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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始祖)
경원황제(景元皇帝)
요(姚)
익중(弋仲)
생몰 기간
280년 ~ 352년
부친
요가회(姚柯回)

1. 개요2. 생애3. 참고 항목


1. 개요[편집]

오호십육국시대 후진을 건국한 요장의 부친으로 요가회(姚柯回)의 아들이다. 아들 요장이 후진을 건국하자 시조(始祖) 경원황제(景元皇帝)로 추존되었다.

2. 생애[편집]

311년, 영가의 난이 일어나자 요익중은 이듬해 무리를 이끌고 유미(榆眉)로 이동하여 부풍공(扶風公), 호서강교위(護西羌校尉), 옹주자사(雍州刺史)를 자칭했다.

323년, 전조유요가 양왕을 자칭한 진안(陳安)을 정벌하자 요익중은 저족강족을 이끌고 전조에 칭신하였다. 칭신한 요익중은 평양공(平襄公)에 봉해지고 평서장군(平西將軍)에 임명되었다.

328년, 유요가 후조석륵에게 패해 포로가 되자 요익중은 태자 유희와 함께 상규(上邽)[1]로 피신하였다. 이듬해 석호가 상규를 공격해오자 요익중은 후조에 투항했고, 후조의 행안서장군(行安西將軍) 및 육이좌도독(六夷左都督)에 임명되었다.

333년, 승상 석호가 요익중, 부홍의 건의로 관중 지역의 호족과 저족, 강족 10만호를 관동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요익중은 양평현공(襄平縣公)으로 개봉되었고, 분무장군(奮武將軍), 서강대도독(西羌大都督)으로 임명되었으며 자신의 부족민들과 함께 섭두(灄頭)[2]로 옮겨 살게 되었다. 이후 석호가 석홍을 폐위시키고 즉위하자 요익중은 십군육이대도독(十郡六夷大都督), 관군대장군(冠軍大將軍)에 임명되었다.

349년 양독(梁犢, ? ~ 349)의 반란을 진압하여 서평군공(西平郡公)에 봉해졌다. 동년 석호가 죽고 11살의 석세가 즉위하자 유태후(劉太后, 318 ~ 349)와 장시(張豺, ? ~ 349년 6월 16일)가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고 반란을 진압한 후 돌아오던 요익중은 부홍과 함께 이성(李城)[3]에서 석호의 9남인 석준에게 즉위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자 석준은 반란을 일으켜 석세를 폐위시키고 즉위했다. 그러나 염민이 석준을 죽이고 석감을 세워 전권을 장악하자 요익중은 석지와 연합하여 염민 토벌군을 일으켰다.

350년, 염민이 석감을 죽이고 즉위하여 염위를 세우자 요익중은 군을 이끌고 석지를 후조의 황제로 세웠다. 이후 석지에 의해 친조왕(親趙王) 및 우승상에 임명되었다.

351년, 염민이 후조를 공격하자 요익중은 아들 요양을 보내 석지를 구하게 했으나 배신한 유현(劉顯)에게 석지가 피살당하자 요익중은 아들들과 동진에 투항했고 고릉군공(高陵郡公)에 봉해졌다. 이듬해 73세의 나이로 죽었으며 그의 무리는 아들 요양이 계승하였다.

이후 후진이 건국되자 아들 요장에 의해 시조(始祖) 경원황제(景元皇帝)로 추존되었다.

3. 참고 항목[편집]

[1]간쑤성 텐수이.[2]허베이성 짜오창.[3]허난성 원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