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dth=50%(러시아의 4대 대표 종교:
유대교,
정교회,
이슬람,
불교)
2012년 통계에 따르면,
러시아인들의 종교는 정교회 41%, 무신론 13%, 이슬람 6.5%, 무응답 5.5%로 집계되었다. 정교회 신자들은 주로 슬라브계 러시아인(русские)들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이슬람 신자(
무슬림)들은 북캅카스, 타타르스탄을 중심으로 분포해 있다.
소련 시절 종교를 금지하던 국가적 영향을 받아 무신론 비율이 높은 편이다.
나무파일:external/www.pravmir.com/Vechnaya_Rossiya-600x308.jpg우선
정교회는
비잔티움 제국 선교사들이 전교해, 988년 블라디미르 대공이 통치하는 키예프 러시아
[68]의 국교가 되었으며,
[69][70] 1037부터 1448년까지
콘스탄티노플에서 임명한
그리스인 대주교가 통치했다. 이후 1589년 모스크바의 욥 대주교가 총대주교가 되면서 자치 교회가 되어,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에 이어 제5위의 정교회가 되었다. 현재 모스크바 총대주교는
키릴이다.
수세기 동안,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의 지배적인 종교였다. 특히 1055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완전히 분리되고,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에 이어 1453년 동로마 제국의 수도이자 동방 정교회 세계의 중심지였던 콘스탄티노플마저
무슬림들에게 점령당한 뒤에 동방 정교회에서 가장 유능하다고 추정되는 지도력을 가진 나라는 러시아 뿐이었다. 이 말은 결국 러시아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정교회 지역들이 모두 이슬람의 손에 떨어졌다는 걸 의미한다. 실제로 이 즈음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마저도 당시의 신흥 강자였던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당했다. 이들 정교회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이 패망한 1922년까지 과거 누렸던 종교의 자유를 제한받았다. 반면 이 시기 러시아 정교회는 종교와 예술 등 전 분야에 걸쳐 러시아 문화의 아름다움을 꽃피웠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 말기, 황실과 결탁한 정교회의 부패는 끝을 달리고 있었고, 이러한 모습은 1917년 10월 혁명과 적백내전으로 집권한
소비에트 연방에게 있어 혁파해야 할 대상으로써 간주되었다.
[71] 특히 레닌은 교회가 소유한 재산을 국유화할 것을 지시하며, 이를 거부하는 많은 수의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투옥시키거나 처형했다. 이후 소련 전역에 위치해 있던
성당과
수도원은 다른 용도로 전환되거나 파손되었다. 또한 공개적으로 신앙을 표현하는 사람들은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없었고, 명망 있는 대학에 입학할 수 없었다. 이 시기 러시아 전역에서 8천만 명 이상의 정교회 신자들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공산당은 정교회의 권위를 깨부수기 위해서 정교회 성인들의 무덤을 파헤치기도 했다. 정교회에선
일부 성인들의 유해가 썩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는데, 썩은 성인들의 시체를 보여 주어 대중의 믿음을 공격하려 한 것이다. 근데 수백년 전에 죽은 시신들을 파냈는데도
전혀 썩지 않아 공산당원들이 하얗게 질리고 흥분한 군중들이 공산당원들을 돌림빵
ang?하는 사태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스탈린은
나치 독일의 침략을 막는 데에 종교적 열의를 이용하기 위해
[72] 다시 정교회 신앙을 부활 시켰다. 사실 스탈린은 남몰래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었다고 경호원들과 손녀가 증언했다.
퍽이나다만 스탈린이 인간의 감정을 이용한다는 현실주의적인 목적도 있었다. 스탈린은 자유 진영 사람들이 원칙과 신념에 따라 행동할 것이라 곧이곧대로 믿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인간 행동의 기저를 의심한 치밀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73]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스탈린 치하에서 어느 정도 정교회가 복원되기는 하지만, 다음에 집권하는
흐루쇼프의 탄압을 받았다. 그래도 소련 붕괴 시까지 민중들은 물론 공산당원조차도 정교회 신앙을 비밀리에 이어 갔다. 대표적인 예가 소련 붕괴 후
교밍아웃을 한 정교인임을 드러낸
블라디미르 푸틴. 이 사람은 소련 비밀경찰기관인
KGB의 간부 출신이다!
소련이 붕괴된 이후에는 거의
국교화되어,
보리스 옐친이나 푸틴은 소련 시절에 명목상 공산주의자였음에도 정교회 신자라고 커밍아웃했고, 이후 성찬예배에도 자주 참례했다. 심지어 소련 공산당의 후신인
러시아 연방 공산당 당수인
겐나디 쥬가노프도 교회에 다니며 정교회 성직자들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공산당 붕괴 이후 러시아에서는 아노미 상태에 빠진 국민들이
사이비 종교에 홀리는 예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비로서 정교회를 밀어주는 정책이 강화되었다. 실제로
옴진리교가 한때 러시아에서 크게 세력을 떨쳤으며 러시아인 신자들은
아사하라 쇼코 교주가 체포되자 무력으로 아사하라 교주를 탈환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소비에트 연방 몰락 이후 각 국가별 교회 문제 때문에 대판 다투기도 하였다. 우크라이나 등 구 소련 영토 내의 교회는 각 국가의 교회이나 그 교회 건물의 소유권을 러시아 정교회가 소유하고 있었는데, 각 국가들의 독립 이후 러시아 정교회가 이를 바탕으로 교도권을 주장하면서 독립 교회를 인정하지 않아 갈등을 빚고 있다.
러시아 정교회는 정교회 세계에서 제일 현지화가 많이 진행된 교회이기에 다른 교회 지체와의 차이점이 상당히 많다. 애초에 초대 교회가 동서로 찢어진 사건 때문에 정교회 성직자들은 러시아 지역에 선교할 때는 '닥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일치!'를 외쳤으나, 이번엔 이 동네가 당시
서유럽보다 더한 깡촌이라서.... 결국 원조(?)와 좀 많이 달라지는 걸 피할 수 없었다. 슬라브 토속 신앙과의 융합을 피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실패했다. 게다가
표트르 대제 때 러시아가 서유럽의 문화를 많이 받아들이면서 러시아 정교회에
가톨릭적 색채가 가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도 분쟁이 일어난 이유가 없었고, 또 이 지역 사람들의 신앙이 깊기도 한 데다가 딱히 핵심 교리에서 변질되거나 한 것도 아니라서 교회가 분열해 버리는 사태는 다행히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편 공산당의 탄압이 시작되기 전에 티혼 러시아 총대주교가 해외 러시아 정교회의 설립을 명하면서, 러시아 정교회는 국내파와 해외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후임 총대주교인 세르게이는 교회의 존속을 위한 궁여지책으로 소련 정부에 대한 비판을 중단하고 지지를 표명하는 등 '살아남기 위한 조치'를 이어가지만 실질적인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다. 게다가 소련 치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부의 관리 아래 들어갔고, 이러한 모습에 비판적이었던 해외 러시아 정교회는 우리나라의 남북한 이상으로 갈등과 대립을 겪어 왔다. 러시아에서 정교회가 자유를 얻은 것은 1990년 고르바초프의 주도로 소련 최고회의가 "양심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법"을 의결한 이후부터였다.
나무파일:external/nyblago.com/vosstanovlenie_edinstva_2.jpg모스크바 총대주교청의 러시아 정교회와 해외 러시아 정교회는 100년간의 갈등을 끝내고 2007년 5월 17일 일치를 선언한다. 무려 100년간의 갈등 끝에 이뤄진 일이다. 물론 이런 일이 있기까지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푸틴이 정교회 신자다 보니 직접 나서서 챙기고 다독거려서 상호 양보를 받아내고 일치에 이르도록 하였다고 한다.
한편 한국 정교회 역시 본래 러시아 정교회 소속이었으나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소련이 들어서면서 러시아 정교회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러시아 정교회는 한국 정교회를 미국의 미트로폴리아 관구의 일본 정교회에 맡기려 했으나, 일본 정교회 역시 식민지를 경험한 한국민의 정서에 맞지 않아 갈등하던 중 1955년 12월 25일에 서울 성 니콜라스 성당 신도회의 결의에 따라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관할 하에 들어가게 된다.
이슬람은 러시아에서 2번째로 세력이 강한 종교로, 현 러시아 인구의 5~10% 정도가 무슬림이다. 러시아에서 가장 큰 소수민족인
타타르족(3.9%)이 대표적으로 이슬람을 믿으며, 그 외에 바슈키르인과 북캅카스에 거주하는 민족 대다수도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
러시아에 이슬람이 전파된 것은 7세기 가량으로, 당시 다게스탄에 처음 선교사를 파견, 이후 주변 민족을 중심으로 전파했다. 10세기 가량 볼가 강 유역에 거주하던 불가르 족이 이슬람교를 믿기 시작했으며, 이후 카잔 칸국의 타타르족이 이슬람을 믿기 시작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 시절 중앙정부 차원에서 슬라브계
러시아인들이 믿던 정교회를 강요하면서 이슬람 신자들은 탄압받기도 했다. 특히 캅카스 지역과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이런 탄압이 심해, 억압적인 소수민족 정책과 더불어 1817년부터 1864년까지 지속된 캅카스 전쟁같은 무력저항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10월 혁명 이후 집권한 소련 정부는 러시아 제국 내에서 탄압받던 이슬람 신자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다. 특히 1920년대 중앙아시아에서 실시한 현지화(Коренизация) 정책으로 이들 이슬람 교리가 보장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1930년대 스탈린 시기를 거치면서 이슬람은 다른 종교와 함께 다시 위축되었고, 이후 소련 말기까지 정교회와 같이 국가 관리 아래 놓여있게 되었다. 이후 1991년 소련이 해체, 종교의 자유가 부활하면서 캅카스를 중심으로 이슬람을 믿는 신자 비율이 급격히 증가했다.
소련 해체 이후 지난 20년 동안 종교를 믿는 러시아인은 급증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적어도 "다소" 종교적이라고 응답한 러시아 성인들은 1991년 11%에서 2008년에 54%로 증가했다. 그리고 “신을 믿는다”고 응답한 러시아인들은 같은 기간 동안 38%에서 56%로 상승했다.
러시아의
성탄절이 12월 25일이 아니고
1월 7일인 이유도 정교회의 세가 워낙에 강한 영향이다. 이에 따라 러시아 정부는 아예 양력설과 크리스마스를 연계시켜 신년 연휴를 만들었다.
가톨릭,
개신교,
유대교,
불교,
힌두교,
도교를 믿는 경우도 있는데 특히, 불교는 부랴트족, 칼미크족들도 믿지만, 일부 러시아인들 중에도 불교로 개종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불교 신자는 대부분 투바 공화국과 자바이칼 변강주, 부랴티야 공화국, 이르쿠츠크 주 등 시베리아에 산다. 불교 공동체와 사원들은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도 있지만, 러시아를 여행하면서 불교의 전통과 역사, 정신을 더 깊이 알고 싶다면 시베리아에 가봐야만 한다. 힌두교를 믿는 비율도 늘어나고 있다. 그 외 러시아 소수 민족들을 중심으로 원시 신앙을 믿는 경우도 있다.
요즘에는
신이교주의자들이
슬라브 신화나 기타 다른 토속신앙을 복원하려고 하지만 규모도 작고 기성종교 집단에게 탄압을 받거나, 이러한 민족 신앙이
인종주의와 결합하여
네오나치 사상에 기반이 되는 경우가 상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