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KBS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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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발단4. 전개5. 언론들의 반응
5.1. 사설5.2. 칼럼
6. 이후7. 여담8. 출처9. 관련 자료10.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1990년 4월부터 6월까지 KBS 사원들이 방송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한 파업투쟁. 'KBS 4월 투쟁'이라고도 불린다.

2. 배경[편집]

1987년 6월 항쟁6.29 선언을 계기로 방송민주화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거기에 노동자 대투쟁에도 영향을 받아 방송사 단위로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뉴스비전 동서남북(KBS2)>이나 <MBC를 말한다>, <어머니의 노래(MBC)>와 같은 현대사 재조명 다큐, 탐사보도 프로그램 등의 제작이 활성화되기도 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정부 여당은 과거 독재시절 시녀로만 보았던 방송인들의 방송민주화 운동에 대한 불만을 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불만은 1989년 3월 KBS1에서 <광주는 말한다>라는 5.18 민주화운동 관련 다큐멘터리를 전국적으로 전파를 탈 때 민주정의당 대변인 박희태의 성명을 통해 잘 드러났다. 그는 "우리가 믿고 사랑하던 KBS의 품위, 양식 깊이가 그 정도 밖에 안 되는지 실망치 않을 수 없다."고 하여 공영방송 KBS가 어떻게 그런 프로그램을 방송할 수 있냐는 식으로 실망을 품은 채 개탄한 것이다. 이로써 노태우 정권은 개탄을 넘어 위기의식을 느끼고 방송민주화운동을 주시하지 않고 탄압에 돌입했다.

3. 발단[편집]

1990년 2월에 감사원은 KBS 직원에 대한 법정수당 지급을 '예산 변칙 지출'로 몰았고, 이어 정부는 방송민주화에 호의적이었던 서영훈 사장을 비롯해 윤혁기 부사장 등 임원 및 간부 4명을 해임시키고 서기원 서울신문 사장을 부임시켰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임명된 서기원 사장이 바로 낙하산이었으며, 1989년 서울신문 26일 파업 당시 노조에 강경한 입장을 내비친 인물이었다.

사실 KBS 특근수당 변칙지출 사건은 당사 직원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돈을 경리상의 실수로 절차상의 하자를 범한 채 1989년 12월에 몰아서 받은 기술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이 언론 왜곡보도로 KBS가 마치 노사합작으로 34억원을 횡령이라도 한 것처럼 세상에 퍼졌다. 이에 KBS 노조는 이러한 왜곡 보도에 대해 "악의에 찬 행위이거나 정확한 취재와 사실 확인에 게으른 언론이 일부 음모자들의 농간에 넘어간 선정주의"라고 비난했다.

사실 수상한 조짐은 서영훈 사장 해임 한달 전에도 있었는데, 그해 1월 24일에 검찰이 연예PD 6명을 배임수뢰혐의로 구속한 사건은 당시 신문들의 극성스런 선정주의적 보도경향에 힘입어 방송인들의 윤리성에 일대 치명타를 가했다. 당시 이 보도를 접한 사람들은 이를 우연의 일치로 보왔고 검찰의 선의를 믿고자 했으나, 나중에 해당 PD들은 검찰이 고문으로 공소사실의 대부분을 조작했다고 폭로함으로써 이 사건의 정치적 흑막에 대한 의혹을 강하게 부각시킨 바 있었다. 그 증거로 해당 PD들은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 회보 <프로듀서> 4월 1일자에서도 검찰이 방송에 대한 전문성의 이해가 전무한 상태에서 이들을 곡괭이로 때리거나 토끼뜀 등 온갖 기합을 주는 등 무리한 수사를 했다고 증언한 바 있었다.

게다가 2월 14일, 최병렬 공보처장관이 대통령에 대한 새해 업무보고에서 새 민간 TV방송 설립을 위해 1990년대에 방송법을 개정하겠다고 말한 것이 밝혀지면서 KBS의 수당 변태지급 파문은 결코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의혹을 짙게 했다. 또 정부는 1989년 4월에 설립된 '방송제도연구위원회'를 독촉하여 예정보다 한 달을 앞당긴 3월 31일에 민방 신설을 골자로 하는 보고서를 확정 발표케 했다.

4. 전개[편집]

민주화 바람을 타고 노동활동이 활발해지던 때에[1] 1989년 공안정국과 1990년 1월 '3당 합당'에 따라 공안통치로 돌입해 분위기가 역전되어 같은 달 현대자동차 쟁의 중 '무노동 무임금' 원칙 적용, 3월 현대중공업 노조 골리앗 투쟁 강제진압과 같이 노동운동 탄압이 강해졌고, 새 사장 부임과 함께 군사정권 시절 관제방송으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이에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언노련)과 KBS 노조[2]는 3월 6일 낮 12시 서울 태평로 언론회관 앞에서 '방송자주권 쟁취 결의대회'를 개최했고, 다음날 무소속 의원 이철은 <KBS 사태 진상보고서>를 통해 서영훈 사장 퇴임 전 정부의 외압과 안기부 개입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들은 한겨레와 일부 지방지들을 제외한 모든 중앙지들이 보도를 외면했다.

3월 8일 KBS 이사회가 서영훈 사장의 사표를 수리한 후, 4월 3일 3차 투표를 통해 서기원 사장 임명제청을 결의했다. 다음날 KBS노조는 비상대책위원회를 확대 개편 후 농성을 확대해 4일에는 '서기원 출근저지 특별감시조'까지 만들었다. 당초 4월 11일에 취임하려던 서기원 사장이 저지조에 의해 출근을 못하자 서 사장은 12일부터 청원경찰과 각 본부장, 국/실장 등 2백여 명의 호위를 받아 사장실로 출근했고, 경찰 측은 백골단 3백여 명을 여의도 본사에 투입시켜 사원 117명을 강제연행해 갔다. 이에 13일 비대위 측은 전국비상사원총회를 통해 서기원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송출기술부를 빼고 무기한 제작거부 투쟁에 돌입하였으며, 25일에는 3,000여 명의 조합원이 참가한 가운데 남산에서 여의도까지 '언론민주화쟁취요구 평화행진'을 진행했다.

이에 경찰은 30일 오후 사원총회의 분위기가 정상화 방안을 거부하는 쪽으로 기울자, 여의도 KBS 본사 주변에 전의경 3천여 명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사원들의 투표 결과가 예상대로 부결 쪽으로 나타나자 개표 종료 2시 30분 만에 KBS에 들어갔다. 경찰측은 밤 11시 45분에 '여의도 진압작전'이란 명칭으로 KBS 농성 강제해산에 돌입해 50여분 만에 본관 2층 로비에서 사원 333명을 강제로 끌고 갔다.

KBS 9시 뉴스 역시 파업으로 4월 12일부터 별도 스튜디오에서 진행했고, 박성범 보도본부장 겸 당시 KBS 9시 뉴스 앵커는 사원들의 파업 보도 요구를 묵살해서 KBS 사태를 보도하지 않자 노조원들이 스튜디오에 들어오면서 날씨와 스포츠 뉴스, 클로징도 하지 못한 채 12분만에 방송이 조기 종료되어 버렸다. 그 다음 날인 13일은 9시 뉴스 중단을 단행해서 내용을 엄청나게 간추려버려 당초 45분짜리가 13분으로 줄어든 채 뉴스가 나간 후 방송이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도 벌어졌다.[3]

타 방송사 노조들의 연대투쟁도 시작됐는데, MBC노조는 KBS 2차 경찰 투입 직후 비상대책위원회를 열었고, 그 결의에 따라 서울 본사는 5월 1일 10시에 비상총회를 열어 전면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19개 지방 MBC도 비대위의 결정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연대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이미 4월 23일부터 무기한 철야농성을 벌여왔던 CBS노조도 같은 날 MBC와 동시에 제작 거부에 돌입하여, 모든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음악만 내보냈다. 5월 2일엔 KBS-MBC 양 방송사 노조가 '구속동지 석방촉구 및 노태우정권 규탄대회'를 열었고, 5월 4일 안동수 비대위원장이 연행당하자 김철수 기획제작국 PD를 새 위원장으로 선출해 방송 정상화와 서기원 퇴진을 요구하며 10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결과적으로 이 파업은 노조의 역할을 공고히 했다는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후술할 언론들의 편파보도로 인해 폭넓은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날이 갈수록 내부 분열까지 겹쳐 어려움을 겪은 KBS 노조는 5월 17일에 파업을 중단하고 방송 정상화에 임했고, 안동수 노조위원장 등 노조 측 14명은 구속되었다.

5. 언론들의 반응[편집]

5.1. 사설[편집]

4월 12일 공권력 투입을 수반한 서기원의 사장 취임 이후 발생된 KBS 사원들의 방송파업에 대한 일간신문 사설 내용들도 하나같이 사원들에 대해 한결같이 비판 일변도였다. 한겨레만이 4월 14일자 사설 <언론계가 힘을 모아 KBS 살리자>를 비롯해 19일자 <서기원씨 사퇴가 유일한 해결책>, 21일자 사설 <정권의 '방송 장악'은 허망한 꿈>까지 세 차례에 걸쳐 KBS 사원들의 입장을 지지했을 뿐 나머지 8개 중앙지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부도 잘못됐고 KBS 사원들 역시 잘못했다는 소위 '양비론'을 펼쳤다. 거의 모든 사설들이 천편일률적으로 KBS에 대한 정부의 공권력 투입은 성급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한편, 파업을 하는 KBS 사원들에게도 '파업 그만하고 방송 정상화나 해라'는 식으로 본업 복귀를 촉구했다.

대표적인 예로 경향신문은 4월 14일자 사설 <KBS는 국민의 것이다>에서 "교조적인 논리에 얽매여 타협 없는 극한투쟁으로 치달을 경우 더 큰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는 식으로 KBS 사원들을 꾸짖었다. 국민일보 역시 사설 <방송은 일단 정상화시켜야>에서 "국가에 비상사태가 나거나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는 방송이 중단되지 않아야 한다"며 "국민을 경시하고 우롱하는 처사는 당장이라도 중지해야 할 것이다."고 밝혔다.

동아일보도 같은 날 사설 <심심찮은 KBS 사태>, 중앙일보 사설 <일단 방송은 제대로 하라>, 한국일보 사설 <우려되는 KBS사태>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했고, 4월 15일자 서울신문 사설 <방송은 정상화돼야>, 조선일보 사설 <KBS는 누구와 싸우나>에서도 파업을 맹비난하고 제작복귀를 촉구했다.

거기에 4월 19일 세계일보 사설 <방송부터 정상화시켜라>에서 "국민들은 방송사 내부 분쟁으로 알 권리를 차단당하고 있는 셈"이라며 다른 문제는 뒤로 미루고 방송을 우선 정상화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20일자 경향신문 사설 <방송은 정상화해야>, 중앙일보 사설 <KBS사태 수습의 원칙>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폈다.

5.2. 칼럼[편집]

대다수 중앙 일간지 칼럼들도 양비론을 펼치면서 KBS 사원들의 방송 정상화를 촉구했다. 다만 동아측 칼럼들만이 사설에 비해 비교적 KBS 사원들의 입장에 동조하는 성향을 보였다.

1990년 4월 15일, 서울신문 논설위원 송복 교수는 칼럼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라>에서 "이번에 KBS 노조가 하고 있는 행동은 철저히 남의 영역에 대한 월권행위"라고 주장하고 KBS 사원들이 "어떻게 얼굴을 들고 활보할 수 있겠는가"라며 의문을 제기하는 등 KBS 사원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조선일보 4월 18일자 홍사중 칼럼 <중단된 방송>에서도 비슷한 의견을 냈다.

4월 17일 동아일보 <동아시론>에서 박권상 당시 시사저널 편집인은 <KBS 사태의 실마리를 풀려면>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구체적인 주장의 개진 없이 사태해결 방법으로 영국 BBC처럼 우리 정부가 진정한 방송의 공영화를 스스로 정치철학으로 삼고 있느냐는 여부에 대한 확고한 의지표명이 있어야 한다고 원론적인 주장을 폈다. 반면 같은 날 조선일보 <TV 주평>에서는 노사 양측이 방송민주화나 공영방송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의지를 독점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4월 19일에 동아일보 생활부장 어경택은 '오늘과 내일'이라는 칼럼란에서 <서 사장 용퇴하시오>라는 칼럼을 내 서기원의 용퇴를 요구하면서 "사원들이 대적하고 있는 상대방은 파행방송에 따른 시청자들의 불만을 모아 그 비난의 화살을 제작을 거부하고 있는 사원들에게 돌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여 조속히 방송을 정상화하라는 충고를 했다. 거기에 당일 서울신문 '방송칼럼'은 "KBS의 사내 문제로 시청자 권리를 박탈당한 많은 시청자들의 분노의 표출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KBS 사원 대표 고희일은 같은 날 국회 문공위 증언에서 "녹슨 수돗물을 계속 가정에 보낼 수 없어 잠시 수도관 공사를 한 뒤 맑은 수돗물을 보내고자 하는 것이니 양해를 바란다."고 밝혔다.

6. 이후[편집]

KBS 사태를 진압한 노태우 정부는 그 여세를 몰아 6월 14일에 새로운 방송제도 개편안을 발표하고, 7월 11일과 14일에 방송법과 한국방송공사법, 한국방송광고공사법 등 방송 관련 3개 법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이 법안들의 핵심 골자는 민방 신설과 방송위원회, 한국방송광고공사, 교육방송에 대한 정부의 통제 강화 등이었는데, 특히 개정 방송법은 방송위의 고유권한이던 방송정책 최고결정권을 공보처에 넘긴 채 방송내용 심의에만 국한시키도록 했고, 한국방송공사법은 KBS 이사회의 기능을 경영에만 국한시켜 사장이 직접 본부장을 임명토록 했다. 그리고 이사회는 매년 경영평가를 실시해 그 결과를 매년 공보처에 보고하고, KBS 경영과 관련해 공보처장관 요청도 신중히 검토토록 했다. 방송광고공사법 역시 '공익자금관리위원회'를 설치해 그 자리를 친정부 인사로 채우도록 했다.

이에 방송인들은 노태우 정권의 방송장악 음모를 읽고 다시 저항에 나섰다. 7월 12일에 MBC 노조가 먼저 제작거부에 돌입하여 KBS, CBS, PBC 등 나머지 3개 방송사 노조는 '연대 제작거부'라는 결의를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연대 제작거부 역시 한계가 있었고, 결국 4개 방송사 노조는 투쟁 3일 만에 '프로그램을 통한 투쟁'이라는 대안을 내건 채 제작을 재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프로그램 투쟁의 허점은 KBS는 물론이요 MBC에서도 곧 드러나고 말았다. 1989년에 부임한 MBC 최초의 방송인 출신 사장 최창봉이 1990년 3당 합당, KBS 사태, 방송법 날치기 통과 등으로 정권 눈치를 보며 태도를 바꾸었다. 최 사장은 8월 24일에 보도국장을 포함한 11명의 국장급 인사를 단행하면서 국장 추천제를 규정한 단체협약을 위반하더니, 9월 15일에는 PD수첩 - '그래도 농촌을 포기할 수는 없다[4]' 편의 방송 취소에 항의한 안성일 노조위원장에게 6개월 정직, 김평호 노조사무국장에게 해고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9월 21일에 자신에 대한 노조의 불신임안이 가결되자 10월 6일에는 안 위원장까지 해고시켰다.

심지어 공정방송 최후의 보루였던 MBC 보도국 역시 노태우 정권에 굴복해 절망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세태를 보여주듯 10월 17일에 기자 일동이 발표한 성명서에는 "MBC 보도국이 다시 신분상승과 권력 배분을 위한 복마전이 돼 가고 있으며, 편집은 귓속말과 은밀한 전화로 이루어지고 눈치가 편집방향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게다가 이달 19일에 전체 MBC 보도국 소속 기자들도 "늘상 집권세력에 야합하려는 습기찬 음모와 알량한 기득권을 향유하려는 독기가 서려 있음"이라고 개탄했다.

10월 19일에 KBS 사태와 관련하여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구속된 KBS 전 노조위원장 안동수와 현 노조위원장 김철수는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 선고공판에서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들이 적법절차에 따른 공정방송 추구 노력을 저버렸고 극단적 제작 거부로 인한 파행 방송이 국민생활 전반에 불안을 초래한 점은 실정법 차원에서 정당화 될 수 없다"는 취지를 밝혔다.

1991년 1월 서기원 사장이 KBS 정상화를 이유로 사표를 제출했다가 반려됐고, 그 사이 지방선거에서도 민자당이 압승을 거두었고 1992년 총선 결과에도 민자당이 무소속 의원 확보로 과반은 넘게 차지하였기에 서기원 사장은 3년 임기를 다 채우고 물러났다. 한편 이 기간동안 노태우 정부에게 친화적인 논조로 되돌아오면서 KBS 9시 뉴스의 시청률은 내려앉아서 10%대를 기록하게 되었는데 그치게 되었다.[5]

7. 여담[편집]

재야 현대사학자 임영태는 해당 파업에 대해 방송인들의 의식구조를 변화시켰다고 해석했다. 5공 시절 언론인들은 권력에 굴종하며 높은 보수와 사회적 지위를 누려왔지만, KBS 파업 당시 이들에게도 공권력이 가차없이 폭력을 가함으로써 그때의 특권은 상대적인 것이었다고 깨달은 것이다. 이 상황으로 볼 때, 방송이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하지 않으면 국민들의 진정한 스타는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이계진 아나운서도 파업에 참여하였다.

한편, KBS 사태 당시 대하드라마 <역사는 흐른다>를 비롯해 <TV 손자병법>, <울밑에 선 봉선화[6]> 등 각종 드라마들이 잠정 중단되었으며 이들 중 <울밑에 선 봉선화>에 출연해 온 김미숙은 이 작품이 잠정 중단된 후 <어둔 하늘 어둔 새>를 통해 MBC로 자리를 옮겼다.[7]

아울러, 김미숙 외에도 전인화, 김희애, 조민수, 김영철, 최재성 등의 인기 배우들이 KBS 사태 후 MBC를 비롯한 다른 방송사로 자리를 옮겨야 했으며 김혜수, 이미연, 손창민, 하희라 등 대학교-대학원 학생 연기자들은 학점 만회에 전념해 왔다.

가요계에서는 조정현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가수로 꼽히는데, <그 아픔까지 사랑한거야>가 골든컵을 놓치고 3주 수상에 그쳤으며[8] 후속곡인 <슬픈 바다>도 충분히 1위할만한 노래인데도 불구하고 시간이 흘러버려 10위권 정도에 그쳤다.

KBS2의 주말 음악 프로그램 '쇼 특급'의 후속작인 '쇼 토요특급'은 1990년 3월 첫방송 예정이었으나 이 사태로 인해 방송이 연기되고 1990년 6월 첫방송되었다.

8. 출처[편집]

  • <한국 현대사 산책 - 1990년대편 1권> -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2006) p50~58.
  •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6. p557

9. 관련 자료[편집]

10. 관련 문서[편집]

[1] 1990년도의 국가슬로건이 '산업평화 정착의 해'였을 정도. 1989년에 메이데이 100주년과 공안정국 등의 영향으로 노동쟁의가 최고조에 달했기 때문.[2] 지금의 제1노조에 해당. 2009년에 파업했던 언론노조 KBS본부는 제2노조에 해당하며, 이 안의 역학관계는 복잡하다. 이 때만 해도 제1노조가 진보적 성향이었으나 2000년대에 들어와 보수화되면서, 진보적 경향의 사원들이 갈라져 나간 것이 제2노조.[3] 이러한 중단은 뉴스9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다. 정확히 24년 후, 길환영 사장 퇴임을 위한 총파업때도 이 상황은 이어진다.[4] 9월 18일 방영 예정분.[5] 의외로 KBS 9시뉴스가 수위권의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중장년층 이상 시청자층에게 압도적인 시청률을 기록하게 된것은 홍두표 시절부터였고 서기원 사장 때까지는 MBC 뉴스데스크가 똑같이 친정부 성향임에도 불구하고 시청률면에서 압도적이었다.[6] 당시 신인 탤런트 변영훈이 처음 비중있는 역을 맡은 사실상의 출세작.[7] 이 작품에서 홍이숙 역을 맡았던 김보연은 <어둔 하늘 어둔 새>에 앞서 KBS 2TV <꽃 피고 새 울면>에 캐스팅되었으나 작가와의 불화로 출연을 중단한 데 이어 KBS 사태까지 발생하자 <어둔 하늘 어둔 새>로 발길을 돌렸다.[8] 2주 1위 후 두달간의 파업 이후 1주 1위를 했다. 즉 그 기간 동안 여전히 가장 인기있는 노래였던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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