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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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국군주(皇帝)
1.1. 어원1.2. 동아시아 한자문화권
1.2.1. 현대
1.2.1.1. 신한제국
1.3. 유럽
1.3.1. 고대 로마1.3.2. 중세
1.3.2.1. 조건 1 : 로마 황제의 후계자1.3.2.2. 조건 2 : 기독교의 보호자
1.3.3. 근대 이후
1.3.3.1. 신성로마제국의 선출황제1.3.3.2. 19세기 유럽 - 나폴레옹과 그 이후1.3.3.3. 편법으로 황제가 되는 방법1.3.3.4. 19세기 아메리카 및 유럽에서 황제가 있었던 국가들
1.4. 다른 문화권의 황제들1.5. 기타 황제로 쳐주기 미묘한 사례1.6. 가짜(사칭) 황제
1.6.1. 일본1.6.2. 중국1.6.3. 러시아1.6.4. 미국
1.7. 황제라는 별명을 가진 실존 인물1.8. 황제 지위에 오른 가공 인물
2. 중국 신화의 황제(黃帝) 헌원씨3. 황제(皇帝)의 동생4. 작약만가 : 서리꽃의 등장인물

1. 제국군주(皇帝)[편집]

자기 휘하의 직할지와 영지를 통치하는 제후를 동시에 거느리고 다스리는 군주(君主).

일반적인 이라는 군주와 달리, 자기 밑에 신하로서 왕을 둘 수 있다는 점이 황제와 왕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 일단 자신의 휘하에 왕을 신하로 둘 정도면, 그 영토의 스케일이 다를테니까 말이다. 영어단어인 Emperor의 번역을 위해 쓰이는 단어이기도 하다. 중국에서는 천자(天子)[2]라고도 한다. 일본의 천황(天皇)은 황제급이다. 사실, 상징과 종교중심의 천황과 정치권력중심의 황제와는 그 의미와 역할이 조금 많이 다르며, 근대에 와서도, 정치권력을 가지지 않았다. 다만, 아래에 서술되어 있듯이 황제와 Emperor의 개념은 완전히 같지 않다. 또한 서구권의 황제는 제국의 통치자가 황제일 필요는 없었다. 그 국가가 미국이나 러시아 처럼 강하다면 제국칭호를 써도 된다.

실제로 여러 왕국을 지배하지 않아도 황제의 호칭을 쓰는 경우도 많다. 그럴 경우 보통 자기 아들 등 핏줄들에게 왕의 칭호를 준다. 과거 대한제국이나 현재의 일본이 그런 예라 할 수 있다. 자국이 세계의 중심이고 누구를 따르는 것이 아닌, 누군가를 이끄는 강대국임을 자부하기 위해서다.

중국도 보통 자기 아들 등 핏줄들에게 왕의 칭호를 주기 때문이고 자국식 체계에 익숙한 일반인들 인식도 고려하기 때문이다. 경우는 좀 다르지만 군 계급 소좌를 한국에서는 소령이라고 번역하는 것과 같다.
예전에 어느 위키러가 중국에선 한국 사극의 조선의 왕을 황제라고 번역한다고 했는데 이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대다수 사극은 조선 국왕이라고 표기하지 조선 황제라고 하지 않는다.중국에선 수준 미달 통역사가 한국 드라마 번역하는 사례는 흔하다

이 외에 황제를 아시아권에선 보통 황제라는 표준어(?)가 정해져 있음에도 천자나 황상 같이 뭔가 다른 단어로 돌려서 부르기도 했으며[3] 유럽권에선 역사상 첫 황제 국가인 로마 제국의 경우 초기에는 임페라토르나 카이사르 같은 단어들이 나오지만 후에는 임페라토르로 굳어지고 카이사르는 동의어처럼 사용하였다.

1.1. 어원[편집]

최초로 중국 전토를 통일한 진 시황제 영정(嬴政)이 새로운 통일 국가의 수장에 어울리도록 새로 만든 칭호. 본래 진시황 이전에는 왕이 지금의 황제의 의미와 비슷했고, 왕을 천자라 했으며(주나라가 천자국을 했다) 그 밑의 군주들을 제후, 공이라 불렀다. 그러나 전국시대 말기에 그 제후와 공들이 너도나도 왕을 칭하게 되자, 이 왕들을 모조리 정복한 시황제가 새롭게 한 급 올려서 만든 지위다.그리고 나중에는 너도나도 황제를 칭하게 된다. 나중에 항우와 유방이 일어나면서 진나라가 쇠락했을 때는 진나라 군주가 자진해서 왕으로 직위를 낮췄다.

황(皇)은 고대에는 왕(王)의 이음동의자였으며, 제(帝)는 상나라 때부터 군주를 가리키는 표현이긴 했으나 보통은 신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당장 옥황상제나 현대 기독교 하나님의 번역어로서 중국에서 사용되는 상제(上帝)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황제라는 단어 자체가 원래 위대한(皇) 하느님(帝)이라는 뜻.[4] 주나라 이후 중국이 점점 인문화되다가, 시황제 시기에 이르러서는 이 황제라는 칭호가 신격화의 의미를 지니지 않게 되었다.

사기의 "진시황본기"에 의하면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작은 나라 하나의 수장의 명칭으로 쓰인 왕(王)을 대신해서 천하의 지배자를 지칭하기에 적합한 명칭을 올리도록 이사(李斯)를 비롯한 신하들에게 요구했고, 이에 신하들이 천황(天皇)--??-, 지황(地皇), 태황(泰皇)중에 가장 존귀한 태황(泰皇)이라면서 태황이라는 호칭을 바치자, 이를 거절하고 태황의 황과 신을 뜻하던 제를 붙여 직접 만든 것이 황제(皇帝)의 호칭이라고 한다. 그 이전에도 삼황오제나 황천상제(皇天上帝) 등의 말에서 보듯이 황(皇)이라는 말과 제(帝)라는 말이 각각 사용되었지만, '황제'라는 단어를 만든 것은 진시황이 처음이다. 그리고 황제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면서 오히려 황(皇)과 제(帝)는 황제라는 말의 약자로 사용하게 되었다.

참고로 진시황 사후 진 제국의 수도를 점령했던 항우는 황제라는 호칭 대신 - 명목상 초(楚)회왕의 신하였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 스스로를 초패왕이라 칭하고, 초회왕 웅심은 의제(義帝)로 올렸다. 초한지에 보면 범증이 '패'라는 글자에는 도덕적 정통성이 깃들어 있지 않다며 반대하는 대목이 나온다. 즉 패왕과 어원이 닿는다는 말은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황제는 "천하를 통치하는 자"이고 패왕은 "힘으로써 지배하는 자"라고 보면 되겠다.

황제를 구성하는 두 단어인 황과 제 사이에서도 의미 차이가 있다. 그런데 기원부터가 왕(王)의 이체자였던 황(皇)보다 신격 상제(上帝)와 연결성이 있는 제(帝) 쪽이 더 강렬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전설상의 삼황오제도 삼황은 매우 추상적인 존재이지만 오제는 대단히 구체적인 존재로 묘시되고 있다. 즉, 황은 권위는 있지만 추상적으로 위대한 존재라는 개념이며, 제는 실질적인 통치자로서의 개념이 강한 것이다.

한나라 시대에 황제의 아버지로서 명목상의 존칭을 받을 때는 태상황이라고 불렀지 '제'를 붙이지 않았다. 한서의 안사고 주석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천자의 부친이므로 '황'이라고 한다.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므로 '제'라고 하지 않는다." 또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있을 때는 태상황제라고 불렸다. 이처럼 황과 제 양자가 거의 동격이기는 하나 실제로 '황'은 수식어에 가깝고, '제' 쪽에 더 실질적인 권한의 의미가 부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위와 같은 이유로 조선에서는 황(皇)은 왕(王)과 혼용해서 썼으나 제(帝)는 사용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영조경종을 추억하며 '황형(皇兄)'으로 칭했던걸 들수 있다.

여담으로 무협소설에서는 황(皇)을 제(帝)보다 높다고 주장하는 경향(예를 들여 열혈강호)이 있지만 실제로 어느 쪽이 높지는 않다.

1.2. 동아시아 한자문화권[편집]

진시황이 스스로 시황제(始皇帝)라 칭한 건 자신의 계승자들이 2대 황제, 3대 황제 하는 식으로 이어질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진제국이 예상보다 빨리 망해버리는 바람에 그러한 생각은 계승되지 못했고, 이후 한 왕조에서부터는 한무제광무제니 하는 식으로 시호와 묘호로 칭한다.

중국의 황제 개념은 원칙상으로는 '천하의 지배자'지만, 실제로는 중국의 일부 지역을 장악하고, 이를 유지할 능력만 있다면 개나 소나 황제를 칭하는 일이 잦았다. 물론 이 같은 잡황제지방의 자칭 황제들은 공식 기록에서는 지역명+왕(또는 주主) 혹은 본명으로 기록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황하 유역의 '북조'와 양자강 유역의 '남조'가 대립하는 경우처럼 특정 국가를 정통으로 확고히 보기 어려운 경우, 심지어 남북이 각기 공식 기록을 남긴 경우 서로 상대방을 참칭 황제라 서술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위진남북조의 경우 삼국의 정통성이 한나라로부터 양위받은 위나라에 있는 것인가, 유씨의 황통을 가진 촉나라에 있는 것인가 하는 해묵은 난제부터 시작해 천하를 통일한 수나라는 북조인데 왜 정통성을 남조에 두어 남북조를 이른바 육조(六朝)시대라 칭하는 것인가 하는 논란. 이 부분은 위(후에 진이 되는)나라가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정통 사서의 경향때문인데 이 진나라는 이후 십육국 시대에 밀려나 남조의 시작인 동진이 되었고 이 때문에 이후 수에서 통일한 뒤 정통성을 얻고자 사용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진짜로 천하의 지배자로서 중국을 지배하는 것을 넘어 주변국가에 조공을 받은 경우도 여럿 있는데 당장 한국인들의 인식하는 거대한 제국을 통치하는 유일무이한 지배자로서의 황제라는 인식이 지배적인 것에는 옆나라 중국의 황제가 큰 기여를 하였으며 진짜로 통일된 거대 제국을 지배하며 수많은 원정을 감행해 진정한 대륙의 기상을 세계에 떨친 중국황제들도 여럿 존재하였다. 대표적으로 정화의 원정으로 세계에 중화 제국의 국력을 과시하고 위상을 떨친 영락제,

동아시아(동양권)의 황제는 휘하에 을 둘 수 있었다. 군주를 휘하에 두는 군주가 바로 황제인 것이다. 하지만 휘하에 두는 왕이, 왕권(王權)을 가진 군주가 아닌 황제의 아들중에서 후계자인 태자(太子)를 제외한 다른 아들들에게 주는 작위로서의 왕도 존재했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이 경우가 더 많았다. 왜냐하면 주나라의 봉건제가 무너진 후 전한의 군국제를 거치며, 전면적인 중앙집권하의 군현제가 이루어지면서 독자적인 왕권을 지닌 왕들은 황제권에 심각하게 위협이 되기 때문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이렇게 독자적인 왕권을 지닌 군주로서의 왕들은 반란의 소지가 농후했는데, 전한의 오초칠국의 난, 서진의 팔왕의 난, 청나라 초기의 삼번의 난 등등 독자적인 왕권을 지닌 왕들은 황제의 중앙집권화에 심각한 위협이 되기 때문에, 중국역사에서는 개판이 아니고 멀쩡하게 돌아가는 나라라면 작위로서의 왕이 더 많았다.

동아시아의 황제는 천명을 받아 '천하'를 다스리는 존재라면, 왕은 '나라'를 다스리는 자였다. 물론 명분상 중화사상에 입각한 중국천하의 지배자이지, 실제로 천하를 지배한 것은 아니었고 황제는 타국으로부터 조공을 받고 명목상으로 다른 나라의 왕들을 승인하는 형식을 취했다.

황제가 내리는 명령은 칙(勅)이라고 부른다. 유교문화권인 동아시아에서 황제와 왕은 구별과 예가 엄격하게 때문에 쓰이는 한자부터 달랐다. 우리나라에서는 구한말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명목상 황제국이 된 후에야 대내외에 공식적으로 이 표현을 사용했다. 사극에서 흔히 나오는 어명보다 당연히 윗단계 표현이다.

황제가 내리는 명령을 담은 칙서(勅書)는 보통 신하를 통해서 전달했는데, 이를 성지(聖旨)로 전달하여 그 명을 받드는 신하는 황제가 실제로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무릎을 꿇고 받들었다. 이건 왕이 내리는 교서(敎書)도 마찬가지일듯...

역사를 설명할 때 황제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진나라가 얼마 못가 쓰러졌지만 최초로 중국을 통일했다는 중요한 아이콘이 되었고, 이후 한나라도 400여년간 통치하면서 중국에서 최고의 직업 = 황제 라는 공식을 굳혔다. 한나라 이후로는 환난이 와도 옛날과 같이 뿔뿔이 흩어져서 살기 보단, 서로 어떻게 해서든지 잡아먹어서 자신이 킹왕짱이 되겠다는 사명으로 서로 치고 박고 하다가 결국 다시 하나의 국가로 모이곤 했다. (먼 옛날 요순시대의 추억도 있었을 것이다.)

즉, 황제라는 자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중화 세계 1인자로서 사실상 중국의 정체성의 중심이다. 황제와 한나라가 없었다면 유럽처럼 수많은 국가들이 지금까지도 서로 치고박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국이 공산주의 치하에서 과거의 유산들이 철저히 탄압받은 결과, 현대 중국에서는 절대적인 최고의 자리를 의미하는 '황제', 전제군주제가 비난받는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의 국가에 하나의 지도자'라는 절대적인 원칙은 변하지 않았으므로 지금의 중국 공산당이 사실상 황제의 권위를 이어받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특이하게 황제가 다른 나라 황제를 제후처럼 책봉하는 경우도 있긴 했다. 금나라남송 황제를 책봉했다(...). 금은 송나라를 완전히 흡수·제압하고 싶었지만 중국 전역을 완전히 제압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송나라 황제를 인정하되 자기네 황제가 책봉하는 방식을 썼던 것. 송나라로서는 굴욕적이지만 전쟁의 종결과 휘종의 유해와 고종의 생모 위씨의 반환을 위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5] 금나라는 송나라 외에도 괴뢰국인 초(楚)나라[6]와 제(齊)나라[7]를 세워 각각 황제를 책봉했었다. 금나라가 북송을 멸망시켰을 때 새로 점령한 장강 이북 지역의 한족들을 직접 통치할 자신이 없어서 대신 북송의 신하였던 장방창(張邦昌)과 유예(劉豫)를 각각 괴뢰 황제로 책봉했던 것. 그런데 초나라 황제로 책봉된 장방창[8]은 금나라 군대가 물러간 뒤 남송으로 도망쳐 버려 초나라 건국이 취소됐고, 유예는 어쨌든 제나라 황제로 버텼으나 남송에 털렸고 결국 금·남송 간 합의에 따라 폐지된다(...).[9] 한편, 근대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의 경우 책봉의 형식을 쓰진 않았지만 사실상 일본에서 푸이를 만주국 황제로 책봉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1.2.1. 현대[편집]

1.2.1.1. 신한제국[편집]
* 고조혜황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3. 유럽[편집]

1.3.1. 고대 로마[편집]

유럽의 황제는 동아시아와 개념이 전혀 다르다. 동아시아의 황제는 철저히 혈통과 종법제도에 근거한 정통성을 강조했다. 반면에, 로마 제국의 황제는 전통과 법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으며, 신권 또한 동아시아보다 강해서 황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다. 동아시아의 황제=최고 종교인[10]인데 반해서 강력한 권력을 가져서 우상화되는 최고 시민인 로마 제국 황제[11]와는 개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설상가상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면서 독자적 종교 권력(교황)이 너무 강력해서 오히려 신권을 기반으로 하는 왕권강화가 더 힘들게 되었다. 유럽권에서는 뒤늦게서야 주장하게 된 것은 종교의 힘이 너무나 막강해서 한 것이었고, 이후에 왕권이 종교의 힘을 어느정도 제압하고 나서야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보통 다른 나라에서는 황제, 그리고 그 다음 격인 왕이라도 일단 멍청이가 보좌에 앉더라도 군주 혈통이라면 밑의 신하들이 알아서 다 하겠지? 정도가 군주 개념의 근본이었던 반면, 유럽에선 힘만 있으면 교체 가능한 존재였다. 이는 유럽 국가들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로마 제국의 특징에서 기인한 것으로, 로마에서는 황제가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고 군림하면서 중앙집권을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혈통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혈통 말고도 제위에 오를 방법이 있어 상대적으로 그렇게 느껴졌을 뿐, 기본적으로 왕조 국가에서 혈통에 의한 정통성은 경시될 수 없었다.

더 자세히 들어간다면 국가의 크기가 커지고 로마 시민의 숫자가 폭증하면서 로마 공화정이 시민들의 총의를 정상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고 힘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세력을 동원, 포로 로마노에 전체 로마 시민에 비하면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 일만 명을 자신의사람들로 채울 수 있다면 국가 전체의 정책을 입맛대로 바꿔버릴 수 있었으므로 로마 공화정 말기에 이르면 지지자들끼리 유혈사태가 일어나는 것은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이런 공화정 말기의 대혼란을 종식한 아우구스투스는 이러한 혼란을 근본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하여 공화정 체제 자체를 포기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그 카이사르 조차도 로마에서 가장 강한 세력 일이언정 전체를 제대로 제압하지는 못했고 결국에는 (자신이 조금만 조심했어도 피했겠지만) 자신이 당하기까지 하였으므로 정면으로 밀고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에게 종신 호민관 특권(Tribunicia Potestas)과 임기 제한없는 군단 지휘권(Imperium Maius) 두가지를 얻어낸다. 이 두가지 특권은 아우구스투스 이후로 자손들에게 계속 상속되었으며, 황제들은 광대한 직할령에서 나오는 막대한 자금력과 군사력, 구 체제의 권위를 더해서 로마 제국 전체를 통치할 수 있었다. 이렇듯 법적으로는 여러 시민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실제로는 초월적 지위를 누리는 특성을 고려해 아우구스투스의 제정을 원수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특성을 가지고 출발하고 있었고 로마 황제는 아우구스투스 이후에도 로마 전체를 제압 할 정도로 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직위는 매우 불안정한데다 아우구스투스의 가문도 오래 권력을 가지지 못하고 중간에 갈려나가고 그 이후에는 다른 가문 또는 계파들에서 황제가 배출되어왔기 때문에 혈통의 의한 정통성이나 안정성 등 안정적인 기반유지를 위한 사전정지 작업이 제대로 되지 않은, 공화정말기의 그 혼란의 불씨가 아직 잠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무슨 이유이건 황제의 권위가 약해지게 되면 황제를 자칭하는 야심가들이 발호할 수 밖에 없었고, 군인황제 시대에 그 혼란은 절정에 달한다.

군인황제 시대의 혼란을 누르고 로마 제국 전체에 자신의 권위를 확립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를 넷으로 늘려 각각의 황제가 상대적으로 좁은 지역에서 보다 밀도 높은 권한을 행사하도록 하고, 대신 황제 간의 서열을 확고히 하여 기존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가 현직에 있을 때는 그 자신의 권위가 사두정치를 유지시켰고, 그가 은퇴한 이후에는 그의 후임인 갈레리아누스가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갈레리아누스마저 급사한 뒤에는 네 명의 황제는 동등한 위치가 되어 혼란이 다시 시작되었다.

결국 다른 황제들과 자칭 황제들을 격파하고 다시 정국을 안정시킨 콘스탄티누스는 동방의 군주제를 로마에 맞게 벤처마킹하고 어떻게든 황제자리를 안정화시킬려고 하였고 종교적인 면에서도 황제자리를 굳히기 위해 황제의 자리에 그리스도교의 보호자라는 권한을 추가하였다. 아예 콘스탄티노플이라는, 동방의 요충지로 이사를 가는 것은 덤. 이렇게 해서 동로마는 어떻게 천 년을 버티게 되었지만 서로마는 그게 안되서 멸망 할 때까지 이것이 나아지지 않았다. 이 이후에도 구 서로마 제국령의 황제는 근본적으로는 힘있는 자 A 그 이상으로 가지 못하여 영국 사절은 중국 황제에게 삼궤구고두의 예를 차려야 한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이것은 그런맥락이 아닌 문화적 차이 또는 상대성의 문제이지만...

이러한 로마식 황제 제도는 이 후 다른 유럽 왕국들과 제국들의 군주제도에도 영향을 크게 끼쳐서, 유럽의 군주제도는 동아시아인이 보기에는 굉장히 이질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다. 때문에 유럽 문화 배경의 창작물이나 역사물을 볼때 동아시아인들은 꽤 미묘한 느낌을 받는다. 한 국가 안에서 XX왕조 XX왕조 하는식의 여러 왕조가 있다든지[12], 왕실의 혈통이 끊기자 외국에 있는 왕실의 먼 친척을 모셔와 왕으로 삼는다던지[13]

1.3.2. 중세[편집]

서로마 제국이 붕괴한 뒤에 생긴 유럽의 황제는 2가지 필요 요건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로마 황제(혹은 그 후계자)라는 타이틀과 그리스도교의 보호자로써 교회에게 인정받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폴레옹 시대 이전까지 서유럽에서는 신성로마제국황제가 서유럽 세계에서 유일한 황제로 인정받았다.

단 국가 자체가 로마 제국 그 자체인 동로마 제국은 중세 처음부터 끝까지 황제이자 제국으로 인정받았다.
1.3.2.1. 조건 1 : 로마 황제의 후계자[편집]
로마의 후계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전 그리스도교 세계에는 단 1명의 황제가 존재해야 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황제의 수는 불어나기 시작했다.) 다니엘서로 대표되는 4마리의 짐승 예언에 의하면 지상에는 4개의 거대 제국이 차례로 존재하며, 로마 제국은 그 마지막 제국이라고 여겼다. 온 유럽 세계의 제국은 로마 제국이 마지막이어야 했고, 그 제국이 멸망하면 바로 찾아올 천년왕국을 준비하기 위해 로마 황제는 계속 유지될 필요가 있었다. 로마 제국이 동서로 갈라진 이후에 서로마의 명장 스틸리코가 꾸준히 로마 제국의 재통합을 노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고, 마찬가지로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로마를 수복한 이유도 진정한 로마 황제가 되기 위해서였다.

중세 초기에는 동방에 잔존한 동로마 제국그리스도교 세계의 유일한 황제 국가였으나, 이미 서유럽에서 영향력을 잃은 동로마 황제의 서방 영토에 대한 지배권은 형식 뿐이었다. 그러던 중 800년 성탄 전야에 교황으로부터 프랑크 왕국의 국왕 카롤루스가 망한지 300년도 넘은 서로마 제국의 제위를 넘겨받으면서 상황이 급변하였다. 이 사건을 동로마 제국 측에서는 완전히 무시했으나, 이후 카롤루스 대제불가리아와의 전쟁으로 힘겨워하는 동로마 황제 미카일 1세로부터 811년 황제 자리를 승인받으면서 유럽의 황제 자리는 공적으로 이 되었다. 당시 서방의 황제는 단지 황제일 뿐이며, 로마 황제는 아니라는 조건을 달긴 했지만, 당대인들에게는 명실상부히 두 제국이 존재하게 된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1세기 후인 919년, 동로마 제국과 경쟁 중이던 불가리아 왕국의 시메온 1세가 불가리아의 황제로 인정받으면서 유럽에 3명의 황제가 존재하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황제 직위가 평가절하될 듯 하였으나 불가리아 제국은 채 100년이 안되어 멸망하고 동로마 제국에 복속되었다.

서유럽에서는 프랑크 제국이 3분되면서 황제 명칭이 잠시 유명무실해졌으나, 독일의 오토 1세가 황제 자리를 넘겨받아 동로마 제국 황제의 조카딸과 자신의 아들 오토 2세를 결혼시키면서 다시 한번 정통성을 획득하였다. 그가 창립한 작센 왕조의 신성 로마 제국은 이후 잠시 대공위 시대(황제가 없는 시대)를 맞이하기도 하였으나 1806년까지 계속하여 이어졌다.

프랑스의 경우, 카롤루스 대제의 혈통이 끊긴 이후 왕좌를 이어받은 방계 위그 카페로부터 혈통이 이어지는 대혁명 이전의 왕들은 황제를 자칭하지 못했다. 발루아 왕조의 프랑수아 1세가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손에 넣으려고 혈안이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14] 하지만 손꼽히는 강한 국력을 가진 프랑스의 왕은 오직 하느님에게서만 명령을 받는 왕을 표어로 하여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아래에 속하지 않는 독립적인 행보를 걸었다. 그것을 위해 카페 왕조와 그 자손들은 프랑스 왕의 대관식을 메로빙거 왕조의 시조 클로비스가 세례를 받은 랭스에서 개최함으로서 나름대로 황제에 버금가는 신성한 권위를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이처럼, 유럽에서 황제를 칭하려면 로마 황제로부터 정통성을 내려받거나 인정받았다는 최소한의 족보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나폴레옹 이전까지 수많은 유럽 국가의 왕들은 황제를 자칭할 수 없었다. 사실 9세기 무렵 크누트 대왕이 다스리던 잉글랜드, 10~11세기의 카스티야, 두샨이 다스리던 14세기의 세르비아 등등에서 황제를 스스로 칭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전혀 로마적 정통성이 없었기 때문에 외교적으로는 전혀 인정받지 못했고, 국내에서 몰래 몰래 쓰는 참칭 수준이었다.
1.3.2.2. 조건 2 : 기독교의 보호자[편집]
서유럽의 황제에게는 다른 대륙 국가와는 차별되는 또 하나의 전통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교황의 인정을 받는 것이다. 이 전통은 457년 이후 동로마 황제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게서 제관을 받던 것을 시초로 볼수 있으나, 서유럽만으로 본다면 카롤루스 대제의 대관식을 로마 교황이 거행했던 것에서 기원한다.

카롤루스 대제가 교황에게서 서로마 황제위를 받기 전까지는 로마 제국 그 자체인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유럽 전역의 기독교의 보호자였다. 소위 '서로마의 멸망' 이후 열린 5, 6, 7차 기독교 세계 공의회 역시 당대의 동로마 황제가 소집한 것이었다. 그러나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플 교회 사이, 동로마 황제와 로마 교황 사이의 잦은 충돌은 서방과 동방 사이의 이질감을 키워나갔다. 뿐만 아니라 랑고바르드족에게 밀려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동로마 세력권이 남부로 쪼그라들면서 동로마가 실질적으로 로마 교회를 보호한다고 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이러던 중 랑고바르드족을 몰아낸 프랑크족의 카롤루스 대제가 교황으로부터 서로마의 제관을 얻게 된 것이다.

교황이 열국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중세의 초강력한 교도권으로 생겨난 권위였다. 심지어 제 아무리 제위에 올라있는 황제라도 교황이 파문하면 데꿀멍하는 굴욕을 겪어야 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카노사의 굴욕.

카롤루스 대제 이후로도 서유럽 황제의 대관식은 교황이 집전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역사상 마지막으로 교황이 손수 제관을 씌워준 황제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 그런데 카를 5세의 재위 중 종교개혁이 터지는 바람에 교황의 영향력은 급격히 실추되었고 이후 교황이 제관을 씌워준 사례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의 형식적인 인정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때까지도 여전히 이어졌다.

말하자면 신성 로마 제국의 대빵이 되었다고 해도 자동적으로 바로 황제가 되는것은 아닌 것이다. 황제를 선출하는 것은 독일 제후의 권리지만, 그렇게 뽑힌 인물이 황제의 자격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권리는 로마 교황에게 있었다. 교황에게 제관을 받기 전에는 격이 떨어져서 '로마왕'이라고 칭해야 하며, 대립 황제와 같이 로마 교황의 인정을 아예 받지 못하는(무효인 경우) 경우에는 격이 또 한단계 더 떨어져서 '독일왕'이라고 했다.

실제로 오스만 제국메흐메트 2세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이후 동로마 제국의 후계자를 자칭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무슬림이었으며, 교황이 이딴 것을 인정할 리는 전혀 없기 때문에, 기독교 세계관에서 오스만 제국이 가지는 동로마 제국의 제위는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에서는 자신들이 동로마 황제에게 제관을 씌워주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보호하고 있고 셀림 1세 이후론 5개의 총대주교구 중 4개를 보유하고 있으니[15] 오스만 제국의 술탄 또한 자기 나름대로 기독교의 보호자라고 할 만은 했다. 교황은 인정하지 않았으나 메흐메트 2세에 의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 선출된 옌나디오스 스콜라리오스는 메흐메트 2세를 로마 황제로 인정하긴 했다. [16]

러시아는 동로마 제국 멸망 이후 스스로 칭제하였다. 그들이 주장한 근거는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정교회의 중심지가 모스크바로 이동하였고, 이반 3세가 동로마 제국 황제의 조카딸과 결혼했다는 것이었다. 신생 러시아 제국은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라 칭했다.(제2의 로마는 당연히 콘스탄티노플) 이때 사용한 칭호 차르Tsar는 유럽의 공용어 라틴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러시아에서 황제를 칭하던지 말던지 다른 유럽 국가에서는 철저히 무관심으로 일관했고, 표트르 1세가 스웨덴과 싸워 이긴 후 차르 대신 라틴어로 황제(Imperator)라고 선포한 뒤에야 비로소 유럽에 알려졌다. 이후 나폴레옹의 침략을 격퇴하는 등 점차 유럽 전체에서 열강으로서의 위신이 높아지면서 이때쯤에는 서유럽에서도 대충 황제라고 외교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1.3.3. 근대 이후[편집]

1.3.3.1. 신성로마제국의 선출황제[편집]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며 서유럽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변화가 생기면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자격에도 변화가 생긴다. 15세기 막시밀리안 1세를 기점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더 이상 교황의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오직 선제후들의 선거로만 황제직에 올랐다.

막시밀리안 1세 이전의 황제는 선제후들의 선거에 의해 황제로 선출된 후에도 일단 독일왕 또는 로마왕 직위에 머물렀다. 이후 교황의 대관식이 치뤄진 후에야 황제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세 후기 교황과 황제의 대립이 이어지면서 교황은 대관식을 황제를 견제하는 수단으로 빈번하게 사용하며 독일에서의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다. 즉 교황과 대립각을 세우는 인물이 황제로 선출되는 경우 그에게 대관식을 치뤄주지 않는 것이었다. 이럴 경우 선출된 황제는 황제가 되지 못하고 로마왕과 독일왕 직위에 머물고 만다. 실제로 하인리히 등이 교황의 대관을 받지 못해 황제가 되지 못했다.

중세 후기 교황의 영향력이 강한 시절에 교황과 황제와의 대립 과정의 여파로 황제자리가 비게 되었는데에도 불구하고, 제후들이 서로를 견제하여 누구도 황제에 선출되지 않아 대공위 시대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대공위 시대 이후 처음으로 황제가 된 루돌프 1세는 교황의 대관을 받지 않았으나, 이때에는 교황이 황제를 원했기 때문에 교황의 대관이 없이도 황제로 인정받을 수가 있었다.

이후 카를 4세는 금인칙서를 통해 황제 선출 방식을 명문화했다. 이 과정에서 카를4세는 제후들의 타협을 이끌어내기 위해 황제권한을 양보하여 황권이 더욱 유명무실해지기는 했으나, 황제 선출과정에서 교황의 역할에 대한 아무런 명시를 하지 않음으로써 독일 국내 정세에 교황이 관여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이는 이후 막시밀리안 1세가 교황의 대관 없이도 황제직을 계승하는 근거가 되었다.

마침내 15세기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1세는 선거에서 황제로 선출된 후 교황의 대관을 받지 않고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이에 대해 교황은 물론이고 어떠한 세속 군주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막시밀리안 1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공식 직함을 선출된 황제를 의미하는 Imperator Romanus Electus (Elected Roman Emperor)로 바꾸었다. 이 직함은 신성로마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황제의 공식 직함이 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 이후 황제들은 교황의 대관식 없이 황제가 되었다. 단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 카를 5세가 유일하게 교황의 대관을 받았다. 이는 카를 5세가 루터의 종교개혁을 저지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카를 5세가 교황의 대관을 받은 것은 황제에 선출된지 11년이 지난 후였는데, 교황의 대관을 받기 전에도 카를 5세는 여전히 황제로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에 교황의 대관은 별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1.3.3.2. 19세기 유럽 - 나폴레옹과 그 이후[편집]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이어 서유럽에서 황제가 된 이는 나폴레옹이었다. 사실 이미 근대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선출황제 이래 황제 제위에 대한 중세시대의 룰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실력으로 인정받는 것일 뿐. 그래도 나폴레옹은 명목상 제위에 대한 조건을 충족하려고 했는데, 카롤루스 대제 - 위그 카페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로 정통성이 이어진다는 제3의 반열을 근거로 해 로마의 후계자로서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그리고 교회의 인정이라는 조건을 맞추기 위해 교황이 집전하는 대관식을 열었다. 대관식을 위해 나폴레옹은 교황을 파리로 직접 오도록 했다(...) 또 교황이 대관식을 집전하기는 했는데, 왕관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썼다(...). 또한 나폴레옹은 그의 아들 나폴레옹 2세로마왕에 책봉하면서 최대한 신성로마제국과 비슷하게 구색을 갖추려고 노력했다.

나폴레옹의 압박을 받아 서독일 지역의 영향력을 상실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프란츠 2세는 울며겨자먹기로 1806년 스스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제위에서 물러났다. 이에 신성로마제국은 공식적으로 소멸했다.

나폴레옹 이전까지 서유럽에서 오직 신성로마제국 황제만이 황제로 인정받았으나, 나폴레옹에 의해 왕권신수설의 논리가 무너지고 힘에 의해 스스로 황제를 자칭하는 사례가 나타나자 이후 '황제 인플레'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교황의 대관 따위는 더이상 필요치 않았다.

나폴레옹 황제 즉위 이후 스스로 신성로마제국 황제에서 물러난 프란츠 2세는 그대신 자신의 직접 통치권하에 놓인 영지들을 통합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하고 황제 자리에 올랐다. 때문에 프란츠 2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제위를 내려놓고 나서도 황제라는 명칭을 계속 유지했으며, 외교적으로도 계속 황제 대우를 받았다. 사실 오스트리아 제국이 수립된 것은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되기 2년 전인 1804년이었다. 이 2년간 프란츠 2세는 두 개의 황제 제위를 갖고 있었다. 나폴레옹 또한 현실적으로 오스트리아 황제를 인정하였는데, 조세핀과 이혼하고 오스트리아 황녀와 결혼하여 자신의 권위를 더욱 드높이려 하였다.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의 패배로 나폴레옹이 실각하면서 프랑스에서는 제정이 무너지고 다시 부르봉 왕조가 들어섰다. 나폴레옹 이후 루이 18세샤를 10세는 다시 왕을 칭했다. 그러나 1848년 혁명 이후 들어선 공화정의 대통령이 된 나폴레옹 3세는 대통령에 만족하지 않고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황제에 당선되었다! 사실 과거 나폴레옹 1세 또한 국민투표에 의해 황제가 되긴 했다.

1870년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호엔촐레른 가문프로이센 왕국이 오스트리아가 배제된 독일 제국을 세우고 황제를 자칭했다. 황제의 명분은 당연하게도 독일 땅에 세워졌던 신성로마제국을 계승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신성로마제국 시절 제후들이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고 거의 그대로 독일제국의 제후가 되긴 했다. 다만 신성로마제국 때와 달리 제후들의 실권은 크게 제한되었고, 제국은 황제의 권한이 크게 강했다.

러시아의 차르 역시 진작부터 서유럽에서 황제로 대접받았다.

하지만 시대가 변해버렸기 때문에 독일 제국 성립 이후 50년도 되지 않아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유럽에서 황제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1.3.3.3. 편법으로 황제가 되는 방법[편집]
재미있는 것은 이때까지 보았듯이 유럽인들은 황위에 있어서 로마 그리스도교적 정통성을 극히 중시했지만, 정작 유럽 밖의 황제들에 대해서는 '아 그런 게 있나보다' 하고 쿨하게 인정하고 넘어갔다는 점이다. 왜 이런 반응이 유럽에서 나왔냐면, 중세 유럽의 국가와 칭호는 개인이 아닌 땅에 귀속되며 세속은 칭호와 국가가 아닌 그 칭호와 국가를 가진 땅을 넘김으로서 이루어졌다. 여기에 더불어 유럽의 대부분을 차지한 제국은 로마 제국이 유일했으므로 '유럽 내의' 황제는 로마 제국의 황제 뿐이지만 '그 외의 땅'에 대해선 로마 제국의 황제가 아닌 다른 황제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

유럽의 열강들이 너도나도 황제를 칭하자, 왕국이었던 영국에서도 황제 직위에 대해 갈망하는 이들이 있었다. 영국의 수상 디즈레일리는 자신이 모시는 빅토리아 여왕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편법을 동원했다. 즉 식민지였던 무굴 제국의 타이틀을 이용해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 황제의 칭호를 추가했던 것. 하지만, 영국 국내 여론에서 무의미한 허례허식으로 취급되어 조롱받았고, 빅토리아 여왕은 Empress라고 불리기보다는 여전히 Queen이라는 칭호를 썼다.

이런 꼼수의 원조는 포르투갈브라질 제국이다. 인도제국보다 50년 빠르다. 더 웃긴건 인도제국은 형식적으로라도 원래 있던 무굴제국으로부터 제국 타이틀을 얻었는데 브라질 제국은 그냥 포르투갈의 브라간사 왕조와 브라질 사람들이 제멋대로 선포한 거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나폴레옹 전쟁때문에 국력이 쇠약해지는 바람에 결국 2개월 만에 왕조 가문만 그대로고 나라와 군주는 따로 놀았다.

2차 대전때로 가게 되면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정복하고 에티오피아 황제 직위를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겸임하면서 이런식으로 황제를 자칭한 적이 있었다. 다만 그 후 이탈리아가 패망하면서 군주제도 소멸해버렸다.
1.3.3.4. 19세기 아메리카 및 유럽에서 황제가 있었던 국가들[편집]

1.4. 다른 문화권의 황제들[편집]

1.4.1. 인도[편집]

인도에서는 마우리아 왕조찬드라굽타 마우리아를 최초의 황제로 본다. 그 후 그의 손자 아소카전륜성왕 황제(Samraat Cakravartin)인정한다. 그 후 라자(서구의 Prince에 비견되는 칭호다.) 칭호를 쓰는 북인도,데칸,벵갈의 여러 왕조가 난립했고 이슬람 세력이 진입해오면서 술탄이란 칭호를 도입하기도 하였다. 무굴 제국이 인도를 대부분 통일한 후 아우랑제브 황제가 알라기르란 타이틀(세계의 지배자란 의미)를 쓰기도 하였고 페르시아의 영향으로 파디샤 칭호를 도입하기도 하였다. 마라타 제국에서는 전통적인 국왕의 의미인 마하라자(직역하면 대왕)에 더해서 마하라자디라자(왕중왕)이란 칭호를 쓰기도 하였다. 영국이 인도 전역을 지배한 후 인도제국을 성립하자 영국국왕이 인도황제를 겸하게 되었다.

1.4.2. 서아시아[편집]

동아시아의 황제와 유럽의 imperator에 비견될 만한 지위로는 고대 서아시아의 왕중왕(王中王, king of kings)이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도시국가 군주들을 평정한 앗시리아 제국에서 처음 쓰기 시작했으며,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군주들이 군주의 기본 호칭으로 "이란과 非이란의 왕중왕"을 채택한 뒤로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서아시아 일대에서 황제격의 칭호로 정착되었다. 왕중왕(샤한샤)와 동격의 칭호로 왕들의 주인(파디샤)라는 칭호도 있었는데, 오스만 제국무굴 제국의 군주들이 바로 파디샤를 칭했다. 팔레비 왕조 시절에 '샤한샤'의 공식적인 번역을 황제로 정하기도 했다.

페르시아나 이집트의 수장들은 신이거나 신의 위치에 준하는 자들이었으며, 이러한 종교적, 봉건적 수직 질서 아래 일반인들은 평생 보지도 못하고 고위 관료들조차도 황제를 만날 때는 특수한 예를 갖춰야 했다. 한마디로 황제는 형이상학적인 국가 자신 그자체였다.

이슬람 문화권의 칼리프, 술탄들의 경우 보통 칼리프를 술탄의 상위 군주로 보고 황제와 왕의 관계와 동일시하는 편이지만 이는 기준히 상당히 애매하다. 물론 칼리프가 명목상 술탄의 상위 군주이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미 11세기부터 정치적 실권을 상실하여 세속 군주들의 종교적 권위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교황에 더 가까울 것이다. 한편 술탄의 경우에도 그냥 "독립적인 군주" 정도의 의미라서, 일반적으로 왕과 동격으로 보긴 하지만 꼭 같다고는 할 수 없다. 오스만 제국의 황제들은 군주의 격을 한 단계 올린다는 의미에서 "술탄 중의 술탄"이라는 칭호를 썼지만, 이는 오스만 제국에만 해당하는 특수한 경우이다. 다른 대부분의 거대 이슬람 국가들은 "대 술탄" 정도의 칭호에 머물렀다.

1.4.3. 중앙아시아 유목제국[편집]

중앙아시아튀르크, 몽골 문화권에서 (Khan)은 왕이나 부족장 격에 해당하며, 몽골 제국이 성장하며 황제 격에 해당하는 칭호인 Khagan(카간 혹은 카안)이 생겼다. '카안'이라는 칭호는 본래 오고타이 칸이 스스로를 타자화하기 위해 붙인 칭호이나, 몽골 제국이 팽창하며, 제국 전체를 지배하는 최고 지위의 칸을 이르는 보통명사화 된다. 보통 한자문화권에서는 이를 "대(大)칸"으로 번역한다. 이후 몽골 제국중국 전토를 장악하면서 몽골의 대칸이 원나라 황제가 되지만 그렇다고 대칸 지위 대신 중국의 황제가 된 것은 아니고 둘 다 겸하고 있었다. 이후 원나라가 주원장에 의해 북원으로 쪼글아들어 다시 내몽골 고원으로 쫓겨나고(북원) 이후 중국식 원 황제 지위는 포기하고 대칸 지위만 이어지다 훗날 청나라가 내몽골을 정벌한 이후 청나라 황제가 대대로 몽골 대칸의 지위도 세습하였다. 그리고 투르크계인 오스만 제국페르시아어인 파디샤와 함께 칸호를 사용했다. 예를 들면 술탄 술레이만 칸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아랍식과 투르크식 군주 칭호를 같이 썼고 유럽 내에서는 룸 카이세리(로마 황제)도 자칭했다.

1.4.4. 기타[편집]

아메리카의 국가들 중에서는 아즈텍, 잉카의 군주들도 황제라고 불리며, 오세아니아의 국가들 중에서는 투이 통가 제국의 군주들을 황제라고 불린다.

서구에서 아직까지 Emperor로 칭해 주는 군주는 일본덴노가 유일하다. 다만 일본의 정식 국명은 1947년 이후부터는 '일본 제국'이 아닌 '일본국' 이다.

아프리카에서는 에티오피아에서 하일레 셀라시에가 폐위된 1974년까지 황제가 있었다. 솔로몬과 시바 여왕을 전설적 조상으로 한 솔로몬 왕조가 그것인데, 황통(皇統)이 3000년간 이어져 왔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일본의 덴노가(家)가 만세일계라고 주장하지만 실은 아닌 것처럼 사실 에티오피아의 황통 자체는 여러 줄기에서 이어져 왔던 것이며 3천년 황통설은 근대 국가를 확립한 메넬리크 2세 시대에 만들어진 신화라는 설이 유력하다.

1.5. 기타 황제로 쳐주기 미묘한 사례[편집]

조선대한제국으로 개칭한 고종과 그 아들 순종도 칭호는 황제였다. 하지만 당대에 그 권위를 인정해 준 사람은 오로지 독일 제국빌헬름 2세 한 사람 뿐. 흥했다면 이 단락에 들어올 일 자체가 없었겠지만 그나마도 그게 13년 천하였으니 대한제국은 조선의 일부 취급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만 '칭제건원'이 타국에 종속되지 않은 독자적인 천하관을 갖춘 독립국이라는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아예 의미가 없는 헛짓거리는 아니다. 명, 청나라를 그저 일개국가로 간주한다면, 중화사상이 지배하는 동아시아에서는 왕이라는 칭호가 일개 제후에 불과하게 보인다는 한계가 있는데, 중국은 2천년이 넘는 기간동안 황제가 지배자고 왕은 그저 황제의 부하내지 가족이란 관념이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일본의 영향력으로 칭제건원을 했다는 견해가 있는데, 물론 일본이 조선을 자주국으로 변신시킨 이유가 조선이 청의 속국이라는 이미지를 떨쳐서 잡아먹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건 맞다. 그러나 그것은 청일 전쟁 이후 왕 체제가 대군주 체제로 변했던 것으로 일본은 만족하였고 오히려 일본은 대한'제국' '황제' 체제라는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였다.

고려에서는 광종이나 경종 등 군주 중 일부가 스스로를 황제라 자칭하였다. 그러나 중국 같은 나라를 상대할땐 외교상 왕이라 하였다. 중원의 천자와는 별개로 고려만의 천자를 자칭한 것이다. 그 외에도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등 한국 고대왕조들은 황제라는 명칭은 사용하진 않았지만 황제국 체제를 어느정도 사용하였다. 중국에는 형식상 번국 행세를 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중국 황제와 동등하다는 생각을 한 것. 자세한 것은 외왕내제 참조.

조카의 희생으로 왕위에 오른 세조도 황제를 칭하려고 시도한 흔적이 보인다.(이것도 고려처럼 외왕내제 차원에서) 황제가 되는데 성공했다면 그나마 비판이나 덜 받는 효과는 있었을 것이다. 황제국의 이미지 자체가 후대 군주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테니...

그 외 조선 성종 같은 경우도 일본 다이묘들의 사신들이 황제라 불러주었다.실록의 기록 그러나 자칭한 것은 아니며 이것은 외교 관례를 모르는 일본의 사절들이 서계의 격식을 제대로 몰라 중국과 같이 황제 칭호를 붙인것에 가깝다.

어쨌건 13년 천하가 흑역사로 끝난 사례를 접어두면 한국은 황제직을 해본 기억이 별로 없기 때문에 칭제하면 백성의 사기가 오른다는 떡밥도 다소 있다. 고려같은 외왕내제 사례도 있긴 하지만 조선시대쯤 되면 백성들에게 그런 기억은 없는 것에 가까웠을 것이다[20][21].

1801년 성립된 베트남의 응우옌 왕조(阮 王朝)는 스스로 황제를 칭했는데, 청나라에 사절을 보낼때는 그냥 왕이라고 칭하여 청나라를 속였다. 프랑스 식민치하에서도 형식적인 황제의 호칭을 허락받고, 제한적인 황권을 인정받았다(1945년까지 존속). 이 동네도 일종의 외왕내제라고 생각하면 된다.

남아메리카브라질도 잠시 브라질 제국이였던 적이 있고 황제가 있었다. 원래 포르투갈 제국의 식민지였는데 국내혼란을 틈타 포르투갈 황태자가 그대로 식민지에 눌러앉아 브라질 제국으로 독립을 선포하여 1821년 본국으로부터 독립했었다. 하지만 1889년 공화정으로 바뀌면서 지금의 브라질 공화국이 되었다.

한때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또한 제국이었던 역사가 있다. 보카사가 1976년 12월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제국을 칭했던 것. 자신을 '아프리카의 나폴레옹' 이라고 선언하면서 온갖 삽질을 일삼았지만 결국 채 3년이 못된 1979년 9월 쿠데타로 쫓겨난다. 실제로는 아프리카의 원술이었다.

카리브해의 섬나라 아이티도 제국을 칭한 적이 있다. 독립 영웅 장자크 데살린은 '자크 1세 황제(재위 1804~06)', 7대 대통령 파우스틴 술루크는 '파우스틴 1세(재위 1849~59)'로 황제를 칭했다[22]

멕시코가 스페인에서 독립했을 때, 아구스틴 이투르비데(아구스틴 1세, 재위 1822~23)는 '멕시코 제국'을 선포했으나 단명(短命)했다. 이후 나폴레옹 3세의 간섭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족 막시밀리안(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동생)이 '막시밀리안 1세(재위 1864~67)'로 즉위했으나, 공화파와의 내란 끝에 제거되었다.

11세기 무렵 스페인 왕국의 전신인 레온-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6세는 자신을 전 스페인의 황제로 자칭한 적이 있었다. 문제는 위에 나온것처럼 유럽에서 황제를 칭하려면 명목상 로마 제국을 계승해야 했기 때문에 주변국의 불평을 대차게 사고, 그가 죽자 이 칭호는 폐지되었다.

제4차 십자군 전쟁으로 인하여 동로마 제국이 붕괴하고 잠시 라틴 제국이 들어섰다. 그로 인해 동로마 제국 재건을 위해 서 아나톨리아에 황제의 사위 가문이었던 라스카리스 가문의 니케아 제국, 트레비존드(옛 트라페주스) 지방에 옛 황제 가문이었던 콤네노스 가문의 트레비존드 제국이 생겨났으며, 니케아 제국은 후에 팔라이올로고스 가문이 제위를 찬탈하고서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해 동로마 제국을 재건하는데 성공했다.

20세기 초 불가리아의 공식 명칭은 불가리아어로 차르스트보 벌가리야(Царство България)로 불가리아의 왕은 불가리아어로는 '차르'로 불렀다. 그러나 이 국호는 타 언어로는 "불가리아 왕국"이라 번역되고 불가리아의 차르는 "왕"으로 번역된다. 비슷한 예로는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의 그리스 왕국이 있다. 국왕을 동로마 제국 황제가 썼던 '바실레우스' 칭호로 불렀다.

2차 세계대전이탈리아에티오피아를 점령하고 당시 국왕인 빅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게 에티오피아의 황제의 칭호를 주었다. 그러나 전쟁에서 연합군에게 무너지고 국토가 황폐화되는 현실속에 종전 후 이탈리아 왕정이 폐지되면서 망했어요.

수 많은 왕조에서는 살아생전에 황제를 한 적이 없지만 죽은 이후 황제로 추서된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 삼국지에만 여러명이 등장하는데 그 예가 조등, 조숭, 조조(이상 위나라), 손종, 손견(이상 오나라), 사마의(진나라) 등이 있다. 조선왕조도 대한제국 선포 후 건국자인 태조정조에서 철종까지의 임금들을 황제로 추존하였다.

일본의 천황에 대한 칭호 논란도 마찬가지인데 일본 또한 만세일계 천황가라고 하며 천황가를 태양신의 후손으로 신성시여기고 권위를 부여했지만 과거 일본은 약 640년에 일본이라 불리기 이전부터 중국 황제에게 조공을 했었으며 230년 경에는 후한에 조공을 하였다. 결국 일본 또한 고려때 처럼 일본만의 천자를 자처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다만 막부시대 덴노는 군주라고 보긴 어렵고 일종의 제사장이었다.

1.6. 가짜(사칭) 황제[편집]

나라에 혼란이 올 때 실제로는 황제도 아니면서 황제라고 사칭하거나 황위계승권자도 아니면서 황위계승권자라고 사칭해서 황제 자리를 차지한 가짜 황제들도 여럿 있었다. 삼국지만 해도 원술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며 일본의 경우 타이라노 마사카도가 덴노를 사칭했었다.

1.6.1. 일본[편집]

1.6.2. 중국[편집]

  • 스딩우(石顶武:1947~1953), 스진신(石金鑫: 1983) - 스딩우는 대중화불국이라는 거창한 나라를 세우고 황제에 올랐으나, 중공당국에 의해 반란죄로 체포되어 처형. 아들 스진신은 후주가 되어 "제국"을 재건했으나 다시 체포되어 처벌받는다.
  • 딩싱라이(丁兴来:1981-1990) - 사이비교주. 도덕금문교를 창시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라 도덕금문황제라고 자칭. 재상과 비빈을 책봉했으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해 10년후에 발견되었다. 체포후 처벌.
  • 장칭안(张清安:1982) - 중원청정국의 창업자. 승상과 문무백관을 임명하고, 장제스를 "위국왕"으로 봉하고(...) 인민공화국을 토벌하기 위한 친정을 감행하려고 했으나 역시 관계당국에 체포된다.
  • 린원융(林文勇:1980-1982) - 성조국(聖朝國)의 창업자. 역시 공안당국에 체포된다.
  • 차오자위안(曹家元:1982) - 옥황대제를 자칭했다.
  • 리청푸(李成福: 1990~1992) - 만순천국을 세웠으나 경찰 세 명한테 체포당한다.
  • 쩡잉룽(曾应龙) - 계획생육정책에 반기를 들고 대유국을 세운다. 군사를 일으켜 병원을 점거하고 의사와 간호사들을 포로하였으나 인민해방군에 의해 제압당한다. 경찰에 허무하게 당했던 다른 황제들과는 달리 군대까지 출동시켰으니 그나마 반란다운 반란이라고 하겠다.
등등이 있다.

1.6.3. 러시아[편집]

1.6.4. 미국[편집]

  • 노턴 1세: 대담하게도 스스로를 미국의 황제라고 자칭한 사람인데, 이 사람은 황제를 자칭한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엄청난 대인배에다가 사람을 인종이나, 빈부에 따라 차별하는 것을 싫어했던 인도주의자였기에 이 항목에 있는 다른 가짜 황제들과는 달리, 지금까지도 칭송을 받고 있다[23].

1.7. 황제라는 별명을 가진 실존 인물[편집]

1.8. 황제 지위에 오른 가공 인물[편집]

황제/캐릭터 항목을 참조.

2. 중국 신화의 황제(黃帝) 헌원씨[편집]

황제(중국신화) 항목을 참조.

3. 황제(皇帝)의 동생[편집]

황제동생황제 한자 표기는 황제(皇弟). 제국의 수장의 동생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한글로 쓰면 동음이의어라서 혼동될 우려가 있고,중국어도 마찬가자리로 황제(皇帝)와 황제(皇弟)의 두 어휘도 발음이 "황디"로 같다. 보통 황제의 동생인 경우는 대부분 선황제의 아들이므로 선황제의 아들로서 받은 친왕이나 군왕등의 작위를 부르므로 잘 쓰이지 않는 단어이다. 반대로 황제의 형은 황형(皇兄) 이라 한다.[31] 황제의 아우여도 엄연히 신하(臣下)이기에 황제인 형에게 신제(臣弟)라고 불렀다.

4. 작약만가 : 서리꽃의 등장인물[편집]

[1] 이란, 일본, 중국, 독일, 러시아, 이슬람 세계의 황제를 뜻하는 단어들이다.[2] 대략 황제는 정치적 의미, 천자는 종교적 의미로 봐도 무관하다.[3] 사실 천자가 황제보다 더 오래된 표현이다. 본래 왕(王)으로 칭해지던 천자의 호칭을 한층 격을 높인 것이 황제인 것. 따라서 천자라고 하면 삼대(夏商周)의 왕과 진(秦) 이후의 황제들을 포괄한다.[4] 서주시대 청동기에는 황상제(皇上帝)라는 낱말이 나오니 위대하신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상서 여형편에서 이 황상제는 한 글자씩 빠져서 "황제"와 "상제"로 나온다.[5] 해릉왕의 남침 실패 이후에 이 군신관계는 숙질관계로 바뀐다.[6] 송나라 정통론자들은 가짜 초나라라는 뜻에서 위초(僞楚)라고 불렀다. 괴뢰황제의 성을 따서 장초(張楚)라고도 한다. 수도는 현재의 난징인 금릉이었다.[7] 송나라 정통론자들은 가짜 제나라라는 뜻에서 위제(僞齊)라고 불렀다. 괴뢰황제의 성을 따서 유제(劉齊)라고도 한다. 수도는 현재의 한단(邯鄲)인 대명부(大名府)였다. 참고로 한단은 전국시대 조나라의 수도였다.[8] 처음에는 금나라의 요구를 거부하고 황제가 되지 않으려 했지만 금나라가 "변경(북송 옛 수도)이 피바다가 돼도 상관 없다 이거지?"라고 협박하는 바람에 금나라 사신이 돌아갈 때까지만 억지로 황제 행세를 했다(...). [9] 대신 유예는 금나라 황제에 의해 촉왕(蜀王)으로 새로 책봉되었다.[10] 동아시아의 황제는 그 시작부터 천하 제패를 스스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올려 보고하는 제사장과 같은 위치였다. 황제 등장 이전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한 나라의 왕이 부덕하여 천명이 다른 필부에게 옮겨가는'개념이 등장했으므로 황제=신의 등식은 엄밀히 말해 성립하지 않는다.[11] 로마 제국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 우상화가 진행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삼두정 시절부터 양아버지인 카이사르를 철저히 신격화하여 "신의 아들"(Divi Filius)이라는 호칭을 썼다.[12] 동아시아의 경우는 특정 왕조의 종말은 곧 국가의 교체로 보았다. 몇몇 예외는 있었으나, 왕조가 교체되면 국가 이름까지 갈아버리는게 일반적이었다. 왕조의 단절을 국가의 멸망으로 보지않는 견해는 비유럽권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으며, 한국사의 신라만 하더라도 중국과의 교류가 적었던 초기에는 세 가문이 왕을 돌려먹는 등 현대 동아시아인의 관점으론 꽤 이질적이었다.[13] 이는 동아시아식 왕조에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일부일처제가 기본인 유럽식 군주와 달리, 동아시아식 군주는 많은 첩(후궁)을 거느리기에 혈통이 끊기는 일이 거의 불가능했다. 물론 서양의 왕이나 황제들 역시 개인적으로 정부를 두었고 정부의 자식도 있었지만, 정부는 첩과 달리 법적인 아내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정부의 소생은 모두 사생아로 취급되어 왕위 계승권이 없었다.[14] 사실 그 이전에 샤를 8세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에게 헐값으로 사들인 전통 로마 제국 황제의 타이틀도 명목상 보유하고 있긴 했으나, 스페인도 안드레아스의 유언을 통해 동일한 타이틀을 확보한 상태였고, 따지고 보면 공식적인 타이틀 자체는 '임페라토르 콘스탄티노폴리타누스(Imperator Constantinopolitanus)', 즉 '로마 제국의 황제'가 아닌 '콘스탄티노플의 황제'였다. 더구나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투르크에게 완전히 정복된 터라 신성 로마 제국 황위와는 달리 아무런 권한이 없는 명예직이었으며, 계승한 수단이나 경로도 좀 그렇고(...) 주권 국가의 지도자로서는 이탈리아로 도망친 그리스인들에게라면 모를까 아무래도 누구 앞에 내놓기 영 민망한 껍데기에 불과했다.[15]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안티오키아.[16] 기독교 국가들이 외교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술탄을 황제로 인정한 것은 동로마 제국의 후계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칼리프였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은 기독교적 세계관과는 무관한 것이므로 '다른 문화권의 황제들' 항목에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17] 윈저가의 황제 직위는 조지6세때 끝이 났다.[18] 인도 황제로서만.[19] 홀슈타인 - 고트로프 가문은 표트르 3세의 아버지 카를 프리드리히(1700년 ~ 1739년)에서 나왔다.[20] 애초에 고려가 적극적으로 외왕내제를 시도했다는 것도 현대 한국사학자들이 밝혀낸 것에 가깝다. 조선에서 고려사를 서술할 때 화이론적 관점에서 보아 참람한 외왕내제적 요소들을 일단은 그대로 서술하기는 했다만 아무래도 그런 요소들이 축소 서술되는 경향이 강했다.[21] 외왕내제든, 뭐든 일단 황제국 자칭해 본 역사가 짧은 게 아쉬웠는지, 외왕내제 조차 안한 조선 왕조나, 황제에 준하는 태왕이라는 명칭이 별도로 있는 고구려를 제외하면, 웬만한 한국 사극에선 역대 왕조의 군주들이 죄다 황제로 격상되어서 나온다. 심지어는 사극이 아니고, 조선 왕실이 일제 강점기 시절의 독립운동에 대한 공로로 현재까지 존속한다는 내용의 가상 이야기인 드라마 에서조차 원작 만화에서 왕이라고 언급되는 걸 씹고 황제라는 호칭을 쓰는 것으로 설정했을 정도다.[22] 데살린의 후임(혈연관계 아님)인 앙리 크리스토프는 황제가 아닌 '왕(재위 1806~20)'을 칭했다. 아이티의 북부지역만 지배하고 있어서 그랬을지도.[23] 다른 가짜 황제들은 순전히 자신의 권력욕때문에 황제를 자칭하고 거병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타이라노 마사카도 정도가 중앙정부의 폭정에 항거한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 하지만, 이쪽도 분명히 역성혁명을 시도하는 등, 권력욕이 없었던 건 아니다. 노턴 1세가 칭송받은 이유는 대인배이고 인도주의자였다는 점도 있긴 하지만, 그와 동시에 초소형국민체의 자칭 국가원수들 마냥 자기 집의 골방에서 황제를 자칭한게 고작이고, 군대를 일으켜서 정부를 뒤엎거나 자기 지역에서 할거하려던 군벌이 아니라서 칭송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24] 위에 서술되어있는 이주일과는 또 다르다.이주일은 모든 코미디를 통합한 황제라고 본다면,이경규는 흔히들 말하는 예능 이라는 장르의 황제라고 보면 된다.[25] 포어로는 O Rei do futebol,즉 축구의 왕이라고 불리었다.[26] 스타크래프트가 정립된 이후로 보통은 그냥 '황제'라고 부른다. 그냥 테란만의 황제라기엔 스타판 전체에 영향력이 너무나 막강해졌기 때문.[27] 영어로는 The king of Rock 'n' Roll. 그러나 항목에 가보면 알겠지만 제왕이라고 표기되있다. 하지만 영어로보면 왕이다.[28] 한국 한정. 영어로는 The king of pop. 즉, 황제가 아닌 왕이다.[29] 한국 한정. 미국에서 많이 쓰이는 단어는 왕을 3인칭으로 지칭하는 his highness의 말장난인 his airness. 물론 중계를 보다보면 the king도 나오고, 역대최고의 선수로 널리 인정받던 워싱턴 위저즈 시절엔 대놓고 중계자가 the greatest of all time이라고 했다.(물론 경기력은 이때가 제일 안 좋았다) 문서화할땐 GOAT라고 쓰인다. 한술 더 떠서 basketball god(!!)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사실 god이란 수식어는 한 분야에서 역대최고수준의 달인을 지칭할 때 종종 쓰는 단어다.예를 들어 guitar god인 에릭 클랩튼. 물론 이 수식어가 붙으려면 웬만한 달인이 아니라 조던이나 클랩튼처럼 정말 역대최고라고 할 정도로 뛰어나야 한다. 예를 들어 조던을 제외하면 god이란 수식어를 달고 있는 농구선수는 없다. 조던의 위치가 그만큼 독보적이기 때문이다. 반면 음악의 경우 여러명이 있는데(제프 벡이나 지미 헨드릭스 등), 종목 특성상 객관적인 우열을 가리기 힘들기 때문.[30] 김범수의 얼굴이 독보적으로 못생긴건 연예계에서 아주 유명한 얘기라서, 김태호 PD가 대놓고 못친소 페스티벌 특집에서 그를 얼굴 황제(...)라고 칭송해 마지 않으면서 해당 특집의 1부와 2부에서 내내 황제니, VVVIP(...)니 하는 수식어가 다닥다닥 붙었다.[31] 제후국에서도 안 쓰인건 아닌데 조선의 왕 영조가 형인 경종을 추억할때 황형이라는 명칭을 쓰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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