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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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2. 정치/경제/사회
2.1. 세계2.2. 한국
3. 경제4. 문화
4.1. 음악
4.1.1. 서양 음악4.1.2. 한국 음악4.1.3. 일본 음악
4.2. 미술4.3. 게임4.4. 만화/애니메이션
4.4.1. 대한민국4.4.2. 일본
4.5. 방송4.6. 영화
5.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
5.1. 한국5.2. 해외
6. 이 시대에 시작된 것들7. 이 시대에 쇠퇴한 것들8. 이 시대의 상징들
8.1. 인물
8.1.1. 정/관계
8.1.1.1. 대한민국8.1.1.2. 해외
8.1.2. 재야운동가8.1.3. 재계8.1.4. 방송/연예계
8.1.4.1. 대한민국8.1.4.2. 해외
8.1.5. 스포츠
8.1.5.1. 대한민국8.1.5.2. 해외
9. 1960년대생10. 1960년대에 들어가는 해

1. 개요[편집]

서기 1960년~1969년까지의 연대시기. 전후 세대(베이비 붐)를 맞이하게 된 연대이자 경제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발전 및 성장기의 과정을 거치는 시기였기 때문에 경제의 태동연대라고도 불린다.

68혁명히피로 대표되는 일명 저항의 시대로도 대변된다. 성적, 문화적, 정치적 자유주의가 확산된 때 역시 1960년대였으며, 이때를 기점으로 서구권이 사회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어 우리가 아는 자유의지주의적이고 개방적인 모습으로 변했다. 또한 현재 우리가 접하는 여러 제품과 물건들의 기본 형태도 이때 잡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비틀즈등 영국의 밴드들이 대중음악과 세계 문화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기도 했다.

2. 정치/경제/사회[편집]

2.1. 세계[편집]

  • 서양
1960년대, 프랑스 파리의 모습

현대사회의 표준점이 정립된 시기이다. 인권의 개념이 구체화 되고, 그것이 대중화된 시기이다. 비록 68혁명으로 대변되는 청년들의 반발은 명목상 실패했지만, 이를 통해서 사회 전반은 크게 성숙했다. 대표적으로 60년대 이전의 미국은 권위적이며 인종차별적인 국가였으며, 이 시기를 거치면서 급격히 민주화와 인권중심으로 변화된다.[1]

군사적으로 냉전이 잠시 격해졌다. 1961년의 서베를린 위기, 1962년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미국존 F. 케네디소련니키타 흐루쇼프는 정면으로 충돌했다. 하지만 다행히 소련의 양보로 인해 핵전쟁은 피하게 되었다.

외교상으로 이때 들어서 대한민국미국 등의 일부 국가를 넘어서 6.25 전쟁에 참전하였던 자유진영 국가를 비롯해 중립국가 그리고 범아프리카 일부 국가 등과 외교관계를 활발히 맺으면서 국제적 위상을 높이려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는 아프리카의 식민지들이 대거 독립하면서 인도(자와할랄 네루), 이집트(나세르) 등과 함께 유엔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환경과도 관련이 있다. 1960년은 대표적인 아프리카의 해로 불린다. 1967년에는 동남아에서 ASEAN이 성립되었으나, 한국처럼 서구식 민주주의 실험이 한계로 접어들자 군사쿠데타가 점차 벌어져 비민주적인 체제로 전환되었다.

과학기술의 측면에서는 50년대 말의 스푸트니크 쇼크에 이어서, 60년대는 우주기술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미소양국의 'Moon Race'가 치열했다. 이 문 레이스의 정점은 주지하다시피 1969년 최고의 이벤트였던 아폴로 계획에 따른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반면 소련은 N1 로켓 발사에 실패하면서 달착륙 경쟁은 포기하고, 이후 우주정거장 건설로 나아간다.
Anti-Vietnam War Movement Documentary

사회적으로 시민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였다. 이는 베트남 전쟁과 결부되어 미국 내에서는 권위주의와 전쟁에 대한 회의감을 느낀 청년이 주도가 된 히피 문화를 촉발시켰다. 대표적인 것이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있다. 유럽에서는 청년들의 불만이 68혁명프라하의 봄의 형태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기성세대와 권력에 대한 저항은 단순히 청년만의 것이 아니었다. 이는 학계를 비롯해서 사회 전반에 퍼져나간다. 실제로 60대 미국은 사실상의 노예제도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유색인종차별은 매우 당연한 상식이었고, 강제적 거세가 진행되었던 시기였다. 60년대 대한민국의 모습이나 미국의 모습이나 사실 다른 것이 없을 정도였다. 그것이 모조리 바뀌게 되는 시기가 60년대 이다. 미국의 사회가 얼마나 보수적이며 차별적이었는지는 트리얼 시카고 7을 통해 볼 수 있다.[2]

비록 이러한 운동이 소련의 프라하의 봄 진압과 리처드 닉슨의 당선으로 인해서 큰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사라졌다고 평가하지만, 이러한 운동과 경험을 통해 미국사회는 분명하게 변화하였다. 시민의 인권과 흑인차별이 본격적으로 대두되면서 흑인차별조치가 점점 사라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게이 등 소수자의 인권이 신장되는 기점이 된다.

존 F. 케네디, 마틴 루서 킹 목사, 맬컴 엑스,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되는 격동의 시기이기도 했고, 종교적으로는 요한 23세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면서 가톨릭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 일본
이 당시 일본은 고도성장기이자 혁명의 시대로, 1956년 이후 전전시대 수준으로 회복한 일본 경제는 성장에 성장을 더해 1961년부터 '소득배가계획'을 실시해 흑백TV-전기 세탁기-전기 냉동고 3종 신기를 필두로 국민들의 생활수준을 윤택하게 만들었다. 1964 도쿄 올림픽 개최 후 경제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여 1965~1970년까지 '이자나기 경기'로 호황세를 더했다.

반면 1955년 자민당 출범 이래 거듭 탄압받은 일본의 좌익세력은 강성화되어 사회적으로 동요됐고, 학생운동전학공투회의를 중심으로 더 치열해졌다. 이들의 불만은 1960년 미-일 안전보장조약(일명 신안보조약) 체결 후 미국이 반공전선 교두보를 일본에 떠넘기면서 더 격화됐고, 거기에 탄압받은 좌익세력의 원한과 자민당의 독주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더해져 5월 안보투쟁으로 번졌다. 그러나 이 투쟁은 물거품이 되어 되려 자민당 득표율 감소에도 야당의 다당화 현상이 두드러졌고, 국민들은 경제에 더 관심을 지녔다.

이에 더 절망에 빠진 일본의 좌파운동세력은 1968년 도쿄대 야스다 강당 사태 같은 폭력과 테러를 일으키며 투쟁 방식에 관한 논쟁과 세력 다툼(우치게바), 국민여론 악화 등으로 점점 사라져갔고, 1972년 아스마 산장 사태 이후 거의 사라지고 만다. 다만 1960~70년대는 일본의 고도성장기였고 가난하던 제국 ~1950년대 시절을 지나서 이때부터 일본은 분위기가 밝아졌다. 1980년대에는 선진국에 진입했으니 말 다 한거다.

2.2. 한국[편집]





당시 영화인 <수학여행(1969)>에서 반영된 1968년경의 서울 모습.[3]

1959년 3월에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대선 승리를 위해 '마지막 카드' 최인규를 내무부장관으로 임명한 뒤, 정/부통령 지명까지 그에게 맡겨 초석을 마련했다. 더 나아가 선거 날짜도 야당과 여론의 반발을 무릅쓰며 종전의 5월에서 3월로 앞당겼으며 11월에 최인규 장관은 지방자치단체장들까지 포섭하며 공무원 부정선거 개입을 지시했다. 대선이 시작되자 자유당은 4할 사전 투표, 3~9인조 투표, 완장부대 동원, 유권자 명부 조작, 경찰 배치 등 온갖 비열한 수법을 쓰며 자유당 정권 연장을 기도했다.

이에 민주당도 1959년 11월 대통령 후보에 조병옥, 부통령 후보에 장면을 각각 지명했으나, 조병옥 후보는 선거를 한달 앞둔 2월 15일, 미국에서 치료받던 도중 사망했다. 선거를 3월에 빨리 치른 탓에 이승만은 사실상 단독 후보가 됐고, 이승만의 추종자들은 이승만의 고령 등을 고려하여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써서 후계체제 포석을 다지려고 했다.
위와 같은 자유당의 행태에 대한 반발은 1960년 2월 28일 경북 대구에서 일어났다. 경북고 측이 민주당 유세에 참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요일인 당일에 학생들을 강제 등교케 하자, 이에 학생들이 정부의 불법적 선거 개입을 비판하는 시위를 벌였다. 3월 15일에 민주당 마산시당 간부들의 시위를 계기로 시민 수천명이 개표장 근처에서 2차 시위를 벌였다. 이에 경찰들이 발포를 감행하여 8명이 사망하고 80여명이 부상하는 등의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같은 날 개표에서 이승만은 88.7%로, 이기붕은 79%로 각각 당선됐다.

4월 11일 아침, 경남 마산에선 한달 전 경찰에 최루탄에 맞아 숨진 고교생 김주열의 시신이 앞바다에서 건져올려지자, 분노한 시민들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에 이승만은 시위대의 배후에 공산당이 있다고 몰아붙였으나, 시위는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동월 18일 서울에서 고려대 학생들이 태평로 국회의사당에서 시위를 하고 학교로 돌아오다가 청계천4가 근처에서 반공청년단 소속 깡패들에게 구타당했는데, 이 사실이 다음날 언론에 크게 보도되어 학생과 시민들이 더욱 분노해 거리로 나섰다. 이에 정권은 경찰들을 동원해 무차별 발포하고 계엄령까지 선포했으나 국민들의 저항을 잠재우기는 어려웠고, 군인들조차 시위 진압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승만은 이에 당황해 내무 및 법무부장관을 잘라가며 수습책을 내세웠으나, 오히려 국민들은 부정선거 무효에 이어 이승만의 퇴진을 요구했다. 자신을 그토록 지원하던 미국조차도 등을 돌리자 이승만은 26일에 하야했다. 서중석 교수는 4.19를 8.15 광복에 이은 '제2의 해방'으로 표현했다.

이승만이 사임하자 과도정부 수반이 된 허정은 정치 개혁을 '비혁명적' 방법으로 하고, 한일관계 정상화, 부정선거 처벌, 확고한 반공정책 강화 등을 내세운 시정방침을 내세웠으나, 오히려 부정선거 관련자와 부정축재자 등의 처벌에는 소극적이고 경찰 인사에서도 발포 명령자들을 임명하는 등으로 혁명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 국민들의 반발을 샀다. 6월 15일에는 내각책임제와 국회 양원제를 주요 골자로 한 개헌안을 통과시켰고, 이에 따라 7월 29일에 총선을 치렀다.

총선 당시 사회대중당과 한국사회당 같은 혁신계가 등장해 눈길을 끌었으나, 장면이 이끄는 민주당이 175석으로 과반을 넘어 당선됐으며 대통령에는 구파의 거두 윤보선, 국무총리에는 신파의 거두 장면이 각각 선임되어 '제2공화국'이 출범됐다. 12월에는 역사상 최초로 지방선거를 치렀으나 투표율은 저조했다. 집권 후 장면 내각은 당면 과제인 민생 안정과 경제 발전을 위해 국토개발사업 등을 실시해 경제 재건을 시도했고, 1961년 4월에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안'을 완성했다. 그리고 공무원 공채를 처음 실시하고 '중소기업협동조합법' 등을 만들어 중소기업 육성도 시도했다. 다만 미국의 원조에 의지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한 한계점을 지녔다.

4.19 이후 사회 각계각층에 민주화의 움직임이 격렬히 일어났는데, 학생들은 학원 민주화운동을 벌이고, 노동 및 청년운동도 같이 활발해졌다. 다른 한편 3.15 부정선거의 책임자와 이승만 때의 부정축재자에 대한 처벌, 백범 암살과 6.25 전쟁 때 국군의 민간인 학살사건 등과 같은 과거사 청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들보다 더 두드러진 건 통일운동이었는데, 1960년 하반기 들어 김용중과 김삼규 등의 중립화 통일론이 잡지 같은 매체에 소개되면서 점차 형성됐다. 학생과 혁신계는 1961년 1월 '민족자주통일협의회(민자통)'을 만들어 자주-민주-평화 3원칙 아래 남북협상을 시도했다. 이들은 남북한 사이의 평화통일을 제창했으며 동년 2월 '한미경제협정 반대투쟁'을 계기로 민족해방론도 내포했다.

그러나 장면 내각은 신-구파 사이의 권력다툼에 치중한 탓에 이러한 사회적 욕구를 수용할 수가 없었고, 미국 역시 장면 내각을 고깝게 여겨서 정국은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부정선거 관련자 및 부정축재자 처단에는 소극적이었으며, 오히려 1961년 3월에는 '반공임시특별법(반공법)' 및 '집회 및 시위 운동에 관한 법률(데모규제법)'을 각각 만들어 민주화 흐름을 억압하려 애썼다. 또한 혁신계 주도의 통일운동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으며 일반 대중들도 좌우 대립과 6.25 전쟁으로 축적돼 온 레드 콤플렉스 탓에 사회주의 등 진보세력에 대해 혐오하는 의식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을 주축으로 한 일부 군인들이 소수의 병력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뒤, 장도영 중장을 내세운 '군사혁명위원회'를 통해 비상계엄까지 선포하여 실권을 장악했다. 5월 19일부터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고치고 6월에는 '국가비상조치법'을 만들어 장도영을 쫓아낸 뒤, 7월에는 박정희가 의장이 되었다. 최고회의는 '반공'을 국시로 하여 경제 개발과 사회 안정을 내세워 부정축재자 처벌, 폭력배 소탕, 농어촌 부채 탕감, 농산물 가격 안정, 화폐 개혁 등을 시행했지만 이마저도 군사정변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으로, 별 성과가 없거나 흐지부지됐다. 더 나아가 증권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등 '4대 의혹 사건'으로 경제가 악화되면서 국민들은 '신악이 구악보다 더하다'고 분통해했다.

다른 한편 군사정부는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정보정치를 확립했고, '반공법'을 만들어 국민 통제를 강화했다. 국회와 정당을 해산하고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규제했으며, 집회/시위도 금지시켰다. 군정을 비판해 온 언론들과 혁신계 세력들을 탄압했다. 이런 식으로 사회 전반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 군사정부는 민정으로 바꿔서 계속 권력 장악을 기도했고, 1962년에는 대통령 중심제 강화와 국회 단원제를 골자로 헌법을 고쳤다. 이듬해에는 박정희 등의 주도로 민주공화당을 만들었다.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선 '사상논쟁' 속에서도 군복을 벗은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민정당 후보를 꺾어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박정희가 이끈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국가 주도의 산업화를 국시로 내세웠다. 이는 이승만 정부와 장면 내각 시절 세워졌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1차 계획은 장면 정부의 계획을 대부분 차용해 기존의 연평균 5.2%성장을 7.1%로 끌어올리는 데 중점을 둔 경공업 중심의 경제 발전을 꾀했으나[4] 2차 계획부터는 박정희 정부 측의 독자적인 중공업 투자와 수출 산업 투자에 비중을 높이기 시작했다. 위와 같은 일환으로 한일 국교 정상화와 베트남 전쟁 참전도 병행됐다.

특히 한일회담에서 국민들의 관심은 일제의 침략과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배상에 집중됐지만, 정부는 '제2의 이완용이 되더라도 한일 국교를 성사시키겠다'는 심정으로 차관 등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데 치중했다. 이에 많은 학생과 시민, 언론들은 굴욕적 대일 외교에 항의하며 1964년 3월 23일에 대학생 4,000여명이 김종필 귀국을 요구하는 시위를 했고, 5월 20일에는 한일굴욕외교반대학생총연합회의 주도로 서울대 문리대에서 벌어진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으로 이어졌다. 드디어 6월 3일, 서울 시내 중심부에서 대대적으로 한일 외교 반대는 물론,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6.3 항쟁) 이에 정부는 비상계엄과 휴교령으로 반대운동을 탄압했고, '언론윤리위원회법'을 통과시켜 언론 통제도 시도했다가 언론계의 반발로 잠깐 보류됐다.

위와 같은 반발에도 불구하고 1965년 2월 20일 한일협정은 가조인됐고, 이에 학생과 지식인들이 비준반대 투쟁까지 벌였지만 정권은 대학 및 고등학교를 닫고 위수령을 발동해 탄압했다. 이런 가운데 12월 18일에 협정이 비준되어 동북아시아에서 공산주의 방어를 위한 한-미-일 공동 안보체제가 형성됐다. 베트남 파병도 6.25 전쟁 때 우방 미국이 한국을 지켜준 보답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실시했는데, 그 댓가로 경제 개발에 필요한 기술과 차관을 미국에서 들여온 후 파월장병들의 송금과 군수품 수출, 남베트남 건설사업 참여 등으로 어느 정도 외화를 벌어 한국 경제에 밑거름이 됐다. 그러나 이 전쟁으로 한국군 5,000여명이 희생됐고, 고엽제로 인한 환자들도 배출됐다. 더 나아가 국군이 베트남전에서 벌인 양민 학살행위도 훗날 비판을 받았다.

이 2차례의 경제발전 계획과 그로 인한 성공적인 경제성장 및 인프라 구축을 통해 박정희 정부는 1967년 대선과 총선에서[5] 상당한 표 격차로 승리했는데, 근대화 열풍 외에도 윤보선과 유진산, 유진오 등 늙은 정치가들이 주축인 야당 측의 고리타분한 행보도 한몫했다. 하지만 이 부정한 선거운동으로 인해 전국적인 반발이 일어났으며, 그로 인해 인혁당 사건과 통일혁명당 사건, 동베를린 간첩단 조작 사건이 일어나고 민주주의적 후퇴가 일어났으며, 3선 개헌을 위해 김용태를 필두로 한 김종필계를 숙청하는 등 1인 독재 체제를 다지기도 했다. 교통 부문에서는 1968년부터 2년간 경인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를 개통시켰다.

남북관계에선 여전히 적대관계 일색이었다. 1960년 4.19 혁명 후 북진통일론은 폐기됐으나

하지만 간편식품 분야에서는 여전히 발전이 더뎠다. 이 때문에 정부를 중심으로 삼양라면을 시작으로 이 때부터 한국에서 혼식이나 라면(분식) 식사문화가 장려되었다. 또한 을 갉아먹는 떼들 때문에 를 잡자, 쥐 잡기 운동이 민간 곳곳에서 성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간편식 문화는 이후 1970년대가 돼서야 두드러지게 발전한다.

1955년을 시작으로 1960년대는 한국 역사상 최대의 베이비붐 세대가 태어났다.[6] 이른바 386세대. 이 때문에 지금과는 반대로 산아제한정책이 실행되었다. "콩나물 교실"도 부족해 오전, 오후반의 2교대 수업을 한 것도 흔한 일이었다.

일제 말기와 해방을 겪던 1940년대 출신들이 이 연대에 들어서 해방 세대 첫 성인으로 성장하게 되었던 때이기도 하였는데 구한말과 경술국치를 겪었던 당시 30대 이상 세대였던 1900년대 ~ 1930년대 세대들이 망국의 통한을 비롯해서 일제의 간악무도한 만행 등을 눈과 몸으로 겪었기 때문에 일제의 만행을 많이 접해보지 못했거나 해방을 맞이하였던 세대들이었으니만큼, 이들에 대한 기대가 꽤 컸었던 편이었고, 또한 해방 후의 조국의 미래를 짊어져야하는 과제를 안기도 하였기에 더욱 그렇다. 그리고 대일 외교굴욕에 맞섰던 6.3 항쟁을 통해서 반일감정을 뿌리깊게 이어나가는 세대들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 태어났다는 1950년대생들이 10대 시절을 맞이하게 되었던 때이기도 하다. 태어나자마자 전쟁을 겪게 되었고 피난까지도 갔기 때문에, 이들의 성장은 그 당시 정서로 따지자면 기대 이상이었던 편. 과외금지조치가 이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다.

3. 경제[편집]

한국에서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수립되어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게 된다. 해당 문서와 한강의 기적 참고. 이 시기의 한국이 로스토우의 도약기에 해당했다는 것이 통론이다.

독일과 일본에서는 1950년대부터 시작된 전후 경제 회복과 성장의 결과가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으며, 두 나라는 서방진영에서 미국에 이은 2, 3위의 경제대국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4. 문화[편집]

4.1. 음악[편집]

4.1.1. 서양 음악[편집]

1960년대는 음악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로, 이 시기를 기점으로 스탠다드 팝, 재즈 등이 쇠퇴하고 '락'이라는 장르가 완전한 음악의 대세로 자리잡게 된다. 1960년대 이전의 노래를 들어보면 굉장히 클래식, 고전적인 느낌이 들지만, 1960년대 이후의 노래를 들어보면 고전보다는 '그냥 옛날'이라는 느낌이 든다.[7]

1950년대 후반 폭발적으로 유행하던 로큰롤이 더욱 발전하여 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며 대중음악의 실세로 자리잡게 된다. 비틀즈를 통해 록 뮤직의 장르가 정의내려지고 여러 장르로 세분화되었다. 이는 단순한 유행이 아닌 대중음악의 큰 줄기로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의 침공'이라 불리우는 브리티시 인베이전이 시작되어 영국 밴드들이 대거 미국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던 시기였다. 비틀즈는 물론, 롤링 스톤즈도 최고의 인기를 누렸고 더 후킹크스, 크림도 큰 인기를 얻었다. 인기만 많은 것이 아니라, 그 수준도 뛰어나서 다수의 명반들이 60년대에 발표되게 된다.

미국의 경우 영국 밴드들 외에도 밥 딜런으로 대표되는 포크송이 인기를 끌었고,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한 서던 록이 대중적으로 유행하였다. 1960년대 초반 한정으로 비치 보이스를 위시한 여러 밴드들이 서프 뮤직을 유행시켰으나, 브리티시 인베이전 이후 서프 열풍은 한풀 꺾이고, 비치 보이스는 Pet Sounds를 시작으로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감행하게 된다.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사이키델릭 음악이 성행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히피 문화가 성행했다. 히피족들의 지지에 더불어 우드스톡 페스티벌 같은 음악 축제들도 크게 성공하게 된다.

백인들에게 로큰롤의 주도권을 빼앗긴 흑인음악계에도 큰 변화가 이 시기에 일어났으니 디트로이트의 모타운 레코드가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R&B, 재즈, 블루스와 같은 정통 흑인음악 장르를 기반으로 하는 대신 대중음악계의 트렌드를 빠르게 분석하여 시기마다 색다르면서 대중친화적인 노래들을 발표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이들은 로큰롤의 위세에 저물어가던 흑인 음악을 다시금 견인하고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끔 해주었으며 모타운 뮤지션들의 영향을 받아 펑크(Funk), 디스코, 그리고 현대식 댄스팝등의 장르가 새로이 탄생했다.

이곳 출신들도 화려한데 마빈 게이, 스티비 원더, 슈프림즈 등이 있으며 훗날 팝의 황제로 군림하는 마이클 잭슨 역시 유소년기에 잭슨5라는 그룹으로 모타운에서 데뷔해 인기를 얻으며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모타운 뮤지션 외에도 아레사 프랭클린, 레이 찰스, 제임스 브라운 등의 베테랑 흑인 뮤지션들이 1950년대의 R&B장르의 명맥을 유지하며 60년대 소울, 펑크(Funk) 장르의 탄생에 기여했다.

4.1.2. 한국 음악[편집]

국내의 경우 미8군 출신으로 대표되는 스탠다드 팝, 가곡 위주의 장르를 부르던 가수들이 큰 활약을 보였으며 패티김과 같은 가수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또한 일본의 엔카를 기반으로 미국의 블루스, 한국의 전통 민요등이 조금씩 뒤섞인 현 시대의 트로트 장르가 완성되어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했으며 이 중심엔 국내 가수 최초로 10만장의 앨범을 판매한 아이콘 이미자가 있었다.

여러모로 한국 대중가요계가 상업적인 성과와 시장성이 커진 최초의 시기이며 많은 가요관계자들이 입을 모아 진정한 한국가요계의 시작이라 일컫는 시기가 1960년대이다.[8]

4.1.3. 일본 음악[편집]

일본에선 1961년 신예가수 사카모토 큐가 발표한 <위를 보며 걷자>가 전국적으로 호응을 얻었고, 1963년에는 <스키야키>라는 제목으로 미국에 발매돼 동양인으로서 최초로 빌보드 핫 100 차트 1위를 땄다. 1962~1965년까지 고교생 출신의 가수들인 요시나가 사유리[吉永小百合], 하시 유키오[橋幸夫], 후나키 카즈오[舟木一夫], 사이고 테루히코[西郷輝彦], 미타 아키라[三田明]가 발표하는 청춘가요 (고교3년생,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 17살의 이 가슴에) 와, 청춘영화 (언제라도 꿈을, 고교3년생,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 저 구름에 노래하자, 키타쿠니의 거리)들이 인기를 끌었다.

4.2. 미술[편집]

앤디 워홀로 대표되는 팝아트가 본격적으로 유행하던 시기였다.

4.3. 게임[편집]

세계최초의 비디오 게임 스페이스워! 라는 단순한 컴퓨터 게임이 1961년에 개발된 후로, 게임이 개발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1970년대를 기점으로 점차 확대된다. 물론, 본격적으로 게임기가 등장한 것은 1970년대고, 현재 게임의 대략적인 형태가 잡힌 것인 1980년대.

4.4. 만화/애니메이션[편집]

4.4.1. 대한민국[편집]

1960년대 한국 만화계는 1950년대에 이어 명작으로 넘쳐난 '황금기'라 할 수 있었다. 1950년대 중후반부터 만화 유통경로가 서점에서 만화방(대본소)으로 옮겨가면서 부엉이문고나 크로바문고 등 만화방 만화책만을 내는 출판사가 생겨났고, 출판사와 만화방을 이어주는 지역별 중간조직 '총판'도 생겨났다. 당대를 대표하는 작가로는 소년만화계에선 김종래, 김산호, 박기당, 방영진, 오명천, 박기정-기준 형제, 손의성, 임창, 신동우, 고우영(당시 추동성), 경인(본명 김경언) 화백이, 순정만화계에선 엄희자, 박수산, 민애니, 권영섭 화백 등이 쟁쟁히 활약했다. 특히 김산호는 <라이파이 시리즈>를, 신동우는 <풍운아 홍길동>, 임창은 <땡이 시리즈>, 권영섭은 <봉선이 시리즈>, 오명천은 <산디만>, 방영진은 <약동이와 영팔이>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연이어 쏟아냈다.

그러나 계속될 줄 알았던 황금기는 1961년 5.16 쿠데타로 위기를 맞았다. 쿠데타 후 수립된 박정희 군정은 대한만화가협회와 현대만화가협회를 강제 해체하고 자율기구 '한국아동만화자율회'를 발족하도록 해 처음으로 만화 사전검열을 실시했고, 1968년 문화공보부가 '아동만화 정화대책'을 수립함으로써 '한국아동만화윤리위원회'가 발족돼 본격적으로 관 주도의 사전심의제도가 확립되었다. 1967년에는 이영래 회장이 진영문고 등 신촌 만화출판사들을 중심으로 규합한 후, 크로바문고와 제일문고, 부엉이문고 등 용두동 만화출판사까지 흡수해 '합동출판사'란 독점출판사 연합체를 만들어 어떤 경쟁자도 허용치 않는 무한독점체제를 구축했다.

애니메이션계는 한동안 관제 애니 및 광고용 애니가 주류였다가, 같은 시기 해외 애니메이션이 히트하자 애니 제작자들 사이에서 국산 애니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1967년에 신동헌 화백이 동생의 작품 <풍운아 홍길동>을 원작으로 국내 최초 컬러 장편애니 <홍길동>을 제작했다. 이 작품은 비용 문제 때문에 미군 항공필름을 재사용하고 포스터칼라로 채색하는 등 열악한 조건 하에서 만들어졌음에도 흥행에 성공했으며, 같은 해에 강태웅 감독이 국내 최초의 퍼펫 애니메이션 <흥부와 놀부>를 만들었다. 이후 1968년 <황금철인> 및 <손오공>, 1969년 <홍길동장군> 및 <보물섬> 등이 제작됐으나, 흥행에만 치중한 나머지 수준 이하의 작품이 만들어지는 등 부정적인 면도 있었다.

4.4.2. 일본[편집]

일본 출판만화계는 1959년에 <주간 소년 선데이> 및 <주간 소년 매거진>이 창간된 후 '주간 만화잡지 붐'이 일었다. 이를 계기로 1968년에 슈에이샤가 <주간 소년 점프>, 1969년 아키타 쇼텐이 <주간 소년 챔피언>을 각각 창간했으며, 특히 소년 점프는 타 잡지들과 달리 유명 만화가들을 주로 초빙하지 않고 모토미야 히로시, 나가이 고 등 젊고 전도유망한 만화가들을 중심으로 틈새시장을 노렸다. 1964년에는 일본 최초의 언더그라운드 만화잡지 <가로>가 창간돼 실험적인 작품들을 배출해냈다.

애니메이션계에선 1953년 TV 방송 시작 이후 제작자들이 한동안 막대한 비용 문제로 TV 애니메이션 제작을 주저했다. 다만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는 토에이 동화에서 갈고 닦은 애니 제작실력을 바탕으로 1961년에 사카모토 유사쿠, 스기이 기사부로 등과 함께 '데즈카 오사무 프로덕션'을 설립했고, 이듬해 실험작품 <어느 길모퉁이 이야기> 제작 후 '무시 프로덕션'으로 사명을 바꾸고 과감히 TV 애니메이션 제작에 접근했으며, 앞으로 발생할 적자를 메꾸기 위해 만화 원고료와 머천다이징 사업으로 재정 보충을 하는 쪽으로 확립해냈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게 1963년에 자신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최초의 장편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철완 아톰>으로, 이 작품은 후지TV를 통해 방영되며 TV 대중화의 바람을 타고 첫화 시청률 27,4%를 시초로 제4화 때 32.7%로 30%대를 깼으며, 이후 30%대 시청률을 웃도는 대성과를 거두었다. 더불어 '메이지 마블 초콜릿'에 첨부된 아톰 스티커 등 관련 캐릭터 상품까지 성공했고 제작사 역시 데즈카 오사무 팬클럽을 '철완 아톰 클럽'으로 변경해 어린이 팬 서비스 확대에 주력했다. 1964년에는 일본 애니제작사로서 최초로 미국 NBC에 <아스트로 보이> 라는 제목으로 해외 방영권 판매를 시작했다.

<철완 아톰>의 성공으로 각 애니 제작사들도 하나둘 TVA 시장에 하나 둘씩 뛰어들었다. TV 수입판매업을 하던 TCJ는 같은 해 9월 일본 최초의 성인취향 애니 <신선부락>을 제작했고, 10월에는 로봇애니 <철인 28호>를 제작해 아톰의 대항마로 급부상했다. 뒤이어 11월 7일에는 TBS로부터 처음으로 발주를 받아 <에이트맨>도 제작했다. 극장 애니메이션 제작에 몰두하던 토에이 동화다카하타 이사오, 야부시타 다이치, 야마구치 야스오를 필두로 <늑대소년 켄>을 제작해 11월 25일 NET를 통해 방영됐다. 그 사이 무시 프로덕션은 선구적인 제작방식을 모색하여 1964년 1월 25일 <철완 아톰> 제56화를 컬러로 처음 제작해 시청률이 처음으로 40%대를 돌파했고, 그해 가을에는 최초의 컬러TV 장편애니 <밀림의 왕자 레오>를 제작했다. 이 작품은 일본 작품으로서 최초로 해외 수출까지 염두에 둔 작품이다.

그러나 성공 뒤에는 어두운 면이 있듯, 애니 제작사들은 꾸준히 퀄리티 있는 작품들을 내놓았음에도 비용문제로 재정난이 심화된 데다, 정규직 제도의 문제점으로 인력난에 시달려왔다. 게다가 토에이나 무시 등 대형 제작사 애니메이터와 프로듀서들이 밤에 몰래 타사 작업까지 도맡았기에 '올빼미 애니메이터', '올빼미 연출' 등이란 호칭이 나돌았다. 1960년대 중반까지 승승장구한 무시 프로덕션에도 위기가 닥쳐왔는데, 스기이 기사부로 등 초기 제작진들이 서서히 퇴사한 데다 1965년부터 후지코 후지오의 일상물을 원작으로 한 <오바케의 Q타로>가 시청률 30%로 <철완 아톰>을 추월했고, 1966년에는 아카즈카 후지오의 개그물 <오소마츠군>이 돌풍을 일으켜 SF중심에서 일상물 중심으로 메인스트림을 변경했다. 심지어 츠부라야 프로덕션이 제작한 TV 공상특촬물 <울트라 Q> 및 <울트라맨>도 애니메이션의 인기를 위협했다.

1960년대 후반 들어서 <요술공주 샐리>, <비밀의 앗코짱> 같은 마법소녀물과 <거인의 별>, <타이거 마스크> 등 스포츠 근성물이 트렌드가 됐고, 1968년 도쿄대 야스다 강당 사태 등 학생운동의 과격화로 '아웃사이더 열풍'이 불었다. 당시 일본 학생운동의 주역들은 1948년을 전후로 태어난 '단카이 세대'였는데, 이들은 학생운동을 하면서 만화도 열심히 읽었기에 '한 손엔 아사히 저널, 다른 한 손엔 소년 매거진'이란 호칭이 붙었고, 이들은 사회의 주류에서 밀려난 아웃사이더에 대해 연민을 가졌다. 이들의 사고방식을 투영한 작품으로는 시라토 산페이의 <사스케> 및 <카무이전>, 츠게 요시하루의 <나사식>, 가지하라 잇키/치바 테츠야의 <내일의 죠>가 대표적이다. 같은 시기 애니메이션 업계에도 노조활동이 활발해 토에이 동화 내에서도 노조 소속인 오오츠카 야스오, 다카하타 이사오, 미야자키 하야오가 중심이 되어 회사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 <개구쟁이 왕자의 구렁이 퇴치> 등 실험적인 장편애니를 열성적으로 제작했으나 흥행은 실패했다.

4.5. 방송[편집]

서구권과 일본, 소련에서는 TV가 본격적으로 대중화되었을 때였는데, 특히 일본에선 1960년 컬러TV 방송이 아시아 최초로 개시됐고, 더 드리프터즈가 TV 코미디 프로를 주름잡아 1969년부터 불후의 개그프로 <전원집합>을 방송하는 데 일조했으며 1966년부터 후지TV에서 국민 만담프로 <쇼텐>이 방송됐다.

다만 한국에서는 TV가격이 매우 비쌌던지라 TV방송망의 확충이 대대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음에도 이때까지도 여전히 부유층의 전유물이었고, 따라서 라디오의 전성시대이기도 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 후 박정희 군정은 김지태로부터 MBC 소유권을 빼앗아 이듬해 5.16장학회에 헌납했고, 1961년부터 첫 TV방송을 진행한 KBS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소식>, <혁명의 아침> 등을 방영해 군사정권 선봉대 노릇을 하기 시작했으며 1962년에는 1기 공채탤런트를 뽑았다.

1964년에는 삼성그룹과 락희그룹이 공동으로 '라디오서울' 및 '동양TV방송'을 개국했으나, 경영권 분쟁을 거쳐 락희가 빠지고 삼성이 독자 경영했다. 1969년에 MBC 역시 TV 방송을 개시했다.

4.6. 영화[편집]

한국영화의 전성기로 손꼽히던 시절이었다. 전후수습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서 지방에서도 영화관이 대대적으로 늘어섰지만 TV는 아직은 매우 비싸서 향유할 수 있는 계층이 몹시 제한적이었던지라 자연히 영상매체는 영화가 주가 되었다. 물론 당대기준으로는 영화 표값이 마냥 싼 것만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대중적인 여가수단이었다. 한국영화도 1950년대에 비해 어느 정도 체계가 갖추워지면서 최전성기를 맞이했으며 한국영화가 영화시장에 차지하는 점유율도 점유율도 50~60%대를 기록했고 1969년에 절정에 달했다.

4.6.1. 해외[편집]

할리우드는 전성기로 불리던 클래식 시대가 1960년대 말 히피 열풍을 지나며 막을 내리게 된다. 이때 60년대 초중반을 풍미한 배우가 우리가 잘 아는 오드리 헵번, 마릴린 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9] 남배우로는 폴 뉴먼이 한 시대를 대표하는 미남이자 최고 대우를 받는 배우로서 군림했고 로버트 레드포드, 워렌 비티같은 배우들도 이 시기에 등장하자마자 큰 인기를 구가했다.

그리고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일명 뉴 할리우드) 시대가 열려서 기존의 보수적이었던 영화들과 달리 비교적 자유롭고, 더욱 폭넓은 장르들의 영화들이 제작되게 된다. 이 시대의 대표작들은 졸업, 이지 라이더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같은 영화들로 대표된다. 직전 시대 할리우드를 대표하던 말런 브랜도는 이 시기 쇠퇴기를 겪지만, 이후 1972년 뉴 할리우드 시대의 대표작 대부의 비토 콜레오네 역을 맡으며 재기한다. 현대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최고 연기파이자 원로로 대접받는 본좌들인 잭 니콜슨, 더스틴 호프만이 데뷔하여 신인으로서 첫 주목을 받은 시기이기도 하다.[10]

프랑스 영화의 전성기이기도 한데, 이때는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 같은 감독들이 '누벨바그'라는 독특한 영화 사조를 유행시켜 장폴 벨몽도, 알랭 들롱, 안나 카리나[11]같은 프랑스 배우들이 전성기를 맞는다.

전설적인 첩보영화 시리즈 007 시리즈가 시작된 연대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스튜디오 시스템에서 서서히 벗어나며 촬영 기법과 장르면에서 더 자유로워진 시대라고 봐도 무방하다.

5.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편집]

해당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 제외. 가상역사/SF물인 경우 ▼.

5.1. 한국[편집]

5.2. 해외[편집]

6. 이 시대에 시작된 것들[편집]

  • TV 방송: 1956년 한국 최초의 TV방송사 HLKZ-TV가 개국됐으나, 본격적인 시작은 1961년 KBS-TV부터다.
  • 종합적 품질관리(TQC): 1951년 미국 제너럴 일렉트릭 품질관리부장 아만드 V. 파이겐바움이 창안한 품질관리제도로 1960년대부터 미국 기업에 정착됐고, 1970년대부터 전 세계에 보급됐다.
  • 대한민국의 총기규제

7. 이 시대에 쇠퇴한 것들[편집]

  • 갑산파: 1967년에 박금철 북한 부수상이 숙청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 대한민국 부통령: 1960년 3차 개헌으로 폐지됨.
  • 대한민국 국회 양원제: 1962년 5차 개헌으로 폐지됨.
  • 대한민국 혁신계: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사실상 명을 다했다.
  • 북진통일론, 우리의 맹서: 1960년 4.19 혁명 이후 자취를 감췄다.
  • 폐지된 법령들
    • 축음기레코드취체규칙, 군정법령 제88호: 1961년 폐지.

8. 이 시대의 상징들[편집]

8.1. 인물[편집]

8.1.1. 정/관계[편집]

8.1.1.1. 대한민국[편집]
8.1.1.2. 해외[편집]

8.1.2. 재야운동가[편집]

8.1.3. 재계[편집]

  •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 정재호 삼호그룹 회장
  • 구인회 락희그룹 회장
  • 김연수 삼양사 회장
  • 남궁련 극동해운-대한조선공사 사장
  • 이양구 동양제과-동양세멘트공업 회장
  • 설경동 대한전선 회장
  • 홍재선 쌍용양회 사장
  • 이정림 개풍그룹 회장
  • 박흥식 화신산업 사장
  • 박두병 동양맥주 회장
  • 박용학 대한농산 사장
  • 이한원 대한제분 사장
  • 최성모 동아제분 사장
  • 최태섭 한국유리 사장
  • 전택보 천우사 사장
  • 정주영 현대건설 사장
  • 조중훈 한진상사 사장
  • 서갑호 판본방적 사장
  • 함창희 동립산업 사장
  • 김지태 한국생사그룹 회장
  • 강석진 동명목재상사 사장

8.1.4. 방송/연예계[편집]

8.1.4.1. 대한민국[편집]
남배우


여배우


아역배우


가수


코미디언


아나운서

  • 박종세
  • 강창선
  • 김찬식
  • 이정부
  • 최계환
  • 서기원
  • 임국희

성우

  • 이창환
  • 김수일
  • 오승룡
  • 류기현
  • 김성원
  • 백민
  • 김영배
  • 오정한
  • 조명남
  • 주상현
  • 김순원
  • 이혜경
  • 천선녀
  • 김수희
8.1.4.2. 해외[편집]

8.1.5. 스포츠[편집]

8.1.5.1. 대한민국[편집]
8.1.5.2. 해외[편집]
선수


지도자


구단

  • 농구
    • UCLA 브루인스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
    • 켄터키 와일드캣츠 (켄터키 대학교)
    • 텍사스 웨스턴 마이너스 (텍사스 웨스턴 대학교[20])
  • 대학 미식축구
    • 오하이오 스테잇 버카이스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 미시건 스테잇 스파르탄스 (미시건 주립대학교)
    • 노트르담 파이팅 아이리시 (노트르담 대학교)
    • 앨라배마 크림슨 타이드 (앨라배마 대학교 터스컬루사 캠퍼스)
    • USC 트로전스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 텍사스 롱혼스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캠퍼스)
    • 아칸소 레이저백스 (아칸소 대학교 파예츠빌 캠퍼스)

9. 1960년대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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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960년대에 들어가는 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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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아직도 진행중인 상황이다.[2] 시카고에서 반전시위운동을 폭력사태로 연관지여 기소한 사건에 보비 실이라는 흑인이 피고인으로 동석하게 된다. 보비 실은 자신의 변호인이 수술로 인해서 참석할 수 없으므로 재판연기를 요청하나 재판장이 거부했으며, 이후 재판장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자 하나 재판장이 변호인이 아니므로 변호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심지어는 애덤스 대 메케인 판례에 따른 자기변호를 요청하지만 이조차도 거부한다. 헌법상 보장된 권리조차 재판장이 무시한 것이다. 이러한 자기 권리가 침해된 보비 실이 항의의 의사표시를 격하게 하자 보비 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쇠사슬에 묶어서 피고인석에 앉힌다. 이것이 1969년 재판에 있었던 일이다. #[3] 영화 내용은 단순하다. 전라도 시골마을의(학교 이름이 선유도국민학교인 것으로 보아, 당시 전라북도 옥구군(현.군산시) 옥도면인 것으로 보인다.) 학생들이 힘겹게 돈을 모아서 서울 구경을 하고 돌아온다는 내용. 구봉서가 출연하기도 한 영화다. 제목은 1969지만, 촬영시기를 감안하면 1968년에 가깝다. 당시 주한미군 복무중이던 닐 미샬로프가 안양과 서울의 풍경을 촬영한 시기와 비슷하다.[4] 장면 내각의 계획을 차용해 실행하것은 1963년까지만 해당한다. 경제개발계획을 쓰이는 데 필요한 달러가 1억달러로 떨어져 이는 최초의 외환위기 였으며 이듬해인 1964년 수입대체 산업화에서 수출주도 산업화로 바꾸었다.[5] 여당에서 혼탁한 선거로 규정하고 일부 의원을 제명하였다.[6] 통계적으로 대한민국베이비붐 세대는 1955년생~1963년생으로 잡고 있다.(더 길게 잡자면 1974년생까지도 베이비붐 세대로 잡기도 한다.)[7] 사실 대중문화 자체가 1960년대를 기점으로 급변하며 1950년대까지의 클래식 느낌이 1960년대를 거치고, 특히 히피 문화를 지나며 거의 없어지게 된다.[8] 당장에 지금도 거물급 가수라고 평가받는 이미자, 최희준, 차중락, 오기택, 배호 등의 전성기는 모두 1960년대였다.[9] 이 셋은 사실 1950년대부터 유명한 배우들이었으나 1960년대 초까지 전성기가 지속된다. 테일러는 오히려 여배우로서의 위상으론 1960년대가 더 리즈였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청춘스타를 넘어서 연기파로 자리잡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10] 허나 이들은 주목을 받긴 했으나 이 시기에 전성기를 구가하진 않았다. 비주얼적으로 눈에 띄는 타입이 아니다보니 오히려 이후 1970~80년대에 연기파로서 걸출한 커리어를 쌓기 시작한다.[11] 사실 안나 카리나는 덴마크인이지만,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것이다.[12] 1966년 NCAA 디비전 1 전국대회 우승을 달성한 텍사스 웨스턴 대학교(현 텍사스 대학교 엘패소 캠퍼스) 농구부를 다룬 실화영화.[13] 영화 자체는 1980년대를 상징하는 명작이지만 극중 배경은 1963년이다.[14] 베트남 전쟁당시 혼란스럽고 어두운 뉴욕의 모습을 잘 묘사해서 호평을 받았다.[15] 전체적으로 60년대 후반~70년대 초 당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16] 극중 내내 1999년과 1969년을 오가면서 진행된다.[17] 배우 주용만의 부친.[18] 배우 조형기의 부친.[19] 가수 문희준의 외조부.[20] 현 텍사스 대학교 엘패소 캠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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