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5현제 시대도 단순한 번영기나 황금 시대라고만 볼 수는 없는 문제점이 극대화된 시기이기도 했다. 외부 침입에 의한 약탈과 노예 노동에 상당히 의존하던 로마는 적들이 갈수록 강해지다 보니 더 이상의 확장이 어려운 지경에 이르면서 이민족을 공격하여 노예와 재물을 약탈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고, 길어진 국경을 지키기 위해 군단은 계속 증설되었다. 뿐만 아니라 로마의 재정수입을 뒷받침하던 '가치있는 적들'은 로마가 모두 정복한 뒤였다. 파르티아나 사산조 페르시아는 정복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들었고 성공을 장담할 수도 없었다. 게르만인들은 정복해봐야 큰 이득을 보장할 수 없었다. 다키아 정복은 방어선 단축 효과는 제외하고서라도 엄청난 이익은 가져다 주지 못했고, 그 외에 로마의 적들 중에서 정복할만한 가치가 있는 땅은 없었다.
게다가 각 군단이 한 지역에 오랫동안 주둔하면서 병사들이 비밀리에 현지 여성과 결혼하게 되면서
[4] 군기가 해이해지기 시작했다.
[5] 또한 은의 주요 공급지였던 히스파니아의 은광이 고갈되고,
[6] 외부 원정을 통한 귀금속의 유입이 감소하자 3세기에 들어서면서 금화와 은화의 질이 하락했다.
[7] 이에 따라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지만 폭동을 두려워한 황제들은 서커스와 같은 대량의 자금이 투입되는 공공 행사를 축소하기 힘들었다. 그에 반해 기간 산업인 농업 생산성은 크게 증가하지 않았다.
로마의 팽창이 한계에 다다르면서 노예의 수가 크게 줄어들었다. BCE 1세기에 비해 CE 1~2세기의 노예 가격은 8~10배 가까이 상승했다.
[8] 노예의 절대적인 수량도 문제였지만 노예 사망으로 인한 손실과 위험성이 증가했다. 노예의 출산율은 높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농촌 노예의 성비는 남초 현상이 심각했으며, 노예의 자식을 부양하는 일을 기대하기도 힘들었다. 실제로 CE 1세기 무렵에는 노예 출산에 장려금을 주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고된 노동으로 인한 농촌 노예의 사망률을 따라잡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농촌 자유민 인구 증가율이 높았냐면 그것도 아니었으며 물레방아, 말이 끄는 수확기를 비롯한 몇 가지 기술 혁신도 있었지만 본질적인 농업 생산력 증가와 연결되지 못했다. 특히 후자는 로마가 새로이 정복한 북부 유럽에 적합한 농법이었지만 그 농법들은 매우 한정적인 지방에서만 적용되었으며 대부분은 지중해식 농법에 의존했다.
[9] 이러한 북부 유럽(로마의 기준으로)은 농경에 그렇게 불리한 지역이 아니었으며, 로마인들은 북부 유럽에 적용할 수 있는 농업기술(예컨대 점토질에서 쟁기질 할 수 있는 무거운 쟁기 등)은 마련되어 있었으나 이런 지역에서는 적극적인 개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그러한 기술을 활용할 정도의 인구압이나 경제적 압력이 해당 지역에 가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족이 소유한 대농장에서는 농장의 확대는 더 많은 노예가 필요하다는 의미였으며, 노예를 들여 새로운 땅을 개척할 유인이 줄어들었다. 재정난에 외부 위협이 더해지면서 많은 세금이 부과되기 시작한 시점에서는 자영농들의 인구도 줄어들었다. 먹고 살기 힘든데 아이를 많이 낳을 필요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런 경우 대농장에 예속되어 소작농이 되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즉 노예 노동에 의존하는 로마의 경제는 근본적으로 변화의 필요성이 있었고 로마의 팽창이 끝나고 노예의 수가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활기를 잃어갔으며, 이를 극복할만한 자영농의 육성에도 지지부진했다. 조지프 A. 테인터가 문명의 붕괴(The collapse of complex societies)에서 지적한대로 어느 시점에서 로마는 투자 대비 수익이 점차 줄어드는 결과, 즉 한계수익 저하를 맞게 되었고 이를 농민층에 대한 중과세를 통해 극복하려 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자영농의 소작화나 농민층의 이탈을 불러왔다.
또한 원수정 시대의 로마는 중국과는 달리 체계화된 세금 징수 체제를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속주의 세금 징수는 상당수 민간인 징세업자에 의존하고 있었고, 아우구스투스부터가 재정이 부족하다고 원로원에 징징을 시전한 뒤에야 로마 시민의 상속에 세금을 부과할 수 있었다.
5현제 시대 이후 군단에 대한 봉급 지급이 지연되는 등 각 지역 주둔군의 불만이 커져 갔고, 지방에 대한 제국 수도의 통제력이 약화되어 갔으며, 여러 지방 군단을 통솔하는 상급 지휘관들은 독자적인
화폐를 주조하는 등 황제가 되기 위한 야심을 드러내다가 결국
내전을 반복하면서 로마 제국은 점점 전제군주화가 진행되었다.
이런 상황은 3세기인
군인 황제 시대에 절정에 달했다. 세수가 부족할 때마다 찍어내는 화폐로 인해 발생한
인플레이션 때문에 화폐 체계가 불안해지고
[10][11] 게르만인들이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하고 호전적으로 변해 국경 경비를 뜷고 약탈을 일삼았으며
[12], 동방에서는 로마에 대해 그다지 공격적이지 않았던 파르티아가 멸망하고 강적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등장했는데,
사산 왕조는 무엇보다도 로마 제국의 효율적인 기동 방어 체계를 무력화시켰다는 점에서 로마 제국에게 부담이었다.
[13] 로마 제국의 기동 방어는 게르만족과의
다뉴브 강 전선에 병력을 보충해야 할 경우 일시적으로 파르티아의 국경에 주둔한 군대를 다뉴브 강으로 이동해서 메우고, 그 반대로 동방 전선에서 일시적인 긴장이 흐를 경우엔 파르티아를 압박하기 위해 다뉴브 강의 군대를 잠시 동방 전선으로 차출시키는 시스템이다. 게다가 기동 방어니 뭐니 하기 이전에, 게르만족 집단 자체의 동원 능력, 병사 개인의 전투력, 편제 능력이 갈수록 이전과는 비교가 안되게 상승하고 있었다. 군단을 융통성 있게 운영하는 기동 방어 체계는 리메스로 알려진 방어선과 더불어 로마 제국의 국경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지만 설령 그게 작동했더라도 이전 같은 상황이 되긴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또한 로마에 호전적인 사산 왕조의 등장으로 인해 다뉴브 강에서 게르만족과 싸워야 할 때에도 동방 전선의 군대를 차출하기가 꽤 어려워졌다. 기동 방어가 순조롭지 못하게 되면서 다뉴브 강 전선과 동방 전선을 모두 방어하기 위해서는 결국 군대를 보충해야 되고, 군대를 보충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이 들기 때문에 예산 또한 늘려야 하는데 로마 제국의 수입을 제공하던 노예는 줄어들어
[14] 제국의 재정 상태가 예전 같지 않은 상황 등으로 화폐를 찍어내게 되고, 은화 함량이 감소해서
인플레이션이 계속 일어났다.
게르만족들이 그 이전보다 차원이 다르게 강성해지기 시작한 시기가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대두한 시기와 대강 비슷했고, 로마 제국의 입장에서는 이중으로 군사력 보충과 방어선 유지에 신경써야 했기에 시기적으로 어려웠다. 이렇게 로마 제국 후기에 큰 짐이 된 사산 왕조는 로마 제국이 분단된 이후에도
동로마 제국과 끊임없이 싸웠다. 동로마 제국과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한 국력의 소모는 결국 사산 왕조가 허무하게 이슬람 세력에게 멸망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동로마 제국이
이슬람에 의해 시리아와 이집트를 빼앗기게 된 것도 사산 왕조와의 전쟁이 원인 중 일부였다. 결국 260년에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사산 왕조와의 전투 중 패배하여 사로잡히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그 아들인
갈리에누스 황제 때에는 사태가 더 심각해졌다. 갈리에누스 황제는 그의 치세 대부분을 반란 진압과 국경을 넘어오는 야만족들과의 싸움에 소진했으나 이들을 완전히 압도하지 못하였고 야만족들의 침입은 거세어져만 갔다. 그리고 갈리에누스의 치하 땐 갈리아 지역(지금의 프랑스)과 시리아 지역(지금의 중동)이 로마에서 독립하여 그들의 왕을 옹립하였다.
그래도 로마 제국은 갈리에누스 당시 3분된 상태에서도 분리된 부분은 서로를 암묵적인 협력자로 인식하면서 꽤 자활적으로 야만족을 막아내고 있었고, 후기 로마군의 근간을 결정하는 중요한 정책들은 모두 갈리에누스가 추진한 것들이다. 단, 갈리에누스는 뛰어난 정책입안자이자 교양인이었으나 전술적 지휘 능력은 부하들에게 안심을 줄 정도가 아니어서 아깝게도 암살당하게 된다.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 2세는 갈리에누스가 개혁한 로마군을 가지고 고트족의 대규모 남하를 일망타진함으로써 극적으로 로마를 구한다. 그는 고티쿠스라는 존칭을 얻었지만 전염병에 걸려 사망한다. 클라우디우스 2세의 뒤를 이은
아우렐리아누스는 도나우 강을 넘어
게르만족을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고 도나우 라인을 재정비한다. 그 뒤 갈리아 제국과 팔미라 제국(로마에서 떨어져 나간 두 세력)을 격파하여 이 두 지역을 다시 로마와 합병시킨다. 그리고 그는 화폐 개혁을 시도하고 로마 시에 다시 성벽을 쌓게 하였으며, 종교 개혁을 시도하여 로마의 정국 안정과 재정 확장을 추진한다. 이때 그가 시도한 태양신을 유일신으로 선포하려는 시도는 훗날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써 정국을 안정시킨 것과 유사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이런 개혁을 진행하며 동시에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꺾어 로마 제국의 동부를 안정시키려 하였으나 원인 모를 다툼이 있었던 비서 에로스의 배신으로 암살당한다.
아우렐리아누스의 죽음으로 로마군은 공황 상태에 빠졌고 이에 따라 그들의 고유 권한이나 마찬가지였던 황제 계승을 원로원에 요청하게 된다. 로마 원로원은 신임 황제를 뽑는 데 상당한 혼란을 겪으며 무능함을 보여주었고 간신히
타키투스 황제를 선출하나 70세의 고령이였던 그는 재위한 지 1년 만에 병사하고 만다. 이를 계기로 원로원이 정국을 주도하는 일은 영영 사라지게 된다.
타키투스 황제 이후
프로부스 황제가 뒤를 이었다. 그는 도나우 강과 라인 강 전역에 걸쳐 게르만족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둠으로써 도나우-라인 국경을 재정비한다. 그리고 사산 왕조 원정을 계획하였으나 무더운 여름날 시르미움의 습지를 메꾸는 공사 시찰 도중 프로부스 황제의 엄격한 질책과 가혹한 공사에 불만을 품은 병사들의 폭동에 의해 살해당한다.
아우렐리아누스와 프로부스와 같은 황제들의 연이은 살해는 당시 로마가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카루스 황제가 뒤를 이으나 불우하게도 군용 캠프에서 벼락 맞아 죽고 내분 끝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 자리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