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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5.18 민주화 운동
발생 시기
발생 위치
관련 기관
12.12 군사반란을 통해 집권한 신군부
최규하 정부[1]
진행 과정
피해 내역
직접사망[2]
165명
후유증 사망자
376명
행방불명자(암매장)
65명
부상
3139명
구속 및 고문 피해자
1589명
광주민주화 운동을 다룬 슈피겔지의 사진.[3]

1. 개요2. 명칭3. 관련 자료
3.1. 한겨레신문 - 광주항쟁: 비극 속의 역사성 (1988.5.17 ~ 5.26 연재)3.2. 경향신문 - 실록 민주화운동 (2004.1.18 ~ 2.1 연재분)3.3. 관련 영상
4. 전개 과정
4.1. 1980년 서울의 봄, 그리고 서울역 회군4.2. 5월 17일4.3. 광주에서 보인 움직임4.4. 5월 18일: 공수부대의 광주 진입, 학살이 시작되다4.5. 5월 19일: 본격적 민주항쟁, 더 잔인해진 공수부대4.6. 5월 20일: 시민들의 전면적 항쟁 시작, 공수부대의 최초 집단발포4.7. 5월 21일: 시민군이 공수부대와 맞서다, 무장투쟁의 시작4.8. 5월 22일: 일시적인 해방4.9. 5월 23~24일: 공수부대의 광주 외곽지역 민간인 학살4.10. 5월 25일: 5.18과 미국4.11. 5월 26일: 도청 진압 D-14.12. 5월 27일: 시민군들의 마지막 항쟁, 공수부대의 도청 함락4.13. 사망자는 몇 명인가?4.14. 사건의 영향4.15. 그 후4.16. 광주 어록 10년
5. 세계기록 유산 등재
5.1. 등재 과정까지 치른 여정5.2. 기록 구성5.3. 등재 허가의 주요 사유
6.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의의와 운동 이후 각계가 보인 반응
6.1. 빨갱이들이 일으킨 무장폭동이다?6.2. 5.18을 다룬 노래·시6.3. 5.18을 다룬 영화·드라마·소설6.4. 5.18에 대한 역사책들6.5. 5.18을 다룬 다큐멘터리6.6. 미국에 대한 새로운 관점
6.6.1. 반론6.6.2. 반론의 반론: 20사단 투입 승인 논란
6.7.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6.8. 5.18 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6.9. 5.18 민주화운동 당시 외신 보도와 국내 언론 보도의 차이
7. 여담8. 관련 문서9. 둘러보기

1. 개요[편집]

광주광역시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정신적 고향 및 민주화의 성지임을 국민들의 인식에 심겨준 사건

군사독재를 부활시키려는 쿠데타에 피로 맞선 무장투쟁

신군부가 광주를 지도에서 없애려고 했던 끔찍한 학살극#####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떄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광주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

5.18 민주화운동, 또는 광주민주화운동은 크게는 1979년 12.12 군사반란 이후, 좁게는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대한민국의 독재 군부가 무고한 시민들을 무차별로 죽인 학살 범죄가 일어나기도 했던, 시민과 계엄군 모두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사건이기도 하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나자 전두환을 중심으로 구성된 신군부가 군부를 장악하였고, 서울의 봄으로 민주화 열기가 거세어지자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일으킨다.

12.12 군사반란이 만든 계엄령대학교들의 겨울방학, 연말이라는 점이 맞물려 이에 대한 대처는 뒤늦게 나타났으며, 대학들이 개학을 맞이한 3월 이후 안개정국에 대한 사항이 알려졌고, 1980년 4월부터 이를 규탄하기 위한 집회가 끊이지 않았으며,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대한민국전라남도 광주시[4]에서 대규모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사건 당시 군부의 통제로 인해 언론매체는 '광주 사태'로 칭했으나 군부 정권이 끝난 이후 진상 조사가 이루어져, 광주 사태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5] 다만 일부 민간인들을 중심으로 국민의 기본권과 민주주의가 군부에게 유린당했다는 것에서 따와 광주 사태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미디어에 따라 광주민중항쟁, 광주 학살, 광주 사태 등으로 부르며, 보통 일어난 날짜를 줄여서 5.18로 부르기도 한다.

전두환의 군사독재에 맞서 일어난 시위가 진압군과 격한 대립을 벌인 끝에 광주에 진입하려는 진압군과 광주시민들의 총격전으로 발전, 결국 진압되지만 수많은 사상자[6]가 발생하였으며, 군사정권에 의한 인권탄압과 민간인 살해 사례로서 많이 알려진다. 이 정도로 설명하기에는 당시 상황과 이후 여파가 어마어마하게 크다. 이 일련의 사태는 대한민국의 민주화 과정의 일부로써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시민들의 희생으로 의의가 재부상했다.

당시 계엄군으로 투입된 특전사 대원들에게도 당시 사건은 지우고 싶은 암울한 기억이다. 이들은 그 당시 시대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상부에게서 빨갱이를 때려잡으러 간다는 대의명분을 갖고 이를 수행하였으며, 진압 당시 학생과 시민들을 진압하다 점점 폭력 수위가 상승, 같은 나라 국민을 상대로 총구를 겨누는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을 다수 겪었다. 진압 작전에 참가한 계엄군들이 가졌던 "빨갱이에게서 나라를 지켰다는 긍지와 자부심"은 나중에 진실이 하나둘씩 밝혀지면서 "군사독재 정권의 앞잡이" 내지는 "잔인한 학살자"라는 불명예로 돌아왔다. 실제로 당시 계엄군의 상당수는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 등 다양한 정신 문제를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계엄군과 시민 양측 모두에게 심각한 상처로 남게 된 것이다.

계엄군이 시민을 사살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책임을 그들에게만 지워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행동한 것이 아니며, 어떠한 진실도 알지 못했던 시대의 희생자이기 때문이다. 1차 책임은 계엄군이 아닌 최종 결정권자이자 명령권자인 전두환군정에게 있다. 계엄군에게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시민 학살을 지시한 장본인이 범한 중죄를 어물쩡 넘어가려는 짓이 절대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이것으로 말단 계엄군의 행위가 정당화되어서도 안 된다. 다만 오해하면 안 되는 점은 당시 대통령은 전두환이 아니라 최규하였고, 전두환이 발포를 지시했다는 증거는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하나회의 특성과 79년 12.12 군사반란으로 사실상 전두환이 정권을 잡았던 시기이기에 광주시민들을 학살한 것에 대한 책임이 전두환에 있다는 것과, 사실상 전두환이 지시했다는 주장을 지지하는 정황증거는 수두룩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전두환이 지시했다는 분명한 증거는 없다.

하지만 학살 문서를 들어가 보면 나오는 사례들 중에는 수하도 없는 사살이야 우발적이라고 쳐도, 이 "계엄군" 은 시위와 전혀 관련이 없는 지나가던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심지어는 물놀이하던 어린아이까지 무차별로 두들겨 패고, 단검으로 찔러 죽이거나 총질을 해댄 것은 물론, 부상 입은 시민에 대한 불법적인 처형, 심지어 공격 헬기를 동원한 무차별 사격 등등 그야말로 단순 "명령대로만 따랐다" 라고 볼 수준을 한참 전에 넘어선, 아인자츠그루펜과 다를 바 없는 추악한 범죄 행위들을 수두룩하기 저질렀기 때문에, 전두환이나 말단 계엄군 쫄병들이나 모두 똑같은 공범인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때문에 "계엄군도 전두환과 하나회에 의한 5.18의 피해자" 로 보는 시선에는 "나치 SS 같이 신나게 죽여댄 놈들이 이제 와서 피해자 좋아하네"[7] 라며 노골적으로 조소하는 의견있는 이다. 이들이 저지른 짓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건만 이런 범죄자들이 28명씩이나 국립서울현충원안장되어 있고, 또 이런 놈들을 추모하는 작자들이 있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

"광주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들인 줄만 알고 그랬다" 는 일부 계엄군 출신자들의 변명도 이들이 저지른 만행을 찬찬히 읽어 보면 전혀 통하지 않는 게, 그렇다면 진짜 공산주의자들에게는 그런 끔찍한 범죄들을 저질러도 아무 문제 없다는 말인가? 터무니없는 소리다. 저 논리대로라면 포로로 잡은 북한군이나 북한 지역 주민들은 "공산주의자들이니까" 보이는 대로 무차별로 쏴 죽여도 문제 없는 존재들이기에, 광주 사람들도 그런 "그들에게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문제 없는 공산주의자들" 로 봤다는 건데, 이건 그야말로 전쟁범죄자들이나 할 법한 사상이다. 어떻게 보면 이 계엄군들이 태어날 때부터 영화만화 등으로 늘상 보고 들으면서 자랐을, 세뇌에 가깝게 주입된 반공 프로파간다가 어디까지 사람을 망가뜨리는가에 대한 반증이라고도 볼 수 있을 듯.

또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한 군부의 행동을 묵인, 사실상 전두환 군사정권의 편에 섰다고 여겨진 미국에 실망한 운동권과 지식층 중 일부가 반미주의로 돌아서는 계기를 마련했고, NLPDR민중민주주의의 성장에도 알게 모르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8]

2. 명칭[편집]

명칭에 대한 의견은 여러 가지 있는데 현재 가장 널리 쓰이는 명칭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이란 내란 세력과 저항세력을 모두 함의하는 기계적인 중립 명칭이다. 용어의 시작은 민주정의당이다. 1988년 6월 21일에 5.18의 명칭으로 논란이 있을 때 민정당은 '광주민주화운동'이란 명칭을 주장했다. 이 명칭은 통일민주당평화민주당에게 격렬한 반대를 받았고 오후 늦게까지 절충을 계속 겪을 정도였다. 동아일보 1988년 6월 21일 기사. 사흘 뒤에 통일민주당은 결국 민정당의 요청을 받아들였으나 평화민주당은 여전히 반대했다. 1988년 6월 24일 동아일보 기사. 급기야 평민당에선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을 쓰는 행위를 "배신 행위"라고까지 했다. 이 단어가 얼마나 불쾌하게 받아들여졌는지 느낄 수 있다. 1988년 6월 24일 동아일보 기사. 평민당은 27일이 돼서야 이 명칭을 받아들였다. 1988년 6월 27일 동아일보 기사.

5.18 단체에선 상당히 긴 시간동안 5.18 광주민중항쟁이란 단어를 썼다. 일부에선 이걸 진보 용어로 오해하기도 하는데, 사실 '광주민중항쟁'이란 단어는 보수주의자유주의 세력한테도 받아들여졌던 단어였다. 2000년대 초반에만 해도 동아일보같은 보수주의 언론이 그대로 썼을 정도였다. #, #, #

민주화운동이란 명칭이 일반화된 것은 노무현 정부부터였다. 이것 때문인지 노무현 정부 이후부터는 민중항쟁이 진보 명칭인 것처럼 오해받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진보나 좌파에서만 통용됐던 편향 단어는 민주화운동도 아니고, 민중항쟁이란 단어도 아닌 광주혁명, 광주민중혁명이란 명칭인데, 너무나 극단적이고 편향된 명칭이라 학계에서 씹혔다. 김영택 박사나 최정운 박사에 따르면 5.18은 민중혁명 같은 게 아니며 오히려 시민군이 그런 걸 거부했다고 한다.[9]

유사역사학 세력을 중심으로 '폭동'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기도 하나, 학술적으로 보나 일반 인식에 비춰보나 올바르지 않은 명칭이다. 자세한 것은 5.18 민주화운동/왜곡 참고.

해외에서는 유네스코에 등록된 대로 'Gwangju Uprising(광주 봉기)'라 부르거나 'Gwangju Massacre(광주 대학살)'라고 칭한다. 드물게 'Gwangju revolt' 혹은 'Gwangju rebellion[10]'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정말로 보기 힘들다. Uprising이 반란 및 폭동 등의 의미를 담고 있어 한때 이 명칭에 대해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정작 해외에서는 uprising이 한국에서 생각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 '지배권력에 대한 저항을 나타낼 때' 항상 쓰는 단어임이 알려진 후엔 그런 움직임도 사그라들었다.

3. 관련 자료[편집]

3.1. 한겨레신문 - 광주항쟁: 비극 속의 역사성 (1988.5.17 ~ 5.26 연재)[편집]

3.2. 경향신문 - 실록 민주화운동 (2004.1.18 ~ 2.1 연재분)[편집]

3.3. 관련 영상[편집]

4. 전개 과정[편집]

4.1. 1980년 서울의 봄, 그리고 서울역 회군[편집]

해당 문서 참조.

4.2. 5월 17일[편집]

1980년 4월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된 학생들의 민주화투쟁과 소위 사북 사건 등으로 대표되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대한민국 국회에서도 비상계엄 해제를 논의하기 위한 본회의 개최를 결정하게 되자, 신군부는 이를 막고 정권 장악을 기도하게 된다. 그리하여 전두환, 노태우 등의 압박으로 열린 비상국무회의에서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단행하였다.

계엄사령부는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및 옥내 외 집회 시위의 금지,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각 대학의 휴교령, 직장 이탈 및 태업, 파업의 금지 등의 조치를 취했다. 17일새벽에 계엄군은 전국 대학교의 학생운동권 관련 학생들을 모조리 검거했고, 18일에는 김대중, 김종필 등 26명의 정치인을 학원, 노사분규 선동과 권력형 부정축재혐의로 연행하고 김영삼을 연금시키는 등 초법적 사태가 일어났다. 국회 또한 폐쇄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헌법에 규정된 국회통보 절차도 거치지 않고 계엄군을 동원,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한 채 취해진 불법 조치였다. 비상계엄의 확대에 따라 전북 금마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여단이 17일 저녁 10시경 광주에 투입되어 전남대학교, 조선대학교, 광주교육대학교 등에 진주하였다.

4.3. 광주에서 보인 움직임[편집]

학생 시위는 서울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서 5월 14일의 광주에서는 민주 대성회라는 이름의 시위가 열리고 있었다. 여기서 전남대학교 학생회장이자 들불 야학의 멤버였던 박관현이 연설을 한다.

민주 대성회로 일어선 학생들은 5월 15일 서울에서 큰 시위가 열렸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호응하여 다음날인 5월 16일에 학생들은 거리 시위로 나서고, 이것이 훗날 촛불집회 때도 알려진 횃불시위다. 이 시위는 별다른 충돌 없이 조용히 끝났으나, 여기서 시위를 주도했던 학생회측은 만일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학교에서 만나자는 행동지침을 내렸다. 학생회 간부들이 긴급연행되면서 지도부가 사라진 서울의 학생운동과는 이 부분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생겼다.

4.4. 5월 18일: 공수부대의 광주 진입, 학살이 시작되다[편집]


사건의 조짐은 5월 17일 저녁부터 발생했다. 이날 전남대 총학생회에 "서울에 있는 각 대학 학생회장단이 모두 계엄당국에 연행되었다"는 한 여학생의 다급한 전화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총학생회장단은 계엄군에 의해 전국적인 체포령이 내려졌다고 판단해 이들은 무등산장으로 피신했다.

이후 밤 23시에 경찰과 보안사 요원들은 시위주동자에 대한 이른바 '예비검속'을 실시하여 재야인사와 학생회 간부 등 연행대상자 22명 중 정동년, 권창수, 오진수, 이승룡, 유재도 등 8명을 체포했다.[13] 이를 모면한 인사들은 광주 외곽이나 지하로 숨었으나, 총학생회가 피신하면서 비상 대중 동원 능력이 상실되어 버렸다. 이 상태로 23시 40분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자 두 시간 뒤, 전남대와 조선대에 특전사 7공수여단 장교 68명과 사병 680명이 M16 소총을 지닌 채 투입되어, 이틀 전 횃불 시위를 마친 뒤 정부의 반응을 신중히 살피던 학생들이 군인들에게 구타를 당해 대다수 학생들은 학교 본부 건물에 감금되었고, 운 좋게 체포를 면한 몇몇 학생들은 강의실 옥상이나 화장실로 기어올라 파이프를 타고 내려와 화를 입지 않았다.

다음날인 18일 아침 10시, 전남대에 휴교령이 내려진 와중에도 1백여 명에 이르는 학생들이 무장 공수부대와 대치하였다. 이후 학생의 수가 2~3백여 명으로 늘자 이들은 공수부대원들의 학내 잔류 학생에 대한 구타 행위를 비난하면서 "비상계엄 해제하라", "계엄군 물러가라", "휴교령 철폐하라" 등지의 구호를 외치고 돌을 던지는 등의 시위를 하자, 곧이어 공수부대원들은 지휘자의 "돌격 앞으로"라는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쇠심이 박힌 진압봉을 마구 휘두르는 바람에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14] 공수부대원들은 도망가는 학생들을 쫓아가며 폭행을 가했고, 심지어는 신분을 밝힌 전남대 교수까지 폭행했다. 근처를 지나던 시내버스에서 공수부대원들의 진압에 항의하던 학생들도 잔인하게 구타를 당했다.[15]

이 일로 학생 시위대가 시내로 이동하자, 계엄군은 11시 50분경 가스차(페퍼포그) 등을 동원해 가톨릭센터, 광주역, 광주고속터미널 인근에서 가혹한 진압 작전을 펼쳤다. 오후 2시에 가톨릭센터 부근[16]에서 시위가 격화되자 시위 인원이 늘어났다.

3시부터 공용터미널에 공수 특전단이 투입되어 진압이 더 잔혹해졌다. 계엄군은 도청 앞과 금남로에 진출하여 시위 학생 뿐만 아니라 시위와 무관했던 일반 시민들까지 진압봉으로 무차별하게 구타하였고, 3∼4명이 한 조가 되어 시위현장의 주변 건물까지 샅샅이 뒤지며 진압 작전을 전개하였다. 심지어는 공수부대원들을 말리는 노인들은 물론 여관에서 머무르고 있던 외지인까지 끌려나왔고 광주 공용터미널에서 청각, 언어 장애인이 대답을 안 한다는 이유로 계엄군에게 구타를 당하여 사망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이러한 폭력에 광주 시민들은 분노하였고, 이것이 학생과 시민이 연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4.5. 5월 19일: 본격적 민주항쟁, 더 잔인해진 공수부대[편집]


어제의 사태에 놀란 시민들은 다시 거리로 나왔다. 11공수여단이 광주로 증파되고 점심식사를 위해 일단 철수한 틈을 탄 시민들은 금남로에 모여들었고, 3000명의 시민들은 경찰 저지선 앞에서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김대중을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30분 정도 시위를 하였다. 전날의 계엄군의 폭력에 대한 소식이 시민들에게 전해지면서 분노한 시민들이 시위에 가세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공수부대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곤봉을 총검을 휘둘러 피투성이로 만들었으며, 조선대학교로 점심식사를 위해 철수했던 부대까지 가세하면서 강경진압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강경한 진압이 계속될수록 시위에 참가하는 시민들의 수는 더욱 불어났다.

오후 시위부터는 전례 없는 새 투쟁이 등장했다. 그토록 공수부대의 폭력적 만행을 외면한 언론들이 시민들의 표적이 되었는데, 그 증거로 공수부대에 대한 소식을 한 줄도 내보내지 않은 전일방송이 먼저 시민들의 공격을 받았으며, 군중들은 광주 MBC 앞에서 왜곡보도에 항의하며 본보기로 취재차량 한 대를 불태우고 광주 MBC 사장이 직영하던 전자제품 가게인 문화상사에 불을 지르기까지 하였다.

4.6. 5월 20일: 시민들의 전면적 항쟁 시작, 공수부대의 최초 집단발포[편집]

내리는 가랑비로 인해 오전에는 소강 상태였으나, 시내의 가톨릭센터에서는 30여 명의 남녀가 공수부대원들에게 붙잡혀 무차별로 구타를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오후가 되면서 시장의 상인들까지 철시하고 시위에 나서기 시작하여 그 인파는 10만여 명이 넘었다. 윤상원 등 계엄령 전국 확대 조치 당시 일제검거 대상이 아니었던 들불야학의 멤버들이 사건의 진행추이를 자세히 담은 정보지 『투사회보』를 제작해 시내 도처에 수천 매씩 배포하였다.


저지선을 사이에 두고 밀고 당기는 공방전이 전개되고 있을 오후 6시쯤, 공수부대의 행동에 격분한 택시기사와 버스기사들은 200여대 택시와 버스에 라이트를 켠 채 유동삼거리에서 도청으로 들어왔다.[17][18] 차량 시위로 인해 시위가 더욱 고조되며, 그런 와중에 노동청 쪽에서 달려들어온 버스에 의해 경찰 4명이 사망하자, 계엄군은 최루탄을 쏘면서 차량을 공격하고 시민들을 진압하였다.

이런 가운데 시민들의 시위와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탄압에 대해서 전혀 보도하지 않은 광주MBC에 분노한 시민들은 밤 8시 40분경에 광주 MBC 건물에 불을 질렀고,[19] 밤 11시경에는 광주세무서에서, 다음날 새벽에 KBS광주방송총국에도 각각 불길이 치솟아올랐으며, 신군부는 이를 '폭도론'의 증거로 TV와 신문을 통해 계속 보여주었다.

다른 한편 밤 9시 50분경에는 광주시청이, 10시에는 광주경찰서와 광주서부경찰서가 시위대에 의해 각각 점거되었다. 한편 11시 30분에 광주역 근처에서 최세창 준장 휘하의 제3공수대대가 소총으로 발포하여 5명의 시민[20]이 사망했다.

4.7. 5월 21일: 시민군이 공수부대와 맞서다, 무장투쟁의 시작[편집]


나무파일:external/pub.chosun.com/W6VNGJXAHXMWMRP89328.jpg

전남도청 앞에 있는 시위대.

5월 21일은 석가탄신일로 공휴일이었다. 전날 밤 광주역 근처에서 사망한 두 시민의 시체가 리어카에 실려 금남로에 등장했고, 이를 목격한 광주시민들은 더욱 격분하게 되었다. 이날 새벽 아시아자동차 공장을 시위대가 점령, 군용트럭과 장갑차를 입수하였다.

이날 오전 10시경, 금남로엔 10만이 넘는 시민들이 모였다. 이날 정오까지 공수부대를 철수하겠다는 약속을 믿었으나 정오가 되어도 물러나질 않자, 일부가 '속았다'고 판단해 흥분한 시민 일부가 장갑차 등 차량을 동원하자 군의 저지선이 금남로3가 상업은행에서 금남로1가 전일빌딩으로 후퇴한 것을 기해 시청광장의 계엄군 병력에 대한 본격적인 실탄 지급이 실시되었다. 출처. 실탄 지급과 뒤이은 사격 명령의 책임자는 지금도 불명확한 상황에 있다. 어처구니 없는 것은 당시 계엄 사령관이 철수를 결정했지만 정작 전남도청을 지키고 있던 부대에 하달이 안되었다는 점. 지휘 계통이 헝클어졌고 자위권 발동 차원에서 시민들에게 발포를 했다는 것이 당시 관련자들의 해명이긴 하나 납득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며, 이 부분에 대해 김대중 평민당 총재가 "대한민국에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발포 명령자가 전두환씨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1%도 안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참고로 2005년 방영된 제5공화국 드라마에서는 한 병사가 발포 명령을 무전으로 연락받는 장면이 있으며, 이에 대한 해석을 역사에 맡긴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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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사진은 영화 '화려한 휴가'의 도청 앞 집단발포 장면이다.

계엄군은 시민들에 밀려서 전남도청 앞에 방어선을 구축했고 전남도청을 사수하라는 지시가 떨어진 상태였다고 한다. 광주시민들은 대형버스 2대를 앞세우며 저지선을 향해 돌진하였으며, 곧바로 계엄군의 총소리가 났다. 하지만 계엄군의 총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광주시민들은 저지선을 향해 계속적으로 전진하였다. 발포 직전인 낮 12시 59분 경, 당일 오전 탈취한 시위대의 장갑차 돌진으로 계엄군측에 사망자가 1명 발생하였다.[21] 이 사건에 이어 전남도청 스피커에서는 애국가가 울려 퍼졌고, 그때부터 군인들은 전남도청 앞에 있는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피바다"로 만들었다. 시민들는 도망쳤고 사격은 1시간동안 계속되었다. 도청 앞 발포로 인해 54여명이 사망하고 5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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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 앞 집단발포로 인해 시민들은 무장 필요성을 느끼고 시위대는 화순, 나주, 해남, 영암 등 시외 지역으로 진출해 무기고를 점거하고 무장했고, 공사 현장의 폭발물과 다이너마이트도 일부 무장으로 활용되었다는 증언이 있다. 이렇게 획득한 각종 무기들을 분배하고 10여 명 단위로 임시 분대가 형성되며 시민군이 생겼다. 시민군들은 계엄군의 정식 발포가 시작된 지 2시간 20분 정도가 지난 21일 오후 3시 20분경부터 응사를 시작하였다. 이때 모인 1,000여명이 넘는 시민군들은 공수부대와 혈전을 벌였으나 훈련과 장비, 조직력의 열세로 시민군측의 피해가 훨씬 컸다. 공수부대는 광주 시내 각 빌딩의 옥상에서 조준사격을 가했고, 시민군은 이에 맞서 시가전이 벌어졌다. 그런 가운데 전남대병원 옥상에 2대의 중기관총이 대학생들에게서 설치되었고, 결국 견디지 못한 계엄군은 조선대와 광주교도소로 철수하게 되었다.

한편 이날 저녁 7시 경에 놀랍게도 국영방송이나 마찬가지였던 KBS를 통해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타 지역에 최초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미 각 언론사 내에서는 광주의 상황에 대해서 이미 인지는 하고 있었고 기사도 쓰여졌다고는 했다만 신군부의 압력에 의해 보도를 전혀 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보도되더라도 광주에서 소요 사태가 일어나서 군인 1명, 폭도 1명이 사망하고 있다는 식으로 실상은 철저하게 가려진 채 보도되었는데, 당시 KBS 보도국 편집차장이었던 장두원이 군부의 위협에도 진실을 알려야 된다는 사명감에 보안부의 승인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기꺼이 보도를 승인해주었다고 하며, 약 40분 정도에 걸쳐서 광주에서의 상황이 상세히 보도되었다.[22] 당시에는 테이프와 필름 가격이 비싸기도 한 데다가 TV 프로그램을 보존해야 한다는 의식이 희박해서 9시 뉴스 등 일부 프로그램 정도나 보존되어있던 것이 현실인지라 안타깝게도 방송 자료는 남아있지는 않다고 한다.[23]

KBS 7시 뉴스를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이 최초 보도된 이후로 방송 종료 직전까지는 여러 방송사에서 광주의 상황에 대한 보도를 시작하였고 각 신문사에서도 호외를 돌리기 시작했지만, 그로부터 하루 뒤부터는 계엄군이 각 언론사 데스크진들과 기자들에게 촌지를 돌리는가 하면, 진실을 보도하는 기자와 언론사주에게 고문을 하겠다고 위협하는 식으로 채찍과 당근을 병행하는 조치를 썼고, 이는 곧 바로 효력을 발휘하여 다음날 저녁부터 각 언론사에서 광주에서 북괴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고 왜곡하는 식으로 논조를 전환하였다.

4.8. 5월 22일: 일시적인 해방[편집]


5월 22일 오후 3시 도청 앞에서는 제1차 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시민들은 이 날부터 매일 오후 3시와 9시, 2차례씩 도청 분수대 앞에서 궐기대회를 갖기로 결정하였다. 원하는 사람에게 연설할 기회를 주고 시가행진의 코스와 선언문 내용, 그리고 시내 치안유지 방법 등이 토론되었다.

한편으로 같은 날 광주의 원로급 인사들이 도청에 모여 수습위원회를 조직했다. 처음에는 광주지역 유지들로만 구성했으나 그것만으로는 시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어 교수, 변호사, 신부 등을 합류시켰다. 아울러 일부 학생을 끌어들여 학생수습대책위원회를 꾸려 모양새를 갖추었다. 이렇게 생긴 시민/학생수습위는 계엄군 측과 협상을 진행하며 "더 이상의 유혈을 방지하고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키 위해선 무기를 반납하고 치안을 계엄군에게 맡겨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이유로 시민 수습위원들은 강경한 입장의 학생 수습위원, 그리고 항쟁에 참여한 노동자 등 기층민들과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24] 이 수습위원들은 상무대로 들어가 계엄군에게 사태 수습 전에 계엄군을 투입하지 말고 과잉 진압을 인정하도록 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7개항의 수습안을 건의했다. 그러나 계엄군 대표와의 협상은 지지부진했으며, 오히려 계엄사령부는 학생 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주장하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여 광주 시민들을 더욱 분노케 했다. 같은 날 미 국방성 대변인 토마스 로스가 주한미군측의 국군 20사단 광주지역 투입 승인을 발표하였고, 아울러 코럴시 호와 조기경보기 2대 투입도 결정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윤상원 등은 광주 시민들의 투쟁의식 발전과 올바른 진실을 알리기 위해 <투사회보>를 만들어 배포해 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학생수습위는 자체특공대를 조직해 무기 회수에 나섰다. 한편으로는 부상자들을 위한 헌혈을 독려했고, 도청 근처 상무관에는 사망한 시민들의 관이 안치되었다.

작전상 공수부대를 퇴각시킨 전두환과 신군부는 언론 플레이를 통해 여론 조성에 나섰다. 이때가 돼서야 광주 관련 보도들이 쏟아졌지만, 이미 신군부가 언론을 검열하는 바람에 철저하게 왜곡된 채 보도되었다. 당시 신문 기사에서 광주 사태는 '광주 소요 사태, 시민들 소총으로 무장, 도로 검거'와 같은 식으로 보도 되었으며, 보도 사진 역시 불타는 도로나 부서진 자동차들이었다. 또 TV 방송 역시 광주 시민들의 참상을 외면한 채 시민들이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장면이나 계엄군의 부상 모습들을 반복해서 보여주었다. 또한 광주로 통하는 모든 도로가 차단되고 통신 수단과 교통 수단이 모두 끊겼다. 군부는 광주를 철저하게 고립시켰다. 이 외곽 봉쇄 작전으로 인해 여러 실종자와 사상자들이 발생했다. 최정운 교수는 이러한 상황을 '관객의 부재'라고 표현하며 아래와 같이 말했다.
5·18의 경우 군부는 언론을 철저히 통제하였고 광주 밖에서는 아무도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군부는 관객석을 봉쇄하고 광주에만 제한된 폭력극장을 만들었고 관객이 없는 이상 비폭력은 아무런 전술적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이 관객의 부재는 공수부대의 폭력이 부당함을 호소하고자 하는 광주시민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군부의 언론통제는 광주시민들을 지원할 타 지역 국민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폭력적 대결 외에 비폭력의 선택의 여지를 없애버렸다. 시민들이 MBC를 세 차례나 공격하고 결국은 불지르려 하고 KBS에도 방화하게 된 이유는 바로 관객의 배제에 따르는 수많은 덧없는 희생 그리고 목숨을 걸고 투쟁해야 하는 고뇌와 고독에 따른 좌절감의 표출이었다. 방송국에 방화한 것은 단순히 언론의 자유를 위해 군사독재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못된 방송국을 처벌한다는 추상적 이상을 실현한 것이 아니었다.
- 최정운 저. <오월의 사회과학>. p159.

또 인류학자인 리나 루이스도 위와 비슷한 메세지를 아래에 전했다.
여기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른 곳에서는 모른다는 것이다. 서울의 풀브라이트 담당관인 마크 피터슨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 정말 무서운 일이다. (다른 지역) 사람들은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 원 출처: 리나 루이스 저. <The Kwangju uprising : shadows over the regime in South Korea> p165. 2차 출처: 최영진 저. <한국 지역주의와 정체성의 정치>. p146.

같은 날 오전 10시경부터 도청 앞 광장에는 5만여 시민들이 운집했고, '살인마 전두환 처단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등의 플랜카드가 나부꼈다. 오후 3시경에 10만여 명의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를 열어 노동자, 농민, 시민, 학생, 주부 등 각계각층의 대표들이 단상에 올라 각종 성명서와 결의문을 낭독하며, 신군부의 야욕을 규탄하며 끝까지 싸워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해냈다. 이에 사회자인 전남대 학생 김태종이 "이 나라 민주주의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를 흘리고 싸워서 쟁취하는 것입니다"라고 외치기도 했다. 대회가 끝난 뒤 시민들이 자리를 뜨지 않은 가운데 10만여 명의 고등학생들이 <애국가>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친구의 시신을 들고 운구하기도 했다.

4.9. 5월 23~24일: 공수부대의 광주 외곽지역 민간인 학살[편집]



5월 23일 오전, 지원동 근처 주남마을에서는 공수부대의 총격으로 17명이 사망하는가 하면, 그 다음날에는 저수지에서 수영하다가 군인을 보고 손을 흔들던 아이들에게까지 총격을 가하는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런가 하면 공수부대와 무반동포로 무장한 광주보병학교 교도대 사이에 서로를 오인한 총격전이 발생하여 사망자가 나오기도 했다. 그 다음날인 24일에 수습위의 집요한 무기 회수작업으로 4천여 정의 총과 1천 개 이상의 수류탄이 회수되어 시민군의 수는 점차 줄어들었다. 그러나 전날 사건이 광주 시민들에게 알려지면서 계엄군과의 협상이 아니라 결사항전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시민들에게 각성시켰고, 이에 따라 수습위의 온건파들은 설 자리를 잃어 강경파가 항쟁 지도부를 재건하게 되었다.

4.10. 5월 25일: 5.18과 미국[편집]


5월 25일 아침 8시에 '전남도청 독침 사건'이란 간첩조작 사건이 일어나면서 이날 오전 중엔 거의 다 무장해제되었다. 이후 미7함대 소속 항공모함 코럴시호가 부산에 출동했다. 광주시민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당일 시민궐기대회에서 미군 항공모함이 부산에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이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미국은 아직 광주에서 대피하지 못한 자기 국민 130명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항공모함을 파견한 것 뿐이었다. 이날 밤 최규하 대통령은 상무대 전남북 계엄분소를 방문해 소준열 계엄분소장과 장형태 전남지사로부터 상황을 보고 받은 뒤, 9시부터 TV와 라디오를 통해 세 차례에 걸쳐 80만 명이 거주하는 광주 지역에만 특별 담화를 발표해 놓고는 돌아갔다. 그리고 수습위원회 대변인인 김성용 신부는 이날 미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우리는 네 발로 기어다녀야 하며, 개, 돼지처럼 입을 그릇에 처박고 먹으며 살아가야 한다. 폭력과 살인을 일삼는 유신잔당들이 우리를 짐승처럼 치고 박고 개 잡듯이 끌고가며, 찌르고 쏘았기 때문이다. 두 발로 걸으며 인간답게 살려면 목숨을 걸고 민주화 투쟁에 투신해야 한다. 지난날의 침묵, 비굴했던 침묵의 대가를 지금 우리는 치르고 있는 것이다. 부마사건으로 숨진 사람들은 유신괴수의 죽음으로 피의 값을 받았다. (중략) 자유와 인권을 위해 죽어간 수많은 우리 시민들의 피의 값도 마땅히 보상받아야 할 것이 아닌가. 이제 우리는 결단의 시기를 맞이한 것이다. 비굴하게 짐승처럼 천한 목숨을 이어가든지, 아니면 인간다운 민주시민으로서 살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워야 한다.
- 원 출처 : 생활성서 2002년 12월호.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김정남 글.)> p46~47.

4.11. 5월 26일: 도청 진압 D-1[편집]


5월 26일. 계엄군은 화정동에서 농성동 방면으로 진출했다. 사태가 악화되자 수습위원 중 재야인사로 구성되어 소위 남동성당파로 불린 홍남순 변호사,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 이성학 장로 등은 계엄군의 진입을 막기 위해 농성동에서 죽음의 행진을 감행했다. 이와는 별개로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열렸고, 도청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도청의 시민군들은 새벽에 계엄군이 도청으로 진입할 것이라 발표하면서 여성과 어린 학생들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이날 광주수습대책위원회와 윤공희 대주교도 아래와 같은 호소문 두 장을 각각 냈다. 마지막에는 <80만 광주 민주시민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행진을 마친 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불렀다.
저희는 계엄군에 의해서 짐승처럼 치욕과 학살을 당하고 폭도요 난동분자요. 불순분자로 지목되었습니다. 저희 80만 광주시민의 피맺힌 한과 응어리진 아픔을 함께해 주십시오. 저희들이 인간 대접을 받으며 자랑스런 민주시민임을 인정받게 해 주십시오. (중략) 추기경께 유일한 희망을 걸고 엎드려 호소합니다.
- 광주수습대책위원회 일동. <추기경께 드리는 호소문>. (원 출처 : 생활성서 2002년 12월호.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김정남 글.)> p46.)
계엄군이 광주시 곳곳에서 천인공노할 잔악한 행위를 수많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행했기 때문에, 자기 아들딸들이 군인들의 몽둥이에 얻어맞고 구둣발에 채여 유혈이 낭자한 채 길바닥에 쓰러지고, 다 죽어 뻗어버린 채로 차에 실려가는 것을 본 시민들이 얼마나 격노하였겠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셨습니까. (중략) 광주 사태의 수습을 위해 지금이라도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사태 발단의 진실을 정부와 군이 인정을 하고, 겸손한 사죄의 표지를 하셔야 할 것이고, 군인들의 만행에 대한 명령 책임자를 엄중히 처단할 것을 약속하셔야 우선 급박한 현 사태의 수습이 가능할 것입니다.
- 윤공희 대주교가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낸 호소문. (원 출처 : 생활성서 2002년 12월호.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김정남 글.)> p46.)

그러나 그런 피 어린 애절한 호소는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결국 이날 전남도청에선 처음이자 마지막 내외신 기자회견이 열렸다. <볼티모어 선>의 블래들리 마틴 기자는 광주항쟁 지도부의 청년학생투쟁위원회 대변인 윤상원에 대해 죽음의 예감 속에서도 최후의 날까지 싸우리라는 다짐이 얼굴에 잘 나타나 있다고 증언했다.[25] 그 뒤 운명의 날 직전인 이날 밤, 윤상원은 총을 달라는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우리들이 싸울 테니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라고 설득했다. 이에 마틴 기자는 윤상원의 설득에 대해 "세계 어느 무장조직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진정한 투사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4.12. 5월 27일: 시민군들의 마지막 항쟁, 공수부대의 도청 함락[편집]

운명의 마지막 날인 27일 0시. 계엄군은 광주 시내의 시외전화선을 차단하고 '상무충정작전'이란 명칭으로 진압 작전에 돌입했다.

새벽 3시에 한 여성[26]이 계엄군이 쳐들어 오고 있다며 우리를 도와달라는 애절한 내용의 가두방송 소리가 광주시내 곳곳에서 들려왔다.
사랑하는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 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의 형제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모두 일어나서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겁니다.
우리는 광주를 지키고야 말 것입니다.

1980년 5월 27일, 가두방송

3시 30분에 도청의 인근 사방에서 총성이 울려퍼지면서 도청 상황실에서는 자폭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한 청년은 눈물을 씻으며 이렇게 말했다.
고등학생들은 먼저 총을 버리고 투항해라. 우리야 사살되거나 다행히 살아남아도 잡혀 죽겠지만 여기 있는 고등학생들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산 사람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민족 통일의 빛나는 미래를 위해 항쟁의 마지막을 자폭으로 끝내서는 안된다. 자, 고등학생들은 먼저 나가라.
-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p241.

새벽 4시가 되자, 계엄군은 탱크를 앞세워 전남도청 앞을 완전히 포위했고, 금남로를 중심으로 처절한 전투가 벌여졌다. 계엄군의 장갑차 위의 서치라이트가 도청을 비추는 중에 계엄군을 항복을 권유하는 최후통첩을 방송했다. 그러나 도청 안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곧 총성이 울려 계엄군의 서치라이트가 깨져 어둠이 깔렸다. 그러자 자동화기를 지닌 계엄군의 일제 사격이 시작되어 시민군들이 하나둘씩 쓰러졌고, 도청에 난입한 공수부대에게 난사당해 무수한 시민군들이 사격 대치 중에 죽었다.

계엄군은 시민군을 학살해야 할 괴물로 봤지만, 시민군은 동족을 향해 쏠 순 없었다. 최정운 교수의 말에 따르면 도청 진압 당시 계엄군이 도청 뒷담을 넘어서 총과 수류탄으로 난사해 응사 중인 시민군들을 쐈지만 정작 시민군은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고 말했다.[27][28] 그리고 시청 정문 쪽으로 도망가던 시민군 1명이 공수부대원의 사격으로 즉사하자, 시민군 8명이 무장을 해제하고 투항했지만 계엄군은 이들을 모두 쏴 죽였다.

도청 작전 당시 사망자는 현재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는데, 시민군 상황실장이던 박남선은 당시 500~600 남짓 되는 시민군이 도청에 주둔했다고 증언했고, 진압 작전을 담당한 소준열은 도청에서 계엄군에 연행된 시민군은 약 200여 명이니, 사망자는 160명에서 400여 명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당시 사망자 중에는 항쟁의 핵심이던 윤상원도 포함돼 있었는데, 발견 당시 그의 시신은 화염방사기로 까맣게 탄 채 가슴에 총구멍이 하나 있었다.

이날 그간 광주시민들의 애절한 중재 요청을 공식적 채널로 접수된 요청이 아니라고 거절한 미국은 "우리는 한 주요한 도시에서 전체적인 무질서와 혼란 상태가 무한정하게 계속되는 것이 허용될 수는 없음을 인식하고 있다"는 성명을 냄으로써 미국이 사실상 신군부의 편에 서 있음을 입증했다.

4.13. 사망자는 몇 명인가?[편집]

5.18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관을 구할 수 없었어. 학생들이 두꺼운 베니어 판을 구해다가 잘라서 그것으로 관을 만들고, 미처 수의를 못 만드니까 당목으로 둘둘 감아서 태극기 한 장씩을 덮어 갖고 묶고 한 것이 도청 마당으로 하나 가득이여. 나중에는 돈 나올 데가 없으니 관 살 돈도 없제, 당목 살 돈도 없제, 그래 교회에서 우선 30만 원을 얻어서 감당하게 했제.
-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대모로 알려진 광주YWCA 회장 조아라 여사의 증언. <이야기 여성사: 한국 여성의 역사 1권>. - '조아라: 나는 아직도 광주가 생생합니다 - 광주민주화운동의 대모' p209~210.

5월 31일 계엄사령부가 발표한 공식 피해자는 민간인 144명, 군인 22명, 경찰 4명 등 합계 17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127명의 민간인, 109명의 군인, 144명의 경찰이 다쳤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이 발표를 믿는 광주 시민들은 아무도 없었으며, 너무 많이 죽어나가 일일이 세는 것조차 힘들었다.

훗날, 5.18 기간 중 오랫동안 집을 떠난 뒤로 신고가 접수되지 않은 이들까지 합하면 전체 사망자 수만 2천여 명에 달할 거라는 얘기도 있었으나 현재 확인할 길은 없다. 5.18 당시 사망자 수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이유가 공수부대원들이 사상자 수를 은폐하기 위해 사상자가 나오는 대로 트럭에 싣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암매장시켰기 때문이다.

반면 광주에서 침례교 목사로 일한 아놀드 피터슨은 당시 광주 인구가 75만 명이고, 광주의 각 침례교회에 출석자 2천 명 중 사망자가 2명이었으며, 당시 국군에서 일한 친구가 5.18 희생자를 832명으로 확인했다고 들은 것을 근거로 해 사망자는 무려 8백여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그러나 신군부의 발표에서조차 사망자 수는 점차 늘어났다. 문제는 사망자 수가 아닌 학살 자체를 가벼이 보는 신군부의 태도이다. 당시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7월 22일 외신 기자회견에서 "광주 사태는 다른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마이애미 폭동' 수준이다"라고 밝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4.14. 사건의 영향[편집]

5.18 광주민주항쟁은 한미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것 때문에 로널드 레이건이 전두환에게 거부감을 보이거나 한미 관계에 영향을 끼쳤을 정도였고, 이런 미국의 태도는 김대중의 석방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정상회담 교섭의 실무를 맡았던 손장래 전 주미공사는 4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해 당시 비공개 접촉을 회고하며 "미국 측은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어떻게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인, 손에서 피가 흐르는 사람을 만날 수 있겠느냐'며 정상회담을 거부했다"고 밝혔다.

정상회담 교섭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그는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김대중대통령의 구명 문제를 에둘러 언급했고 당시 앨런 보좌관이 이를 레이건 전 대통령에게 귀띔해 비공개 접촉 1달 만에 정상회담이 성사됐다고 설명했다. 이 정상회담을 계기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감형을 받고 1982년 석방됐다.


또한 당시 국민들의 인식에도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실제로 5.18 민주화운동은 5.16 군사정변과 달리 전두환의 정통성에 심각한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심지어는 5.16 군사정변 당사자조차 내란 세력이 저지른 짓이라고 인식할 정도였다.
김종필, 김재춘, 김계원, 장세동 씨 등 10여 명이 둘러앉았다. 전두환 씨는 불참.
국회가 화제가 되고 얘기는 80년 광주 문제로 옮아갔다.
장세동(전두환 정권의 국가안전기획부장 경호실장) 씨가 광주 사태는 진주민란이나 홍경래의 난 같은 것이라는 취지로 80년 5월의 광주 상황을 설명해갔다. 그러자 김재춘씨(3代 정보부장)가 무뚝뚝하고 직선적인 성격 그대로 '무슨 그따위 얘기를 아직도 하고 있는 거요.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보로 아는가. 당신네들이 총칼 들고 정권 잡아가지고 저지른 짓을 무슨 홍경래 반란이라고?' 하며 내쏘았다. 그 자리에서 어떤 분은 웃으며 일어서면서 '국회에서 특위 조사할 것도 없이 결론이 이미 나와 버렸군' 하여 웃고 헤어졌다. (당시의 한 참석인사)

동아일보 1992년 10월 10일자 남산의 부장들(김충식 글) 112회 - <전두환 '대권 각본' 밀어붙이다>

5.16 군사정변에 가담할 정도로 반공주의 성향이 강한 3대 정보부장도 저랬으니, 일반 국민들 사이에 퍼진 인식은 어땠을지 짐작이 가능하다.

4.15. 그 후[편집]

  • 1980.5.29. 상무관에 안치되었던 5.18 희생자 129명의 시신이 청소차로 운구되어 망월동 시민묘지 제3묘역에 안장.
  • 1980.5.30. 서강대생 김의기가 서울 기독교회관 3층에서 "학살정권 물러나라"를 외친 뒤 투신자살.
  • 1980.6.6. '5.18 광주의거 유족회'가 발족됨.
  • 1980.6.9. 삼진특수철 노동자 김종태가 <광주 시민/학생들의 넋을 위로하며>라는 제목의 유서를 남기고 분신자살.
도대체 한 나라 안에서 자기 나라 군인들한테 어린 학생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수백, 수천 명이 피를 흘리고 쓰러지며 죽어가는데 나만, 우리 식구만 무사하면 된다는 생각들은 어디서부터 온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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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김종태 열사가 분신 직전 남긴 유인물 <광주 시민/학생들의 넋을 위로하며> 中
  • 1980.10.25. 보통계엄군법회의 5.18 관련 선고공판에서 정동년 등 5명에게 사형, 변호사 홍남순 등 7명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함.
  • 1980.12.9.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 일어남.
  • 1981.5.18. 5.18 제1주기 추모식이 경찰의 원천 봉쇄로 무산.
  • 1981.5.27. 서울대 도서관 앞 광장에서 5.18 1주기를 맞이해 침묵 시위를 벌임. 이때 서울대생 김태훈이 "전두환 물러가라"를 세 번 외친 뒤 서울대 도서관 4층에서 투신자살함.
  • 1982.3.18.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이 일어났다.
  • 1982.3.31. 대법원은 5.18 관련 구속자 84명의 상고를 기각하고 정동년 등 3명에 사형, 김종배 등 7명은 무기징역, 그 외 72명은 징역 15년에서 선고유예에 이르는 판결을 내림.
  • 1982.4.3. 정부는 당초 사형이 확정된 정동년 등 3명은 무기로 감형하는 한편, 나머지 83명은 특별감형 및 사면, 복권 조치를 내림.
  • 1982.5.3. '횃불회 사건'으로 구속 중이던 기종도가 옥사함.
  • 1982.5.18. 5.18 제2주기 추모식이 경찰의 봉쇄로 무산되자 유족 30명만이 모인 채 위령제로만 진행.
  • 1982.7. '5.18 광주민중항쟁 유가족 협의회'가 발족됨.
  • 1982.10.12. 5.18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이던 박관현이 광주교도소 수감 도중 교도소의 비인간적 처우에 항의하며 단식투쟁을 하다 옥사.
  • 1983.5.18. 정부가 5.18 당시 희생자의 유족과 부상자에 대한 격리조치를 시행함에 따라 3주기 추모식이 무산됨.
  • 1983.11.12. 미국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이 방한하자 대학생들은 '광주학살 배후조종 등 내정간섭 금지'를 요구하며 반미 시위를 벌였다.
  • 1984.5.18. 6천여 명의 광주시민이 모인 가운데 5.18 4주기 추모식이 무사히 치뤄졌다.
  • 1985.5.18. 5.18 5주기 추모식 개최. 이날 야당, 재야인사, 종교인 등 500여 명이 참석했다.
  • 1985.5.23 ~ 5.26.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이 일어났다.
  • 1985.8.15. 시민군 출신 노동자 홍기일이 금남로 1가에서 <8.15를 맞이하는 뜨거움의 무등산이여!>라는 전단을 뿌리고 분신자살.
  • 1987.11.8. '5.18 광주민중항쟁 동지회'가 발족됨.
  • 1988.5.18 ~ 5.27. 준합법적인 5.18 기념행사가 개최되었다.
  • 1988.7.8. 국회,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구성.
  • 1988.11.23. 외무부, 윌리엄 글라이스틴 전 주한 미국대사와 존 위컴 전 한미연합사령관에게 광주특위에 출석해 증언하도록 요청하는 광주특위의 서한을 주한 미국대사관에 전달.
  • 1988.12.2. 미국 국무부, 위컴과 글라이스틴이 광주특위에 출석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입장 발표.
  • 1989.1.9. 국회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 특별위원회 소속 정웅 의원 등은 5.18 당시 공수부대 주둔지였던 주남마을 현장 발굴 과정에서 변사체 1구를 발견했다.
  • 1989.1.16. 5.18 당시 특전사 중사가 주남마을 총격 사건에 대해 양심선언을 했다.
  • 1989.2.3. 최초의 5.18 관련 다큐멘터리 <어머니의 노래>, MBC에서 방영.
  • 1989.3.8. 5.18 관련 다큐멘터리 <광주는 말한다>, KBS1에서 방영. 이에 박희태 민정당 대변인은 "우리가 믿고 사랑하던 KBS의 품위, 양식 깊이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지 실망치 않을 수 없다"라며 개탄했다.
  • 1989.3.17. 주한 미국대사관, 광주특위가 준비한 48개항의 질의서를 국무부에 전달.
  • 1989.6.20. 미국 국무성은 미국 정부가 광주에 특전사 대신 20사단의 투입을 마지못해 승인했다는 답변서를 광주특위에 제출했다.
  • 1990.8.6. 광주 피해자 보상법 제정
  • 1993.3.18. 김영삼 대통령의 망월동 묘역 참배 시도가 남총련 소속 학생들의 저지로 무산.
  • 1993.5.13. 김영삼 대통령, 특별담화 통해 5.18 묘지 성역화, 상무대 터 공원조성, 5.18 기념일 제정 등을 골자로 한 광주 수습책 제시. 12.12를 쿠데타 사건으로 규정.
  • 1993.5.18. 5.18 13주년 기념행사가 최초로 민관 합동으로 개최됨
  • 1994.8.30. '5.18 기념재단'이 설립되었다.
  • 1994.10.19.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인해 구금되었던 김상현 의원 등 당사자 및 유가족 22명, · 두 전직 대통령 외 신군부 관계자 10명을 '내란목적 살인죄 및 살인미수죄'로 검찰에 고소.
  • 1994.11.1. 광주 운정동에 5.18 새 묘역 건설을 위한 첫 삽을 떴다.
  • 1995.7. '5·18학살책임자 처벌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구성되어 5·18유족과 부상자 등 150여명 명동성당에서 농성함, 이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전두환, 이희성 등 7명을 국회위증죄로 고발함.
  • 1995.7.18. 서울지검, 5.18 수사 결과 발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요지로 불기소 결정 → 국민들의 반발 일어남.
  • 1995.8. '5·18 학살책임자 처벌 특별법 제정을 위한 범국민 서명운동'이 전개됨.
  • 1995.9.22. 국민회의 공소시효 만료 무효화 및 특별검사제 도입 등을 담은 법안 국회 제출
  • 1995.9.30. 민자당 대변인 논평을 통해 소급입법 추진 위헌의 소지 및 특별검사제는 우리 실정에 맞지 않다고 거부 의사 표시
  • 1995.10.17. 민자당 김윤환 대표위원 국회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특별법 제정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함. 같은 날 국민회의 정대철 부총재는 특별법 제정 거듭 촉구
  • 1995.11.14 김영삼 대통령, 민자당에 5.18 특별법 제정 지시.
  • 1995.11.29. 5.18 헌법소원 청구인, 헌법소원 청구 취하서 제출
  • 1995.11.30. 12.12 및 5.18 사건 특별 수사본부 발족, 검찰, 재수사 결정.
  • 1995.12.2. 전두환, 연희동 자택에서 대국민 담화 발표 뒤 낙향 후 연행. 구속 수감.
  • 1995.12.15. 헌법재판소, 5.18 헌법 소원을 청구인들의 취하로 종료 선고
  • 1995.12.21. 검찰, 전두환·노태우를 12.12 관련 혐의로 기소,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
  • 1996.1.17. 전두환과 장세동 등의 6인, 서울지법에 5.18 특별법의 위헌법률심판 제청 신청
  • 1996.1.18. 서울지법, 헌법재판소에 5.18 특별법에 대해 위헌법률심판 제청
  • 1996.2.16. 헌법재판소, 5.18 특별법에 대한 위헌 제청 및 위헌 소원에 대해서 합헌 결정
  • 1996.8.5. 검찰, 전두환·노태우에게 각각 사형, 무기징역 구형
  • 1996.8.26. 서울지법, 전두환·노태우에게 각각 사형, 징역 22년 6월 선고
  • 1996.12.16. 서울고법, 전두환은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 노태우는 징역 22년 6월에서 징역 17년으로 감형
  • 1997.4.17. 대법원, 전두환 무기징역, 노태우 징역 17년으로 확정
  • 1997.4.22. 국무회의, 5월 18일을 법정기념일로 제정.
  • 1997.5.4. 망월동 구 묘역에 묻힌 5.18 희생자 유해가 북구 운정동에 소재한 새 묘역으로 이장되기 시작함.
  • 1997.5.13. 운정동 소재 '5.18 신(新) 묘역' 준공.
  • 1997.7.28. '5․18 완전해결과 정의실현, 희망을 위한 과거청산국민위원회'가 인권운동사랑방 홈페이지를 통해 '전/노 사면반대' 운동을 진행함.
  • 1997.7.29. 박종철의 부친 박정기 등 민가협, 유가협 소속 회원 16명이 '전/노 사면반대'를 호소하며 청와대 앞 대고각에 설치된 신문고를 두드리다가 청와대 경호원들에 의해 강제 연행되었다.
  • 1997.12.22. 김영삼 정부, 국민대화합 차원에서 전두환·노태우 사면. 당시 사면일이 12월 22일이었는데 크리스마스 특별사면과 리스트가 혼동되어 1998년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 2000.5.18. 제20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 개최. 이날 최초로 대통령이 참석함.
  • 2001.4.27. 구 광주 상무대 터에 5.18 기념문화관 개관.
  • 2001.12.21. '광주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현 5·18 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제정.
  • 2011.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록"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등재
  • 2012.5.20. 광주MBC 및 KBS광주 양대 노조, 금남로 전국노동자대회 기자회견에서 신군부 시절 양대 방송사의 5.18에 관련 왜곡보도에 대해 반성문을 발표함.
  • 2017.5.17.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가 1988년 국회 광주 청문회를 앞두고 5.18 민주화운동을 왜곡하기 위해 군 관련 서류를 조작한 사실이 29년 만에 처음으로 드러났다. #
  • 2017년 8 29일 Jtbc뉴스에 따르면 당시 신군부 하나회가 130만발의 총탄을 광주에 투입했다고 보도했다. 완전 광주을 철저히 묻어 벌이려고 한것이다.

4.16. 광주 어록 10년[편집]

  •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1980년 5월 20일 전남매일신문기자일동 전남매일신문사장 귀하. - 전남매일신문기자의 집단사직서
  • 임신 8개월의 딸이 숨졌는데 뱃속에는 태아가 뛰고 있었다. 민정당 의원들에게 더도 덜도 말고 한 번만 똑같은 일을 당해보라고 얘기하려 했는데 아무도 안 나왔으니 - 89.2.22. 국회청문회 김현녀[30] 증인
  • 딸이 행여 살아서 돌아올까봐 대문을 잠그지 않고 있으며, 밤에 바람소리만 스쳐도 집 밖에 나가보곤 했다 - 88.5.21. 행불자 추가 신고한 이옥순
  • 졸업장을 준다니 고맙긴 하지만 광범이는 안 좋아할 거요. 그때의 주범들이 버젓이 활개를 치고 있는데 좋아할 리가 있겠소? - 88.12.3. 5.18 명예졸업장을 받은 방광범 군의 아버지 방두형
  • 여보, 당신은 천사였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 임산부임에도 학살된 최미애의 묘비명[31][32]
  •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 가족이 왜 총을 맞아야 했는가를 모르겠어요. 시위를 한 것도 아니고 고향에 돌아가려 했는데 왜 우리에게 무차별 총질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 88.5.15. 최연소 부상자 김준향
  • 살아 생전 아들의 뼈를 찾아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는 것이 소원이다. - 5.17 행방불명자의 부친 김점식
  •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 1980년 5월 30일, 당시 서강대 학생인 김의기 열사가 투신자살 직전에 남긴 유인물 <동포에게 드리는 글>의 한 구절
  • 도대체 한 나라 안에서 자기 나라 군인들한테 어린 학생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수백, 수천 명이 피를 흘리고 쓰러지며 죽어가는데 나만, 우리 식구만 무사하면 된다는 생각들은 어디서부터 온 것입니까? - 1980년 6월 9일, 노동자인 김종태 열사가 분신 직전 남긴 유인물 <광주 시민/학생들의 넋을 위로하며> 중에서
  • 30년 전 6·25의 국가적 전란 때를 빼고는 가장 난잡했던 사태에 직면한 비상계엄군으로서 군이 자제에 자제를 거듭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중략)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 - 80.5.28 조선일보 사설
  • 중국 문화대혁명 때 수천만명이 희생당하고 엄청난 피를 흘렸다. 이런 갈등, 이런 불화, 이런 피를 흘린 사건이 있었는데도 (책임자) 몇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한 사람도 처벌하지 않았으며, 등소평이 중심이 돼 그 원로들을 다 대접하고 활용했다. 거기에 비하면 광주 사태는 아무것도 아니다. - 95.10.5 경신회[33] 모임에서 노태우

5. 세계기록 유산 등재[편집]

2011년 5월 25일,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등재되었다. 등재된 페이지 유네스코한국위원회 페이지.

기록 유산 중 현대사 관련 자료 중 최초의 등재 자료이자, 유례 없는 대규모 자료라 총 9개의 주제로 분류되어 기록된다.

9개 주제, 4,271권, 85만 8,904페이지, 흑백필름 및 사진 2,017컷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이 중 미국이 제공한 기밀 해제 문서는 국가기록원의 자료를 보조하는 참고용으로 거론되었으나, 재검토 과정에서 국회 진상규명회의에 참가한 당시 수뇌부들의 모순된 증언을 지적하는 증언 자료로 변경되었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게 되자 미국은 추가로 다량의 기밀 자료를 공개, 독립 카테고리로 승격했다.

5.1. 등재 과정까지 치른 여정[편집]

최초의 등재 요구 제출 시기는 2010년 3월이었으나, 한국 내 유사역사 단체인 이들이 '광주 사태북한에 의해 조작된 것이며, 기록이 투명하지 못해 기록 유산으로 등재될 이유가 없다'는 요지의 항의서한이 유네스코에 전해져 검토에 들어갔다.

총 일곱 유사역사 단체가 항의서한을 보냈었으며, 이 중 실존 단체이자 대표자의 신원이 확인 것은 3명으로 국가정체성회복협의회의 박세환, 한미우호증진협회의 서석구, 사회발전시스템연구소의 지만원이다.

유네스코 측은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진압으로 진압하게 만든 수뇌부가 한국 헌법에 의한 법적인 처벌을 받았다는 점을 거론, 항의서한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2011년 국무총리인 김황식도 이에 동참하는 발언을 국정회의중 하여 정부도 광주민주화 운동의 기록 유산 등재를 원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결국 2011년 5월 25일 등재가 확정되었다.

5.2. 기록 구성[편집]

세계기록유산 등재에 서포터로 참가한 국가기록원은 그간 간행해온 5.18 민주화운동 자료를 제공했고, 광주시민 중 민주화 운동에 참가한 것으로 확인된 이들이 증언 자료의 검토에 참가[34], 9개의 주제로 분류된 방대한 양의 자료가 만들어졌다.
  • 국가기록원이 간행한 5.18 민주화 운동 자료
  •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자료 및 군사법기관 재판 자료
  • 운동참가 시민들의 성명서와 선언문, 기자들의 취재수첩과 참가자들의 일기
  • 2017컷의 사진 자료(흑백)
  • 민주화운동 참가 시민들의 증언 영상 및 기록 자료
  • 피해자들의 병원 치료 기록
  • 5.18 광주민주화 운동 진상규명회의록[35]
  • 미국 정부가 제공한 5.18 민주화 운동 관련 기밀 해제 문서
  • 정부의 정식 보상 내역서와 보상인 자료

5.3. 등재 허가의 주요 사유[편집]

훈민정음 등재를 '한글' 등재로 오해하는 것처럼, 이 기록물 등재를 종종 민주화항쟁 자체가 등재된 것으로 오해받곤 한다.

유네스코 기록 유산 가운데 근현대사 자료 중 가장 먼저 등록된 이유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발생과 억압에서부터 진상조사 활동과 보상에 이르기까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기록물들이기 때문이다. 즉, 민주주의 발전과 인권 향상을 보여주는 기록물이자 교과서인 셈이다.

특히 유엔 인권위원회가 진상 조사, 가해자 처벌, 명예 회복, 보상, 기념 사업이라는 인권침해에 대한 보상 규칙을 결정하였는데, 그 모범이자 기준으로 5.18 민주화운동이 언급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모두 모은 것이기에 당연히 높이 평가되었다.

한편 유네스코에선 5.18 민주화 운동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와 관련하여 5.18 민주화 운동을 민주주의와 인권의 전환점으로 평가한다. 아울러 동아시아의 국가들의 민주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보았다. 즉, 이 운동이 세계적으로 중요하다고 보았으며, 그렇기에 그 기록물 또한 높이 평가한 것이다.

6.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의의와 운동 이후 각계가 보인 반응[편집]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결국 전두환과 신군부에 의해서 무자비하게 진압되었으나, 이는 도리어 전두환 정권의 원죄가 되고 말았다. 5.18은 87년 6월 항쟁까지 이어지는 80년대 민주화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80년대 학생운동에 뛰어든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학생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돌아오는 5월마다 5.18 추모 행사가 열렸고, 이때마다 민주화 열기는 뜨거워졌다고 한다. 이는 많은 386 인사들이 증언하는 바이기도 하다.

한홍구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적길 5월 27일 새벽의 저항이 그 이후 민주화 운동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치게 됐다고 서술했다. 당시 보잘 것 없는 무장으로 공수부대와 마지막 항쟁을 했던 사람들은 여느 서민들이었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앎에도 도망치지 않고 신군부에 정면으로 맞섰던 것. 이것은 이후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인텔리 계층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죽음으로 지키고자 했던 '민주주의'란 가치를 고민하고 부끄러움을 이겨내기 위해 운동권에 투신했던 사람들이 폭증했다. 70년대에 비해 80년대 학생운동이 격해지고 활발해진 것은 99%가 5.18로 말미암은 것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5.18을 계기로 미국에 대한 학생운동의 인식이 크게 바뀌게 된다. 이전까진 입에 담을 수조차 없었던 반미의 구호가 대학가에서 대중화되는 데 5.18이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왜냐하면 대개 한국군미국이 동의하지 않으면 병력이동 자체가 불가능한데, 대규모 병력이 투입되어 시민들을 제압했다는 건 미국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 그래서 80년대엔 전국 미 문화원은 학생운동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됐다.

5.18 이후로 군부정권은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전두환김대중 등에게 '광주 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다. 이 외에도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한 직후, 8월 27일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

지역적인 면에서는 광주광역시를 비롯한 호남 지역이 이후의 민주정의당3당 합당으로 이어지는보수 세력에 대해 적대심을 가지고, 민주당계 정당의 표밭이 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미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유무형의 정치적인 차별을 받고 있었지만 5.18의 참상은 호남 지역이 다시는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게 만들 정도로 심각했으며, 호남소외론의 가장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 이 부분은 광주광역시/정치영호남 지역갈등 문서에도 자세히 나와 있다.

6.1. 빨갱이들이 일으킨 무장폭동이다?[편집]

신동아: "5·18 당시 보안사령관으로서 북한군 침투와 관련된 정보보고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전두환: "전혀."
이순자: "지금 그 말(북한군 침투설)을 하는 사람은 각하가 아니고 지만원이란 사람인데, 그 사람은 우리하고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독불장군이라 우리가 통제하기도 불가능해요. 그걸 우리와 연결시키면 안 돼요."
고명승: "북한 특수군 600명 얘기는 우리 연희동에서 코멘트한 일이 없습니다."
전두환: "뭐라고? 600명이 뭔데?"
정호용: "이북에서 600명이 왔다는 거요. 지만원 씨가 주장해요."
전두환: "어디로 왔는데?"
정호용: "5·18 때 광주로. 그래서 그 북한군들하고 광주 사람들하고 같이 봉기해서 잡았다는 거지."
전두환: "오... 그래? 난 오늘 처음 듣는데."

신동아 인터뷰 전문

사실 폭도는 계엄군이다.[36]

참고로 이 헛소리는 자유민주연합 문서를 봐도 알 수 있듯이, 5.18 특별법이 통과되기 이전인 1990년대 초중반만 해도 호남을 뺀 나머지 지역에서는 정설로 보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전두환, 노태우의 지지 기반이었던 대구광역시경상북도에서는 확실한 사실로 취급 받았던 헛소리다. 참고로 이건 지역감정을 일으키기 위한 서술이 아니라 사실이다.

하지만 전두환, 노태우가 구속되고 5.18 특별법이 통과된 이후로 폭동이 아니라는 근거, 물증, 증언만 해도 수없이 많다. 폭동설은 현재 영구기관 수준의 공상허언급 개소리 취급을 받고 있다. 다른 양반도 아니고 전두환조차도 (지만원의 북한군 주장은) 오늘 처음 듣는 얘기라며, 과거 보안사령부에서 일한 측근들과 함께 반박한 사실이다.[38][39]

상술한 바와 같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대한민국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객관적으로 인정하고, 당시의 기록물이 보존되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데다가, 피해자 유족들이 생존해 있으며, 따라서 역사적 및 사회적 평가가 모두 끝난 상태다. 또한 국방부북한의 개입은 없다고 1980년대에 이미 인정했다. 그러나 2012년 대선 이래로 인터넷의 보급과 함께 일부 세력들에 의하여 이러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북한이 개입한 폭동"으로 비하되고 있어 사회 전반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심지어 최고 책임자였던 사람이자 일베의 영원한 대통령이자 최고의 신적 존재라는 그 전두환조차도 북한군 따위 없다고 못을 박아 버렸다는데, 왜 일베는 계속 없는 얘길 지어낼까? 이거야말로 타진요랑 다를 바 없는 짓이다.

이들의 주장은 크게 북한간첩이 5.18에 개입했다는 주장과, 5.18은 민주화운동이 아닌 폭동이라 불러야 한다는 두 가지 주장에 기초하고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반박은 별도의 문서에서 따로 다루고 있으니 이쪽을 참고하면 된다.

2013년 5월경 TV조선채널A 2곳의 방송사에서 이와 같은 근거 없는 주장을 그대로 보도함으로 인해 다시 사회 여론의 지탄을 받았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5.18 북한개입설 보도사건 문서를 참고할 것.

Timothy Scott Shorrock 이라는 이름의 미국 기자가 "체로키(Cherokee)" 로 알려진 CIA 문건을 폭로하며 600명의 북한군 개입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밝혔으며(영문 기사 링크), 결국 CIA가 직접 5.18 관련 기밀 문건을 공개함으로써 북한 개입설=거짓이라는 사실에 쐐기를 박았다.

참고로 디시위키의 해당 문서에선 맨 위에 일베충 틀과 반달당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의 틀, 극혐 틀을 달아놓은 채 폭동설을 쓰는 사람과 지우는 사람들과의 혈전이 벌어지고 있다(...)

또한, 삼성그룹 자본의 동양방송(TBC)은 전두환 정부 언론반의 위압기운(국가 관리 차원 실행)으로 KBS, MBC[40]에 알렸다는 (국가 내란 엄폐를 실현하기 위한) '북한 군중의 광주 장악설'로 위장 보도한 일에 대해 1980년 5월 22일에 동양 제3 라디오의 '뉴스 기상도' 프로그램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현황' 보도를 했으나, 당시 신군부의 검열로 더 이상의 진실을 알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 상태로 11월에 언론통폐합에 따른 신문-방송겸영 금지로 동양방송이 폐국되었으나, 2009년 미디어법에 따른 신방겸영 허용으로 2년 뒤에 부활한 JTBC가 개국되었을 때, 검열로 못 실린 채 미공개되었던 5.18 당시의 영상이 보존되어 공개되었다.

6.2. 5.18을 다룬 노래·시[편집]

5.18을 다룬 노래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빼놓을 수 없다. 이 곡은 국민의례에 대비되는 민중의례에서 사용할 정도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민중의례에 쓰인다는 것 때문에 5.18 추모곡임에도 단순히 5.18만을 위한 곡으로 국한시킬 수 없다고까지 평가된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끝없는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또한 <오월의 노래>라는 노래가 만들어졌는데, 가사가 섬뜩할 정도로 당시의 상황을 잘 드러낸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딜갔지
망월동의 부릅뜬 눈 수천의 핏발 서려 있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산 자들아 동지들아 모여서 함께 나가자
욕된 역사 투쟁없이 어떻게 헤쳐 나가랴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대머리야 쪽바리야 양키놈 솟은 콧대야
물러가라 우리 역사 우리가 보듬고 나간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피!피!

오월의 노래

1980년 6월 2일, 처음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작품인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가 전남매일신문에 실렸다. 그러나 군부의 검열 때문에 실리지 못한 채 전남매일은 언론통폐합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
우리들의 아들은
어디에서 죽어 어디에 파묻혔나
우리들의 귀여운 딸은
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있나
우리들의 혼백은 또 어디에서
찢어져 산산이 조각나 버렸나

하느님도 새떼들도
떠나가버린 광주여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아침저녁으로 살아남아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아 통곡뿐인 남도의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후략)

선생님, 광주의 5월을 아세요
선생님, 광주의 5월을... 광주의 5월을 아세요
그날 꽃잎처럼 쓰러져간 언니, 오빠를 아세요
아이들은 몰라야 되나요 우리들은 알면 안 되나요
그날 남녘땅 이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선생님, 슬픔의 망월을 슬픔의 망월을 아세요
그날 거름처럼 묻혀져 간 언니, 오빠를 아세요

-아름나라 어린이 예술단, 2004년 5.18 민주항쟁 24주년 기념식 노래 <선생님, 광주의 5월을 아세요>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마라
거리에도, 산비탈에도 너희 집 마당가에도

살아남은 자들의 가슴엔 아직도
칸나보다 봉숭아보다 더욱 붉은 저 꽃들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마라
그 꽃들 베어진 날에 아 빛나던 별들

송정리 기지촌 너머 스러지던 햇살에
떠오르는 헬리콥터 날개 노을도 찢고 붉게...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깃발 없는 진압군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탱크들의 행진 소릴 들었소

아 우리들의 오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날 장군들의 금빛 훈장은 하나도 회수되지 않았네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마라
소년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오...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옥상 위의 저격수들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난사하는 기관총 소릴 들었소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마라
여기 망월도 언덕배기의 노여움으로 말하네

잊지마라 잊지마 꽃잎 같은 주검과 훈장
누이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오...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태극기 아래 시신들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절규하는 통곡 소리릴 들었소

잊지마라, 잊지마, 꽃잎 같은 주검과 훈장
소년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오....

정태춘, 5.18
과거를 묻지 마라 그 누가 말했나
사랑이라면 이별이라면 묻지 않겠다

그러나 그러나 아하
과거를 잊지 마라 절대 잊지 마라
반역자에겐 학살자에겐 용서는 없다
없다 없다 없다

수많은 세월 훌러도 상처 아물지 않는다
그들이 아직 유유자적 여생을 즐기고 있는 한
수많은 원혼 눈물로 구천을 떠돌고 있지만

그들은 권력의 담 밑에
쥐새끼처럼 잘도 숨어 지낸다

이 시대를 강물처럼 살아온 풀 같은 사람들
그 가슴에 뚧린 멍과 한과 탄식을

누가 누가 채워주려나
안돼 안돼 안돼

그들을 정의의 제단 앞에 세워야 한다
한다 한다 한다

그들을 오월의 영령 앞에 세워야 한다
한다 한다 한다

안치환 - 한다

서독에서 활동하던 작곡가 윤이상은 1981년에 관현악 작품인 '광주여 영원히!(Exemplum in memoriam Kwangju)'를 작곡했고, 이 곡은 그 해 5월 8일[42]쾰른에서 와카스기 히로시 지휘의 쾰른 서부독일 방송 교향악단이 초연했다. 하지만 이 곡은 제목부터 5.18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에, 1980년대 중반 한국에서 잠시 윤이상에 대한 언급이 허락되었을 때도 제목의 앞 단어만 뚝 잘라 '표본(Exemplum)'이라고만 지나가듯 언급되었을 뿐이었고, 곡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함구해야 했다.
하지만 6월 항쟁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윤이상 작품의 공연이 해금된 뒤에는 한국에서도 여러 차례 연주되었고, 광주 소재 관현악단인 광주 시립 교향악단이 해마다 5.18 기념 공연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5.18이 본격적으로 재평가받기 시작한 1990년대부터는 유병은의 관현악을 위한 시나위 제5번 '오월의 노래', 김선철의 오페라 '무등 둥둥' 등의 음악 작품들이 계속 창작되고 있다.

1981년 MBC 대학가요제 대상곡인 정오차의 '바윗돌' 은 "광주에서 죽은 친구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만든 노래고 바윗돌은 친구의 묘비를 의미한다"는 한 신문의 인터뷰 기사 때문에 심사위원들은 방송금지곡으로 묶어버렸다.
1984년 발표된 '바위섬'은 "5·18 광주를 생각하며 부른 노래"인 것이 방송금지 관리자에게 잘 알려지지 않아 가요 프로그램에서 2위를, 라디오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다. #[43]

힙합 그룹 클라우댄서의 '당신은 어디 있었나요?'도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룬 곡이다.
나가 자전거 끌고잉 출근허고 있었시야

근디 갑재기 어떤 놈이 떡 하니 뒤에 올라 타블더라고. 난 뉘요 혔더니, 고 어린 놈이 같이 좀 갑시다 허잖어. 가잔께 갔재. 가다본께 누가 뒤에서 자꾸 부르는 거 같어. 그랴서 멈췄재. 근디 내 뒤에 고놈이 갑시다 갑시다 그라데. 아까부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른한티 말을 놓는거이 우째 생겨먹은 놈인가 볼라고 뒤엘 봤시야. 근디 눈물 반 콧물 반 된 고놈 얼굴보담도 저짝에 총구녕이 먼저 뵈데.

총구녕이 점점 가까이와. 아따 지금 생각혀도...... 그땐 참말 오줌 지릴 뻔 했시야. 그때 나가 떤건지 나 옷자락 붙든 고놈이 떤건지 암튼 겁나 떨려불데. 고놈이 목이 다 쇠갔고 갑시다 갑시다 그라는데잉 발이 안떨어져브냐. 총구녕이 날 쿡 찔러. 무슨 관계요? 하는디 말이 안나와. 근디 내 뒤에 고놈이 얼굴이 허어애 갔고서는 우리 사촌 형님이오 허드랑께. 아깐 떨어지도 않던 나 입에서 아니오 요 말이 떡 나오데.

고놈은 총구녕이 델꼬가고, 난 뒤도 안돌아보고 허벌나게 달렸쟤. 심장이 쿵쾅쿵쾅 허더라고. 저 짝 언덕까정 달려 가 그쟈서 뒤를 본께 아까 고놈이 교복을 입고있데. 어린놈이.....

그라고 보내놓고 나가 테레비도 안보고야, 라디오도 안틀었시야. 근디 맨날 매칠이 지나도 누가 자꼬 뒤에서 갑시다 갑시다 해브냐.

아직꺼정 고놈 뒷모습이 그라고 아른거린다잉......

-정민경, <그날>[44]

2007년 5.18 27주년 청소년 백일장에서, 심사위원들을 충격에 빠트리고[45]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 시의 전문이 돌아다닌 시이다.시 전문이 담긴 기사 링크

6.3. 5.18을 다룬 영화·드라마·소설[편집]

1989년에 5.18을 최초로 다룬 독립영화 <오 꿈의 나라>와 <황무지>를 필두로 1990년에 최초로 5.18을 다룬 상업영화이자 이정국 감독의 데뷔작인 '부활의 노래[46]', 1996년 개봉했던 영화 '꽃잎', 2007년 개봉했던 영화 '화려한 휴가'의 기본배경은 이 사건을 두고 있고,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은 직접적으로 5.18의 장면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주인공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묘사된다.

MBC 드라마 제4공화국, 제5공화국SBS 드라마 모래시계, 코리아게이트에서도 이 사건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모친을 5.18 현장에서 잃은 후 정신적인 충격으로 미쳐버린 피해자 소녀와 그녀를 돌보게 된 날품팔이 인부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가 있다. 후에 이 소설을 바탕으로 하여 만든 영화 '꽃잎(1996)'이 태국에 방영된 후, 타이에서 일어난 군부의 대학생 시위 탄압 및 학살이 재조명되는 등 국제적인 영향을 끼쳤다.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호평을 얻어 글로벌 네임드작이 되었다. 덕분에 해외 동포 2~3세대를 상대로 상대로 한국 역사를 강연한다며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명백히 잘못된 사실을 홍보하던 속칭 해외파 극우 인사들의 주장을 물 먹이는 데 일조하였다.

2007년 7월 25일 5.18 민주화운동을 시간별로 일어난 과정을 다룬 영화인 화려한 휴가가 개봉됐다.

2007년 11월 역시 5.18이 일어나기 열흘전부터 당일까지를 소재로 한 영화인 스카우트가 개봉됐다.

2017년 8월 2일 외국에 5.18을 알린 외신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와 그를 광주에 데려다 준 택시 기사 김사복을 다룬 영화인 택시운전사가 개봉했다.

5.18을 다룬 소설로는 소설가 임철우의 '봄날'이 있다. 한국전쟁을 그린 장편소설 '붉은 산, 흰 새'의 후속작이라고 할 만한 내용으로, 소설의 주인공인 삼형제가 각각 시민군, 계엄군, 대학생을 대변하고, 5월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기반으로 한 사실성까지 더했다.

2010년에 발간된 작품으로 박혜강 소설가의 장편소설 '꽃잎처럼'이 있다. '무등일보'에서 연재했던 소설을 책으로 엮은 것으로, 총 5권으로 되어있는 장편소설이다. 단순히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그 운동만을 다루는 것이 아닌, 5.18이 일어나기 전부터 5.18이 끝난 그 후까지를 폭 넓게 그려낸 작품이다. 주인공들이 각각의 자리와 현실 속에서 보여주는 모습과 생각을 통해 당시 5월의 현실과 아픔을 느낄 수 있다.

단편소설 소설가 윤정모의 '밤길'에서도 주된 사건이 민주화운동이며, 그 이야기를 알리기 위해 외부로 나가는 신부와 학생의 고뇌를 그리고 있다.

또한 한강소년이 온다 도 마찬가지로 광주 민주화 운동의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하여 지은 소설이다.

한편 5.18을 다룬 웹툰으로는 강풀<26년>과 광주시에서 스타워즈를 패러디하여 만든 5.18 홍보 만화인 제국의 안습이 있다.

6.4. 5.18에 대한 역사책들[편집]

5.18에 입문하는데 김영택, 5월 18일 광주 (광주민중항쟁 그 원인과 전개과정), 2010, 역사공간이 최고라 하겠다. 책이 두껍긴 하지만(734쪽) 책 문장은 쉽게 쓰여있다. 입문용으로나 학술용으로나 완성도가 높은 책이다. 이 책은 2011년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학술도서로 뽑혔다. #

이 사건을 다룬 최초의 도서는 전남사회운동협의회와 당시 증언과 보도, 희생자·부상자 치료 기록 등의 자료를 공동 편집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다.[47] 출간 당시 금서로 지정되고 관련자들이 줄줄이 잡혀갔으나, 80년대에는 운동권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할 필독서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독재정권 당시 쓴 책이라 사실도 있지만, 과장된 것과 유언비어도 섞여있다. 그리고 온건파를 투항파로 부르며, 과격파만 편향된 부분도 있다. 김영택 박사 책을 읽은 뒤에 보면 괜찮을 것.
2017년 5월 출간된 개정증보판은 내용을 많이 추가했을 뿐 아니라, 적절치 못한 부분은 들어내고 민주화 이후의 관련자 재판과 이후 밝혀진 내용, 초판 발매 당시에는 살아 있었던 생존자들의 사망 소식 등을 덧붙이는 등 대폭 수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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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5.18 항쟁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이던 박남선이 쓴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도 있다.

프레스바이플에서 E북으로 낸 "기억하는 자의 광주"도 좋은 책이다. 이 책은 1990년에 돌베개에서 나온 책을 2010년에 개정한 것이다. 이거 책소개가 "유시민", "이해찬"으로 돼 있어서 마치 특정 진보 세력이 쓴 것처럼 오해받을 만한 책이다. 실제로 이 2010년 개정판에는 이해찬이 굉장히 진보편향스런 개정서문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유시민 과 이해찬은 엄연히 "공동저자"일 뿐이며, 해당 책은 여러 사람이 참여해서 쓴 책이다. 광주특위에 참여한 평민당 위원이 참여하기도 했다. 일반인은 볼 수 없는 중요한 군자료나 평민당 신고서 내용을 인용하며 청문회 자료도 잘 정리된 책이다. 이 책은 1990년에 쓴 책이라는 한계가 있으며, 낡은 마르크스주의 사상이 깃들어있는 게 단점이긴 하나 그걸 감안할 정도로 풍부하고 객관으로 쓴 내용이 많다. 김영택 박사 책을 읽은 뒤에 보면 좋을 것.

김영택 박사의 "5월 18일 광주"와과 평민당 위원이 참여했던 "기억하는 자의 광주"를 읽어 봤다면, 최정운 정치학 박사가 쓴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2012, 오월의 봄"을 봐도 좋다. 이 책은 5.18 광주민주항쟁을 사회학으로 분석한 책이다. 이 책을 나중에 읽는 게 좋은 이유는 이게 사회학 분석에 초점을 둔 책이기도 하지만, 최정운 박사가 역사학과 무관한 탓에 좀 잘못된 해석이나 과장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김영택 박사의 책을 읽고 읽으면 좋은 책일 것.

정사 중심으로 보려면 1995년에 전남매일 특별취재반이 엮은 <정사(正史) 5.18>이 있으며, 사료 중심으로 보려면 1990년에 나온 <광주민중항쟁사료전집>을 보면 된다.

6.5. 5.18을 다룬 다큐멘터리[편집]

  • 어머니의 노래 (1989, MBC)
  • 다큐멘터리 제5공화국 2편 - 광주는 말한다 (1989, KBS1)
  • 역사추리 - 광주 독침 사건의 진상 (1996, KBS1)
  • MBC 다큐스페셜 - 5.18 사라진 작전보고서 (1997, MBC)
  • KBS 개혁실천 특별기획 프로그램 이제는 말한다 - 5.18 광주민중항쟁 (1998, KBS1)
  • MBC 다큐스페셜 - 사라진 사람들 (1998, MBC)
  • 다큐멘터리 5.18 (1998, 광주MBC)
  • KBS 일요스페셜 - 80년 5월, 푸른 눈의 목격자 (2003, KBS1)
  • 인물현대사 - 산 자여 따르라, 윤상원 (2003, KBS1)
  • 인물현대사 - 영원한 오월광대, 박효선 (2004, KBS1)
  • 다큐극장 - 광주 33년 5 · 18의 기억 (2013, KBS1)
  • 그것이 알고 싶다 - 화려한 휴가, 그리고 각하의 회고록 (2017, SBS)

6.6. 미국에 대한 새로운 관점[편집]

"지금 미국항공모함부산항에 들어왔습니다. 시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미국전두환의 학살을 막고 광주시민을 도와주러 왔습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시민들은 미국이 광주시민들을 도와주러 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은 아직 광주에서 대피하지 못한 자기 국민 130명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항공모함을 파견한 것 뿐이었다. 미국은 전두환에 대해서는 별다른 가치 판단을 하고 싶지 않았고, 도리어 박정희 시절에 진행했던 핵 개발 포기 등으로 말이 통하는 상대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 듯하다. 당시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의 민주주의는 후차적인 문제였다. 당장 라이벌 소련이 뒤를 봐주는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민주주의보다는 정권의 안정과 현상유지를 중요시했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이 반정부 시위로 정권이 바뀌는 사태를 원하지 않았을 테고, 때문에 이를 알고서도 방관하거나 유사시 미군을 투입해 정권을 지키지는 않았을까 하는 의혹을 사고 있다. 비슷한 사례로 남미 등에서 미국은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다는 이유를 대면서 자국에서 인권유린을 하는 군사 독재자들에게 지원을 해줬다.[48]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민주화운동의 불길을 당겼다는 평가와 더불어 미국에 대한 또다른 시선이 성장하는 (다르게 말하자면 반미 감정의 기원이 된) 계기였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가 있다. 80년 5월 전까지만 해도 '미국'에 대한 인식은 한국전쟁에서 남한을 도와준 우방국이라는 개념이었고, '민주주의의 나라이자 한국의 가난을 구원해준 나라'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었고, 또한 지미 카터가 인권외교를 내세우며 독재정치를 펼치던 박정희와 대립했다는 점 때문에 운동권 내에서 한국의 민주주의에 도움이 되는 나라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당시 미국이 신군부와 결탁하고 있다는 것은 여러 증거들이 발견되었다. 당시 평상시 군 통제권은 대통령이 아니라 주한미군 사령관에게 주어져 있었는데, 신군부가 쿠데타를 위해 군대를 일으킨 것, 또 5.18 당시 계엄군을 이동 통솔시킨 것은 사전에 미국의 허락을 받지 않고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군사 결정권은 미군 총사령관에게 있었고, 전두환 독단으로 군을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외신이었던 뉴스위크는 광주 사태 이후 위컴 사령관이 유감을 표했다며 의례적인 제스처를 보여주었으나, 지식인들은 이미 미국에 깊은 실망을 느낀 후였고[49], 이러한 반미 성향은 서울 미 문화원 점거 사건과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 등으로 이어진다.[50] 86년에 지어진 운동권 가요 '반전반핵가'에서 <양키 고홈>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과, '5월의 노래'에서 <양키놈 솟은 콧대야>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에서 이러한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반미 성향에 80년대 운동권을 휩쓸었던 마르크스의 철학사상 등이 결부되며 사회주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나타나고, '민족끼리 해결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며 80년대 중반들어 운동권 내에서 NLPDR민중민주주의가 주류를 차지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51]

6.6.1. 반론[편집]

-- The Korean authorities gave the United States two hours' advance notice of the declaration of full martial law, which began at 0001 on May 18. The United States had no prior knowledge of the Korean military authorities' intentions to arrest political leaders and close the universities and National Assembly. On May 18, in both Seoul and Washington, the United States sharply and vigorously protested the implementation of martial law.
- 한국 당국은 미국에게 5월 18일 0001시에 시작한 전체 계엄령의 선언을 시작 2시간 전에 통지했다. 미국은 정치 지도자를 체포하고 대학과 국회를 닫는 한국 군사당국의 의도를 전혀 알지 못하였다. 서울과 워싱턴에서 5월 18일, 미국은 급격하고 강력하게 계엄령의 구현을 거부하였다.

-- The United States did not initially know the full extent of the violence in Kwangju. When it became aware of the seriousness of the situation, the United States repeatedly urged restraint by ROK military forces and issued a public statement on May 22 expressing concern over the civil strife in Kwangiu and calling for dialogue between the opposing sides.
-- The United States was assured by Korean authorities that its May 22 statement calling for dialogue would be broadcasted and distributed in the city. This never happened. Instead, official radio reports in Kwangju falsely asserted that the U.S. had approved the dispatch of Special Warfare Command (SWC) troops into the city.
- 미국은 처음에 광주에서 벌어진 폭력의 범위를 몰랐다. 이 상황의 심각성이 인식되었을 때, 미국은 반복적으로 한국군에게 자제를 촉구하고 광주의 민사 분쟁 우려를 피력하는 한편, 둘 사이의 대화를 촉구하는 공개 성명을 5월 22일에 발표했다. 한국 당국은 미국의 5월 22일 발표문을 방송하고 시내에 배포할 것이라고 보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광주의 공식 라디오 보고서는 미국이 특수전사령부(SWC) 군대의 파견을 승인했다고 거짓 주장했다.

허나 주한미국대사관 홈페이지에는 미국이 전두환이 광주에서의 진압을 승인했다는 것처럼 묘사한 것에 대해 강력하게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원문, 번역문.

즉, 일부 유사역사학 성향의 잡지나 신문, 언론인 등이 주장하는 미국의 승인 하에 일어난 정당한 폭도 진압이라는 주장을 주한미국대사관이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미군은 광주민주화 운동이 벌어진 당시, '''결코 진압을 허가하지 않았으며 후에도 한국 정부의 발표(전두환측의 주장)과 달리 진압을 허가해준 일이 없다"'라고 불만을 표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미국이 유일하게 인정한 20사단 투입 건은 아직까지도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또한 이시기 카터 행정부는 외교 정책면에서 '도덕외교'로 인해 사방에서 공격을 받으며 레임덕에 처해 있었는데, 이러한 국내 정치 상황을 고려한다면 승인이라는 표현보다는 묵인이라는 표현이 적절한 편이다. 실제 카터 행정부가 전두환의 군사행동을 승인했다면 김대중 살리기에 그렇게 열중했을 리가 없고, 레이건에게 김대중은 반드시 살려야 한다고 요청했을리가 없다. 우파적인 레이건 행정부조차 전두환에게 김대중 죽으면 주한미군 빼겠다는 엄포를 놨을 정도다. 전후 사정을 고려했을 때 518에 대한 군사행동을 승인했다기 보다는 어쩔 수 없이 내버려뒀다는 것이 맞다. 당장 지금 이라크 전쟁이나 ISIS를 봐도 상대국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외부 개입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당장 이 시점에서 미군이 개입해서 전두환 정권 교체해버렸다가 신군부가 단독 군사행동해버리고 그 틈을 타 북한이 침공하면 그 결과는 가만히 앉아있는 것만 못하다.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미국의 시각에서 한국을 바라봤을 때 이런식의 합리적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의 외교관 크리스토퍼 힐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추모하기 위해 광주 묘역에 가서 조의를 표하기도 하였다.

6.6.2. 반론의 반론: 20사단 투입 승인 논란[편집]

현재 미국은 광주의 학살극에 대해 유일하게 인정한 면이 하나 있다. 바로 '20사단의 광주투입 승인'이다. 그것도 정당하다는 변명과 함께. 이에 미국 워싱턴 포스트의 특파원이던 돈 오버도퍼는 "남한에선 미국이 군병력을 동원한 광주 진압을 묵인 또는 사전 승인을 했다는 비난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고 아래와 같이 말했다.
5월 16일 계엄령이 선포되기 전 한국 군당국은 남한군 20사단 휘하의 2개 부대를 한미연합사령부의 작전통제권에서 제외시키겠다는 방침을 사전규정에 따라 연합사 측에 통보했다. 또한 한국 군당국은 광주를 재탈환하기 위해 20사단을 광주에 파병하기 전 위컴에게 이를 승인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이 20사단은 이미 미군의 작전통제권에서 벗어나 있었으므로 그런 승인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워싱턴 정가의 의사를 타진한 다음 위컴과 글라이스틴은 미군의 통제하에 놓였던 적이 없는 잔혹한 공수부대를 파견하느니, 20사단을 파견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전두환의 정치 선전기구들은 이 사실을 십분 활용해 미국이 광주항쟁의 무력 진압을 지지했다고 선전했다.
- <두 개의 한국(돈 오버도퍼 저, 이종길 역)>. 길산. 2002. p206

그러나 아직 의문점이 남아 있다. <미국 비밀문서로 본 한국현대사 35장면>의 저자 이홍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광주 사태를 기록해 놓은 미 국방부의 비밀문서들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비밀 분류에서 해제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 정보공개법에 따라 특정 시기, 특정 사건, 특정 부처 문서의 비밀 해제를 요청할 경우에도 광주 사태 문건들은 여전히 엄밀한 비밀 해제 작업을 거쳐 검정 띠로 여기저기 가려진 채 공개된다. 특히 광주 사태 문건의 경우 펜타곤의 국방정보국(DIA) 자료는 앞뒤 문맥을 이어나갈 수 없을 만큼 '떡칠'이 되어 나온다. 광주 현장에서 첩보 활동을 했던 국방정보국 소속 보고자의 이름, 보고 날짜, 한국군 부대 이름은 물론 국방정보국 내 접수처와 심지어 접수 날짜 및 시간조차 가려져 있는 경우가 흔하다.
- <미국 비밀문서로 본 한국현대사 35장면(이홍환 저.)>. 삼인. 2002. p65.

6.7.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편집]

1995년 12월 21일,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관련된 것에 대해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국가법령정보센터 자료를 통해 공시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52]
제1조(목적) 이 법은 1979년 12월 12일과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하여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범죄행위에 대한 공소시효 정지 등에 관한 사항 등을 규정함으로써 국가기강을 바로잡고 민주화를 정착시키며 민족정기를 함양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공소시효의 정지) 1979년 12월 12일과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하여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 제2조의 헌정질서 파괴범죄행위에 대하여 해당 범죄행위의 종료일부터 1993년 2월 24일까지의 기간은 공소시효의 진행이 정지된 것으로 본다.
제3조(재정신청에 관한 특례) ① 제2조의 죄에 대하여 고소 또는 고발을 한 자가 검사 또는 검찰관으로부터 공소를 제기하지 아니한다는 통지를 받은 경우에는 그 검사 소속의 고등검찰청이나 그 검찰관 소속의 고등검찰부에 대응하는 고등법원 또는 고등군사법원에 그 당부(當否)에 관한 재정(재정)을 신청할 수 있다. 법률 제5029호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 시행 전에 제2조의 죄에 대하여 공소를 제기하지 아니하기로 결정된 사건의 경우에도 또한 같다.
② 제1항의 재정신청에 관하여는 「형사소송법」 또는 「군사법원법」의 해당 규정을 적용한다.
제4조(특별재심) ① 5·18민주화운동과 관련된 행위 또는 제2조의 범행을 저지하거나 반대한 행위로 유죄의 확정판결을 선고받은 자는 「형사소송법」 제420조 및 「군사법원법」 제469조에도 불구하고 재심(再審)을 청구할 수 있다.
② 재심의 청구는 원판결의 법원이 관할한다. 다만, 「군형법」을 적용받지 아니한 자에 대한 원판결의 법원이 군법회의 또는 군사법원인 경우에는 그 심급(審級)에 따른 주소지의 법원이 관할한다.
③ 재심의 관할법원은 제2조의 죄를 범한 자가 그 죄로 유죄를 선고받고 그 형(刑)이 확정된 사실에 대하여 직권으로 조사하여야 한다.
④ 제1항의 재심 청구인이 사면을 받았거나 형이 실효(失效)된 경우 재심 관할법원은 「형사소송법」 제326조부터 제328조까지 및 「군사법원법」 제381조부터 제383조까지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종국적(종국적) 실체판결(실체판결)을 하여야 한다.
⑤ 제1항의 재심에 관한 절차는 그 재심의 성격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 「형사소송법」과 「군사법원법」의 해당 조항을 적용한다.
제5조(기념사업) 정부는 5·18민주화운동 정신을 계승하는 기념사업을 추진하여야 한다.
제6조(배상 의제)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른 보상은 배상(賠償)으로 본다.
제7조(상훈 박탈) 정부는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상훈(賞勳)을 받은 자에 대하여 심사한 결과 오로지 5·18민주화운동을 진압한 것이 공로로 인정되어 받은 상훈은 「상훈법」 제8조에 따라 서훈(서훈)을 취소하고, 훈장 등을 환수한다.

1996년 12.12 군사반란의 주역들이 이 법에 의해 처벌받게 되자, 헌법재판소에 이 법이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였는데, 한정위헌의견 5, 합헌 의견 4로 위헌 결정에 필요한 정족수 6인을 채우지 못 해 합헌 결정이 나왔다.[53] 이를 두고 정족수 없이 위헌 의견이 많으면 위헌이 되는 미국 대법원의 예를 들면서 '위헌 의견이 더 많았으니 사실상 위헌'이라고 정신승리를 하기도 하는데, 이는 결정문도 제대로 안 읽어봤다는 반증이다.

헌법재판소는 전원 일치하여 이 법이 헌법 13조 1항의 형벌불소급 원칙 위반이 아니라고 보았으며, 공소시효 정지를 규정한 이 법 2조가 소급입법인지에 대하여 재판관 3인은 검찰의 소추권 행사가 불가능했으므로 당연히 공소시효가 정지되는 것이고, 이 법률은 그것을 확인한 것에 불과하다고 하여 소급입법이 아니라고 보았고, 재판관 2인은 이 법률로 인해 공소시효가 정지된 것이라 하여 소급입법으로 보았으나, 재판관 4인은 공소시효에 대한 판단권은 법원에 있다 하여 판단을 유보하였다.

만약 공소시효가 완성되지 않았다면 재판관 전원은 일치하여 이 법은 단지 진행중인 공소시효를 연장하는 이른바 부진정 소급입법으로서 위헌이 아니라 보았고, 공소시효가 이미 완성되었다면 재판관 5인은 이는 진정소급입법으로서 언제나 위헌이라고 보았고, 4인은 '국민이 소급입법을 예상할 수 있었거나, 법적 상태가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웠거나 하여 보호할 만한 신뢰의 이익이 적은 경우와 소급입법에 의한 당사자의 손실이 없거나 아주 경미한 경우, 그리고 신뢰보호의 요청에 우선하는 심히 중대한 공익상의 사유'가 있었을 경우에는 진정소급입법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설령 미국 대법원처럼 위헌 의견이 다수일 때 바로 위헌이 된다고 하여도 이 경우 '공소시효가 이미 완성되지 않았을 경우에 적용하는 것은 합헌'인 것인데,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이 부분은 절대 말하지 않는다. 그저 5인의 위헌 의견이 있었으니 5.18 특별법은 위헌이라고 주장할 뿐이다. 그러나 이 5인 재판관도 전두환, 노태우가 '헌정 질서 파괴 범죄자'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공소시효가 문제지 이놈들의 죄 자체는 당연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4인 의견에 대해 권력에 아부해 법리를 왜곡했다고 비난하기까지 하는데, 그러한 비난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 환수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헌법재판소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에 관한 특별법에 대해 위의 4인 의견과 동일한 논리로 예외적인 경우 진정 소급입법이 허용된다고 하여 합헌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논리의 일관성을 지키기 위하여는 5.18 특별법이 위헌이라면 친일파 재산 환수도 위헌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참고로 4인의 합헌 의견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우리 헌정사에 공소시효에 관한 진정소급입법을 단 한 번 예외적으로 허용한다면 바로 이러한 경우에 허용하여야 한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경우가 진정소급입법의 원칙적 금지의 예외에 해당하지 않는다면, 그 예외는 대체 어디에 해당되고 무엇을 위한 예외인지 진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이 특별법은 원칙적으로 금지되는 진정소급입법이지만, 사안의 특수성으로 인해 합헌이다. 헌법재판소에서 지금까지 심사해 온 수많은 진정소급입법 관련 사건 중에 단 두 개만 합헌인데, 최초가 이 5.18특별법이고, 다른 하나는 앞서 말한 친일파 재산 환수 특별법이다.

6.8. 5.18 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편집]

1995년 역사바로세우기 때에도 5.18 참가자나 유족들의 국가유공자 예우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2001년부터 김대중 정부는 '5.18 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이들을 유공자로 예우하였다.
5.18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 약칭: 5.18유공자법 )
제1조(목적) 이 법은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희생하거나 공헌한 자와 그 유족 또는 가족에게 국가가 합당한 예우(禮遇)를 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숭고한 가치를 널리 알려 민주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예우의 기본 이념) 우리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발전에 이바지한 5·18민주화운동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의 귀감(龜鑑)으로서 항구적으로 존중되고, 그 희생과 공헌의 정도에 상응하여 민주유공자와 그 유족 또는 가족의 영예(榮譽)로운 생활이 유지·보장되도록 실질적인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제3조(정부의 시책)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5·18민주화운동의 민주·정의실현의 이념을 기리고 이를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시책을 마련하여야 한다.
제4조(적용 대상자)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자로서 제7조에 따라 등록이 된 자(이하 "5·18민주유공자"라 한다)와 그 유족 또는 가족은 이 법에 따른 예우를 받는다.
1. 5·18민주화운동사망자 또는 행방불명자: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사람 또는 5·18민주화운동으로 인한 상이(질병을 포함한다. 이하 같다)의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람으로서,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보상을 받은 사람
2. 5·18민주화운동부상자: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상이를 입은 사람으로서,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제5조제5항에 따른 장해등급(이하 "장해등급"이라 한다)의 판정을 받고 보상을 받은 사람
3. 그 밖의 5·18민주화운동희생자: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제22조에 따라 지원을 받은 사람
제5조(유족 또는 가족의 범위) ① 이 법에 따라 예우를 받는 5·18민주유공자의 유족이나 가족의 범위는 다음과 같다.
1. 배우자
2. 자녀
3. 부모
4. 성년인 직계비속(直系卑屬)이 없는 조부모
5. 60세 미만의 직계존속(直系尊屬)과 성년인 형제자매가 없는 미성년 제매(弟妹)
② 제1항제1호의 배우자의 경우, 사실혼 관계에 있는 사람을 포함한다. 다만, 배우자 및 사실혼 관계에 있는 사람이 5·18민주유공자와 혼인 또는 사실혼 후 그 5·18민주유공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사실혼 관계에 있거나 있었던 경우는 제외한다.
③ 제1항제2호의 자녀의 경우, 양자(養子)는 5·18민주유공자가 직계비속이 없어 입양한 자 1명에게만 이 법을 적용한다.
④ 제1항제3호의 부모의 경우, 생부 또는 생모 외에 5·18민주유공자를 양육하거나 부양한 사실이 있는 부 또는 모의 배우자가 있으면 5·18민주유공자를 주로 양육하거나 부양한 자 1명을 부 또는 모로 본다.
⑤ 제1항제4호의 조부모의 경우, 성년인 직계비속이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생활능력이 없는 정도의 장애인이거나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람으로서 의무복무 중인 경우에는 성년인 직계비속이 없는 것으로 본다.
1. 「병역법」 제16조 또는 제20조에 따라 입영된 현역병(본인이 지원하지 아니하고 임용된 부사관을 포함한다)
2. 「병역법」 제22조에 따라 소집된 상근예비역
3. 「병역법」 제25조에 따라 전환복무된 의무경찰 및 의무소방원
4. 「병역법」 제2조제1항제10호에 따른 사회복무요원으로 소집된 사람
⑥ 제1항제5호의 미성년 제매의 경우, 60세 미만의 직계존속과 성년인 형제자매가 있더라도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생활능력이 없는 정도의 장애인이거나 제5항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람으로서 의무복무 중인 경우에는 60세 미만의 직계존속과 성년인 형제자매가 없는 것으로 본다.
제6조(예우 원칙) 5·18민주유공자와 그 유족 또는 가족에 대하여 5·18민주유공자의 희생과 공헌의 정도에 따라 예우하되, 그 생활수준과 연령 등을 고려하여 예우의 정도를 달리할 수 있다.
제7조(등록 및 결정) ① 5·18민주유공자, 그 유족 또는 가족이 되려는 사람은 국가보훈처장에게 등록을 신청하여야 한다.
② 국가보훈처장은 제1항에 따른 등록신청을 받으면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제4조 또는 제5조에 따른 요건을 확인한 후 5·18민주유공자, 그 유족 또는 가족에 해당하는지를 결정한다. 이 경우 국가보훈처장은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제4조에 따른 5·18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심의위원회(이하 "보상심의위원회"라 한다)의 위원장에게 그 요건과 관련된 사실의 확인을 요청하여야 하며, 보상심의위원회의 위원장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그 요건과 관련된 사실을 확인하여 국가보훈처장에게 통보하여야 한다.
③ 국가보훈처장은 제2항 전단에 따라 5·18민주유공자, 그 유족 또는 가족에 해당하는지를 결정하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74조의5에 따른 보훈심사위원회(이하 "보훈심사위원회"라 한다)의 심의·의결을 거칠 수 있다.
④ 제1항에 따른 등록신청의 순위와 절차 등에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6.9. 5.18 민주화운동 당시 외신 보도와 국내 언론 보도의 차이[편집]


전반부는 외신의 보도 내용, 후반부는 국내 언론 보도를 담고 있다.


TBC 동양라디오 1980년 5월 22일자 저녁 7시 뉴스 프로그램 '뉴스 기상도' 녹음

사건 당시, 북부독일방송 도쿄 지국 소속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광주로 잠입해 현장을 취재했다. 현재 80년 당시 남아있는 컬러 영상 대부분이 힌츠페터가 촬영한 영상이다. 힌츠페터는 계엄군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5월 19일 광주에 잠입했고, 영상을 촬영한 후 필름을 과자통[54]에 숨겨 독일 본사로 보냈다. 이 영상이 북부독일방송의 저녁 뉴스 프로그램인 타게스샤우를 통해 방송되면서 세계에 광주의 실상이 알려지게 됐다. 힌츠페터는 5월 22일 2차 잠입 후 보강 취재하여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독일 본사에 보냈으며, 이 다큐멘터리는 80년대 독일에서 유학하던 천주교 신부들이 녹화해서 국내에 들여와 당시 광주의 참상을 고발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55]

당시에 한국 천주교의 비밀 정보망을 이용하여 외신 기자들의 사진을 광주에서 해외로 옮겨갔다는 관련자의 이야기가 있었다.

7.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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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당시 광주시내 모 탄약창에 근무하던 배승일은 계엄군의 도청 탈환 작전 직전인 5월 24일 시민군의 손에 넘어간 전남도청 지하실에 설치된 엄청난 양의 폭약을 제거해 달라는 시민군 속 온건파 학생들의 요청을 받고 죽음을 무릅쓴 채 현장에 잠입하여 2,000여 개의 다이너마이트와 450여 발의 수류탄 뇌관을 제거한 공을 세워 그 해 보국훈장 광복장을 받았다. 배승일은 1977년 전북 이리역 폭발사고를 목격한 적이 있어, 지하실에 가득 쌓인 폭발물을 본 순간 자칫 광주 시가지 전체가 불바다로 변할 수 있다는 아찔한 위기감에 밤을 새 작업했다고 당시를 회고하였다.[56]

그러나 2006년 3월, 노무현 정부가 당시 5.18민주화운동 진압 작전 참가자 등 176명의 훈장 서훈을 취소하였고, 이 중엔 배승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배승일은 소송 끝에 2007년 훈장을 되찾을 수 있었다. 배승일은 비록 군무원 소속이었긴 하지만 진압 작전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수많은 광주 시민들의 생명을 위협하던 요소를 제거한 일을 했으므로, 다른 계엄군 출신 인물들과는 달리 훈장을 박탈당하는 것이 부당했던 입장이다. 기사 참조.

<친일파를 위한 변명>이란 책으로 욕을 드럽게 먹었던 김완섭도 광주 민주화 유공자 출신이다.

이 당시에는 아직 최고의 기자로서 활약하던 조갑제광주에 직접 들어가서 취재하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조갑제는 이 운동을 민주화운동으로 높이 평가하며 5.18 왜곡보도 등을 깠고, 지금도 왜곡이 나올 때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작작 좀 지껄여라'라고 말하고 있다.[57]

그리고 어찌 됐든 전두환은 잘 살고 있다. 물론 형이 선고되어서 신변보호를[58] 제외한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법적인 예우는 못 받지만[59] 그동안 쌓아놓은 게 워낙에 많아서... 저지른 일들에 대한 비난을 받는 것은 기본이요, 청문회에 몇 번 불려 나와야 하지, 여기에 온갖 비리 등으로 법정으로 불려나오고, 이 상황에 말 한 번 잘못 했다간[60] 온갖 욕을 보통의 정치인보다 엄청 뒤집어쓴다. 하지만 어쨌든 전직 대통령이란 이유 및 권력으로 이리저리 잘도 피해다니고, 여전히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1998년에 한국에 금서 해지되어 번역된 1980년 9월에 출판된 일본인 기자가 쓴 80년 5월 광주 봄의 대학살(光州80年5月―つかの間の春の虐殺)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당시 광주를 방문해 광주사태를 직접 목격한 일본인 기자단의 이카리 아키라(猪狩章)라는 기자가 당시의 충격에 바로 집필을 시작하여,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여러 이야기와 그에 대한 확대 생산이나 축소 논란에 빠지지 않고 3개월만에 나온 책으로 상당히 객관적으로 저술되어, 오히려 요즘 나온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책들보다 냉정하고 정확한 해석을 보여준다.

당시 화려한 휴가 작전에 참가한 특전사의 인터뷰 : 다만 장갑차에 대한 진술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1999년 위 동일인물이 쓴 당대비평에 실린 글

광주광역시에서는 5.18 운동이 일어난 현장 중 27곳을 사적지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5.18 사적지 목록 참고.

2015년 초 기준으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전남도청 리모델링 공사 현장 내부에는 아직도 5.18의 흔적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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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된 사진은 공식적인 촬영이 아닌, 당시 현장에 출입한 인원에 의해 촬영된 것으로서 현재의 보존 상황은 알 수 없다.

운동 당시 전남도청에서 마지막 방송을 했던 박영순이 35년만에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광주의 참상 와중에서 피로 얼룩진 살육을 막으려던 양심 있는 경찰이 있었는데, 바로 당시 전라남도 경찰국 국장 안병하였다. 그는 공수부대들이 시민들을 폭력으로 진압하는 와중에도 진압 경찰들에게 무력진압을 하지 말아달라고 명령했다가 5.18 직후에 신군부에 의해 동빙고 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이후 '자진사직' 조건으로 풀려났으나, 그동안의 고문 후유증으로 투병하며 생활고에 시달리다 1988년 10월에 사망했다. 6월 항쟁 직후 부인인 전임순 등의 진상규명 노력으로 2003년에야 광주민주화유공자에 등재되었고, 2005년에는 유해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2016년 6월 19일, 국가보훈처에서 5.18 현장인 구 전남도청(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앞에서 6.25 전쟁 기념 군사 퍼레이드를 진행하기로 하였는데, 여기에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진압군으로 투입되 시민을 학살했던 제11공수여단이 참여하는 것으로 밝혀져 파문이 일었다. 기사. 당연히 피해자인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가족 및 유공자 단체는 크게 반발했고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은 성명을 내고 국가보훈처장의 해임을 주장하고 나섰다. 결국 이 계획은 여론에 부담을 느낀 제11공수여단이 불참을 결정하면서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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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일빌딩의 헬기 총격설이 꾸준히 나오고 있었지만, 36년만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조사로 상공에서 발사한 것으로 보이는 실탄 사격 총탄 흔적이 발견함에 따라 조사가 가속도가 붙으며, 사적지 보전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기사. 그리고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37년만에 공식화했다. 기사.

그리고 사건 당시 계엄군이 헬기 총격을 요청했고, 실제로 발포했다는 군 보고서가 나왔다. 기사. 1995년 전일빌딩 헬기 총격 전면 재조사에서 검찰이 제외시켰다는 것이다. 기사. 5.18기념재단이 군 헬기에서 발사된 총탄에 시민이 숨졌다는 목격담이 공개됐다. 기사. 헬기 사격은 전남대학교 5·18연구소에 따르면 20사단의 전남도청 투입 작전과 관련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기사.

전두환이 쓴 회고록에서 "나는 발포 명령을 내린 적이 없으며, 시민들이 먼저 쐈기 때문에 방어 차원에서 군인들이 응사하게 된 것" 이라는 구절이 발견되었다. 이 부분을 소재삼아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취재까지 나갔는데, 당시의 계엄사령관 역시 같은 입장을 취했다. 판단은 개인이 알아서...

2017년 5월 1일.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대병원에서 치료받은 환자는 총 223명이며, 이 가운데 총상 환자가 가장 많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기사.

2017년 8월 21일, JTBC 뉴스룸은 단독으로 5.18 당시 수원공군기지의 전투기에 공대지 폭탄을 장착하고 출격대기하라는 명령이 있었다라고 보도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는 당시 공군 파일럿들 여럿이 증언하는 바인데 이 증언에 의하면 5월 18일 이후 가용 가능한 모든 기지내 전투기에 공대지 폭탄을 장착하고 출격대기 중이었다는것. 당시 파일럿들은 출격할 장소가 광주로 알고 있었다고 증언해 충격을 더했다.

이게 왜 문제가 되냐하면, 일반적으로 공대공 작전을 주로 하던 이들에게 공대지 폭탄을 장착하라는건 사실상 광주를 폭격할 생각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신군부가 당시 광주 상황에 따라서 폭격까지도 고려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에서 헬기 총격보다도 더 큰 충격을 주는 사안이다. 수원공군기지의 가용 전투기들을 총동원했다는 증언으로 미루어보면 한두대나 서너대정도의 수준이 아니었을거라는건 상식적으로 추론이 가능한 상황. 만약 이때 출격이 이루어졌고 광주를 폭격했다면 5.18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도 더 엄청난 참극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대대장인 김홍래 전 공군참모총장은 북한의 동향에 대비한 조치였다고 주장하며 이에 대해 반박했으나, 공개된 미국 CIA 기밀문서는 당시 북한군의 특이 동향이 없다라고 밝히고 있어서 김홍해 전 총장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게다가 당시 광주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5.18을 겪은 아놀드 피터슨 목사는 자신의 회고록에 자신에게 대피하라고 찾아온 미군 하사 데이브로부터 한국 공군이 공격의 일환으로 도시에 폭탄을 떨어뜨릴 계획을 세웠다고 들었다라고 증언했는데 이런 증언과도 맞아떨어지는 대목이다. 공군의 5.18 당시 광주 폭격시도에 대해서 철저한 조사와 당시 자료에 대한 면밀한 검토등이 필요한 상황이다.
[단독] "5·18 직후 폭탄 장착한 채 출격대기" 당시 조종사 '증언'
"5·18 당시 미군에게 공습 얘기 들었다" 피터슨 목사 수기 보니
미 국방정보국 비밀문서엔 "신군부, 광주시민을 베트콩처럼…"
[인터뷰] '5·18' 당시 전투기 조종사 (2017.08.21)

2017년 8월 23일, 문재인 대통령은 518 민주화운동 특별조사단을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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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8일, 군 문서를 조사한 결과 계엄군이 실탄 50만발 가량을 비롯해 TNT 1200kg, 권총탄 3천발 가량 등을 소모했고, 발칸포 등을 광주에 투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심지어 대전차로켓66mm 로우 50발을 어디에다가 쓴지 몰라도 실제로 사용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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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상무지구에 새로 건설된 광주광역시청은 의회동을 5층, 행정동을 18층으로 지음으로서 5.18 민주화운동을 기념하고 있다.

8.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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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국어
1980년 인권기록유산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록물
영어
Human Rights Documentary Heritage 1980 Archives
for the May 18th Democratic Uprising against Military Regime,
in Gwangju, Republic of Korea
국가·소장
대한민국 : 국가기록원, 광주광역시, 육군본부, 5·18기념재단, 국회도서관
미국 : 국무부, 국방부
등재유형
기록유산
등재연도
제작시기

[1] 12.12 군사반란으로 군부가 이미 정부를 장악했기에 실권은 없었다.[2] 사망자 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므로 후술되었다.[3] 위 사진에서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꼬마 상주는 조천호(당시 5살), 그리고 영정 속 남자는 아버지 조사천(향년 34세)으로, 건축 일을 하던 조사천은 시위에 동참했다가 5월 21일 낮 1시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발포로 숨졌다. 이 사진은 외신 기자가 몰래 찍어 독일의 슈피겔지에 실린 후 5.18의 상징이 되었다. 한편 조천호는 훗날 "어렴풋하지만 당시엔 슬프기보다 배고팠어요. 너무 배가 고파서 힘이 없었습니다. 지쳐서 영정 사진에 기대 있었던 것 같습니다"라고 술회했다. 제대 뒤 5·18묘역 관리소에서 근무하다 혼인 후 광주시청에서 일하고 있다.[4]광주광역시. 1986년에 광산군, 송정시와 통합해 광주직할시로 승격됐고 1995년 광주광역시로 개칭됐다. 참고로 광주 구도심에서 학살이 벌어지던 당시에도 광주시의 일부가 아니었던 광산군과 송정시(현 광산구)는 강 건너 근처임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일이 없이 조용했다.[5] 단, 광주 '폭동' 등의 진짜 왜곡 용어와 달리 사태(事態)라는 단어 자체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없고 건조한 중립적 어휘다. 그리고 발생 당시에 사용된 용어라서 가끔씩 일부 언론이나, 일상에서는 주로 중년 이상 계층에서 우파가 아니라도 정치적 성향에 관계 없이 광주 사태라고 부르기도 한다.[6] 1988년 제6공화국에서 공식적으로 밝힌 바에 따르면 사망 191명, 부상 852명이다. 참고 문헌: 두산백과, 5·18 민주화운동 #[7] 수하 없는 무차별 사격은 물론, 철수할 때는 민간 병원에까지 총질을 하는 등 도무지 제대로 군기 잡힌 군대의 모습이 아니었기에 "명령에만 따랐다" 정도가 아니라 명령에 따르는 수준을 넘어서서 아주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학살에 참여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기도 한 듯.[8] 다만 5.18 이후에 NL이 당장 성장한건 아니고 사실 NL이 주도권을 차지하게 된 건 80년대 중반의 일이다.[9] 학술 쪽으로 깊이 파고 싶다면 김영택, 5월 18일 광주 광주민중항쟁 그 원인과 전개과정;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 사회과학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재구성한 5월 광주의 삶과 진실을 참고할 것.[10] 특이하게도 브래태니커 백과사전은 이에 대해 rebellion과 uprising 두 표기를 모두 사용한다.[11]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상에선 2회라고 오타가 남.[12] The Living Tombstone - September이라는 곡과 Green Day - Whatsername 리메이크 버전과 화려한 휴가를 요약한 것이다.[13] "피고인 이학봉의 지시를 받은 광주지구 보안부대가 5.17. 23:00경부터 시위주동자에 대한 이른바 '예비검속'을 실시하여 재야인사와 학생회 간부 등 연행대상자 22명 중 정동년, 권창수, 오진수, 이승룡, 유재도 등 8명을 체포하는 등 전국 각 지역에서 비상계엄 확대와 병행하여 실시한 예비검속 과정에서 총 2,699명을 체포하는 등 전국적인 비상계엄의 위력을 과시하여 헌법과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신체의 자유 등을 침해하고 동시에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인 대통령과 국회의원 그리고 국무위원 등을 강압, 외포케 하여 폭동하였다." 서울고법 1996.12.16, 선고, 96노1892 판결 내용 인용.[14] 서울고법 1996.12.16, 선고, 96노1892, 판결 참고.[15] 12.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62쪽.[16] 왜 가톨릭센터 부근이냐면, 유신 시기인 1970년대 후반부터 민주화 시위의 거점은 곧 가톨릭센터였으며, 민주화운동이 시작된 5월 18일 당시만 해도 가톨릭농민회나 정평, 노동청년회 등이 한 자리에서 민주화 운동의 진원지 역할을 했던 관계로, 뚜렷한 지도부가 부재했던 광주 시민들을 가톨릭센터로 이끄는 역할을 했다.[17] 택시기사들은 공수부대원의 구타로 다친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싣고 가다가 공수부대원들에게 공격을 당했고, 앞서 말했듯 시내버스의 경우에도 공수부대원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승객들을 닥치는 대로 구타했다. 이게 알려지면서 택시기사와 버스기사들이 시위에 가담하게 된 것.[18] 제5공화국 드라마에서는 광주 최대의 버스회사인 대창운수 소속 차량이 대거 시위에 동원된 것으로 나오며, 이는 역사적으로 고증이 정확한 부분이기도 하다. 대창운수 문서 참고.[19] 그러나 가두방송자 전옥주와 시민 서채원의 증언에 의하면, 화재 당일 방송국이 셔터를 내린 상황이었기 때문에 방화 여부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다.[20] 김만두, 김재화, 이북일, 김재수, 허봉[21] 피해자의 정확한 인적사항에 관해서는 상반되는 증언이 있어 불분명하다.[22] 물론 당연하겠다면 당연하겠지만 이후로 보도 관계자들은 1980년 7~8월 언론인 대량해직 및 11월 언론통폐합 때 죄다 해고되었고, 6월 항쟁이 끝나고 나서야 복직되었다.[23] 그런 연유로 1989년에 KBS 노조(제1노조)가 낸 <5공하 KBS 방송기록>에선 노조 측은 해당 자료집을 내는 과정에서 1980년 및 5공 초기의 자료가 부재해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24] 송기숙 교수의 증언으론 남동성당에 모인 인사들은 도청에 모인 유지급 인사들의 과거 경력 때문에 그들을 불신하는 기운이 있었던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로 온건한 수습을 주장한 인사들을 후에 운동권에서 지나치게 매도한 감도 없진 않다.[25] 서울신문 1998년 9월 10일 6면. <'폭동' 아닌 '민중항쟁' 자리매김 큰 몫 윤상원 5ᆞ18 시민군 대변인(임창용 기자 글)> 참고.[26] 박영순이다. 출처.[27] <오월의 사회과학>. p230.[28] 사실 쏠 수도 없었다고도 한다. 생존자 증언에 따르면 카빈 소총 한 정당 실탄 세 발씩만 주어졌다.[29] 영화 <화려한 휴가>의 김 신부의 모델이 된 인물.[30] 밑에 서술된 최미애씨의 어머니[31] 당시의 표기는 "-이었오"만 쓰였고 "-이었소"는 없었다.[32] 당시 최미애씨는 전남고등학교에 재직중이던 남편을 기다리며 집 앞에 서 있었으나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 때 뱃속에 8개월이 된 아이가 있었는데, 이 아이도 얼마 가지 않아 엄마와 함께 숨을 거두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겨우 20대 초반이었다.[33] 경북고등학교 졸업생 중 정관계 인사들의 모임.[34] 개개인이 따로 참가한 것이 아니라 광주시의 이름으로 모인 시의 숙원사업 진행에 가깝다.[35] 국회청문회 기록.[36] 계엄군들이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을 닥치는 대로 마구 폭행하거나 죽이기까지 했으니 폭도나 다름없다. 실제 전두환 전 대통령[37]의 판결문(서울고법 1996.12.16, 선고, 96노1892, 판결)에서도 폭동으로 명시하고 있다. '피고인들이 국회를 봉쇄하고 정치활동을 금지하며 주요 정치인들을 구속하고 비상계엄을 부당하게 전국으로 확대한 행위는 이미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국헌을 문란케 한 행위이고 위의 시위 상황에 의하면 광주시민들은 위와 같은 피고인들의 국헌 문란 행위를 항의하기 위하여 대규모의 시위에 나온 것이므로 이것은 주권자이며 헌법 제정 권력인 국민이 헌법 수호를 위하여 결집을 이룬 것이라고 할 것이고 피고인들이 국헌문란의 목적이 없는 계엄군을 동원하여 위에서 본 것처럼 난폭하게 이를 제지한 것은 강압에 의하여 그 권한 행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이어서 국헌 문란의 폭동에 해당한다.'[37] 더이상 전두환에게 전 대통령이라는 호칭은 맞지 않다. 김영삼 정부 당시 재판에서 전직 예우를 박탈했기 때문. 따라서 공적인 자리에서도 손석희 앵커처럼 그냥 전두환씨 정도로 부르는게 맞다.[38] 단, 발포 명령에 대해서는 부인했기 때문에, 향후 5.18 관련 연구는 "누가 발포 명령을 내렸는지?"에 대해서 전보다 더 초점이 맞춰질 전망이다.[39] 상식적으로도 군을 장악한 전두환의 입장으로 생각해볼 때, 북한군이 경기도 광주가 아닌 당시의 전남 광주까지 버젓이 들어와서 활동을 했다는 것은 본인의 무능을 만천하에 증거하는 말이다. 또한 육해공군과 경찰들이 단체로 논 것이 아니라면 600명이라는 인원이 육로와 바다와 하늘에서 솟아나거나 떨어지기도 힘들기도 하고... 특히 계엄 상태의 군이라면 600명의 침투를 모를 리가 없다.[40] 그 중 광주MBC가 1980년 5월 20일에 광주 난민들한테 방화당하였음.[41] 전남매일신문 80.6.2 게재.[42] 공교롭게도 나치 독일제2차 세계대전에서 서방 연합군에 항복한 날이기도 했다.[43] 이 곡은 2015년 들어 재조명되기도 했다. 수필집 <밤이 선생이다>로 젊은 독자들에게 주목받은 원로 문학평론가 황현산 선생이 트위터에 "가사가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 디스했다가, 트위터 이용자로부터 이 노래가 5월 광주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지적을 받고 하룻밤 자고 일어나도 충격이라며 비아냥거렸던 것을 사과한다고 사과하는 해프닝이 있었기 때문. 시인 겸 평론가 권혁웅 역시 이현세의 만화 해왕도의 내용을 노래 가사로 옮긴 것이라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 노래의 숨은 상징이 얼마나 알려지지 않았는지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44] 5.18 27주년 청소년 백일장 대상[45] 심사위원장 왈, 항쟁을 직접 겪은 사람도 이렇게는 못 쓸거라고... #[46] 그러나 노태우 정권 시기인 1990년에 공연윤리위원회(현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사전심의를 받지 않고 대학가에서 상영했다는 이유로 '심의 불가' 판정을 받았으나, 이후 공윤의 확대회의와 재심의에서 심의가 허가되었다. 그러나 도청사수 장면과 전야 횃불시위 장면 등 전체 분량의 22%가 '고증오류'를 빌미로 공윤에서 삭제하고자 했다가 또다시 심의를 거쳐 '미성년자 관람불가' 등급을 받고 철기가 총을 맞는 장면 등 1분짜리 분량만을 편집한 채 개봉했다. 이후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 5월에 무삭제로 심의가 허가되어 신촌 크리스탈극장에서 다시 개봉되었다.[47] 황석영은 원래 완성됐던 책을 다듬기만 했지 책을 쓴 사람은 아니다. 편집자에 가까웠다.[48] 다만 지미 카터 정부가 니카라과의 공산화와 이란 미 대사관 인질 사태로 최악의 레임덕을 겪고 있었다는 것은 조금 감안해 둘 필요는 있다. 또한 이 당시는 냉전이 아직 진행 중이었던 시기였기에,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에서 이란 인질극과 같은 일을 막는 것이 더 시급한 문제였다.[49]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 뒤에도 리차드 워커 주한 미국대사의 "버릇 없는 아이들이 저지른 장난이므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발언이 큰 기폭제로 작용했다. 비단 지식인 뿐만 아니라 우리의 농민들도 미국의 시장 개방 압력에 따른 농산물 등 미국 상품 상륙으로 농수산물 값이 폭락함에 따라 분노가 치솟아올랐다.[50] 서울 미 문화원 점거 사건의 자료 사진을 보면, 점거한 대학생들이 창문에 '광주학살 책임져라'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걸어두었음을 알 수 있다.[51] 임수경문익환의 방북을 생각하면 된다. 물론 정부는 그렇게까지 풀려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귀국과 동시에 체포되었다.[52] 1995년 12월 21일 제정, 2010년 3월 24일 개정, 법률 제10182호.[53] 종래 헌법재판소는 이럴 경우 '위헌 불선언' 결정을 했는데, 이 결정을 계기로 위헌 불선언 결정을 하지 않고 있다.[54] 당시 조선호텔에서 팔던 수입 과자를 담는 통이 필름 크기과 비슷했다.[55] 이 때문에 힌츠페터 기자는 푸른 눈의 목격자라는 이명을 얻게 되었다.[56] 다이너마이트와 수류탄은 단순한 위협용이라고도 한다. 왜냐하면 전남도청을 폭파할 의도가 있었다면 도화선을 연결했을 텐데 시민군은 그러지 않았다.[57] 조갑제는 1979년 부마민주항쟁도 직접 취재했을 정도로 7-80년대에는 정부에 비판적인 굵직한 기사를 많이 썼다.[58] 전직 대통령이 납치되어 국가 기밀을 누설하는 걸 방지하는 것이 주 목적이다.[59] 허나 골프라도 한 번 치러 가려면 의무경찰들을 비롯한 경찰들의 보호를 받는다. 사실 이는 예우라기보다는 전술한 신변보호에 관한 것이긴 하다.[60] 예를 들어 29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