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키아게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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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引揚者(인양자. 끌 인, 날릴 양, 놈 자)

1. 개요2. 숫자3. 등장 배경4. 우리나라에서는5. 일본으로 돌아가서6. 실제 사례7. 비슷한 경우8. 창작물에서

1. 개요[편집]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1945년 일본 제국의 패망까지 해외에 거주했다가 귀국한 일본인을 이르는 표현. 한국어 독음으론 인양자라고 읽는데, 한국어에서 인양이라는 표현은 침몰한 배 등을 끌어올릴 때 쓰는 말이라 의미 전달이 전혀 안된다. 의미를 살려서 번역하자면 귀향자, 귀국자 정도. 관동군이나 일본군으로 참전했다가 돌아온 일본인들은 엄밀히는 히키아게샤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들은 재향군인으로 분류되는데, 정작 관동군 중 상당수는 일본군이 해체되는 바람에 민간인 자격으로 귀국한 사람도 굉장히 많았다. 아니면 소련군한테 잡히지 않으려고 민간인 행세를 했거나.

2. 숫자[편집]

제국주의를 내건 일본은 많은 아시아 국가를 침략해 식민지로 삼았다. 이를 겸해 일본 내부의 빈곤 문제나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인들을 이민보냈다. 이렇게 넘어간 해외 체류 일본인들의 숫자는 패전 당시에 230만명에 이르렀다. 이는 군인을 제외한 숫자다. 만주국이나 중국에 약 110만명 이상, 사할린에 약 38만명, 대만에 32만명, 북아메리카에 30만명, 남아메리카에 20만명, 조선에 69만명 수준이었다.

이 중에 북미나 남미에 있던 사람들이 귀국하진 않았다. 현재 일본계 남미인들은 그 수가 불어 브라질에만 100만이 넘었다. 페루에선 알베르토 후지모리 같은 일본계 대통령도 나왔고.

왜 합이 230만을 넘는가 하면 당시 일본은 식민지인 조선과 대만을 일본으로 포함했기 때문. 당시 조선의 인구가 본토(한반도)에 2천 5백만, 중화권에 2백만, 일본 열도에 2백만, 소련 일대에 수십만 정도가 분산됐음을 생각하면, 먹고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난 조선인이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당시 일본의 인구가 1945년 즈음 7천만 정도였다.

3. 등장 배경[편집]

이들은 한탕 해보자는 생각이나 본토에서 먹고 살기 힘들어서 식민지로 넘어온 사람들이나 당시 제국주의에 협조하던 일본 대기업들의 회사원이나 그 가족들로 구성됐다. 군인의 가족으로 넘어온 사람도 많았다. 문제는 1945년에 일본이 연합군에게 개발살이 나면서 식민지들이 독립했고, 이들은 공식적으로 불법점거자가 되어버렸단 것이다.

4. 우리나라에서는[편집]

우리나라에서는 이때 남은 일본인들의 땅이나 거주지(적산가옥)나 재산 등은 전부 몰수되어 신한공사 등을 통해 한국인들에게 불하되었다. 1950년대~60년대 일본에서는 이 때 몰수된 재산을 돌려받아야 한다는 정치인들의 발언이 몇 번 있었는데, 당연히 한국에서는 망언으로 취급되어 그 때마다 반일감정이 비등했다.

히키아게샤들은 당연히 일본으로 귀환해야 했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1945년 일본 정부는 기능을 정지했고 실질적으로 GHQ의 하부 기관에 불과했다. 그 때문에 이들 히키아게샤들의 귀환에서 일본 정부는 제 기능을 하지 못 했다. 상당수의 민간인들이 자력으로 일본으로 복귀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식민지배를 받던 피식민지 사람들의 린치나 소련 점령군들의 약탈, 강간이 일부 일어나기도 했다.

한국에 체류했던 히키아게샤도 당연히 있는데 이들은 거의 대부분 무사히 철수했다. 한국이 일제강점기 와중에 겪은 일들을 감안하면, 이들이 집결한 곳이 부산 용두산공원 등 치안력이 유지되는 도시나 행정 소재지였기에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다는 말도 있다. 태평양전쟁 말미에 패전이 가까워 보이자 건국연맹 등과 총독부의 밀교섭으로 다수의 일본군과 히키아게샤가 안전히 철수할 수 있었다는 야사가 있다. 시골일 경우 보복 행위가 심했다고 하고, 일본과 가까운 경상도 지방의 보복이 가장 심했다고 전해진다.

이 중에는 한국에서 태어나 성장한 이들도 많았고, 아예 일본인 이주자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이루고 본적을 한국으로 둔 사람들도 있었는데, 패전 후 철수하게 되면서 그 마을은 사라졌고, 그들의 본적은 문서상에만 존재하는 곳이 되었다. 관련된 다큐멘터리도 국내에서 방송된 적이 있으며, 그 마을 출신자들도 고령이지만 아직 일본에 있다. 불이촌(不二村)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곳이었다. 일본어 독음으로는 후지촌이었다고 한다.

인터뷰에 출연한 그 마을 출신 노인이 말하길, 자신들은 그곳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일본으로 귀국할 때 자신들의 고향을 빼앗긴 마음이었고 억울한 생각도 있었지만, 후에 자신들의 고향인 그 마을 또한 조선인에게 부당하게 빼앗은 땅과 재산으로 이루어진 침략의 결과라는 것을 알고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고 나온다.

그 외에도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이 수십 년이 지난 현재 동창회가 열리면 일본에서부터 찾아오기도 한다. 역사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학교들을 보면 동창회 관련해서 가끔 목격담이 나오기도 하고, 일제강점기부터 쓰던 본관 건물을 새로 짓기로 하자 웬 양복 입은 구부정한 할아버지들이 찾아와서 쳐다보니 일본인이었다는 증언도 있을 정도.[1]

물론 일본 본국으로 철수하지 않고 그대로 한국에 남아서 귀화해 한국 국적을 가지게 된 일본계 한국인도 소수 있다. 60년대 한국에서 근무한 일본인 외교관의 수기에 따르면, 한일수교 후 한국인과 결혼했다가 사별한 일본인 여성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었다고 나온다. 주한일본대사관에서는 그런 여성들을 찾아내서 귀국시키곤 했는데, 그녀들 중 몇몇은 오히려 일본 생활을 적응하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그 마을에서 사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5. 일본으로 돌아가서[편집]

하여튼 식민 지배에 피해를 입었던 아시아인들 입장에선 가해자였지만, 정작 이들은 일본으로 돌아가 차별당했다. 패전 직후에 일본에선 일본 제국주의를 연상시키는 이들 히키아게샤에 대한 언급을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2] 이들의 경험이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수기문학이 한동안 인기를 끌기도 했다. 일본어판 위키백과에 따르면 이들이 들여온 문화가 군만두라멘집이라고 한다.

이러한 차별에는 히키아게샤들의 출신이 하류층이었던 영향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제는 자국 내의 가난한 사람들이나 빈농들을 모아 집단 이민단을 내보내곤 했다. 그러니까 히키아게샤들은 이미 당시 일본에 있을 때부터 하층민이었으므로, 귀국 후라고 해서 그 대우가 달라질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하층민이었던 이들 이주자들은, 식민지로 나가서는 현지인들을 핍박하며 수탈하는 침략의 첨병 노릇을 하며 특권을 누렸다. 또한 장기간 외국 체류에서 성장한 경우에는 그 나라에 동화된 상태라서 귀국 후에도 문화적 차이 등으로 인해 차별대우를 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점 때문인지 현재도 일본 대학에서는 입시 때 히키아게샤와 그 자손에 대한 특별전형을 실시한다.

일본 현지에서도 한동안 언급을 기피했던 점을 볼 때, 해외에서 이들을 다룬 문헌이나 연구는 극히 드물다. 웬만한 항목은 다 있는 위키백과 영어판에도 이들에 대한 항목은 직접적으론 없고 일본어판에만 있다.

일본어판 위키에 따르면 일본인 3,000명이 조선인민의용군과 중국 공산당군에 의해 학살당한 사건도 있다는 것 같다.

중국 쪽에선 그냥 중국인 행세를 하며 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식을 알던 중국인에게 맡기고 나중에 데리러 돌아오겠다고 했다고도 한다. 이런 일본 잔류 고아가 2천 7백명에 이를 정도였고, 중국인과 결혼한 일본인들도 그냥 남았다. 그 숫자도 4천명 정도 됐다고 한다. 그 외에 그냥 중국인 행세하고 남은 일본인은 더 있을 걸로 보인다. 남은 일본인들 중 일부는 문화대혁명 때 조리돌림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1970년대에 중일수교가 복구되면서 일본 정부는 이들을 일본으로 귀국하도록 시도했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자기가 일본인인지도 몰랐고 일본어도 90% 정도가 못 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과 혈연 관계가 있으면 영주권을 주는 법률에 의해 한 사람의 일본인과 친척을 맺은 수십 명의 중국인들이 넘어오는 일도 있었다. 짐작한 대로 이들은 차별당했고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기도 했다. 일본어판 위키에 따르면 이들의 2세, 3세가 일본에서 마피아가 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하는 걸 보면 가이진(外人) 인식은 완전히 불식되지 않은 듯하다.

히키아게샤는 한국인 입장에서는 복잡미묘한 주제이다. 이들이 일본에 돌아가 차별을 당하고 그런 인식이 이들의 문학이나 미디어에서 드러나고 있어 동정심이 들기는 하지만, 한편 이들이 식민지배의 한 축을 담당했던 자들임을 고려하면 마냥 동정적으로 바라보기는 어려운 존재이다. 한국에서 이들에 대해 다룬 책으로는 《조선을 떠나며》가 있다.

6. 실제 사례[편집]

  • 이향란(李香蘭,1920-2014) - 본명은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 이향란은 예명으로, 중국어로는 리샹란, 일본어로는 리코란이라고 읽는다. 중국 봉천성(현재의 랴오닝 성) 출신. 1943년에 중국에서 항일의식 고취를 위해 아편전쟁 100주년 기념으로 제작한 만세유방(萬世流芳)에서 주역으로 출연하여 중국인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다. 그런데 1938년에 배우로서 데뷔했던 곳이 만주영화협회였고, 전속배우로서 활동한 경력이 전후에 문제가 되었다. 당시에는 중국인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일제의 선전영화에 계속해서 출연했으니 한간죄가 성립하게 되고, 그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까지 갔었다. 중국어 실력이 꽤 되었기 때문에 일본 호적을 제출하기 전까지는 모두들 중국인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인이라는 게 확인되어 국외추방의 형식으로 귀국했다. 이 때 재판을 담당한 재판관은 '본 법정은 중국인이면서 중국을 배신한 한간을 재판하는 곳이므로 일본국적을 완전히 입증한 당신은 무죄이다. 하지만 논리상, 도의상의 문제는 하나 남아있다. 그것은 중국인의 이름으로 '지나의 밤' 등 일련의 영화에 출연한 것이다. 법률상 한간재판과는 관련없으나 본 법정은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의견을 덧붙였고, 이에 그녀는 '젊어서 그런 게 아니고 생각을 잘못했다는 걸 인정하겠습니다.'고 사죄를 했다고 한다. 후에는 홍콩에서 배우로 출연하고, 동시에 주제가 앨범이 발매되면서 다시 이향란의 이름을 중국어권에서 부활시키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참의원에서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초기에는 다나카 가쿠에이와 관계가 있었지만 록히드 사건 이후로는 미야자와 파로 돌아선다. 2014년 9월 14일 별세.
  • 나리타 유타카(成田豊, 1929-2011) - 일본 최대의 광고 기업인 덴츠의 전 회장으로 천안 출신이다. 다만 사람들에게 천안이 어딘지 설명하기가 귀찮아서 서울 출신이라고 설명했다고. 한국에서 자란 배경 탓인지 한일관계 개선에 신경을 썼다.
  • 미후네 토시로(三船敏郎, 1920-1997) - 일본의 유명 영화 배우. 중국 칭다오에서 사진 기사인 일본인 부부 밑에서 태어나서 유년기를 중국에서 지내다가 2차대전이 일어나면서 군대에 징집되어 1940년에야 일본에 가봤다.
  • 도미시마 다케오(富島健夫,1931.10.25~1998.2.5) - 일본의 소설가. 그 유명한 <여인추억>의 작가다. 조선 경성 출생.
  • 아카츠카 후지오(赤塚富士夫) - 일본의 유명 개그 코미디 만화가. 대표작으로 오소마츠 군이 있다. 만주국의 려허성에서 관동군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패전 직후 아버지가 소련으로 연행되어 남은 가족들과 자력으로 일본에 귀향하였고 주변 이웃들에게 많은 따돌림을 당한 경력이 있다.

7. 비슷한 경우[편집]

대표적으로 프랑스의 피에 누아르(Pied-Noir)가 있다. '검은 발'이라는 뜻을 가진 이들은 식민지 알제리에 살던 프랑스인들을 가리키는 말로, 1960년 당시 100만명 이상이 살고 있었으나 알제리 전쟁 여파로 모조리 프랑스로 내쫓겨났다. 2000년대 와서 이들이 알제리에 있는 재산 보상하라 이렇게 고집을 부리지만 알제리 측에게 코웃음 치며 무시당하고 있다. 피에 누아르로 유명한 인물이라면 알베르 카뮈이브 생로랑이 있다.

8. 창작물에서[편집]

  • 명가의 술 2부 - 가난한 소작농에게 만주국의 토지를 준다며 만주로 이주시키는 상황이 나온다.
  • 고바야시 마사키의 1962년작 영화인 인간의 조건 3부는 관동군으로 참전했다가 일본으로 돌아가는 주인공 카지의 관점에서 히키아게샤 이야기도 일부 다루고 있다.
  • 게임 용과 같이 제로 : 맹세의 장소의 핵심 조연인 타치바나 테츠와 마키무라 마코토(본명은 소교) 남매 역시 히키아게샤 출신.[6] 타치바나는 집안 출신이 출신이라 사회적 냉대 속에 15세 때부터 삼합회에 들어갔다는 언급이 있고, 중국인들로부터 멸시를 받는 걸 참다 못해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왔다.[7] 마코토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오빠를 찾으러 왔다가 그 오빠의 오른팔인 오다 준[8]에게 실명 + 인신매매 크리로 인생 막장 테크를 타나 싶다가(...) 때마침 팔려간 조직과 세력권 전쟁을 벌이던 본토 삼합회 청부업자였던 리웬하이에게 우연히 발견되어서 거두어졌다. 이 남매의 사연들을 듣고 있자면 4편의 불행 남매였던 사에지마 타이가·사에지마 야스코 남매 이상으로 안구에 습기가 찬다(...)[9] 거기다 타치바나는 친동생과 해후하지도 못한 채 결국...
  • 소설 1Q84 - 남자주인공인 가와나 덴고의 아버지는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서 중일전쟁 중에 만주로 이주하여 농사를 짓고 살았으나, 일본의 패전으로 인해 본국으로 추방당한다.

[1] 일본인 졸업생들이 귀국 당시라며 보여준 사진을 보면, 한국 학생과 일본 학생이 양쪽으로 도열해서 서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충공깽.[2] 당장 조선을 떠나며란 책에서도 이들이 귀국한 뒤 겪어야 했던 실상들이 상세히 적혀있다.[3] 광복 이후 경성중 건물을 미군정이 인수해 오늘날의 서울고등학교가 되었다.[4] 이계진 당시 아나운서가 쓴 책인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딸꾹!'에서도 나온다. 이름이 도시가스처럼 들릴 수 있어서, 이 사람이 나오는 뉴스에서는 '마에다 (주한일본)대사'라고 하면 그만인데도 장난삼아 일부러 이름까지 넣는 일도 있었다고.[5] 재조선 일본인을 다루긴 하지만, 일본인의 입장에 치우친 편견으로 가득찬 주의가 필요한 책이다.[6] 대놓고 히키아게샤라고 불리지는 않고 "중국 잔류 일본인 출신", "잔류 고아"라는 식으로 간접 언급된다.[7] 일본에선 반대로 또 중국인 취급 받았다는 등 여간 고생이 심한 게 아니었다는 언급이 있다.[8] 물론 오다도 타치바나도 전혀 몰랐다.[9] 남매끼리 극장에 갔는데 어둠 속에서 주변 중국인들에게 온갖 위협을 당했다거나, 여동생 마코토는 기껏 혈육이라고 해서 어머니랑 일본에 있는 할아버지를 찾아 왔더니 처음에만 환대하고 말이 안 통해서 다시 냉대, 그래서 기껏 중국어를 까먹을 정도로 일본어를 배웠더니 막상 어머니가 적응 못하고 자살. 더 골때리게도 그 할아버지는 "한 평의 땅"을 알박기 해놓고 킬러 라오구이에게 살해당하는 바람에 난데없이 상속권자가 된 마코토는 순식간에 땅을 노리던 도지마구미의 타겟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