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의 평범한 뉴스.jpg 총체적 난국 야 안보이잖아대기업
한보그룹의 파산을 시작으로 그 해 연말에는
IMF 외환위기가 터져버렸다.
1996년까지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아시아의 네 마리 용" (한국,
홍콩,
싱가포르, 대만)이라며 "기초가 튼튼하다던" 한국이었지만,
태국,
말레이시아를 시작으로 북상하는 아시아 금융위기를 피할 수 없었다.
지못미.
나무파일:external/nuri.hani.co.kr/101206%2013-3.png영국의
조차지 홍콩이
중국에게 반환되었다.
1996년까지는 비록 사고공화국이니 하는 등의 비판도 나왔지만 1인당 GDP가 역사상 처음으로 1만 달러를 돌파하는 등, 지속적인 사회 발전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응답하라 1994나
응답하라 1997과 같은 작품이 계속 나오는 것도 이 시기의 추억에 대한 나름의 향수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1997년은 남북한간 최악의 대치가 여전히 진행중이었고 경제는
IMF 외환위기 사태(전국 사업장 체불임금 금액이 6480억원)를 맞으며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존망마저 위태로운 시기였다.
1997년 12월, IMF 사태가 터지던 시기의 국내
실업률은 3.1%로 집계되었다.
[1]기구하기 짝이 없는 이후 20년의 서곡을 알리는 이 해에 태어난 사람들
[2]은 7차 교육과정의 마지막 코스를 밟게 된다.
본격 마지노 선 입시 공부 열심히 할래? 아님 내년에 한국사 볼래? 또한 대부분의 학생이 학창시절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의
수학여행 기억을 제대로 갖고 있지 않다.
[3] 이런 이유들로 인해 97년생 사이에서는 이 년도가 저주받은 해라는 소문이 있다. 추가로 말하자면 남학생 한정으로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때
군대에 있다.
문민정부의 해인
1993년 ~
1996년과는 비교가 안될정도로 최악이다.
일본한자능력검정협회가 선정한 1997년
올해의 한자는 '倒(넘어질 도)'였다.
한편 문화체육부(현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이 해를
문화유산의 해로 지정하였다.
1997년 10월, 외환위기 직전
노동부에 신고된 전국 사업장 체불임금 금액은 6480억원에 달해 수많은
직장인과
근로자들이 임금도 못 받는 상황에 직면해
경제위기 상황을 실감케 해준다.
[4]나무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19970132-00_01014127.jpg11월 8일, 당시 임기말의 대통령인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정치권의 허위사실 유포에 엄히 대처하겠다며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한다.
김영삼대통령, 정치권 허위사실 유포 엄단 임기말 퇴임을 겨우 몇달 앞두고
IMF 사태로 지탄을 받게 되는 임기말의 대통령이 이렇게까지 뉴스데스크에서 비중이 높았던 것을 보면 그 당시 얼마나 권위주의가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나무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19970143-00_01014127.jpg11월 19일, 경제가 위기에 빠져들면서
강경식 경제부총리가 물러나고
임창열 통상산업부 장관이 새 경제 부총리로 임명됐다.
환율 변동 폭을 현행 2.25% 범위 내에서 10% 범위내로 대폭 확대한다고 발표한다.
나무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19970145-00_01040504.jpg이튿날
11월 21일, 정부가 결국 국제 통화기금
IMF의 구제 금융을 신청하기로 했다.
구제금융 요청 경제 우등생 한국의 신화를 뒤로 한 채 사실상의 국가 부도를 인정하고 국제기관의 품안에서 회생을 도모해야 하는 뼈아픈 처지가 된 것으로 임창열 부총리는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3당 대통령 후보와의 청와대 만찬에 참석해
IMF 구제 금융에 불가피성을 설명한 뒤 밤 10시에 IMF 요청 사실을 공식 발표한다.
임창열 부총리는 그날 우리나라를 방문 중인
스탠리 피셔 IMF 부총재와 티모시 게이디너 美 재무부 차관보와의 잇단 접촉에서 우리나라가
IMF로부터 자금지원을 받는 것이 불가피하다는데 의견을 같이 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창열 경제 부총리와 IMF부총리의 긴박했던 협상IMF의 지원받은 나라들 경제주권 포기할 정도 아시다시피 IMF는 그냥 돈을 빌려주는 곳이 아니며 IMF에 돈을 빌린 나라들은 IMF의 명령에 따라 경제운영을 해야 한다.
12월 3일, IMF와의 협상이 최종적으로 발표되었다.
임창열 경제부총리와 캉드쉬 IMF 총재는 협상을 마치고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대회의장으로 나와서 협상의 타결 소식을 전했는데
캉드쉬 총재는 이 자리에서 한국에 지원할 자금 규모는 모두 550억 달러로 결정됐다고 말했다.
먼저, 550억 달러의 자금 조달 내역을 보게 되면
IMF가 210억 달러, IBRD 세계은행이 100억 달러, ADB 아시아 개발은행이 40억 달러 등 국제기구에서 350억 달러를 지원하는데 합의했다. 사실상 경제주권을
IMF에 바친 셈으로 그 이후 4년간 한국경제는
IMF의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게 되었다.
IMF, 긴급 자금지원나무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19970167-00_01082905.jpg나무파일:external/monthly.chosun.com/1101_b084_5.jpg한국도 IMF에 돈을 빌리고 그들의 뜻에 따르는 조건으로 경제주권을 IMF의 손에 맡기는 처지가 되었다.
IMF 협약 반드시 지켜야당시 IMF 총재
미셸 캉드쉬는 한국이
국제통화기금의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한다고
대한민국정부를 위협했다.
나무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19970023-00_01200908.jpg검찰에 소환되는
이현세 화백.
임기말 레임덕 상황을 겪던 김영삼 정부는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에 관한 문제를 거론해 표심을 잡기 위해 학교폭력 문제를 단속하자는 명분으로 1996년에 '청소년 보호를 위한 유해 매체물 규제에 대한 법률안’을 들고 일어났다. 발의 당시 청소년 보호를 빙자하여 위장된 검열을 행하는 데다가 그 검열 판단의 결정을 행정기관이 판단한다는 점에서 언론인과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반발이 거셌고, 무엇보다 이미 존재하는 법인 형법 제243조(음화반포)와 미성년자보호법과 중복되는 입법인데다 법에 명시된 심의 기준이 애매모호해 죄형법정주의 5대 원칙 중 하나인 '명확성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의견도 있지만, 결국 3월 7일부로 통과되고 말았다.
1997년 3월 7일부로 법명이 '청소년보호법'으로 결정되어 법이 공포됨과 동시에 동법 제45조에 의거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를 사단법인에서 법정기구로 바꾸고 난 뒤 1961년 한국아동만화자율회 시절부터 실시한 만화 사전심의제도를 36년만에 사후심의로 바꾸는 한편 동법 제2장에 '청소년 유해매체 표시'라는 규정을 만들어 앞으로 유해매체 표시를 달지 않은 성인만화의 경우 이를 판매한 업자를 벌금형에 처하도록 규정했다. 4월 15일에는 '음란/폭력성조장매체공동대책협의회(이하 음대협)'가 국내 3대 스포츠신문 발행인과 편집국 책임자들을 미성년자보호법 위반을 적용하여 즉각 고발하는 바람에 5월 26일에는 배금택과 이두호 등 만화가와 소설가, 스포츠신문 편집자가 먼저 검찰에 소환되었다.
이보다 더 주목할 것은
7월 1일은 '만화사냥의 여름'이 시작되어 한국 만화계의 암흑기가 형성된 날이다. 마침 같은 시기에 '일진회 사건'이 터지자 언론들은 <
캠퍼스 블루스>등의 만화를 거론했고, 동월 2일부터 신한국당 대표 이회창이 '학교폭력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공권력의 만화 단속이 본격화되었다. 이 시기부터 검찰과 경찰은 전국의 만화소매상, 만화방, 도서대여점 등지를 상대로 일제 단속을 벌여 만화책을 마구잡이로 압수하여 9일에는
미등록 출판사 대표 및 만화방 업주 142명을 입건하는 소기의 성과를 거둔 바 있었다.
그러나 동월 23일에
천국의 신화에서 묘사된 음란성/폭력성을 문제삼아 원작자인
이현세 화백을 요청 4일만에 소환시켜 법정에 세웠고, 8월 1일에는 음대협의 고발을 받아들인 검찰은 스포츠신문 만화가들과 책임자들을 대거 소환하여
강철수, 방학기 등 스포츠신문 만화가 8명도 같이 불구속 기소되었다. 이중 조운학 등 세 명은 약식 기소, 이두호, 황재, 배금택,
오일룡 등은 기소 유예되었다. 그리고 7월 31일에는 성인 만화잡지 <미스터 블루(
세주문화사)>, <투엔티 세븐(대원)>, <빅 점프(
서울문화사)> 등이 발행을 중단했다. 이에 만화계가 일제히 반발해 7월 15일에 PC통신 '만화수호연합'이 첫 성명서를 낸 것을 시작으로 29일에는 한국만화가협회, 우리만화 발전을 위한 연대모임 등 9개 만화 관련 단체들이 모인 '표현의 자유 수호를 위한 범만화인 비상대책위원회'는 <정부의 '만화 탄압'에 대한 범만화인 성명서>를 냈다.
이 해는 4월경에
KBS 2TV를 통해서 1992년
일본에서 방영하였던 애니메이션
세일러문이
달의 요정 세일러문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첫 방영하였던 해이기도 하다. 일본에 비해서 5년 늦게 국내방영을 하였는데 그 당시가
김영삼 문민정부 말엽이었고 해방 이후 50여년을 지켜온
철저한 대(對) 일본문화 봉인정책과 청소년보호법 제정의 여파로 일부 내용이 국내 심의상으로 대폭 수정, 개편되었던 영향이 있었다. 특히
히노 레이(국내명 : 비키)가 나오는 일본식 신사가 나오는 장면이 통째로 삭제되었으며
미즈노 아미(국내명 : 유리)가 남친인 우라와(국내명 : 피터)와의 만남상에서 우라와가 세일러 머큐리를 공격하는 꿈의 내용 중 머큐리가 옷이 벗겨지는 장면 등이 통째로 삭제되었고 또한 히노 레이가 첫 등장하는 장면마저도 편집수정되어서 그 당시 이러한 사정을 몰랐다가 뒤늦게서야 삭제편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시청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또한 이 때는 1998년 일본문화 대개방이 이뤄지기도 1년 전의 일이었고 김영삼 정부까지 역대 정권들의 정치사회적 노선상 일본문화에 대한 봉인책도 유지되었던 편이라 일부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1,2년만 늦게 방영했다면 좋았다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였다.
[5] 후에
대원방송에서 무삭제판으로 재방영을 하였다.
그리고 1년 먼저
투니버스와
MBC에서 방영하였던
웨딩피치에 비해서 늦게 방영하였던 편이기도 하다. 일본에서는 세일러문이 웨딩피치보다 3년 먼저 방영하여 선점하였던 편이지만 국내에서는 심의 등의 사정으로 웨딩피치보다 1년 늦게 방영을 하였던 영향으로 웨딩피치가 선점하였다는 점이 있다. 물론 그 당시는 지금에 비해서 다운로드도 받을 수 없었던 시절이라 어쩔 수 없이 TV를 통해서 볼 수 있는 시절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당시 국내에서
세일러문이 웨딩피치보다 먼저 나왔다고 알려주면 오히려 놀라거나 정반대였다는 사실에 믿기지 못하는 반응을 보인다. 이 때는 컴퓨터를 보유하는 가정도 드물고
인터넷도 할 수 없던 시절
[6]이었고 당시엔
일본만화를 제대로 접해보고 일본의 신작만화에 대한 정보를 알려면
일본인이 아닌 이상 알 수도 없던 시절이었다.
2010년대로 접어든 이후에는 국내에서 세일러문에 대한 인지도가 아주 낮아졌거나 소멸된 편이었지만 이 때까지만 했어도 국내에서는 세일러문의 인기가 상당히 높았던 편이었으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완구와 팬시 등이 많이 출시되었던 편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그 당시 10대 시절을 보냈던 20대 이상 성인들 및 세일러문 매니아들을 위한 키덜트 용품이 인터넷 쇼핑상에서 나오는 편이라 세일러문의 열기가 이들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편이다.
1997년 mbc에서 보도된 국내 연도별 10대 뉴스나무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19970184-00_01234225.jpg나무파일:external/img.tf.co.kr/131018_52609eb7d6c5e.jpg나무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20030046-00_01253311.jpg국내와 마찬가지로 1997년 한해는 국외에서도 국제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던 한해였다.
-
2월 19일 등소평 사망,
8월 31일 다이애나 사망,
9월 5일 테레사 수녀 사망,
-
7월 1일 홍콩반환, 동남아 금융위기
- 엘니뇨 세계 강타,
7월 4일 미국 패스파인더호 화성 착륙,
2월 23일 복제양 돌리 탄생등
등소평과
테레사 수녀,
다이애나 비가 세상을 떠났고 복제양 돌리가 탄생해서 생명 복제를 둘러싼 윤리와 과학의 논란이 제기됐다. 또, 아시아에서는 금융 위기가 휩쓸었다. 97년 하반기는 홍콩의 중국 반환으로 시작됐다. 한편, 유럽에서는 좌파 세력이 제2의 절정기를 맞았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등에서는 삶의 질을 개선하려는 욕구가 이념의 대립을 넘어선다는 것을 입증했다. 동남아에서는 금융위기의 태풍이 몰아쳤다. 태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을 휩쓴 금융위기는 이제 한국에 상륙해 이른바
IMF 통치를 받게 되었다. 금융 재앙과 함께
엘리뇨의 자연 재앙이 닥쳤다.
엘리뇨가 몰고 온 기상 이변으로 호주와 인도네시아는 가뭄으로, 페루와 멕시코 그리고 아프리카 동북부에서는 폭우로 수많은 희생자가 생겼습니다.
우주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이 패스파인더라는 꽃을 키운 것도 바로 97년이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수백 년이 지난 뒤
1997년에 가장 큰 기록으로 남을 사건은 복제양 돌리의 탄생일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신의 작업으로만 남겨져온
인간창조 작업이
인간의 손으로 넘어온 시점인, 그래서 인간의 역사가 바뀌기 시작한 것이 바로 1997년이라고 평했다.
1997년 세계 뉴스,시련도 기쁨도 아듀 나무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19970093-00_01040507.jpg1997년 대선당시 손을 맞잡은
김영삼과
이회창의 모습
1993년부터 온갖 대형사고와 비리사건으로 지지율이 내리막을 치닫고 있던 김영삼 문민정부에게도 이 해는 레임덕의 극치였다.
일본놈들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는 이 발언 한마디와 노태우, 전두환 전 대통령 구속 계기의 과거사 청산, 2002년 한일월드컵 유치로 조금이나마 정도 지지세 행진을 이어갔던 김영삼 정부였지만, 1997년 정초에 들어서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파동으로 국민들의 여론이 악화되면서 재개정을 천명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도리어 한보 사태와 아들 김현철 스캔들로 김영삼의 국정 장악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또 노동법/안기부법 파동과 김현철 스캔들은 1차적으로 당시 당 대표인
이홍구를 신한국당 후보 경선에서 중도 하차하게 만들었다. 거기다가 민주계의 좌장격이던
최형우 의원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이회창 전 국무총리가 당 대표로 지명된 것이다. 이회창 대표는 유리한 입지를 활용해 신한국당 후보 경선에서 승리함으로써 김영삼의 레임덕 현상은 가속화되었다.
또 그해 연말에 외환위기가 찾아오면서 김영삼은 후계 구도에서까지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여 우울해하던 김영삼을 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끌어내리게 만들었다. 일찍이 찾아온 레임덕 때문에 15대 대선에 영향력을 별로 행사하지 못하였고, 숟한 문제들로 해서 비난이 가중되어 있기는 하나, 문민정부의 개혁과 사정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는 희망마저 외환위기가 싹 걷어가 버렸다.
외환위기는 이미 1996년 말 외채가 1천억 달러를 넘어서면서 그 조짐이 보였지만, 정부의 안이한 늑장대처와 기업의 계속된 차입, 금융권의 무분별한 대출로 1997년 11월에 이르러 결정적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오히려 김영삼은 "내부적으로 위기 대책을 진행하되 대외적으로 위기를 감추자는" 식의 구시대적 발상으로 외환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이런 전략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까지 지속되었는데, 여기에는 경제 정책을 직접적으로 담당한 재정경제원이나 한국은행 등 경제 관료들의 잘못이 크지만 김영삼 역시 국정 통솔자로서 비난을 면키가 힘들었다. 이로써 김영삼 대통령은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국난'을 제공케 해 준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고 말았다. IMF 체제는 국민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그에 대한 원망과 비난은 고스란히 문민정부에 향해졌다.
이렇게 해서 집권 초기 90%대를 넘나들며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도는 아예 통계조차 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김영삼 퇴임 이후인 1998년 3월 당시
PC통신 유니텔이 네티즌 1,78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김영삼은 '역사상 가장 지탄받아야 할 인물' 1위에
[8] 뽑히고 말았던 것이다. 사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시기는 우루과이라운드와 WTO 체제의 등장으로 직면되는 세계사적 전환기로서 한국은 대내외적으로 숱한 도전에 직면했던 시기이자 위기와 기회를 내포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김영삼은 그 위기를 기회로 살리지 못해 국가적 위기를 불러오고 자신은 파멸이란 구덩이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1월 11일 :
정보통신부는 수사기관과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권한을 강화한다는 내용을 담은 '전기통신사업법 시행령 제16조 개정안(통칭 통신보안법)'을 국회에 발의했다. 이 개정안은 수사기관이 사법부의 영장 없이 자의적으로 통신권을 제한시킴으로써 국민의 기본권인 통신권 박탈까지 가능하게 할 뿐더러 정통윤으로 하여금 게시글에 대한 사전 심의와 사후 통제를 가능하게 했다.
1월 21일 : 미국 정부는 통신품위법 소송사건에 대한 적요서를 연방대법원에 제출했다.
1월 23일 :
한보철강 부도. 이 사건이
외환위기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이 때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후 한보 비리의 책임을 묻는 청문회가 진행되었는데, 당시 회장이 모른다 일관에, 깃털 몸통 등의 각종
개드립을 시전해서 한동한 유행어가 되기도 하였다.
1월 28일 : 전기통신사업법 시행령 제16조 개정안이 민변과 통신연대, 정보연대 SING 등 시민단체와 야당의 끈질긴 반발로 무산되었다.
이한영씨가
분당신도시 자택에서
벨기에제 브라우닝 권총으로 피살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9][10] 당시 36살인
이한영씨는
김정일의 前 동거녀 성혜림씨의 언니인 혜랑의 아들. 즉 김정일의 처조카로 본명은 리일남이다.
그는
김정일의 맏아들인 정남씨와 어울리면서 북한 최고의 로얄 페밀리에 속했던 이씨는 지난 1982년 모스크바 대학 유학중 스위스 한국대사관을 통해 귀순했다. 신분을 밝히지 않는 조건으로 귀순해 14년간 당국의 보호를 받아온 이씨는 지난 85년에는 북한의 보복이 두려워 성형수술을 받고 한국에서 은둔생활중에 1996년 2월, 성혜림씨 일가 서방 탈출 사건을 계기로 알려진 인물이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는 이한영씨 피살사건은 두명의 북한 특수공작원이 저지른 것이라고 발표했다.
[11]2월 20일 : 미국시민자유연합은 통신품위법 소송사건에 대한 적용서를 연방대법원에 제출했다.
3월 : 카마엔터테인먼트를 통해
플레이스테이션 게임기가 국내에서도 정식 출시되었다.
3월 1일 : 쌍용제지가 화장지 비바와 스카티의 제조를 중단하고 새 화장지 브랜드 '코디'를 선보였다. 또, 이날부터
제6차 교육과정 2차 개정이 실시되어 초등학교 영어가 3학년생부터 실시되었다.
3월 7일 :
청소년보호법이 제정되면서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가 동법 제45조를 근거로 법제화되면서 만화 사전심의제도가 사후심의로 바뀌었으나 '청소년 유해매체 표시'라는 새로운 검열이 생겼다.
3월 8일 : 제13회 한국여성대회에서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이이효재가 '부모 성 함께 쓰기'를 선언하였다. 이는 여권신장 운동 중 하나인 '부모 성 함께쓰기 운동'의 시초였다.
3월 12일 : 이회창이 신한국당의 새 대표로 취임하였다.
3월 19일 : 미국 연방대법원은 통신품위법 소송사건에 대한 심리를 시작했다.
4월 3일 : 이른바
이태원 살인 사건 발생일. 홍익대학교 재학생 조중필 씨(당시 23세, 1974년 생)가 버거킹 화장실에서 흉기에 9번 찔려 사망하였다. 당시 용의자는 2명의 한국계 미국인인 존 패터슨(당시 17세)과 에드워드 리(당시 19세). 2016년 현재 존 패터슨은 징역 20년이 선고되었다.
법원은 전두환에게
내란과
반란의 수괴죄로 2심 그대로 무기
징역이 확정되고
추징금 2,205억원을 선고했다.
노태우에게는역시 2심 그대로 징역 17년이 확정되고 추징금 2,628억이 선고됐다.
5월 ~
6월 : 정보통신부는 국가보안법, 전기통신사업법 제53조, 집시법 제5조 2항에 의거하여 한총련 5기 출범식을 전후해 한총련 관련 학생들과 전국연합, 전해투 등 재야 단체들의 아이디 수십개와 수백건의 게시글들을 각각 일방적으로 이용정지/삭제처분시켰다. 이에 정보연대 등의 시민단체들이 항의하여 7월 12일에 아이디 상당수가 복구되었다.
5월 1일 :
영국의 총선에서 18년만에 노동당이 659석 중 418석(직전 274석)을 차지하며 압승을 거두었다. (집권
보수당의 의석은 343에서 165로 급감) 다음날 노동당 당수
토니 블레어가
영국 총리가 되었다.
5월 20일 : 민주노총 산하 '전국민주택시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5월 25일 :
프랑스의 조기총선에서
사회당(PS)이 53석의 3당에서 총 577석 중 255석으로 의석을 크게 늘리면서 제1당이 되었다. 사회당은 과반을 확보하지는 못했으나 공산당 등 급진좌파와의 연정을 통해
리오넬 조스팽을 총리로 추대하는데 성공했고, 이로서 프랑스에서는 우파 대통령에 좌파 총리인 동거정부가 이루어졌다.
[13] 6월 3일 : 한총련 5기 출범식이 개최되었다.
6월 12일 : 종전의 주민등록증에서 전자주민카드로 대체하기 위한 '주민등록법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되었다. 그러나 전자주민카드가 도입될 시 개개인의 사생활 침해와 범죄 악용 우려, 그리고 무엇보다 국가의 국민에 대한 감시 및 통제가 우려됨으로써 대다수의 시민단체 및 재야단체 등이 이를 반대했다.
6월 16일 : 영국의 록밴드
라디오헤드가 실험적이고 우울한 3집
OK Computer를 발매했고, 이후 본인들의 최고 앨범이라는 평가를 받고 당대 최고의 음반이라는 칭찬을 들으며 이후로 꾸준히 다른 아티스트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같은 날에 영국의 록밴드
스피리추얼라이즈드가 실험적이고 우울한 3집 Ladies And Gentlemen We Are Floating In Space를 발매했고 이후 본인들의 최고 앨범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당대에서 손꼽히는 음반이라는 칭찬을 들으나 전자의 어마어마한 평가에는 미치지 못한다.
6월 26일 : 미국 연방대법원은 통신품위법의 일부 조항에 대해 수정헌법 제1조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7월 3일 : 정승화 전 육참총장이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7월 10일 : 영국 대영박물관에 한국전시실이 개관되었다.
울산이
경상남도에서 분리독립하여 울산
광역시로 승격되었다. 옛 직할시 명칭이 아닌 광역시라는 바뀐 명칭을 처음 받게 된 지역은
울산이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하다.
[울산광역시]
1997년
7월 16일, 중동부 전선
군사분계선에서 남북한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다. 20여분 포격전
북한 군인이 군사 분계선을 넘어 오면서 비롯된 이날 교전은
곡사포까지 동원돼 남북한간 최악의 대치상황을 실감케 했다. 그날 10시 50분,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먹실리 아군
백골부대 지역
비무장지대, 전방을 경계하던
초병은
북한군 7명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우리 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20여분 포격전
북한 군인이 군사 분계선을 넘어 오면서 비롯된 이날 교전은
곡사포까지 동원돼 남북한간 최악의 대치상황을 실감케 했다. 그날 10시 50분,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먹실리 아군
백골부대 지역
비무장지대, 전방을 경계하던
초병은
북한군 7명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우리 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나무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19970016-00_01043110.jpg북한 군인 군사 분계선 침범,아군 초병과 20여분 포격전,mbc아군 초병은 즉각 군사 분계선을 넘는 것은 중대한 도발 행위이며, 즉시 복귀하라는 경고 방송을 실시했으나 북한군은 경고 방송을 무시하고 계속 군사 분계선을 70m나 넘어왔고 11시2분, 아군은
K-2 소총 100발씩 두 차례에 걸쳐 위협사격을 가했다.
3분쯤 지난 11시5분, 북한군 초소에서 자동화기와 소화기 실탄 7-80발이 날아왔다. 아군 초소를 겨냥한 조준 사격이였고 아군도 즉각 응사했다. 다시 15분쯤 지난 11시21분, 이번에는 아군 초소에 북한군의 포탄 10여발이 떨어지고 아군도
57mm 무반동총으로 응사하면서 교전은 점차 확대됐었다. 개인 화기와
중화기,
야포까지 동원되면서 격렬했던 양측의 사격전은 11시 47분 서로 사격을 중지하자는 아군의 방송으로 긴박했던 상황을 끝냈다.
7월 19일 : 닌텐도에서 개발한 가정용 게임기인
닌텐도 64가 국내에서는 '현대컴보이64'라는 이름으로 정식 출시했다.
그러나 2년 뒤에 망했어요 7월 20일 : 보름달하고 해왕성 행성. 14시 34분 황위 차이 = 3746°
7월 22일 : 국회 내무위원회는 상임위원회를 개최하여 주민등록법 개정안이 충분한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 법안을 법안 심사소위원회에 회부하지 않기로 결정하여 전자주민카드 관련 법안의 통과가 유보되었다.
뉴스특보로 보도된 괌 추락참사 장면.
1997년 8월 6일, 서울을 떠나서 괌으로 가던 대한항공 801편이 오늘 새벽 1시쯤 괌 공항에 착륙 직전 밀림 지대에 추락하여 탑승객 254명 가운데 228명이 사망하고 26명정도만 살아남은 역사상 최악의
항공 사건사고가 벌어졌다.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를 참고.
8월 26일 : 장승길
이집트 주재
북한 대사 내외가 제3국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18] 한편 같은 시기에 장 대사의 형인 장승호
프랑스 주재 북한 대표부 참사관도 일가족과 함께 제3국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8월 30일 : 한국증권거래소에서 주문표에 의한 수작업
주식 매매가 마지막으로 이루어지고, 9월 1일부터 완전 전산화되었다. 박초롱초롱빛나리 유괴 사건이 발생했다.
9월 : 카마엔터테인먼트와 KDS를 통해
세가 새턴이 국내에서 재출시되었다.
9월 26일 :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하타 국제공항을 출발해 메단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던 가루다 인도네시아 항공 152편이 추락해 탑승인원 234명 전원이 사망했다.
10월 19일 : 정보통신부는 미국의 인터넷 호스팅 업체 지오시티(Geocities)에 호스팅을 받은 친북 사이트가 있다는 이유로 지오시티 전체를 접속 차단시켰다.
10월 21일 : 브릿팝의 양대산맥
블러가 서울 문화체육관에서 내한공연을 하였다.
11월 13일 : 국회 내무위에서 주민등록법 개정안이 여당인 신한국당과 자민련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11월 14일 : 전자주민카드 도입을 골자로 한 '주민등록법 개정안'이 국회 법사위에서 통과되었다.
미국에 사는 한국 교포들이 모국에
달러를 보내주기 시작했다.
12월 5일 :
금융기관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고려증권이 부도가 났다. 12월 13일 :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하 가정폭력 처벌법)'이 제정되었다.
국제통화기금의 간섭으로 한국의
환율제도가
자유변동환율제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환율이 미친듯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또, 이 날
한화그룹이 한화에너지와 한화에너지 플라자를 현대오일뱅크에 매각했다.
12월 17일 : 전자주민카드 도입을 골자로 한 '주민등록법 개정안'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전자주민카드 도입 건은 IMF로 인한 긴축 재정과 전자주민카드 제도에 반대한 김대중 후보의 당선으로 사실상 백지화되었다.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하타 국제공항을 출발해
싱가포르 창이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던 실크항공 185편이 인도네시아 무시(Musi)강에 수직낙하해 탑승인원 104명 전원이 사망했다.
12월 24일 :
원달러환율 사상 최고치 달성 : 1달러 당 2050원대 (사진은 12월 23일)
12월 30일 : 대한민국의 마지막 사형 집행. 이날 오전 9시부터 3시까지 사형수 23명에게 사형을 집행했다. 사형집행은 문민정부 출범 후 94년 15명, 95년
지존파 등, 19명에 대한 사형집행 이후 세 번째이며 긴급조치 시대인 지난 76년 27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 후 최대 규모였다.
[23] 이날 이후 20년간 현재까지
대한민국에서는 단 한 건의 사형집행이 이뤄지지 않아 사실상 사형 폐지국으로 분류되고 있다.
참고로 한국에서
중2병이란 단어가 가장 크게 확산했을때가 2011년이라서 97년생들이 중2였을때랑 맞물린다.
이하 중2병 환자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