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이 스스로 시황제(始皇帝)라 칭한 건 자신의 계승자들이 2대 황제, 3대 황제 하는 식으로 이어질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진제국이 예상보다 빨리 망해버리는 바람에 그러한 생각은 계승되지 못했고, 이후 한 왕조에서부터는
한무제니
광무제니 하는 식으로 시호와 묘호로 칭한다.
중국의 황제 개념은 원칙상으로는 '천하의 지배자'지만, 실제로는 중국의 일부 지역을 장악하고, 이를 유지할 능력만 있다면 개나 소나 황제를 칭하는 일이 잦았다. 물론 이 같은
잡황제지방의 자칭 황제들은 공식 기록에서는 지역명+왕(또는 주主) 혹은 본명으로 기록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황하 유역의 '북조'와 양자강 유역의 '남조'가 대립하는 경우처럼 특정 국가를 정통으로 확고히 보기 어려운 경우, 심지어 남북이 각기 공식 기록을 남긴 경우 서로 상대방을 참칭 황제라 서술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위진남북조의 경우 삼국의 정통성이
한나라로부터 양위받은 위나라에 있는 것인가, 유씨의 황통을 가진 촉나라에 있는 것인가 하는 해묵은 난제부터 시작해 천하를 통일한
수나라는 북조인데 왜 정통성을 남조에 두어 남북조를 이른바 육조(六朝)시대라 칭하는 것인가 하는 논란. 이 부분은 위(후에 진이 되는)나라가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정통 사서의 경향때문인데 이 진나라는 이후 십육국 시대에 밀려나 남조의 시작인 동진이 되었고 이 때문에 이후 수에서 통일한 뒤 정통성을 얻고자 사용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진짜로 천하의 지배자로서 중국을 지배하는 것을 넘어 주변국가에 조공을 받은 경우도 여럿 있는데 당장 한국인들의 인식하는 거대한 제국을 통치하는 유일무이한 지배자로서의 황제라는 인식이 지배적인 것에는 옆나라 중국의 황제가 큰 기여를 하였으며
진짜로 통일된 거대 제국을 지배하며 수많은 원정을 감행해 진정한 대륙의 기상을 세계에 떨친 중국황제들도 여럿 존재하였다. 대표적으로 정화의 원정으로 세계에 중화 제국의 국력을 과시하고 위상을 떨친
영락제,
동아시아(동양권)의 황제는 휘하에
왕을 둘 수 있었다.
군주를 휘하에 두는 군주가 바로 황제인 것이다. 하지만 휘하에 두는 왕이, 왕권(王權)을 가진 군주가 아닌 황제의 아들중에서 후계자인 태자(太子)를 제외한 다른 아들들에게 주는 작위로서의 왕도 존재했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이 경우가 더 많았다. 왜냐하면 주나라의 봉건제가 무너진 후 전한의 군국제를 거치며, 전면적인 중앙집권하의 군현제가 이루어지면서 독자적인 왕권을 지닌 왕들은 황제권에 심각하게 위협이 되기 때문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이렇게 독자적인 왕권을 지닌 군주로서의 왕들은 반란의 소지가 농후했는데, 전한의
오초칠국의 난, 서진의
팔왕의 난, 청나라 초기의
삼번의 난 등등 독자적인 왕권을 지닌 왕들은 황제의 중앙집권화에 심각한 위협이 되기 때문에, 중국역사에서는
개판이 아니고 멀쩡하게 돌아가는 나라라면 작위로서의 왕이 더 많았다.
동아시아의 황제는 천명을 받아 '천하'를 다스리는 존재라면, 왕은 '나라'를 다스리는 자였다. 물론 명분상 중화사상에 입각한 중국천하의 지배자이지, 실제로 천하를 지배한 것은 아니었고 황제는 타국으로부터
조공을 받고 명목상으로 다른 나라의 왕들을 승인하는 형식을 취했다.
황제가 내리는 명령은 칙(勅)이라고 부른다. 유교문화권인 동아시아에서 황제와 왕은 구별과 예가 엄격하게 때문에 쓰이는 한자부터 달랐다. 우리나라에서는 구한말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명목상 황제국이 된 후에야 대내외에 공식적으로 이 표현을 사용했다. 사극에서 흔히 나오는 어명보다 당연히 윗단계 표현이다.
황제가 내리는 명령을 담은 칙서(勅書)는 보통 신하를 통해서 전달했는데, 이를 성지(聖旨)로 전달하여 그 명을 받드는 신하는 황제가 실제로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무릎을 꿇고 받들었다.
이건 왕이 내리는 교서(敎書)도 마찬가지일듯...역사를 설명할 때 황제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진나라가 얼마 못가 쓰러졌지만 최초로 중국을 통일했다는 중요한 아이콘이 되었고, 이후
한나라도 400여년간 통치하면서 중국에서 최고의 직업 = 황제 라는 공식을 굳혔다. 한나라 이후로는 환난이 와도 옛날과 같이 뿔뿔이 흩어져서 살기 보단, 서로 어떻게 해서든지 잡아먹어서 자신이
킹왕짱이 되겠다는 사명으로 서로 치고 박고 하다가 결국 다시 하나의 국가로 모이곤 했다. (먼 옛날 요순시대의 추억도 있었을 것이다.)
즉, 황제라는 자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중화 세계 1인자로서 사실상 중국의 정체성의 중심이다. 황제와 한나라가 없었다면 유럽처럼 수많은 국가들이 지금까지도 서로 치고박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국이 공산주의 치하에서 과거의 유산들이 철저히 탄압받은 결과, 현대 중국에서는 절대적인 최고의 자리를 의미하는 '황제',
전제군주제가 비난받는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의 국가에 하나의 지도자'라는 절대적인 원칙은 변하지 않았으므로 지금의
중국 공산당이 사실상 황제의 권위를 이어받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특이하게 황제가 다른 나라 황제를 제후처럼 책봉하는 경우도 있긴 했다.
금나라는
남송 황제를 책봉했다(...). 금은 송나라를 완전히 흡수·제압하고 싶었지만 중국 전역을 완전히 제압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송나라 황제를 인정하되 자기네 황제가 책봉하는 방식을 썼던 것. 송나라로서는 굴욕적이지만 전쟁의 종결과 휘종의 유해와 고종의 생모 위씨의 반환을 위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5] 금나라는 송나라 외에도 괴뢰국인 초(楚)나라
[6]와 제(齊)나라
[7]를 세워 각각 황제를 책봉했었다. 금나라가 북송을 멸망시켰을 때 새로 점령한 장강 이북 지역의 한족들을 직접 통치할 자신이 없어서 대신 북송의 신하였던 장방창(張邦昌)과 유예(劉豫)를 각각 괴뢰 황제로 책봉했던 것. 그런데 초나라 황제로 책봉된 장방창
[8]은 금나라 군대가 물러간 뒤 남송으로 도망쳐 버려 초나라 건국이 취소됐고, 유예는 어쨌든 제나라 황제로 버텼으나 남송에 털렸고 결국 금·남송 간 합의에 따라 폐지된다(...).
[9] 한편, 근대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의 경우 책봉의 형식을 쓰진 않았지만 사실상 일본에서
푸이를 만주국 황제로 책봉한 것이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