했고 촉에 형 미축이 있는 미방은 미방이 관우와 사사로이 사이가 틀어졌다고 두 마음을 품어 배반했다고 미축전에 전한다. 그에게 업신여김을 받고 결정적으로 군수물자를 태워먹은 일 때문에 질책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두려움을 품어서 대놓고 이전부터 손권과 내통하고 있었기에[59] 사인을 보자 별 미련도 없이 시원스레 성을 넘겨주고 만다. 그것도 쇠고기와 술을 준비해서 대접까지 하면서. 정사 여몽전 주석 오록의 기록에 따르면 배반의 주체를 명백히 미방으로 한정짓고 있다. 왠지 내 동생이 유비와 결혼했고 형이 촉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지만 말 그대로 미방의 항복은 미방 본인의 독단이었기에 남군성 사람들로는 "이게 뭥미?"의 상황. 우번 말대로 내응이 있어 척후도 없고 봉화도 오르지 않았는데 갑자기 오군이 나타나고 그 내응자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60]이었으니 이런 반응도 무리는 아니다. 결국 몇몇 사람이 복병을 만들어 성급하게 연회를 여는 여몽을 공격하려 했지만 우번이 이를 예측하고 한창 성 밖에서 축하연을 벌이고 있던 여몽에게 경고를 하고 여몽 또한 우번의 말을 들어 관악을 장악한 탓에 성공하지 못했다.
5.3.2.4. 여몽의 심리전[편집]
그런 강릉 군민들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여몽은 그곳에 잡혀있던 우금과 관우와 그의 장수, 병사들의 가족들을 붙잡았는데 여몽은 그들 모두를 위로하고 보살폈으며, 군대의 약속을 하고 다음과 같은 명령까지도 내린다.
민가를 돌아다니며 요구하거나 빼앗는 일을 할 수 없도록 하라.
여몽은 그 말을 지켜 여몽과 같은 군 사람이 공적인 물건인 관의 갑옷을 지키기 위해 민가에서 삿갓 한 개를 빼앗아서 갑옷을 덮는 사건을 발생했을 때도 군령을 범했는데 고향사람이라고 용서할 수는 없다면서 눈물을 흘리며 목을 베었다. 이런 일이 벌어진 이후 군영 안에서는 두려움에 떨면서 길에 떨어져있는 것조차 줍지 않았다고 한다.

거기다가 여몽은 아침저녁으로 측근들에게 기로[61]들을 구휼하고 부족한 것이 있느냐고 묻고 병에 걸린 자에게는 의약품을, 춥고 배고픈 자에게는 옷과 양식을 내어주면서도 관우의 관부의 재물과 보화는 봉쇄하고 손권이 올 때까지 사용하지 않는다.

그때 이제야 소식을 들은 관우는 돌아오는데 길에 확인차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 여몽에게 보내 서로 묻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여몽이 원하던 바. 여몽은 번번이 그 사자를 후하게 대우하고, 성안을 다니며 다른 장수와 병사들의 가족과 만나보게 하고 편지까지 받아가게 한다.

이 병사와 장수들의 가족들이야 말로 여몽이 미친듯이 잘 대해주던 그 사람들인지라 그런 그들의 말을 듣고 편지를 받은 관우의 사자가 돌아와 가족들이 병사에게 보낸 편지를 모두 보여주고 얼마나 잘 지내는지를 말로 설명해준다. 그리고 병사들은 모두 자기 집에 무탈하다는 것을 알고, 심지어 평소보다 더 잘 대우받는 것을 알게 되고 저절로 관우군대의 관리와 병사들은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편지를 받았더니… 힘이 빠진다…

한편 여몽이 이렇게 형주의 문제에 심혈을 기울일 동안 육손은 남은 유비의 잔당들을 처리한다. 219년 11월 유비의 의도태수 번우가 의도군을 버리고 달아나니 여러 성의 장리와 만이 군장들이 모두 항복했다. 육손이 금은동의 관인을 청하여 이제 막 귀부한 이들에게 임시로 내려주고 병사 3천 명을 장군 이이에게는 수군을, 사정에게는 보병을 이끌고 험요지를 끊게하고 촉장 첨안(詹晏)[62], 진봉을 공격하게 해 첨안을 격파하고 진봉을 사로잡는다.

또한 방릉태수 등보, 남향태수 곽목을 공격해 대파했다. 자귀의 대성[63]문포, 등개 등이 이병[64]수천 명을 규합해 서방(촉한)과 서로 연결했지만 육손이 다시 사정을 거느리고 문포, 등개를 치자 문포, 등개가 달아나 촉에서는 그들을 장수로 삼았다. 그 후 육손이 사람을 보내 이들을 유인하자 문포가 무리를 이끌고 돌아와서 항복하는데 이 앞뒤로 참획하고 초항하여 귀부시킨 자가 모두 수만 명을 헤아렸다. 장흠 또한 면수를 장악하며 관우가 수로를 통해 움직이는 것을 차단하며 손환은 관우의 병사 50명을 잡고 수많은 말과 병기들을 얻었다.

5.3.3. 관우, 최후를 맞다.[편집]

적을 몰아붙이던 상황에서 순식간에 근거지를 잃고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된 관우는 양양의 포위를 풀고 퇴각한다. 조인을 비롯한 위군은 그런 관우를 추격하려고 했지만 조엄이 '손권은 관우의 배후를 치려고 우리에게 순종하고 있지만 실상은 우리 군사력을 관찰하고 있으며 지금 관우를 추격하면 손권의 태도가 바뀔 가능성이 있다'며 추격을 반대하였고 조조 역시 관우를 장수들이 추격할까 걱정하여 추격하지 말라는 명을 내리자 추격을 포기하고 손권에게 관우의 처리를 떠맡긴다.

12월, 관우는 맥성에 들어가 응전을 벌였으나 전세는 기울고도 한참을 기울었다. 급기야 관우는 거짓항복까지 시도하면서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우번이 점친 점괘의 내용대로 반장마충에게 사로잡히는 신세가 된다.

관우와 그 아들 관평은 참살당했고 그 수급은 허도의 조조에게로 보내진다. 이때 손권은 촉에 있다가 유비에 의해 공안으로 쫓겨난 유장을 얻고 그를 익주목으로 삼아 자귀에 주둔하도록 했는데 얼마 안 되어 유장은 죽었다.

관우가 최후를 맞은 직후에도 형주 일부에서 저항은 계속되었다. 손권이 강릉에 도착하니 모두 다 항복하지만 반준만이 항복하지 않았는데 손권은 직접 반준을 찾아가 울면서 얼굴을 파묻고 일어나지 못하는 반준을 직접 달래 아군으로 만들고 그를 이용해 무릉의 만이들을 규합한 패잔군 번주가 일으킨 난을 진압하게 한다. 또 거짓 항복했던 습진이 이끄는 패잔병들이 난을 일으켰으나 역시 패하고 말았다. 요화 역시 포로로 잡혔으나 도주하여 동쪽으로 진군중인 유비군과 합류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릉대전에서도 살아남아 촉의 멸망까지 지켜본다. 한편 역시 촉으로 도주하는데 성공한 왕보는 유비의 이릉대전에 참가하나 실패하고 전사했다.[65]

하지만 손권이 강릉을 점령한 즈음에 대규모 역병이 발생한다. 이 때문에 손권은 애써 점령한 형주의 조세를 면제해주는 식으로 민심을 다독여야 했고 때마침 오나라 군부의 기둥이라 할만한 여몽과 장흠을 동시에 잃는 손실까지 겪는다.[66] 이런 질병과 더불어 중요한 상장들을 잃은데다가 이후 곧이어 이릉대전과 조비의 남정으로 인해 손오는 이 방면에서 더 이상의 확장을 이루진 못했다.[67]

5.4. 결과[편집]

관우는 죽었다. 촉은 형주를 잃었고 제갈량이 생각한 천하 삼분의 계획이 근본부터 흔들리고 말았다.

이후 조비가 한조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자 촉한을 건국해 제위에 오른 유비는 분노에 휩싸여 장장 8만 대군을 이끌고 오를 공격, 이릉대전이 발발해 처음에는 선전했으나 육손의 계략에 모조리 대파당하여 수많은 무장들이 죽어 촉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릉대전의 대패로 실의에 빠진 유비 자신도 곧 관우를 따라가고 말았다.

오는 장강의 수비라인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고 그토록 그리던 형주땅을 손에 넣었지만 후에 이릉대전의 발발과 뒤이은 조비의 총공격으로 국가의 존망을 걸고 싸워야 했다. 간신히 촉과 위를 격퇴했지만 양양은 끝내 점령못해 당초 계획한 형주 방어선 계획은 한쪽이 뚫린 채 미완성으로 남았고 오가 받은 상처는 매우 컸다. 더구나 수비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뒤로 제껴버린 그 서주를 얻기 위해 수없이 합비를 공격하는데 국력을 소모해야 했고 끝내 합비의 벽에 좌절을 해야 했다.

한중 공방전으로 큰 피해를 입은데다가 내부적으로 문제가 많아 흔들리던 위에게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형주-이릉대전으로 이어진 오와 촉의 싸움으로 두 나라는 국력을 많이 소모해 위를 무너뜨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비도 이릉대전이 끝난 뒤에야 뒤늦게 오를 공격하는 바람에 원정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 삼국구도를 고착시켜 버렸고 위 역시 이 구도에서 결정적인 이득을 얻진 못했다. 만약 조비가 유엽의 조언을 받아들여 이릉대전 도중에 촉과 함께 오를 쳤다면 오는 그대로 무너졌을 것이다.

형주를 잃고 유비가 죽고 인재들이 손실된 뒤 제갈량의 북벌은 처절하게 진행된다. 형주를 잃었기 때문에 익주에서 산을 타고 서량을 공격하는 한정적인 전술을 쓸 수 밖에 없었고 위는 단순화된 촉의 북벌루트를 방어할 수 있었다. 결국 제갈량은 234년 오장원에서 과로로 쓰러져 죽는다. 그 전까지 적벽대전, 입촉, 한중전 승리 등으로 '드디어 유비가 팔자를 펴는구나'라고 생각하고 보던 수많은 어린이들이 느닷없이 찾아오는 시리어스함에 몹시 당황스러워했다고 한다. 흔히들 관우가 죽을 때 삼국지를 처음 덮고, 유비가 죽을 때 삼국지를 두 번째 덮으며, 제갈량이 죽을 때 세 번째로 덮는다고 한다.[68] 장비가 죽을 때는 너무 황당해서 덮을 생각도 안 난다고. 형주 공방전 즈음으로 초반부터 고난을 함께 헤쳐나가던 유관장 삼형제가 다 죽어버리기 때문에 촉빠들의 눈물샘을 심히 자극한다.

근본적으로 제갈량이 융중대를 유비에게 처음 건의했을때는 유표의 형주를 온전히 승계해 형익을 아우르는 대전략이었다. 하지만 이후 조조의 진공 및 유종의 항복으로 인해 이 대전략은 중도에 수정되어야 했고 유비가 백성들을 거느리고 내려가느냐고 신속하게 남형주를 장악하지 못했기에 형주의 수복은 이전부터 형주를 노리던 손권과 같이 진행하는 수 밖에 없었다. 문제는 유비는 형남 4군과 남군까지의 점령을 동등한 동맹으로 보았고 형주에 있어서 자기 권리를 주장할만하다 여겼지만 손권은 유비를 한 수 아래로 보고 형주를 자신이 온전히 소유한 것이며 강릉에서 유비가 주유와 함께 공격한 공적은 온전히 손오의 공적이며 나머지 유비가 차지한 형남 4군 역시 자신의 영토로 여긴데서 문제가 발생했다.

여기에, 노숙이 지적한 바와 같이 유비가 이미 형주에서 인심을 얻었고 손권은 강릉을 얻었지만 아직 완전히 형주를 어우를 역량이 되지 못했기에 유비를 사실상 형주에서 조조의 탱커 역할을 하도록 강릉을 빌려주었다. 이후 손권은 대놓고 유비를 미혹시켜 포로로 삼으려 하거나 사실상 혼인동맹을 가장해 자신의 누이인 손부인에게 관리와 병사를 이끌고 유비가 주둔한 공안 옆에 성을 쌓고 유비를 핍박했고 종국에는 유비의 후계자인 유선을 납치하여는 시도까지 해 유비와의 동맹은 완전히 파탄났다. 한편 유비 역시 원래의 대전략을 위해 형주가 필요했으므로 해당목표가 달성될때까지 빌린 남군을 돌려줄 마음이 전혀 없었고 역시 자신의 대전략을 위해 손권이 익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이렇게 양측의 목표와 명분, 대전략이 충돌했기에 결국 익양대치로 일단락 했지만 전반적인 양측의 우호를 주장하던 노숙이 죽고 관우와 여몽이 서로 적대하고 반목하고 두 장수가 각자 추구했던 궁극적인 전략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으니 형주의 분란은 어느 한쪽에 유리하게 되지도 못하고 양측을 약화시킨 원인이 되고야 말았다.

5.4.1. 연의에서의 묘사[편집]

이 부분은 위의 두 개와는 달리 대부분의 전투 기록만은 일치하는 편이다.

다만 손권의 혼인 논의에서는 손권 자체를 쥐새끼라고 욕해 모종강
손권이 개라면 관우와 의형제를 맺은 유비는 손부인과 혼인을 했으니 호랑이 형과 개 누이가 혼인을 맺은 것이고, 호랑이 시동생에 개 형수가 있는 셈이다.
라며 관우를 깐다.

또 관우가 거짓항복을 시도한 기록이 연의에는 나와있지 않으며 이릉대전 때 죽는 왕보가 관우의 죽음을 알고 성벽 아래로 투신자살하며 이후 여몽이 이후에 피 토하고 죽는다던가 등의 관우 죽인 녀석들 복수를 소설로 대리만족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나관중본 삼국지연의에서는 아예 하늘로 올라간다. 도망치던 중 잡히기 직전에 하늘에서 "운장은 그만 싸우라"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관우와 관평은 싸움을 그만두고 하늘로 올라가 버린다(…). 즉 관우는 유비를 돕기위해 내려온 신이란 얘기. 얼떨결에 관평도 같이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흔히 알고 있는 관우가 잡혀죽는 내용은 모종강본으로 사서의 내용에 근접하게 묘사하였다.

6. 이에 대한 평들[편집]

6.1. 역사학자[편집]

팬덤사이에서는 최고의 장작인만큼 역사학자들의 썰도 이래저래 갈린다. 일단 진수의 경우엔 보통 억울하게 죽었을 경우 애석하다는 말을 자주 하는 편인데(대표적인 예가 군주에게 밉보여서 죽은 문관들) 관우의 경우는 관장마황조전 평에서 오히려 패망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또 여몽에 대한 평도 여몽전에서 그저 그의 전술을 높게 평가한 것이 전부였다. 또한 오나라 위소가 작사한 관배덕關背德 통형주通荊州 오나라의 생각을 알 수 있는데 당연히 관우가 먼저 잘못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홍무제도 이때의 일을 말하며 걍 관우가 멍청해서 당했을 뿐이라며 디스.

후출사표에서는 제갈량이 오나라가 먼저 맹약을 어겼다고 하고 있으나 위작논란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출사표 문서 참고.

호삼성은 육손이 여몽에게 관우를 공격하자고 제의한 것을 가지고
영웅들이 보는 것이 대략 같으니 여몽이 그 뜻이 깊다는 것을 안 이유다.
라며 여몽과 육손을 영웅으로 보고 관우를 공격하자고 한 뜻이 서로 같다고 평가하였다.

이 사건에 대해 오나라에 부정적인 평을 내린 다른 역사학자들의 얘기도 들어보자, 우선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평을 보면
만일 손권의 형인 손책이었다면 오히려 이 기회를 타고 중원에 진출하여 위의 세력을 뒤흔드는 결전을 시도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손권은 바로 형이 관찰한 대로 창업주가 아니라 수성의 인물이었다.

그는 형주의 거의 전역을 장악하여 양자강 중.하류를 영토로 하였기 때문에 안정성은 높아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방정권이 퇴보정책을 취하면 그 다음에는 멸망이 기다릴 뿐이다.

삼국지집해에도 촉서에는 내용이 실려있으나 관우가 저럴 줄 몰랐냐? 다른 애들은 관우 잡으려고 여러명 동원했구만 왜 관우 혼자 싸우게했냐?[69] 촉에서 대비가 소홀한게 아니라면 진수가 자세히 몰랐던거 아니냐? 같은 내용이 대부분. 단, 익양대치에 대해서는 통감집람을 언급하며 유비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왕무횡, 이안계의 경우는 영웅은 모두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며 칭찬한 호삼성과는 반대로 조조가 바로 공격했다면 강동이 무너졌을 것이라며 여몽의 계책을 비판했다. 이안계는 노숙이 유비에게 땅을 빌려주라고 한건 단점이 아니며 만약 두 영웅이 서로 다투었다면 조조만 이로웠을 것이다라고 했다. 왕무횡은 애시당초 남군을 유비에게 빌려줬으니, 정보는 남군을 지킬 수 없다고 근심했고 조조가 오직 유비만을 꺼리는 것은 천하가 모두 아는 바였기에 그의 힘을 빌려 조조를 막고자 한 것이라며 여몽의 형주공격은 공이 아니고, 강동의 패업을 무너지게 할 뻔한 짓이라고 까지 평가했다. 또 조조와 맞서려한 주유와 노숙을 이후를 생각하지 않은 여몽에 견줄 바는 아니다라고 했고 형주를 얻은 이후 오가 계속 위에 굴복했는데 촉과 계속 동맹했다면 이랬겠느냐 비판했다. 한모려는 여몽이 먼저 손유 동맹을 깼다고 보고 먼 근심을 걱정하지 않고 가까운 이익을 달게 여겨 공을 탐내다 어둠을 불러들여, 나라를 그르치게 함이 적지 않다고 했다.

하작의 경우에는 노숙이 있을 때는 조조가 정정했기에 같이 조조를 방비해야했으나 나중에는 조조가 늙어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상류를 취했어야했다고 말하고 있다. 또 노숙이 10여년만 더 살아 있었더라도 촉오 동맹은 굳건했을 것이고 한실은 충분히 흥할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6.2. 누가 어디서 어떻게 잘못했나?[편집]

역시나 조익의 의견에 따라 이 부분에 있어서 오서는 조작됐고 후의 기록들은 그 조작된 기록을 보고 쓴 잘못된 내용이라 여겨 무시하면 걍 오나라의 잘못으로 끝나는 문제이니 따로 기술하지 않습니다. 시간대 별로는 이미 위에서 설명했으니 그것을 이제는 세력별로 나눠서 기술합니다.

형주 문제에 있어서는 기본적으로 유비와 손권의 목표 의식과 세력 운영의 경향성의 차이에서 오는 '동상이몽'이 갈등의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6.2.1. 유비[편집]

1. 유비가 관우에게 형주를 전적으로 일임하고 오나라와 분쟁을 해도 내버려둔 것.[70]
2. 관우가 손권의 결혼 요구에 사자를 모욕하며 결혼을 거부한 것. 개인간이라도 결례인 판에 세력간의 외교에서 이런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71]
3. 관우가 손권을 오소리 새끼라며 모욕하고서는 다음은 너네를 정복하겠다며 엄포를 놓아 안 그래도 부족한 전력을 가진 상태에서 전선을 이중으로 만든 것. 단, 이것은 전략의 기록으로 아래에서도 나오지만 배송지는 이 기록을 믿기 힘들다고 한다.[72]
4. 관우가 군량이 부족하다며 상수 경계 상관에서 식량을 마음대로 가져 간것.[73]

6.2.2. 손권[편집]

1. 적벽에서 분명 동등한 동맹군의 입장으로 싸웠음에도 유비를 자신의 장기말 및 방패막이로 이용하려 한 것. 주유는 미수에 그쳤지만 여기에 더해 유비를 타락시키고 유비세력을 흡수하려 했다.[74]
2. 손부인에게 관리와 병사를 주어 시비를 가장한 무장병사를 손부인이 가지고 다녀 유비가 두려워하고 주둔지 옆에 오나라 관리와 병사가 주둔하며 감시하는 상황을 만들고, 결정적으로 그녀를 시켜 유비가 없을 때 유선을 납치하게 한 것.
3. 겉으로는 서로 화친하자는 제스처(여몽의 친선책, 육손의 편지)를 취해놓고 실제로는 언제든지 관우를 공격할 마음을 가진 것. 그럼에도 관우가 경계심을 가지고 봉화대를 만들정도면 대놓고 속이 뻔하게 보이는 의도였다고 할 수 있다.
4. 형주의 일부를 빌려줘놓고는 형주 전체를 빌려준 거마냥 행동하면서 서천을 정복한 유비가 형주를 안 돌려준다고 유비가 자력으로 점령했던 지역을 힘으로 뺏은 것. 익양대치 발발. 관우 말 따라 유비군도 형주에서 열심히 싸웠고 형남 4군도 자력탈취며 서로 상부상조한 관계인데도 노숙은 무슨 불쌍한 유비를 손권이 가엽게 여겨서 도와준 것처럼 굴었다. 실제로는 유비 아니면 조조를 막을수 없다고 판단해서 동맹맺은거고 남군 빌려준건 지들이 형주에서 인심을 얻지 못해 유비를 방패막이로 세워준것이며 적벽과 형남 정벌 당시 유비한테 병력과 물자 보태준건 유기지 손권이 아니었음.
5. 익양대치 때 손권의 주장인 형주 3군의 반환과 상수경계선 확정으로 결론이 매듭지어져 더 이상 형주의 소유권을 주장할 명분이 없었음에도 손권이 형주에 욕심을 내어 동맹을 파기하고 공적인 잘못을 저지른 미방을 배신자로서 포섭하는 등 계획적인 뒷통수로 침공을 감행하여 형주를 통채로 점령한 것.
6. 관우를 도와주기로 하고 안 도와준 것. 단, 이것은 전략의 기록으로 배송지는 여몽이 형주로 들어갈 때 몰래 들어갔는데 구원 요청을 받았다면 몰래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며 전략의 기록에 의문을 표한다.
7. 자군측에 명령하여 관우를 생포했어야 하나 죽게했다. 단 배송지는 손권이 멀리 있었으므로 손권이 그랬을리 없다고 하는데 이러면 현장지휘관인 여몽의 오판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
8. 관우를 죽여 어그로를 끈것도 모자라서[75] 형주를 차지한 이후, 형주와 함께 그대로 손권으로 넘어가게 된 유장과 아들 유천을 바지사장 익주자사로 임명하고, 사섭을 통해 남중의 호족 옹개를 포섭하려고 하는 시도 등 촉을 뒤흔드려는 시도와 도발행위가 끊이질 않았다.

6.3. 그외 논란 거리[편집]

6.3.1. 국경선 연장으로 인한 방비 문제[편집]

많은 사람들이 이것으로 오나라가 한 일이 바보짓이라고 욕하나 이것만은 어느정도 사실이 아닌 것이다. 여몽이 한 말에서 볼 수 있듯 아예 형주를 점령하면 수비선이 오히려 더 탄탄해짐을 말하고 있다.

육항 또한 손호에게 이릉[76]을 잃으면 오나라 전체가 위험해진다고 하고 진수 또한 과연 육항이 걱정한 것처럼 되었다며 이 말이 맞음을 인정한다. 실제로 양호가 세운 오나라 정복 계획에서도 형주를 점령한 다음에 거기서부터 배를 타고 내려가서 정복하자고 말하는데 양호가 죽은 후에 두예왕준이 방법을 사용하자 오나라는 힘도 못 쓰고 녹아버린다.

일본의 미야자키도 아예 장강 수비라인은 구축할 수 있었고, 그것이 유일한 획득(성과)이라고 했을 정도로 장강의 중류를 오나라가 차지하면 방어선이 탄탄해지는 것은 분명하다. 여몽의 구상은 실제로 동진의 서부군 방어선과 남송몽골(원나라)을 방어할 때 비슷하게 사용되었다. 이는 장강 자체를 방어선으로 삼는다기보다는, 양양을 방어의 중심으로 삼고 장강은 보급로로 삼아서 기동방어를 한다는 상당히 원대한 구상이다. 여몽의 계획이 흔히 생각하듯이 '동맹국 뒷통수 쳐서 영토 좀 따먹는' 근시안적인 수준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관우가 양양을 점령하는데 성공해서 촉한이 백제성-남군-양양을 확보하는데 성공한다면 오나라의 중심지 건업은 완전히 장강 수로에 노출되어 촉한이 마음만 먹으면 공세를 퍼부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되는 오나라는 촉한에게 저항하는 것도 불가능해서 촉한에 뒷덜미를 잡힌 상태가 돼버린다. 촉한까지 견제한다는 입장에서 보자면 반은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여몽의 방어선 구상은 미완성으로 끝났는데, 오나라는 진소가 양양(襄陽)을 정복 후 뺏긴 이후로 조위(曹魏)로부터 다시는 빼았지 못해서 장강의 수로를 완전히 확보하지 못했으며 장강삼협의 입구인 백제성(白帝城)도 촉(蜀)이 점유한 상태로 남았기 때문이다. 결국 오나라의 수비 체계는 장강을 기동로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장강의 지형에 기대서 방어하는 형태에 그쳤다. 그리고 애당초 관우가 원정을 떠난 형주도 정면으로 뚫지 못했는데 여몽의 계획대로 그 이상을 바라 볼 수 있었는지는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후세 사가들 가운데는 여몽의 계획이 허황되다며 잘못된 기록이 아닌가 의심하는 학자도 있었을 정도다. 이 때문에 차라리 관우를 제어할만한 유일한 사람인 노숙이 더 살아서 명분과 실리로서 계속 관우를 제어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의견도 있다.

6.3.2. 손권의 선택은 과연 최선이었나?[편집]

사실 조위 vs 손오 대립구도에서 형주가 메인 격전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합비는 말할 것도 없고, 유수구 전투석정 전투 등 조위와 손오 사이에서 발발한 주요 전투는 대개 회남-양주(楊州) 방면에 집중됐다. 오히려 형주-양주 방면에서 발발했던 적벽 대전 같은 경우가 이례적인 케이스에 가까운데 이조차도 형주 세력의 잔당 유기-유비가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대립상은 후에 벌어질 북조 vs 남조의 대립구도에서도 시대를 달리해 반복되었다. 전진동진을 치기 위해 벌인 비수대전 역시 회수방면에서 벌어졌으며[77], 수나라진나라(陳)를 멸망 시킬 때도 장강을 바로 건너 건강(건업)을 기습하는 루트를 활용했다. 비록 악비한세충의 활약으로 구사일생하긴 했으나, 남송 초기 남송이 금에게 속절없이 밀릴때도 회수방면에서 금나라군이 남송의 수도인 임안으로 쳐들어와 송고종이 임안을 버리고 바다로 도주한 사례도 있다. 즉 형주가 강동의 방어에 도움이 된 건 사실이지만 이른바 "목줄", 즉 주된 방어거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렇게 보면 조위와 손오의 대립구도는 북조와 남조의 대립구도의 프로토 타입인 셈.

실제로 손권 본인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관우를 죽이고 이릉대전에서 대승을 거둬 남형주를 다 점유하고도 손오는 양양-번성 라인으로 북진하는데 소극적이었다. 양번 라인을 돌파하는 건 관우를 통해 검증된 북벌루트였는데도 불구하고 손오는 이 루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대신 거듭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포기를 모르고 손권 본인이 계속 친정하여 합비에 꼴아박은 걸 보면 손권의 주된 관심사는 서주도 형주도 아닌 과거 원술의 근거지였던 합비-회남 방면으로 여겨진다. 이 지점을 뚫고 중원에 진출하는 것 혹은 최소 화이허강(회수)-회남 방면을 차지해서 동오의 중심지인 건업을 위시한 양쯔강 삼각주를 방어할 완충지대를 확보하고자 하는 게 손권의 플랜의 핵심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육조왕조들과 후일의 남송을 비롯해서 회수인근-회남을 차지하지 못한 강남의 남조왕조는 손오가 유일하다.[78]

일반적으로 형주는 손권의 부친 손견의 한이 서린 땅이고 또 실제로 동맹을 배신하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남형주를 병합한 탓에 손권이 형주에 무지 집착했다는 인식이 강하다. 그러나 조비 즉위 초기의 불안정한 정국을 틈타 불시기습과 조비의 판단착오가 겹쳐 일시적이나마 여몽의 플랜인 번성-양양 라인을 확보해 놓고도 결국엔 유지가 어려워 버리는 걸[79][80] 보면, 영안-양번-이릉/강릉이 연결되는 양쯔강 중류 삼각 방어거점을 완성하고 싶어했던 여몽 혹은 익주-형주-양주를 모두 아우르는, 어찌 보면 후일 형성된 남북조시대의 남북 구도의 프로토 타입에 가까운 천하이분지계를 주창한 주유라면 모를까 형주가 손권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81]

오히려 형주는 촉한 입장에서 절실히 아쉬운 지역이었다. 왜냐하면 익주와 형주를 확보하고 양방향에서 북진해 천하통일을 이루자는 게 융중의 대계였기 때문에 촉한 입장에서 형주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한 축이었기 때문이다. 후에 제갈량이나 강유의 북벌이 나름의 치밀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누가 봐도 눈에 들어오는 뻔한 공격루트로 갈 수밖에 없기에 몇번의 강펀치를 날려 조위의 군세에 상당한 타격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번번이 대군을 등에 업은 조위의 우주방어에 길이 막혀 일정한 영토를 점유하는 측면에 있어서는 성과를 내지 못한 걸 보면 흔히 유비의 대삽질로 여겨지는 이릉대전 같은 경우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선택이었던 셈. 결과가 안 좋아서 그렇지 특히 강유 같은 경우는 왕경과의 조수 전투를 통해 수만명을 전사시킴으로써 적장 등애로부터까지 "옹주가 전체가 함락 직전에 몰렸으니 후퇴해서 다시 싸우자"라는 평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한뼘의 옹양주 땅도 얻지 못했으니 강유와 촉한 입장에선 아쉬울 노릇일듯. 만약에 조위의 전선이 적절히 분산돼 옹양주로 군세가 집중되는 일이 없었다면 옹주 방위군을 궤멸시키고도 옹주 땅을 점유하지 못한 아이러니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목표가 천하통일인지 할거인지 분명하지 않는 손권 같은 경우는 형주는 본인의 마스터플랜 바깥의 영역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보면 형남 점령의 궁극적 목적도 이릉-강릉 라인의 양쯔강 중류 수로를 확보함으로써 본인의 근거지인 양쯔강 삼각주의 방어를 공고히 하려는 다소 소극적인 수준의 문제의식의 발로에 가깝다. 그러나 모처럼 기회가 열려 있을 때 강대국 조위의 회남을 점령하는 게 손오의 미래를 위해 더 나은 선택일지 아니면 자기들이 익양대치를 통해 전성기 형주의 1/3 이하로 세력을 깎아버린 동맹 촉한의 형남을 점령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일지는 누가 봐도 명약관화이고그나마도 형남조차 뒷공작과 뒷치기로 간신히 획득했지만 이는 실제로 후일 손권과 제갈각 등이 다시 재정비가 끝난 합비, 합비신성에 연거푸 꼴아박음으로써 온몸(...)으로 입증했다.

물론 동오 같은 경우는 사천에서 진격해 형주를 점령하고 양쯔강 중류를 장악해 그 물길을 타고 내려간 서진의 공격에 멸망한 케이스지만, 상술했듯, 후에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전투 양상을 보면 형남과 회남 가운데 어느 지역이 더 강동 방어의 핵심인지는 누가 봐도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북조가 남조를 공격하는 주된 루트를 살펴보면 양쯔강 중하류에서 수로를 타고 내려가는 패턴보다 강북에서 곧바로 화이허강-양쯔강을 건너 다이렉트로 강남에 진격하고자 하는 패턴이 더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즉 양쯔강 삼각주 방어에 있어서 형남 양쯔강 중류 확보보다 화이허강과 양쯔강 사이에 가로놓인의 회남이라는 완충지대를 확보하는 게 더 중요하고 또 그렇게 하는 게 더 유리하다는 얘기다. 그도 그럴 것이 대군을 이끌고 바다처럼 장대한 양쯔강 하류를 도하하는 건 만만한 시도가 아니긴 하지만 일단 그 고비를 넘어서기만 하면 곧바로 강남의 중심지가 펼쳐지기에 공격하는 강북 정권의 입장에서는 이 회남-양쯔강 하류를 건너는 최단거리 공격루트가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건 당연지사다.[82]

즉 촉한의 중심지인 사천평야 방어에 있어서 한중분지 일대의 확보가 필수적이듯 동오의 중심지 양쯔강 삼각주의 방어에 있어서 회남 일대의 확보가 필수적이라는 얘기다. 손권도 역시 이걸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거듭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본인 주도하에 회남 병합을 이루고 싶어서 그토록 합비에 꼴아박은 것이다. 만약 손권 주도로 회남을 장악한다면 손오 본거지인 강동의 방어력도 강화되고 손오 종특의 모래알 조직력 위에 세워진 황권도 제고되기에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셈이다.

그렇다면 번성 공방전 시점을 기준으로 보면 손권의 선택은 근시안과 조급함의 소산이라는 평을 피할 수 없다. 이 시점에서 굳이 형남을 빨리 병합하려고 성급한 액션을 때릴 이유가 없었다. 물론 이전 합비 공방전 때 장료에게 당한 게 많기에 그 후유증으로 당장은 회남으로 북진할 의욕이 안생겼을 수는 있다. 그러나 천적 장료는 양번 전선에 투입될 예정이었으니, 그렇다면 일단은 장료의 부재로 공백지나 다름없던 합비-회남 방면을 기습해 확보[83]해 놓고, 나중에 조위와 촉한의 필연적인 대립구도가 더 극단화되어 관중이나 사예에 양 세력의 힘이 집중되는 때를 노려 형남을 점령하는 선택지도 얼마든지 고려할 수 있었다.[84] 아니면 후일 제갈량이나 제갈각의 북벌처럼 촉한-동오 동시 북벌 노선을 선택해도 딱히 무리는 없다.

흔히 손오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거로 조위처럼 한실을 대체하겠다고 하든지 아니면 촉한처럼 한실을 부흥, 계승하겠다고 하든지[85] 하는 세력의 독자적인 존재의의를 뒷받침할 확고한 명분과 이념의 부재를 든다. 그러나 이를 역으로 생각해 보면 조위 혹은 촉한이 굳이 손오와 극한대립을 벌여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얘기도 된다. 즉 조위와 촉한은 400년 한실이라는 기준점을 두고 정반대의 정치적 스탠스를 취하고 있기에 필연적으로 극한대립을 피할 수 없는 상호 대척관계지만, 손오는 내세우는 뚜렷한 이데올로기가 없기에[86] 양립불가의 적에 맞서 싸우기 위한 동반자로서 타협과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즉 흔히 단점으로 지적되는 손오의 무이념 노선은 리더가 운용의 묘를 잘 살리기에 따라선 손오가 조위와 촉한 모두에게 소위 캐스팅보드의 역할로 다가가 실리를 챙길 수 있는 실용주의 노선으로 면모를 일신할 장점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물론 삼국시대 전체라는 큰틀을 놓고 볼 때 손오가 이런 중간적 입지를 그럭저럭 잘 살린 건 맞는 데 번성 공방전이라는 중요 분기점에선 보여준 모습은 성급한 선택이었다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이 시점에서 손권이 대국적인 흐름을 잘 살피고 이러한 절묘한 포지션을 좀더 균형감각 있게 잘 살려 실리를 챙겼다면 삼국지의 결과는 우리가 아는 그것과 완전히 달랐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219년과 220년 한중 공방전~번성 공방전 시점에, 즉 조위와 촉한의 대립구도가 심화되는 시점에 손오는 꽃놀이 패를 쥐고 있었다. 유비가 한중왕 즉위를 선언한 이상 위왕 조조와 한중왕 유비의 재격돌은 필연적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조조는 이미 당시 나이가 60대 중후반으로 당대의 평균적인 수명을 고려해 봤을 때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었고, 실제 역사상으로도 219년을 넘기자마자 죽어버렸다. 거기에 위나라 내부에선 여러 문제가 터져나오는 상황이라 분명 전성기 때 보단 약해져 있었고 조조 사후 혼란을 생각하면 이런 상황에서 그냥 조조가 지명해서 세자가 된 조비의 위왕 계승 이후 상황도 불안정해지기 충분했다. 상승세의 촉한이 치고 나올 경우 힘들게 싸울 수밖에 없을 터였다. 촉한 역시 당장은 한중왕 선언 이후 기세를 타고 조위를 몰아붙일 수 있지만 유비 역시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였고 유비의 후계자인 유선은 당시 10대 초중반으로 어렸다.

반면 손권은 당시 30대 후반의 한창 때 나이였고 심심하면 술판을 열어 말술을 들이붓고 사냥판을 벌여 달려드는 맹수를 튕겨내는(...) 등 왕성한 건강과 정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여몽이야 자신의 병이 중병인 걸 알았기에 자기가 죽기 전에 조위-촉한 전쟁의 전초 단계인 관우의 북진을 틈타 한시라도 빨리 형남을 정벌하고 싶어 조바심을 낼 수밖에 없었겠지만 손권의 입장에서 따지고 보면 사실 그렇게까지 서두를 일은 아니었다.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이 많았고, 무엇보다 형남은 회남을 얻어 강동을 방어한다는 손권의 최우선 플랜에서 벗어난 지역이기에, 그 사이 위에서 가정한 여러가지 시나리오를 충분히 숙고하고 주판알을 굴릴 여지가 많았다.

문제는 이 극한대립이 본격적으로 점화되기 직전에 성급하게 액션을 때려 조위에 고개를 숙이고 동맹을 배신해 관우를 죽이고 형남을 병합하는 바람에 상승세의 촉한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버려, 조위와 촉한 사이에서 막 끓어오르던 첨예한 대립구도를 불식시키고 말았다. 덕분에 조비는 조먼닭 조조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으로 찬탈의 길을 걸을 수 있었고 동맹이었던 촉한에게는 감정적인 어그로는 다 끌어놓아 종국에는 이릉대전이 발발, 촉한과 동오는 양패구상의 형태로 퇴락해 버려 삼국시대는 1강2약의 구도로 고착화됐다. 결국엔 다시 촉한과 동맹을 맺고 조위와 대립각을 세우지만 손권이 진정 얻고 싶었던 회남의 방어력은 다시금 공고화돼, 손오는 회남에 아무리 전력을 퍼부어도 그 이상을 나가지 못하는 예전 상태로 회귀하고 말았다. 이런 측면에서 동오의 대국적인 전략이 미진했거나 손권의 선택이 지나치게 조급했던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6.3.3. 서주 논란[편집]

여몽에 부정적인 평가로는 손권이 차라리 방어병력이 없는 서주를 먹으면 된다는 말이 있다. 사실 오나라 내부에서 서주로 진출하는 계획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일단 손책이 한 차례 서주를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손권 역시 서주목을 칭하였다. 이러한 계획이 아예 없었다면 반대로 여몽이 반박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몽은 서주로 진출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다. 여몽은 서주를 공격하면 취할 수 있으나 기병이 잘 다니는 곳이라 7~8만으로도 못 막는다고 확정해 버린다. (강릉을 먹으면 장강 앞에 강릉이라는 보호막이 하나 더 생기고, 형주 남부까지 있으니 협공이 가능하다.) 결론은 약한 육군으로 건업 방어를 유지, 강화하고 무모한 침략을 통한 역관광을 피하기 위해서 오의 영토확장은 고작 강릉 방면 밖에는 없었다는 것.

여몽의 발언은 '현재로서는 서주를 먹을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후한서 군국지에서 제왕세기의 인용에 따르면 244년 위나라가 파악한 오나라의 병호는 13만 2천, 진양추에 기록된 오나라 멸망시의 병호가 23만이었다. 이 당시 오나라의 총동원 병력은 10만 내외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7~8만이면 동원 가능한 병력의 거의 대부분이다. 즉, 촉에서의 공격은 아예 없다고 가정하고 전 병력을 서주로 돌린 다음에도 유수오에서 매번 조조와 싸워야 했던 여몽은 이를 지킬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원래 지방세력의 집합체 성격이 강한 동오정권의 성격까지 고려해보면 서주를 공격해서 유지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한 것은 현실적인 판단이다. 다만, 형주공격이 가져올 여파에 대한 고민이 과연 있었는지는 의문스러운 점으로 확실히 형주를 손에 넣어 장강방어선을 확립한다는 것은 동오의 안정에 중요한 일이었지만 문제는 당시 세력구도는 위라는 절대강자에게 촉과 오가 뒤로는 어떤 관계였든 서로 힘을 합쳐서 견제를 하는 관계였고 그렇게 해도 총전력으로서는 촉과 오가 밀렸다. 아무리 관우 쪽에서 먼저 여러가지 구실을 제공했고, 막타를 가한 것도 관우가 위나라 번성 포위망을 푼 다음이라지만, 결국 서주 공격을 통한 협력을 안 하고 강릉을 점령한 것은 여몽이었다. 이로써 위나라는 위풍의 난과 각지의 반란 관우의 공격 등으로 천도 논란까지 나오던 곤란한 상황을 넘길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촉과 오를 바꿔 이릉대전에서 나타난다는 것이 아이러니할 나름.

여몽이 일단 형주를 손에 넣고 나면 다시 필요성에 의해 촉과 관계 정상화를 꾀해서 오나라 우위의 삼국정립의 구도를 유지해갈수 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전임자인 주유가 촉과 이런저런 마찰을 겪으면서도 중원 정벌의 대계를 그리며 관계를 유지했고, 노숙 역시 촉과 익양대치를 빼고는 대체로 화평을 유지하며 공명의 천하삼분지계와 비슷한 전망을 가지기도 했던 것을 비교해본다면, 여몽의 전략적인 식견은 다분히 세력유지를 우선시하는 지방세력의 시각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87] 명장이기는 했지만 그 시각은 천하보다는 위에서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평가처럼 지방세력의 세력온존을 중시하는 목적을 우선시한 것이다. 전임자가 너무 먼치킨들.

6.3.4. 명분[편집]

유비는 유기의 보호자라는 명분이 있었지만 손권은 옛날옛적에 아버지 손견이 장사태수로 있었다는 것을 빼면 그런 거 없다. 애시당초 손견은 군벌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조정의 명을 받고 장사태수로 임명[88]된 거라서 장사의 소유권을 주장할수도 없다. 물론 유표 또한 조정의 명으로 형주자사로 부임한 것이기는 하나, 손견은 형주의 수 많은 군현 중 하나인 장사군의 태수에 불과했고, 유표는 형주 전체를 관할하는 형주자사였다는 점에서 유비와 손권의 입장은 현격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그냥 땅 먹고 싶어서 전쟁 건 거라고 봐야 한다. 그나마 옛날 아버지가 태수로 있던 장사땅은 익양대치 이후 손권이 탈취했다. 아버지 손견의 죽음과 관계있는 땅이라고? 원술 명령으로 형주 침공하다가 죽은 것이다.

6.3.5. 조조의 형주만이 상업이 발달했고 풍요로운 것이다?[편집]

출처 표기바람.

상용-양양 사이에 상업이 발달했고 조조가 가지고 있는 형북만이 손권과 유비가 가지고 있는 형주보다 풍요로웠다는 의견이 있는데 도저히 출처를 찾을 수 없다. 그나마 찾아낸 것은 주연전 주석의 조중 땅이 풍요롭다는 것인데 이것 역시 상업의 발달과는 무관하다.

더욱이 풍요롭기 그지 없다는 양양과 번성을 조비손권이 무섭다며 불태워서 완충지로 삼아 버린다 이때도 사마의는 "양양은 수륙의 요충이며 적을 막는 요해"라고 표현을 하지만 양양이 풍요롭다던가 상업이 발전했다던가 등의 말은 하지 않는다. 손권이 진소를 보내 점령하자 다시 조인을 시켜 재점령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풍요로운 땅을 불태워서 버릴 수 있을까? 문빙이 점령하고 있던 강하는 치소의 위치도 추정하는 정보가 거의 없는 곳.

만약 남양 땅의 풍요로움을 말하자는 거였다면 장수가 조조에게 항복한 이후로 쭉 조위의 땅이었으니 거론할 가치가 없다.

또 형주의 인구가 줄어든 것은 주유와 조인이 전쟁하면서 쑥을 재배하고 유비가 열심히 키워놓으려고 했으나 다시 손권이 망쳤기에 그랬다는 말이 있으나 기록 역시 출처 표시가 필요하다.

그나마 확인 가능한 것이 인구가 줄어들었다는 부분인데 이건 비단 오나 형주에 국한된 내용이 아니다.

장수에게 식읍을 내릴 때도 아직 1천호를 채우는 사람이 없는데 장소가 처음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말이 있으며 장제는 상소를 올려 현재 백성들의 수는 한나라 시대의 커다란 한 군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거기다가 진군이 올린 내용 중 일부를 봐도 인구가 예전의 한군과 같다고 하고 있다. 이걸로도 부족하다고? 두서의 상소를 봐도 열개주가 한개주에 불과하다고 하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 형주의 인구가 영제 때 보다 줄어든 것은 당연하다.[89]

6.3.6. 유비가 형주 관리를 더 잘했을 것이다?[편집]

이 설의 대표적인 것은 바로 무릉만이 문제인데 주요 근거가 촉한세력은 이민족들과 매우 친했다는 것과 그들을 자신들의 세력으로끌어들였다는 것과 이릉대전마량이 비단을 바리바리 싸들고 가서 사마가를 비롯한 자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인 것이.[90] 이에 대해서 누가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만 마량 가장 가까운 군대가 익양에서 유비의 지원군을 막고 있던 보즐.

또한 무릉의 종사였던 번주가 무릉의 이민족과 영합해서 반란을 일으킨 상황에서 습진도 유비의 이릉전투에 호응해 관우의 원수를 갚겠다면서 스스로 소릉태수를 칭했으나 보즐과 이전에 관우 수하에 있던 부하 중 반준이 당시 이들을 토벌했고 이로 인해 영릉과 계양의 군대는 유비에게 호응하지 못하고 있다가 유비 퇴각 후 진압되었다고 한다. 즉 유비가 자력으로 차지했던 형남 4군 중에서 3군이 유비가 진격하자 호응하려고 했다는 의미고 이 지역의 상당수의 무릉만이들이 여기에 호응했다는 정황이 들어난다. 이렇듯 보즐과 반준이 형남일대에서 대대적인 친촉반오 세력봉기에 맞서 군사 활동을 한 정황이 있는데 상황인데 마량이 후퇴 중 혼란에 죽었다는 것은 맞겠지만 꼭 무릉만에 죽었다는 근거는 부족하다. 그리고 적어도 이런 상황을 보면 유비가 적벽부터 형주공방전, 이릉대전까지 형주 인심을 오나라보다 더 잘 잡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유비 10만 형주 민간인 남하사건을 굳이 대지않더라도 당장 노숙부터가 유비에게 땅을 빌려줘야 한다는 명목 중 하나가 이 지역에서 오나라가 민심을 못잡았다고 대놓고 실토하는 마당인데 더 설명이 필요한지? 물론 관우 공격 이후 여몽이 남군에서 군율에 엄정하고 관용을 베푸는 통치로 인심을 안정시켰다지만 그 순간에도 육손은 촉 휘하 형주 각지의 저항진압 및 항복작업, 호족들이 이끄는 이민족 토벌을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또 유비 통치시기에 유비가 직접 무릉에 주둔했고 이 시기 무릉만이 촉 상대로 변란을 일으켰다거나 하는 기록은 없으며 어쨌거나 이릉대전 당시 무릉만이가 촉한 쪽에 호응한것은 사실이다. 무릉만에 한정하지 않고 이민족들로 범위를 넓히면 남군공방전 때 관우가 패한 다음에 남군(南郡) 일대 산과 계곡에서 거주하던 만이(蠻夷)들이[91] 악진에게로 와서 투항하는 등 결코 관우도 이민족 통치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애시당초 남군 위에 있던 고을과 부락이 위나라에 항복하는데 이 근처에 사는 만이들이 위나라에 항복하는건 전쟁중인데 관우의 통치와는 상관없이 충분히 있을만한 일이다.[92]

관우의 정치에 대해 좋은 말을 찾는다고 하면, 여몽이 육손에게 형주를 치기 위한 의도를 설명하면서 했던 짐짓 했던 말인[93] '그는 벌써 형주를 점거하고 은혜와 신의를 대대적으로 시행하고 있으며, 아울러 원래 공로가 있으며 담력과 기세가 성대하여 도모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가 있지만 이 말 하나로 관우의 통치를 세세히 살핀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94] 사대부나 일반 병졸 쪽으로 나가면 장비전에는 관우가 사대부에게는 교만하지만 병졸들에겐 잘해주었다라 되어 있다. 다만 이후 남군성 사람이 처음엔 여몽의 진입에 반발하여 계략을 짜다가 진압당한 장면을 보면 관우의 통치가 민심을 처음부터 이반시킬 정도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 관우가 통치하던 백성들이 여몽이 남군을 점령하고 평소보다 은혜를 후하게 베푸는 정치를 펴 다스리자 병사들에게 이를 말하기까지 한 부분은 그만큼 여몽의 군정이 탁월한 면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익양대치 때는 장사, 계양의 두 군이 여몽의 편지 한 장에 항복한 것을 관우의 통치 문제로 보기도 하나 애시당초 이 두 군이 항복한 것은 편지 한장에 그냥 넘어간게 아니라 손권이 여몽을 파견해 선우단, 서충, 손규 등의 병사 2만 명을 지휘하여 장사, 영릉, 계양 세 군을 취하도록 하고, 노숙으로 하여금 1만 명을 인솔하여 파구에서 주둔하며 관우를 방어하도록 한 상태에서 군을 동원해 편지로 항복시킨것이므로 통치문제로 보긴 어렵다. 학보가 여몽의 공갈에 속아 항복했으며 관우가 죽을 때는 사인이 우번의 내응이 있다는 말에 항복하고[95] 미방은 아예 내통하여 형주의 수비가 쉽게 뚫리도록 도움을 주어 이게 형주가 바로 항복하는 원인을 제공했으므로, 부하들의 행보를 보면 인선쪽에서 부족했다는 말이 나오기도 하나 형주 탈취 당시 저항하거나 촉으로 도주하거나 협조를 거부한 관우의 관리들도 있었고 몇몇 관리는 관우가 죽은 다음에도 저항했으므로 꼭 그렇다고만 볼 순 없다. 그리고 공신 반열에 들고 유비의 인척이었던 미방의 내통을 과연 누가 예상하겠느냐는 반론도 나올수 있다.

거기에 이것에 대해 애초에 이러한 책략은 공격 시작하고 부랴부랴 준비해서는 신속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익양대치나 관우공격 때의 신속한 점령은 손권이 미리 형주 일대에 광범위한 정보 공작을 펼쳐서 만일의 상황에 대비 해두었던 성과를 얻은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미방의 내통이 형주 탈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만 봐도 그러하다.

6.3.7. 관우를 누가, 왜 죽였는가?[편집]

관우전 주석에 기록된 촉기에서는 손권이 그를 살려주어 조조를 견제하고자 했으나, 좌우에서 '범의 새끼는 기를 수 없다'며 만류하여 결국 죽이기로 마음을 굳혔다는 일화가 있다.[96]

배송지는 이를 두고 "임저에서 강릉까지(여몽과 손권이) 2-3백리 거리인데 어찌 때에 맞춰 관우를 죽이지 않고 바야흐로 그 생사를 의논할 여유가 있었겠는가?"라며 사실성에 의문을 표했고 반장전 등에서는 단순히 참수되었다고 나온다. 다만 여범전에는 주석이 아닌 본문에 손권이 물시계와 해시계를 가져다 두고 관우가 붙잡혀 오기를 기다리니 여범의 예측대로 붙잡혀 왔다는 말이 있다.

어쨌든, 여기서 배송지의 평등을 따라 관우를 여몽이 독단적으로 죽였다고 하면 '몸값이 비싼 포로'라는 교섭카드를 왜 스스로 버렸을까? 일단 누가됐던 관우를 참한 것이라면 관우를 수하에 두고 쓴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는 일단 제쳐놓고 관우의 오만함과 더불어 유비가 형주에서의 세력을 재수복하려고 침공할 명분을 주지 않고, 그에 대한 볼모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인질을 왜 죽였냐는 의문이 남는다.

일단 정말 손권이 참수를 명령했는지는 둘째치고 정말 여몽의 지휘하에 참한 것이라면 여몽이 당시 풍습대로 포로를 죽이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수준의 인물이었거나, 자기 이름 한번 날려보고자 나라에 짐을 떠넘긴 여대 꼴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현대에 와서는 관우가 생포된 당시 치명상을 입어서 회생의 가능성이 없었다거나, 관우가 볼모가 되지 않기 위해 자결을 했다는 식으로 짜맞추는 경우도 있다.

'동맹국의 장수'를 급습해서 죽인다는 것이 어떤 관점에서 보건 굉장히 껄끄러운 일이기에, 당시 오나라의 군가를 참조하면 당시 동오에서는 이것을 한오(漢吳) 동맹국 간의 분열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관우가 독단적으로 움직인 것'이 원인이 되었다고 둘러댄 내부적으로 수습하는 명분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 대처는 이릉대전을 촉발시켰다. 관우의 죽음이 사실상 가장 큰 실책. 어쨌든 명목상으로는 동맹국의 개국공신에 유력장수인데 생포하여 협상할 생각은커녕 사로잡자 마자 바로 처형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우만 죽지 않았더라도 촉한은 형주수복의 명분이 줄어드니 결국 역사보다 10여년 정도 빨리 양주를 흡수하기 위해 북벌을 감행했을 공산이 크다. 이러면 촉나라는 한중공방 당시의 전력을 보존한 상태에서 여전히 위군을 압박할 수 있고 오군은 형주를 얻으면서 오나라에게 좀 더 유리하게 흘러갔을 가능성이 컸다. 관우가 살았다면 양자에게 모두 이득이 가는 형태로 갈 수도 있었다는 것.

6.3.8. 과연 관우의 독단으로 북진을 했는가?[편집]

결과적으로 이는 뒤에 오나라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북진을 하여 실패가 되었기에 번성을 공격한 것이 관우의 독단적인 판단이 아니냐는 말이 있다.

형주에서의 북진이 제갈량의 융중대에 포함된 촉의 국가전략인 만큼 관우를 평가하고 사건의 전후관계를 완전히 파악하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누가 북진을 꾀했는지 사서에 아무런 언급이 없다.

다만 당시 유비는 한중 공방전을 승리해서 기세가 좋은 상태였고, 조조는 흔들리는 상황이었다. 만약에 관우의 북진이 성공한다면 형주의 방어선을 강화함과 동시에 관중과 형북 양면에서 조조를 압박해서 수월하게 대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패한다해도 조조가 형북을 신경쓰는 틈을 타서 관중으로 밀고 들어가도 되고. 그러나 그렇다면 관우의 북진과 함께 유비 또한 관중으로 북진하는 움직임을 보였어야 하는데, 유비가 군을 북진시키거나 북진을 준비했다는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 일단 관우의 진격과 후퇴는 불과 몇달만에 발생한 일이라 한중에 있던 유비가 한중을 정비하느냐고 미처 손을 쓰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어찌됐던 간에 실패한 전략인지라 이걸 관우의 독단이라면 관우를 까내리게 되고 독단이 아니면 유비를 까야하니 촉빠들끼리 싸우는 모습도 볼 수 있는 부분(…) 결국 여기에 대해 제갈량이 관우를 죽였다는 음모론까지 나오게 되지만 해당 설은 밑에 고우영 삼국지 문단을 보도록 하자.

이에 대해 이중텐 교수는 장쭤야오의 유비평전의 "관우가 유비와 제갈량의 뜻을 받아" 일으킨 것이라는 말과 허쯔취안의 삼국사(三國史)의 "관우는 양양과 번성을 공격하는 문제를 유비나 제갈량과 협의 하지 않았다"는 두 가지를 소개하지만 당시 관우는 아무런 명령을 받았다는 말이 없었기에 독단으로 행동했을 것이라고 자신의 생각을 밝히면서 유비도 말리지 않았기에 유비 또한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다만 제갈량은 당시 직함은 군사장군, 직무는 서좌장군부사로 군사와는 관계가 없기에 제갈량의 책임은 없다고 하였다.

또 뤄지푸의 경우는 유비가 군사 명령을 내릴때는 항상 견遣, 별견別遣, 령令, 유留, 사使와 같은 사역형 동사를 썼지만 양번전투에선 관련 사역동사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단독작전이라고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관우의 출병 목적이 본격적인 북진이라기보다는, 형북 일대의 영토를 조금 넓히려는 소규모 작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한 마디로 관우가 출병한것은 본디 형북쪽에 대한 단순한 견제나 기선제압 정도의 의미인데 7군 수몰+번성 함락직전이란 엄청난 호기가 갑자기 닥쳐오자 관우가 무리를 했다는 의견이다. 갑작스레 닥쳐온 호기에 관우가 손권이 형주땅을 노리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무리를 했고 초전의 엄청난 승리가 결과적으론 관우의 몰락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관우는 유비가 한중왕으로 등극한 후 조인을 공격할 때[97] '가절(仮節)'을 받고 있어 어느 정도의 독자 행동이 용인되는 상태였다는 주장이다.# 다만 여기에 대해서 가절은 그 정도로 강력한 권한이 아니며, 관우의 관직은 형주 지역의 도독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유봉전에서 관우가 상용의 유봉, 맹달에게 구원을 올 것을 명령하고, 유봉과 맹달이 거절하자 유비가 이를 원망했다는 기록을 보면 유비 역시 관우의 움직임을 상당부분 묵인했거나 동조했을 가능성이 있다.

6.3.9. 관우에게 혼인을 제의한 것이 그릇된 행동인가?[편집]

먼저 이것이 겹사돈 부류에 들어가기에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확실하게 아닌 것이 일단 관우는 좋게 봐줘야 의형제고 조조와 손권 같은 경우는 손씨-조씨 결혼을 세 번을[98] 했기에 겹사돈이라고 안 맞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른 것은 관우의 딸을 인질로 사용하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인데, 이건 말 그대로 관우를 엄청난 딸바보로 만들어서 공과 사도 구분 못 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행위다. 간단하게 손씨와 조씨도 서로 결혼으로 상대쪽에 친척이 있었지만 싸움을 해댔는데 말이다. 이로인해 파생된 결혼으로 유비가 관우를 의심하게 만들 계획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 또한 유비를 너무 낮춰 보는 행위다. 손권만 하더라도 제갈근을 의심하지 않았고 위정반준장완이 이형 관계라며 무고했을 때도 오히려 위정의 관직을 삭탈했는데 하물며 유비와 관우의 관계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또 하나는 관우가 이리 예측할 줄 알고 손권이 일부러 개전 이유를 만들기 위해 이리 했다는 설이 있다. 이건 사서에도 그냥 한 줄로 관우한테 서로 결혼하자고 했더니 거부당했다를 가지고 추측 한 것에 불과하다. 상관의 쌀을 멋대로 취한것처럼 사서에 개전 명분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육손이 관우를 방심하게 만드는 것처럼 계획하고 행한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니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다.

사실 애시당초 그냥 관우의 성격문제와 손권에 대한 불신으로 손권의 결혼동맹 자체에 나쁜 감정을 가져서 부정적으로 바라봤다고 한다면 딱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 관우는 오측 인물들이 자신의 사기와 힘을 믿고 거꾸로 뒤엎는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또 손권과의 결혼 동맹은 이미 유비와 손부인의 결혼을 통해 유비측 인사들이 위협적으로 봤고 결국 손부인이 유비의 후계자인 유선을 오나라로 데리고 가려던 것을 조운과 제갈량이 저지한 적이 있으며 관우는 당시 형주에 있으면서 무례하다고 밖에는 볼 수 없는 방식으로 손권측이 혼인관계를 청산한 상황을 똑똑히 지켜본 사람이다. 애시당초 유비 측 인사들이 손부인을 보면서 손권과의 결혼동맹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은 사서에도 나오는 사실이니 딱히 추측거리라고 볼 여지도 없고 이 시기 관우는 오의 침공을 막기 위해서 봉수대를 쌓고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손권이 갑자기 이제는 촉의 2인자인 자신과 사돈이 되자고 하자고 나온 것이다. 관우의 입장에서는 대놓고 기회만 엿보고 있는 손권의 이런 행동이 표리부동하며 자신이 어찌나올지 시험하려 든다고 볼 여지가 충분히 있는 셈.

손권이 관우에게 혼담을 청한 시기는 분명하지 않은데, 이 무렵 손권은 서주자사(徐州刺史) 행 거기장군(行 車騎將軍) 이었으므로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에 오르기 전에는 아무래도 혼인 동맹을 요청하기에는 관우와 손권의 격이 걸맞지 않았다. 그러므로 유비가 한중왕을 칭하고 관우가 전장군(前將軍)에 배수된 이후인 219년 가을 이후로 보인다.

6.3.10. 관우가 혼인을 받아들였다면 손권이 뒤치기를 할 일은 없었다?[편집]

사실 이 부분도 애매한 구석이 있다, 상관 군량 유용이나 혼인거부가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하나 이미 오래전부터 손유동맹은 익양대치 등으로 언제 깨질지 모르는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는 데다가 애시당초 정사 여몽전에 대놓고 여몽이 관우는 믿고 기대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칭하면서 형주를 얻어 방어선을 더 굳게 만들 것을 청하는 등 처음부터 형주를 공격할 생각을 품고 있었고 겉으로만 관우를 방심시키기 위해 친근하게 대했다고 나왔다. 손권과 여몽은 노숙이 죽은 이후 처음부터 관우를 치려고 계책을 짰다고 나와 있기 때문에 이미 꽤 오래전부터 관우의 빈틈을 노리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관우가 봉화대 등을 준비해 오에 대해서 대비한 것이나 오의 형주진공이 말 그대로 전광석화에 뒤처리까지 깔끔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단순히 손권이 한 번 무시당했다는 이유만으로 즉흥적으로 결정내렸다고 볼 수는 없는 셈이다. 애시당초 당시 촉-오 동맹은 언제 깨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에 있었으니 이런 계책이 나왔다 한들 하등 이상할 게 없었고 겉으로 관우와 우호를 맺으려고 시도한 것이 바로 저 혼인건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뭐 사실 보면 결혼동맹이란것도 깨면 그만이다. 북연, 성왕도 그러다 깨졌다.

6.3.11. 상관(湘關)의 미곡문제[편집]

흔히 한국에서 정사 삼국지가 처음 알려졌을 무렵엔 상관은 오나라의 관문으로 관우가 우금의 3만 포로를 먹여 살리기 위하여 멋대로 오나라 땅을 침범해 쌀을 가져갔기에 손권이 진공 명분이 되었다는 시각이 많았다. 그런데 2010년대 이후 한국에서도 이 상관이라는 곳 자체가 '정말 오나라만의 땅이 맞느냐?'는 의문점이 곳곳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우선 상관은 익양대치 당시 손권이 가져간 땅인 계양, 장사, 강하에 속하는 땅이 아닌 유비가 가져간 영릉지역으로 영릉의 치소인 천릉현 바로 옆이다. 또 자치통감 호삼성 주석에 따르면 '오와 촉이 형주를 나누며, 상수를 경계로 삼았기에, 관을 설치했다.'라고 한다. 또 청나라 시대 학자 조일청이 말하길 '방여기요 75권에 오, 촉이 형주를 나눠, 상수를 경계로 삼고, 관을 물 위에 설치해서, 상인과 여행객을 통하게 해, 이를 상관이라고 일렀으며 81권에 상구관(湘口關)은 영주부(永州府) 북쪽 10리에 있어, 소, 상 두 물이 합류하는 곳이다.'라고 했다. 이렇게 보면 상관은 유비측 지역인 영릉에 속하고 최대한 많이 봐주면 촉-오 양측 상수 경계에서 양측 통행인을 관리하는 관문이지 이게 순수 오나라의 땅이라는 얘기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한 것. 아무리도 못해도 해당관은 촉한과 손오의 경계 지역, 혹은 완충지역에 있었으며 이곳을 지나가는 인원을 관리했다고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촉한 강역이라고 되어 있는 영릉에 속한 곳이 꼭 오나라 땅 맞긴 한가에 대한 의문이 나올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상관의 쌀을 관우가 마음대로 가져갔다는 측면을 명분으로 삼은 것으로 보아 오나라의 지분이 없는 땅이라고 아예 할 순 없다. 자치통감에도 이 부분에서 '(관우가) 식량이 떨어지자 손권의 상관미를 마음대로 취하였다(糧食乏絕,擅取權湘關米)라고 명시하고 있다. 다만 이전에 정사 삼국지가 처음 알려지던 시기에 오나라 팬들의 주장마냥 '관우가 순수하게 오나라 영역이었던 곳을 침범하여 쌀을 탈취했다'가 아니라 '촉한에도 권리가 있는 지역의 쌀을 동맹인 오나라 사전협의 없이 가져간것을 문제삼았거나, 관우의 식량사정을 파악한 오나라가 통수의 기회로 삼은것이 진짜 사건의 진상이 아니었느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자치통감이나 정사 삼국지에 주석으로 남겨진 학자들의 기록에서도 상관은 분명 양쪽 경계에서 어느 한쪽만이 아닌 양측의 통행인을 관리하던 곳임에는 분명하고 촉한만 아니라 손오에도 둘 다 서로 지분이 있을만 하다고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다. 정사 삼국지나 자치통감이나 관우의 이 행위에 대해서 탈취, 약취 같은 단어가 아닌 '마음대로 가져갔다, 멋대로 가져갔다'(擅取)라고 되어있는데 서로간 사전협약을 무시하고 관우측이 그냥 가져갔다고 해석 할 수 있는 부분인 것이다.

또 당시 관우가 상관의 쌀을 갖다 쓴 건 우금과 3만 군사를 포로로 수용함으로서 생긴 식량 부족이 문제였고 촉나라 영역인 영릉군 위에 있는 상관에 비축한 곡물을 가져오는 거 자체는 당연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수송로. 당시 번성을 두들기고 있던 관우 입장에서는 빠른 시일 내에 식량 보충을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육로로 이동시키는 건 그만큼 지연 문제가 컸을 것이고 그럼 남은 곳은 상수를 통한 수로 이용뿐이다. 강하군에서부터 남쪽 창오군까지 내려오는 물길이 하나 있고, 그 물길이 장사군에서 영릉군까지 다이렉트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 부분은 당연히 손오의 영역이다. 즉, 손권이 내세운 명분으로 보아 관우가 사전협의 없이 쌀을 가져갔고 거기에 자기네들 물길을 사전에 얘기도 않고 수송로로 사용했다는 의미로 나중에 침공의 명분으로 삼았다는 것인데, 문제는 손권이 겉으로나마 관우에게 협력을 약속했고 여기에 이전에 여몽을 대신해 새로 부임한 육손이 '관우에게 전적으로 협력하겠다'고 속없이 좋은 말로 언플을 날렸다는 전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데 이 문제를 단순이 관우가 제멋대로 굴었다라는 시각으로만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6.3.12. 형주의 상실로 촉한의 천하통일은 좌절되었나?[편집]

결과적으로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된 제갈량의 융중대가 관우의 죽음과 형주 상실로 깨지고 이후 촉한의 천하통일이 좌절된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다. 워낙 형주가 그만큼 중요한 땅이었기에 제기되는 이야기로 확실히 이로 인해 그동안 순조롭게 진행되던 촉한의 대전략은 처음으로 좌초를 맞게 된다. 그러나 이 상태에서 아직까지 촉한의 천하통일이 완전히 좌절되었다고 볼 순 없다.

당시 촉한에게는 두 가지 선택 방향이 있었다. 하나는 후일 제갈량의 북벌처럼 한중에서 진천, 양옹주으로 진격하여 북벌을 시작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원 역사처럼 형주를 탈환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었다. 유비 본인은 형제와 같았던 최측근 장수 관우의 복수라는 명분이나 사섭을 통한 남만 자극이나 유장의 아들 유천의 익주자사 임명 껀 등 손권의 도발 때문에 후자에 더 집착했고, 조운 같은 다른 중신들은 이왕 이렇게 된 이상 형주는 어쩔수 없으니 북벌을 시행하자는 입장으로 갈렸는데 사실 여기까지는 어느쪽을 선택하던 딱히 문제가 없고 황제인 유비의 입장에 따라서 후자를 실행했을 뿐이다.

이렇게 이릉대전은 시작되었고, 시작은 좋았다. 무릉의 이민족들도 포섭했고, 옛 형주 지역에서 관우의 잔당들의 호응까지 있었으며, 여몽 사후 다른 오나라의 장수들은 유비에게 격파되고 있었다. 다만 하필 이 당시 오나라의 총사령관이 육손이었고 그가 시행한 계책이 촉한 동정군에 치명타를 입히는 바람에 차라리 이 병력을 북쪽으로 돌린것만도 못하게 된 상황이 되어서 그렇지(...) 촉한은 이 이릉대전의 패배로 북벌을 위해 준비한 많은 물자, 병력, 인적 손실을 겪어야 했으며 건국군주 유비마저 이 전투의 패배로 마음의 병을 얻어 얼마후 승하하는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이런면에서라면 확실히 촉한의 천하통일 가능성을 낮춘건 단순히 형주의 상실 때문이라기보단 그 과정에서 촉발된 이릉대전의 실패 때문이 더 크다.

만약 여기서 5년을 더 기다려 이 자원들로 남만을 평정하고 황제 유비의 친정으로 옹양주를 공략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렇게 말아먹고 5년간 뼈빠지게 재건한 촉한의 군세로도 촉한의 북벌은 순식간에 관중을 진동시킬 수 있었다. 하물며 유비가 이 자원을 그대로 보존한채 제갈량을 대동하고 직접 옹양주를 공략했다고 하면 그 파급력이 어땠겠는가? 물론 유비의 나이가 있다는게 문제지만 이릉대전이 없었다면 남만평정-북벌 까지의 시간이 단축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물론 실제로 실행되지는 않았으므로 IF에 불과한 시나리오지만, 향후 제갈량부터 시작해 강유에 이르기까지 촉한의 눈물나는 북벌사(...)를 생각하면 이 부분에 아쉬움이 남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손해를 어느정도 만회 할 수 있었을 거라는 말이지, 형주의 상실로 인한 피해가 작다는건 아니다. 당장 제갈량의 융중대는 하북과 중원을 장악해 하나로 만듬으로서 천하의 대부분을 장악한 를 상대하기 위해 익주에서 장안으로, 형주에서 완성을 넘어 낙양으로 진격해 양한의 수도를 동시에 석권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비록 적벽대전과 익양대치로 위와 오에게 야금야금 빼앗겨 관우의 북정 당시에는 원래 형주의 삼분지일만 남았지만, 이전부터 나중에 있을 북벌의 핵심 공격루트로 일찌감치 내정되어 있던 곳이었다. 이러한 형주 지역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촉한의 대전략을 처음부터 다시 구상하게 만든 큰 피해다.[99] 유비가 중신들의 만류에도 동정을 시행한건 이런면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고[100] 제갈량 역시 이를 알았기에 얼마전 죽은 법정의 부재를 한탄하며 적극적으로 반대하진 못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후일 융중대 붕괴 이후 제갈량의 북벌은 한고조의 고사에만 따라 기습으로 진행하거나 아니면 동맹인 오와의 연계하거나 강족, 저족, 선비족등 이민족과의 연계를 생각하면서 진행해야 했다.

7. 기타 창작물에서[편집]

7.1. 삼국[편집]

형주의 형세가 좋지 않아 제갈량이 형주에 지원군을 보내는것이 좋지 않겠냐고 유비에게 묻지만 유비는 "관우는 천하의 용장일세. 괜찮을걸세"라며 아우를 심하게 믿어 의심치 않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후의 일은 결국 제갈량의 예견대로 흘러가게 된다.

당시 관우는 제갈량이 장비보다도 위험하다고 유비에게 진언했던 그 특유의 오만함이 극에 달한 상태였는데, 마량의 충언들을 오만한 언사를 동반하여 거의 99%는 씹는다.

나중에 답답해진 마량은 관우의 팔을 치료한 화타에게 관우에게 말을 좀 해달라고 부탁하고 여기에 대해 화타가 "왜 귀공이 직접 말을 하지 않소?"라고 묻자 마량은 "제 말은 듣지 않으십니다."라고 한다. 화타는 설득하러 갔다가 결국 관우에게 씹히고 마량에게 "관공의 팔은 고칠 수 있었지만 오만이라는 병은 고칠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대표적인 오만한 언사는 마량이 형주에 대해 걱정하자 "동오에 병법을 아는 것은 노숙과 주유뿐인데, 그들이 다 죽었으니 동오에는 쥐새끼들 뿐. 어찌 형주를 공격하겠는가"라고 말하며 씹었고(…), 보다못한 마량이 "장군이 천하무적이긴 하나 그래도 그 겁쟁이 손권이 형주를 공격하면 어떡합니까"라고 진언을 다시 해보지만 관우는 도리어 "그놈이 강을 건너 형주를 치면 나도 강을 건너 건업을 쳐 손권을 사로잡으리라!"라고 말을 한다. 이쯤 가면 막장이라는 말밖에 안 나온다(…).

이후에는 결국 마량의 염려대로 형주는 동오에게 함락되고, 관우는 당시 자신을 공격해온 서황에게 "한팔로 너를 쓰러뜨려주겠노라!"라고 말하며 한팔로 청룡도를 휘둘렀다.

물론 그게 가능할 리가 없어 서황에게 죽을 뻔했다가, 주창과 관평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지는 굴욕을 당한다.

그 뒤, 맥성에서 탈출을 시도한 관우는 포위된 뒤 자결을 하는데, 손권은 관우를 죽일 생각이 없었기에 후에 밉보인 여몽이 독살당하는 듯한 묘사가 있다.

성도에서 일하던 유비에게 관우의 혼령이 찾아온 뒤 제갈량이 전령과 함께 비보를 알리지만 유비는 "관우가 죽을 리가 없다. 불가능하다"며 되뇌이다가 충격에 쓰러지고 만다. 본작에서는 형주의 상황이 관우의 능력을 과신한 유비의 책임이 어느 정도 있기에 허탈하면서 그렇게 관우를 믿었던 유비기에 그 충격과 슬픔이 배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병석에 누운 유비와 제갈량은 관우의 그런 오만함에 대해 개탄을 하였으며, 훗날 유비는 장비에게 "운장의 죽음은 그의 거만한 성격 탓도 있어. 너도 그 불같은 성격들 좀 고쳐야지. 이제 병사들을 혹독하게 대하거나 하지는 마라. 알았지?"라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고, 여기에서 장비도 눈물을 흘리며 "알겠소, 형님"이라고 대답하는 꽤나 훈훈한 장면을 보인다.

하지만 감정적인 난폭한 성격의 장비는 그 뒤, 술 퍼마시고 범강, 장달을 개 패듯 학대하였고 결국 그 둘에게 목이 달아난다.

나중에 손권이 조조에게 황제의 자리에 오르라는 글을 보내자 조조는 손권의 뜻을 알아채고 웃으면서 자기가 형주가 욕심나서 형주를 강탈하고 이 조조에게 책임을 떠넘기다니 우습다고 하며 관우가 유비와 장비와 도원결의로 의형제인건 온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 그 사실을 잘 아는 인간이 쓸데없이 관우를 죽여서 엄청난 화를 자초했냐며 멍청한 손권이라고 비판했다.

7.2. 창천항로[편집]

최종장

관우에 대한 버프가 극에 달한 부분인 동시에 관우가 주인공인 조조에 버금가는 버프를 받은 캐릭터라는걸 보여주는 부분.

관우가 이마에 화살을 맞고도 싸우는 장면에서 정사 부분을 강조해서 인용하는가 하면 벼락으로 관우의 위엄을 더하고 물 위를 걷는듯한 신적인 묘사에 서황 등의 적국 무장 조차 관우에게 반해 어쩔줄을 모른다.[101] 관우가 천하를 격동시키자 이에 호응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가 하면 조조는 관우가 오군을 털어버리고 자신을 공격해오는 꿈을 꾸면서 즐거워하다가 깨어나서 꿈이라는 것을 알고 착찹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이런 관우 띄워주기로 인해 조조빠 만화라며 창천항로를 까대던 수많은 촉빠들은 말 그대로 데꿀멍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말도 안되는 주장이다. 창천항로가 조조빠 만화 소리를 듣는 건 조조를 미친듯이 띄워줬기 때문이다. 작중 최후반부에 관우가 온갖 버프를 받는다고 해서 20여권에 걸쳐 조조를 터무니없이 미화한 전적이 상쇄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관우의 기세에 쫄아서 말로나마 씨바 수도 옮길까; 했던 기록상의 조조는 온데간데 없고 두통으로 자주 정신을 잃으면서도 관우가 수도까지 쳐들어오는 상상에 드디어 왔구나 겨뤄보자!!! 하는 호탕한 조조만 남아 있는 상황이다(…) (물론, 하필 다른 사람 놔 두고 손권한테 직접 죽은 걸 못마땅하게 여긴 이들도 있긴 했지만.)

7.3. 영걸전 시리즈[편집]

7.3.1. 삼국지 영걸전[편집]

이상하게도 영걸전 시리즈에서는 형주 공방전이 그리 큰 비중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영걸전에서는 맥성 전투, 단 한 개의 전투로 이루어져 있다. 미방의 배신 같은 중요한 전개도 전부 생략되었다.[102] 아무래도 주인공이 유비 삼형제가 아닌 유비였기 때문이 아닐까. 관우를 구출하고 싶다면 먼저 병종을 보병으로 바꾸는게 좋다. (기병으로는 숲을 지나갈 수 없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난이도의 문제일 뿐, 기병으로도 충분히 살릴 수 있다. 핵심은 미리 관평, 주창, 관우에게 충분한 양의 폭탄을 지니게 하고 관우는 적토마를 지니고 있을 것. 이것만 갖추면 특별한 노가다 없이도 기병으로 앞을 막는 적을 폭탄 던져 죽여가며 살릴 수 있다.
아이템을 사기 싫다면 관우/관평/주창의 레벨업을 충실히 하자. 아이템이나 클래스변경 없이도 손쉽게 클리어 가능하다. 하드한 정도의 노가다가 아니라 경험치 좀 우려내주는 플레이 정도만으로도 맥의 전투에서 위 3인의 평균렙을 60정도 맞추는 것은 가능하고, 그럴 경우 쉽게 클리어 할 수 있다. 사실 위에 언급한 진짜 '하드한 노가다'를 어느정도 영걸전에 정통한 플레이어가 했을 경우 여기서 관우 레벨이 80이 넘는다.

7.3.2. 삼국지 공명전[편집]

영걸전과 마찬가지로 맥성 전투만 존재한다. PC판에서는 영걸전과는 달리 관우를 끝까지 탈출시켜도 무조건 죽는다. 참고로 관우, 관평, 주창 등은 모두 컴퓨터가 조작하고 플레이어는 관흥, 관색만 조작할 수 있다. 물론 맵도 막혀있어 관우가 있는 곳으로 갈 수는 없다. 굳이 해보고 싶다면 에디터를 이용해 관흥, 관색을 맹호대 같이 숲에서 기동성이 좋은 부대로 변환시켜준 후 시도해봐도 되긴하는데 어차피 살릴 수는 없다.
맥성전투 하나에 여러 분기가 나온다. 관우가 죽는건 변함이 없지만.

1. 관우, 관평이 그대로 가다가 앞에 오군 복병이 나타나게되면 이동을 멈추며 공격은 안하고 오군이 공격하는 것에 반격만한다. 관흥, 관색이 성공적으로 성채에 당도하면 관우, 관평은 잡히게 된다. 이게 정상적인 진행.

2. 총퇴각을 한 번 한 뒤에는 관우, 관평이 되려 오군을 공격하는데 오군을 전멸시키면 조인의 위군에 의해 잡히게 된다. 물론 오군을 전멸시키기 전에 관흥, 관색이 성채에 당도하면 이 땐 오군에게 잡힌다.

3. 에디터를 이용해 관흥, 관색으로 관우, 관평 앞에 나타난 복병을 제거해서 관우를 마을로 유도하면 반장의 복병에게 잡히게 된다.

PS.에디터를 이용해 왕보, 주창을 죽지 않을 정도로 내구력을 올려주고 버티게 하다가 관우가 잡히고 나면 왕보와 주창이 관우의 처형소식에 자살한다.

콘솔판에서는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관우를 살릴 수 있지만 어차피 남만 평정 이후 은퇴하므로 키울 필요는 없다.

7.3.3. 삼국지 조조전[편집]

번성 구원전, 단 한 개의 전투로 이루어져 있다. 조조군 입장이라고 해도 상당한 난이도를 자랑하므로 조심해야 한다.
특히 조인이나 만총은 둘다 각 계열의 경쟁자들에게 밀려 버려지는 경우가 많은데[103], 공교롭게도 이 둘이 강제출전 하며, 번성이 함락되면 게임이 끝나는데 그 성을 조인과 만총만이 지키고 있다. 모든 장수를 균형있게 키우는 유저나 조인의 성능이 나쁘지 않은 신조조전이라면 몰라도 키우고 싶은 유닛만을 키우던 초보유저에게는 무서운 상황이다. 또한 방덕이 주창과 접근하면 사망하게 되어 아군 최고의 보병을 잃는 만만치 않은 전투다.

7.4.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편집]

삼국지 10에서는 이벤트로 등장하는데 나머지는 다 이벤트 대사로 지나가고[104] 번성 전투부터 시작된다. 이 전에 병사 이산으로 인해 아군 전 부대의 병력이 각각 1/5가 되는데, 가령 10만일 경우에는 2만으로 감소한다. 적은 여몽군+손권군 해서 9만이다. 이기면[105] 셋 다 살아서 성도로 가게 되며 지게 되면 강릉에 소재한 플레이어 캐릭터가 관우, 관평, 주창이 아닌 경우 관우와 관평, 주창 셋 다 죽게 되고, 셋 중 하나인 경우, 나머지 두 사람이 죽고, 나머지 한 사람은 탈출하여 성도로 가게 되는 이벤트다. 승패에 상관없이 형남의 땅은 모두 오군이 가져가게 된다. 그런데 배반하는 미방이나 부사인으로 플레이하면 이벤트가 일어나지 않는다(!). 반준으로 플레이할 경우 이벤트가 일어나기는 하는데 살아서 성도로 간다(…). 하긴 얘네들로 누가 플레이한다고

플레이어가 강릉이 아닌 무릉이나 영릉 소속일 경우 역시 이벤트는 발생하지 않는다. 플레이어가 신장수인 채로 이 이벤트에 참여하게 되면 번성 전투에서 같이 싸우게 되며 지면 당연히 관우, 관평, 주창 셋 다 죽고 플레이어 신무장만 성도로 가게된다. 플레이어가 만약 지휘특기가 없거나 여몽보다 무력이 높다면 일기토를 안 받아주므로 이 전투는 못 이기고(…) 지휘특기가 있으면 관평을 지휘해서 여몽에게 어떻게든 일기토를 걸도록 하자. 컴퓨터는 멍청해서 지휘로 복병을 해줘도 알아서 풀고 병력이 딸려도 적에게 박아서 자살을 하기 때문에 지휘특기가 없거나 관평이 퇴각했다면 이길수가 없다. 병력차이가 너무 심각하기 때문.[106]

삼국지 10 PK에서는 전쟁사모드 시나리오로 등장해서, 위, 촉, 오 중 한 세력으로 플레이할 수 있다.
  • 공통
    특별한 이벤트 트리거 분쇄가 없으면 칠군수몰 이벤트가 일어나서 방덕은 3,000명, 우금은 혼란상태의 1,000명의 병력만 남게된다. 이후 미방과 부사인의 배반, 병사이산 이벤트가 일어나게 설계도어 있는 것이 기본이다.
  • 관우, 주창 시점
    3일 뒤 무조건 칠군수몰 이벤트가 일어난다. 여기까지만 보면 촉이 압도적으로 유리하지만, 문제는 다음부터다. 우번의 부대가 전장에 남아있는 한, 며칠 뒤 미방, 부사인의 투항 이벤트가 일어나 그들이 오군으로 귀순하게 된다. 그 이후 성채가 일정이상 공격받으면 병사이산 이벤트가 일어나서 관우 분대는 퇴각하게 되고, 관우, 관평, 주창의 병력은 절반으로 줄게 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병사이산 이벤트 후 정확히 10일 후 관우의 턴에, 성도에서 촉의 지원군이 달려오는 촉빠들의 로망과 같은 광경이 펼쳐지지만[107] 원군이 오기까지 버티는 것이 정말 힘들다.
    다만, 너무 잘 싸워서 적군의 병력을 많이 줄였다면 미방과 부사인의 배반 이벤트를 보고 성채마저 부서졌더라도 병사이산 이벤트가 일어나지 않기도 한다. 이 정도로 진행이 되려면 복병과 지휘-궁시를 매우 적절히 사용한 경우로, 이대로 진행하면 관우-관평-주창 셋 만으로도 적 전멸까지 노려볼 수 있다. 셋 모두가 무력이 80이상이기때문에 복병의 기습으로 혼란에 걸린 무력이 낮은 부대(주연, 제갈근, 만총)에게 강제일기토를 걸어 때려눕히고, 설령 일기토를 잘 받지 않더라도 혼란상태인 적에게 상성만 맞춰 통상공격(궁병은 궁시공격)만 하면 엄청나게 좋은 교환비를 보여주는데 아군에게는 보병(주창, 관우분대), 기병(관우본대), 궁병(관평)이 모두 있어서 이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면 전멸도 어렵지 않다.
    클리어 방법은 보통 3가지인데, 투항과 병사이산 이벤트가 나오기 전에 신속하게 조인을 때려잡는 속전속결과, 아니면 원군이 올때까지 복병질 + 불놀이로 시간을 끄는 숨바꼭질 작전, 그리고 관우로 미방을 지휘해 우번을 먼저 잡아버려서 투항 및 병사이산 이벤트를 원천차단하는 방법이 있다. 속전속결의 경우 칠군수몰 이벤트 직후 신속하게 달려들어야 하는데, 일기토에 자신이 있다면 관평이나 주창으로 조인에게 일기토를 걸어서 단 한 번에 끝장낼 수도 있다. 숨바꼭질의 경우 불이 오군 쪽으로 바람을 타고 흘러야 하는 운빨이 섞여 있다. 따라서 경우의 수를 따지지 않고 잡으려면 시작하자마자 관우로 미방을 지휘하여 우번을 먼저 때려잡는게 가장 좋다. 이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게 되면, 오리지널 시나리오인 한조부흥전이 플레이 가능해진다.
    관우로 플레이할 시 관우 vs. 방덕 (일기토 신청시 발생, 무승부, 관우부상), 관우 vs. 서황 (일기토 신청시 발생, 무승부)이 준비되어 있고, 주창으로 플레이하면 주창 vs. 방덕 (칠군수몰 후 주창이 방덕과 물에서 인접하면 발생, 방덕포박) 이벤트가 일어난다.
  • 방덕, 서황 시점
    칠군수몰 이벤트는 절대 피해갈 수 없다. 그리고 총대장인 조인은 유저에게 컨트롤 권한이 없어서 기타 부대들을 조작하기 힘들다. 다행히 방덕은 돌기병대를 이끌고 있어서 3000명으로 줄더라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안심이다. 우선 방덕으로는 관우에게 접근해 일기토를 보고, 이후 칠군수몰 이벤트를 거쳐가며 복병과 궁시로 공격을 하면 배반과 병사이산 이벤트를 거치며 아군들의 힘으로 관우를 잡아낼 수 있다. 서황의 경우도 방덕과 비슷하게 아군의 힘으로 클리어하게 되는 점은 같으나 칠군수몰때 병사들이 줄지도 않으며, 일기토를 해봐야 무승부이므로 CG를 모았으면 굳이 일기토를 할 필요는 없다. 공통적으로 조인의 AI가 좋지 않아서 가끔 어이없는 전멸을 당하기도 하므로 주의할 것.
  • 여몽, 우번 시점
    여몽은 턴이 오자마자 우번을 부사인 옆으로 붙여버리면 시작하자마자 배반 이벤트를 발생시킬 수 있다. 이 경우 칠군수몰 이벤트는 트리거가 분쇄되어 일어나지 않는다. 이후 성채를 공격해서 내구력을 떨어뜨리면 병사이산 이벤트도 일어나게 되고, 질래야 질 수 없는 판이 구성된다. 우번의 경우는 직접 부사인에게 접근해서 설전을 벌이는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지만 우번의 능력치가 낮아서 칠군수몰 이벤트는 거의 보게된다.

삼국지 11에서는 PK (기종불문) 결전제패 모드에서 번성 전투라는 이름으로 형주공방전 전반이 그려지고, 콘솔 이식판 한정 모드인 스테이지 시나리오에서 맥성탈출전이라는 이름으로 후반부가 그려진다. 전자는 수비측인 조인, 후자는 오군에게 포위된 관우를 플레이어로 담당하게 된다.

둘 다 난이도가 높은 전투로, 우선 전자는 관우(특기 신장 보유) 뿐 아니라 관색(특기 질주 보유), 주창 등 공격력 높은 유닛들이 바로 밀고 들어오기에 불을 질러 진격로를 우회시키거나 위보/교란을 활용해 최대한 적부대 진군을 늦추며 버티는 게 관건. 길목에 하나 놓인 궁노대를 지키는 것도 꽤 중요하다. 일정 턴을 넘기면 차례로 우금과 방덕, 서황이 원군으로 등장하며, 관우와 방덕을 접촉시키면 연의처럼 화살로 부상을 입혀 능력치를 저하시키는데, 관우 부대만 궤멸시키면 클리어가 인정되므로 이때를 노려 집중공격하는 게 포인트. 우금/방덕 부대의 궤멸 여부에 따라 클리어후 대화가 약간씩 달라진다.

후자는 포위망을 뚫고 일정기한 내에 영안으로 관우를 탈출시키는 게 승리조건인데, 주변의 포위망뿐 아니라 영안으로 이동하는 도중 여몽과 육손의 복병까지 나타난다. 더하여 플레이어 부대의 기력도 낮은 상태. 대신 부대마다 상당량의 자금을 보유한 상태라, 우선 연노대를 짓고 전법이나 위보 등의 계략을 응용해 포위망을 하나하나 풀어낸 다음 왼쪽이 비기 시작하면 관우 유닛을 신속하게 옮기는 게 공략법. 버티다 보면 유봉과 요화의 원군도 영안 근처에서 나타나므로 복병들 몸빵으로 활용하자. 이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면 관우가 극적으로 생환, 합류하는 가상 내용으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본격 삼국지 영걸전 후반 스토리 돌입

삼국지 12에서는 한중왕유비 시나리오의 이벤트로 나오며 촉한을 선택했을시 제갈량이 나온 의견대로 관우를 번성으로 진격시켜 기선을 제압하게 한다와 수비를 굳건하게 한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할수 있다. 관우를 번성으로 진격시키면 번성공방전 이벤트로 방덕이 참수되고 오나라가 역습을 가해 미방, 사인, 반준 등이 오나라에 속하고 관우와 관평은 살해당하며 촉한에 남겨져 있던 강릉, 무릉, 영릉이 오나라에 속하게 된다. 대신 여몽도 여기서 죽는 것으로 처리. 수비를 굳건하게 한다를 선택하면 관우가 강릉성에 그대로 머무르게 되므로 형주 3군을 그대로 지킬수 있다.

삼국지 13에서는 관우가 주인공인 영걸전 스테이지 무신중위로 재현되었다. 스테이지를 클리어해도 관우가 참수당하는 결말이 나온다.

7.5. 진삼국무쌍 시리즈[편집]

진삼국무쌍2 부터 시나리오로 추가. 관우의 최후를 그리는 드라마틱한 전투라는 점 때문에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촉에서 플레이할 경우에는 아군의 배반과 속속 등장하는 위와 오의 원군, 연합측에서 플레이할 경우에는 수공을 못 막으면 아군이 걸레짝이 되는 이벤트 때문에 어느 측이던 상당한 고난이도 전투가 된다.

2에서는 연합측에서 시나리오 시작시에 플레이어 무장과 여몽의 대화이벤트가 발생하는데, 이게 캐릭터에 따라서 대화가 달라지므로 상당한 잔재미가 있다. 프리시나리오에서 촉나라 무장으로 플레이해보면 관우를 족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촉무장들을 볼 수 있다. 특히 관우의 경우는 "나와 싸우게 되다니… 힘든 전투가 되겠군"이라고 하며 비장한 장면이 단숨에 개그씬으로 탈바꿈하는 위엄을 선보인다(…).

진삼국무쌍3에서 촉군 시나리오로 나온다. 수공 이벤트 후 맵 서쪽 본진 근처에서 오군이 등장하는데, 본진에 들어가는 직후 미방부사인의 배반이벤트가 일어나며 이후 오군 네임드장수들이 적의 원군으로 등장한다. 배반 이벤트 후에는 일정 시간마다 아군병사들이 적군에 투항하기 때문에 그 둘을 쳐서 투항을 멈추는 것이 포인트. 미방과 부사인을 방치해서 투항이 계속되면 관우가 "궁지에 몰린 쥐로구나" 란 대사를 하는데,[108] 관우의 10유니크 무기는 이 대사 후 오군의 네임드무장들을 격파해야 한다. 어려움 난이도에서 전세가 완벽히 기운 상태로 오군 네임드들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상당한 실력을 요구한다. 어째 관우무기는 11무기도 그렇고 왜 하나같이 얻기 어려운지 모르겠다...[109]

진삼국무쌍4에서 번성전으로 나온다. 위, 촉, 오 각각의 시나리오가 존재한다. 촉군에서는 수공을 일으켜 위군을 섬멸하다보면 서황의 위군 및 오군이 적 원군으로 등장하며 본진에 미방, 부사인이 배반하는 이벤트가 있다. 플레이어 캐릭터가 관우가 아닌 경우 관우가 죽고 장비가 총대장이 되는 이벤트가 존재한다. 위군에서는 원군를 기다리며 수공을 저지하거나 관우에게 갈시에 장비가 적원군으로 와 관우과 함께 싸우고, 오군의 경우 수공이 성공되며 위와 촉이 싸우는 도중 난입하며 미방, 부사인의 체력을 떨어뜨려 아군으로 포섭하는 이벤트가 있다.

여기서 위,오 측 무장으로 관우[110]를 격파해 승리하면 마지막으로 동영상 이벤트가 나온다. 유저와 관우의 무기가 스쳐 지나간 후, 관우는 웃으면서 "그대의 무, 훌륭하다! 나의 대의가 이뤄지지 못했으나… 이 최후, 무장으로써 바라는 바! 잘 있거라, 친구여!" 이런 간지나는 유언를 남기고 청룡언얼도가 손에서 떨어지면서 죽는다. 촉빠라면 눈물이 나올 장면.

또한 맹장전의 외전 시나리오로 맥성전투가 있다. 시작하자마자 사방에서 적이 쏟아지며 군의 사기가 바닥을 치고 있어 아차하는 순간 게임오버로 치닫는다. 꽤나 난이도가 있는 시나리오. 플레이어는 관우가 본진을 지키는 동안 오군의 포위망을 뚫고 지원거점들을 점령해야한다.[111] 거점을 확보하는 족족 아군 무장[112]들이 지원오며 최종적으로 여몽조인을 쓰러뜨리면 클리어.

진삼국무쌍5에서 역시 번성전이 존재한다. 유비군으로는 관평을 도와 수공을 성공시키고 조인을 처치하는 것이 목표이고, 연합군은 수공을 가능한 한 막고 육손의 원군이 올 때까지 버틴 뒤 반격하는 것이 목표이다. 촉군은 미방부사인의 배반 이벤트가 있지만 플레이어가 접근하지 않으면 배반 이벤트가 발생하지 않기때문에 빙 둘러 피해가버리면 되는데다가 배반하더라도 시리즈 3 번성에서의 막장 선동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쓰레기 두 개만 더 생기는 것 뿐이라 별 문제는 되지 않는다. 성밖의 적장을 3명 이상 잡으면 성안에서 서황이 뛰쳐나와 홀로 플레이어를 쫒아 오는데 이때 서황까지 잡고 나면[113], 관평이 곧바로 강 상류에 나타나 둑을 터뜨려 수공 이벤트를 일으켜 연합군 본진을 제외한 성내외 저지대의 모든 적을 쓸어버린다.[114] 수공 이후에 적의 원군들이 오지만 그리 위협적이지도 않으니 올때까지 기다렸다가 싸워도 되고 그냥 수공 이후 바로 조인 잡으러 가든 어느 쪽이든 무방하다.

반면에 연합군 시나리오에서 수공 막으려면 정말 피가 마른다. 서문과 남문에 소수 군단이 적 대군을 맞아 싸우고 있는데 시작부터 구원 요청 보내고 있고, 남문이 공격받고 있다고 보고하는 전령 병사 성우 연기가 일품 성문 뚫리면 관평이 강 상류에 곧바로 나타나서 수공. 성문이 안 뚫렸어도 어느 한쪽 문이든 아군이 전멸하면 그대로 수공. 미친 듯이 쓸어서 적군을 다 해치우면 관평이 대규모의 적군 증원과 함께 등장해서, 장판파 유비 수준으로 강 상류 지점으로 뛰어간다. 플레이어가 때리려고 해도 전투를 안 하고 피해서 뛰어가도록 설정이 되어 있고, 상류 지점 다리를 건너는 순간 다시 수공(...). 그 관평까지 잡고 나면 패드나 키보드에서 손떼고 숨 좀 돌릴겸 잠시 물이나 음료수 한잔하거나 화장실 다녀오자. 적 총대장 관우를 제외하고 나머지 적들을 성에 짱박혀서 놀고 먹으며 배불리고 있던 아군들과 오나라 원군들이 청소하고 있을 테니 안심해도 좋다. 따라서 서문과 남문의 공성 병력을 모두 격퇴시키고 관평이 다리를 건너기 전에 화력집중으로 잡아야 수공이 그제서야 저지되는 것이다. 달인 난이도 정도까지는 어렵지 않게 수공을 저지할 수 있지만, 수라 난이도에서는 상당히 어려우며 한시도 낭비하지 않고 빠르게 적장만 잡아내고 이동해야 한다. PS2로 나온 진삼국무쌍5 Special에서는 관평이 처음부터 강 상류에 등장하기 때문에 수공저지가 시스템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만 관평이 등장하는 조건을 숙지하고 도전하면 아주 불가능하진 않다. 성공시키기가 욕나올 뿐이지만(…). 영 못해먹겠을 경우엔 그냥 떨어지는 사기치 감수하고 싸울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사기치만 떨어지는게 아니고 군단 개수 및 병사수도 엄청나게 떨어진다는 거지만...

촉군 외에 여포군과 손견군 시나리오로도 번성 공격이 포함되어 있는데 여포군은 10분 내에 두 문 돌파, 손견군은 5분 내에(…) 둘 중 한 문을 열어야 하는 괴랄한 난이도의 전공목표가 각각 있고, 두 세력 모두 체력 유지 전공목표까지 있다(…). 이래저래 5탄의 번성은 촉군을 제외하고는 죽음의 땅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악명높은 전장이다. 삼라숭마 노가다로도 악명이 높지

진삼국무쌍6에서도 번성전이 나오는데, 위나라 시나리오와 오나라 시나리오에서는 관우를 죽이는 것이 목표이고 촉나라 시나리오의 경우는 전편이 관우, 후편은 관색으로 플레이하게 된다. 이 후편 전투가 촉빠 입장에서는 상당히 눈물나는데, 관평이 본진에서 적을 막는 동안 관우를 호위하며 탈출해야 한다. 여기서 플레이어가 관평 곁에 있을지라도 죽는건 막을 수 없다. 플레이어가 번성에서 어쩔수 없이 나가야 하는데[115], 만약 관평 곁에 있는 시간이 어느정도 지났을 경우 나가자마자 죽기 때문. 난이도와 상관없이 비장하고 애정한 BGM과 피가 마르는 연출이 멋진 전투이다. 전투 중반부에 이르면 관우,관색 둘이서 일당백으로 싸워야 될 정도로 처절하다. 전투가 끝나고 부친과 함께 서촉으로 도망가려는 관색을 관우가 창신으로 쳐서 강제로 혼자 도망가게 만들고 본인은 밀려오는 오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다. 역대 모든 진삼국무쌍 시리즈의 번성전 가운데 관우의 죽음이 가장 드라마틱하게 묘사된 전투.

전체적으로 고증이 상당히 충실한 편이지만, 위나라 스토리로 가게 될 경우 이걸 완전히 정면으로 깨먹는 충격과 공포의 전개가 나온다. 그게 뭔고 하니... 조인과 서황이 활약하는 이 전투에 하후돈이 난입해서 활약한다(…)[116] 조조의 앞길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인 관우를 이번에야말로 끝장낸다며 플레이어 캐릭터로서 번성 전투에 갑툭튀. 같이 관우를 쫓자는 여몽의 제안도 뿌리치고 홀로 관우를 추격한 하후돈은 끝끝내 관우를 자기가 직접 참살한다.[117] 참고로 이것이 위나라 스토리의 마지막 전투이며, 이 싸움 이후 조조가 사망하면서 스토리가 종결된다. 역시 진6의 위 스토리 진 주인공은 하후돈이다

진삼국무쌍7에서도 중요한 전투인 만큼 위, 촉, 오 세 스토리 모두에 들어가 있다. 특히 위는 마지막에, 촉은 정사 루트와 if루트의 분기점에 위치해서 더더욱 중요.
진삼국무쌍 7 분기 전투
여포
허창 전투
정도 전투

촉의 경우 사실 모드와 IF 모드 시작의 두가지로 나뉜다.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관우, 관흥, 관색, 관은병.

사실 모드는 조인이 번성을 버리는 상황을 가정했는지 촉군이 번성을 점령중. 다만 그냥 버린 것은 아니고, 번성을 버려서 촉군이 번성을 점령하면 번성의 촉군을 역으로 포위하는 작전이었던듯 하다. 때문에 관우 가족과 촉군은 위기상황을 맞고, 위군의 수공이 가해진다. 수공때문에 전황이 불리해지자 관우는 전투를 포기하고 퇴각을 결정, 관평은 성에 혼자 남아서 위군을 막다가 전사한다. 잠깐, 연의던 정사던 수공은 관우가 가했고, 전작들에서도 관우가 수공으로 위군을 곤경에 몰아넣지 않았었나?[118] 승리목표는 관우와 남은 자식들인 관흥, 관색, 관은병 3명이 탈출지점에 도달. 승기를 잡은 위군은 관우를 추격하고, 일단 관우 일행은 강가로 도망치려하지만 강가에 도착하면 여몽, 육손, 주연 등 위와 동맹을 맺은 오군까지 관우를 쫓아오는 처절한 탈출이 이어진다.[119] 이후 미방과 부사인이 탈출로가 있다며 관우를 부르지만 가까이 가면 당연히 배신. 이후 서황의 노포와, 하후돈의 습격, 조인의 수비 등 수많은 난관을 뚫고 탈출지점까지 무사히 도착하면 여몽이 병사들을 이끌고 관우 가족을 포위한다.

관우는 함께 싸우겠다는 관색의 목을 때려서 기절시키고 관흥은 조용히 아버지와 이별의 인사를 나눈 다음 기절한 관색은 관은병이 들쳐업고 포위망을 뚫고 도망친다.[120] 관우는 마지막까지 분투하다가 결국 중과부적으로 선채로 죽는다.

IF 모드에서는 지금까지의 분기 조건을 만족하면 서서가 찾아오는데 서서가 위군의 수공을 눈치채고 재빨리 움직여 북영채를 점거하고 사다리차를 깔아 지름길을 만들어 수문으로 쳐들어가 막 수문을 열려던 방덕을 막아 수계를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여기에 방통이 정군산 공략이 끝난 이후 바로 구원군을 이끌고 도달하고, 서서는 성 앞에 노포를 깔아 우주방어를 실시. 한편 왠일인지 살아있는 노숙은 오군을 이끌고 촉을 도우러오지만… 여몽 등 휘하 장수들은 주유의 천하이분을 잊었냐며 신의 따윈 개나 주라면서 노숙의 명령을 쌩까고 번성의 촉군을 공격한다. 근데 문제는 번성 앞에는 서서의 노포가 깔려있다는 거… 알아서 불리한 곳으로 와주시다니 어이쿠 감사 게다가 반동탁 연합 당시 도움을 줬던 장각의 황건당이 관우를 돕기 위해 때맞춰 와준다. 노포들의 도움을 받아 성을 급습하려는 오군은 가볍게 쓸어낼 수 있다. 이후 하후돈이 도착해서 수문으로 향해 다시 수공을 시도하는데 걍 때려잡아주고, 이후 노숙이 지휘하는 남은 오군과 조인이 지휘하는 위군들을 모두 때려잡으면 승리.

대승을 거둔 관우의 승리의 함성은 성도에 있는 유비와 장비에게도 전해진다. 이후 오군의 배신때문에 걱정하는 손상향을 유비가 오군도 무슨 사정이 있을 것이라며 오를 믿는다는 유비의 말과 함께 훈훈한 if 루트 진입. 촉빠의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감격적인 장면. 물론 역사에서는 현시창이기에 더 안타깝기도 하다. 이 분기로 가려면 황건적과 전투할 때 백성을 도와줘야 하고[121], 서주성에서 퇴각하는 적을 다 잡아야 하며[122], 적벽전에서 염상 후 서서를 찾아 퇴각시키고[123], 촉 정벌전에서 방통을 살려내고[124], 정군산 전투에서 조휴를 잡아야 한다.[125]

오나라의 경우 정사 루트로 빠지면 익양 대치를 각색해서 만든 전투[126] 다다음의 합비전투에서 정사루트로 간 후, 유수오 전투를 지나면 번성전투이다. 시작하면 일단 미방과 부사인을 잡아 배신 플래그를 세워놓고[127], 번성 앞에서 방덕을 쓰러뜨리며 깽판치고 있는 관우를 퇴각시키고 투석기로 돌을 던지는 주창까지 퇴각시키고 나면 관평이 수공을 위해 수문으로 돌격하고 관색이 강화무장이 돼서 후방을 막아서는 상황이 전개된다. 그런데 수문을 지키는 우금의 경우 거의 전투 발생하자마자 관평에게 작살나고 수공이 일단 발생하면 상황에 따라 아예 게임오버가 되어버리거나[128] 설사 여몽이 어떻게 살아남아도 답 안나오는 상황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주창 격파와 동시에 전속력으로 달려 어떻게든 관평을 격파해야 한다. 말타고 최단루트로 무조건 달리면 운이 좋을 경우 관색이 관문 폐쇄하기 전에 문 통과하고 관평과 바로 싸울 수 있다.

위의 경우 방덕의 관짝 이벤트 + 하후돈, 서황, 조비, 하후연[129]의 원군 참여 이벤트 영상과 함께 전투가 시작되며, 성의 상황은 수공 + 투석공격으로 인해 개판 5분전인 상황에서 시작된다.

초반의 경우 성 주변에서 병사들이 힘들어한다며 항복을 고민하는 우금 부대[130]를 도와준 뒤 성 내부에서 처절하게 싸우는 조인을 도와 내부의 적들을 제압하며, 그 뒤에는 투석기로 깽판치는 곳을 털거나, 아니면 오의 원군을 노포로 막는 주창[131]과 직접 관문을 닫고 싸우는 관색을 격파한 뒤 다시 투석기를 재가동하는 관흥을 쓰러뜨리고, 그 뒤에는 성으로 직접 러쉬를 오는 관평을 꺾는 식으로 진행된다.

어느 정도 진행이 되면 직접 충차를 꺼내들고 관우가 있는 쪽으로 공격에 들어가는데 이때 원군으로 황충, 마초가 차례대로 등장하며 원군까지 제압한 뒤 관우의 본진으로 가면 관우의 자식들이 직접 단체로 총출동해서 플레이어를 막아서게 되고 이들을 전부 격파할 경우 관우와 마지막 맞다이를 치르게 되며 여기서 관우는 마치 라오우의 내 생애에 한 점의 후회도 없다의 임팩트를 남기고 사망하게 된다.

해당 스테이지의 경우 7편의 위나라 정사 루트의 마지막 스테이지이며, 방덕을 살리는 IF 조건이 있다. 조건 만족 시 방덕이 죽기 직전인 관우에게 찬사의 말을 건네는 추가적인 장면이 등장한다.[132]

맹장전에서는 우금과 방덕, 조인이 주역으로 나오는 외전 맵이 있는데, 여기서는 촉과 오가 동맹으로 번성을 친다. 여기서 위군은 촉이 보낸 전령병을 격파, 오군을 번성으로 유인, 수문을 열어 오군을 날려버리고는 촉군에게 덤터기를 씌워버린다.

7.6. 고우영 삼국지[편집]

고우영 화백이 그린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고우영 화백 특유의 강한 재해석이 들어가 있다. 관우가 여몽의 계략에 속아 고전하는 부분까지는 그런대로 삼국지연의와 비슷한 내용으로 돌아가는데 여기서 제갈량이 관우가 당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 체하였다는 묘사를 집어넣었던 것이다.

제갈량은 천재적인 능력 덕분에 이미 유비군 내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쥐어 잡았지만 작중 관우가 뛰어난 머리와 눈치로 제갈량의 아픈 구석을 콕콕 찌르거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묘사가 종종 나올 때마다 제갈량은 이를 무척 불쾌하게 여기는 등 은근히 유비군 내의 2인자 자리를 다투는 라이벌 관계였다.

예를 들어 작중에서 이러한 떡밥(?)은 계속해서 다루어지고 있었다. 예컨대 적벽의 큰 싸움 이후에, 화용도로 패배한 조조가 도망칠 것을 이미 짐작하였던 제갈량이지만, 장비, 조운 등에게는 군령장을 내려 군사행동을 지시하는 것에 비해 유독 관우에게만큼은 군령장을 주지 않는다. 이에 관우가 어째서 자신에게 군령을 주지 않느냐고 항변하고 이에 두 사람은 서로가 군령장을 내어 목숨을 담보한다. 제갈량은 화용도로 조조가 오지 않으면 목숨을 내어놓기로 하고, 관우는 조조의 목을 거두지 못하면 목숨을 내어놓기로 한 것. 이에 걱정이 된 유비가 군사께서 어떻게 그렇게 행동하였느냐고 묻자 제갈량은 "조조가 대패할 운세이긴 했으나 목숨이 다 할 운세는 아니라 관우의 이름을 높여주고자 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지만 바로 그 다음 장면에서는 관우를 견제하고자 하는 그의 속셈이 그려진다.

이러한 묘사가 계속되는 가운데 마침 관우가 위험에 빠진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 기회에 적의 손을 빌어 라이벌을 제거하고자 했던 것. 가히 충격스러운 묘사가 아닐 수 없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논란과 무수한 떡밥(...)을 불러 일으킨 소재인데 요즘 시점에서 이런 재해석을 평하는 것도 쉽지 않다. 고우영 화백이 삼국지를 그리던 때가 70년대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요즘처럼 삼국지의 역사적 사실에 관한 자료를 얻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연의도 일종의 창작물이니만큼, 그냥 창작물을 재해석한 하나의 관점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적당하다.

물론 이러한 설이 사실이었는가? 라는 질문에는 일고의 가치조차 없다! 제갈량이 관우를 아무리 꺼려한들, 관우와 함께 날려버리기에는 형주는 너무나도 중요한 땅이다. 가뜩이나 잠재력이 중원보다 못한 촉 지방을 기반으로 중원을 평정하려면 형주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과 형주의 요충지들이 없어서는 안 된다. 왜 제갈량의 북벌이 조금만 삐끗해도 실패하는 아슬아슬한 시나리오로 점철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자(...). 단, 고우영 삼국지에서 제갈량은 병만 걸리지 않았으면 천하를 본인 손으로 통일하고도 남았을 괴수이고, 사마의가 가로막자 '어차피 싸울 거 뭘 좀 아는 놈하고 싸워야지' 라고 멘탈을 회복한 다음 사마의를 몇 컷 쓰지도 않고탈탈 털어버린다! 오장원에서 수명이 다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중원 제패. 이 정도로 엄청난 능력자이니 형주와 관우를 세트로 날려버린다는 발상이 가능한지도 모른다. 바꿔 말하면 정상인이라면 결코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다만 고우영의 삼국지는 70년대 최고의 신문연재만화로 인기를 구가하던 작품이었기에 당시 세대의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제갈량이 관우를 배신했다는 설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이 많다. 실제로 연재 당시에도 신문사에 제갈량이 배신한 게 사실이냐고 묻는 연락이 쇄도했다고 한다. 이는 제갈량의 배신이라는 소재의 특이성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극화를 풀어내는 고우영 화백의 능력이 빛을 발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제갈량 등장씬부터 관우와 은연 중에 대립하는 구도가 사실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1] 물론 장강 이북의 양양, 강릉, 남양같은 곳을 가리킨다. 장강 이남의 4군은 그렇지 못하다. 무릉만으로 대표되는 이민족들이 많은 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후한서 지를 보면 인구는 꽤 있었다.[2] 물론 손권은 나중에 교주도 얻지만, 이 땅은 본래 사섭 일족이 다스리며 오나라에 신종하는 자치구역의 성격이 강했다. 본디 남방교역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쓸만한 땅이었으나 손권과 여대가 이 땅을 직속으로 다스려보겠다고 저지른 만행으로 인해 손권 말년부터는 반란의 메카가 되어 별 쓸모없는 땅이 되어 버렸고 오나라 말년에는 진나라에 넘어가기도 했다.[3] 청니 대치 때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중국 위키백과에서는 이때로 적혀있어서 남군 전투 때로 둔다.[4] 본디 임저와 상양은 208년부터 양양에 속했는데 적벽대전 이후 관우에게 호응했던 것으로 보인다. 관우 이후 다시 조위에 넘어갔는지 조예시절에 양양남부도위에 소속된다.[5] 이 내용은 이통전에만 있는데다가 자치통감에는 나오지 않기 때문에 시기가 모호하다. 어쩌면 조인이 1년 후 강릉을 잃고 달아날 때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6] 적벽대전 당시 손권이 3만의 군세를 가지고도 정작 주유, 정보에게 2만만 떼어준것은 손권이 양주의 이런 불온한 움직임을 컨트롤 할 필요성이 있어서였을 것이다.[7] 자세한 것은 아래 참조.[8] 자치통감에 주를 달은 호삼성은 '이 여러군'을 해석하길 유비가 남부 4군(영릉, 장사, 무릉, 계양)을 빌리고 또 강, 한 사이 땅을 빌리려고 한다고 해석했는데 노필은 남양이나 장릉은 조조땅이고 남군과 강하는 오나라가 다스리는데 어떻게 땅을 줄 수 있겠으며 유구 얘기는 영을 세운 땅을 가리키는 것으로, 강남 4군을 이름이 아니라고 이 주석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했다. 왕무횡의 경우엔 한 술 더 떠서 무릉군 잔릉현이 곧 공안이고 유비가 남으로 4군을 거둬들여 병력으로 이를 점거했는데 누가 땅을 줬다는 소리냐, 또 주유는 유비가 경구에 이르렀을 때, 토지로 유비에게 기반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고 그런식으로 말한건 노숙인데 주유가 유비에게 공안을 줬을리가 없지 않느냐며 이건 죄다 망령된 소리다라고 강표전 기록 자체를 깠다. 판단은 알아서.[9] 이를 보아 노숙의 방책은 조조와 직접 맞닿는 부분은 줄이고 유비에게 늘어난 전선을 떠맡겨 손오의 손해를 줄이고 힘을 기르다겠는 의도로 보인다.[10] 이 사건은 강표전에 언급되며 조조의 행동과 함께 주유를 의심하게 만드려는 유비의 행동으로 나온다.[11] 선주전,어떻게 번역하면 손권을 아랫사람으로 삼기엔 어려우니란 번역이 될 수도 있다. 건강실록에는 "손거기의 기운은 두루 넉넉하나 그의 아랫사람이 되기는 어렵다."라고 기록되어 있다.[12] 화살로 어깨죽지 쪽 급소를 맞았다, 당시에부터 부상이 대단히 심해서 조인과 싸우다가 물러났을 정도, 연의에선 이 부상을 가지고 조인을 격파했다고 각색했다.[13] 손권측이 본인들이 얻은 형주 남군땅 인심을 장악하지 못했고 자신들이 형주를 얻음으로서 조조를 형주에서 단독으로 막을 수 있다는 역량이 있다는 사실에 회의적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까놓고 말해서 형주에서 인심을 얻은 유비를 강릉에 두어 조조 상대로 방패를 삼으려고 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14] 이에 관한 것도 아래 시기 참조.[15] 호북성 강릉현 양자강변.[16] 사선으로 읽어야할 것 같지만 한서 지리지에는 사이현으로 읽으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두었다.[17] 적벽대전 이후의 이 부분이 오측 본전 기록에는 전부 누락이라 오서만 보면 유비는 강릉 공략에 아무런 지분도 없으면서 강릉을 그냥 얻은 걸로 착각하게 만들수가 있다. 그래서인지 배송지가 주유전에 오록 주석을 붙어놨긴 하지만.[18] 그러니까 제갈량이 당장 형주는 우리가 먹을거라고 했는데도 손권은 입도 뻥끗 안 했다는 소리다.[19] 위에서도 나오지만 이 기록은 노숙전 본전만 아니라 노숙전 주석 한진춘추의 기록에도 있다. 조익의 주장으로는 '오나라인들이 꾸며낸 사실이 후대 사서들에까지 영향을 주었다!'라고 주장하는 듯 하다.[20] 조익의 주장의 옳고 그름은 둘째치고 일단 촉지 선주전만 보면 '돌려주겠다'는 뉘앙스는 좀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 선주전 기록은 다음과 같다. '건안 20년, 손권이 선주가 이미 익주를 얻어, 사자(오주전에 따르면 제갈근)를 보내 형주를 얻길 원한다고 통보했다. 이때 선주가 말하길 "모름지기 양주(涼州)를 얻으면, 응당 형주를 주겠소." 손권이 이에 분해, 곧 여몽을 파견해 장사, 영릉, 계양 3군을 습격해 탈취하게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형주를 주겠소'라고 번역된 단어는 밑에서도 나오지만 선주전에 '荊州相與'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자치통감에서도 비슷한데 여기서 상여는 '같이 또는 공동으로'의 뜻이 있다. 동아일보 2008년 11월 27일 기사에서 서울대학교 중문학 오수형 교수의 설명.주역(周易) 중 함괘(咸卦)의 단전(彖傳)을 보면, '유상(柔上)하고 강하(剛下)하니 이기감응(二氣感應)하여 상여(相與)한다 - 유가 올라가고 강이 내려와 두 기운이 느껴 응함으로써 서로 더불게 된다.' 라 되어 있다.어쨌거나 선주전 표현대로라면 유비는 '형주에는 자신의 충분한 지분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향후 융중대가 실현되면 동맹을 생각해 양측에서 적절하게 형주를 같이 다스리거나 분할을 생각하고 있었을 여지는 있다. 물론 오주전에선 그런거 없고 유비가 '양주만 먹으면 무조건 다 돌려드리겠습니다'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서술하긴 했는데 자치통감은 두 기록을 종합하면서 아무래도 선주전쪽을 더 취합한 듯 하다.[21] 이에 대해 통감집람(通鑒輯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형주의 동남 문호(門戶)는, 오, 촉의 세력이 필시 다툴 곳이었다. 그러나 두 영웅이 서로 다투고, 조조가 천자를 데리고 제후에게 명령하여, 마침내 평화롭게 한(漢)의 제위를 바꿀 수 있었다. 손권이 진실로 의론에 만족하지 못하여, 사익을 취하는 과오로 인해, 유비가 사양할 수 없었다."[22] 건강실록에 따르면 실제로 1만은 손권이 중군으로 가지고 있었고 오로지 2만명만이 주유와 정보에게 있었다.[23] 이에 대해서 특별한 설명은 없는데 강표전에서 주유가 병력이 적음에 실망하는 유비더러 '님은 우리가 공을 세우는걸 지켜보시라' 라고 했던 기록을 뜻하는 것 같다. 여기서는 유비가 2천명만을 가지고 관망했단 기록이 있기 때문. 이 기록은 손성부터가 오인들이 공을 독차지 하려는 말이라고 대차게 디스했고 자치통감도 강표전의 내용은 기록하되 유비가 주유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 부분과 2천명을 가지고 관망했다는 내용은 제외하고 기록했다.[24] '본시 협력하여 조조에 대항하려고 했던 것은 생각지 않고, 유비에게는 본래 손권에게 빚이 있으며, 손권에게는 유비에 대한 빚이 없다고 한 것이다.'라는 번역이 있다.[25] 무엇보다도 합의가 쉽게 이루어지게 하도록 한 것이다.(즉 촉이 양보한 것이다라는 뜻)이라는 번역이 있다.[26] 이때 여대가 한중을 공격하려고 했던 기록이 있긴하지만 정확히 어떤 목적으로 갔는지는 불명.[27] 정작 쳤는지 안 쳤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오나라에는 관련 기록이 없으며 삼국지집해에서는 오나라에서는 도움을 요청한 적이 없고 유비가 뻥카친 것이라고 했다.[28] 이 셋이 떠난 시점은 정확히 언제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29] 제갈량이 2차로 떠난 부분은 언젠지 확실하지 않은 부분이다.[30] 손권전에선 "나는 지금 양주를 취하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양주를 평정한 후에 곧바로 형주를 오나라에 돌려주겠습니다."라고 말한다.[31] 자치통감에는 손하로 되어있다.[32] 오주전에는 여몽이 손교, 반장과 같이 도착했다고 되어있다.[33] 여기나 위에 있는 여대 얘기는 여대전에만 실린 얘기며 자치통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215~220년 사이에 일어난 것이 확실할 뿐 이때 일어난 일이 아닐 수도 있다.[34] 본래 이름은 노숙성이었으나 후일 기능이 제방으로 바뀜에 따라 이름도 바뀌었다. 국내 사이트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아 검색되지 않지만 구글에서 鲁肃堤라 치면 검색 결과가 나온다.[35] 일단 여기에 넣어두었지만 이때의 일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감녕참고.[36] 근데 유비에 대한 지원으로 따지면 솔직히 오나라보다 유기가 더 많이 해 주었다.당시 유비군 절반이상이 강하태수였던 유기의 군사들이었고 오나라가 군사 보태준 기록은 유비가 장비와 군사 1천명을 오나라측 군사 2천명으로 교환한 기록밖에 없다.[37] 연의에선 주창이다.[38] 217~219년 즈음 오지의 여러 인물들의 기록을 보면 오나라 전체적으로 관우를 치려는 분위기가 강하게 느껴진다. 위나라 배불리는 짓이라느니, 배신이라느니 반대의견 같은 게 전혀 없다. [39] 정작 여몽이 죽고나서 손오는 이전과 같이 합비를 공략해 서주, 예주를 지속적으로 노렸다.[40]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나, 민간 전승에선 관은병이라고 한다.[41] 두습 문서에 자세한 설명이 있다. 사실은 옮기기가 귀찮아서… [42] 절월 역시 이를 위해 어느 정도의 자율권을 부여한 것이라는 것. 관우가 봉수대를 쌓고 언제든 돌아갈 준비를 했다는 기록도 있어서 이런 예방전쟁이 확대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43] 번성 공방전 관련 기록에는 이상하게 촉 수군에 대한 기록은 있는데 번성에 주둔했을 법한 위 수군에 대한 기록이 없다. 어떤일로 없었거나 관우의 수군에 격파되었거나 중 하나일 것이다.[44] 연의에선 주창에게 자맥질 싸움 끝에 사로잡힌다.[45] 물에 빠져 죽거나 관우의 공격에 죽은 위군은 제외한 수치다. 원래 7군의 숫자는 더 많았을 것이다. 자치통감을 번역한 권중달 교수는 중국의 고대병제를 적용해 10만 1500명 정도의 대병으로 추측했으나 이는 좀 높게 잡은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46] 육혼현의 경우 위에서 언급한 손랑이 관우에게 귀속되어 관우의 관인을 받았으며 관우는 그에게 병사들까지 주어 위와 대적하게 했다.[47] 삼보결록주에선 경기, 위황의 난 당시 아예 관우가 강성하여 조조는 업에 가 있고 왕필에게 허도의 사무를 맡겼다는 기록까지 있다.[48] 관우는 배를 타고 공격하였다고 한다.[49] 당연하지만 번성에 있던 관우가 직접 털었을 가능성은 낮다. 관우 휘하의 부하들이 했던지 후방의 미방이 했던지 였을것인데 최훈의 삼국전투기에서는 당시 보급담당자인 미방이 한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이 약탈의 시점에 이미 오나라군이 움직이기 시작하지만 그건 아래에서 얘기하자.[50] 동한무렵, 병사들이 주둔하던 곳을 말할때, 많은 수의 병사가 주둔하던 곳 : 營, 적은 수의 병사가 주둔하던 곳 : 塢라 한다.營은 邊郡(변군: 변방의 군, 국경지역)에 많이 있으며 塢는 內地郡國(안쪽의 군, 국)에 많이 있다. - 중국통사 中 [51] 서황의 자(字) 또한 공명(公明)이다. 참고로 제갈량의 자는 孔明.[52] 서황측이 몇번 화살로 편지를 보내 지원군이 온 사실을 알렸다.[53] 주전파인 자신이 전선에서 떨어져 관우를 안심시키려는 계략이긴 했으나, 실제로도 여몽은 지병이 심해 그해 219년 사망한다. 관우가 경계를 안한데는 이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한다.[54] 나이가 적지는 않았다. 183년생이니 36살.[55] 상관은 영릉지역으로 영릉의 치소인 청릉현 근방이다. 호삼성 주석에 따르면 '오와 촉이 형주를 나누며, 상수를 경계로 삼았기에, 관을 설치했다.'라고 하고 조일청이 말하길 '방여기요 75권에 오, 촉이 형주를 나눠, 상수를 경계로 삼고, 관을 물 위에 설치해서, 상인과 여행객을 통하게 해, 이를 상관이라고 일렀다. 81권에 상구관(湘口關)은 영주부(永州府) 북쪽 10리에 있어, 소 潇, 상 두 물이 합류하는 곳이다.'라고 했으니 해당관은 촉한과 손오의 경계 지역, 혹은 완충지역에 있었으며 이곳을 지나가는 인원을 관리했다고 보인다.[56] 밑에서 우번의 말에서도 나오지만 내응자의 도움이 컸을 가능성이 크다. 호삼성은 미방과 사인이 배반하지 않았다면 관우가 알았을것이라는 설을 내세운다.[57] 부사인이 아니다. 여몽전, 손권전, 계한보신찬에는 모두 사인(士仁. 성이 사, 이름이 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오직 정사 관우전에서만 부사인(傅士仁)이라 표기하고 있는데 정황상 오기의 가능성이 높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58] 譎兵, 기만술에 의한 군사행동[59] 실제로 정사의 주석인 오록 기록에는 미방이 남군성의 군사기물을 태워먹은 실수로 인해 손권과 내통했다고 기록했다.[60] 당연하다. 20여년을 넘게 유비를 섬기고 군주의 인척이기까지 하고 그의 형은 유비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이런 사람이 내통한다는 걸 예측하는 사람이 있었을리가.[61] 60~70 이상 된 노인들[62] 자치통감에는 담안이라고 되어있다. 물론 그럼에도 주석에는 첨이 성이라고 되어있는 상황[63] 大姓 명족, 호족[64] 夷兵, 이민족 군사[65] 연의에서는 맥성에서 관우와 관평의 목을 보고는 충격을 받아 자살한걸로 나온다.[66] 여몽의 급사 자체는 이전부터 앓아온 지병 때문이라고 볼 여지가 있지만 장흠까지 동시에 죽은 만큼 장흠은 이 질병에 희생되었다는 것이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형주 공격에 참전한 또다른 장수 손교도 이 때 사망. 감녕도 이 즈음 사망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215년설과 219년설, 관우를 잡은 후 반장이 감녕의 군대를 이어받았다.)을 보면 역병의 영향이 상당히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67] 사실 무릉같은 경우에는 계속 반란이 일어나 오나라가 통제를 못하는 지경이었다.[68] 다른 말로는 던진다는 과격한 말도 있다.[69] 대표적인 예로 유봉이 지원군을 안 보내준 것을 든다.[70] 물론 유비 역시 입촉 이후에 익양대치, 한중공방전, 익주 정벌 후 혼란했던 익주의 내정정리로 매우 바쁜 상황이었기에 일일히 모든곳에 신경 쓸 상황은 아니긴 했다. 당장 215년 이후 219년 한중공방전의 완료까지 한중-익주 경계에선 지속적인 전투가 벌어졌고 반면 오나라 전선에선 여몽이 속은 형주병탄을 원했지만 겉으로나마 일부러 친분을 다지는 척을 하고 있었던 겉으로만 보면 평화로운 상황이기도 했다. 문제는 이미 관우가 여몽의 속셈을 뻔히 알고 있었고 이 때문에 갈등이 없을수가 없었다는 것.[71] 다만 이 사건 전, 손부인이 유비가 없는 틈을 타서 유선을 납치하여 오로 도망치려했던 사건이 있었다. 다행히 유선은 구해왔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유비측과 손권측 사이에서 결혼의 관한 문제로는 감정이 상할 만큼 상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또 다시 자기 딸을 시집보내라는 말은 관우의 입장에서는 좋게 보일 소지가 없었을 공산이 크다. 그렇다고 이런 식의 대응이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72] 당시 오나라 인사들의 발언을 보면, 오나라에서는 유비는 몰라도 관우가 독단적으로 오나라를 공격할 수도 있다는 위협론은 적지 않게 대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73] 이전에 육손의 협력하겠다는 식의 편지를 보고 육손이 협조적으로 나설거라 오판했는지는 몰라도 오에게 명분을 준건 사실이다.[74] 적벽대전 첫 대면부터가 주유쪽이 그렇게 좋게 나간것도 아니었고 주유가 자기 붙잡아두고 견제하려는걸 이미 제갈량의 파악으로 유비도 뻔히 다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주유를 견제할 이유는 있었다고 할 수 있다.[75] 보면 알겠지만 유비의 경우 낙성에서 붙잡은 장임을 처형하긴 했지만 회유시키려고 하기라도 했고 조조의 경우에도 능력있는 장수면 일단 회유를 해보고 통하면 부하로 삼고 안되면 죽였다.[76] 손권이 이릉을 서릉으로 개명했다. 대략 강릉 서쪽에 위치한다.[77] 물론 거대한 전역인 만큼 모용수를 통한 형주 방면의 부공과 요장의 촉에서 출발하는 진공 역시 존재했으나 전역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쪽은 회수쪽의 주공이었다. 당장 부공을 이끈 요장과 모용수는 부견의 패배 이후 부견을 배신하고 자기네들 나라인 후진후연을 세운다.[78] 심지어 동진 이래 육조 최약의 왕조였다던 조차도 진욱 시절에 10만의 군대를 동원해 회남일대를 차지한적이 있다.[79] 위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당시 여몽이 무슨 생각으로 조위와 촉한을 동시에 상대하며 양번과 영안을 다 먹을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는지 의문스러운 수준이다.[80] 후일 육손이 손권의 명령을 받아 양양을 공격하려다가 사전에 들통나자 시원하게 포기한 케이스도 있고, 주연이 조중을 비롯해서 이 지역을 자주 찔러보았고 번성까지 포위한 적(작피의 역)도 있긴 한데 작피의 역 당시에도 사마의가 바로 군대를 끌고 오자마자 주연은 한달만에 그냥 도주해버린다(...).[81] 형남정벌 후, 이 지역의 최고 책임자가 자기 직속인 여몽에서 선대부터 악연이 있던 대호족 오의사성인 육손으로 바뀐것도 큰 영향을 주었을것이다. 비록 육손은 그럼에도 손권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보였고 손권도 이릉대전 당시 육손에게 전적으로 군권을 위임하는 등 신뢰를 보여주는듯 했지만 후일 여일 사건과 이궁의 변에서도 드러났듯, 실제 손권의 속내는 이릉대전 이후 명망이 높아진 대호족 육손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82] 후일 남송 시절에 벌어진 얘기긴 하지만 남송 역시 몽골의 맹공에 사천, 양번을 잃었지만 나라가 곧바로 망하진 않았고 중심지인 회수, 회남 일대는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기에 맹공의 반격하에 이 지역을 모두 수복하는데 성공한다.[83] 이러면 조조를 손권이 배신한 게 되지만 관우 추격전 말미에 손권이 분명 수작질을 부릴거라 예상하는 위나라 반응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조조에게 손권이 진심으로 충성을 바치고 조조가 손권을 믿을수 있다고는 조조나 손권 본인을 비롯해 지나가던 개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조조는 굳이 관우 잡겠다고 회남의 하후돈과 장료까지 빼버렸다.[84] 물론 이렇게 되면 문제적 인물(...)인 관우도 북쪽에서 북벌에 투입되었을 터이므로 굳이 관우를 죽일 상황이 아예 생기지 않았을수도 있다.[85] 물론 각각의 정통론적인 관점으로 따지면 실상은 이것보다 복잡해지지만 일단 대충 이렇게 설명해두자.[86] 적어도 208년 적벽대전 이후 조정을 장악한 조조에 항복하지는 의론이 주전파들의 반발로 완전히 꺾인 후 손오정권은 그렇다. 이후 후한이 완전히 망할때까지 손권은 조조 상대로 한때는 굽히고 한땐 대립하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계속 유지한다.[87] 여몽의 식견은 전술적으로는 탁월했지만, 전략적으로는 조금 모자란 부분이 보인다. 좀 더 장기적으로 보자면 당시 촉은 한중 공방전에서 승리를 거둬 승승장구하고 있었고, 조조는 여러모로 흔들리는 상황이었다. 촉의 우선순위가 오가 아닌 위인 이상, 이 기세로 5년 정도만 기다리면 촉은 알아서 위와 결전을 치루게 될테고, 촉이 위와 대치하는 틈을 노려 어느쪽으로든 일을 도모하는 쪽이 오히려 더 대업을 진행하기가 수월했을 것이었다.[88] 심지어 손견은 18로 제후에 참가하기 위해 임지를 이탈한 바가 있고, 비록 거짓 문서에 낚인 것이라고는 하나 직속 상관인 당시 형주 자사 왕예를 살해한 바도 있다.[89] 물론 배송지는 이렇게 한주 수준으로 인구가 떨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으나 어차피 이들이 욕하는 것은 후한서 군국지와 비교해서 형주 인구가 떨어졌다고 욕하는 것이다. 즉, 배송지 말대로 해당 사료들을 믿을 수 없다고 하게 되면 인구가 줄었다고 욕하는 비교 자체가 잘못된 것.[90] 자치통감에서 이릉대전의 기사 뒤에 마량도 오계만에서 죽었다고 표기하고 있다.[91] 무릉만 보다는 면중만일 가능성이 높기에 따로 서술[92] 유비가 통치하던 시절에도 황개가 무릉만이를 물리치는 등 유비가 그들을 건드린 기록은 없지만 이미 무릉만이들은 통치세력에 반발했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이것은 당시 무릉이 손권 땅이라고 하거나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215년 이후 기록이라고 하면 해결된다.[93] 이 부분에 대해 자치통감 호삼성의 주석에선 둘러댔다는 설을 지지한다.[94] 사실 여몽이 관우는 용맹하다던가, 학문을 좋아하고 강직하고 웅대하고 남에 위에 서길 좋아한다던가, 매섭고 빼어난 장수라고 판단했다던가 하는식으로 관우에 대해서 고평가한 적은 전에도 있었다. 관우를 상대로 겉으로나마 우호를 닦아 기회를 엿본것도 이런 관우가 다스리는 형주에서 오를 철저히 경계하고 방비하니 이를 방심시키기 위함이었다.[95] 그러나 사인은 오서 측 기록해보면 분명 성을 처음엔 지켰다고 되어 있다. 분명 관우랑 사이가 안 좋은건 사실이었긴 하나 무조건 배신자로 몰기엔 무리가 있다.[96] 연의에서는 그 좌우에 있던 장수가 좌함이라 적고 있다.[97] 화양국지에 이때라고 기록해두고 있다.[98] 손광, 손분, 유수구 전투 후에 한 번 더[99] 그렇기에 성공 가능성이 확 떨어졌다는 점은 부인 할 수 없다. 이후 촉한의 북벌 루트는 누가 봐도 눈에 들어오는 뻔한 공격루트인 장안-양옹주 방향으로 제한되었고, 그 루트는 다른데 신경 안쓰고 그곳에만 집중한 위에 의해 철저히 요새화되어 결국 번번히 막혀버리게 된다. 정말이지 위를 흔들수 있을 제2전선만 있었어도 결과는 충분히 달라졌을 것이다. 실제로 제갈량의 북벌 중 1차 북벌이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고 하는 이유는 기습의 이점도 있지만, 맹달을 회유해서 얻은 상용을 통해 양면 공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100] 그외에도 여러가지 요인이 있었을 것이다. 하필이면 이 시기에 관우를 비롯해 장비, 황충, 마초, 법정 등 뛰어난 장수와 모사들이 연이어 세상을 떴고 자신 역시 이젠 꽤나 많은 나이였다. 여러가지로 후계인 유선을 생각해서라도 꺾은 분위기 환기와 안정된 기반을 남겨야 한다는 일념 역시 있었을 것이다.[101] 서황의 경우 손권의 뒷치기로 포위가 풀리자 비겁한 짓이라고 분노하기까지 한다. 하후돈의 손권이 동맹만 아니었다면 관우를 구하러 갈 기세라고 생각. 장료의 경우 관우 사후 손의 굳은 살을 보며 관우를 따라잡기 위해 노력했음을 고백한다.[102] 미방의 경우는 오히려 주군이랑 을 따라 촉나라에 가서 한중공방전에 참전중이다[103] 조인의 경우 그놈의 무력 때문에 하후돈에게 밀리고, 장료에게 치이며 만총은 순유에게 밀려서 제대로 크지 못하는 케이스가 많다.[104] 이 이벤트에서 방덕은 죽는다.[105] 여몽 부대를 조지던가(관평이 무력이 같으므로 일기토를 받아주기 때문에 일기토 추천), 복병으로 30턴을 버티면 된다.[106] 10만을 꽉 채웠을 경우에는 관우 4부대 주창 2부대 관평 2부대 신무장(플레이어) 2부대씩 각각 2000병사를 데리고있는데 저쪽은 10000병사가 9부대고 장수들도 여몽, 육손 등등이라 이길수 없다.[107] 유비, 제갈량, 조운, 장비, 황충의 부대가 각각 병력과 사기가 최대치인 중고급 병과를 갖춰 나타나는데다, 살아남아있던 부대들의 병력도 5000까지 회복시켜준다![108] 저 대사가 뜰 때쯤엔 관평과 주창도 빈사거나 퇴각한 상태다. 플레이어가 관우를 하지 않는 이상 저 대사 뜨고 나서 관우를 방치하면 몇초도 안돼서 죽는다. 그것도 초급 난이도에서.[109] 10무기는 그나마 조건이라도 단순하지, 11무기는 조건도 까다롭기 관우가 이리저리 뛰어야 하는데다가 운까지 따라야 한다. 아예 구 마왕넷 공략 첫 줄에서 '패드 안집어던진 당신은 성인군자'라고 했다…[110] 여기서는 관우는 여포처럼 빨간 오오라의 강화무장이다. [111] 플레이어가 관우라면 관평이 본진에 남는다.[112] 관흥, 장성채, 유비, 장비 등등.[113] 격파수를 좀더 올리고 싶다면 서황은 내버려두고 다른 장수들을 잡을 수도 있다. 참고로 그것도 너무 오래 끌지 말 것. 7분 동안 수공 이벤트 일으키지 않으면 실패(!!)하고 일반적인 공성전으로 성문을 뚫어야한다. 그리고 전공도 같이 날아간다 [114] 안습하게도 미방과 부사인은 배반 이벤트를 보지 않아서 둘이 아군으로 남아있어도 수공 이벤트가 발생하면 같이 소멸한다.(...) [115] 관우를 지켜야 하기 때문.[116] 진수의 대표적 오류로 뽑히는 여포를 관우로 해석한 결과이긴하지만 너무 나갔다(…) [117] 이것 덕분에 방덕이 아예 묻혀버렸다는 말도 있다. 그나마 6 맹장전에서 다시 재참전하여 맹장전 전용 시나리오에서 나왔으니 다행이지...[118] 실제로 오군,위군 버전 번성전투에서는 촉군이 수공을 가한다. 좀더 전투를 드라마틱하게 만들려고 이렇게 한 듯.[119] 이때 방통이 살아있어서 원군이 도착한다고 해도 수공 때문에 길이 막혀 도와주러 오지도 못하고 손가락만 빨고 있다… 분명 지도에는 물에 안 잠긴 길이 보이는데![120] 이 장면은 서주방어전에서 관우가 유비와 장비를 대피시키고 홀로 곽가의 복병에 맞서다 붙잡히는 장면과 흡사하다. 전투 시작전에 한 병사가 관장군은 천하무적이지만 서주때와 같은 경우도 있다며 불안해하는데 이게 복선인 셈. 따라서 해당 이벤트를 보지 않는 것이 번성에서 관우가 살아남는 IF 루트 진입 조건중 하나다. 반대로 해당 이벤트를 보는 것이 관도대전의 돌입조건이기 때문에 관도대전을 했다면 무조건 사실루트로 간다고 보면 된다.[121] 이 이벤트에서 장각이 유비의 인덕을 보고 감복한다. 어떻게 보면 여기서부터 30여년의 복선...[122] 간혹 다 잡아도 이벤트가 나온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경우는 적 원군이 덜 나온 상태에서 퇴각 이벤트를 띄웠거나 곽가의 퇴각 명령 이전에 털었기 때문이다. 잡아야 하는 적의 부대는 2부대씩 네번 등장하는 8부대이며, 곽가의 퇴각 명령이 뜨고 퇴각하기 시작할 때부터 족쳐야 한다.[123] 적벽 염상 이후 유비가 "서서는 어떻게 되었지?" 라고 말하면서 걱정하는 대사가 나오는데, 이 대사 이후 플레이어가 직접 최북단 선단에 혼자 있는 서서에게 다가가야 한다.[124] 방통이 가는 낙봉파 루트를 미니맵상 자세히 보면 검게 칠해져 있는 부분이 있다. 그곳으로 신속히 이동해서 방통이 당도하기 전 장임을 발견해야 한다. 물론 본인이 방통이면 시간적 여유가 넘치니까 주변 적을 다 정리하고 가도록 하자.[125] 본인이 직접 잡아내지 않더라도 퇴각할때 지가 순순히 말하고 퇴각한다.[126] 관우가 오나라에게 형주를 안 돌려주고 무례하게 굴자 노숙이 군대를 이끌고 형주로 들어가 관우를 박살내고 형주를 일단 관우가 가지고 있되 위를 공격하는데 사용해달라는 약속을 맺고 돌아온다. 스테이지 이름은 그냥 형주의 전투.[127] 오군 조우시 초고속으로 맵에서 도망치므로 재빠르게 잡아야 한다.[128] 수공 발생시 다른데서 헤매고 있는 경우 여몽이 수공 발생과 동시에 죽어버린다.[129] 정군산 전투에서 황충이 천탕산을 점거하기 전에 패퇴시키면 하후연이 생존해 번성에 등장한다.[130] 플레이어블이 되어 캐릭성이 확립된 7편 맹장전과의 연동에서부터 이런 모습이 나온다. 그냥 7편으로만 하면 얄짤 없다.[131] 굳이 직접 플레이어가 가지 않아도 조비가 알아서 털어준다.[132] 전투 진행 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전령이 직접 방덕님께서 고전중입니다! 라는 말을 하는데, 이때 방덕과 대결하는 촉군을 격파하면 된다. 수문 근처에 있는지라 그렇게 찾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