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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캅카스 산맥 이북의 일부 지역만이 동유럽에 속해있다.
2우랄 강 이서의 일부 지역만이 동유럽에 속해있다.

우크라이나
Україна
국기
면적
603,628km² (크림 반도 제외시 582,628km²)
인구
42,488,512명(2016)[1]
수도
공용어
민족구성
우크라이나인 77.8%, 러시아인 17.3%, 크림 타타르인 0.5%
정치체제
대통령
페트로 포로셴코(Петро Порошенко)
임기
총리
볼로디미르 흐로이스만(Володимир Гройсман)
임기
통화
1인당 GDP
명목 2,052$(2016), PPP 8,278$(2015년 추정치)
국가
설립
소련으로부터 분리 독립
1991년 12월 1일
분쟁지역
우크라이나어: Україна 우끄라이나
러시아어: Украи́на 우끄라이나
타타르어: Украина 우크라이나
영어: Ukraine 유크레인(/juːˈkreɪn/)
라틴어: Ucraina 우크라이나
한국어: 우크라이나
한자: 烏克蘭 오극란

1. 개요2. 역사3. 기후4. 경제5. 지리6. 사회
6.1. 인구6.2. 종교6.3. 언어
7. 전치사 논쟁8. '미녀의 나라'와 성 상품화
8.1. 에이즈 문제
9. 군사
9.1. 총기 수출 강국(?)
10. 정치
10.1. 역대 지도자들10.2. 2004년 오렌지 혁명10.3. 유로마이단
11. 외교 관계
11.1. 유럽연합 가입을 위한 행보11.2. 러시아와의 관계11.3. 대한관계
12. 문화
12.1. 축구12.2. 그 외 스포츠12.3. e스포츠12.4. 기타
13. 우크라이나 국적, 출신 캐릭터14. 우크라이나 출신 인물15. 기타

1. 개요[편집]

동유럽에 있는 나라. 러시아와 동쪽 국경을, 폴란드, 헝가리, 몰도바, 루마니아와 서쪽 국경을, 벨라루스와 북쪽 국경을 접하고 있다.

우크라이나(Україна)라는 국가명은 У + країна의 합성어로 우리의 땅 또는 내륙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일부로 여겨지기도 하며 지금도 러시아의 변방쯤으로 인식하는 사람이 많다. 이들은 우크라이나어/러시아어인 країна/край가 갖고 있는 뜻 중 하나인[2] 변방, 끝자락 등의 의미로부터 변방에 있는 나라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물론 우크라이나인에게 이런 말을 하면 기분 나빠한다. 우크라이나라는 이름의 뜻은 폴란드어로 '주변 땅'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는데 실제로 서부 우크라이나는 대부분의 역사 동안 폴란드 땅이었다.

수도는 키이우(Київ, Kiev). 우크라이나어 발음으론 키이우(/ˈkɪjiw/)라고 읽는다. 역사 시간에 러시아의 모태 국가인 키예프 대공국(키예프 루시)으로 유명하지만, 키예프 공국 전체 영토로 치면 상당히 남쪽에 있다. 또 그 바탕 민족이 바이킹인와 슬라브인이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결국 이 키예프 공국을 공통조상으로 삼고 있다. 때문에 예전에는 우크라이나인들 본인들을 우크라이나 루스(Україна русь)로 부르기도 했다.

면적은 남한의 6배 크기이며 산지가 별로 없고 토질이 매우 좋아 국토 대부분이 비료가 필요없는 비옥한 흑토인 체르노젬으로 이루어져 옛날부터 세계적인 곡창지대로 유명했다. 세계 최대의 식량수출국이었던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독보적이었고, 2011년에는 곡물 수출량이 세계 3위에 달했을 정도. 이렇게 농사가 잘 되는 땅에서 그 유명한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발생했으니 주민들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반러시아 감정역시 여기에 근거를 갖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용어는 우크라이나어이지만 러시아어도 널리 사용된다. 특히 동부와 남부에서 러시아어가 많이 사용된다. 서부는 우크라이나어만 사용되는 비율이 높고, 가운데쯤에 있는 수도 키이우와 중부지역은 반반 경계선 느낌이다.

1인당 GDP는 2,052$로 옆나라 몰도바 다음으로 유럽 제2의 빈국이다. 물론 여기에는 지하경제가 빠져있어[3] 실제 1인당 GDP는 이보다는 많은 편이다. 하지만 내전을 겪으면서 화폐가치와 경제가 붕괴하면서[4] 2016년 2월 기준 월평균 급여는 약 165달러로 떨어젔다고 한다.[5] 최저임금은 1378흐리브냐로 약 50달러 수준이다. 주급이 아니다, 월급이다.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의 장바구니 물가는 대한민국의 1/4 ~ 1/3 수준이다. 다만 우크라이나산 식료품에 한한 이야기이며 공산품의 경우 수입품이 대부분이라 대체로 가격이 높은 편이다. 특히 서유럽이나 미국에서 수입한 공산품들은 환율에 따라 변동이 심하며 대한민국보다 비싼 경우도 있다. 또한 유럽이 대체로 다 그렇듯 마트의 식재료는 매우 싸지만 식당에서 하는 외식은 상대적으로 비싸다. 이렇게 물가가 싼 우크라이나에서도 전통 요리 같은 걸 먹으려면 한 끼 최소 5천원 정도는 써야 한다.

사실 이 나라는 경제적 잠재력이 충분하다. 비옥한 땅과 많은 고학력 인재들을 보유하였으며, 소련 시대에는 각종 첨단 공업시설이 많이 위치하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소련이 해체될 당시에는 가장 발전 가능성이 높은 나라로 평가되곤 했다. 그런데 그걸 제대로 써먹질 못해서 문제지.

크림 반도 최남단 항구도시 얄타에서 얄타회담이 열렸다.

2. 역사[편집]

바이킹족과 슬라브인들이 세운 첫 국가인 키예프 공국이 우크라이나의 시초다. 이 키예프 공국은 러시아의 시초이기도 하므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본래 한 뿌리다. 당시 세계구급 깡패였던 몽골(킵차크 한국)의 습격 때문에 키예프 공국이 완전히 멸망하자, 이 지역은 몽골과 투르크계 타타르인의 지배가 계속 이어졌다. 킵차크 칸국이 와해되면서 크림 반도를 위시로한 우크라이나 남부 일대에 타타르인들의 크림 칸국이 독립했고, 크림 칸국은 오스만 제국의 번국이라서 무슬림 몽골-투르크(타타르) 세력이 계속 지배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남부는 키예프 공국 이후 계속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았고, 그곳에 살고 있던 우크라이나인의 슬라브족 국가는 자라나지 못했다. 그러나 멀찍이 북쪽인 모스크바 지역은 투르크 세력과 멀리 떨어져 있었기 대문에 독자적으로 성장하여 러시아가 된다.

한편 크림 칸국의 지배에 든 남부와 달리 서부 및 중부 우크라이나는 킵차크 칸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후 여러개의 카자크 국가들이 성립했지만 얼마 못 가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먹혔고, 리투아니아는 폴란드와 동군연합을 이루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로 합체하여 한동안 동유럽의 깡패로 군림했다. 비록 이단인 가톨릭이 국교인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리투아니아였지만 우크라이나의 카자크들은 반 독립적인 자치를 누리고 가톨릭 지배자들에게 충성을 바쳤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가톨릭 신앙을 강요하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행보와 대귀족 슐라흐타들의 폭정이 이어지자 1648년 카자크 헤트만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이른바 대홍수라는 대재앙이 발생하게 되었다. 대홍수 와중에 수세에 몰린 흐멜니츠키가 신종을 조건으로 지원을 요청하자 우크라이나의 동포들을 해방시킬 기회로 본 러시아가 개입하고 뭐 좀 따먹을 게 없나 싶던 스웨덴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크림 칸국, 몰다비아, 트란실바니아 등이 개입하면서 스케일이 몇 배로 커져 한바탕 개판이 벌어진 끝에 우크라이나는 드네프르 강을 경계로 서쪽은 폴란드-리투아니아, 동쪽은 러시아가 지배하게 되었다. 우크라이나의 완전 장악 및 흑해 진출을 노린 러시아는 이후 크림 반도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남부를 노리고 크림 칸국, 그리고 그 종주국 오스만 제국과 10 여 번에 걸친 전쟁을 벌여, 1783년 크림 칸국을 합병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서 동부 우크라이나는 완전히 러시아의 손아귀에 들어왔고 가톨릭 이단 놈들과 이교도 타타르 놈들의 지배에서 해방시켜 준 러시아를 동부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러시아는 이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같이 3차례에 걸쳐서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분할하면서 서부 우크라이나까지 차지했다[6].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제국의 통치 아래에서 하나로 모였지만, 이미 동부와 서부 우크라이나는 같은 민족임에도 수백 년간 따로 살면서 종교적-정서적으로 매우 이질적인 존재였다. 동부 우크라이나는 투르크의 압제를 러시아가 해방시켜 자신을 러시아의 한 부분으로 인식한 반면, 서부 우크라이나는 폴란드 지배를 받으며 어느 만큼 서방화해 러시아를 이질적으로 생각했다.[7] 16세기 이후 형식적으로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나 제정 러시아의 지배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귀족화된 토착 카자크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제정 러시아의 간섭을 많이 받았다.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이 지역은 잠시 독일 세력권에 할양되었지만 곧 독일 제국이 패망한 뒤 이 지역은 무주공산이어서, 볼셰비키·멘셰비키·사회혁명당·민족주의자·극우주의자·무정부주의자들 제각각 무장하여 쟁투를 벌였다. 뜬금없게도 거의 비슷한 시기 우크라이나에서 멀리 떨어진 러시아 극동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이 자신들 관할 극동을 우크라이나국의 일부라고 선언하기도 하였다. 자세한 건 젤레나 우크라이나 문서 참고.

조약 이후 우크라이나는 (동)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과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으로 (공산국가는 아니다!) 각각 분리독립을 이루고, 현 우크라이나 동부지방은 적백내전에서 백러시아에 가담했다. 동서 우크라이나는 곧바로 1920년에 통일을 선언하나, 막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폴란드 제2공화국은 친폴란드 우크라이나인들(주로 서부인)의 요청(+자국의 팽창주의)으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갓 건국된 폴란드 입장에서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로부터 독립해야 자국의 독립을 보장받는다고 생각했다. 이에 우크라이나의 공산주의자들이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당시 소비에트 연방은 없었다)에 도움을 청하면서 공산 러시아와 폴란드가 맞붙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에서 러시아는 키이우까지 들어온 폴란드군을 잘 물리쳐 이후 바르샤바까지 몰아붙였다가 선봉대가 두드려맞아 전멸하는 참패를 당하고 이후 밀려 1921년 리가 조약을 맺으면서 서부 우크라이나를 폴란드에 할양, 이곳은 다시 폴란드의 지배를 받았다. 남은 동부 우크라이나는 소련에 가입하여 한 공화국이 되었다. 이 복잡한 과정은 이 링크를 참고.

러시아에 가까웠던 동부 우크라이나에서도 민족주의자들의 독립 움직임이 있었지만, 이들은 소련에게 철저히 탄압당했다. 당시 소련 국방장관인 레프 트로츠키는 우크라이나의 오데사에서 자란 유대인이었는데,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을 철저히 짓밟으면서 "우크라이나어는 러시아어의 사투리에 불과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렇듯 러시아인들은 전통적으로 우크라이나를 다른 나라가 아닌 그저 자국 변방의 하나 생명선?라고 생각한다. 현재의 푸틴도 마찬가지. 애초에 이쪽에서는 역사적으로 근대 이전에 우크라이나 지방을 부르는 이름이 '소 러시아'라는 뜻인 말로로씨야(Малороссия)였다. 20세기 이전에는 심지어 우크라이나인들 본인들도 별로 기분나쁘게 생각하지 않고 종종 우크라이나 일대, 자신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소 러시아'라고 했으나, 혁명, 내전, 독재, 탄압, 집단 아사, 학살의 피비린내나는 20세기의 상처 때문에 현대에 우크라이나 사람 앞에서 '소 러시아인' 따위 개드립 치다가는 종로에서 북한의 대남도발사 때 인공기 들고 응원하는 것만큼 빨리 다음날의 해를 못 보게 될 것이다.

이런 우크라이나 탄압은 트로츠키와는 앙숙이었던 이오시프 스탈린 치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스탈린이 추진한 집단농장화에서 큰 애로사항이 꽃피어서(...) 초절정 아귀지옥으로 바뀌어 수백만명이 굶어죽은 아픈 역사가 있다. 바로 1932년~1933년우크라이나 대기근이다.[8] 때문에 미국인들이 가진 대공황에 건 뿌리깊은 공포 이상으로 우크라이나가 기근에의 공포심은 크다. 이는 러시아에 건 반감의 연원이기도 하다. 다만 동부 우크라이나는 제정러시아 시절부터 석탄의 주산지였는데, 스탈린의 무자비한 공업화 몰빵으로 엄청나게 산업화했다. 그러면서 이곳에 러시아인 인력이 다수가 이주해와서 살았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지낸 니키타 흐루쇼프도 바로 조상이 이렇게 우크라이나에 이주해 와서 태어난 러시아인 광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독소 불가침조약에 따른 폴란드 분할 당시, 폴란드에 속하던 서우크라이나 지역은 소련이 합병한다. 소련은 서부 우크라이나를 자국의 우크라이나 사회주의공화국에 편입시키면서 1921년 빼앗긴 영토를 수복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물론 서부인들은 이런 소련의 지배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독소전쟁을 개전하고 우크라이나 지역을 독일군이 점령한 초기에 이들을 해방자로 환영했지만, 수탈과 기아, 민간인 학살 등이 나오자 반독으로 돌아선다. 전쟁 기간 중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기로 독일과 러시아 양쪽에게 우크라이나 민간인들이 학살당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때문에 전사자 포함, 약 700만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입었다.[9] 안습.

한편 서부의 우크라이나인들은 2차 대전 당시에 나치 독일에 협력하여 유대인들과 폴란드인들을 상대로 제노사이드를 벌였다. 폴란드의 경우는 민족적 탄압을 받고 있었고, 경제의 대지분을 차지하고 있던 유대인들에 대한 불만도 컸다. 이후 독소전쟁으로 독일이 전전의 폴란드 동부 영토로 밀고 들어오자 해당 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은 이에 협력하여 해당 지역의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데에 적극 동참했으며(...)[10] 이후 유대인들이 싸그리 절멸당한 후에는 1943년 봄부터 600년 가럄 함께 살아오던 이웃 폴란드 농민들을 상대로 대량 학살을 벌였다(...) 여기에다가 전후 서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전전에 40%에 이르던 폴란드인이 싸그리 현 폴란드 영내로 이주되면서 결과적으로 서부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 전체 국토에서도 우크라이나인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 되었다.

2차 대전 뒤 연합국의 대지분을 보유한 소련은 폴란드의 항의에도 1939년 합병한 서부 우크라이나 영토를 확정했고, 대신 폴란드는 독일의 동부 영토를 할양받았다. 서부 우크라이나에 살던 사람들은 원래부터 대부분 우크라이나인이었기 때문에 폴란드에게 별로 명분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부 우크라이나인들이 소련의 지배를 달가워한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이런 동부-서부의 다른 역사는 이후 큰 갈등의 씨앗이 된다.

특히 우크라이나의 서남부 5개 주(리비우[11][12], 테르노필, 이바노프란키브스크[13], 자카르파티야, 체르노브치)는 1939년, 또는 1945년까지 러시아/소련 땅이었던 적이 단 1번도 없었다! 이들 지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을[14] 거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지배했고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의 지배를 받다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완전히 소련 영토로 들어왔다. 이들에게 러시아는 철저히 외부세력일 뿐이다.

반대로 몰도바 남쪽의 해안지대인 부자크는 이 때부터 우크라이나의 영역이 되었다.[15]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1954년에 우크라이나 출신자인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기에 소련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크림 반도를 러시아에게 받는다. 크림 반도의 인구는 110만명을 차지한다.[16] 이후 1991년에 소련에서 8월 쿠데타가 실패한 틈을 타 독립에 성공한다.

우크라이나의 민족적 개념은 소련에 맞서고 탄압받으면서 나왔으나, 사실상 2개의 민족에 가까울 만큼 지역별로 러시아에 입장이 다르다. 키이우가 있는 내륙의 서부 우크라이나와 공업도시 하르키브(제2도시, 러시아어 하르코프)와 항구도시 오데사(제3도시), 크림 반도 등이 속한 동부 우크라이나는 지지정당부터 민족, 언어 구성까지 제법 다르다. 그래서 서부 지방은 러시아에 반감이 상당히 심한 반면, 러시아와 붙어있는 동부 일부 지방은 러시아어를 많이 쓰고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는 편이다.

우크라이나의 민족 구성을 보면 크림 반도만이 유일하게 러시아계가 50%를 넘는 지역(58%)이고 나머지 지역은 우크라이나계가 다수다. 2014년 독립운동이 일어났던 우크라니아 동부의 도시 하르키우도 우크라이나계 48% 대 러시아계 40%로 반반이다. 물론 러시아어가 더 우세한 지역들이 동부에 꽤 있지만 그건 우크라이나계 가운데 러시아어 사용 인구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친러 성향의 우크라이나계 우크라이나인 일부나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 일부는 자신을 러시아인이라고 생각한다.

서쪽에 있는 독일, 폴란드와 일단은 친하게 지내는 편이지만, 역사적으로 서부를 집어삼키던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서부를 잃어버린 자기들 땅이라고 여기기에 우크라이나에서 폴란드를 견제하고 있다. 대신에 폴란드는 이미 소련 지배에서 벗어난 우크라이나를 세계에서 최초로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이후 지금의 폴란드-우크라이나 국경을 인정했기에 여기는 동부 우크라이나와 크림 반도보다는 갈등의 여지가 적은 편이다. 무엇보다도 전후에 서우크라이나 지방에 거주하던 폴란드인들이 죄다 현 폴란드 영내로 강제이주되었기에 동부 우크라이나나 크림 반도처럼 민족자결주의 같은 드립을 치며 반란을 일으킬 껀덕지도 없다(...).

독일 또한 악랄한 소련폴란드로부터 우크라이나를 해방시켜준 구원자들인줄 알았더니 소련놈들보다 더한 학살을 저지르고 간 일이 있어 좋게 보지는 않는다. 북쪽에 있는 벨라루스와는 사이가 나쁜데 벨라루스가 과거 키예프 공국으로 같은 동족이면서도 여긴 러시아 지배를 받아들인 편이기 때문. 둘이 과거 키예프 공국 이야길 하며 서로를 옛 우리땅이라 까고, 벨라루스는 친러시아(친러) 성향이니 우크라이나와 사이가 나쁘다. 한편 우크라이나는 구 소련 시절 벨라루스에 부득이하게 체르노빌산 낙진을 선물해줌으로써 빅엿을 먹여준 적이 있다.

2010년대 들어서의 역사는 아래 문서 참조.

3. 기후[편집]

전체적으로 대륙성 기후를 보인다. 하지만 남부 크림 반도는 지중해성 온대 기후를 나타낸다.

4. 경제[편집]


우크라이나는 경제적으로 비옥한 토지를 가진 농업과 소련 시절 지어진 대규모 중공업단지나 제철소, 탄광을 가지고 있어 경제가 발전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출처 하지만 이웃 슬라브 3국 중에서도 경제발전이 많이 뒤처지는 편이다.[17] 여기에는 여러 정치적 문제가 크다는 것이 중론이다.

1991년 독립 이후 다른 소련 국가와 같이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체제 변환을 거치는 과정에서 초인플레이션을 겪었다. 특히 초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우크라이나 국립은행은 1996년 하르보바네츠(карбованець)를 오늘날 쓰이는 흐리브냐(гривня)로 교체했다. 하지만 1998년 러시아의 모라토리움 선언 등으로 인해 2000년 초반까지 통화 불안정을 겪었다.

이후 2001년부터 경기가 점차 회복세로 돌아서 2007년 통계에 의하면, 2001년 빈곤율 32%에서 2005년 8%로 급감했다. 출처 (세계은행 보고서) 특히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수출량이 50% 증가하면서 경제 성장의 혜택을 누렸다. 하지만 2014년 크림 위기 이후 주요 교역국이었던 러시아와 무역이 중단되면서 GDP에서 약 10.4% 정도의 타격을 받았다. 출처(UA Today) 2016년 5월에는 IMF가 우크라이나의 부패 청산과 경제 개혁을 조건으로 하여 1,750만 달러 가량의 대출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출처 (로이터)

사실 우크라이나 경제 문제는 정치 문제로도 자주 연결이 되는데, 농업이 주산업인 서부 지방은 소련 시절 농민들을 탄압해 온 역사(라스쿨라치바니예, 홀로도모르 참고) 때문에 러시아에 반감이 상당히 심한 반면, 공업이 주산업인 동부 지방은 러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특히 소련 시절 동부 우크라이나 공업지대는 소련 중공업/군수공업의 한 축을 이루었다. 소련 주요 우주발사체 로켓을 설계한 하르트론 설계국, R-36 미사일(NATO명 SS-18 사탄)을 제작한 유즈노예 설계국, An-225로 유명한 안토노프 설계국과 T-64를 제작한 하르코프 공장이 전부 우크라이나에 위치해 있었다. 이 때문에 소련 해체 이후에도 한동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 많은 량의 기계류를 수입했었다.
우크라이나는 지하 경제 규모가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체 GDP의 최소 50% 이상을 차지한다는것이 중론이다. 덕택에 공식적인 소득 수준만 본다면 우크라이나가 매우 가난한 국가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보다는 잘 사는 편이다. 물론 그렇다 해도 우크라이나의 생활수준은 동유럽을 기준으로 봐도 매우 뒤떨어지는 편이라 몰도바에 이어 유럽 최빈국 자리를 지키고 있다. 폴란드나 러시아 등지로 일하러 나가는 노동자들도 상당한 편이다. 폴란드나 러시아에서는 우크라이나어 특유의 말투를 희화화하며 흉내내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이들을 무시하고 있다.

5. 지리[편집]

흑해 연안에 있는 오데사(Одеса) 항구는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감독의 유명한 영화 '전함 포템킨(Броненосец «Потёмкин»)'의 '오데사 계단 학살 장면'이 찍힌 곳으로 유명하고[18], 건담 시리즈의 '오데사 공방전'이 일어난 곳이며, 또한 세계에서 가장 긴 인공터널군인 '오데사 카타콤베'가 있는 곳이다. 길이만 2,500km 이상이라고... 근데 이 기록은 중국 서부 핵미사일기지인 '지하 만리장성'에 의해 깨진 듯하다. 무려 5,000km 이상의 길이라고.

저 위 지도에 보이는 세바스토폴항은 러시아 흑해함대의 모항이다.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함대보고 "방 빼!"라면서 한동안 키배를 벌이다가 구 소련의 수상함을 일부 양도받는 조건으로 2014년까지 임대시기를 연장해줬는데, 친러시아 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2042년까지 대여기간이 늘어났다가, 2014년 3월에 도시 전체가 러시아로 넘어가 버렸다.

시간대가 비슷한 경도에 위치한 벨라루스와 러시아보다 빠른 시간대를 쓴다. 그래서 러시아 서부 지역에서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으로 가면 시간대가 더 늦어져야 정상인데 오히려 두 시간이나 빨라지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런데 이는 러시아와 벨라루스의 시간대가 경도에 비해 이상하게 느려서 그런 거지 우크라이나는 오히려 실제 시간에 가깝다.

주변에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등 다양한 국가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러시아의 천연가스 파이프가 이 나라를 지나고 있다. 때문에 러시아가 가스잠가라 마법을 부릴 경우 크게 피해보는 나라 중 하나. 현재는 유럽 연합 국가들 투자로 새로운 나부코 파이프라인을 부설중이...었다.

지도상의 북쪽, 벨라루스와의 접경지대에는 그 악명높은 체르노빌(Чернобыль)이 있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그 체르노빌이다. 참고로 체르노빌은 우크라이나어로는 초르노빌(Чорнобиль)이라 불린다.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체르노빌 사고에 대해 좀더 이야기 하자면, 1986년 4월 원전 폭발당시 하마터면 인구 200만의 수도 키이우를 고스란히 버려야 할 정도의 헬게이트가 열릴 뻔했다. 체르노빌에서 겨우 100km 남짓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다, 자칫 증기폭발로 원전 바닥이 완전히 녹아버리면 키이우의 상수원인 드네프르강은 그대로 오염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련 잠수부들의 목숨을 바친 희생으로 원전의 냉각수를 모두 빼낸 후 극적으로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헬게이트는 당시 풍향 때문에 낙진을 고스란히 맞은 벨라루스에서 열렸다...

동부 지역은 친러적이고, 서부 지역은 반러적인 성향이 강하다. 2010년 대선에서 당선된 친러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후보는 동부의 도네츠크 주에서 무려 90.44%를 득표했으나 서부의 이바노-프란키우시크 주에서는 겨우 7.02%를 득표했다.

위치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서방과 러시아가 이 나라를 놓고 정치적 패권 싸움을 하고 있다. NATO가 발트 지역과 남, 서동부 일대를 에워싼 지금 우크라이나까지 NATO 손에 넘어가면 러시아는 서방의 MD에 삼면의 영토가 노출된다.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NATO에 가입하려는 걸 수단방법 안 가리고 막으려 하고 있다.

6. 사회[편집]

2014년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종합 순위 6위를 차지했다. 사실 옛 소련 이래 수많은 인재들이 유입된 곳이라 쓸만한 인재는 꽤 많은 나라다. 다만 그걸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과 엘리트층의 수준이 너무 낮은 게 문제다.참고

2009년 11월 17일 인플루엔자 A보다 치사율이 높고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가 출현하여 현재까지 키이우와 르비프 시 지역에 약 100만명 감염에 약 2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감기 바이러스와 캘리포니아 인플루엔자가 합쳐진 변종 바이러스로 밝혀졌다. 그러나 WHO 측에서는 변종이라는 증거가 없다며 변종설을 일단 부정 중. 그러나 과거 인플루엔자 A가 창궐할 때 멕시코가 각종 삽질로 인해 바이러스를 전 세계에 퍼뜨리는 공을 세웠던 데 반해 우크라이나 정부는 국경 일부를 봉쇄하는 등 신종 바이러스 출현에 대처를 잘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우크라이나는 유럽 대륙에서도 이동 통신 서비스의 발전 속도가 상당히 느린 편에 속한다. 이동통신 주파수를 한동안 군용으로 묶어 놓는 바람에, WCDMA 도입도 국제 평균보다 상당히 늦은 2011년에서야 시작되었다. 그것도 기존 통신사들이 3G를 쓸 수 있게 해 준 형태가 아니라, 3G 전용 통신사를 따로 하나 만들고 기존 통신사들은 로밍을 통해서 3G 망을 이용하였고, 3G 전용 통신사도 2G 망을 이용하려면 역시 로밍을 통해야 했다. 물론 이 과정에 덤으로 돈은 돈대로 나가고 커버리지는 커버리지대로 최악이 되고... 이 와중에 유로마이단 덕분에 크림 반도나 동부에 있었던 이동통신 시설들이 뜯겨 나간 건 덤이다. 결국 2015년에 와서야 군용으로 묶어 두었던 이동통신 주파수가 해금되면서 기존 통신사들도 자체적인 3G 망을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들이 LTE를 상용화할 때에도 여기는 겨우 3G가 깔리기 시작하고 있다.

6.1. 인구[편집]

인구 면에서, 아니 생존 자체에서 비참한 경험을 했던 나라.[19] 우선 적백내전이 끝나고 겨우 독립을 하나 싶더니 폴란드소비에트 러시아가 쳐들어와 땅을 낼름해버렸다. 그냥 얌전히 쳐들어왔다면 모를까 양측에서 저지른 '정리 작업'으로 인해 이 과정에서 엄청난 양민들이 죽어나갔다. 그러나 이는 애교로 보일 정도의 대사건이 터졌으니, 1930년대의 우크라이나 대기근으로 수백만에 달하는 엄청난 사람들이 죽은 것이다. 1933년의 평균 수명이 남자 7세, 여자 10세라는 정말 말도 안되는 수준이었으니 그 참상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기근을 넘겼나 했더니 이번에는 전쟁.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그 통에 엄청난 사람이 죽었다. 특히 이번에 쳐들어 온건 폴란드와 소련보다 몇 배는 악랄한 나치 독일. 이들의 학살 스케일은 그야말로 엄청나서, 시체로 이루어진 퇴적층이 아직까지도 우크라이나에서 종종 발견될 정도이다. 이 때문에 현지 거주 유대인을 포함하여 7백만명이 전쟁 중에 죽었는데, 이는 당시 인구수의 1/6 이 넘는 숫자다. 그로 인해 1941년~1944년의 기대수명은 남자 15세, 여자 25세에 그쳤다. 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전후 베이비붐[20]크림반도 획득으로 1950년대 중후반에 대기근과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인구손실을 만회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에 출산율이 1.9-2.1명 정도의 수준을 꾸준히 유지하면서 인구성장은 점차 주춤해졌다. 소련 붕괴 직후의 인구는 5,200만을 찍었으나,[21] 소련 붕괴 이후 출산율의 급속한 감소와 해외로의 이민문제까지 겹쳐지면서 인구의 감소가 시작되더니 1999년에 인구 5000만 선이 붕괴되었고 이후로도 인구가 쭉 감소하고 있는 형편이다.

인구는 2013년 1월 기준 4,547만 명이며 1992년에 5200만명을 넘긴 이래 급격한 감소추세에 있다. 이는 소련붕괴 이후 크게 낮아진 출산율(천 명당 11.4명. 그래도 이건 2000년대 후반 이후 많이 회복된거다.)과 높은 사망률(영아 제외시 천 명당 16.1명)을 기록하는 인구구조를 띄기 때문으로, 영아 사망률(천 명당 8.4명)이 상당히 높다. 출산율 자체는 이미 2001년(1.08명)에 저점을 찍었고, 이후에는 출산율이 1.5명대까지 상승하였으며 이에 따라 출생아수도 30만명대 후반 정도에서 50만명선까지 올랐으나(단, 2014년부터는 크림반도 분리의 영향으로 다시 40만선으로 떨어졌다) 사망률이 위낙에 높다보니 현재까지도 인구 감소가 지속되고 있는 중이다. 그렇지만 고령화가 그만큼 빠르게 진행되고 있지는 않은데, 이는 평균 수명이 워낙 짧기 때문이다(...). 사실 이건 더 빠르게 인구가 줄어든다는 이야기므로 좋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각 주별로 따로 똑 떼어놓고 보면 다르지만 전반적으로 보았을때는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은 농촌지역이 많아서 비교적 출산율이 높은 편이고, 도시화가 이루어진 동부 우크라이나 지역의 출산율이 낮은 편이다.

이민 나가는 사람도 많고 이민 들어오는 사람도 많다. 1991년~2004년 동안 220만 명이 우크라이나로 이민을 왔고(주로 구소련권의 우크라이나계를 중심으로), 250만 명이 이민을 떠났다. 이민온 사람이 많다 보니 우크라이나 전체 인구의 14.7%가 이민자 출신이다. 그리고 2014년 이후의 혼란으로 백만 단위의 우크라이나 피난민들이 러시아로 이주했다고 한다.

평균 수명이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도 정체세다. 술을 많이 마셔 알코올 중독 문제도 심각한데다가 환경오염 문제까지 겹쳤다. 러시아와는 다르게 소련 붕괴 이후에 평균수명이 대폭 감소하는 참사까지 벌어지지는 않았지만[22] 이후로도 평균수명이 크게 연장되지 않아서 현재까지도 70대 초반에 머무르고 있으며 덕택에 2012년 기준 세계 제2위의 사망률을 기록하고 있다. 천명당 15.76명이 사망.

총 인구의 77.8%를 차지하는 우크라이나인 외에 러시아인이 17.3% 되는데 이들은 주로 동부와 남부에 거주한다. 서부에서는 우크라이나어가 거의 단독으로 사용되며 수도 키이우를 비롯한 중부에서는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가 둘 다 사용된다. 나머지 4.9%의 소수민족은 0.8%의 몰도바계-루마니아계, 0.6%의 벨라루스계, 0.5%의 크림 타타르계, 기타 불가리아계, 헝가리계, 폴란드계, 유대계, 아르메니아계 등이다.

세계에서 일본에 이어 인구 감소가 가장 빠른 나라 2위로 꼽혔다. 대책 마련이 시급하지만 나라가 내전 중이라 어려울 것으로 평가된다.

2015년 통계 기준으로 정세 불안에 의해 출산율이 급락해서 1.31로 더 떨어진 데다가, 사망률까지 올라가면서 평균 수명도 오히려 더 짧아지고 말았다. 인구학적으로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다.

현재 4200만명대로 감소했지만 감소세가 오히려 더욱 더 빨라지고 있다고 한다.

6.2. 종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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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는 동구권 유럽이 대부분 그렇듯 정교회 문화권의 국가다.

2004년을 기준으로 하여 우크라이나 정교회(키이우 총대주교청) 39.8%, 우크라이나 정교회(모스크바 총대주교청) 29.4%,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 14.1%, 우크라이나 독립 정교회 2.8%, 기타 가톨릭, 개신교, 유대교, 이슬람 등이 4.9%이고 무종교 인구는 9%다.

동방 정교회 내에서 교회법상 위치를 합법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유일한 교회는 우크라이나 정교회(모스크바 총대주교청)뿐이다. 다만 설문조사의 주체에 따라 우크라이나 정교회(모스크바 총대주교청)이 더 우세한지, 아니면 그 라이벌인 우크라이나 정교회(키이우 총대주교청)이 우세한지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정교회 신자들 상당수는 자신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 특별히 구별하지 않으며, 참석하는 성당의 소속도 그다지 의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크게 따지면 중부와 동부를 중심으로 정교회 인구가 72%로 절대 다수이고, 여기에 서부에 주로 분포하는 그리스 가톨릭교회가 14.1% 더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상당수 정교회가 실질적 총대주교 관할이 없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6.3. 언어[편집]

  • 범례
80%
우크라이나어
러시아어
루마니아어 / 몰도바어
크림 타타르어
헝가리어
불가리아어
가가우즈어[23]
폴란드어
알바니아어
체르노빌 피해지역
공용어는 우크라이나어(전체 우크라이나 인구의 67% 사용). 동슬라브어파러시아어와 매우 밀접하다. 간단히 말해 폴란드어와 러시아어를 반반 섞으면 우크라이나어카더라. 수도인 키이우에서는 오히려 러시아어가 더 널리 쓰인다 한다. 가까운 언어라서 그런지 우크라이나어로 말걸면 러시아어로 대답하고 그러는 일도 흔하다. 러시아어 사용자는 30%에 달한다. 우크라이나 민족보다 우크라이나어 사용자가 더 적은 편인데, 이는 우크라이나 민족이면서도 15% 정도인 554만 명은 러시아어를 쓰기 때문이다(전체 러시아어 사용자의 40% 가량을 차지). 하지만 그럼에도 지도에서 보듯 크림 반도와 일부 동부지역을 제외하면 대다수가 우크라이나어가 강세인 지역이 많다.

우크라이나어는 러시아어의 방언이라거나, 이 두 언어가 매우 유사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폴란드나 슬로바키아를 여행해 보면 현지 주민들이 하는 말을 이해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고, 현지 주민들도 우크라이나어를 쉽게 알아 듣는다. 한편, 러시아에 가서 우크라이나어로 말하면 러시아인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 두 언어가 정말 유사한지 의구심이 생긴다. 키이브 타라스 쉐브첸코 국립 대학교의 언어학과 코스땬띈 띄쉬첸코 교수는 우크라이나어의 문법과 음성학 상 82 가지 특성 목록을 작성했다. 이 목록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어는 벨라루스어하고는 29 가지,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하고는 23 가지, 폴란드어하고는 22 가지, 크로아티아어와 불가리아어하고는 21 가지, 슬로베니아어하고는 20 가지가 같고, 러시아어하고는 11 가지가 같다. [Ukrainian and Russian: Two Separate Languages and Peoples - https://ukrainianinstitutenyc.wordpress.com/2015/08/28/ukrainian-and-russian-two-separate-languages-and-peoples/]
Русский язык - не иностранный,
러시아어는 외국어가 아니며,
А мы - не иностранцы!
우리 또한 외국인이 아니다!
독립 후 우크라이나어의 우위가 강조되면서, 러시아어를 주로 쓰는 주민들은 차별받는다고 느껴 러시아어를 제2공용어로 지정하자는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번번히 무산되었다. 그리고 러시아어를 포함한 소수민족어를 지역공식어로 인정하는 법률이 폐지되면서 인구의 10%이상이 사용하게 되면 지역 공식어로 정해졌던 소수민족어는 지역 공식어 지위를 박탈당할 뻔 했으나 투르치노우 대통령 권한대행이 해당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리고 2014년 5월 20일의회에서 다시 러시아어가 제2국어로 지정될 예정이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근데 2014년 10월 3일에 리비우를 방문한 포로셴코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는 영어에 특수지위를 부여해야 하고 제2외국어로 영어가 되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2015년 2월 3일, 포로셴코는 우크라이나의 유일한 공식어는 우크라이나어가 될 것이라고 확언했다. Пам'ятайте: ані слова російською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여전히 러시아어 역시 많이 쓰이고 있다. 당장 TV 방송만 보더라도 국영 채널인 UA: 페르시(UA: Перший)만 우크라이나어 방송만 하며, 인테르(Інтер), 1+1, 우크라이나(Україна) 등의 주요 방송사들은 아직도 러시아어 방송을 내보낸다. 주로 뉴스의 경우 우크라이나어 뉴스와 러시아어 뉴스를 다른 시간에 배치하는 형식으로 한다.[24]

통계에서 보듯 3%의 주민은 우크라이나어도, 러시아어도 아닌 언어를 제1언어로 한다. 루마니아어(몰도바계 18만 + 루마니아계 14만 = 32만), 크림 타타르어(23만)과 헝가리어(15만), 불가리아어(14만)가 대표적. 몰도바계와 불가리아계는 러시아어를 쓰는 인구도 상당하다.

한편 민족어 사용빈도가 낮은 민족들도 있는데, 폴란드계(14.4만)는 대다수가 비슷한 우크라이나어에 동화되어 10만명 가량이 우크라이나어를 쓰고, 유대인(10만)과 아르메니아인(9만)들은 각각 8.5만, 4.3만명이 러시아어를 쓴다.

7. 전치사 논쟁[편집]

우선 이 논쟁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명에 대한 러시아어의 전치사에 대해 알아야 한다. 러시아어에서는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국명 앞에는 전치사 в와 из[25]를 사용한다(예: 한국 - в Корее, 러시아 - в России, 일본 - в Японии). 반면 일반적으로 지방이나 반도, 섬(일부 섬나라 제외), 산지 등의 경우에는 на와 с[26]를 사용한다(예: 캅카스 - на Кавказе, 우랄 - на Урале. 단 시베리아는 в Сибири다). 다만 몇몇 국명의 경우(특히 섬나라)에도 на와 с를 사용한다(예: 키프로스 - на Кипре, 필리핀 - на Филиппинах, 쿠바 - на Кубе).[27][28]

그런데 러시아어에서는 예로부터 일반적으로 장소/방향에 관한 전치사를 우크라이나라는 국명과 함께 쓸 때는 на/с를 사용해왔다. (예: на Украине) 이는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라는 국명을 '변방에 있는 땅'이라는 의미로 봤기 때문으로, 1930년대 소련에 의해 на/с를 표준으로 정하고 в/из 형태는 버리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당시에는 소련이라는 하나의 나라에 있었던 상황이었던 데다가 민족주의를 소련이 의도적으로 배제하려 했기 때문에 1980년대 후반까지 이에 대한 반발은 거의 없었다. 참고로 1980년대 후반~1990년대 극초반에 발간된 국내의 러시아어 교재에서도 대부분 на Украине를 표준으로 적어 놓고 있다.

그러나 1990년 우크라이나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이후로 전치사에 대한 논쟁이 발생하였다. 우크라이나는 섬나라도 아닌 데다가 이제는 더 이상 러시아(소련)의 지방이 아니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1993년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 정부에 정식으로 국명 앞의 전치사를 в/из로 바꿔줄 것을 요구한다. 러시아 측에서는 이 요구를 받아들여 '주우크라이나 러시아 연방 대사관'의 이름을 "Посольство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в Украине"라고 써왔다.# 그러나 2011년 경부터 러시아의 공식 입장이 다시 на/с를 사용하는 것으로 변하였는지 2011년부터는 "Посольство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на Украине"로 변경하였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 번째로는 관용의 문제다. 러시아에서는 오랜 세월 우크라이나라는 국명 앞에는 на/с를 사용해와서 в/из를 사용하는 것을 어색하게 느끼게 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우크라이나라는 국명의 어원에 대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견해 차이 때문이다. 러시아에서는 우크라이나라는 국명의 어원을 '변방의 위치한 땅'이라고 봐서 국명 이전에 지방의 의미가 강하기 때문에 на/с를 고수하는 경향이 강하다. 반면 우크라이나에서는 '크라이나' 자체를 '국가'라는 의미로 보기 때문에 '우리의 나라'가 어원이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결국 이러한 어원의 해석 차이 때문에 전치사 논쟁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 문제는 결국 자연스럽게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로 까지 번져 우크라이나 뿐만 아니라 러시아 내부에서도 현재까지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일단 당사국인 우크라이나에서는 러시아어로 쓰더라도 우크라이나라는 국명 만큼은 우크라이나 정부의 입장을 따라 в/из로 적는 것이 대부분이다. 당장 구글에 в Украине를 검색해보면 .ua로 끝나는 우크라이나 사이트들이 대부분일 정도다. 그나마 보이는 .ru의 러시아 사이트들도 이 전치사 논쟁을 다룬 내용이 대부분이다. 반면 러시아에서는 공식적으로는 на Украине를 고수하기로 했는지 대부분의 주류 언론들이 на Украине를 고수한다.[29] 하지만 일반 언중들 사이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이제는 독립국이기 때문에 в Украине가 맞다."라는 의견이 있는 한편, "지방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혹은 "오랫동안 써온 러시아어에 우크라이나 너네들이 왜 간섭이냐?"고 하여 на Украине를 고수하는 의견도 있다. 그래서인지 현재 각종 문헌을 보면 둘 다 쓰이고 있는 상황이다.

역사적, 특히 문학 작품에서 쓰인 예시들을 살펴보더라도 두 전치사가 혼용이 되고 있다. в Украине 자체도 사실 따지고 보면 나름 많이 사용되었다. 나레즈니, 고골, 코스토마로프, 코롤렌코, 베르낫스키 등 우크라이나 출신의 작가들 뿐만 아니라 타티셰프, 카람진, 오도옙스키, 게르첸, 프리시빈, 고리키 등 러시아 출신의 작가들도 자신의 작품에 в Украине/из Украины를 사용했다. 물론 이런 작가들도 항상 в Украине를 사용했던 것은 아니고 на Украине를 혼용하기는 했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유명한 작가인 타라스 셰우첸코의 작품을 보면 "Як умру, то поховайте Мене на могилі, Серед степу широкого, На Вкраїні милій..." 처럼 на를 쓴 경우도 있는 반면, "І мертвим, і живим, і ненарожденним землякам моїм в Украйні і не в Украйні моє дружнєє посланіє" 처럼 в Украине를 사용한 경우도 있을 정도.

결국 이 문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정부 뿐만 아니라 네티즌 사이, 그리고 러시아 네티즌 사이에서도 항상 논쟁거리가 되어 이에 대한 열띤 토론을 하는 광경을 볼 수 있는 상황이다.[30]

영어에도 비슷한 문제가 존재했다. 우크라이나 독립 이전에는 영어로 우크라이나를 부를 때 정관사 the를 붙여서 "The Ukraine"이라고 썼는데, 도널드 트럼프우크라이나 사태를 논하며 "the"라는 정관사를 꼬박꼬박 붙여서 우크라이나인들을 빡돌게 했다. 다만 이 양반 자체가 보통 러빠 푸빠가 아니다보니 그냥 트럼프스럽다고 여긴다면 이상하지는 않다(...).

8. '미녀의 나라'와 성 상품화[편집]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우크라이나는 미녀의 나라라는 이미지로 잘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우크라이나에서는 김태희가 밭일하고 전지현이 빨래한다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비틀즈의 노래 'Back In The U.S.S.R.'에도 우크라이나 미녀 드립이 나오는 걸 보면 꽤 오래 전부터 퍼진 인식인 듯 하다. 비정상회담 우크라이나 편에서는 방송에 출연한 우크라이나인 안드리에게 사실인지를 물어보았는데, 안드리는 사실에 가깝다고 보시면 된다답변했다. 때문에 모델 등[31]으로도 많이 활동하곤 한다. 나라가 가난한 관계로 국제 결혼 또한 활성화되어 있는데, 키이우에도 여러 개의 국제 결혼 중개업체가 성업하고 있다. 다만 동양 쪽보다는 주로 유럽 선진국이나 북미 남성과의 국제 결혼을 주선한다고 한다. 한 해에 한국인과 우크라이나인의 국제 결혼 사례가 얼마나 되는지는 통계 자료가 없어서 정확한 수치를 알 수가 없지만, 국내에 살고 있는 우크라이나인의 숫자를 생각하면 최대 15명 안팎의 극소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나라에서는 성 상품화가 여러가지 차원에서 활성화되어 있다. 젖은 셔츠 축제를 열거나 하는 특기할 만한 점은 성매매를 반대한다는 시위에서도 토플리스로 선정적인 포즈를 취하는 등 성 상품화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런 시위는 오히려 성매매 반대와 반대적인 모습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외치는것이다. 이 시위를 주도한 단체는 페멘(Femen)이라는 여성주의 단체로, 그들이 쓴 "분노와 저항의 한 방식, 페멘 "이라는 책을 참고해보면 좋을 것 같다. 이 책에서 '가슴은 우리의 무기'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표현하는데 성을 이용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우리나라의 부천경찰서 성추행 사건에서 비판하던 측은 성추행 사건의 폭로를 두고 운동권이 성마저도 혁명의 도구로 쓴다는 증거다고 비난했던 것을 상기해 본다면 문화적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크라이나에서 성매매는 불법이지만[32] 아주 활성화되어 있으며, 러시아와 함께 전 세계의 백인 매춘부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에는 홍등가가 없지만, 어떤 사람들은 키이우의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홍등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통계에 의하면 여대생의 18.5 %가 자신의 학비를 위해 성매매를 한다고 한다.[33] 동남아 등지와 함께 다른 나라에서 섹스 관광을 위해 찾기도 한다. 또한 이 방면에서는 터키 관광객이 유명한데, 이들은 유독 동유럽권 여성을 좋아하여 동유럽권 여성과의 결혼이나 성매매에 열을 올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90년대 말에는 합법적으로 아동 포르노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물론 90년대 말 아동 포르노가 제작된 곳은 루마니아, 러시아 등 다른 동구권도 마찬가지였지만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신문광고를 내며 모델을 모집하는 등 합법적이고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곳은 우크라이나 뿐이다. 자세한 것은 아동 포르노 항목 참고. 물론 지금은 포르노 제작 자체가 불법이라고 하나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곤란하다.

8.1. 에이즈 문제[편집]

이러한 사정 때문인지 에이즈가 어마어마하게 창궐한다. 유럽에서 1위다. 거의 어지간한 아프리카 나라들 뺨치게 에이즈가 창궐하는데 80년대까지는 에이즈환자가 없었지만, 현재는 마약을 사용할 때 주사기를 돌려쓰는 문제와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에 의해서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우크라이나의 창녀촌에서의 화대는 소름끼칠 정도로 저렴하다고 한다.YTN 특약.

게다가 빈민촌이나 가출하는 청소년들 사이에서도 문란한 성생활과 마약에 쩔어사는 생활 등의 영향으로 빈민가는 거의 무조건이라 할 정도로 에이즈가 창궐한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 정부 당국에서는 에이즈 문제에 대해 약품 보급이나 치료 등에 대해 거의 손을 놔버린 상태이다.

왜냐하면 유로마이단, 크림 반도, 돈바스 전쟁, 천연가스 문제 등 골치아픈 것들이 너무 많이 쌓여있기 때문인데, 이렇게 영 좋지 않은 일들에 매달리느라 에이즈 문제까지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다. 거기에 친러와 반러가 돌아가면서 정권을 잡다 보니 굳이 이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정책 현안에서 계속 갈아엎는 짓거리가 자행되어 이 문제에 대해서 역시 전혀 손을 쓰지 못하는 형국이다.

그런데 어느 나라이든 심보를 부리는 인간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에이즈 환자들 중에서 인간성이 상당히 질이 떨어지는 종자가 가끔 있는데, 자신이 사용한 주사바늘을 화장실 좌변기 등에 몰래 설치해서 그 주사바늘에 찔려서 에이즈를 전염시키려는 심보들도 아주 가끔 발견되고 있다. 자기 혼자만 에이즈 걸려 죽기는 억울하다는 심보로 이런 짓거리를 자행한다.

굳이 내전이나 소요 사태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것 하나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매우 위험한 나라이다. 조심해서 가면 문제 없겠지만, 정말 주의를 잘해야한다.

9. 군사[편집]


우크라이나는 독립 직후인 1991년 12월 소비에트연방으로부터 인수한 장비와 병력을 재편성하여 독자적 군대를 창설했다. 소비에트연방의 16개 군 관할 구역 중 키이우, 오데사, 자카르파티아 등 3개의 군 관할구를 그대로 인수하였는데 인수 당시 병력은 78만 명으로 유럽 내 1위였다. 또한 소련시절의 핵무기도 그대로 물려 받았는데 독립당시의 핵무기 보유량은 세계 3위였다.

하지만, 현재는 구소련에서 독립 당시보다 군사력이 매우 줄어들었는데, 1991년 2011년의 군사력 비교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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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우크라이나는 징병제를 폐지했다. 로이터 올해의 사진 하지만 크림 위기의 여파로 2014년 5월 1일 공식적으로 징병제 폐지를 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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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남자" 등의 제목으로 한국 인터넷에서 짤방으로 유행하던 사진. 이 불쌍한 청년이 우크라이나 마지막 징집병이 되는듯 했지만... 1년도 안돼서 2014년 초에 우크라이나 내외의 정세가 불안정하게 되는 바람에 농담이 더이상 농담이 아니게 되었다. 이후 우크라이나는 전쟁 상태로 돌입했고, 징병제 폐지는 당연히 없던 일이 되었으며 이 불행한 마지막 징집병들의 군생활에도 동정적이거나 비유적인 의미가 아닌 진짜 헬게이트가 열린 셈.사람 인생은 진정 한치 앞도 모른다더니 정말이다

9.1. 총기 수출 강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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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방송에서 누구나 쉽게 총을 살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땅파면 총이 나올 정도는 아니어도 총이 흔하긴 한 듯. 그 결과는 유로마이단 당시 총기로 무장한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에서 입증되었다.

분리독립 당시 우크라이나에는 전략적인 사유로 90만의 현역병력과 100만명 이상을 위한 전략예비물자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당연히 갓 새로 독립한 우크라이나 정부에서는 이걸 유지할 돈이 없었고, 필요하지도 않았다. 때문에 90년대 당시 예비물자는 물론이며 현역장비까지 해외에 유출되었다. 물론 필요하지 않다는 건 당시 기준이고 현재 와서 보면 그 물자를 싹 팔아넘긴 덕택에 러시아의 크림반도 진격에 맞설 힘이 없어진 것 같다고는 하지만... 사실 소련 해체 당시 우크라이나에 주둔하던 대병력은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필요 이상으로 과도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가 독립 당시 군대를 축소한 건 불가피한 일이었다. 소련시절 우크라이나에 과도한 병력이 배치된 이유는, 이곳이 원래부터 독소전쟁 이래로 격전지였던데다가 [34] 냉전시에는 나토 제2전력의 하나였던 터키를 견제하기 위해 좀 과하게 밀집된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소련군으로부터 알짜전력을 물려받은 러시아군조차 500만 대군으로부터 90년대 30만 이하로 내려갈 정도의 막장(현재도 러시아군 총병력은 70만밖에 안된다)이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가 소련군으로부터 물려받은 90만 대군을 유지하기란 불가능했다. 당시 군수물자를 팔고, 군비를 축소한건 안목이 짧았던게 아니라 애초에 방대한 군대를 유지할 수 없는 국가적 한계 때문에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당장 북한이 필요이상으로 과도한 군대를 가졌다가 어떤 꼴을 겪었는지 보지 않았는가.

특히나 우크라이나에 있던 AK-47 수백만정이 유출된 것으로 보이며 90년대부터 21세기까지 아프리카와 중동의 분쟁지역에 나도는 "새" AK소총은 거의 절대 다수가 우크라이나에서 유출된 소련제였으며 20년간 상당량이 소모(!)되어 현재는 숫자가 상당히 줄어들었다고 한다.[35]

비단 소총같은 단순한 물건 뿐만이 아니라, 우크라이나에 배치되었던 핵무기의 경우 서방과 러시아의 협정을 통해 핵탄두는 파기하고 발사체는 인공위성 발사체로 처리되었고, Tu-160같은 전략폭격기의 경우 미국에 매각하려다가 러시아와 협상을 통해 채권을 탕감하는 대가로 러시아에 돌려주었다.

무기 같은 "유용한" 물건이 아닌 옷이나 잡다한 장비같은 군수품 창고들은 사실상 방치되다가 차근차근 리인액트먼트 용품으로 팔아먹기 위해 업자들이 창고째로 매입해다가 팔고 있다. 지금도 이베이에서 그 물품들을 쉽게 구할 수 있으며 직접 사본 사람의 경우 사용한 흔적이 전혀 없는 물건에서 엄청난 냄새가 나기에 스탬프를 확인하니 1972년도였다고 한다.

10. 정치[편집]

대통령총리가 있는 이원집정부제 국가다. 대통령은 5년 중임제로 1회 연임이 허용되며, 총리역시 5년 중임제로 1회 연임이 허용된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논하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현재 우크라이나는 이 국가가 중세이후 처음으로 독립한 국가라는 점이다. 즉 몽골침략으로 키에프 공국이 몰락한 13세기 이래 오스만투르크, 러시아, 폴란드, 소련, 나치 독일의 지배를 골고루 받다가 최초로 처음으로 성립된 완전한 독립 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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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정치에서 통치방식이나 대화와 타협 문화가 발달하지 못했으며, 정쟁이 극단적으로 치달아 국가분열 양상을 띠고 있다. 그 여파로 국회 공성전이 매우 격렬하게 이루어지는 국가이기도 하다.

10.1. 역대 지도자들[편집]

  • 레오니드 마카로비치 크라우추크(우크라이나어: Леонід Макарович Кравчук, 러시아어: Леонид Макарович Кравчук. 1934년 1월 10일 ~) - 우크라이나 초대 대통령.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과 함께 소비에트 연방 해체에 합의, 소련 붕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 중 하나다. 1934년 1월 10일 태어났다. 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정치국원이 되었고, 1990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지도자인 최고회의 의장에 선출되었다. 그 후 곧 소련 공산당을 탈당하고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을 펼쳤다. 1991년 12월 1일, 우크라이나 최초의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되어 소비에트 연방 구성 공화국으로서의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통령이 되었다. 12월 5일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곧 소련 붕괴와 우크라이나 독립을 위한 활동을 펼쳐, 12월 8일,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 대통령과 벨라루스의 스타니슬라우 슈시케비치 지도자와 함께 소비에트 연방 해체와 독립국가연합 창설에 합의하였다. 독립국인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1992년 8월 정식으로 취임하였으나, 체제 변환기의 혼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여 경제 상황을 크게 악화시켰다. 1994년 선거에서 레오니드 쿠츠마에게 패해 물러났다.
  • 레오니드 다닐로비치 쿠츠마(우크라이나어: Леонід Данилович Кучма, 러시아어: Леони́д Дани́лович Ку́чма. 1938년 8월 9일 ~) - 우크라이나 2대 대통령. 1938년 8월 9일 소비에트 연방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체르니히우 주에서 태어났다. 1960년에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 대학교 물리 기술 학부를 졸업했고,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 주에 있는 유주마 시에서 일했다.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에 입당했고 1991년 8월의 보수파에 의한 8월 쿠데타 이후 공산당을 탈당했다. 1994년 대선에서 동부의 지지로 제2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1999년 대선에서 서부의 지지로[36][37]재선하며 유럽연합과 미국, 러시아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면서 전임 크라우추크 대통령이 말아먹었던 경제분야를 개혁하며 발전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비밀경찰을 운용하면서 정적과 언론을 탄압하는 폭압적인 권위주의 통치를 하며 민심을 잃었다.[38] 그래도 막장이었던 자국 경제를 어느 정도 복귀시켜 놓은 공은 부정할 수 없고, 이 양반일 때가 우크라이나 리즈 시절이었다. 그리고 자기 임기가 끝나자 자연스레 내려왔다. 연임한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아직까지는 이 사람이 유일하다.
  • 빅토르 안드리요비치 유셴코(우크라이나어: Віктор Андрійович Ющенко, 러시아어: Ви́ктор Андре́евич Ю́щенко. 1954년 2월 23일 ~)는 우크라이나의 3대 대통령이다. 정치인으로서 우리 우크라이나당의 지도자였다. 1954년 2월 23일, 소련의 일부였던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미 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안드레이는 제2차 세계 대전에 출정했으나 대소전에서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힌 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수용되었다. 유셴코는 90년대 말 쿠츠마 정권하에서 총리로 재직하여 경제개혁을 주도하면서 IMF위기를 그럭저럭 넘기는데 공헌했다는 평을 들었지만 2000년대 초반에 쿠츠마의 권위주의적 행태에 반기를 들며 야당인사가 되었다.. 2005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총리를 물리치고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한편 오렌지 혁명의 성공으로 율리야 티모셴코를 지지하여 그를 총리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티모셴코와 불화를 겪었고 친서방 정책에 반발하는 친러 세력(야누코비치)이 득세하는 위기를 맞았다. 2010년 1월 17일에 재선에 도전하였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 빅토르 페도로비치 야누코비치(우크라이나어: Віктор Федорович Янукович, 러시아어: Виктор Фёдорович Янукович 빅토르 표도로비치 야누코비치. 1950년 7월 9일 ~)는 우크라이나의 4대 대통령이다. 야누코비치는 1950년 7월 9일 소비에트 연방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예나키예베에서 태어났다. 그는 2살 때 간호사였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할머니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다. 청소년 시절에 절도와 폭력으로 17살이 되던 1967년에 3년간 소년원에서 수감 생활을 하였다. 1972년 버스 회사에서 전기공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그 후 도네츠크 기술학교에서 학업을 마쳤다. 1980년 졸업 직후에 예나키예베에서 운송 회사의 최고 관리자로 임명되었고,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다. 1990년대 초반 정치에 입문하였고, 소련이 붕괴되었다. 이후 동부 공업지대인 도네츠크 주 주지사를 지냈다. 친러시아 성향의 지역당에서 활동하며 도네츠크 주지사로 영향력을 행사했고, 2002년 총선에서 지역당이 포함된 연정이 중앙 정권을 잡아 그도 입지를 굳혔다. 2002년 11월, 총리로 임명되어 중앙 정계에 진출했고, 2003년부터 지역당 당수를 지냈다. 2004년 10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빅토르 유셴코 후보와 격돌했으며, 1차 투표에서는 근소한 차로 유셴코가 앞섰으나, 유셴코와 야누코비치 모두 다수표는 얻지 못하여 11월, 결선 투표가 치러졌다. 개표 결과 야누코비치가 49.46%의 득표로 대통령 당선인으로 발표되었으나, 선거 부정이 개입되었다는 이유로 유셴코 후보 지지자들은 강력히 반발하였다. 오렌지 혁명으로 알려진 시위가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등 큰 논란 끝에 12월 26일 재선거가 실시되어 결국 유셴코가 다수표를 얻어 대통령 당선인으로 발표되자, 이번에는 야누코비치 후보 지지자들이 반발하였다. 그러나 선거 결과를 뒤집지 못하고 유셴코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야누코비치는 2005년 1월 총리직에서도 축출되었다.
    그 후 야누코비치가 이끄는 지역당은 2006년 3월 총선에서 최다 의석을 확보했으며,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 정국은 다시 여당과 야당의 대립으로 불안이 계속되었다. 지역당은 친러시아 성향의 다른 당들과 연정을 구성, 2006년 8월에 야누코비치는 다시 총리 자리에 올랐고, 야누코비치의 정적이었던 유셴코 대통령은 정국 안정을 위해 야누코비치를 총리로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됐다. 이후로도 정국 불안은 계속되어 유셴코 대통령은 2007년 4월 국회 해산을 결정했으며, 이에 따라 조기 총선이 치러졌다. 조기 총선에서 그의 지역당은 제1당의 자리는 유지했으나, 율리야 티모셴코가 중심이 된 다른 당들이 연정을 구성하여 그는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고, 티모셴코가 총리 자리에 올랐다.
    2010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다시 지역당 후보로 선출되어 선거에 출마했다. 야누코비치는 1차 투표에서 1위에 올랐으나, 다수표는 얻지 못하여, 율리야 티모셴코 총리와 결선 투표를 치렀다. 이 선거에서도 극심한 정파, 지역, 민족간 대립으로 매우 심한 혼란이 있었으며, 결선 투표 결과 48.95%의 득표율로 최종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 선거에 당선된 야누코비치는 2010년 2월 25일, 제4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야누코비치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율리야 티모셴코 내각은 해산되었으며, 야누코비치의 측근인 미콜라 아자로프가 지역당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후 티모셴코 전총리는 직권 남용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아 수감되었고, 친러시아와 친EU를 사이에 놓고 정국 불안은 계속되었다. 야누코비치 대통령과 아자로프 총리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서부와 키이우 일대를 중심으로 계속되었으며, 2013년 하반기부터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확산되었다. 그는 유화책으로 아자로프 총리를 해임하고, 야권 인사들의 사면을 발표하고 EU와의 관계를 강화하겠다고 하였고, 최종적으로 야권 대표와 휴전의 합의했으나, 결국 대규모 유혈사태가 일어났으며, 야권은 더욱 강하게 반발하여 키이우와 의회를 점거하자, 야누코비치는 키이우를 떠나 도주하였다. 이 일로 여당도 그에게 등을 돌렸으며, 2014년 2월 22일, 국회는 그를 인권침해와 직무유기 등의 혐의로 탄핵을 가결하여 그는 대통령직을 상실하였다.
    이후 그는 러시아로 잠입하였다가 2014년 2월 28일, 로스토프나도누에서 모습을 드러내어, 자신이 여전히 우크라이나의 합법적인 대통령이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사태에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최고의회인 라다가 2015년 2월 4일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의 대통령 직위를 박탈하는 법안을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2010년부터 2014년까지 제4대 대통령을 지낸 야누코비치는 공식적으로 대통령 직위를 잃고 전임 대통령으로서 특권과 혜택도 누릴 수 없게 됐다.
  • 페트로 올렉시요비치 포로셴코(우크라이나어: Петро Олексійович Порошенко, 러시아어: Пётр Алексе́евич Пороше́нко. 1965년 9월 26일 ~)는 우크라이나의 백만장자 사업가이자 우크라이나의 제5대 대통령이다. 포로셴코는 1965년 9월 26일 오데사 주의 볼흐라드 시에서 태어났지만1 우크라이나 중부의 빈니차 시에서 자랐다. 그는 1989년 키이우 대학교의 국제관계 및 법학부 (뒤이어 국제관계학회)에서 경제학 학위를 받으며 졸업했다. 졸업 후 포로셴코는 카카오 열매 판매 사업을 시작했다. 1990년대 그는 과자 기업 몇 곳에 대한 통제력을 가지게 되었고, 이후 로셴 그룹과 합병하여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큰 규모의 과자 생산 기업을 만들었다. 포로셴코는 제과업계에서 성공을 거두어 '초콜릿 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포로셴코의 기업은 여러 곳의 자동차 및 버스 공장, 레닌스카 쿠즈냐 조선소, 5 카날 텔레비전 채널을 비롯한 다양한 기업을 포괄하고 있다. 2012년 3월, 《포브스》는 포로셴코를 포브스 세계 부자 순위 중 10억 달러의 재산으로 1,153위에 올랐다고 발표했다. 2009년부터 2010년까지 외교부 장관, 2012년에 경제발전통상부 장관을 지냈다. 2007년부터 2012년까지는 우크라이나 국립은행을 이끌었다. 정치 외에도 포로셴코는 다른 여러 회사들을 포함한 대규모 과자 사업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는 그에게 '초콜렛 왕'이라는 별명을 얻도록 했다. 그는 2014년 5월 25일 1차 투표에서 55%에 달하는 표를 획득했고, 그 때문에 당선이 확실시되어 2차 투표를 하지 않게 되면서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문제는, 동부 친러 세력이 내전을 개시했고 덕분에 국토의 절반과 해안 대부분이 날아갔다는 것...
    훗날 행적은 추가바람.

10.2. 2004년 오렌지 혁명[편집]

본격적인 우크라이나 정치 갈등의 시작.

쿠츠마가 임기만료에 따라 물러나면서 치르게 된 2004년 대선은 쿠츠마의 후계자 격인 여당 후보 빅토르 야누코비치(Віктор Янукович)와 그에 맞서는 야당 후보 빅토르 유셴코(Віктор Ющенко)[39] 간의 맞대결 양상으로 흘러가게 된다.

대선을 두달 반 정도 남겨둔 2004년 9월 5일, 유셴코 후보는 독살을 당할 뻔했고, 미중년 간지남이었던 그의 외모는 강철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팀 마르코처럼 변해버렸다. 안습... 사건 후 유셴코의 혈액에서는 기준치의 1천 배가 넘는 다이옥신이 검출되었다. 이 암살기도는 우크라이나 보안국(SBU)의 이고르 스메쉬코 전 국장, 블라디미르 사추우크 전 차장과 식사를 한 후 일어난 것이었으며, 유력한 용의자로 우크라이나 보안국이나 러시아 측에서 친러파 후보인 야누코비치를 당선시키기 위해 음식에 다이옥신을 집어넣었을 것이란 의혹을 받았다. 구사일생으로 유셴코는 목숨을 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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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2004년 11월 대선 결선투표 결과는 야누코비치가 49.53%, 유셴코가 46.66%의 득표율을 기록했다고 발표되어 야누코비치가 당선되었지만 유셴코와 러닝메이트인 율리야 티모셴코 지지자들은 투표에서 대규모 선거 부정 사례를 입수했다. 이에 키이우 등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우크라이나 대법원과 중앙선거위원회가 개입한 끝에 재투표를 거쳐 유셴코가 51.99%라는 아슬아슬한 표차로 승리했다.

하지만 개혁 노선 차이로 유셴코 대통령과 율리야 티모셴코 총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정적으로 돌변했다. 친서방 지도자로써 개혁을 주장하던 티모셴코 총리와는 달리, 유셴코 대통령은 친러 세력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어느 정도 눈치를 보아야 했다. 특히 티모셴코 총리와 갈등을 빚던 유셴코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하고 재선거를 실시하고 티모셴코를 해임하는 초강수를 두면서까지 막나가던 티모셴코를 견제하려 했다. 심지어 유셴코는 자신의 경쟁자였던 야누코비치를 총리로 임명하기도 했다.
그래도 당시에 호경기였을때라 경제가 급속하게 성장하는 편이었지만 결국 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후폭풍[40]으로 1인당 GDP가 3900달러에서 2500달러로 떨어지면서 우크라이나 경제를 큰 타격을 입는다. 이후 IMF가 우크라이나에 금융지원을 하였으나, 우크라이나는 IMF가 요구하는 구조조정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그 반동으로 결국 2010년 2월에 치러진 대선에서 야누코비치 전 총리가 1차투표에서 유셴코를 탈락시키고, 2차투표에서 경쟁자였던 티모셴코를 꺾고 당선이 되면서 향후 다시 친러 성향을 보였다. 당장 전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던 나토 가입을 철회했고, 특히 야당의 강력한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2010년 4월 흑해 주둔 러시아 해군의 철수도 취소하고 시한을 2017년에서 2042년으로 연장시켰다. 사실 당시에야 야누코비치와 우크라이나 정부는 훗날 크림 위기같은 일이 일어날 지 몰랐겠지만,[41] 이는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무혈점령하게 된 가장 큰 병크가 되어버린다.

독재정권에서 비롯된 정당과 자유주의 개혁 정당의 대결구도라서 그런지, 대한민국이나 대만과 정치 구도가 많이 비슷한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국회 공성전도 심심치 않게 종종 벌어진다.(...).예를 들면 이런 거(...).[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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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혁명은 단지 정치적인 시위에만 그치지 않아서, 위의 지도(2010년 대통령 선거. 적색이 티모셴코, 청색이 야누코비치)에서 볼 수 있듯이 지역에 따라 친러성향과 친서방성향으로 극명하게 갈리게 되었다. 결선투표메서 티모셴코는 서부 지역에서 최대 91%, 야누코비치는 동부 지역에서 최대 93%를 득표했는데, 우크라이나 대선에서는 기권표도 집계하는 걸 감안하면 93%면 한국 기준으로는 95% 넘게 득표한 셈이다.

이렇게 우크라이나가 내부적으로 앓고 있던 갈등은 결국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최악의 형태로 터져버렸다.

10.3. 유로마이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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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18일 우크라이나 독립광장에서 벌어진 반야누코비치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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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유럽연합(EU)과의 협력협정 체결 잠정 중단으로 시작된 대규모 시위를 계기로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탄핵과 도피,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 등을 겪은 우크라이나는 사실상 내전 상태와도 같은 국가적 위기에 처했다.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가 촉발한 배경에는 유럽연합과 협력 좌절과 러시아와 경제지원협약 체결로, 그동안 독단적이며 권위적으로 나라를 운영해 온 야누코비치 정권에 쌓여왔던 불만이 폭발해버린 것이다.

이 와중에 우크라이나는 크림 반도러시아에게 빼앗겨 버렸다. 크림 자치공화국은 주민투표를 통해서 크림 공화국으로 분리 독립, 러시아로 편입해버렸다. 거기에 도네츠크를 비롯한 러시아계 다수 지역까지도 독립요구를 하며 시위대가 무장하고 군복차림으로 나서고 있다. 이를 진압한다고 투입된 우크라이나군이 되려 무장 시위대에게 포위되며 무기를 넘겨주고 굴욕적으로 탈탈 털리면서 철수를 하는 상황이다. 물론, 함부로 러시아계 무장 시위대를 건드리다가 러시아를 자극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만.[43]

아래는 우크라이나 위기의 현재 정황을 적절하게 잘 설명한 만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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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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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가 위험하다!
프랑스의 시각으로 본 우크라이나 위기.

현재 유로마이단의 가장 큰 원인은 '동, 서부의 다른 지역적 정체성'이라기 보다는 우크라이나 내부에서 일어나는 지역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부추긴 정치인들의 책임이 크다. 적어도 쿠츠마 시절까지 안정적으로 유지되어오던 우크라이나 정치계는 친서방이라는 개혁파와 친러시아라는 보수파 프레임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고, 여기에 지역적인 이권요소와[44] 러시아, 미국을 비롯한 외부세력의 이해관계가 엮이면서 우크라이나의 지역갈등은 극도로 치달았고, 특히 미국에서는 러시아 견제를 위해 친서방세력을 이용하고 러시아에서는 우크라이나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내 친러세력을 이용하면서 결국에는 극단적인 정치 대립을 낳게 되었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 독립 이후 EU 가입을 지속적으로 추진을 해 왔지만, 심각한 경제위기와 뿌리깊은 지역 분할구도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오히려 국가분열이라는 건국 이래 최대위기에 직면해 있다. 비록 우크라이나 과도정부와 EU가 2014년 3월 21일 협력협정의 정치 부문에 서명하고 5월 대선 이후 경제 부문에도 서명하기로 합의했지만, 현재 같은 내부의 고질적인 갈등이 지속되는 한 EU 가입은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유럽연합(EU)과의 협상 불발로 지난해 말 우크라이나에서 반정부 시위가 시작된 이후 6개월이 흘렀다. 그동안 야누코비치 대통령 축출과 크림반도의 러시아 합병, 동부지역 분리주의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우크라이나 사태는 악화일로였다. 국제 사회는 5월 25일 치러지는 조기 대선이 우크라이나 정국 안정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대선 전까지 우크라이나를 존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45] 과거 경제장관과 외무장관을 역임했던 포로셴코가 강한 리더십으로 개혁 정책을 추진하다면 나락으로 떨어진 우크라이나 경제도 회생의 길을 찾을 수 있을 듯 했으나...

크림 병합의 사례를 보면서 우크라이나군이 자신들을 제압하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얻은 동부지역은 우크라이나 대선을 거부했다. 하지만 크림 반도와는 달리 우크라이나가 본격적으로 군사력을 적극 투입해 강경진압으로 나서면서 동부 우크라이나는 분리주의 반군과 본격적으로 전쟁으로 치닫게 되었다.[46]

하지만 2014년 말기에 다다르며 경제 제제에 따른 서방의 압박이 구체화되자 러시아는 점점 동부 개입에 소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한 때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러시아 외무장관과 회담한 후 러시아군이 동부 우크라이나에서 철수 중임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기사 또한 정부군을 상대로 호전한 반군 세력이 러시아의 적극적인 지원을 잃으면서 전선이 고착되었다. 우크라이나 동부 위기 상황에서 러시아의 개입에 대해 경제제재로 일관하고 있는 서방세계의 대응이 미약하고 별 효과가 없다. 원래 제재는 나라가 크고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을 상대로는 효과가 매우 미비하다. 그리고 러시아인들 만큼 산전수전 다 겪은 나라 국민들도 드물다. 러시아의 경제 난황은 사실 세계적 경기 불황으로 인해 러시아 역시 엄청난 경제적 타격을 입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미 2012년 GDP 증가율이 3.4%로 낮아졌던 러시아는 심지어 2013년엔 GDP 증가율이 1.3%까지 추락했다. 서방 측의 경제제재는 단지 러시아를 조금 더 불편하게 할 뿐.

다만, 서방 측의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로 당장 외국자본은 탈출하는데다 시중 은행, 기업들이 달러, 유로화 등의 외화를 구하기가 어려워지면서 해외채무를 갚기 위해 이들이 외화 구하기에 나서면서 루블화 가치가 급락했다. 러시아는 환율방어를 위해 외환을 지속적으로 투입하고 있는 상황. 90년대 말 동남아 및 대한민국1997년 외환 위기와 비슷한 상황. 반면 러시아 전체수출의 65%, 재정수입의 50%를 담당하는 자원산업 쪽은 영 경기가 좋지 않다. 2014년 현재 우크라이나의 동부위기, 이라크 내전에도 불구하고 국제 유가는 되려 하락세를 계속하고 있다. 아무래도 경제위기로 서유럽 등지에서 에너지 수입이 줄어들 것으로 보이는데다 이런저런 정치적·경제적 이유[47]OPEC에서도 석유를 크게 감산하지 못하게 됨으로서 예상 수요 대비 생산량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셰일층에서 원유를 추출하는 방법이 진일보하면서 미국의 석유 생산량이 증가할 것으로 보이고, 서유럽 역시 러시아의 반복적인 밸브 잠구기에 질려 에너지 수입원 다각화에 나서면서 러시아의 자원수출 전망은 더욱 어두워졌다. 다만 러시아에서는 중국 등 적극적으로 제제를 돌파할 시장을 찾는지라 제제가 효과를 제대로 된 효과를 발휘하기는 어렵다. 일단 현재로써는 적어도 서방이 대소련 경제봉쇄와 같은 효과를 러시아에게 주기는 어렵다. 하지만 러시아 경제 입장에서는 현재 서방의 경제제제와 저유가가 겹치면서 장기간동안 경기침체가 예정된 상황이다.
현재 사태는 민스크 종전협정을 계기로 현상황을 유지하는 것(Status quo)으로 잠정 결론이 났지만, 우크라이나나 러시아 모두 현상황에 만족하지 않는지라, 무력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러시아의 이런 움직임 가능성은 동부지역의 분리주의 움직임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됐다. 본격적인 위기 시작 후 서방국가들이 크림 병합과 동부지역 개입에 대한 책임을 물어 러시아에 대한 제재 수위를 높였고, 때마침 시작된 저유가로 인해 가즈프롬 등 러시아 국영 기업들 역시 충격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듯하다. 특히 석유같은 자원경제에 큰 비중을 두고 있는 러시아 경제에도 침체가 계속될 것으로 전망한다.

일단 현재 분쟁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가장 유력해 보이는 시나리오는 몰도바조지아 같은 사례다. 사실상 크림 반도와 동부 지역의 분리 독립 국가를 묵인하는 형태로 가는 것. 하지만 민스크 휴전협정이 맺어진 이후에도 현재까지 동부지역에서 군사적 분쟁이 지속되는 상황에서[48] 서방과 우크라이나, 러시아가 어떻게 나올지에 따라 달려있다.

11. 외교 관계[편집]

11.1. 유럽연합 가입을 위한 행보[편집]

1991년 소련 해체로 독립국이 된 우크라이나는 크랍추크, 쿠츠마, 유셴코, 야누코비치로 이어지는 정권 변화에도 EU 가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다. 우크라이나는 94년 6월 독립국가연합(CIS) 회원국 가운데 최초로 EU와 동반자협력협정(PCA, 1998년 발효)을 체결해 양자협력의 포괄적 기반을 마련하고, 97년 9월 우크라이나-EU 정상회담을 개최하면서 EU 가입을 위한 행보를 시작했다.

이후 1999년 5월 당시 쿠츠마 대통령이 EU 가입을 의미하는 ‘유럽의 길’을 선언했으며 2002년 6월 EU 가입을 최우선적 국정과제로 규정하면서 EU가 제시하는 기준에 부합하는 법·제도 정비도 본격화했다.

한편 우크라이나의 이러한 움직임에 러시아는 강력히 반발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인을 비롯한 동슬라브족의 문명적 고향이자, 러시아 흑해함대의 주둔지인 크림반도가 위치한 군사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당시 CIS 내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경제 규모가 큰 우크라이나가 EU에 가입할 경우 자국 주도의 탈소비에트 지역통합이 추동력을 상실할 수 있어 러시아로선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부채상환 독촉, 가스가격 인상, 잠가라 밸브 등의 방식으로 경제적 압력을 가하면서 2004년 11월 대통령선거(대선)에서 러시아와의 경제 통합에 호의적이던 야누코비치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하지만 부정선거 논란으로 ‘오렌지 혁명’ 이후 EU 가입을 공약으로 내세운 유셴코가 대통령에 당선하면서 우크라이나의 EU행은 더욱 유력한 시나리오가 됐다.

2005년 1월 유셴코 정부의 출범을 계기로 우크라이나는 EU의 ‘유럽근린정책(ENP)’에 입각해 ‘ENP 행동계획’을 마련했고 이를 통해 EU와의 협력을 강화하면서 가입 기준 충족을 위한 내부 개혁을 서둘렀다. 2010년 2월 집권한 야누코비치 역시 당초 예상과 달리 균형외교를 선언하면서 EU와의 협력관계를 강화해나갔다.

2013년 5월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주도의 탈소비에트 지역통합 프로그램인 관세동맹에 옵서버로 참여하기로 결정했지만, 그와 동시에 EU와 탈소비에트 국가의 협력 프로그램인 ‘동부 파트너십’ 차원에서 사실상 자유무역협정(FTA)에 해당하는 협력협정 체결도 계속 추진했다. 그러나 2013년 11월 협정 체결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이를 잠정 중단하기로 결정했고 이러한 결정은 이른바 우크라이나 사태의 시발점이 됐다.

야누코비치 정부가 EU 가입의 분수령이 될 협력협정 체결을 중단한 배경에는 러시아 측 압력과 함께 심각한 경제위기가 있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경상수지 및 재정수지 적자 확대, 대외채무 누적 등으로 디폴트 위기에 직면해 대외자금 조달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2013년 우크라이나 경제는 2012년(0.2%)에 이어 0%대 저성장에 처해 있었다. 또 경상수지 적자가 사상 최대치인 국내총생산(GDP) 대비 8.9%까지 확대됐고, 재정수지 적자가 GDP 대비 4.4%를 기록했으며, 외환보유액 대비 단기외채 비중도 약 200%에 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EU와의 협력협정 체결에 따른 제도개혁 비용이 2017년까지 연 200억 달러씩 총 1600억 달러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됐지만 경기 침체를 겪던 데다 사실상 후진국이나 다름없는 우크라이나를 편입시켜 큰돈을 들일[49] 가치를 느끼지 못했던 EU는 단지 14억 달러 지원만 약속하고 있었다. 이에 야누코비치는 2013년 10, 11월 두 차례 러시아를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비공식회담을 갖고 우크라이나-EU 협력협정 체결을 중단하는 대신 150억 달러 차관 지원과 가스가격 인하 약속을 얻어냈다. 결국 경제위기와 러시아의 에너지지원 위협, 그리고 친러파가 EU 가입을 향한 우크라이나의 발목을 잡은 셈이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자체의 지정학적인 특성 역시 문제로, 우크라이나 내전에서 보듯이 우크라이나는 기본적으로 평지 위주라 러시아군의 주특기인 장갑기동군을 동원한 고속타격전에 굉장히 취약하다. 군축으로 인하여 방어 위주로 전력이 개편된 EU 입장에서 우크라이나를 지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여기에 극히 좁고 그나마도 절반이 친러국가 벨라루스에 막혀 일부 국경만을 맞대며 심장부와 다소 떨어져 있는 발트 3국과 달리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심장부를 남부에서 직접 노릴 수 있는 위치라 러시아가 결사적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는 점도 부담이다. 또한 우크라이나 자체도 경제 자체가 굉장히 열악한 데다 EU 가입 조건에 전혀 맞지 않은 상태라는 것도 문제.

그런 와중에서도 EU의 동방 확장 정책과 우크라이나의 친EU 정책이 맞물려 2014년 6월 EU-우크라이나 자유무역협정(FTA) 및 포괄적 협력협정을 체결했다. 그래서 EU-우크라이나 FTA는 2016년 1월 1일 공식 발효했는데...

네덜란드의 反EU 세력들이 EU-우크라이나 협력협정에 반대하는 청원 운동을 벌여 법정 충족요건인 30만명 이상의 서명을 받았다!! 그래서 네덜란드[50]에서는 2016년 4월 6일 EU-우크라이나 협력협정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된다. 구속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 EU가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동유럽 확대 정책에 중대한 도전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여론조사에서도 협력협정에 반대하는 여론이 우세했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EU 28개국 중 네덜란드에서만 EU-우크라이나 협정이 비준되지 않고 있었는데, 결국 국민투표에서 반대가 다수를 차지하면서 비준이 이루어지지 않을 확률이 높다.## 게다가 네덜란드 국민 61%가 EU-우크라이나 협정에 반대하면서 협정 찬반 국민투표가 부결되었다.#

그러다 2017년 2월 들어 네덜란드 하원이 다시 투표하여 이를 통과시켰고, 상원도 이에 동의하면서 협정이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이에 따라 EU 의회는 5월 11일에 우크라이나 무비자 협정에 공식 서명하였으며(5월 22일에 발표), 6월 11일부터 적용된다. 단, 영국은 무비자가 적용되지 않는다.

11.2. 러시아와의 관계[편집]

러시아와는 키예프 공국시절부터 같은 뿌리, 혈통을 유지해 왔지만, 키예프 공국 멸망 이후에는 크게 갈리게 되었다. 동부는 대체로 친러성향, 서부는 반러성향을 나타낸다. 소련시절에 우크라이나에서 홀모도모르,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2014년에 일어났던 유로마이단으로 러시아와의 관계가 크게 악화되고 있다. 게다가 크림 반도가 러시아로 편입되기도 했다. 그리고 동부지역에선 러시아친러반군의 지원으로 도네츠크 인민 공화국, 루간스크 인민 공화국이 탄생되기도 하는 등 러시아와의 관계는 악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독립국가연합에도 탈퇴를 선언하기도 했다.

러시아어도 우크라이나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언어이지만, 러시아와의 관계 악화로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려는 분위기가 퍼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소련시절에 있었던 일부 지명들을 새로운 이름으로 바꾸고 있다.[51] 유로마이단 이후에는 소련 관련 상징물도 금지하고 공산당의 활동도 금지시켰다. 그리고 러시아와의 갈등으로 러시아에서 제작된 드라마, 영화 등도 수입을 규제하고 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정부는 2018년 1월 1일부터 러시아인의 입국통제를 강화한다고 밝혔다.#

유로마이단, 돈바스 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동부지역의 거주민들이 대거 러시아로 피난을 갔다.

11.3. 대한관계[편집]

대한민국은 1991년 소련의 해체 이후 독립국가연합 국가들과 수교를 통해서 우크라이나를 승인하였으며 1992년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북한도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를 승인하여 외교관계를 맺었지만 1998년 공관을 철수하였다. 북한이 크림반도를 러시아 영토로 승인하자 결국 외교적 보복조치로 모든 무비자협정을 파기하고 북한인들을 추방하는 조치를 내렸다.


우크라이나의 공익광고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그럭저럭 좋은 편이지만 서구권만큼이나 동양인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다가 관광을 갔을 때 중국인으로 오인받으면 불이익을 당한다고 하니 조심하도록 하자.

여담이지만 우크라이나 철도국이 현대로템에서 구입한 간선 전기 동차가 고장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이 설원 한가운데에서 난방이 끊긴 열차 안에서 벌벌 떨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현대의 현지식 발음인 '휸다이'가 욕으로 쓰이고 있다고...[52] 그래도 차후 철도 관련 유지 보수는 수주하는 데 성공했다.

12. 문화[편집]

12.1. 축구[편집]

축구에서는 변방국으로 인식되었으나 자국 명문구단 디나모 키예프샤흐타르 도네츠크의 국제무대 선전과 안드리 셰브첸코라는 국가적 영웅이 등장한 이후, 2006 독일 월드컵 8강 진출 성과를 이뤄냈다. 국대에 대해 자세한 것은 우크라이나 축구 국가대표팀 문서 참조.
우크라이나 여성들이 가장 원하는 배우자가 축구선수다.

러시아가 크림 반도의 프로 축구단까지 자국 리그에 병합했다. 러시아 축구협회는 8월 1일 성명을 통해 크림반도에 있는 SKChF 세바스토폴, 젬추지나 얄타, 타프리아 심페로폴 등 3개 구단을 러시아 프로축구 리그에 편입시켰다고 밝혔다.

이들 우크라이나 클럽은 올 시즌 개막과 함께 러시아 3부 리그에서 활동하게 된다. 러시아는 올해 2월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의 병합을 선언하고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축구협회는 러시아의 축구 클럽 병합에 강하게 반발했다. 협회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러시아가 월권행위를 저질렀다”고 성토했다. 그러면서 "축구에서 정치가 배제되기를 원한다."며 국제축구연맹(FIFA)과 유럽축구연맹(UEFA)의 제재를 촉구했다.

FIFA는 축구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축구 경기나 행정에 대한 정치권력의 개입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이 원칙을 어기는 회원국에 자격정지나 제명과 같은 제재를 가하기도 해 향후 대응이 주목되었지만 이 3개 구단주도 러시아계라든지 친러시아적인 태도를 이전부터 밝혀왔으며 다수 서포터들도 지지를 보내왔기에 문제시될 사항이 없는 걸로 알려졌다. 때문에 피파나 UEFA는 그다지 제재할 분위기를 보이지 않고, 이 3개 구단의 러시아 프리미어리그 승격 및 유러피언컵 진출여부도 인정하면서 사실 더 이상 우크라이나로서도 뭐라고 할 말이 없게 되었다.

러시아는 2018 러시아 월드컵 본선 때 크림 반도에 참가국 베이스 캠프를 차리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12.2. 그 외 스포츠[편집]

복싱헤비급 챔피언 비탈리 클리츠코&블라디미르 클리츠코 형제가 있다. 형 비탈리는 1999년 처음으로 WBO챔피언에 오른 뒤 통산 45승 2패 41KO를 기록하고 헤비급을 천하통일한 뒤 2012년 은퇴했다. 그후 동생 블라디미르는 헤비급 통산 2위의 타이틀 보유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WBA,WBO,IBF 헤비급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센 형제 중 하나이다. 형 비탈리는 복싱 은퇴후 현 야당인 우크라이나 개혁민주동맹당의 당수로서 정치에 참여하고 있으며 대통령 출마를 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지지를 얻어 2014년 6월 키에프 시장에 당선되었다.

종합격투기에서는 90년대 무규칙격투를 주름잡았던 이고르 보브찬친이 대표적이다. 격투황제 에밀리아넨코 효도르와 그 동생 에밀리아넨코 알렉산더는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으로 알려져 있다.

펜싱으로도 알려져 있다. 지금 은퇴한 남자 플뢰레의 세르히 홀루비츠키는 김영호와의 1997년 세계선수권 결승전에서 연장혈투 끝에 금메달을 거미쥐었다. 3년 후 김영호와 홀루비츠키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8강에서 만났는데, 홀루비츠키는 이 경기에서 5대 15로 대패한 뒤 그대로 은퇴하였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처음 선보인[53] 여자 사브르 단체전의 초대 금메달리스트가 우크라이나 국가대표 선수들이다. 당시 올가 카를란[54]가 마지막 바우트에서 맹활약을 펼친 것에 힘입어 홈팀인 중국을 1점차로 잡고 우승하였다. 바로 앞선 준결승전에서는 매리얼 재거니스를 필두로 사브르 개인전에서 금, 은, 동메달을 모두 휩쓴 당시 세계랭킹 1위 미국을 6점차로 꺾었고, 더 전으로 돌아가 8강에서는 현재 세계랭킹 1위(당시 세계랭킹 4위)에 군림하는 러시아를 꺾었다. 이후 카를란은 크게 성장하였고, 여자 사브르 내에서 가장 꾸준한 선수들 중 하나가 되었다. 여자 에페의 야나 솀야키나는 런던 올림픽 여자 에페 개인전 결승에서 독일의 브리타 하이데만을 연장전에 꺾고 우승하였다.

리듬체조를 상당히 잘 하는 국가. 특히 90년대 초반엔 러시아가 부럽지 않을만큼 최 정상의 지위를 누리기도 했다. 현재는 이 바닥 1인자인 러시아가 굳게 버티고 있고 점점 선수들의 질적 저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한탄이 나오긴 하지만 아직까진 러시아, 벨라루스와 함께 리듬체조 빅3로 꼽힌다.

그 밖에 체스를 무진장 잘하는 나라다. 현재 러시아에 이어서 세계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꼴랑 1명 있는 그랜드 마스터를 74명이나 보유하고 있는 나라다.

야구도 한다. 우크라이나 야구 국가대표팀 참조.

12.3. e스포츠[편집]

e스포츠 실력이 우수한 나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으레 블리자드 행사에서 스타크래프트에 출전하면 한국선수 상대로 꼭 한판정도는 이기는 스타 강국중에 하나이기도 하며, 그 외 워크래프트 3, 최근에는 스타크래프트 2까지 유럽 내에서는 우수한 게임 강국 중에 하나이다. 동구권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크래프트 2 프로게이머 DIMAGA가 우크라이나 출신. 도타 2 강호, 2014 월드 오브 탱크 그랜드 파이널 우승팀인 Natus Vincere도 우크라이나 팀이다.

동구권 한정으로 폴아웃 3 이상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FPSRPG 스토커 시리즈가 이 나라에서 나온 물건이다.[55] 가끔씩 러시아에서 나온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을 아는 사람(특히 우크라이나 사람)이 그런 소리 하는걸 보면 폭풍같이 깐다.그리고 피를 뿜깼지

워크래프트3 유명 프로게이머로는 Foggy와 Sonik 이 있으며 둘다 유럽 최상위권의 나이트엘프 유저이다.
특히 Foggy는 2016 골드리그 챔피언십 시즌1에서 세계최고의 오크 유저인 박준을 꺽는 저력을 보이며 물이 올랐다는 평을 듣게되었고 워크대회 규모로는 가장큰 대회인 WCA2016의 유럽예선에서 우승을하며 그랜드파이널 진출을 확정 지었고 Sonik 또한 그랜드파이널 진출은 실패했지만 3위로 좋은 기록을 마크했다.

12.4. 기타[편집]


세계테마기행[56]에 따르면, 크림반도의 항구도시 얄타 토박이들은 결혼식을 굉장히 간소하게 한다고 한다. 10여명 이내의 하객이 올 뿐이다. 그리고 결혼 서약서에 서명하고, 법적인 효력을 발생하는 문서를 들고 기념 촬영하는 방식으로 결혼식을 진행한다. 사회자도 따로 없고, 정부 공인 주례사가 결혼식을 진행한다. 허례허식이 전혀 없다.

13. 우크라이나 국적, 출신 캐릭터[편집]

14. 우크라이나 출신 인물[편집]

러시아 인물로 알려진 명사들이 알고 보면 우크라이나 태생인 경우가 꽤 많다. 예술계로 예를 들면 문학가 니콜라이 고골과 음악가 니콜라이 카푸스틴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가 그런 경우. 네오 클래시컬 메탈 장르에서 유명한 키보디스트인 비탈리 쿠프리(Vitalij Kuprij)도 여기 태생이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에밀 그레고로비치 길렐스(오데사 출신),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스뱌토슬라브 리크테르/리히테르), 마리아 그린버그 등의 러시아 출신 피아니스트로 알려진 이들이 사실은 우크라이나 출신. 특히 유대계가 많다. 또한 과학기술, 정계 등 다른 분야로 범위를 넓혀보면 이런 현상은 더욱 강하다. 우크라이나어를 러시아어 사투리 따위(...)라 했던 레프 트로츠키가 우크라이나 태생(다만 혈통은 독일계 유대인이다)이며, 소련 서기장도 둘이나 배출했다. 지금도 반서방/반우크라이나 성향을 드러내는 러시아 정치인들(특히 통합 러시아당) 중 우크라이나 출신이 꽤 섞여있는 것은... 흠좀무. 소련의 자랑인 우주개발사에서도 세르게이 코롤료프가 우크라이나 태생이다. 우크라이나 동부의 공업지대에도 항공우주공학 쪽의 업체들이 꽤 있었는데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뒤 그 제작사들이 우크라이나 정부의 국유화 조치를 받았다. 이에 러시아의 미르 프로그램이 심하게 뒤틀리며 미국과 손을 잡아야 했을 정도. 2015년 말 국제우주정거장에 체류중인 러시아 우주비행사 3인 중 두 명이 우크라이나 출신 러시아 군인들이다. 단, 현재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은 99.8%가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언급된 인물들의 상당수가 러시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것을 알 수 있다.

15. 기타[편집]


[1] 2014년 크림 반도가 나가면서 약 200만명이 줄어들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는 약 4,200만명대로 추정된다. 또한 돈바스 전쟁으로 도네츠크 인민 공화국, 루간스크 인민 공화국에 거주하는 380만 명이 사실상 이탈.[2] 러시아어로도 우크라이나어로도 여기에 국가, 땅, 영토, 변방, 끝자락 등의 의미가 있다.[3] 여기에는 다차라는 러시아식 별장에서 지은 농작물을 팔아서 번 수입부터 밀수나 마약, 성매매 등에 의한 수입까지 다양하다.[4] 2014년 1월 1달러당 7흐리브냐 수준에서, 2016년 4월 1달러당 25흐리브냐로 1/3 이하로 폭락하였다. 이는 물론 유럽권 내에서 가장 심하게 폭락한 화폐이며, 2위는 우크라이나와 싸우던 러시아 루블이다. 러시아 루블은 반토막났다.[5] 2015년 평균급여는 약210달러[6] 갈리치아의 서남부 5주는 제외. 여기는 오스트리아(이후의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차지했다.[7] 가장 러시아의 지배를 덜 받은 갈리치아 지방은 우크라이나의 주류 정교인 정교회가 아니라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라는 동방 가톨릭 교회의 일파가 다수를 차지한다.[8] 적백내전 당시인 1921년~1922년에도 이미 1차례 대기근이 있었다고 한다. 1932년 대기근의 원인과 결과 논란은 문서 참고.[9] 이런 독일의 우크라이나 천시는 독소전 패배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도 지적받는다.[10] 홀로코스트 당시 우크라이나 인들이 대독 협력자로 유대인 대량학살에 가담한 건 매우 유명하다.[11] 폴란드식 이름으로는 르부프Lwów. 공작의 아들 '레오(사자)'의 이름을 따서 붙인 곳이라서 라틴어로는 레오폴리스라고 했던 도시다. 안 그래도 독일어로 뢰베Löwe가 사자인데, 정작 독일에서는 렘베르크(Lemberg)라고 한다.[12] 반파, 반노 성향을 가진 극우 정당 자유당의 지지도가 높은데, 재작년에 폴란드 코모로프스키(Bronisław Komorowski) 대통령이 서부 우크라이나를 방문했다가 극우청년한테 계란을 맞았다. 폴란드 영토였는데 왜 폴란드 반대 성향이 강하냐면, 이 동네 일대가 2차대전 이후 영토, 인구 교환 때 까지 지주, 귀족 등 상류층은 폴란드인, 의사 같은 전문직은 유대인들이 다 해먹고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를 믿는 현지 동슬라브계 우크라이나인들은 대부분 농노 취급을 당했기 때문이다. 현재 리비우는 우크라이나인이 전체 인구의 88.1%로 압도적으로 많다(단 전쟁 전에는 폴란드계가 전체 시민의 2/3을 차지하긴 했다). 폴란드계는 2차대전 이후 대부분 현재의 폴란드 영역으로 쫓겨났고, 남아있는 폴란드계 숫자는 타 지역보다 많지만 그게 전체 인구의 1%에 불과하다. 게다가 우크라이나의 폴란드계 자체가 원래 가장 우크라이나에 동화한 집단이다.[13] 옛 이름은 폴란드의 "헤트만" 스타니스와프 포토츠키의 이름을 딴 스타니슬라보프이며, 1962년에 작가 이반 프란코의 이름을 따서 개칭되었다.[14] 리비브, 이바노프란키브스크 같은 경우는 도시로서의 기원이 중세 폴란드 왕국이 세운 도시들이었다. 이 동네는 그 이후로 줄곧 도시 외곽의 농촌은 우크라이나인 절대 다수였던 반면, 시내의 전문직은 유대인들이, 정치적, 사회적 엘리트들은 폴란드인들이 양분하며 공존했으며, 19세기에는 폴란드 민족주의자들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 양쪽의 핵심적인 활동 거점이었다.[15] 몰도바 공국은 오스만 제국이 점령했고, 이후로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는데, 초기 독립 상태에서 이 바다 지역을 나중에 차지한 셈이라 반드시 자기 영토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민족 구성을 따지더라도 몰도바는 루마니아의 일부였다가 소련이 병합했으니(...).[16] 크림 반도는 2014년에 크림 공화국으로 독립하여 우크라이나에서 벗어난다.[17] 2015년 PPP기준 1인당 GDP에서 러시아 25,411달러, 벨라루스 17,654 달러, 우크라이나 7,519달러[18] 몽타주 기법을 처음 쓴 장면으로 영화학도들은 반드시 봐야 하는 장면이다. 워낙 유명해진 나머지 아예 이름이 포템킨 계단(Потьомкінські сходи)으로 붙여졌다.[19] 다만 인구구조 자체는 러시아벨라루스와 비슷하다. 차이점이라면 우크라이나의 상황이 러시아보다 안 좋다는 것.[20] 다만 전후 베이비붐이라고 해도 무턱대고 애를 쑴풍쑴풍 낳아재끼는 수준은 아니었고(연 출생아수 80만명대 출산율 2명대 중후반정도의 수준, 참고로 러시아, 벨라루스, 발트 3국 등의 상황도 우크라이나와 비슷했고, 동유럽이나 서유럽 지역도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역시 사정은 비슷했다.), 인구도 비교적 완만하게 증가하는 추세였다. 진짜로 얘기를 숨풍쑴풍 낳아재끼는 수준이었으면 우크라이나 인구가 최소한 프랑스보다 많았을거다[21] 당시 대한민국의 인구는 4000만 명을 넘은 직후였다.[22] 우크라이나도 소련 붕괴 이후에 평균수명이 70세에서 67세로 감소하긴 했다. 물론 이후에 회복되었다.[23] 몰도비안 타타르족의 언어[24] 일반적으로 같은 앵커가 러시아어로도, 우크라이나어로도 모두 진행한다.[25] 서로 대립 관계에 있는 전치사다. 정확히는 в+대격, из+생격이 대립 관계.[26] 마찬가지로 서로 대립 관계에 있는 전치사다. 정확히는 на+대격, с+생격이 대립 관계.[27] 이 부분에서는 편의상 в, на+전치격 형태를 사용하였다.[28] 필리핀의 경우에는 영어(Philippines)로나 러시아어(Филиппины)로나 모두 원형이 복수형이기 때문에 복수 전치격 어미 -ах를 써야 한다. 이 점은 네덜란드(Нидерланды)도 마찬가지.[29] 다만 일부 뉴스 앵커들의 경우 в Украине를 쓰는 경우도 있다.[30] 굳이 비유하면 일본인들이 한국을 이전부터 불러왔다는 이유에서 한국을 남조선이라 부르고, 서울을 경성(실제로 키이우에서는 자국의 로마자 표기를 러시아식 키예프(Kiev)에서 키이프(Kyiv)로 변경해달라고 위키피디아에 요구한 적이 있었다.)이라고 부른다고 생각해보자. 설사 일본어에서 이러한 표현이 정착되었다고 해도, 한국인 입장에서는 이를 좋게 보기는 힘들 것이다.[31] 꼭 전문 패션모델 뿐 아니라 쇼핑몰, 홈쇼핑 모델, 누드모델, 각종 행사 도우미 등 아름다운 서양 여성을 찾는 수요는 상당히 많다.[32] 약 250흐리브냐의 과태료에 해당한다고 한다.[33] 설문에서는 자신의 매춘 경력을 숨기는 것이 대부분인지라,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34] 독일군의 남부집단군을 견제하기 위해 키에프 군관구는 소련군 군구에서도 손꼽히는 중무장 군구였다.[35] 영화 로드 오브 워의 모티브가 되었다. 주인공 유리가 우크라이나에 방문해 우크라이나군 장교인 삼촌한테 뇌물먹이고 AK-47 4만정을 빼돌리는 걸로 시작해 탱크, 장갑차에 이어 공격 헬기까지 빼돌린다.[36] 왜 이리되었냐면 대선 결선에 올라온 야당 후보가 공산당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심한 서부에서 쿠츠마를 찍은 것.[37] 다만 현재처럼 동부와 서부의 정치성향이 극과 극으로 까지 갈리지는 않았다. 1991년 대선과 더불어 우크라이나에서 동서구도가 무의미 했던 대선이다(정확하게는 서부에서 바체슬라프 후보가 서부 3개주만 1등을 달렸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크라우추크가 압승을 거두어서 동서 구도가 별의미가 없었던 것).[38] 쿠츠마 집권기던 2000년 9월 16일 반정부 성향의 '우크라인스카 프라브다'의 공동 창립자인 조지아 출신의 기자 그리고리 곤가제 (Георгій Русланович Ґонґадзе, 조지아어 გიორგი ღონღაძე)가 갑자기 실종되어 2달 후인 11월 3일 키이우 근교의 한 숲에서 머리가 날아간 채로 발견된 적도 있었다.[39] 우크라이나어에서 Щ(Shch, Sh)는 지역이나 개인별로 발음에 차이가 있는 편이다. 원래는 옛 러시아어처럼 '시취'로 발음했지만, (예: Борщ (보르시치(shch), 보르시(sh)) 최근 들어서는 쉬로 발음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어에서는 거의 쉬로 정착되었다.)[40] 사실 금융위기 이후 타격을 입은 경제를 회복하지 못한 우크라이나가 경제지원을 위해 EU와 러시아와 협상했음을 감안하면 유로마이단의 간접적인 원인이기도 하다.[41] 이미 우크라이나는 1994년 부다페스트 협약으로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신 크림 반도 등의 영토 주권을 보장받고, 1997년 최종적으로 러시아와 크림 반도 영유권 문제를 해결한 상태였다.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설마 러시아가 이를 어길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42] 2005년 WBC 세계 챔피언(!)인 비탈리 클리츠코국회의원을 하고 있는데, 패싸움이 벌어졌을 때 구경하는 장면이 찍히기도 했다(…). 링크 그리고 2014년 4월에는 아예 비탈리 클리츠코 자신이 국회 패싸움의 시작이 되기도 했다(....)기사링크[43] 당장 남오세티아 전쟁에서도 조지아 입장에서는 분쟁 중이던 자국의 영토(압하지아, 남오세티아)에서 벌이는 군사작전 중 러시아군이 공격 받았다는 이유로 전면공격을 받았다. 왜 크림 사태 때 우크라이나군이 엄밀히 말해 반란군에 속하는 민병대와 적극적으로 교전하지 않았는지 생각해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44] 농업이 발달한 서부가 친서방 성향이 강하고, 공업지대가 발달한 동부가 친러 성향이 강한 것은 단순히 역사적 정체성으로만 설명하기는 힘들다. 서부 입장에서는 농업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리적으로 수출에 용이한 유럽연합과 경제협력(유럽시장의 관세를 낮추는 자유무역협정 등)을 선호할 것이고, 소련 시절 건설된 대규모 중공업 공업단지를 운영해야 하는 동부 입장에서는 중공업 생산품의 주 소비자인 러시아와 협력 관계가 중요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우크라이나의 항공사인 안토노프만 해도 자사 주기종인 An-124의 주고객이 러시아 공군과 볼가-드네프르 항공이였다.) 즉, 민족적 감정이나 논리 이전에 당장 먹고 사는 경제적 이권이 걸린 문제였기에 서로 치열하게 대립할 수 밖에 없었다.[45]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언제든지 군사적 개입 등으로 압박하겠다는 노골적인 의사표현이었다.[46] 만약 우크라이나가 크림 반도와 같이 대응했다면, 당장 오데사, 하르키프 등 친러 세력의 시위가 격렬하던 지역에서도 무장 소요가 겉잡을 수 없이 확대될 지경이었다.[47] 석유값 하락세에도 불구하고 사우디아라비아가 떠오르는 원유 주요 소비국인 중국을 고객으로서 잡아두기 위해 원유 수출량을 줄이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한다.[48] 중장비를 동원한 대규모 전투만 없을 뿐 엄연히 전투는 계속되는 상황이다.[49]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의 가입은 경제사정이 좋던 2007년에 이뤄졌는데도 EU 내에서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그 뒤로 비슷하거나 그 이하의 경제력을 가진 국가를 가입시키는 일은 다시는 없었다. 하다못해 크로아티아도 국민소득이 꽤나 높은 축에 들어간다.[50] 골때리는 건 네덜란드가 2016년 상반기 EU의장국이다...[51] 예를 들자면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를 드니프르로 바꿨다.[52] 우크라이나 철도국이 국제대회로 급하게 만들어달라고 요청했으나, 말도 안 되는 납품기한 때문에 타국의 철도차량 제조회사들은 거절했지만 현대로템이 계약을 따냈다. [53] 개인전은 전 대회인 2004년 아테네 올림픽때 처음 등장하였다.[54] 런던 올림픽 여자 사브르 개인전 시상식에서 김지연의 볼에 키스해 화제가 된 인물[55] GSC Game World가 우크라이나 회사다.[56] '황금의 땅, 우크라이나 , 3부 흑해가 품은 보석, 얄타'편 [57] 국적은 러시아지만 출생지는 키이우로 되어 있다.(당시 러시아에 합병된 상태라서 그런 듯)[58] 정체는 먼 미래에서 온 렉스 루터의 후손이지만 자란곳은 우크라이나이다.[59]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건이 이 게임의 모델[60] 구소련 시절의 우크라이나 출신이다.[61] 출생지는 우크라이나이지만 오스만 제국의 하렘으로 팔려왔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 사람이라 불러도 무방하다.[62] 동독군 소속이지만 우크라이나 출신 난민이다. 해당 번외면 마지막에서 안타깝게 사망한다.[63] 키이우 출신. 탄생은 500년 정도 전. 리투아니아 대공국일 때다(...)[64] 키이우 태생 유대인.[65] 출생은 우크라이나이지만 활동은 러시아에서 했으며 러시아의 문학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고골 자신은 우크라이나어를 모국어로, 러시아어를 외국어로 생각했고 그의 작품들 중에는 우크라이나를 배경으로 하는것들도 많다. 비이나 타라스 불바에서는 강한 우크라이나의 정취가 난다.[66] 우크라이나 홀리프카 출신. 러시아에서 활동하고 있다.[67] 의외로 러시아에서 출생한 러시아인이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 우크라이나에 오래살았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에 대한 애정이 강했고 서기장 재직시절에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 넘겨주는 등 우크라이나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폈기 때문에 사실상 반(半)우크라이나인 취급을 받는다.[68] 흐루쇼프와 달리 이쪽은 혈통까지 우크라이나인이지만 권력 상층부로 접근하면서 혈통을 러시아인으로 세탁했다.[69] '루슬라나'로 알려진 우크라이나 슈퍼스타 가수. 생모가 러시아인이다.[70] 오데사출신의 유대계 우크라이나 소련인. 일본 게임회사 타이토의 전신이 되는 타이토양행의 창립자.[71] 아버지는 세르비아인, 어머니는 러시아인이다.[72] 부모 모두 유대계인 유대인이다.[73] 현대건설 배구단의 외국인 선수 아버지는 러시아인 어머니는 우크라이나 인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났다. 국적은 아제르바이잔 우크라이나 이중국적[74] 역대 8번째 우주인이자, 최초의 우크라이나 태생 우주인. 보스토크 3호와의 최초의 랑데부 비행 임무를 수행했다. 소련 해체 이후에는 러시아에서 살았지만 우크라이나에서도 영웅으로 대접받았으며 2009년 타계하자 양국에서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75] 쉴레이만 대제의 황후. 우크라이나 출신 노예에서 오스만 제국의 황후가 되었다. 그녀의 생애는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무흐테솀 유즈이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