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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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佛敎 | Buddhism
석가모니(샤카무니)
약 5억 7000만 명[1]
세계 4위
불교의 대표적 상징인 법륜(法輪).[2]
산스크리트어로 다르마차크라(Dharmachakra).

1. 개요2. 핵심 교리
2.1. 무아(無我)2.2. 변(變)2.3. 탐진치(貪嗔癡)2.4. 명상(冥想)2.5. 명색(名色)2.6. 오온(五蘊)과 행위(카르마)2.7. 연기(緣起)2.8. 공(空)2.9. 유식(唯識)2.10. 이타심2.11. 상징과 신(神)2.12. 결단2.13. 현실2.14. 종합
3. 주요 특징4. 분파5. 역사
5.1. 전파5.2. 분포 관련 역사
6. 불경
6.1. 근본 불교6.2. 부파 불교6.3. 대승 불교
7. 성지8. 붓다9. 각종 오해와 통념들10. 대한민국에서의 불교
10.1. 종단 목록10.2. 유관단체10.3. 한국 불교의 역사
11. 관련 용어
11.1. 붓다, 승려 등을 뜻하는 용어11.2. 교리 관련
12. 관련 인물
12.1. 석가모니와 불제자12.2. 고승 및 불교 사상가
12.2.1. 인도12.2.2. 중앙아시아12.2.3. 중국12.2.4. 한국
12.2.4.1. 근현대
12.2.5. 베트남
13. 부처들과 보살들, 그 외의 신들
13.1. 불·여래13.2. 보살13.3. 명왕13.4. 그 외
14. 불교에 영향을 받은 종교와 사상(가)
14.1. 종교14.2. 사상(가)
15. 불교 신자16. 타 종교 간의 관계17. 기타18. 관련 문서

atta(스스로)dīpā() vihar(살다)atha(그리고) atta(스스로)saraṇā(피난처) an(~아니다.)añña(다른 것)saraṇā(피난처),
스스로를 섬으로 삼아 스스로에 의지하며 살아라.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dhamma()dīpā() dhamma()saraṇā(피난처) an(~아니다.)añña(다른 것)saraṇā(피난처)
진리를 섬으로 삼아 진리에 의지하라.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대반열반경에 나오는 석가모니의 마지막 설법.[3]

1. 개요[편집]

불교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따르고, 불경을 경전으로 삼는 종교이다.

세계적으로 신도가 약 4억 8천만 명에서 5억 3500만 명 정도[4] 있고, 종교라는 한자어를 맨 처음 만들어낸 종교이기도 하다. 유교, 도교, 경교 등이 모두 부차적인 가르침이고 불교가 으뜸 가는(宗) 가르침(敎)이란 뜻으로 표현한 데서 시작되었다.[5]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 다음으로 교세가 크며, 절대자로서의 을 섬기지 않는 종교 중에서는 세계 최대 규모이다.[6]

2. 핵심 교리[편집]

종종 우리는 사는 게 괴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어떨 때는 진지하게 '왜 살까?'싶기도 하다. 불교는 이러한 삶의 괴로움에 대한 해결책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2.1. 무아(無我)[편집]

불교에서 가장 오래된 교리. 불교의 가르침의 시작이자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숫타니파타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4장에도 언급된다.
‘이것은 내 것이다.’ 또는 ‘이것은 어떤 다른 자의 것이다.’ 하는 생각이 없다면,
내 것이라는 것이 없으므로, 그는
‘나에게 없다.’고 해서 슬퍼하지 않습니다.

숫타니파타 4장의 15. 폭력을 휘두르는 자에 대한 경(attadanda sutta)

'내 것'이라고 생각한 것을, 우연한 사고나 세월이 변함에 따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을 때" 괴로움이 생긴다.

내 몸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람은 언젠가는 죽으며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건강뿐만 아니라 가족, 친구, 재산, 사회 등의 모든 것이 마찬가지이다. 내 마음대로 되길 원하지만, 현실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들이 대다수이다. 한 때는 '내 것' 이었던 것들도 언젠가는 '내 것'이 아니게 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된다.

언젠가 상황이 변해, 보내 주어야 할 때가 오면, 붙잡지 않고 보내 줄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

2.2. 변(變)[편집]

시간이 가면 모든 것은 변한다. 모든 것이 변하기 때문에 '내 것' 또한 변해가며, 변해가는 '내 것'에 괴로워한다. 삼법인에서 제행무상, 아함경의 '무상-고-무아' 등이 여기에 해당. 근본 불교에서도 무아와 연결하여 기본적으로 설명하였다. 이후 연기에 적용되어 여러 변화의 기본이 된다.

2.3. 탐진치(貪嗔癡)[편집]

탐욕, 성냄, 어리석음. 괴로움에 빠지지 않기 위해 경계해야 될 것을 말한다. 역시 가장 오래된 가르침 중 하나이다. 숫타니파타에서 그 원형을 알아 볼 수 있는데 요약하자면
  • 동굴에서 떠나라. 스스로가 "좋다"고 생각한 것에 머물려고 하는 마음가짐을 '동굴'에 비유하였다. 동굴 속 '익숙함'과 '편안함'에 취해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지만, 결국 언젠가 상황은 변하고 가진 것을 잃어버리게 되므로 심한 괴로움을 느낀다. 아무리 괴로워도 '이때까지의 익숙했던 상태'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상황이 다시 좋게 바뀌길 하염없이 기다린다.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괴로움은 심해지나, 이때까지 했던 것들이 생각나서 동굴을 떠나지도 못한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그러니 '이대로 계속 괴로워하든지', 아니면 '변해버려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버리고 자기인생을 살든지' 하라는 것이다. 건강에 대한 슬픔과 자신의 재산, 가족이나 친구, 연인과의 사랑, 사회 생활, 사람의 죽음에 대한 걱정도 동굴에 해당된다. [7] [8] [9]
  • 내가 옳다고 남을 비난하지 마라. 내가 옳다고 여겨서 '나는 이렇게 한다'고 뽐내면서 가르치거나, 그렇게 하지 않는 다른 사람을 비하하지 말라'는 것.[10] "내가 옳다"는 생각이 들면, 남에게 반드시 말하려고 하기 때문에 모든 싸움이 일어난다.[11]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 "내가 틀렸다"는 것을 옳다고 여겨, 스스로를 비난하며 '자신의 일'이나 '실패 후 새로운 시도' 자체를 포기하려는 것도 마찬가지다. 스스로가 스스로와 싸우는 셈)
  • 결점없는 완벽한 순수를 찾지 마라. 보고 듣고 느껴지는 그 어떠한 진리나 가르침에도, 결점없는 완벽한 순수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결점없이 완벽하고 순수한 깨달음이 있다고 믿어서, 그 깨달음을 묻고 다니며 찾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따름이다. 그것이 진리라고 해서, 종교적 가르침이나 삶의 깨달음이라고 해서, 그 말을 따르거나 하진 말아야 한다. 설사 완벽하고 순수한 진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자신 스스로가 그러한 완벽한 순수를 구현해내기란 불가능하고, 삶을 더 괴롭게 만들 뿐이기 때문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완벽한 순수를 찾았는데, 완벽을 추구하여 도리어 괴로워진다면 본말이 전도된 것이니, 이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삶은 애초부터 괴로움에서 떨어질 수 없는 것인데,[12] 왜 괴로움이 없는 삶(진리)이 있다고 믿어 그것을 찾아다니는 것인가? [13] [14]
  • 최고를 생각하곤 비교하지 마라. 어떤 것을 최고라고 생각하면, 최고가 아닌 다른 것을 볼 때는 '수준이 낮다'며 비교하게 된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어떠한 것에도 "최고"를 두지 말라는 것. '좋아하는 것'을 두게 되면,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싶어' 지고, 여기에 매달리게 되어 집착이 되므로 괴로워진다. 이렇게 비교는 집착의 씨앗이 되기 때문에 경계하는 것이다. [15]
차례대로, '가진 것'에 대한 집착, '견해'에 대한 집착, '결점(완벽)'에 대한 집착, '더 좋은 것'에 대한 집착이다.[16]

2.4. 명상(冥想)[편집]

숫타니파타에서,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할 수 있는 궁극적인 방법이며 사성제의 결론이다.[17] 지각[18]에 대한 지각도 여의고, 지각에 대한 잘못된 지각도 여의고, 지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지각이 소멸된 것도 아닌, 이러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 이로 인해 지각된 물질적 형상이 소멸한 상태을 '적멸' 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어떤 평범한 사건이 발생하면 연상작용을 통하여 이에 대한 생각을 확대 재생산한다. 근본 불교에서는 이렇게 '왜곡된 방식으로 생각이 계속 확장되어 나가는 것'을 희론[19](Papañca)이라고 한다.[20] 종종 사람들은 희론에 필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며, 이는 실제 입은 피해보다 사람들을 더 과도하게 걱정하고 괴로워하게 만든다. 쓸데없는 잡생각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러한 희론을 경계하는 연습이 명상이라 할 수 있다.

숫타니파타 5장에 따르면, 어떤 것을 느낄 때 '좋아하는 것'을 두지 말며,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하고 싶다'고 '매달리지' 마라. 내 마음이 무엇을 하는지 감정의 흐름을 끊임없이 경계해서, 이윽고 어떠한 것을 보더라도 '좋다'거나 '나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고 말한다.

다만 '호불호를 두지 않는 평상심'에 대해서 강조하는 이러한 명상은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니 아무렇게나 하자'는 상대주의적 결론으로 나아가서는 안되며,[21] 삶이 괴롭다고 여겨질 때 이 감정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써의 명상이 되어야 한다. 이렇기에, '호불호'를 버리고 나면은, '호불호를 버리고자 하는 마음' 마저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불교 명상에 관한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사티 참고.

2.5. 명색(名色)[편집]

'명색'은 팔리어로 nāma-rūpa. '정신과 형체'. 즉, 형체에 대한 정신적인 작용을 말한다. 한자로는 '형체에 이름짓다'는 뜻. 물질에 뜻을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넓은 의미에서 '물체에 주의를 기울이다', '물체에 관심을 가지다' 정도로 해석된다.

숫타니파타 4장 투쟁과 논쟁의 경에서 원시적인 연기[22]와 사성제를 설명하는데 이 때 괴로움(부정적 감정)의 가장 근본원인이 바로 명색(名色) 이다.

즉, 어떤 물질에 우리가 의미(또는 이름)를 부여하면 그 때부터 그것에 대한 '감정'이 생긴다는 것. 행복에 의미를 부여하면 행복해지고, 불행에 의미를 부여하면 불행해진다. 우리가 감정적으로 지나치게 괴로울 때, 스스로가 '불행'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2.6. 오온(五蘊)과 행위(카르마)[편집]

우파니샤드에서 전래된 오래된 가르침[23]이 상좌부 불교에 흡수되어 전승. 근본 불교에서 우파니샤드의 아트만(자아)을 부정하므로써 나온 개념이 안-아트만[24]. 즉, '무아'이다. 무아를 강조한 근본 불교에는 '아트만'의 개념이 잠시 사라졌다가, 근본 불교의 뜻이 희석되자 상좌부 불교에서 다시 '오온'과 '카르마'라는 개념으로 부활하였다. 여기서 아트만이란, '절대 변하지 않는 자신만의 영혼'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영혼(아트만)의 특징은 '자신이 쌓아온 경험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혼(아트만)은 '끊임없이 생성 소멸하는 몸'을 빌려서 윤회를 하며 천당과 지옥을 넘나들게 되는데, 이는 '자신의 행위(카르마)'에 따라 정해지게 된다.

윤회, 업보, 의 유무, 지옥천당의 존재는 아트만(영혼)의 개념이 있어야 성립하는 것이며, 아트만은 본디 무아(안-아트만[25])의 개념과 공존할 수 없는 것이지만, 상좌부 불교 시대에 이르러 두 개념은 공존하여 모순을 만든다. 이렇기 때문에 상좌부 불교에서는 아트만이 있어야 개념이 성립하는 윤회를 받아들이면서도, '안-아트만'을 깨달아서 해탈하면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모순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이다. [26][27]
atman
an(없다.)-atman(아트만)
영혼, 나, 아트만
무아 (안아트만)
상좌부 불교에서의 '나[28]'는 어떻게 정의되고 응용되는지 살펴보면,

상좌부 불교에서 '나'라는 것은 나의 몸(색), 나의 느낌(수), 나의 기억(상), 내가 했던 것들(행), 나의 생각(식)들로 이루어 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핵심은 경험과 기억과 행위와 사고 들이 "쌓여서(蘊)", '나'라는 인격과 정체성을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색수상행식을 "다섯가지 쌓임, 즉 오온(五)"이라 하는데, 오온 = 아트만(영혼: 수,상,행,식) + 육체(색) 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상좌부 불교에서도, 이런 오온으로 이루어진 '나(아트만)'는 가상이며 이런 오온이 실체가 없는 것을 알아 '무아'를 깨달으라고 말을 하지만, 사실 상좌부 불교의 가르침에 해당하는 고집멸도의 사성제팔정도에는 도리어 '나'라는 아트만의 개념이 있어야만 성립되는 '업보'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는데서 모순이 생긴다.

우선 카르마에 따른 업보를 살펴보자. 업보란, 오온으로 이루어진 '내'가 지금 '올바른 행동(카르마)'들을 행한다면, 이 '올바른 행동'들이 쌓여 미래의 '나(자아)'를 만들게 되고, 이렇게 '올바른 행동'들로 만들어진 '나(자아)'라는 인격은, 올바른(좋은) 생각을 하여 괴로움을 쉽게 이겨낸다는 것. 반대로 지금 '내'가 괴로운 것은 과거의 내가 올바르지 못한 행동들을 했기 때문이다.[29]

'현재의 (어떤) 행위가 쌓여서, 이것이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는 업보(카르마)의 개념은 사성제팔정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성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가인데, 고집멸도에서 '집'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집'은 집착의 '집'이 아니라, 모을 집(集)이다. 팔리어로는 'samudaya': sam- 쌓이다. udaya 일어나다. 합쳐서 해석하면, '쌓여서 일어나다.' 즉, 괴로움의 원인은 (행위karma가) 쌓여서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 이는 당연히 오온과 업보의 개념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상좌부 불교에서 오온과 업보의 문제(괴로움)를 풀어주는 방법인 팔정도는 어떠한가. 팔정도의 정언, 정견 등에 보이는 正은 팔리어로 접두사 sam-, samma- 에 해당되며 sam-의 뜻은 '쌓는다'이다. 따라서 팔정도의 정언, 정견 등은 올바른 말을 쌓고, 올바른 것을 보는 것을 쌓아라는 것. 이는 마찬가지로 '(어떤) 행위가 쌓인다'는 오온과 업보(카르마)의 개념이다. 이 둘을 종합하면, 행위(경험의 축적)를 통해 '내(아트만-괴로움)'가 만들어지고, 이러한 '나'는 '올바른 행위'를 쌓음으로써(팔정도), 해결된다는 것. 즉, 올바른 말과 생각, 올바른 생활과 노력 등 팔정도에서 말하는 대상은 '나'일 수 밖에 없고, '나'는 아트만을 의미하므로, 아트만이 없어야 되는 '무아'개념과 모순을 이룬다는 것이다.[30] [31]

이 모순된 관점('무아를 말하면서 올바른 나를 또한 강조')은 상좌부 불교 이후의 대승 불교밀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팔정도에서의 '올바름'이란 '선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여기서 '올바름'은 해탈(무아)을 이루려는 방향을 의미하기 때문에, 무아와 모순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사람들 조차도 상좌부 불교 논서에서 나오는 '윤회'나 '업보'의 개념이, '아트만'이 있다는 전제하에서만 성립되는 개념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윤회하기 위해서는 그 윤회의 대상인 아트만(영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아트만'과 '무아'의 가르침 사이에는 '모순'이 생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순에도, 과거의 행위들이 쌓여 현재 '나'의 상태를 만든다는 카르마(업보)의 개념은, 사람은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올바른 행위'를 쌓아 '올바른 나'를 쉬지 않고 만들어야하며, '나쁜 행위'를 쌓으면 '나쁜 나'가 만들어져 괴로움에 빠지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는 '인과응보'의 개념으로 나름의 가치를 지니며 지금까지 불교에 이어져 오고 있다.

2.7. 연기(緣起)[편집]

결과에 따른 원인. 불교에서는 '괴로움'의 원인을 잇따라 추측해보는 과정. 따라서 연기는 괴로움의 원인을 알고자하는 모든 승려들의 연구처이기도 하다. 공(空)개념도 여기에서 나왔다.

숫타니파타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추측되는 4장과 5장인 원시 숫타니파타에서의 연기는 명색 - 접촉 - 쾌불쾌 - 욕망 - 좋아하는 대상(집착) - 투쟁과 논쟁 순이며, 근본 원인은 명색에 있다. 명색은 '물질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뜻하며, 물질에 의미를 부여하므로서 괴로움이 시작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어떤 것에 의미를 부여하므로서 싸움과 슬픔이 생기고, 자만하거나 남을 헐뜯게 되어 괴로움에 빠진다.

반면, 상좌부 불교의 12연기[32]에서는 그 근본 원인이 '무명과 행'이 된다. 어리석은 생각(무명)과 행동(행)으로 인해서 '올바른 생각과 행동'을 쌓지 못하게 되므로 괴로워진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2연기 참조.

2.8. 공(空)[편집]

모든 개념은 '서로가 서로에게 인과[33]에 의해서 의존적'이므로[34], 한 극단은 혼자 존재할 수 없으며 다른 극단과 함께 존재한다. 즉, "양극단은 공존한다"는 것이 '공(空)'이다. 여기서 '공'은 양극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기계적 중립주의처럼 양극단을 하지말자는 것이 아니라, 양극단은 공존하므로 "양극단을 하나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 (나누어서 봐야되는 것이 아니라 합쳐서 봐야 된다는 것)[35][36][37]

또한 공(空)은, 모든 가치적 판단이 상대적 기준에 의해 달라지므로 '모든게 의미가 없다'라는 뜻이 아니라, 상대적 기준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으므로 '그 어떤 것도 다 될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어떤 가치적 판단이나 개념이든 간에, '정해져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보지 말고,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봐야 된다는 것. 불교를 허무주의로 보는 것은 공(空)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공(空)은 산스크리트어로는 '순야타(Śūnyatā)'라고 하며 "부풀어 속이 비어 있다"는 뜻이다. 비어 있기 때문에 물을 담을 수 있고, 주스를 담을 수 있으며, 우유를 담을 수 있고, 술을 담을 수 있다. 우리는 그릇이 비어 있다고 '이 그릇은 의미 없어'라고 말하지 않는다. 비어 있기 때문에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비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38]

삶이 괴로울 때, 사소한 행복도 공존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 행복은 지금보다 커질 것이라는 것도 안다. 곧, 희망이다. 반대로 삶이 행복할 때, 괴로움도 공존해 있음을 알고, 언젠가 커질 이 괴로움을 통해 거만해지지 않고 앞선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를 가진다. 우리 삶에서 괴로움만 남아 있다면 그 삶은 얼마나 힘든 것인가. 단편적 극단에서 괴로워하거나 그저 즐거워하는 것에서 벗어나, 괴로움의 이면에 행복이 공존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삶을 이해하게 되고 또한 그 자체로써 위로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 개념은 삶이 괴로울 때 '혹시 내 생각이 극단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닌가?'하며 다른 생각을 살펴보는데서 그 뜻이 있는 것이지,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니까 내 마음대로 할 것이라며 극단적인 행동하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우리의 감정을 컨트롤할 수 없이 너무나 괴로울 때, 생각의 지평을 넓혀서 여러가지 대안들을 살펴보자는 취지이며, 따라서 '포기'나 '체념'을 뜻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에 유의해야 된다.

'반야'도 '공(空)'과 비슷한 개념이다. 산스크리트어를 그대로 직역하자면, '분별하지 않는 지혜'(나누어 보지 않는 지혜)를 뜻한다.

2.9. 유식(唯識)[편집]

오직 생각의 문제라는 것.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일체유심조를 말한다.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

우리가 정보를 받아들일 때 눈, 코, 귀, 입, 피부 등을 통해 시각, 촉각, 후각, 미각 등을 느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한 정보들은 왜곡 될 수 있다는 것이 '유식'의 핵심이다.

예를 들면, 길가던 나그네가 순간 뱀을 보고 깜짝 놀라고 무서웠는데, 다시 보니 노끈이었다는 얘기가 있다. 무서운 감정은 '잘못된 정보'가 들어왔기 때문이며, 마찬가지로 부정적 감정들의 대부분은 왜곡되고 확대-재생산되어 우리들을 괴롭힌다. 이러한 '왜곡된 정보'가 괴로움의 원인이되며, 왜곡된 정보로 인해 무서운 감정이 들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결책이다.

이렇게 내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내 마음을 바꾸기도 하고, 또한 내 마음이 내가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바꾸기도 하므로, '모든 것은 마음의 문제' 라고 말하였다.

2.10. 이타심[편집]

이타심은, '나'와 '남'이라는 양극단을 하나로 이해하는 공(空) 개념에서 비롯되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인과로 의존하므로 '나의 이익은 남을 이롭게 하는 데서 나오게 된다'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개념이 만들어졌고, 여기에서 다시 자비(慈悲)라는 개념이 생겼다.

이타심을 강조하는 것은 상좌부불교와는 차별되는 대승불교의 특징인데, 물론 상좌부불교 내에서도 이타심을 강조하는 부분이 많지만, 대승불교는 유독 이 이타심을 상좌부불교와는 다른 차별점이라고 특정지었다. 비교하자면, 상좌부불교에서는 '개인'의 올바른 수행을 강조하는 팔정도가 주된 가르침이지만, 대승불교에서는 '나'의 깨달음을 추구하면서도 '남'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수행을 하자는 '자비'가 주된 가르침이 된다.[39]

이러한 이타심의 수행방법은 대체적으로, '남이 나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에 집중하지 않고 '내가 남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만 집중한다. 왜냐하면 '남이 나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에 집중하는 순간, '남의 반응'에 맞춰서 대응하는 '나'를 생각할 수 밖에 없고, 이는 '나'와 '남'을 구별하게 하는 '분별심'을 유발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을 더 쉽게 말하자면, 남이 나를 싫어하면 나는 그러한 남을 싫어하고, 남이 나를 좋아하면 나는 그러한 남을 좋아하게 된다면, 이것은 '너는 너, 나는 나'를 더 명확하게 구분짓는 사고방식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는 서로 다른 양극단을 하나로 이해하는 '공(空) 개념'과 일치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승불교에서는 앞서 말했던 '내가 남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춰야 된다고 강조한다.[40]

이러한 점은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인 '바라밀'과 '사무량심'에서도 나타난다. 바라밀에서는, '남을 아무런 조건없이 도와주는 보시'와 '남의 모욕적인 반응에도 평정심을 가지는 인욕'을 통해, '남의 반응과 상관없이 남을 대하는 나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는 '이타심'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41]

또한 '4가지 측정할 수 없이 큰 마음가짐'을 뜻하는 사무량심은 자(慈), 비(悲), 희(喜), 사(捨)의 4가지 수행법이 있다. 자(慈)는 친절한 얼굴로 상대방에게 즐거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을 뜻하고, 비(悲)는 상대방의 불행에 같이 슬퍼하는 마음을 뜻하며, 희(喜)는 상대방의 성공에 같이 기뻐하는 마음을 뜻하고[42], 사(捨)는 상대에게 이러한 마음을 되돌려받지 못하거나 이러한 나를 남들이 어리석다고 비난해도 평정심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즉 상대방에게 열린 마음으로 다가서서, 상대의 아픔에 같이 슬퍼하고, 상대의 성공을 같이 기뻐하며, 내가 준 마음을 남이 나에게 되돌려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평정심을 가지는, '공감'의 이타심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남의 반응과 상관없이 남을 대하는 나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자비'로운 마음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대승불교의 '공(空)사상'을 몸으로 직접 실천하는 것이 된다. 이를 통해 '나'의 괴로움을 잊는 것 뿐만아니라 나에게 영향을 주는 '사회'의 괴로움마저 돌보아, 이 공통의 괴로움을 아우르고 거기서 평정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개념에서 발전하여 세상 모든 것은 그물처럼 얽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화엄'사상이 생겨났다.

2.11. 상징과 신(神)[편집]

사람은 언젠가는 잊어버린다. 오랜 수련으로 '깨달은 바'를 항상 염두에 둘 수야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간순간 잊어버리는 것" 까지 완전히 없앨 순 없다. 사람이란 원래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나친 모욕을 당해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올라 감정을 주체 못할 때가 있다. 또는 생활에 바빠서 '깨달음'에 대해 잊고 사는 경우도 있다. 또는 '깨달음'에 대해 이해하면서도 막상 자신의 감정 앞에서는 무기력해지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될까?

이렇게 사는 게 바빠 순간순간 깨달음을 잊어버리고 괴로움과 무기력의 감정에 빠지게 된다면, 상징을 통해 계속해서 깨달음을 상기시키는 것이, 감정을 컨트롤하는데 있어서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대표적으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외치는 것(진언[43]), 손가락 동작으로 '깨달음'을 상기시키는 것(수인[44]), 반야심경 등을 노래로 만들어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것, 눈에 띄는 곳에 불상을 두어 볼 때마다 '깨달음'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서 서로 선한 영향을 주고 받는 것 등이 있다.

진언이나 수인, 노래나 문양 등의 상징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는 계기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는 괴로움을 벗어나게 해주는 유용한 도구가 된다.

또한 불교에서 말하는 여러 신의 존재도, 절대자로써의 신이 아니라, 교훈이나 깨달음을 상기시켜 주는 일종의 "상징"의 역할을 한다.[45]

2.12. 결단[편집]

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주제이다.

불교에서는 집착을 끊으라고 말하면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을 매우 중요시 여긴다. 집착에서 벗어나면 해탈이라는 마음의 평온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집착이란 무엇일까? 그건 생각(또는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다. 한번 했던 생각을 다시 떠올리고, 머리속에 떠오르기 때문에 그것을 하고 싶고, 하고 싶기 때문에 행동으로 나타난다. 사람들은 그 대상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어도, 그 대상을 계속해서 머리속에 다시 떠올리기 때문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 생각을 거듭 떠올리는데서 집착이 만들어지므로, 이러한 '생각의 반복'을 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마음을 먹는 것이, '결단'인 셈.

따라서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반복된 생각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 또는 '틀에 박힌 생각이나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창조적이고 자신만의 해석으로 세상을 바라보겠다는 결심', '삶의 관점을 항상 새롭게 만들겠다는 다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46] [47] [48]

그렇기 때문에 '결단'은 불교의 시작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취급되어 왔다. 숫타니파타에서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며 '결단'을 촉구했으며, 선종에서는 돈오(頓悟)가 '결단'에 해당되어 이 이론으로 선종교종에서 벗어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49]

2.13. 현실[편집]

모든 것을 하나로 보는 것이 공(空)이고, 하나에서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유식(唯識)이다.[50] 사람들은 지엽적이고 의미없는 것에 목숨 걸어가며 산다는 깨달음은 공(空)을 말하는 것이고, 그렇다고 모든 것이 의미없는 것이 아니라 비어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보는 깨달음은 유식(唯識)을 말하는 것이다. 공으로 집착을 버리고, 유식으로 희망을 찾는 것은 하나의 일관된 과정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원효는 공과 유식을 하나로 보아 일심(一心)사상을 주장하였는데, 이후 한국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원효는 세상을 등져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춤추고 노래하면서까지 일반 백성들과 함께하였는데, 여기서 그가 얼마나 현실을 중요시 여겼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지눌은 교종의 이론과 선종의 수련을 합쳐서, 배워서 깨닫고 그것을 수련한다는 정혜쌍수를 주장하였는데, 앞의 원효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큰 통일된 이론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였다. 깨달음(이론)과 수행(참선)을 하나로 합치려는 정혜쌍수 역시 한국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중국의 교종과도 다르고 중국의 선불교[51]와도 다른, 새로운 사상이라 볼 수 있겠다.[52] ("중국은 사상을 받아들여서 수많은 각론을 만들고, 한국은 중국의 각론을 받아들여서 종합하여 결론을 내며, 일본은 한국의 결론을 받아들여서 그대로 유지하고 이어나간다"고 이야기된다.)

한국의 불교는 원효와 지눌의 영향 아래서 이렇게 하나로 통합되기도 했었고, 현실을 극도로 중요시 하는 유교의 영향도 컸었기 때문에, '속세'마저도 '속세를 벗어난 세상'과 하나로 보아, 현실의 삶에서도 불교의 가르침을 어떻게 적용하고 유용하게 쓸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궁리하였다. 승려가 따로 있고 일반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마저도 하나이고, 현실에서 벗어난 청정한 깨달음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세계는 현실과 하나의 세상이다.

'모든 관념에서 벗어나라'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지만, 정작 지금 이 말 자체는 매우 관념적이다. 따라서 「 '관념에서 벗어나라'는 관념 」에서 다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와야 되는데,[53] 세상을 버린 뒤에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야 되는 이치인 것이다. 성철스님은 이를 두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고 말했다.

지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는 것은 공(空)이고, '산은 물이고 물은 산이며, 다른 어떤 것도 될 수 있다'는 것은 유식(唯識)의 입장이다. 반면 성철 스님은 저 둘은 단지 탈속의 세상이고 거기서 얻어지는 깨달음은 또다른 관념이라는 허상이기 때문에, 결국 현실로 돌아와야만 그 깨달음이 '끝'이 나므로, 깨달음을 얻고 나면 그 깨달음을 잊기위해 살아야 한다(현실을 살아야 한다)[54]는 의미에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고 말한 것이다.[55]

괴로움이란 삶의 현실 속에서 만들어진다. 모든 욕망에서 벗어난 깨끗한 경지가 절에 들어갈 때만 생긴다면, 절에서 나오고 나면 그게 무슨 소용이랴. 괴로움 속에서도 그 괴로운 감정에 최대한 휘둘리지 않으며, 그러한 괴로운 감정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살아가자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2.14. 종합[편집]

근본 불교에서는 무아, 명색을 강조하여 '내 것'이나 물질에 의미부여하는 언어적 활동 자체가 괴로움을 일으킨다 보았다. 따라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언어마저 잊어버린 경지, 즉 희론(Papañca≒망상)을 없애는 명상을 통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강조하였다.

상좌부 불교에서는 '자아(오온)'는 나의 행위들이 쌓여서 만들어진 것이어서, 선한(올바른) 행위들을 쌓아가면 선한(올바른) 자아가 만들어지고, 악한 행위들을 쌓아가면 악한 자아가 만들어지므로,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올바른 행위[56]를 통해 '올바른 자아'를 만들어야 됨을 강조하였다. 즉 언어적 잊힘 보다 '행위'를 강조한 것. 부처님 사후, 제자들은 무리를 이끌고 승단을 만들어 장로가 되었다. 이렇게 승단이라는 '사회'가 만들어 졌기 때문에 '선한 행위'를 강조함으로써 사회적 질서를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대승불교(나가르주나)는 상좌부 불교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다. 근본 불교는 '내 것이 없음(무아)'를 강조하는데 상좌부 불교는 반대로 '좋은 나를 만들기(오온, 카르마)'를 강조하는 모순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에 모순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으면서도 사회를 유지하는 질서까지 생각하는 개념을 탄생시켰으니 그것이 '공'이다.[57] '공'이라는 것은 모든 개념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므로, 한 극단은 혼자 존재할 수 없으며 다른 극단과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양극단은 공존하기에 하나로 봐야된다'는 것. 또한 모든 가치적 판단은 상대적 기준에 의해 달라지므로 '어떤 것도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닌다. 이러한 공개념은 나와 남을 하나로 보아서 '나의 이익은 남을 이롭게 하는 데서 나온다'는 자리이타와 자비의 개념으로 발전하였고, 이를 통해 '남을 도움으로써 사회가 무너지지 않게 하는' 사회적 질서 역시 설명할 수 있었다.

이후 유식학파에서는 용수의 공사상이 모든 것을 하나로 인식하는데서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현실은 하나가 아니라 수만가지로 다양한데, 용수의 말처럼 모든 개념이 하나로 귀결된다면 이러한 현실의 다양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또한 세상의 다양한 물질들은 우리의 눈, 귀, 코, 입, 피부를 통해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생각 등으로 분별되어 각각 다른 물질들로 받아들여지지만, 이러한 정보는 쉽게 왜곡, 확대 재생산 되어서 괴로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이러한 왜곡된 정보들에 벗어나서 바르게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불행'이라는 정보를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내가 괴로워지기도 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린 문제,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에 달린 문제라는 것을 강조했다.

괴로움이 '주어진 정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렸다는 것은, 역으로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좋게 가공된 정보'를 통해 괴로움을 피해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가상의 신이나 상징을 믿어 의지하는 것도 괴로움을 잊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다는 것. 이에 밀교에서는 여러 신들을 믿는 것 뿐만 아니라 진언(주문)이나 수인(손동작) 등의 상징 마저도 괴로움을 잊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삶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나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 방법(무아), 물질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방법(명색), 삶은 쌓아가는 것이며 결과는 나중에 나타난다는 것을 깨닫고 옳음을 꾸준히 행하는 방법(오온 또는 카르마), 양극단이 공존하는 것을 알아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하나로 합쳐 보아 삶을 이해하는 방법(공), 내가 받아들인 정보는 왜곡됨을 알아 내 생각을 왜곡된 정보에 휘둘리지 않게하여 내 마음의 주인이 되는 방법(유식), 의도적으로 가공된 정보를 이용하여 마음의 평안을 유도하는 방법(신이나 상징을 믿음)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방법들을 종합하자면.. 불교가 말하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란,
  • 욕심과 문제의 대상이 언제까지나 '나의 것'이 아님을 알고
  • 닥쳐온 불행에 '의미를 부여'해서 거듭 괴로워하게끔 하지 않으며
  • '좋아하는 것'을 따로 두지 않아서, 비교의 씨앗을 만들지 않고
  • 양극단을 하나로 합쳐 보아[58] 삶을 너그럽게 이해하며
  • '삶은 선한 것을 꾸준히 쌓아가는 것'임을 알아, 문제를 부정하지도 않고 포기하지도 않으면
  • 천천히 사회는 변화하고 개인은 쌓아온 것들을 자신의 '선한 성격'으로 돌려받는다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

3. 주요 특징[편집]

다른 여러 종교와 비교해 불교가 지니는 중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 석가모니는 해탈열반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여 도와주는 존재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후에 이상화(理想化)되고 확대되어 절대(絶對) ·무한(無限) 및 그 밖의 성격이 부여되고, 각성과 구제의 근거가 되고 있으나 정복자와 같은 자세는 취하지 않는다. 역사, 문화적으로 유일신교적 관념이 기본 바탕에 깔려 있는 서양인들이 처음에 가장 혼란스러워 하는 것이 이 부분이다. 사람들이 이 세상의 이해못할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신'이라는 절대적 존재를 만들어내고 그 존재를 숭배하는 그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전통적인 서양에서의 Religion의 개념이기 때문에 불교를 공부한 뒤 자국에 불교를 설명하는 서양인들이 '불교는 Religion이 아니다'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 이 때문이다. 하지만 '불교는 종교다'라는 말은 맞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종교라는 단어 자체가 불교를 지칭하기 위해 나왔고 의미도 '으뜸가는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애초에 영어의 Religion과 한자어의 종교가 서로 정확하게 대응하는 의미의 단어가 아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혼돈이다.
    • 다만 대승불교에서 부처가 반신적 존재로 여겨지는 것은 맞는다.
      대승이 등장했을 무렵은 이미 붓다가 죽은 지 수 세기가 지난 뒤였고,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더욱 과장되고 윤색되었기에, 그는 반신적(半神的, semi-divine) 존재로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신비로움은 마지막 열반에서의 그의 지위를 둘러싼 모호함에 의해 고조되었다. 상좌들은 비록 그가 이 세계를 넘어서 마지막 열반에 들었다고 가르쳤지만, 그를 초월적 영역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또한 가능했던 것이다. 대승을 따르는 이들은, 붓다처럼 자비로운 존재는 자기 자신을 다른 이들로부터 떼어놓지 않을 것이라고 논했다. 그들은 그런 존재가 ‘저편’ 어딘가에 여전히 있으면서, 지상에서 행했던 것처럼 온갖 존재들의 안녕을 위해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믿음과 궤를 같이하여 그에게 존경과 숭배를 바치고 간구(懇求)하는 봉헌(奉獻)적 신앙도 생겨났다.

      -데미언 키온(Damien Keown)[59], 『불교』
      참고로 같은 책에서는, 불교의 종교적 요소를 제거하고 현대화하여 읽는 독법이 서구에서의 인기를 얻을 수는 있어도 불교의 '인기 없는 요소'를 훼손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60]
  • 중도의 진리를 받아들인다. 이에 따라 힌두교의 일부 종파나 형제 뻘인 자이나교와 달리, 불교는 고행을 권하지 않는다. 일단 개조인 석가모니부터가 극단적인 단식과 걸행 등의 고행을 그만둔 다음 심신의 지나친 이완과 긴장 모두를 물리친 뒤 보리수 아래 앉아 깨달음을 이뤘다. 불교는 몸을 해치는 절식(絕食)이나 각종 무모한 고행을 권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러한 행동이야말로 깨달음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 ‘지혜(智慧)'와 '자비(慈悲)'로 대표되며, 특히 자비는 무한이며 증오(憎惡)나 원한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일반적으로 광신(狂信)을 배척하고 관용(寬容)인 동시에 일체의 평등을 관철하고자 하며, 자비의 구체적 실천으로 보시를 강조한다. 지혜의 내용은 여러 가지로 발전하는데, 일체를 종(縱)으로 절단하는 시간적 원리인 '무상(無常)'과, 일체를 횡(橫)으로 연결하는 공간적 원리인 '연기(緣起)'가 중심에 있어, 이것은 후에 '공(空)'으로 표현된다.
  • 항상 변하고 실체가 없는 허상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 모든 번뇌를 야기한다고 본다. 이를 없애기 위한 수행, 참선이 강조되며 허상을 버리고 현실을 직시(直視)하는 경향이 강하다. 여기서 직시란 '단견'과 '상견'의 관점을 모두 버려 대상을 치우침없이 적관하는 것을 말한다.
  • 대승 불교에서는 바라밀이라는 방법의 수행을 권한다. 바라밀이란 산스크리트어로 'paramita'. 직역하자면, '저쪽 언덕(피안)에 도달한 상태'. 초기불교에서부터 인간의 '감정'을 강물에다가 비유했는데, '감정'이라는 급류를 인간이 건널 때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 강물에 빠져 평생을 고통속에서 허우적댄다고 보았다. 바라밀이란 이 '감정'이라는 강물을 안전하게 건너,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차분하게 넘어가는 것을 말한다. 즉 불교에서 바라밀이란 해탈하는 방법이다. 6가지의 바라밀이 있는데, 이 6바라밀에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가 있다. [61] 보시는 베푸는 것, 지계는 계율을 지키는 것, 인욕은 고난을 참고 이겨 나가는 것, 정진은 노력하는 것, 선정은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집중하는 것, 반야바라밀은 진실하고 올바른 지혜로 나머지 다섯 바라밀을 성립시키는 근거로서 중요하게 여긴다. 선정 바라밀은 반야 바라밀이 발현되게 하는 원인이다.
  • 조용하고 편안하며 흔들리지 않는 각성(覺性:解脫)을 통해 열반(涅槃)’을 실현하고자 한다. 그 교의(敎義)는 석가모니의 정각(正覺)에 기초를 둔다. 그러나 오랜 역사 동안, 교의(敎義)의 내용은 여러 형태로 갈라져 매우 복잡한 다양성을 띠게 되었다.
  • '내 것'이 없다는 무아의 개념은, 부처님 유언에 '스스로에 의지하라'는 말과 상충되지 않는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이는 '삶의 주체인 나'와 '나라고 생각하는 환상'을 구별하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이다. 우리는 '나'라는 개념을 버린다하더라도, 실제로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즉, 전자와 후자는 다른 것. 따라서 '삶의 주체인 나'는 신뢰하되,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내 것이 될 수 없는 '내 것이라는 환상'(이 환상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생긴다.)'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삶을 살아가는 주체로서의) 현재의 '나'를 믿기 때문에, 굳이 (변해버렸거나 변해버릴) 과거와 미래의 '내 것'에 집착하지 않는 자세를 말한다.
현실의 삶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실존주의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현실의 삶'에 집중한 불교의 개념은 실존주의 보다 훨씬 이전부터 만들어져 왔으며 실존주의와는 다른 미묘하고도 독특한 차이가 있다. 실존주의에서 인간의 실존은 고독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긍정하거나, 또는 이러한 인간 삶을 방해하는 권위에 대해 반항을 해야만 하는 존재로 묘사되지만, 불교에서 인간은 자신의 감정에 휘둘려 자신의 제대로된 삶을 살지 못한다고 보아 긍정과 부정을 포함한 '감정'에 집착하지 말고 자신의 삶을 살아라는 점, 그리고 '자아'마저도 또다른 권위가 될 수 있다고 보아 '내 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점에서 다르다고 볼 수 있다.
  • 불교는 포스트모더니즘 철학과 비슷한 점이 많다. 이 때문에 종종 이를 연관시켜 설명하는 현대철학자들도 많다. 삶을 방해하는 절대적 권위-'언어', '고정 관념'-에 대한 탈권위주장은, 포스트모더니즘와 불교가 공통적으로 가지는 특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대승 불교 한정, 여타 종교에 비해 저승하늘이 다양하다. 천국지옥만 언급하는 개신교나 거기에 더해 연옥의 개념이 있는 가톨릭과는 다르게 대승 불교에서는 천국과 지옥 및 그 외의 장소들까지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62]. 대승 불교에는 욕계 6천, 색계 18천, 무색계 4천까지 수많은 하늘을 정밀하게 구분하고 있다. 지옥은 불지옥 8종류와 얼음지옥 8종류에, 재판받는 길목마다 지옥들이 존재한다. 때문에 가장 지옥의 종류가 많은 종교이기도 하다. 또한 동물로 태어나는 환생을 지옥에 가긴 애매한 죄를 가진 영혼이 가는 형벌로 분류해 놓았다. 그리고 축생계보다 죄가 무겁지만, 지옥을 갈 정도는 아닌 정도의 죄를 지은 영혼은, 불교 고유의 세계인 아귀도나 아수라 등을 간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석가모니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따위를 고민치 말고, 지금 당장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에 집중하여 현실을 살라.'며 저승에 대해 비중을 두지도 관심을 가지지도 말라고 가르쳤다. 이는 현실을 직시하는 경향이 강한 불교의 색감이 강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석가모니의 행적을 살펴봐도 충분히 현실적인 색채를 느낄 수 있는데, 고행을 포기한 후에 깨달음을 얻거나 타인을 믿지 않고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구원해야 한다는 논리가 그렇다.
  • 해탈에 도움이 안되는 쓸데없는 형이상학적 질문에 석가모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위키백과 14무기 참조. 여기서 '무기(無記)'란, '현실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답도 찾을수도 없는 형이상학적 질문은 기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불교에 형이상학적인 질문이 많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형이상학적인 질문'이란 '형이상학을 위한 형이상학'을 말하는 것으로, 불교에서 어쩔 수 없이 사용되는 형이상학 질문은 오로지 '현실의 삶 - 그 괴로움'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 불교의 기본 원칙이다

4. 분파[편집]


현재의 불교는 크게 대승 불교(마하야나)와 상좌부 불교(테라와다)로 티베트 불교로 구분된다. 자기인생을 자기가 살지 못하고 남에게 얹혀서 살려는 사람이 중생이고, '남의 인생을 살지 않고 자기 인생을 살며, 과거에 살지 않고 현재를 살아라'는 것이 본디 불교의 가르침인데, 여기서 '바른 말과 행동들을 쌓아서 올바른 삶을 살자'는 것이 상좌부(테라와다)이며, 여기서 '남을 조금이라도 도와줘야 되지 않겠냐?'며 자비를 강조하는 것이 대승이다. 사람들은 '좋아하던 것'이 다르게 변해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괴로워하는데, 이 생각에서 벗어나서 보고 느낄 때 '좋아하는 것'을 따로 두지 않아 호불호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보통 괴로움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살지 않고 다른 것에 의미를 두며, 과거에 얽매여서 현재를 괴롭힌다.

대승 불교한자문화권에 주로 분포하고 있으며, 과거에는 인도 서북부,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에서도 흥했으나 현재는 소멸하였다. 상좌부 불교(테라와다)는 스리랑카와 태국, 미얀마를 비롯한 베트남을 제외한 동남아에 주로 분포한다. 티베트 불교는 티베트와 몽골에 주로 분포한다. 티베트의 불교는 상좌부 불교, 대승 불교, 밀교를 시대별로 차례차례 받아들인 북전 불교와는 달리 인도 반도를 통해 모든 사상을 한꺼번에 받아들였으며 독자적인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실질적으로는 밀교가 강하긴 하지만.

이외에도 불교는 북미유럽에 전해져 여러 지역에서 다양하게 분포한다. 그 중 티베트 불교가 서양에서 가장 대중화된 불교 종파가 되었다. 프랑스 같은 경우는 일본선불교와 함께 가장 인기 있는 불교 종파이기도 하다. 게다가 티베트를 탄압하는 중국조차도 화북지역 한족이 티베트 불교를 열렬히 신봉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청나라가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인 것이 지금까지도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중국에서도 세가 상당히 크며, 티베트인 뿐만 아니라 일반 중국인들[63]도 상당히 많이 믿고 있기 때문에, 달라이 라마 14세가 망명 중임에도 불구하고 신앙 자체에 대한 탄압은 받지 않는다. 물론 티베트 독립운동은 중국에서 국가분열죄로 다스린다. 서양의 유명인 중에 티베트 불교 신자가 의외로 많다. 브래드 피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리처드 기어, 스티븐 시걸 등. 티베트 불교 이외에는 일본 선불교가 있다. 일본 선불교 신자로 대표적인 이는 스티브 잡스.

대승 불교(Mahayana)가 발전되었을 시기에는 대승 불경을 읽지 않는 부파 불교를 대승 측에서는 소승 불교(Hinayana)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대승 불교의 관점에서 붙인 비하적 명칭이라는 성격 때문에 1950년 열린 세계불교도우의회에선 소승 불교라는 표현은 어떠한 불교 종파에 대해서도 써선 안된다고 결정하였다.

5. 역사[편집]

근본 불교는 원시 불교라고도 불리며, 석가모니가 살아 있을 때부터 제2차 결집으로 교단에 분열이 일어나기 전까지, 즉 그의 입멸 후 약 100년까지의 불교를 말한다. 분열이 일어난 후에는 부파 불교라고 부른다.
법장부
설일체유부(보특가라론 제외)
보특가라론자
분별설부(현대 테라와다의 기원, 법장부 제외)

부파 불교는 보통은 상좌부(Sthaviravada)와 대중부로 나뉜다. 근본 불교가 끝나고 제자들 사이에서 사상적인 분열이 일어나는 시기이다. 상좌부(Sthaviravada)에 속하는 분별설부로부터 테라와다가 나왔으며, 오늘날에 흔히 일컬어지는 상좌부 불교는 이 테라와다이다.

대승 불교는 부파 불교의 한 종파인 대중부에서 발전하여, 3세기 용수가 공(空)사상을 주장함으로써 시작된 불교를 말한다. 크게 중관학파유식학파로 나뉜다. 중관학파는 '양 극단을 하나로 보아야 하며, 분별해서 말해선 안된다는 반야를 주장하였고, 유식학파는 내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내 마음을 바꾸기도 하고, 또한 내 마음이 내가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바꾸기도 하므로, '모든 것은 마음의 문제(일체유심조)' 라고 주장하였다.

5.1. 전파[편집]

기원후 1세기 무역길과 불교의 영역



불교는 석가모니 생전에 이미 교단(敎團)이 조직되어 포교가 시작되었으나 석가모니에 의해 교의가 전해져 내려왔다.

대승 불교는 북방 경로를 통해서 중앙아시아에 전해졌는데 이는 도시 상인 계급의 불교 선호 및 브라만교,카스트 제도에 대한 유목민들의 반발과 거부감에서 비롯되었다.[67] 상인들의 호응을 받는 종교였던 불교는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동북아시아로 전파되었다. 서역(西域)을 거쳐 중국으로 유입되는 과정에서 여러 인도인, 토하라인, 중국인들의 노력을 통해 불교 경전이 한어로 번역되었다. 이후 중국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래가 이루어져 세계적 종교로서 자리를 굳혔다. 베트남 역시 한자문화권으로 중국을 통해 대승 불교가 전파되어 주류가 되었다. 이 밖에도 대승 불교는 남방 경로를 통해 동남아시아에도 전해져 성행하였다. 스리위자야는 대승 불교를 국교로 삼았으며, 크메르 제국도 대승 불교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베트남을 제외한 동남아시아의 대승 불교는 이슬람상좌부 불교의 팽창으로 소멸하였다. 현재 대승 불교는 한자문화권이나 동북아시아 이주민들이 많은 지역에서만 강세이다.

부파 불교의 한 부류인 상좌부 불교스리랑카타밀족촐라 왕조의 영향을 받은 곳에서만 유력하였다. 그러다가 11세기 이슬람의 인도 정복 이후 동남아시아로 전파되어 성행하였다.

중국에서 불교가 유행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위진남북조 시절 한족 지식인들의 염세주의, 유목 정복왕조의 중화주의 견제를 위한 불교 진흥 정책이었으며, 이와는 별 관련이 없던 한국과 일본에서 불교가 받아들여진 계기는 왕즉불 사상 때문이었다. 이는 중앙집권을 강화할 명분을 만들어주어 지배계층의 수요를 만족시켜 주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인 프로파간다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사실 왕즉불 사상은 정치적 프로파간다 정도가 아니라 석가모니의 사상에 완전히 배치(背馳)되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와 정치의 결탁은 언제나 있어 왔으니.[68] 백제성왕(이름 자체가 전륜성왕에서 따옴), 신라의 경우엔 법흥왕부터 진덕여왕까지 왕권 강화 차원에서 불교식 왕호를 사용했고, 진흥왕의 경우엔 전륜성왕을 자처하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도 태조 왕건의 청동상을 불상처럼 만들거나, 고려사 악지에 임금을 '제왕 부처'(海東天子當今帝佛)라고 칭하기도 했다.

5.2. 분포 관련 역사[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63px-Buddhism_percent_population_in_each_nation_World_Map_Buddhist_data_by_Pew_Research.svg.png

본토인 인도 반도에서는 석가모니 사후 마우리아 왕조 시대 아소카 대왕의 보호와 포교로 크게 교세를 확장하여 6세기경까지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여전히 다수 종교였던 힌두교에 점점 밀려 교세가 약해졌다. 오히려 인도로부터 선교를 받은 박트리아 등지의 중앙아시아에서 강세였다. 하지만 이슬람의 유행으로 중앙아시아의 불교세도 점차 사그라들었고, 이 연장선으로 14세기 이후 인도까지 이슬람에 정복당하여 크게 세력이 약화되었고, 신자들도 이슬람교로 대거 개종되었다. 이때 수많은 인도 북동부의 불교 사원과 유적이 파괴됨으로써 거의 소생 불가의 치명타를 받고 인도 본토의 불교는 절멸했고, 인도계 지역 가운데서는 티베트계 지역이나 스리랑카에서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이다.

인도에 병합된 시킴은 원래부터 불교 왕국이었고, 아루나찰프라데시미얀마, 티베트와 접경 지역인 인도 동북부 지역에도 토착 불교 신자가 꽤 있다. 티베트에서 망명해온 티베트 불교 승려들의 포교도 인도 불교 신자 수 증가의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현대에는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의 불교로의 개종을 시발점으로 하여서 마하라슈트라 지역을 중심으로 나바야나(Navayana)라는 불교 종파가 인도에 발생하였다. 하지만 이는 옛부터 이어져온 것이 아니라 새로이 만들어진 신흥 종파이다. 일부 카스트 제도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하층 계급, 일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나바야나 신도가 유지되고 있다. 마하라슈트라주에는 나바야나 불교 정당이 있을 정도. 물론 그래봤자 인도 전체 인구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원나라티베트 불교[69] 국교였으며, 한국의 경우에는 삼국시대 때부터 불교가 성행하여 삼국 및 고려 시대에는 국가와 협력-공생 관계였으나,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서 유교에 밀려 차별당하고 박해받기도 했다.[70]

20세기 들어 태국대만을 제외한 중국동남아시아 등지 상당수 불교권 국가들에서(몽골, 중국,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 등)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선 이후로는 공산당에 의해 탄압받기도 했다. 몽골의 경우에는 대다수의 사원이 강제로 폐쇄당하기도 했고, 중국도 문화대혁명의 광풍 속에서 상당수의 사찰과 불교 문화재들이 홍위병들에 의해 훼손되기도 했다. 물론 공산권이라고 해도 나라에 따라 사정이 은근히 다르기는 했지만 말이다. 스리랑카에서는 힌두교 세력과 내전을 치르기도 했고, 미얀마 등지에서는 군부정권이 버마족의 민족적, 국가 정체성으로 불교를 밀어, 21세기 들어서 불교 근본주의가 대두되고, 이로 인해 로힝야족 탄압 등을 초래하기도 했다.

인구 대비 불자 수가 많은 나라들은 스리랑카를 제외하면 동아시아동남아시아에 있다. 전통적으로 태국과 미얀마에 많은 신도들이 있으며, 절대적인 수로는 불자 인구가 세계 1위인 중국을 비롯해 티베트, 몽골, 등도 불교 인구 다수 지역이다. 세계구 급으로 골고루 퍼진 기독교이슬람과는 달리 불교는 중국과 불교권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으며, 서구 일부 지역을 제외한 동유럽, 중동, 중남미 등 나머지 지역에서는 거의 교세가 없다시피 하다. 본고장 인도에서도 교세가 매우 약해서, 1% 수준으로 시크교기독교 인구보다도 적다. 또 특이하게 이슬람권인 오만, 카타르, 쿠웨이트 등지에도 신자가 조금 있는데, 이는 아시아계 외국인 노동자의 영향이다.

20세기 후반 이후로 일부 유럽, 미국 등지에서 소수종교로서 점차 교세가 커지고 있다. 현재도 증가 중. 예전에는 티베트 불교나 일본 불교(젠 부디즘)이 중심이었는데,[71] 근래에 들어서는 한국에서 출가한 서양인 승려들이나 불자 교민들의 불사와 노력을 통해 한국 불교도 점차 퍼져나가는 중이다. 게다가 최근 서구 백인들 중에선 절에 다니는 비율이 증가한 추세이며, 빌 클린턴과 같은 유명 인사들도 명상이나 불교를 공부하는 모습이 언론에 노출되어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만약 “이 가장 많은 도시가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대다수 사람들은 아시아의 어느 나라라고 응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절이 있는 도시는 2016년 기준, 놀랍게도 미국의 LA(로스앤젤레스)이다. 현재 LA에는 무려 300개의 사찰이 있으며 75개의 불교협회, 2500여 개의 명상센터가 있다고 한다. 아놀드 토인비는 불교가 서양에서 주류 종교가 될 것이란 말을 했는데, 물론 과장된 점이 없지는 않지만, 의미심장한 발언이다. 다만, 2016년 갤럽 기준 미국의 불교 신자 수는 1% 남짓하며, 이는 0.8%인 이슬람교와 거의 비슷하다. 기독교는 73.7%. 아직도 미국 내에서 불교의 입지는 실제로는 매우 낮은 편이다.

중국 불교의 경우 문화대혁명의 여파가 가신 이후로 중국 정부의 암묵적인 지원으로 현재 중국 내 불교 신자는 최소 2억 명이 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며, 최근 몇 년간의 증가세를 감안하면 최소 몇 년 내에 4억 명을 돌파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현재 중국을 제외한 세계 불교 신자가 3~4억 명 내외인 것을 감안하면 향후 국제 사회에서 중국 불교의 위상은 더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 불교는 중국불교협회를 중심으로 문화대혁명 시기에 잃어버린 옛 영광을 재현하는데 성공하면서 동남아는 물론 세계 불교계에서의 주도권 쟁취에 적극 나서고 있다. 특히 세계불교포럼을 주최하면서 중국 불교의 영향력 확대를 꾀하고 있는 중. 자세한 사항은 중국/문화 참조.

아프리카에는 불교 신자가 거의 없다. 위키백과세계의 불교(영어) 내용에 따르면, 10억여 명의 인구가 있는 아프리카에서, 불자의 수는 10만여 명에 불과하고 인구에서 불자가 차지하는 비율도 0.012%로 가장 낮단다.

유럽에서는 칼미크 공화국(러시아의 자치 공화국)이 유일한 불교 국가다. 이유는 칼미크 공화국은 몽골계 민족 칼미크인이 중심이 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과거 약 5만명의 오이라트인이 이 지역으로 이주한 것이 칼미크 족의 기원으로, 이들이 불교를 믿고 있어 불교를 국교로 삼게 되었다. 칼미크 남쪽은 다게스탄 공화국, 체첸 공화국 등 무슬림이 많고, 칼미크 북쪽은 정교회가 지배적이라, 이슬람정교회 사이에 불교가 끼어있는 오묘한 상태.[72] 일찍이 러시아옐리자베타 여제 시절에 불교를 러시아 제국의 종교들 중 하나로 인정하였고, 칼미크 뿐 아니라 동시베리아의 투바부랴티아에서도 불교세가 강하다.

오스트레일리아크리스마스 섬에도 불자가 많다. 아마도 이 섬의 인구 중 약 70% 정도가 중국계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같은 이유로 싱가포르 역시 불교 강세 국가이다.

6. 불경[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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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근본 불교[편집]

  • 숫타니파타의 4장과 5장이 근본 불교에 해당한다. 정확히는 "1장의 3번째경" / "4장 전체" / "5장에서 1번째 경을 뺀 부분"이 근본 불교에 해당한다. 이는 '닛데사'의 주석과 아소카 대왕의 기둥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6.2. 부파 불교[편집]

상좌부 불교에서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부파 불교 시대의 '5부 니까야'라고 하는 팔리어 경전으로 전승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붓다의 가르침은 인도의 전통에 따라 구전으로 전승되다가 기원전 1세기에 문자로 기록되어 수많은 경전들이 흩어져서 존재하였고, 5세기 부터 합쳐진 니까야를 붓다고사가 인도 남쪽으로 전했다는 것이 학자들의 소견이다. 니까야는 5부 니까야로 구성되어 있는데 5부 니까야란 디가니까야, 맛지마니까야, 쌍윳따니까야, 앙굿따라니까야, 쿳다까니까야를 말한다. 니까야는 다양한 나라의 문자로 번역되었는데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초기불전연구원 등에서 한국어로도 번역하고 있으며 다양한 번역자들의 개별 번역본도 존재한다. 인터넷 서점에 '니까야'를 쳐보면 나온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기준 5부 니까야 중 4부 니까야는 번역이 완역 되었고 쿳다까니까야는 《숫타니파타》, 《법구경-담마파다》가 번역이 완역 되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디가, 맛지마, 상윳따, 앙굿따라 4부 니까야가 번역이 완료되었다. 참고로 한국빠알리성전협회의 전재성 박사의 번역으로 예전부터 한국에 널리 알려진 《숫타니파타》의 4장과 5장은 5부 니까야 중에서도 초기의 불경에 속한다.
  • 팔리 삼장: 팔리 삼장은 경, 율, 논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은 붓다의 가르침, '율'은 불자의 계율, '논'은 붓다의 제자들이 남긴 경과 율의 주석들을 말한다.
  • 경장
    • 니까야(아함경[74] - 아함경은 근본 불교가 아니라 상좌부 불교에 속한다. 행위와 규율을 중요시하고, 수련의 단계를 세밀하게 나누며, 귀신과 신, 지옥의 존재를 인정하고, 유사한 구절의 반복된 질문을 하는, 상좌부 불교의 대표적 특징을 다 가지고 있다.)
      • 디가니까야 (장아함)
      • 맛지마니까야 (중아함)
      • 쌍윳따니까야 (잡아함)
      • 앙굿따라니까야 (증일아함)
      • 쿳다까니까야 (아함에 해당되는 것이 없이, 니까야에만 있는 부분.)
        • 숫타니파타 (숫타니파타의 1장, 2장, 3장은 전형적인 상좌부 불교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다만 '4장'과 '5장'과 '1장의 3번째 경'만이 근본 불교에 해당된다.)
        • 법구경 (근본 불교가 아니라 상좌부 불교에 해당한다. 행위(카르마)와 규율을 중요시 하는 것은 상좌부 불교의 큰 특징이다.)
  • 율장
    • 위나야 삐따까(Vinaya Piṭaka)
    • 사분율
    • 오분율
    • 십송율
    • 유부신율
    • 마하승기율
    • 해탈율
    • 범망계
    • 유가계
    • 삼취정계
  • 논장
    • 아비담마 삐따까
    • 6족론

6.3. 대승 불교[편집]

  • 논서
    • 금강삼매경론
    • 대지도론
    • 삼론(백론, 십이문론, 중론)

7. 성지[편집]

모두 석가모니의 인생에 주요한 분기점이 되는 장소들이다. 룸비니(Lumbini), 부다가야(Bodhgaya), 사르나트(Sarnath), 쿠시나가라(Kushinagar)를 불교의 4대 성지라고 하고, 여기에 슈라바스티(사헤트마헤트), 산카샤, 라지기르, 바이살리를 더하여 불교의 8대 성지라고 한다.
  • 룸비니: 석가모니가 태어난 곳. 샤카족의 도읍 카필라성이 있다. [75]
  • 부다가야: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곳. 마하보디 사원과 깨달음을 얻은 장소의 보리수 나무를 볼 수 있다.
  • 사르나트: 석가모니가 최초로 설법 한 곳. 오비구에게 사성제와 무상고무아를 가르쳤다. 사슴동산을 뜻하는 녹야원이 위치한다.
  • 쿠시나가르: 석가모니가 돌아가신 곳. 히란냐바티강에 석가모니를 화장하였다.
  • 슈라바스티: 코살라국의 수도. 사위성. 석가모니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기원정사(기수급고독원)가 있는 곳.
  • 산카샤: 간담바 나무 아래에서 천개의 몸을 나뉘는 기적을 행한 곳.
  • 라지기르: 마가다왕의 수도. 왕사성. 석가모니의 주된 불교 교화의 중심지. 가까운 곳에 제자를 가르친 영취산이 있다.
  • 바이살리: 리차비족의 주도로 자이나 교조 마하비라의 탄생지여서 자이나교가 득세하였으나, 석가모니의 가르침 하에 불교로 전향된 도시.

8. 붓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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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 불(佛), 혹은 '붓다(Buddha)'는 '깨달은 자', '눈을 뜬 자'라는 뜻이다. 한자 佛은 이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한자다. 붓다에 가까운 발음인 弗에 '사람 인' 변을 더했다. 원래의 한국 한자음은 '붇'이었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불'로 음운 변화했다.

보통 부처님이라고 하면 석가모니(釋迦牟尼, Shakyamuni)를 가리키지만, 그 외에도 불교에는 수많은 부처님이 존재한다.

9. 각종 오해와 통념들[편집]


  • 불교 신자, 특히 승려고기도 안 먹고 생선도 안 먹는다.
    • 불교에 관한 대표적인 오류 중 하나다. 애초에 석가모니가 했던 말은 ‘탁발해서 얻어먹는 놈들이 고기를 탐하고 그러면 보기도 안 좋고, 특히 자기를 위해 죽여서 고기로 만들면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을 간접적으로 범하니까 탁발로 뭘 주든 그냥 바라에 담아주는 대로 먹어라.’였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고의로 살생을 저질러서 얻은 고기가 아닌 자연사한 동물로부터 얻은 고기는 먹어도 좋다였다. 이러다가 불교가 중국으로 전해지고 남북조시대의 양무제에 이르러, 승려들은 절대 고기 먹지 말라는 계율이 만들어졌고 이 관습이 한국에서도 비판없이 전래되었다.# 반면에 상좌부 불교 쪽의 동남아에서는 과거든 현재든 고기, 생선을 가리지 않고 먹으며, 현대 불교의 어지간한 거대 종파에서도 이제는 계율 위반도 아니고 승려들도 고기, 생선을 굳이 가리지 않고 먹는다. 다만 한국 최대 불교 종파인 조계종에서는 여태껏 육식을 금지하지 않았는데 2013년 조계종 승려들 도박파문이 벌어지면서 자체 이미지 쇄신하겠다고 계율로 승려들은 아프지 않으면 고기 먹지 말라고 규정을 만들어서 금지시켜버렸다. 자정 노력은 좋지만 약간 시대 흐름을 좀 거스르긴 한 케이스. 다만 고기 먹고 오신채 먹고 그러면 '힘이 좋아져서' 수행에 방해되기 때문에 잘 먹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 최대 불교 종파인 조계종 승려들이라면 나이 어린 승려들이 성장을 위해, 또는 아플 때나 대접 받은 요리를 먹을 때 일부 들어있으면 굳이 빼내지 않고 그냥 먹는 정도인 듯. 승려도 이런데 당연히 불교 신자들은 고기건 생선이건 오신채건 잘만 먹는다. 다만 몇몇 신도가 개인적으로 채식을 하는 경우는 있다. 승려들 중에서도 소림사의 경우 무술시범승(무술 시범단)과 전투승(무술 수련단)은 고기와 오신채를 되려 일반인보다 더 많이 먹는다. 이유는 그래야 무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파계승으로 간주하진 않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임무목적상의 육식섭취일 뿐이지 살생을 즐기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 단지, 종단에서 내부적으로 "타인의 시선을 조심하라" 고 주의하는 지침 정도는 내리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스님들이 육식을 하는 모습을 보면 놀라 까무러치는 사람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현장에서 경기를 일으키는 목격자들도 간혹 있다. 그러니 눈 앞에서 스님이 고기 뜯는다고 땡중이나 파계승이라고 단정하지 말자. 종파마다 다르다.[76]
    • 달라이 라마의 경우도 평상시에는 채식을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먹을 때는 딱히 고기를 거부하지 않는다고 한다.[77]
    • 만일 불교에서 육식을 완전히 거부를 한다면 태국 요리에서 육류요리가 발달했을리가 없으며 티베트 요리는 지역이 산악지대라는 특성 때문인지 오히려 채소의 비중이 적은편이라고 한다.
  • 요약하자면 육식 자체를 금지하는것이 아닌 살생금지로 인해 어느정도 자제하는 것으로 보는것이 옳으며 실제로도 자기자신을 위해 도축된것이 아닌 고기는 먹어도 된다고 한다.
  • 일본의 승려들은 결혼을 할 수 있다.
    • 이건 한국과 같은 마찬가지로, 종파마다 다르다. 단지 한국과 차이점이 있다면 일본 불교계는 결혼을 허용하는 종파가 다수라는 것.
  • 불교 신자들은 모두들 다도에 익숙하며, 그윽한 의 향기와 풍미를 즐길 줄 안다.[78]
    • 스님도 점점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는만큼 속세의 문물에 익숙한 젊은 스님들을 시작으로 점차 속세의 문물이 들어오는 경우가 많아 속세의 문물을 아예 모르지는 않다. 의외로 깊은 산골 암자의 선방에서 드립 커피가 나온다거나 하는 일도 종종 있다.[79] 물론 같이 나오는 간식거리는 티라미수, 파르페, 수입과자 뭐 이런 것들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등, 스님 취향 마음대로다.
    • 비슷한 편견으로 스님들이 전통 음식만 드실 것이라는 게 있는데, 이 역시 사찰음식이나 사찰식 피자 문서만 봐도 간단히 반박할 수 있다. 고기오신채만 안 들어갔으면 아무거나[80] 먹을 수 있어서, 스님과 수녀들이 함께 종교 간의 화합과 공존을 되새기는 의미로 유럽 여행을 한 것을 다룬 2009년 10월 29일자 한겨레신문 기사에서는 스님과 수녀가 러브샷(?)으로 아이스크림을 나눠먹는 사진이 올라있기도 했다.[81]
  • 불교 신자들은 불경을 다 외우고 다닌다.[82]
    • 대장경 전체를 기준으로 하면 불경의 총 분량상 절대 불가능하다. 양이 적은 불경 몇 권의 경우 달달 읽고 다니다 보면 외울 수도 있지만[83] 팔만대장경 전체를 어떻게 다 외우고 다니겠는가. 물론 초기 불교 시절의 스님들은 정말 다 외우고 다녔지만, 당시의 초기 경전들은 분량과 종류가 후기 경전들만큼 다양하지 못했고, 문헌의 형태도 시나 단문(수트라)였으며, 구전의 한계로 부파마다 차이점이 보인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그리고 구전과 암기로 경전을 전승하던 초기 불교 시절 스님들도 결국 패엽경을 거쳐 경전을 문서화하게 된다. 동북아 스님들과 달리 자체 노동을 통한 식량생산도 안 하고 오롯이 불교 수행생활에만 전념하면서도 말이다.
    • 예외적으로, 남전불교계의 경우 삼장법사 칭호를 얻으려면 8천 장이 넘는 빨리어 삼장을 정말로 한 글자도 안 틀리고 다 외워야 한다(...). 아무리 빨리어 삼장이 북방불교계 대장경보다 적다지만 이는 보통 일이 아니기 때문에 삼장법사 칭호를 받은 스님이 한 번 나오면 그 스님은 전 국민의 존경을 받을 정도다. 물론 이해도에 무게를 두는 북방불교계에서도 삼장법사 칭호를 받는 것은 그 시대의 불교계에서 두루 인정을 받아야 할 수준에 올라야 한다는 의미이기에 매우 어려운 일이다. 괜히 삼장법사라는 칭호가 불교 종파에 상관없이 극존칭에 속하는 게 아니다.
  • 성철 스님은 죽기 전 자신이 불교에 귀의한 것을 크게 후회하는 유언을 남겼다.
    • 사실이 아니다. 실제 유언은 "참선 잘 하그래이."[84]이다.
  • 저승세계에서는 염라대왕이 킹왕짱이다.
    • 동북아 불교 한정으로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염라대왕은 10명의 시왕 중 하나이자 대표격일 뿐이며 옥황상제의 부하이다. 다만 티베트를 비롯한 타 지역에는 저승10왕 개념이 없어[85] 저승의 지배자는 야마(염라)하나 뿐이고, 불경에도 야먀가 사는 야마천은 인도 신화에서 옥황에 해당하는 제석천이 사는 욕계보다 위에 있다. 또한 염라대왕부터가 다음 생에 보현왕여래라는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를 받은 존재인지라 격이 낮은 존재는 절대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염라대왕 항목 참조.
  • 불교에는 윤회가 있어서 금수저가 될 때까지 자살했다 윤회하길 반복하면 된다.
    • 자살하면 지옥(불교)에 간다.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해치는 것 역시 불살생계를 위반, 그것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라 중죄로 취급된다.[86] 때문에 지옥에서 엄청난 시간 동안 고통을 받은 뒤[87] 다시 윤회를 거쳐야 하며, 그마저도 인간으로 태어나 불법을 접할 가능성이 크게 줄어든다. 불교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메이저 종교들의 교리는 살인과 자살을 중죄로 본다.
    • 어떤 경우엔 자살을 하게 되면 저승사자가 되어 죽은 사람들을 데리러 다니며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우치며 반성하라는 벌을 받게 된다고도 한다.
    •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윤회도 생전에 얼마나 선행을 했는지에 따라 갈린다. 태국 같은 경우엔 이 점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지도층들의 부의 축적을 정당화시킬 정도다.
  • 불교는 전쟁과 폭력을 한번도 저지르지 않은 평화로운 종교이다.
    아쇼까는 전륜성왕(轉輪聖王, Cakravartin)이라는 전통적 개념, 곧 정의로운 불교적 왕을 모델로 삼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비록 신화적인 전륜성왕이 다르마의 힘에 의해 평화적으로 정복한 것으로 그려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웃 왕국들을 여행할 때 군대와 함께 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런 불합리한 점을 고려하여 몇몇 학자들은 무력의 사용에 대한 불교의 입장이 처음에 보이는 것만큼이나 분명한지에 대해서 의문을 표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유보적 태도는 후대의 문헌에 의해 강화된다. 초기 대승의 자료로서 아마도 2세기 저작으로 추정되는 『사띠야까의 변화Satyakaparivarta』〔『불설보살행방편경계신통변화경佛說菩薩行方便境界神通變化經』 또는 『대살차니건자소설경大薩遮尼乾子所說經』으로 한역됨〕는 일종의 정당한 전쟁옹호론의 초기 형태를 제시하였는데, 왕은 전쟁에 의지하기 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우호적으로 대하고, 도움을 주고, 이어 위협을 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전제를 달면서도 전쟁은 다른 수단이 소용없을 때 추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문헌은 자비나 방편과 같은 대승의 개념을 사용하여 불교의 영향력을 확산시키려는 정복 전쟁을 옹호하면서 전쟁과 고문, 가혹한 처벌을 정당화하고 있다. ...... 스리랑카의 초기 역사에 따르면, 싱할라족과 인도 출신 타밀족 사이에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싱할라족 왕인 둣타가마니(Duṭṭhagāmaṇi, 1세기)는 타밀족 장군인 엘라라(Eḷāra)를 격퇴함으로써 민족적 영웅으로 여겨졌고, 이 섬의 역사를 담은 『대사(大事, Mahāvaṃsa)』라는 5~6세기 싱할라 연대기는 이 승리를 기리고 있다. 이 연대기는 그 분쟁을 불교도와 힌두교도 사이의 일종의 ‘성스러운 전쟁’으로 묘사하면서 불교의 승리를 찬미한다. 여기에서는 (아쇼까가 그랬던 것처럼) 둣타가마니가 전쟁에서 승리한 뒤에 회한을 느끼지만, 깨달은 승려(아라한)의 말을 듣고 다르마를 수호하는 과정에서 그가 불교의 계율에 맞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았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오늘날 고(故) 왈폴라 라훌라(Walpola Rāhula, 1907-1997)와 같은 지도자급 승려들은 ‘정치적 민족주의’를 승인하는 말을 하면서 둣타가마니의 군사작전을 ‘십자군’으로 묘사하곤 하였다.

    데미언 키온(Damien Keown)[88], 『불교』
    • 불교 국가 중에서도 정복과 약탈에 적극적이었던 국가들도 있다. 준가르 칸국이나 칼미크인들이 세운 칼미크 칸국의 경우 노예 사냥이 주 산업 중 하나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요나라(거란)도 엄청난 불교 국가였다. 고려를 침공한 요 성종의 이름은 문수보살의 종이라는 뜻의 '야율문수노' 였을 정도다. 이러한 편견(?)은 상당부분 달라이 라마 14세의 평화주의 노선에서 비롯되었다. 현대에도 동남아 불교 신자들이 무슬림들과 힌두교 신자들을 린치하는 사례가 발생한다. 일례로 미얀마 출신의 로힝야 족의 경우, 국가적으로 불교 문화권이지만 이들은 무슬림들이기 때문에 국가에서 추방당해 보트피플이 되었다.[89] 일본의 승려들도 태평양 전쟁에 극도로 동참했다는 내용의 서적 《전쟁과 선》도 함께 참고해 보자.
  • 불교 신자들은 현실을 등한시하기 때문에 게으르다.
    • 근면이 가장 중요시되는 덕목 중 하나이다. 싯다르타의 유언도 게으르지 말고 해야 할 바를 모두 성취하라는 말이었다. 정작 초창기 불교는 도회지 상인들이 주로 믿던 종교였으며 불교 전파도 무역상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 순수한 불교 국가들은 모두 가난하다.
    • 주로 근본주의 성향의 기독교, 이슬람 관련한 선교단체에서 자주 사용하는 레퍼토리이다. 해당 주장은 대개 대표적 반례인 일본이나 그 외 동남아의 부유한 화교들을 제외하는 방식 등을 이용하여 통계를 짜깁기해서 만들어진다. 반대로 기독교 등의 신앙을 고수하는 국가들 중 경제적, 문화적으로 낙후된 경우를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실로 논할 가치가 없는 유치한 프레임 공격. 원래 종교가 가난한 사람 부유한 사람 차별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포함하기 마련인데, 특정 종교 신자들이 부유하니 가난하니 같은 주제를 가지고 선교에 이용한다는 자체가 종교인으로서 잘못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 인구의 절대다수가 기독교남아메리카 국가들과 이슬람이 대다수인 중동 국가들이 얼마나 잘 사는 나라인지 보자. 반대로 인구의 대다수가 불교 신자인 중화민국(대만)은 미승인국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전세계 최상위 수준의 경제를 자랑하는 선진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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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대한민국에서의 불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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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종단 목록[편집]

10.2. 유관단체[편집]

10.3. 한국 불교의 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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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관련 용어[편집]

11.1. 붓다, 승려 등을 뜻하는 용어[편집]

11.2. 교리 관련[편집]

12. 관련 인물[편집]

12.1. 석가모니와 불제자[편집]

  • 라훌라 - 십대제자에도 속하지만, 석가모니의 친아들이란 부분도 있으므로 따로 분류.
  • 앙굴리말라 - 1,000명을 채우게 되면 득도할 수 있다는 말에 속아 999명을 살해하고 손가락을 전리품으로 삼았다고 한다. 막판에 석가모니를 만나 아라한이 되었다.
  • 출라판타카 - 간단한 계율도 외우지 못하던 그에게 석가모니가 성전을 빗질하라고 한다. 그리고 '쓸고 닦으라'고 외우면서 쓸라고 한다. 그러한 일종의 수행법으로 아라한이 되었다.

12.2. 고승 및 불교 사상가[편집]

12.2.1. 인도[편집]

12.2.2. 중앙아시아[편집]

12.2.3. 중국[편집]

12.2.4. 한국[편집]

12.2.4.1. 근현대[편집]

12.2.5. 베트남[편집]

13. 부처들과 보살들, 그 외의 신들[편집]

13.1. 불·여래[편집]

  • 대일여래 - 비로자나불, 치성광여래
  • 아미타불 - 서방극락세계의 부처.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 미륵 - 석가모니불에 이어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 해당 문서 참조.

13.2. 보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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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무갈보살(법기보살) - 당나라 때 중국에서 편찬된 화엄경에 등장하는 보살로, 금강산에 머물며 설법한다고 한다. 실제로 금강산에는 이 보살이 현신했다거나, 만났다는 설화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13.3. 명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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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그 외[편집]

14. 불교에 영향을 받은 종교와 사상(가)[편집]

14.1. 종교[편집]

사실상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종교들은 작건 크건 다 불교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부처님 손바닥(...)
  • 힌두교 - 브라만 교 때는 영향을 받았다가, 불교가 크게 커지고나서 역으로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 마니교 - 출가자와 재가자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부파불교의 수행 방식을 받아들였다.
  • 무속신앙/사머니즘 - 불교 자체의 영향력도 있고, 몽골이나 북아시아 지역에는 불교와 텡그리 사머니즘을 융합시켜 만든 종교도 있다.
  • 증산법종교 - 현재의 증산 계열 종교 분화와 관계없이, 강일순은 저서 현무경에서 불佛을 형체(佛之形體)로 정의한 바 있다. 흔히 상제님이라고도 칭하며 증산법종교는 이를 모태로 미륵의 출세를 서원한다고 한다.
  • 원불교 - 창시자인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은 이후 경전들을 두루 열람하면서 금강경을 읽은 뒤 석가모니가 자신의 연원이라고 결론지었으며, 교전인 <원불교전서> 내에서 《불조요경》항목에 금강경, 반야심경 등 불교에서 외는 경전 일부가 들어있기도 하다.
  • 유교 - 초기 유교는 당연히 영향이 없다. 그러나 중세시기 송나라 때 등장하는 성리학은 도교와 불교의 영향이 상당히 컸다. 성리학의 이기론은 불교의 화엄사상을 참고로 발전된 이론이며, 양명학이나 심학 계통은 선불교의 영향이 크다. 조선시대를 지배하고 불교를 배척한 성리학이 사실은 불교의 영향력하에서 생성되었다는 건 꽤나 아이러니한 일이다.
  • 선교 - 과거 이름은 선(仙)불교. 정부에 등록된 법인명칭은 "선교유지재단". "1997년 창교된 선교교단, 재단법인 선교(仙敎)와 무관하다." 선종(禪宗)과 다르다. 원불교와 비슷하게, 불교의 영향을 받은 다른 종교이다. 원불교처럼 선불교도 불교의 한 갈래가 아니다. 1994년 11월 교주이자 창시자 만월 도주가 출가하였으며, 이때를 선불교가 만들어진 날이라 해서 창교일로 잡는다. 한국 토속신앙의 하느님을 신앙하며, 단군을 불광선인이라 부르면서 성인으로 받들어 모신다. 공식 홈페이지 교리의 유사성 등을 들어 단월드와 관련이 있다는 의혹이 있지만 명확한 입장 표명을 한 적이 없어서 확인되지 않았다. 공식 홈피의 주요 연혁을 따르면, 선교로 이름을 바꾼 시기는 2016년. 2016, 2017년 연속 재단법인 선교(仙敎)를 사칭하여 오인혼동유발.
  • 이슬람 수피즘: 이슬람 수피즘은 중앙아시아 불교 교리와 수행 방법에 적잖은 영향을 받았다. 낙슈반디야 교단의 경우에는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 이슬람 시아파: 미륵불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여담인데 일부 쉬아 소수종파들은 티베트 불교와 힌두교의 영향으로 교주가 환생한다고 믿는 경우가 있다. 드루즈교가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 시크교: 인도에서 불교 교세가 거의 소멸하고 나서 출현한 종교이나 티베트 불교를 통해서 불교의 약간이나마 받게 되었다. 펀자브 지방과 비교적 가까운 카슈미르 라다크 지방 등의 불자들과 토론하고 교류한 흔적이 시크교 경전에 조금 남아있다.

14.2. 사상(가)[편집]

  • 헤르만 헤세 - 싯다르타란 저서를 쓴 적이 있다.
  • 쇼펜하우어 - 사상이 불교의 일체개고랑 비슷하며, 실제 불교를 공부해본 결과 불교가 기독교를 대신하여 유럽을 지배할 것을 기대하기도 했다. 다만 염세주의 때문에 그의 불교에 대한 이해가 미흡하다는 평가도 있다. 참고
  • 추사 김정희 -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불교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죽기 얼마 전 출가했다. 당시 국내 간화선의 대가라 불렸던 백파긍선과 선불교의 정통성을 놓고 논쟁을 벌였을 때 백파긍선이 전전긍긍했을 정도다.[95]

15. 불교 신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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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타 종교 간의 관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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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기타[편집]

철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불교에 대한 KBS 다큐멘터리
  • 시뮬레이션 게임 《문명》 시리즈 중 하나인 《문명 4》에선 종교 중 하나로 등장하는데, 종교 중 제일 먼저 등장한다. 이는 신비주의 → 명상을 통해 곧바로 창시되기 때문. 《문명 5》에서는 불교의 영향을 받았던 나라들은 불교를 만든다. 문제는 시스템상 불교를 만드는 문명이 시암밖에 없다. 따라서 게임을 하다보면 불교는 주로 시암이나 기독교, 가톨릭교를 창시하지 못한 유럽 문명이 창시하게 된다.
  •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으로 불교에 왜곡된 긍정적인 관점을 지닌 사례도 있다. 공격적인 독설로 유명한 이탈리아 유명 여기자인 오리아나 팔라치는《나의 분노, 나의 자긍심》이라는 책에서 불교를 가장 평화로운 종교라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한 적이 있었다. 자신은 기독교 신자(가톨릭)이지만, 기독교나 이슬람이나 유대교 같은 종교는 피비린내나는 역사를 가지고 있던 걸 그리도 혐오하는 그녀에게 종교 자체를 들이대며 학살이란 걸 저질러본 적이 없는 불교는 위대하다고 엄청나게 불교를 칭송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정작 역사 속~현대 불교도들의 모순과 폭력에 대한 이해가 아예 없는 무식한 발언이다. 실제로 유럽 역사학자들은 이런 팔라치의 편견에 맞서 소헤이를 반론의 근거로 든 적이 있다. 그야말로 동양에 대한 환상과 편견으로 점철된 시각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녀가 불교를 공부했다는 기록도 없다(...). 사실 이와 같은 불교에 대한 서양 지성인(?)들의 편견은 니체의 '안티크리스트'같은 서적에서도 볼 수 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리차드 도킨스는 비난의 대상인 종교를 칭할 때에 불교는 예외라는 의견을 밝혔다.
  • 불교 광신도 세력도 상당히 있는데, 대표적으로 미얀마의 아신 위라투, 스리랑카의 보두발리세나 정당 등이 있다. 근래 불교에서도 근본주의적 움직임이 고개를 들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 참조.
  • 한국 불교계가 무아마르 알 카다피에게 인권상(...)을 수여한 적이 있다. 참고 하지만 카다피의 초기 집권은 나쁘다고만을 볼 수 없다. 남녀평등을 위해 여성에게도 교육을 실시, 대규모의 문맹 추방 그리고 석유회사 국유화로 남는 이익을 국민을 위해 사용하기도 했다. 물론 그러다보니 그의 부정적인 면이 잘 드러나지 않았고, 불교계에서도 이를 잘 모르고 수여했던 걸로 보인다.
  • 불교의 형벌에는 축생계가 존재하는데 이건 다른 두 개[96]에 비하면 벌이라면서 벌이 아닌 것 같다며 모순 아니냐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지만, 패리스 힐튼 같은 엄청 유명인의 애완동물[97]로 태어나면 어지간한 인간을 웃도는 수준으로 호화롭게 살다가 천수를 누리고 죽는 경우도 있기는 있지만 이런 식으로 유명인의 애완동물로 간택되는 짐승들이 전체 동물의 몇 %나 될지 생각하면 그렇게 태어나 산다고 그게 마냥 좋다고 볼 수도 없다. 로 태어날 경우 경주 실력만 뛰어나면 은퇴 이후에도 씨수마로 귀족 대우를 받으며 천수를 누리다 가며 는 그 대우가 이미 준인간이라고 지적하기도 하지만, 씨수마가 아닌 말들의 경우 그렇게까지 우대받지는 않는다. 개들도 대우가 준인간인 경우는 주인을 잘 만났을 경우[98] 그렇다는 것이지, 주인의 성격이 아무리 좋다고 한들 아니, 당장에 중성화 수술 받고라도 오래 사는 길을 택하고 싶으냐고 물으신다면... 유럽의 경우 소, 돼지, 닭 등으로 태어나면 죽을 때 그 한 순간만 참수로 생을 마감할 뿐이지 그 나머지 생애는 엄청 편안하다는[99] 사례를 들기도 하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누군가에게 먹히기 위해서 사는 호화스러운 삶을 '행복하다'고 부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면 형벌이라면서 형벌이 아닌 것 같다고까지 말할 근거는 될 수 없다. 애초에 불교의 육도란 부처가 되지 못한 중생이 전생 혹은 현생을 살면서 행한 행적들의 인과를 따라 죽음 이후 부처가 될 때까지의 유예기간 동안에 머물 곳이 거듭 정해진다는 개념인데, 딱히 죄를 지어 받는 '형벌'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살아 생전에 행한 과보의 나머지를 환생해서 마저 갚는다는 '부채(負債)'에 가깝다. 불교의 지옥은 한 번 떨어지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 아니고, 대승불교의 경우 석가모니를 해치려다 지옥 가장 깊은 곳에 처박힌 데바닷타가 석가모니의 전생의 스승으로 석가모니 전생의 성불을 도왔던 인연으로 지옥에서 자신이 저지른 '석가모니 살해 미수'의 죄의 부채를 다 갚고 나면 성불해 부처가 되도록 예정되어 있다는 법화경의 구절을 보아도 좀 가혹한 형태로 죄값을 치르느라 선업의 대가가 아주 오랜 기간 유예되어 있는 공간에 가깝다. 징역 56억은 있어도 종신형은 없는 감옥.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의 전생을 전하는 본생담 가운데 자신이 스스로 죽음을 택한 사슴 왕이나 자신의 몸을 불길에 던져 굶주린 선인에게 공양했다는 토끼 등 짐승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나, 석가모니가 태자 시절에 타고 다니던 칸다타라는 말이 석가모니 부처로부터 축생도에서 인간도를 뛰어넘어 천상도에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보면 당연히 축생도에 떨어진 짐승이라고 해도 선업을 닦았던 것이 있다면 부처가 될 근기가 갖추어져 있고 얼마든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 영화 매트릭스(영화)의 주제도 워쇼스키 남매가 인터뷰에서 직접 밝혔듯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 승려의 육식에 관해서 말이 많으나, 결과적으로 말한다면 삼정육에 해당한다면 먹어도 상관없다. 더 자세한 내용은 스님 문서 참조.

18.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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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의 불자 수 집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데 이 통계에 따르면 중국의 불자 수는 대략 인구 13억 중 11억 이상으로써 있다. 일단 공식적인 통계에서의 세계 불자 수는 약 5억 명 정도라고 본다.[2] 조화와 화해의 이미지를 담고 있으며 깨달음에 이르는 8가지 길, 팔정도를 보여준다. 법륜을 간단히 말하면, '진리의 수레바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진리(법, 다르마)란, "'아트만'이라고 불리는 '나'와 '내 것'이라는 것은 사실 없다"는 것. 즉, 제법무아. 무상, 고, 무아의 핵심은 '무아'에 있다. 일체개고(제행개고)와 제행무상은 '제법(모든 법)'이 '무아(아트만이 아니다)'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설명이다. 여기서 아트만은 '자아'나 '영혼'을 말한다.[3] 여기서 '섬'은 강물 사이에 있는 작은 섬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감정을 강물에 비유하여 감정에 휘둘리고 괴로워하는 것을 '거센 흐름'이라 하였다. 또한 깨달음을 '감정이라는 강물을 건너는 것'에 비유하여, 감정이 격해지면 이 언덕에서 강을 건너 저 언덕으로 갈 때 감정이라는 강물에 휩쓸리지 말고 섬에 의지하여 건너라는 것이다. 결국 깨달음이란 감정이 격해졌을 때 스스로에 의지해서 평정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진리, 법(dhamma)은 '모든 법에 내 것이 없다'(sabbe dhammā anattā)는 것을 아는 것. 즉, 제법무아를 아는 것이다. 보통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에서는 '섬'을 '등불'로 번역하였기 때문이다.[4] 미국 Pew research center 통계[5] 다른 종교들(기독교, 이슬람 등)의 '믿음을 제1의 가치로 두는 모습'을 종교의 기준으로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불교의 철학적 가치에 중점을 두는 이질적인 면모에 혼란스러워하는 상황이 올 수 있으나, 둘 다 으뜸 가는(宗) 가르침(敎), 즉 종교(宗敎)이니 딱히 틀린 번역은 아니다.[6] 석가모니 및 부처는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에겐 그저 '불교에서 믿는 신'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불교 교리상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최종목표 해탈까지의 과정을 안내하는 일종의 선배멘토에 가까운 존재다.[7] 탐진치에서 말하는 "탐욕"의 원형이라 볼 수 있다.[8] 집착의 뜻과 같다. 집착은 한자로 '잡을 집', '붙을 착'. 즉, 딱 잡고 붙어 있다는 뜻. 따라서 동굴에서 떠나라는 말은 '집착을 버려라'는 말과 같다. 잡지 말고 놓아버리고 붙어 있지 말고 거리를 두라는 것. 도망칠까봐 개에 목줄 걸고는 죽을 때까지 줄만 잡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목줄을 풀고 개가 스스로 다가오는지 아닌지를 시도해 볼 것인가? 놓는다고 다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거리를 둔다고 개가 도망을 칠거라곤 볼 순 없다. 도망치느냐 아니냐는 내가 개한테 어떻게 했느냐에 달려있는 것이지, 개는 다 죽어가는데 개 목줄만 잡고 있을 것인가? 삶 역시 '절대로 이것만은 놓칠 수 없다'며 붙잡고 있지만, 놓아버려야 비로소 '괴로움'에 변화가 시작된다.[9] 괴로움이 심해지면 놓아야 될 때인 걸 알고 놓을 줄 알아야 되는데, 해온 게 아까워서 놓을 줄 모르는 것이 '집착'이다. 즉, 과거에 좋아했던 것들이 점점 변해서 이젠 내가 원하는 것이랑 다른데도 불구하고 보내주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10] 여기서 옳음은 자기만의 옳음을 뜻한다. '자기만의 옳음'으로 다른 사람을 비하하지 말라는 것. 하지만, 사회적으로 합의된 옳음으로 다른 사람을 비평하는 것까지 하지마라는 것은 아니다. 불교에서는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논하는 것들이 많다.[11] 탐진치에서 말하는 "성냄"의 원형이다.[12] 일체개고(一切皆苦):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13] 탐진치에서 말하는 "어리석음"의 원형이다.[14] 이는 알베르 카뮈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행복이 무엇인지 계속 묻는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인생의 의미를 찾아 헤맨다면 결코 인생을 살아갈 수 없다."[15] 탐진치에는 해당사항이 없으나, 숫타니파타에서는 언급된다. 원래 탐진치는 4개 였는데 후대에 전해지면서 가르침도 미묘하게 변하고 그 중 하나는 빠져버리게 된다.[16] 이는 최근에 팔리삼장(니까야) 보다 더 오래된 원본이 발견된 『현겁경』에서 "마음에는 네 가지 병이 있다. 첫째는 탐내는 마음과 음욕이고, 둘째는 성내고 미워하는 것이며, 셋째는 어리석음이고, 넷째는 아만심이다."라고 말한 것과 비슷하며 첫째, 둘째, 셋째는 탐진치에 해당된다. 또한 12연기 중 4취(욕취(欲取) · 견취(見取) · 계취(戒取) · 아취(我取))와도 비슷하다.[17] 보통은 사성제의 결론은 팔정도로 생각하지만, 이는 상좌부 불교에서 말하는 결론일 뿐, 숫타니파타에서는 다르다. 숫타니파타에서 사성제에 해당되는 부분을 찾아보면, "지각을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지각을 잊어버리려고 하는 마음' 마저 잊어버리라"고 한다. 즉, 명상을 말하는 것.[18] 감각 기관을 통하여 대상을 인식하는 것.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함.[19] Conceptual proliferation (팔리어: papañca, 한자: 戲論)[20] 불교에서는 언어학의 중에서 처격, 탈격, 소유격을 왜곡된 사유, 즉 희론의 산물이라고 풀이한다. 일반적인 사람은 무언가를 대격으로 경험한 후 그 지각된 바를 기억에 저장해서 사유화하는데, 이때 그 지각을 '나'처럼 여기는 단계에서 처격('지각의 가운데에서')이 나오고, 그 '나'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이를 기준으로 한 이런저런 생각이 덧붙는 단계에서 탈격('지각으로부터')이 나오며, 이로 인해 '나의 것'이라는 자아관념의 기초가 형성되는 단계에서 소유격('나의 지각')이 나온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희론이 인간의 언어 세계를 확장시킴과 동시에, 그만큼 자아 관념을 비롯한 망상을 고도화시킨다고 본다.[21]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니 아무렇게나 하자는 마음가짐은, 결국 허무해지기 때문이다. 허무해지고자 명상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점마저 극복해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22] 12연기의 원시적 형태. 투쟁과 논쟁(괴로움) - 좋아하는 대상(집착) - 욕망 - 쾌락과 불쾌 - 접촉 - 명색 순 이며, 12연기와는 다르게 6개의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다.[23] 불교의 제사 배격, 아트만, 업보, 윤회와 해탈 등은 원래 우파니샤드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아트만은 '나(아트만)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인간 내면의 근원 정신으로써, 여기에 육체를 더하면 불교의 오온에 해당한다.[24] an-: '~없다.'를 나타내는 접두사. 따라서 anatman(안-아트만)은 '무아(無我)'를 말한다.[25] an-: '~없다.'를 나타내는 접두사. 따라서 anatman(안-아트만)은 '무아(無我)'를 말한다. 즉, 영원불변의 영혼(아트만)은 없다는 것.[26] '무아'의 꺠달음을 통해 아트만(자아)을 부정하면 윤회나 업보를 믿을 필요가 없고, 아트만을 긍정하면 '무아(안-아트만)'의 깨달음은 헛된 것이 된다. 아트만을 부정하여 나온 개념이 근본 불교의 안-아트만(무아)이기 때문에 두 개념은 본디 공존할 수 없는 것인데, 상좌부 불교 시대에 이르러 '우파니샤드의 아트만의 개념'과 '불교의 안-아트만의 개념'은 서로 공존하게 되어 모순을 만들게 된다.[27] 정작 붓다가 살아있을 적의 초기 불교에선 대놓고 정확히 이런 오해와 모순이 발생하는 걸 경계하고 있다. 초기 불교의 '무아' 개념은 영원불변한 자아(= 아트만)는 객관 세계에선 없다. 딱 거기서 멈추며 자아 자체를 부정하진 않는다. 여기에 더해 붓다는 경험론적이던 초기 불교답게 우리가 경험 자체를 할 수가 없는, 그래서 확인이 불가능한 오온 외의 자아가 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아(無記) 의외로 이쪽에선 모순이 발생하진 않는다. 업 개념 역시도 결정론의 우파니샤드&자이나교, 단멸론의 물질주의 학파들과는 다르게 업은 원인"들" 가운데 하나 라는 입장을 취해 환경, 상황, 결과, 동기등을 종합적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데 사람들은 대부분 동일성 = 연속성이라 오해하는 경향이 있는데다 헷갈리는 단어 상의 문제까지 맞물려 이미 당대부터 신학자들까지 오해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이는 현재 진행형이다. 이학사 - 데이비드 J.칼루파하나의 '불교철학 역사분석' 참고.[28] 우파니샤드에선 아트만, 상좌부에서는 오온에 해당한다.[29] '업보'(카르마)의 개념이다. 따라서 업보나 인과응보 등은 아트만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며 '올바른 아트만'을 만드는 일은 상좌부 불교에서 권장하는 바 이지만, 이는 '무아(안아트만)'해라는 근본 불교의 가르침과는 모순되게 된다.[30]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올바름을 쌓아라'는 개념은 근본불교에는 없는 개념이다. 어떤 사람은 법구경의 내용이나 부처님 오도경을 들고나와 근본 불교에 '윤회'의 개념이 있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틀린 얘기이다. 법구경은 '올바름을 쌓아야 된다'는 개념과 승단의 개념을 서술하고 있는 상좌부 불교 영향하에 있는 저술이기 때문이다. (시기상으로도 숫타니파타 4,5장보다 훨씬 늦게 지어졌다.) 이는 근본 불교와 상좌부 불교의 차이점을 잘 모르는 셈. 숫타니파타 4,5장은 근본 불교, 숫타니파타 1,2,3장은 상좌부 불교에 해당되며, 이후 저술된 아함경법구경 등도 상좌부 불교의 영향하에 있다. 숫타니파타 4,5장에는 '윤회' 개념이 없다. 정리하자면, 근본 불교는 언어자체가 현실을 1대1로 반영하지 못하며 이로 인해 괴로움(탐욕, 싸움, 어리석음)을 유발한다고 보았고 사회와 가정을 떠나 무소의 뿔처럼 홀로 살면서 깨달음을 추구하였다. 반면, 상좌부 불교는 이러한 가르침을 전수 받은 장로들이 모여서 승단을 만들고, 사회를 형성하면서 생기는 문제들을, '올바른 것들을 쌓아' 계와 율을 지켜야지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31] 또한 '행위(카르마)'를 중시하는 상좌부 불교에서는, 근본 불교의 명색(名色)보다는 무명(無明: 올바른 행위를 알지 못하는 것. 무명도 우파니샤드에서 만들어진 개념이다.)과 행(行: 행동, 행위)을 중요시 여기게 되고, 이에 따라 근본 불교의 원시연기(숫타니파타 4장 '투쟁과 논쟁의 경'에서 나오는 원시적 형태의 연기. 명색이 근본원인으로 나오며, 여기서 무명은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는 상좌부 불교의 12연기로 변하게 된다. 이는 사실상 과거의 우파니샤드 시대로 돌아간 것이다. 그런 와중에 모순되는 두 개념, 근본 불교의 안아트만(무아)와 우파니샤드의 아트만(나)은 상좌부 불교 하에서 공존하게 된다.[32] 숫타니파타 3장에 나오는 12연기를 말함. 이는 원시 숫타니파타의 연기(4~5장에 나옴)와 시대가 다르다. 자세한 것은 숫타니파타 참조.[33] 원인과 결과. 하나가 다른 하나로 이어진다. 하나는 다른 하나의 원인이 된다. 이 인과에서 벗어나는 물질은 없다. 모든 물질과 개념은 다른 것이 원인이 되어 생긴다.[34] 상의상대[35] 여기서 '하나'로 보는 것을, 왜 '공'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라고 의문을 표할 수 있다. 쉽게 설명을 해보자면, 범주로 볼 때에 두 개의 범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범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고, 기준으로 볼 때에는 범주를 두 개로 나눈 그 하나의 기준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보아 이 기준을 없애서 사건을 바라보아야 된다는 뜻에서의 '공'이 되는 것이다. 즉 모든 개념은 '범주'와 '기준'으로 추상화하여 정리할 수 있으며, 이 범주와 기준으로 추상화된 언어들은 절대적인 것으로 보이고 그렇게 믿어왔지만, 사실은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이, '공사상'에서 말하는 주요 핵심 포인트라 할 수 있겠다. [36] 그럼 상대주의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사상과 상대주의는 다르며, 엄밀히 말하자면 상대주의는 공사상의 일부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절반에 해당된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니까 어떤 것에도 특정한 의미를 두지 않는다'가 상대주의라고 본다면, 불교에서는 여기에 더해서 '모든 것은 상대적이니까 모든 것에 각각의 특정한 의미를 둘 수 있다'는 개념까지 포함하고 있다. 상대주의가 '색즉시공' 만을 말한다면, 불교에서는 '색즉시공'과 함께 '공즉시색'까지 말한다는 것.[37] 여기서 '하나로 합쳐서 이해해보자'는 것은, 개념을 '구별'하는 '기준'을 없애서 이해보자는 것이지, '하나가 되자'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 주의. '하나로 합쳐서 이해하자'는 '하나가 되자'랑 다른 것이며, '하나가 되자'는 것은 또다른 극단에 지나지 않는다.[38] 엄밀히 말하면, 어떤 것의 의미는 확정할 수 없어 비어 있다는 것까지가 공(空)이고, 그러한 빈 부분에 어떤 것이든 채워 넣을 수 있다는 것은 유식(唯識)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불교가 허무주의가 아닌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해하기 쉽게 공과 유식을 다 말한 것이다.[39] 한 때 이런 관점에서 상좌부불교를 '소승 불교'라고도 불렀지만, 이는 대승과 비교하여 비하적 단어로 여겨져서 최근에는 쓰여지고 있지 않다. 자세한 것은 상좌부 불교 참조.[40] '남'과 '나'를 구분짓는 마음은 '나'라는 존재를 더 부각시켜서 '무아'의 가르침에 위배되고 '나'는 괴로움에 빠진다. 따라서 내가 괴로움에서 벗어나자 한다면, '남의 반응과 상관없이' 남을 도와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를 간략하게 말하면, "무아(無我)를 하고 싶다면 이타(利他)를 해야된다"는 것.[41] 바라밀의 나머지 부분인, 지계(持戒)·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는 '개인의 깨달음'이나 '계율'을 강조한 팔정도와 비슷하다. 대승불교에서 유독 '보시'와 '인욕'을 강조하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42] 불경에서는 자비희사 중 가장 수행하기 힘든 것이 '희(喜)'라고 말하였다.[43] 범문을 번역하지 아니하고 음(音) 그대로 외는 일[44] 불교 깨달음의 내용이나 활동을 손가락 동작을 통해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표시를 말한다.[45] 절대자를 믿고 의지하는 종교로서의 의미는 희박한데, 이는 불교가 남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를 믿으며 스스로가 깨닫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에 나오는 신과 보살들은 교훈이나 깨달음을 다시 상기시켜 주는 '선배'나 '멘토'로서의 역할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46] 그럼 창조하는 피곤한 일을 매일 해야하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어제를 매일 버리면 오늘을 항상 새롭게 살 수 있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창조라는 것은 바로 어제를 버릴 때, 오늘에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굳이 창조를 하려고 애쓸 필요 없다. 이는 저절로 자라나는 것이다. 더럽고 엉망진창인 진흙탕에서도 고귀하고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나듯이, 괴로움의 삶, 그 한가운데서도 저절로 그 꽃을 피워내는 것이 우리의 삶인 것이다.[47] 매번 망각하는 것에 자신이 없거나, 창조하기 힘들다는 경우에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끊임없이 배우고, 배운 것으로 자신을 바꿔나간다."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 배우면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달라지며 행동이 달라지면 그 행동으로 자신만의 삶을 풀어갈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러한 깨달음이 결코 어렵거나 추상적인 것은 아니며 실제로 행동하고 실천하기 쉽다는 것을 스스로가 알아야 한다. 즉, '배우겠다'는 액션의 중요성을 깨달으라는 것. 이것이 창작의 기본이고 망각의 출발이며 행동의 시작이고 실천의 근거가 된다.[48] 오해가 가능하기 때문에 덧붙여 말하자면, '망각'이나 '창조'나 '배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 각자의 삶에 집중하게 만드는 핵심가치가 있음을 알고, 그것을 우리의 삶 속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이해하는 도구가 '망각', '창조', '배움'이 되는 것이다.[49] 간화선에서 강조하는 것이, 기존의 생각을 버리고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도록 결단내리는 것이다. 하지만 묵조선은 결단보다 명상에 가깝다. 선종은 이렇게 '명상'과 '결단'의 두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상은 모든 생각을 없애는 것이고, 결단은 모든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명상은 '공(空)'에 해당하고, 결단은 유식에 해당한다.[50] 참고로 색즉시공은 공을 말하는 것이고, 공즉시색은 유식을 말하는 것이다.[51] 선불교화두 특성상, 하나의 틀에 넣어지지 않아서, 수백가지의 종파로 나뉘게 된다. 결국 이러한 흐름은 관념에서 벗어나는 것 뿐만아니라 현실에서도 벗어나게 되는 단초를 제공하는데, 때문에 도교와 합쳐져서 변질되어 버리기도 했다. 반면 한국의 불교는 수백가지의 종파를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이루어져 왔다.[52] 당시 중국의 불교는 수십개의 다른 이론을 가지고, 서로가 자신의 이론이 맞다며 이론에 따라 여러 종파를 세웠다. 하지만 한국 불교는 종파의 차이와는 상관없이 교종이든 선종이든 방법은 서로 다르지만, 둘 다 불교로 가는 길일 따름이라고 생각했다.(한국불교의 주류가 그렇다는 것)[53] 근본 불교가 비슷하긴 하지만 결론이 다르다. 근본 불교는 언어에서 벗어나라고 하는 생각마저 벗어나라며, 언어자체를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고, 지금 관념에 대한 말은 관념을 벗어난 뒤에도 '관념에서 벗어나고자'하는 관념에 집착하게 되므로 현실로 돌아와 그것을 잊는다는 것이다. '언어를 버리느냐, 불교를 버리느냐'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54] 왜냐하면 깨달음에 집착하는 것 자체가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강력한 증거이기 때문이다.[55] 성철 스님이 돈오돈수를 말했던 것도 여기에 있다. 어차피 삶 자체가 현실과 떨어져 있지 않는데, 수행해서 과거의 습관을 없앤다고 한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습관에게 굴복하면서도 다시 습관에 지지않겠다는 뜻을 세우는 것이, 삶인 것이다. 완벽하게 과거의 습관을 없애려고 하는 것 자체가 집착인데, 과거의 습관을 없애려고 수행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한번 깨달으면 그저 족한 것을..[56] 행위에는 생각, 일 등도 포함된다. 즉, 올바른 무엇인가를 하는 것. 팔정도를 의미한다.[57] 사실 그 전 초기불교 때부터 '공'개념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구체적이지 못했다. 상좌부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는 사성제팔정도였다. 하지만 용수(나가르주나)가 중론을 써서 팔부중도(八不中道)를 통해 '공'을 설명하자 비로소 그 개념이 구체화되고 각 불교 종파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58] '나'는 나와는 전혀 다른 '남'과 공존하기 때문에, '나'는 '남'과 하나로 합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 우리가 남을 돕는 이유이다. '공'개념 참조[59] 런던대학 골드스미스 칼리지 불교윤리학 명예교수. 왕립아시아학회(Royal Asiatic Society) 회원[60] "그러나 ‘불교 현대화론(Buddhist modernism)’이라고 명명된 이런 불교 독해법은 아주 이른 시기부터 있어왔고, 현대 서구의 태도와 덜 조화되는 그 종교의 몇몇 특징들을 상쇄시킨다. 기적과 만뜨라, 주송, 부적의 효용성에 대한 믿음이 그런 사례이다. 오늘날에도 티베트 망명 정부는 중요한 사안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해 국가의 신탁을 참고하고 있다. 신과 정령들이 거주하는 초세간적 영역에 대한 믿음과 보이지 않는 업의 힘에 대한 믿음은 아주 이른 시기부터 불교의 가르침들에서 핵심적인 또하나의 교리이다."(같은 책)[61] 여기서 방편, 원, 역, 지의 4가지 바라밀을 추가한 10바라밀도 있다.[62] 단테신곡에는 천국과 지옥을 층별로 분류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후세에 지어진 예술적 창작물이다.[63] 장위안도 티베트 불교 신자이다.[64] 여러 부파로 갈라지기 전까지의 불교로 근본 불교, 원시 불교라고도 한다. 다만 원시라는 표현이 단어의 원래 뜻과 달리 '미개한','발전이 덜 된'이라는 늬앙스를 주기 때문에 보통 근본 불교나 원시 불교라는 표현을 쓴다.[65] 남방불교의 기록에 의거함. 북방불교의 기록인 세우의 부집이론은 대중부로 분류하고 있다. (부집이론 소승20부)[66] 상좌부라는 단어는 이 Theravada와 더 윗단계 분류인 Sthaviravada를 지칭하는 말로 혼용된다. Sthavira와 Thera는 산스크리트어팔리어냐의 차이일 뿐 둘 다 장로,상좌를 뜻하기 때문에 중국에서 처음 한자로 번역될 때 둘 다 상좌부로 번역된 것으로 보인다.[67] 쿠샨 왕조,인도-파르티아 왕국 문서 참조[68] 생각해 볼 점은, 석가모니같이 사회의 급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철학자의 입장과 지배 계층의 이해관계를 어느 정도 고려해야 하는 정치가의 입장은 다르다는 것이다. 결국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69] 대한민국일본과 다르게 티베트 불교는 후기 불교다.[70] 다만, 태조 이성계 등 몆몆 역대 군주들은 불교를 믿기도 했다.[71] 서양이 일본식 선불교를 퍼뜨린 인물로는 스즈키 순류와 데시마루 다이센이 있다. 전자는 미국에서, 후자는 유럽에서 활동했다.[72] 볼고그라드에서 남쪽으로 달리면 나오는 칼미크 공화국의 수도 옐리스타에는 이게 러시아가 맞나 싶을 정도로 불교 사원과 건축물들로 가득하다. 오히려 분위기만 보면 유럽 한복판의 몽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73] 한글번역본과 우측상단에 원문을 클릭하면 한자원문까지 볼 수 있다. 서버가 동국대에 있는 작은 서버라서 최초 로딩 속도가 느릴 때가 많지만 대부분의 불경이 한글로 번역되어 있어서 유용하게 사용된다.[74] 니까야는 저본이 2개가 있다. 남쪽으로 전해져 팔리어로 써진 니까야와 북쪽 중국으로 전해져 한자로 번역된 아함경[75] 4대 성지 중 유일하게 인도가 아닌 네팔에 위치해 있다.[76] 이는 '종파'라는 개념을 일반인들이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일부 사이비 목사들이 저지르는 범법 행위 때문에 가톨릭이나 정교회를 포함한 모든 종파가 덤터기로 까이는 것과 같은 이치. 사이비 종교들은 이런 허점을 파고들어 일반 신도를 자기편으로 물밑에서 끌어들이는 '추수' 행위를 자주 일삼는다. 종파 차이를 전혀 모르는 일반 신도는 같은 교회인가보다 하고 다니다가 점점 해당 사이비에 물들어버리는 식.[77] 달라이 라마는 애초에 너무 척박한 기후 때문에 식물성 음식을 구경하기가 매우 어려운 티베트 출신이다. 그래서 달라이 라마를 포함한 티베트 불교의 승려들은 육식을 거부하지 않을 뿐 아니라, 고기를 꽤 자주 먹는 편이다.[78] 애초에 이것도 차를 제대로 즐길 줄 아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 종교와는 관련 없는 것이다. 쉽게 예를 들자면 기독교에서 성찬식을 할때 포도주를 사용하니 기독교인들은 모두 와인을 고급지게 음미한다고 보는거나 마찬가지이다[79] 실제로 가수 박준형이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인 와썹맨의 촬영 중에 동국대학교 불교 동아리를 방문했을 때, 동아리의 자문을 맡은 스님들이 커피를 타서 대접하는 것에 놀란 적이 있었다.[80] 문제는 이것 때문에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사찰음식이 마냥 건강식은 아니라는 점이다. 흔히 고기를 안쓰니까 사찰음식 = 채식 = 건강식으로 오해하는데, 고기와 오신채만 없으면 뭐든 먹을 수 있다보니 기름이나 고추, 치즈, 빵 같이 살찌기 쉬운 음식도 아무 문제없이 먹는다.[81] 사진 속의 스님은 비구니, 즉 여자 분이시니 오해하지 말 것. 기사 자체는 불교계와 가톨릭간의 화합을 다룬 내용이다.[82] 이것 또한 케바케, 물론 승려들은 수행을 위해 불경을 많이 읽고 외우기는 하지만 사람마다 차이가 있고 신자들도 진짜 독실해야 많이 읽는편인 것이지 다 외우고 그런것도 아니다. 기독교 신자들도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을 권장 받기는 하지만 사제나 목사처럼 애초에 성경을 가르치는 위치가 아니라면 다 그런것도 다 외우고 다닌것도 아니지 않는가?[83] 진짜 내용이 짧은 불경들은 글자크기 10포인트 기준으로 A4 용지 몇 장 분량 남짓한 것도 있다. 대표적으로 정토종의 소의경전 중 하나인 불설아미타경은 내용이 2천 자도 안된다.[84] 성철 스님은 억센 동남 방언으로 유명했다.[85] 저승 10왕 개념 자체가 불교와 도교가 교류하면서 생긴 것이다. 당연히 도교가 마이너한 지역의 불교에선 저승10왕 개념을 찾을 수 없다.[86] 사실 불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자살을 금하고 있다.[87] 지옥마다 다르지만 중죄로 가는 지옥들은 겁 단위는 금방 지나간다. 참고로 한 겁은 보통 우주 하나가 태어났다 사라져 무로 돌아가는 수준의 까마득한 시간이다.[88] 런던대학 골드스미스 칼리지의 불교윤리학 담당 명예교수. 왕립아시아학회(Royal Asiatic Society) 회원[89] 로힝야족은 무슬림이라서 차별받았다기보다는 과거에 영국미얀마를 식민지배할 때 그 앞잡이 노릇을 했기 때문에 타 민족들의 미움을 받은 탓이 크다. 하지만, 로힝야족 말고도 불교 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탄압받는 민족이 미얀마에는 많다. 그리고 미얀마 승려들 중에서도 특히 악명높은 근본주의자였던 아신 위라투의 이교도 박해는 그를 불교 버전 오사마 빈 라덴이라고 비난받게 만들었다.[90] 본래 한국의 종단 중 2위였으나 2015년 12월 15일부로 한국불교종단협의회 회비 미납, 폭력 사태로 인한 총무원장 구속 등으로 회원 자격이 정지되었다가, 2016년 7월 12일 자격이 회복되었다.[91] 불법의 생활화, 대중화를 표방하지만 한국불교의 종파로 분류되지는 않는다.[92]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가 만든 맹세로 알려져 있다.[93] 그의 범신론은 불교 및 도교 사상과 유사하다는 설이 있지만, 정작 그가 불교를 공부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94] 불교 신자이긴 하나 그 신앙이 사상에 영향을 준 사실은 없으며, 억불 정책을 쓰라는 상소를 쓴 것으로 보아 불교도이기 이전에 성리학자로 보는게 옳다.[95] 과거 일각에선 이를 놓고 유학자의 관점에 입각한 불교 비판이라 폄하하기도 했으나, 동국역경원 역경의원을 역임한 박건주 능가선연구소장이 저술한 책 '선종사상 왜곡의 역사와 간화선'에서 전모를 밝히고 있다. 보면 간화선 제일주의와 선종 문헌에만 빠져있던 당시 선승들의 문제를 추사가 청나라 옹정제의 교서까지 인용하며(추사 본인은 옹정제의 교서라는 걸 숨겼다) 비판한 것이다.[96] 삼악도의 나머지 두 개인 지옥도와 아귀도. 나머지 아수라도와 인간도, 천상도는 삼선도라 부르며, 삼선도와 삼악도를 묶어서 육도라고 부른다.[97] 패리스 힐튼의 애완 돼지, 빌 클린턴의 애완 고양이, 마이클 잭슨의 애완 침팬지 등.[98] 불교에서는 이를 전생의 선업에 따른 인연의 하나라고 설명한다.[99] 유럽의 축산 관련 과학자들과 생물학자들에 의하면 스트레스를 안 받을수록 고기 육질이 부드러워져서 더욱 맛있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이 때문에 유럽의 축산업자들은 어지간하면 방목을 선호하며 심지어는 농장에 관현악 음악을 틀어서 소나 돼지들이 그걸 감상하게 해주기도 한다.[100] 불교의 대표 경전인 반야심경이 대중적으로 널리 전파되는 계기가 된 영상이다. 이로 인해 불교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쌓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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