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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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 임페라토르
Caesar | 카이사르
파일:Julius_Caesar_Coustou_Louvre_MR1798.jpg
Nicolas Coustou,
'율리우스 카이사르', 1696년,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소재.[1]
출생
기원전 100? 7월 12/13일
사망
기원전 44년 3월 15일
재위
로마 공화정 종신독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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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없음
칭호
임페라토르(imperator)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Gaius Julius Caesar)
신장
174cm
후임
1. 개요2. 언어별 표기3. 이름의 어원4. 생애
4.1. 가족 배경4.2. 젊은 시절4.3. 장년기4.4. 갈리아 전쟁 시기4.5. 카이사르의 내전4.6. 카이사르의 개혁4.7. 종신독재관 시절4.8. 3월 15일
5. 사후의 카이사르6. 그에 대한 평가
6.1. 정치적 평가
6.1.1. 긍정적 평가6.1.2. 부정적 평가
6.2. 군사적 평가: 기적의 반전 전술가
7. 사생활8. 카이사르의 교양9. 카이사르의 행운10. 기타11. 카이사르가 치른 유명한 전투들12. 대중 문화

1. 개요[편집]

Vēnī. Vīdī. Vīcī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율리우스 카이사르, 기원전 47년 폰투스 전쟁에서 승리하고 원로원에 보낸 편지의 전문

CAIVS IVLIVS CAESAR[2]

고대 로마정치인이자 군인, 성직자, 저술가. 무엇보다 서구권에서 황제 개념의 시초가 된 인물로, 본인은 황제가 된 적이 없으나, 그의 이름은 황제라는 의미로 남게 되었다.[3]

삼두정치를 통해 로마를 통치했으며, 갈리아를 정벌하고, 정적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에서 승리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자신에게 정치 권력을 집중시켰으나 원로원에서 암살당했다. 하지만 이미 카이사르로 인해 로마 공화제는 사실상 종식되었고,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로마는 제정으로 변모해 로마 제국이 되었다.

카이사르가 황제였는지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이견이 있어왔는데, 근대 이전까지는 카이사르를 최초의 로마 황제로 여기는 풍조가 강했으며, 그 이름은 후대의 유럽 국가에서 황제를 뜻하는 단어로 변형되었다. 그 뒤 19세기 이후 역사학계에서 카이사르의 정치 체제와 아우구스투스원수정과의 차이를 들어 아우구스투스를 최초의 황제로 보는 시각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2. 언어별 표기[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C3%A9sar_%2813667960455%29.jpg
이탈리아 투스쿨룸에서 발굴된 카이사르 흉상으로
유일하게 카이사르 생전에 제작된 흉상으로 추정된다
고전 라틴어(Latina classica)
카이사르(Caesar)
카이사로스(Καισαρος)
체자어(Cäsar), 카이저(Kaiser)
체자리(Цезарь)
세사르(César)
시저(Caesar)
체사레(Cesare)[4]
교회 라틴어
체사르(Caesar)
세자르(César)
尤利烏斯·凱撒

3. 이름의 어원[편집]

고대 로마의 초기 알파벳 체계는 그리스 문자가 에트루리아에서 변형된 것이 로마로 전해진 것인데, 에트루리아 언어에서는 /k/와 /g/ 발음이 구분되지 않아 /g/ 발음을 표기했던 감마가 C로 변형되어 /k/ 발음에 썼다. 그래서 초기 로마자에는 G가 없고 C로 /k/와 /g/를 모두 나타냈다. 추후 G가 추가되었지만, 인명을 표기할 때는 초기 용법에 따라 CAIVS, CNAEUS 등으로 표기된다.

카이사르 생전에는 고전 라틴어가 사용되어서 카이사르에 가까운 발음이었다. 이는 고대 이집트에서 이름을 표기할 때 사용한 카르투쉬에 분명히 "카"이사르로 표기되는 등 사료가 많이 존재하기 때문에 교차검증이 가능하다. 로제타 석에서도 "KAISRS"라는 발음표기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라틴어 'Caesar'의 그리스식 표기 'Καισαρος(카이사로스)'를 다시 상형문자로 옮긴 것.

현재 국립국어원에서 인정한 표기는 카이사르다.[5] '케사르'라고 읽는 사람도 있다. 한국어 개신교 성경에는 '가이사'로 표기된다.

카이사르의 어원에 대한 설은 당대부터 많이 퍼져있었다. 대다수 역사가들은 카이사르라는 이름은 카이사리에스(Caesaries)의 변형으로 본다. 저 단어의 뜻은 "풍성한 머리를 가진"이란 뜻으로, 아마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상 중 한 명이 태어났을 때부터 풍성한 배냇머리를 가지고 있어서[6] 붙었을 것이라 보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집안 남자들에게 계속 대머리가 유전되다보니 희망사항으로 저런 이름을 붙였다는 주장도 있다. 카이사르가 대머리였다는 걸 보면 꽤 신빙성이 높은 설이다. 카이사르는 율리우스 가문의 씨족 중 한 개의 이름, 즉 코그노멘(Cognomen)이고 주로 먼 조상 중 한 명의 별명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그리고 코그노멘에는 주로 그 시조뻘되는 사람의 신체적 특징을 담고 있는 게 유난히 많아서[7] 더 신빙성이 가는 설이다.

다른 속설에 따르면 '카이사르'라는 단어는 본래 카르타고어로 '코끼리'를 뜻하는 카이사이(Caesai)의 변형이라는 '썰'이 당대부터 퍼져있었다. 로마와 카르타고의 전쟁에서 한 병사가 전투 중 단신으로 코끼리를 죽이는 대활약을 해서 이런 별명을 얻었는데, 이 별명이 가문명으로 정착되었고 카이사르는 그의 후손이다. 이 '썰'이 맞는다고 가정한다면, 어찌 보면 로마에게 멸망한 카르타고의 '코끼리'라는 낱말이 한 로마 병사를 거쳐서 카이사르에게 전달되고 마침내 황제를 뜻하는 대단한 말까지 승격되어 현대(독일어 카이저(Kaiser), 러시아어 차르(Царь/Tsar) 등)까지 생명력이 남은 셈이다. 카이사르 개인은 이름이 코끼리에서 왔다는 설을 굉장히 좋아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어마어마한 전공[8]을 세운 전쟁 영웅일화가 더 폼도 나고, 정작 이름과는 달리 자신은 대머리였다는 아이러니함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파일:external/www.romanemperors.com/julius-caesar-elephant-coin.jpg
그래서 본인을 새긴 주화에 코끼리를 넣기도 했다.[9] 위 사진처럼.

4. 생애[편집]

4.1. 가족 배경[편집]

카이사르는 유서깊은 귀족으로 혈통이 왕정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율리우스 가문 출신이다. 다만 당시 율리우스 가문은 오랜 귀족이기는 했어도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나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가문처럼 공화국 고위직을 독점하는 가문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혈통은 있지만 재산이 부족했고, 때문에 율리우스 가문 사람들은 그 오랜 혈통에도 불구하고 집정관직까지 진출하지는 못하는 상태였다.[10]

그런데 카이사르가 태어날 무렵 이 가문의 운명이 크게 달라지게 되는데, 이는 성공적인 혼사 덕분이었다. 카이사르의 할아버지 가이우스는 부자이자 전도유망한 군인이지만 시골 아르피눔 출신의 평민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사위로 맞았는데, 가문의 이름이 부족했던 그에게 이 결혼은 큰 도움이 되었다. 이후 마리우스는 첫 집정관 직에 오르고 유구르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20만에 가까운 로마군을 잃게 하면서 한니발 이래 최악의 위기를 가져온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아내면서, 로마 제3의 건국자로 불리고 남들은 한두 번 지내기도 힘든 집정관직을 일곱 차례나 역임하게 된다.

카이사르가 태어나기 전 해인 BC 101년에 마리우스는 게르만족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식을 치렀고, 마리우스의 명성과 인기는 절정에 올라 있었다. 이런 마리우스의 후광과 재산에 힘입어 카이사르 가문에게도 고위직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카이사르의 삼촌인 섹스투스는 BC 91년 집정관, 카이사르의 오촌당숙인 루키우스는 BC 90년 집정관을 지내게 된다. 카이사르의 아버지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트라보 역시 법무관과 아시아 총독을 역임했으나, 집정관이 되기 전, BC 85년에 사망했다[11]. 아버지 쪽에서 오촌당숙과 삼촌이 집정관을 지냈고, 아버지가 법무관이었으니 카이사르 가문은 다시 로마의 최상층에 진입한 셈이었다. 아버지가 끝내 집정관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일은 카이사르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마리우스와 킨나로 이어지는 포풀라레스 정권에서 아버지 가이우스가 집정관을 지냈으면 그는 마리우스파 핵심인사로 분류되었을 것이고, 그의 아들인 카이사르 역시 술라의 숙청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고위직으로 진출할 길은 열렸어도 카이사르는 그렇게 부유한 편은 아니었다. 그의 출생지는 로마의 대표적인 서민 주거지인 수부라로 귀족들이 선호하는 지역이 아니었다. 다만 빈곤층에 속하는 것은 아니었고, 지금으로 치면 주인집에서 사는 강북 건물주쯤의 재산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이탈리아 반도의 한 지역 전체를 통채로 소유한 지주인 폼페이우스나 대규모 사업체를 경영하는 재벌 크라수스 같은 인사들에 비하면 재산이 많이 적었을 뿐이다. 가문의 입지에 비해서는 크게 부족한 재산이었고, 때문에 카이사르는 경력을 쌓는 과정에서 큰 돈을 빌리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다. 세계제국으로 도약한 로마에서 공직에는 엄청난 이권이 걸려있었고, 때문에 후보자는 당선되기 위해 큰 돈을 들여 공공사업을 벌이고 유권자들에게 뇌물을 뿌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리우스와의 연대로 카이사르 가문의 출세길이 다시 열리기는 했어도,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카이사르 가문은 당시 로마를 장악한 옵티마테스 고위 귀족들의 일원이 될 수 없었다. 마리우스는 시골 출신의 평민으로 원로원 의석을 오랫동안 차지해온 귀족들과 대립하는 입장이었고, 마리우스의 붕당은 민중파, 혹은 포풀라레스로 불리게 된다. 때문에 카이사르 가문은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출신 가문으로는 옵티마테스[12]에 속해 마땅했으나, 마리우스와의 관계 때문에 포풀라레스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마리우스는 자신의 편을 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카이사르의 오촌당숙인 BC 90년 집정관 루키우스를 살해하기도 했을 정도로 마리우스와 카이사르 가문의 관계는 미묘했다.

또한 카이사르 가문은 술라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술라의 첫 부인이 율리우스 가문의 여자였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13] 마리우스의 처가로서 마리우스 붕당에 깊이 관여하고 있던 카이사르 가문이 술라의 숙청에서 살아남아 로마 정치의 중심에서 계속 활동할 수 있었던 데는 술라와의 인척관계가 유리하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이 결혼에서 태어난 딸인 코르넬리아 술라는 폼페이우스 루푸스와 결혼해 폼페이아를 낳았는데, 이후 그녀는 카이사르의 두 번째 부인이 된다. 카이사르는 마리우스와의 관계를 강조하면서도, 그의 숙적이었던 옵티마테스의 대표주자 술라파와의 관계에도 소홀하지 않았던 것이다.[14]

카이사르 가문이 포풀라레스와 옵티마테스 양쪽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는 점은 어머니 아우렐리아의 가계만 봐도 드러난다. 아우렐리우스 코타 가문 사람들은 옵티마테스 쪽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술라의 숙청에서 살아남는 데 도움을 받기도 했다.[15] 다만 코타 가문은 카토나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처럼 원로원의 특권만을 앞세우는 강경한 옵티마테스 인사들은 아니었고, 카이사르의 외삼촌인 루키우스는 원로원이 독점하던 배심원 역할을 기사계급과 함께 수행하는 법률을 입안하기도 했다.

다만 카이사르는 젊은 시절부터 자신이 민중파라는 것을 위험을 무릅쓰고도 전혀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다. 술라의 숙청 이후에도 마리우스는 평범한 시민들에게 전쟁영웅이자 민중의 편으로 큰 존경을 받고 있었다. 내전과 술라의 숙청으로 마리우스의 친족들은 남김없이 살해당했기 때문에 혈연관계가 없어도 마리우스와의 관계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카이사르뿐이었고, 그는 이 점을 이용해 젊은 나이부터 포풀라레스 붕당의 영수가 된다. 법무관도 지내기 전에 집정관을 여러 차례 지낸 원로에게 어울리는 자리인 최고신관직에 당선되고,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더불어 대등한 입장에서 삼두연합을 맺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나중에 토지개혁 등 그라쿠스 형제가 못 이룬 꿈을 일부분이나마 이룬다.

4.2. 젊은 시절[편집]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 로마 공화국이 혼란하던 시절에 태어났다.

카이사르가 10대일 때의 로마는 원로원 귀족파(옵티마테스)의 거두 술라의 살생부로 대표되는 독재정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어린 시절 가정교사는 당시 웅변가이자 문법학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그니포였다. 그니포는 갈리아 출신이었다고 하는데 훗날 카이사르가 갈리아 정복으로 큰 명성을 얻은 점을 보면 묘한 우연이다.

이 외에도 카이사르의 어린 시절 기록은 생각보다 적은데 이는 당대 쓰여진 카이사르 관련 역사책 중 어린 시절 부분이 죄다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고(기원전 85년) 16세에 유피테르(제우스)의 고위 사제 '플라멘 디알레스(Flamen Dialis)'로 선출되었다(기원전 85년).[16] 그리고 원래 기사계급의 코수티아라는 여성과 약혼을 깨고 당시 반 술라파의 수장이던 루키우스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한다. 이때까지는 가문 좋고 성공가도를 달리는 평범한 로마 청소년의 일대기인데, 문제는 장인인 루키우스 킨나가 기원전 84년에 죽고 2년 뒤에 고모부와 장인과 대립하던 술라가 로마로 군대를 끌고 돌아와서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술라는 돌아오자마자 살생부로 대표되는 마리우스 일파의 대 숙청을 시작한다. 카이사르의 고모부는 마리우스고 장인은 루키우스 킨나인지라 완벽하게 마리우스 일파에 속했지만, 술라는 여러 사람의 만류에 아직 10대(19세)였던 카이사르를 처음부터 숙청 대상으로 지목하지는 않고, 카이사르에게 코르넬리아와 이혼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술라의 이혼 명령을 거절하고 잠적해버린다. 살생부에 다시 오르게 된 카이사르는 우선 모든 재산과 아내의 지참금몰수당하고 플라멘 디알레스 직위도 박탈당한다. 그렇게 숨어지내던 와중에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와 아우렐리우스 코타의 탄원, 그리고 로마에서 존경받는 신분이던 '베스타 신전의 여사제'들까지 들고 일어나서 결국 술라도 여기에 못이겨 카이사르를 사면해준다. 다만, 카이사르가 살아난 것은 무엇보다도 원로원의 유력 가문이었던 외가의 강력한 영향력 덕분이었다. 당장 카이사르의 외할아버지인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만 하더라도 집정관 출신에, 옵티마테스를 잡아죽이지 못해 안달난 포풀라레스의 영수 마리우스에게도 대놓고 저항할만큼 결기있던 인물로, 당연히 당시 옵티마테스의 핵심인사였다.

이때 술라의 숙청이 얼마나 지독했냐면, 위에서 언급한 '살생부'에 이름이 오르면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자손들이 다시는 공직에 진출할 수 없게 되는 정도가 가장 가벼운 벌이고 십중팔구는 그 자리에서 살해당했다. 물론 이때도 재산 몰수는 덤. 게다가 술라는 단순히 자신의 부하들을 동원하는 수준이 아니라 피살자의 재산을 현상금으로 수여하는 제도를 도입해서 살생부에 오른 자가 도망간다고 해도 현상금을 노린 사람들이 피살자를 추적, 살해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카이사르는 이 도주 생활 때 추적을 피하느라 큰 고생을 한다.

수에토니우스와 플루타르코스가 쓴 기록에 따르면 술라는 카이사르를 살려달라는 탄원을 수락하면서 "카이사르의 속에는 백 명의 마리우스가 들어 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17]

카이사르는 비록 술라가 사면해주었지만 안전을 확신하지 못해 로마로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때 사제직 박탈이 전화위복이 된다. 로마의 플라멘 디알레스는 로마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금지되어서 군인 같은 직업을 맡을 수 없었는데 플라멘 직위가 박탈된 카이사르는 해외에서 잠수도 탈 겸 해서 로마군에 입대한다. 기원전 81년부터 카이사르는 아시아 속주 총독이던 마르쿠스 테르무스의 부관으로 군생활을 시작한다. 여기서 카이사르의 평생을 따라다닌 비티니아 국왕 니코메데스 4세와의 게이섹스 스캔들이 시작되었다. 소문의 배경은 카이사르가 함대 차출을 위해 동맹국 비티니아에 사신으로 파견된 적이 있었는데 이때 니코메데스의 궁전에서 오랜 시간을 지체했다. 그리고 다시 복귀한 뒤 또 비티니아를 찾아갔다. 일단 수에토니우스가 (앞의 루머들도 같이 쓴 뒤) 기록한 카이사르가 비티니아에서 머문 공식적인 이유는 채무 관계 청산.

당시 로마는 그리스 문화를 굉장히 존중했고 상류층의 경우 그리스에 유학을 갔다 오는 것이 당연한 관례일 정도였지만 그리스의 동성애 문화만큼은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로마인들은 게이섹스를 윤리적 죄악으로 여긴 것은 아니어도 '남자답지 못한'[18] 행동으로 여겼으며 특히 성관계에서 수동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런 역할은 보통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담당했으나 하필이면 꽃다운 미청년 시절의 카이사르는 수동적인 역할을 했다고 소문이 났다.

훗날 니코메데스 4세는 죽을 때 비티니아 국토 전체를 유증의 형태로 공화국 로마 정부에 넘겨주었는데[19] 당시 로마인들은 카이사르가 절륜한 게이섹스로 늙은 니코메데스 4세를 홀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진실이야 어쨌든 몇몇 사람들만 빼고 다 그 루머를 믿었다. 심지어 카이사르의 병사들조차 그랬다. 농담과 장난을 좋아하던 카이사르도 M자 탈모와 게이섹스 루머로 놀리면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그래도 그와 친했던 병사들은 개선식 등에서 구호로 써먹어가며 잘도 놀려먹었다.
"갈리아는 카이사르에게 정복당했고, 카이사르는 니코메데스 왕에게 정복당했다네. 갈리아를 무찌르고 개선하신 카이사르가 납신다! 셋 중에서 가장 위대한데도 니코메데스 왕은 월계관을 쓰지 못했다네. 대머리 난봉꾼 카이사르가 납시니, 로마인들이여, 어서 와이프를 숨겨라! 그는 금덩어리를 빌려 쓰고는, 고작 갈리아 창녀로 갚는다네."

<카이사르의 생애> 中 "로마 군단의 개선행진가" 필립 마타작 저 "로마 공화정"에서

그렇게 군시절 게이섹스 루머에 시달리던 카이사르는 미틸레네(아나톨리아 반도 동쪽에 인접한 섬) 전투에서 동료의 목숨을 구해서 오크나무 시민관[20]을 받은 일로 이미지가 회복되었으며 킬리키아 전투 등 아시아 인근에서 활동하다가 기원전 78년 술라가 죽자 안전을 확신하고 로마로 돌아온다. 이후 로마에서 현직 집정관인 마르쿠스 레피두스[21]가 반란을 벌일 때 참여를 요청받았지만 참여하지 않았고, 레피두스의 반란이 진압된 뒤 카이사르는 변호사로 나서서 전직 집정관이자 마케도니아 총독이던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를 총독시절 비리 혐의로 고발한다. 비록 재판은 흐지부지됐지만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 재판 때 보여준 변호사로서의 실력도 좋고, 부패나 비리를 저지른 전직 총독 등 높으신 분들도 거리낌없이 디스하며 고소를 날려대어 명성을 얻었다. 키케로도 카이사르의 변론을 보고 "어느 웅변가가 그대를 능가하겠는가?"라며 그를 높이 평가했다.[22]

한창 변호사로 주가를 올리던 카이사르는 수사학 공부를 하러 로도스의 아폴로니우스 몰론[23]에게 유학하러 가기 위해 에게 해를 건너다 해적들에게 납치되었는데, 두목이 카이사르에게 "몸값으로 은 20탈렌트[24]를 받겠다" 라고 하자 카이사르는 겁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대뜸 화를 내며 "내 몸값이 고작 은 20탈렌트냐? 나는 못해도 은 50탈렌트의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라는 파격적인 소리를 한다. 물론 은 50탈렌트는커녕 20탈렌트조차 당장 가지고 있지는 않던 카이사르는 하인을 시켜 돈을 마련해 오라고 한다. 해적 두목은 이 거물을 후대했고, 본인도 귀빈이라도 된 듯이 해적들에게 꿇리지 않는 모습으로 다녔다. 혹여나 자는데 해적들이 시끄럽게 떠들면 조용히 하라며 호통을 쳤고, 심기가 상한 해적이 인질 주제에 어디서 반항하느냐고 화내자 "꼬우면 죽여보든가"라며 오히려 해적을 협박했다고 하며, 또한 자신의 자작시를 낭독하는데 그걸 듣다가 잠들어버린 해적들을 야만인이라고 욕하는 패기를 내뿜는가 하면, 나중에 해적들을 싹 잡아들여 십자가형에 처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풀려난 후 아시아 속주에서 함대를 모아 해적들을 싸그리 체포했다. 자신이 내준 은 50탈렌트를 남김없이 되찾아온 건 덤. 아시아 총독 마르쿠스 융크투스는 카이사르의 요구대로 처형하는 대신 이들을 노예로 팔고 싶어했지만, 카이사르는 기어이 그들을 십자가형에 처함으로써 약속을 지켰다.[25][26][27] 이 당시 활개치던 킬리키아 해적들은 에게 해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반도까지 기어들어오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기원전 67년에 돼서야 폼페이우스에 의해 소탕된다.

그러나 BC 74년 카이사르가 로도스에서 유학하던 시기에, 폰투스 왕국이 소아시아를 다시 침략했다. 이때 카이사르는 자비를 들여 군대를 모아 소아시아 도시들을 도왔고, 그동안 로마에서 루쿨루스가 파견되어 폰투스 왕국을 물리친다.[28]

BC 73년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왔고, BC 72년에는 선거를 통해서 대대장(Military Tribune)으로 선출된다. '명예로운 경력'의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이 당시에는 돈이 없어서 하층민들이 사는 수부라의 빌라에서 사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BC68년~BC69년 카이사르는 안찰관(Aedilis)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이 덕분에 원로원의 한 자리를 얻게 된다. 이 시절에 아내인 코르넬리아와, 카이사르의 고모이자 민중파의 우두머리였던 마리우스의 아내 율리아가 죽는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BC 69년에 아내와 고모인 율리아의 장례식을 주관한다. 그리고 로스트라(공공연단)에서 추모연설을 하는데 여기서 카이사르는 본인이 마리우스파임을 천명하며, 자신은 비너스의 후손이자 로마 고대 왕의 후손이지만 마리우스의 유지를 이어받아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겠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다.[29] 이쯤에서 그는 술라파 인물들에게 견제를 받기 시작한다. 술라파 의원이자 현직 집정관이었던 레피두스[30]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자신의 반란에 참여하라고 카이사르에게 권유했지만 카이사르는 이 제안을 거절한다. 이때 불안해하는 술라파 정치인들을 안심시키 위해서 카이사르는 술라의 외손녀와 결혼한다. 정치적으로는 폼페이우스파였으며 안찰관으로서 폼페이우스가 지중해 해적들을 토벌할 수 있도록 원로원에서 그를 위해서 법안을 발의한다.[31] 그 뒤 히스파니아의 속주를 다스리기 위해서 히스파니아로 출발한다.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 시절 카이사르가 스페인의 도시인 가데스(카디스)에서 알렉산더 대왕의 석상을 보고 알렉산더는 나와 같은 33세에 세계를 정벌했지만 나는 아직 역사가 기억할 만한 업적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로마에 돌아온 카이사르는 BC 65년 재무관으로 선출된다. 이때 온갖 축제와 이벤트들로 로마 시민들의 환심을 사는데, 문제는 이 비용의 일부분을 자신의 돈으로 대버리는 바람에 빚이 엄청나게 많아졌고 그 빚의 대부분은 크라수스에게 빌린 돈이었다. 이때 폼페이우스의 부인 및 여러 정치인들의 부인들과 온갖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BC 63년 카이사르는 공석이 된 폰티펙스 막시무스 선거에 출마한다. 워낙 돈이 많이 들었고, 경쟁자들이 워낙 쟁쟁한 인사들이라서 카이사르 본인도 선거에 이길지 확신을 못했다. 이 때문에 카이사르는 선거 당일 자신의 어머니에게 선거에서 이겨서 돌아오든지 아니면 아예 집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카이사르에게는 다행히도 다른 두 후보들이 표를 나눠먹는 통에 카이사르는 폰티펙스 막시무스 선거에 당선될 수 있었다. 이 로마 종교 최고사제직은 단순히 뽀대나는 근사한 명함으로써 역할을 해줬을 뿐만 아니라, 점술 및 종교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던 로마의 정치문제에 대해서 카이사르가 원하는 대로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서 키케로에 앙심을 품고 호민관이 되기 위해서 일부러 평민의 양자가 된 클로디우스 같은 경우, 스스로 평민으로 강등되기 위해서 종교적 절차가 필요했는데 카이사르가 최고사제로서 이를 승인하여 법적인 문제를 해결해 준다.[32]

BC 62년 카이사르는 법무관(Praetor)으로 선출된다. 이미 마리우스 공적비, 마리우스의 아내인 율리아의 장례식 때 한 발언 등으로 이미 술라파 인사들에게 찍힌 카이사르는 법무관으로 선출되면서 더더욱 경계를 받게 된다. 이때 카틸리나 음모가 발각됐는데, 카이사르는 이에 연관되었다는 강한 의혹을 받았고, 카토를 비롯한 보수파 인사들은 이 사건을 빌미로 카이사르를 실각시키고자 했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서 실패했다. 한편 여신에게 바치는 여자들로만 이뤄진 종교행사가 최고사제였던 카이사르의 집에서 이뤄지는데, 클로디우스가 카이사르의 아내를 유혹하기 위해서 여장을 하고 숨어들어갔다가 걸려서 망신을 사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 키케로는 본인 특유의 말빨을 사용하여 클로디우스를 조롱하고 맹비판했고, 장래가 유망했던 귀족 클로디우스는 젊은 나이에 정치 커리어가 완전히 개박살난다. 이에 앙심을 품은 클로디우스는 민중파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보다 젊은 평민의 양자로 들어갔고. 호민관에 당선된다. 그리고 재판없이 로마 시민을 처벌하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법안을 내놨는데 당연히 이 법안은 키케로를 노린 것이었다.[33] 이 때문에 키케로는 카틸리나 음모 이후 전직 집정관인데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1년간 로마에서 추방당한다. 법무관 임기를 마친 이후 히스파니아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된 카이사르는 현재 포르투갈 지역에서 지역 부족들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했고, 이 덕택에 소규모 개선식을 열 권리를 얻게 된다.

이 당시 카이사르는 '명예로운 경력'을 차근차근 밟아가고 있었고, 정치적인 면에 있어서는 폼페이우스키케로를 제외한 젊은 세대에서 성공적인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34]

그는 법무관이 되어 직무를 수행한 뒤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스페인 서쪽 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하여 그곳에서 현재 포르투갈 지역을 제패하는 군사적 업적을 쌓았다. 이로써 그는 원로원으로부터 개선식[35]을 거행할 권리를 인정받게 된다.

4.3. 장년기[편집]

기원전 59년, 총독 임기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41세의 나이에 생애 최초로 집정관에 선출된다. 원로원은 반체제 인물로 낙인찍힌 카이사르의 집정관 선출을 방해하기 위하여 그에게 개선식과 집정관 후보 등록의 양자택일을 강요한다.[36] 당시 규정대로라면 집정관에 선출되기 위해서는 직접 로마 시내에 들어와 입후보 지원서를 내야했는데 개선식 이전엔 로마 시내에 들어오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양자택일을 강요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결국 카이사르는 개선식을 할 권리를 포기했고 이것이 못내 아쉬웠던 그는 로마 시내에 들어올 때 백마를 타고 들어왔다고 한다.

집정관이 되기 위해 카이사르는 우선 폼페이우스와 접촉했다. 폼페이우스는 당시 지중해 전역에서 창궐하던 해적을 완전히 소탕하여 세계 전역으로부터 찬양받고 있었고 폰투스, 유다, 시리아를 정복해 조국의 영토를 넓힌 승전장군이었는데, 전쟁이 끝나서 백수신세가 된 휘하의 부하들 수만 명에게 생계를 위한 농토를 지급해달라는 요청을 원로원이 일방적으로 씹고 있어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렇게 원로원이 대놓고 폼페이우스에게 엿을 먹인 데에는 자신들의 군사적 무능을 부각시키는 폼페이우스라는 걸출한 인물에 대한 반감과 동시에 자신들이 불법적으로 점유한 국유지를 반납하기 싫다는 심사도 깔려 있었다.

이러한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협력하였고 여기에 당시 로마 최고의 거부였던 크라수스[37]를 끌어들여 삼두정치를 시작하게 된다. 여기서 이들이 맺은 협정의 내용은 폼페이우스는 압도적인 수의 충성스런 전직 부하들을 동원해서 카이사르에게 필요한 득표수와 무력을, 크라수스는 선거운동과 당선 후 막후공작에 필요한 거액의 정치자금[38]을 지원하는 한편 카이사르는 당선된 후 집정관의 자격으로 이들이 원하는 정책을 발의해주는 것이었다.[39]

카이사르는 이 삼두협정 덕에 집정관에 무난히 당선되었고 여기서 그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최초로 발휘하여 율리우스 농지법을 성공적으로 민회에서 통과시킨다.

농지법은 로마의 국유지를 민중에게 나누어주는 법안으로 당시 정계에선 일종의 금기와도 같은 것으로 이 농지법을 주도한 기원전 140년대의 그라쿠스 형제와, 기원전 100년대의 사투르니누스 같은 호민관들은 살해되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집정관으로서 이것을 무난히 해낸 것이었다. 다만 그라쿠스의 농지법과는 목적과 법안 내용에서 차이가 있는데 그라쿠스는 원로원에게 국유지 한계치 이상의 양은 소유할 수 없게 못 박고 빈민들에게 임대시켜 정착시키게 하는 급진적인 내용이라면,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퇴역병을 정착시키는 땅을 주는 목적만이 담긴 법안이었다.

어쨌든 이로써 국유지 임대권의 매매가 인정되었고(임대 20년 이후), 원로원 귀족들이 장악했던 캄파니아의 옥토는 제외되었으며, 몰수된 자에게는 폼페이우스가 해적을 토벌하면서 얻은 전리품을 팔아 보상금으로 지급하게 했다. 그런데도 원로원에서는 카토가 필리버스터를 계속해서 시도하다가 쫓겨나는 등 논의가 파행만을 거듭했고, 카이사르는 결국 농지법을 민회에 상정해버렸다. 민회는 그라쿠스 형제 시절의 평민집회와는 달리 전통적으로 서민층의 영향력이 적고 원로원의 귀족과 친귀족 평민들의 입김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곳이었지만, 이번에는 폼페이우스의 옛 군인 출신 부하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도끼눈을 뜨고 난리를 치며 누구 하나 때려죽일 듯한 험악한 분위기를 형성하였던 중이라 카토는 반대연설을 시작하자마자 연단에서 끌려내려와 맞아죽기 직전에 겨우 퇴장했으며, 그걸 본 비불루스는 중요한 일을 결정하기에는 그날의 점괘가 흉하다는 핑계를 대고 발언권을 포기해버려 만인의 비웃음을 샀다.[40] 크라수스가 대표하는 부유층 평민들이 찬성해주는 한편 당대 일반인들 사이에서 인기 최고의 스타 정치인이었던 폼페이우스가 열변을 토하며 법안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자 민회는 가결이 확실시되는 분위기가 되었고, 이때 비불루스가 거부권[41]을 행사하려 하자 '아이고 비불루스 집정관님이 반대하시면 이 법안 무효됩니다~'라고 재빨리 외친 카이사르의 재치가 빛을 발해서 비불루스는 맞아죽을까 봐 반대 발언 한마디도 못하고 쫄아서 그 길로 집으로 튀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이렇게 민회에서 통과시키는 김에 불법 점유지 몰수대상에 캄파니아 지방까지 포함시켜 원로원에 엿을 먹이고 원로원 의원에게 민회 결의를 따른다는 맹세를 의무화하는 등 이중 삼중으로 원로원에 직격타를 날려버렸다.

또한 비공개였던 원로원과 민회의 의사록인 악타 디우르나(acta diurna)를 일반 대중에게 공개하게 하였다.[42] 디우르나(diurna)는 ‘매일’이라는 뜻으로, 후일 언론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인 저널(journal)의 어원이 되었다.

이외에도 징세업자의 속주세 예납제를 폐지하고,[43] 갈리아 땅에서 세력을 불리던 게르만족의 수령 아리오비스투스와 동맹을 맺었다.

동료 집정관이자 정치성향상 정적이었던 비불루스는 정치적, 개인적 이유에서 카이사르를 방해하기 위해서라도 카이사르의 독단적 행보에 저항했으나 민회에서 공개적으로 똥물을 뒤집어쓰고 린치를 당한 이후 종교상의 이유를 내세우며 태업상태에 돌입했고,[44] 이 때문에 카이사르를 위시한 삼두는 한동안 원로원파에게 극도로 경계를 당했다. 그러나 이 시절에도 폼페이우스의 퇴역병들이 꽉 잡고 있던 민회나 개혁을 원했던 일반 시민들, 그리고 무산자들에게는 매우 환영받았다. 결국 카이사르를 포함한 삼두는 성공적인 집정관 임기를 보내는 데 성공. 덕분에 카이사르와 비불루스가 집정관에 취임했던 기원전 59년은 "율리우스와 카이사르가 집정관이던 해"라고 불릴 정도였으니 비불루스는 그대로 공기화. 또한 개혁의 핵심이었던 군대에 참여했던 무산자들에게 땅을 나눠주는 법에 대한 지지가 너무 높았고, 이 문제에 대해서 일찍이 폼페이우스가 원로원에게 양보했는데도 불구하고 법안을 질질 끌면서 폼페이우스를 깎아내리기에 급급했던 원로원에 대한 지지도 냉랭하기 그지 없었다. 이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서 일찍이 카이사르는 원로원에서 각각 원로원의 의원들에게 농지법에 문제가 되는 조항이 있으면 이 법안을 제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의원도 이치에 맞게 카이사르를 말빨로 카이사르의 농지법을 반박하지 못했다.[45][46] 특히 (小) 카토는 농지법을 아예 통과시키지 말자는 태도로 나왔다.[47] 카이사르는 지지자들을 동원해서 처음에는 카토를 포룸에서 끌어내렸고, 카토가 다시 연설을 하려고 하자 그때는 아무도 카토의 연설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카이사르의 임기가 점점 만료되자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견제하기 위해 임기 후 임지로 중요하긴 하지만 전쟁 같은 화려한 업적은 없는 "산림과 도로"로 배정하려고 한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삼두정의 배경을 활용하여 자신의 임지를 갈리아[48]로 바꾼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로 임지를 바꾼 이유는 아마도 헬베티 족(지금의 스위스 안팎에 거주)이 민족 이동을 하려고 준비 중인 것을 알고 있지 않았나라는 가정을 할 수 있다. 헬베티 족은 민족 이동을 위해 3년간의 준비를 하였고 카이사르가 집정관이었을 때는 이들이 준비를 시작한 지 2년째 되던 해였다.

헬베티 족이 갈리아 내부로 침입한다면 갈리아 내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군사적 업적을 세울 기회를 노렸던 카이사르가 원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임지를 '산림과 도로'에서 갈리아로 바꾼 것이다. 카이사르가 헬베티 족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증거는 갈리아 전기에서 단 보름 만에 헬베티 족에 맞서기 위한 5개 군단을 소집했고 이 중 3개 군단을 새로 뽑았다고 서술된 것에서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갈리아 전쟁이 시작된 것은 갈리아 전기에서 묘사한 것처럼 카이사르가 우연히 그 자리에 있어서가 아닌 카이사르가 의도적으로 전쟁이 날 가능성이 높음을 보고 그 자리를 선택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4.4. 갈리아 전쟁 시기[편집]

이후 집정관에서 물러난 그는 일리리아,[49] 갈리아 키살피나[50] 두 속주의 총독으로 내정받았고, 여기에 더해 갈리아 트란살피나[51]의 총독권 또한 추후에 원로원 의결을 통해 부여받았으며 이에 따라 4개 군단의 명령권(임페리움)을 수여받았다. 복수의 속주 총독을 겸임하는 것 역시 전례가 없는 파격적인 조치였고, 이 세 속주의 위치상 누가 봐도 카이사르는 야만족의 땅 갈리아를 정복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갈리아 제패라는 업적을 남긴다.

카이사르가 부임하던 해에 헬베티 족[52]이 고향 땅을 떠나 갈리아 내부로 침입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때 헬베티 족은 전 갈리아의 풍요로운 영토를 힘으로 빼앗은 뒤 전 갈리아를 정복하겠다는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인 것이었다. 이 원정을 위해 이들은 3년의 준비를 해왔다.

3년간의 준비가 끝나자 헬베티 족은 마을을 전부 불사르고 자신의 영토를 지나 갈리아로 침입한다. 우선 이들은 카이사르에게 사신을 보내 이들이 로마 속주 통과를 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카이사르는 이를 거부하고 만일 이들이 통과한다면 무력으로 저지하겠다는 생각을 분명히 밝힌다. 할 수 없이 이들은 기회를 엿보았으나 카이사르가 협상하면서 서둘러 건설해놓은 강의 방책을 보고 단념하였다.

결국 하이두이 족의 유력자 둠노릭스의 중재를 통해 이들은 세콰니족 영토를 거쳐 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은 약속과는 달리 세콰니, 하이두이 족 영토를 지나면서 약탈을 시도했고 하이두이 족의 요청으로 개입한 카이사르가 이들을 쳐부수었다.

그 뒤 갈리아인들은 족장회의를 통해 카이사르에게 게르만족을 쳐부숴달라고 요청한다. 카이사르는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자신의 군단을 이끌고 라인 강까지 올라온 뒤 당시 네르비 족 영토에 깊숙히 들어와있던 게르만족의 수장 아리오비스투스와 결전을 벌여 이들을 격파한다.

그 이듬해에 카이사르는 사비스 전투에서 로마 세력이 들어온 것에 반발하는 갈리아 북부인들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둔다. 그 뒤 4년 동안 카이사르는 갈리아인들의 여러 반항을 진압하는 데 시간을 보냈고 그동안 라인강을 건너 게르만 영토에 침입하거나 도버 해협을 건너 잉글랜드에 상륙하는 등의 모험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로마에서 총독 임기를 연장시키는 데도 성공했다.

7년째엔 베르킨게토릭스가 주도한 갈리아 전체 민족의 반란에 직면하여 이들의 초토화 작전에 고전한다. 갈리아족은 그야말로 완전한 청야전술을 구사하였는데, 즉 카이사르군의 진격로에 있는 마을들을 완전히 불사르고 사람들을 피신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베르킨게토릭스는 젊은 데다 당시 힘이 없는 부족 출신이었으므로 그의 명령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특히 아바리쿰에 있던 부족들은 이것에 불복하였고 이들은 베르킨게토릭스에게 카이사르의 공격에도 견딜 수 있다고 호언했다. 하지만 이들의 도시는 강과 절벽에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임에도 불구하고 우수한 지휘관인 카이사르와 실전 경험으로 단련된 로마 군단병의 공세에 무너지고 그 도시에 있던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학살된다.

이렇게 되자 청야전술을 주장했던 베르킨게토릭스의 발언권은 매우 강해졌으며, 그 결과 갈리아인들은 베르킨게토릭스의 지휘를 인정한다. 특히 12만에 달하던 아바리쿰 거주민들의 몰살은 갈리아인들이 마을과 터전을 자신들의 손으로 불사르는 게 더 낫다고 느끼게 하였다. 그 결과 베르킨게토릭스는 거의 완전하게 청야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현지 조달밖에 방법이 없었던 카이사르는 보급할 길이 끊기게 된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베르킨게토릭스와 그의 본군을 정면으로 공격하여 그를 생포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카이사르는 베르킨게토릭스가 있는 게르고비아로 진군한다. 그런데 여기서 카이사르는 큰 실수를 하게 되는데 그는 자신의 10개 군단에서 4개 군단을 떼어 부관 라비에누스에게 주어 다른 부족을 공략케 한 것이었다. 때문에 그의 병력은 아바리쿰를 공략했을 때의 60%에 지나지 않았다. 아바리쿰도 10개 군단을 동원하여 간신히 점령했을 정도인데 베르킨게토릭스가 친히 있던 게르고비아를 6개 군단만으로 점령하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었다. 즉 카이사르는 자신의 전력과 적의 전력을 오판한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게르고비아를 공격하였으나 이곳 역시 천혜의 요새였고 베르킨게토릭스의 본군이 머물고 있었으므로 방비가 철저했다. 게다가 4개 군단이 줄어들었으므로 로마의 공격도 아바리쿰 시에 비해 거세지 않았다. 때문에 이 도시는 여러차례 공격했어도 끄떡도 하지 않았고 결국 군량이 다 떨어진 카이사르는 철수키로 결정한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철수하기 전에 '이대로는 그냥 못 가겠다'라고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한번 총공격을 한 뒤 큰 피해를 입히고 철수하려고 계획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병사들에게 거세게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걸 병사들이 오해하고 적진에 깊이 뛰어들고 만다. 그 결과 선두부대는 고립되고 많은 수가 전사하였으며 결국 본때를 보이려던 카이사르는 오히려 큰 피해만 입고 물러나게 된다. 즉 게르고비아 전투에서 카이사르는 처음으로 갈리아족에게 패배한 것이었다.

이때 카이사르를 갈리아에 불러들였던 장본인이었던 하이두이 족이 카이사르를 배신하고 베르킨게토릭스에게 붙는다. 하이두이는 카이사르를 불러들여 그 덕분에 갈리아의 맹주노릇을 하였는데 게르고비아 공방전의 패배로 카이사르에게는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하이두이 족의 땅에 대부분의 군수자금과 군수물품, 그리고 갈리아 부족들에게서 잡아둔 볼모들을 머물게 하였는데 하이두이 족은 이것을 모조리 압수하고 로마인들을 살해한 뒤 카이사르를 배반한다. 그 뒤 하이두이는 배신한 대가로 베르킨게토릭스가 지휘하는 갈리아 연합군을 그들이 지휘하겠다고 하였으나 갈리아 족장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거부당한다. 그제서야 하이두이 족은 카이사르를 배신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카이사르는 이렇게 되자 빨리 군량이 있는 곳으로 철수해야 했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강행군하여 루아르 강으로 가서 군량을 확보한다. 이때 카이사르에게서 4개 군단을 받아두었던 라비에누스는 상대한 족장을 이긴 뒤 돌아와 카이사르에게 합류한다.

이때 카이사르의 상황은 매우 안 좋았는데 당시 카이사르가 달성했던 갈리아에서의 군공에 원로원은 시기하고 있었고 특히 삼두정의 동료였던 폼페이우스가 유난히 그랬다. 때문에 로마 정부로부터의 지원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멋대로 임지를 벗어나 침략 활동을 벌이고 있다며 그를 탄핵하여 갈리아족에게 넘기자는 의견까지 제시되는 상황. 게다가 그때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총독 임기 말이었으므로 널널하게 전쟁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그의 임기는 단 1년만 남겨두고 있었으며 게다가 이미 삼두정치가 끝장났으므로 더이상의 총독 임기 연장은 불가능하였다.

때문에 베르킨게토릭스는 무사히 그 해를 넘긴 뒤 카이사르의 마지막 임기인 다음 해만 버티면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은 완전히 물건너가게 되는 것이었다. 만일 이렇게 된다면 카이사르는 거의 분명히 정치 생명이 끝났을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모든 갈리아 부족이 배반했고 하이두이 족의 배신으로 모아둔 상당한 물자와 볼모가 날아갔기 때문에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카이사르가 일단 임지로 철수한다면 그것으로 베르킨게토릭스는 갈리아의 해방이라는 그의 목적을 십중팔구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카이사르도 이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게르고비아에서 졌다고 그대로 철수하지는 않았다. 그는 우선 머물고 있던 루아르 강과 속주 사이에 있던 세콰니 족을 공격하였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속주의 물자를 쓸 수 있는 루트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갑자기 베르킨게토릭스가 대군을 집결하고 카이사르의 눈앞에 나타난다. 이는 베르킨게토릭스가 더 이상 청야전술을 쓰지 않고 카이사르와 군사적으로 맞붙겠다는 것이었다.

만일 베르킨게토릭스가 청야전술을 계속 쓸 생각이었다면, 카이사르가 향하고 있던 세콰니 족을 이주시킨 뒤 그 영토를 불살라야했다. 비록 이로써 카이사르가 속주의 루아르 강의 루트를 만들 수 있기는 하지만 어차피 카이사르는 적에게 고립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보급을 꾸준히 교란하면서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 카이사르에게는 그다지 큰 승산은 없었다. 하지만 베르킨게토릭스는 승리에 고무되어 판단력이 흐려진 것인지 아니면 사기가 고양된 부족들의 압력 때문에 그런 것인지 모르겠으나 카이사르 앞에 갈리아 족 전체에게서 긁어모은 병력을 이끌고 전투를 걸었다. 특히 당시 카이사르는 게르고비아 때와는 달리 라비에누스가 4개 군단을 이끌고 합류하여 10개 군단 전부를 휘하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정면에서 전투를 거는 것은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다.

카이사르는 이 강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갈리아족을 살육하다시피[55] 하고, 도망가는 베르킨게토릭스를 추격한다. 베르킨게토릭스는 황급히 알레시아로 들어간 뒤 성문을 닫았고 카이사르군은 이 도시를 겹겹이 봉쇄한다. 베르킨게토릭스는 그의 대군이 이토록 쉽게 분쇄될 것이라 생각치 못했고[56] 알레시아로 달아날 것이라고 생각치 않았으므로 알레시아엔 고작 보름 남짓 먹을 식량이 있었을 뿐이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식량을 아껴먹어 30일간 버티기로 하였고 외부의 구원을 기다린다.

베르킨게토릭스를 구하기 위해 갈리아족은 어마어마한 대군을 이끌고 로마군의 포위망을 공격하였고 베르킨게토릭스도 이에 호응해 성밖으로 나와 공격한다. 카이사르는 앞뒤로 적을 맞이하는 셈이었으나 미리 방벽과 참호를 만들어둔 데다 로마 군단병의 무장 수준과 전투력이 워낙 갈리아족보다 뛰어났으므로[57] 갈리아족은 앞뒤로 공격한다는 전술적 우위와 자신들의 영역에서 많은 수로 공격한다는 이점을 안고도 패배하고 만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이 패배로 카이사르에게 항복하였고 구심점을 잃은 데다 두 차례의 패배로 인해 어마어마한 인적 손실을 입은 갈리아족이 카이사르에게 항복함으로써 갈리아는 평정된다.

그 넓은 갈리아 전역을 단 7년 만에 제패해버린 사건은 로마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범갈리아 연합론(?)을 내세워 봉기한 베르킨게토릭스알레시아 전투에서 물리치고 갈리아 지배를 결정적으로 확립함에 따라 서서히 원로원의 견제를 받게 된 그는 마침내 원로원의 최종권고를 받고 루비콘 강 앞에서 모든 군대를 해산한 뒤 로마로 올 것을 요구받는다. 카이사르는 원로원에게 합법의 테두리 안에서 대결하기 위해 그들에게 여러 타협안을 제시한다. 그중 가장 중요한 핵심은 카이사르 자신이 갈리아 총독을 유지한 상태에서 집정관에 출마할 수 있게 허락해달라는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군대 지휘권을 반납하는 순간 원로원의 수많은 정적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이므로 이것은 목숨을 걸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었다. 원로원은 이 제안을 거부한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총독 말기에 원로원과 이토록 심하게 대립하게 된 원인은 카이사르를 비호해주는 가장 중요한 두 인물들인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삼두결속이 깨졌기 때문이었다. 크라수스파르티아 원정에서 지휘관으로서의 극도의 무능력함을 보인 끝에 자기 아들(젊은 크라수스) 및 군대와 함께 카르헤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였던 율리아의 죽음, 카이사르에 대한 정치적 견해의 차이로 폼페이우스는 원로원파로 기울어지게 된다.[58] 그 결과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의 대성공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에서 고립되게 되었다. 반대로 원로원파는 폼페이우스라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대단히 강력한 후원자를 등에 업고 카이사르에게 대단히 강경하게 나갈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결국 양자 간 충돌로 나타난다.

원로원은 부재중 입후보를 금지시켰고, 카이사르에게 지휘권을 반납한 뒤 민간인 신분으로 집정관에 입후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카이사르는 부재중 입후보 출마를 허락하면 군대를 해산하고 입후보하겠다고 답한다. 원로원은 토의 끝에 카이사르에게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동시키고, 카이사르는 내전을 치르기로 결정한다. 카이사르의 군사행동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8개 군단이 휘하에 있으면서 순순히 자기 목숨(실제 생명은 물론 정치 생명도)을 적대 세력 손에 내어주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결국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대와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넌다. 그 유명한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는 말은 이 강을 건널 때 했다고 전해진다.

4.5. 카이사르의 내전[편집]


율리우스 카이사르, 루비콘 강을 건너며
우선 명확히 해야할 것은 로마는 과두정에 가까웠으며 명문대가의 인사들이 돌아가면서 고위직을 차지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들의 입장에서 속주 총독직은 집정관이나 법무관 역임자들이 1년 아니면 부득이한 경우 2년씩만 돌아가면서 맡는 자리였고, 임기를 채운 총독은 당연히 물러나 원로원의 일원으로 남아야 했던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정무관 및 과두정 인물들끼리 모두 동등하거나 그렇다고 믿었냐면 그건 아니었다. 집정관과 재무관의 차이가 있었고, 같은 원로원 의원들끼리도 전직 집정관이냐 아니냐, 돈이 많냐 적냐, 가문이 얼마나 오래됐냐,[59] 출신이 어디냐 등 갖은 조건에 따라서 같은 기사계급인데 가문이 원로원에 진출을 언제 했느냐에 따라서 신참자(Novus Homo)니 뭐니 다 꼬리표가 있었고 높고 낮음이 있었다. 원로원에서 연설할 때도 이런 순서대로 했다. 그래서 로마 과두정 인물들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가문을 높이는데 필사적이었다. 그러므로 로마 공화정에서 특정 정당이나 이념보다는 자신과 가문을 위해서, 그리고 보호민-피호민 관계에 따라서 이합집산을 반복했다. 그리고 이렇기 쌓아올린 명예(?)를 Dignitas라고 하며 이는 로마 공화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한국어로 딱히 정확하게 대체되는 단어가 없으며 대충 명예, 존엄, 권위가 짬뽕된 의미라고 상각하면 편하다.[60] 목숨보다 이 Dignitas 때문에 카이사르는 내전을 선택했다고 고백했으며, 결국 이 Dignitas를 너무 독점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살아있을 시절 Dignitas가 절정에 달했을 때 암살당한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3개의 속주와 6만 명의 병력에 대한 지휘권을 10년씩이나 보유했다. 단순히 계산해 봐도 전직 정무관 30명이 1년씩 돌아가면서 맡을 수 있던 자리를 카이사르 혼자 차지한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역시 마찬가지로 공화정 정무관에게 허락될 수 없는 거대한 지휘권을 보유했다. 당연히 그만큼 기존 명문귀족들의 자리는 줄어들었고, 북이탈리아나 에스파냐 같은 수익성 좋은 속주에서 재산을 모을 기회도 사라졌으니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전통적 귀족들에게는 최악의 적이었다.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61]는 경제적, 정치적 원조를 통해 자신의 피호민들을 공직에 진출시켰다. 이것은 로마에 있던 보호자-피호민 체제에서 자주 있던 일이다. 보호자는 이렇게 피호민이 많고 그들의 지위가 높아져 자신의 세를 불릴수록 Dignitas가 더 올라갔다. 카이사르의 문제는 내전에 이긴 다음 술라를 본받아 혼자 Dignitas를 거의 독차지하고 따른 야망이 있는 명문가 자제들이 카이사르의 Dignitas를 넘볼 수 없도록 횡포를 부렸다는 것이다. 그나마도, 카이사르는 적들도 사실상 피호민으로 만들기 위해서 정적들을 죽이지 않고 가능하면 관용을 베풀었는데 첫번째 이렇게 반강제적으로 피호민이 되는 것은 명문가들 입장에서는 굉장히 기분나쁜 일이었고 그럼 카토처럼 죽었어야지 둘째는 이런 정적들을 죄다 죽여버린 술라와 다르게 카이사르는 살려줬기 때문에 이들이 카이사르의 암살을 획책하게 되었다.

때문에 대부분의 원로원 계급은 혼자 Dignitas를 독점하는 카이사르를 두려워하거나 경계하거나 싫어했지만,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포르키우스 카토,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등 소수 보수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술라-마리우스 내전같이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더 두려워했다.[62] 원로원의 많은 현역의원들이 카이사르처럼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봤거나 공포정치를 경험해 봤기 때문에 또 다른 독재자가 로마로 진격해서 내전이 일어나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다만 카이사르 다음 순번으로 기다리고 있던 고명한 명문가들은 입장에서 카이사르의 두 번째 집정관 당선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내전하고 말겠다는[63] 엄밀하게 따지면 원로원이 최종권고를 통해 카이사르를 역적으로 지정한 것이 먼저이며 폼페이우스는 원로원 측으로부터 카이사르와 맞설 군대의 지휘권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이를 역이용해 도리어 원로원 최종권고의 법적 불합리성을 주장[64][65][66]하면서 로마로의 진군을 결정하였다. 이때 카이사르의 주장의 요지는, 갈리아를 제패하여 지금 로마의 영광을 드러낸 것이 바로 카이사르인데 이렇게 국가의 영웅인 자신을 (애초에 불법인) 최종권고를 날려서 죽이려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또한 헌법적인 면을 볼 때 친카이사르 성향의 호민관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원로원에서 쫓아낸 일이 있었다. 이는 원로원이 호민관의 신체불가침 권한을 침해한 것으로 전임 집정관으로써 카이사르에게 좋은 구실을 줬다. 하지만 카이사르 본인이 고백하기로는 전에 개선식도 포기하라고 강요하고 이제는 갈리아를 제패한 자신의 Dignitas를 깎아 내리려는 원로원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가 진짜 이유였다.

갈리아 전쟁에서 전격전과 기동전에 익숙해진 카이사르 군단은 원로원의 예상보다 빠르게 로마 본토로 강행군해 들어왔고, 맞설 병력의 소집이 미처 끝나지 않은 원로원과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에서 싸우는 것은 불리하다고 보고 함께 그리스로 넘어가서 그곳에서 군단을 편성한다. 국가의 최고 지도자들이 수도를 버리고 달아나는 모습은 결국 이들에게 정치적 불리함을 안겨주게 된다.[67]

카이사르는 로마에 입성하여 집정관에 단독으로 입후보하여 집정관이 된다. 그 뒤 스페인으로 건너가 그곳의 원로원 세력을 일레르다 전투에서 격파하고 폼페이우스와 대결하기 위해 그리스로 건너간다. 그리스의 디라키움에서 폼페이우스를 숫적 열세의 상황에서 포위를 하다 맹렬한 반격을 받아 패배하고 만다(디라키움 공방전). 폼페이우스는 군량 보급과 숫적 우위, 그리고 막강한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회전보다는 지구전을 펼치는 게 유리한 게 명백했다. 그리하여 폼페이우스는 시종일관 지키는 전법으로 나갔는데 폼페이우스와 동행하던 원로원 의원들은 장기간의 군대 생활에 싫증을 느꼈고 때문에 폼페이우스에게 조속히 결판을 내달라고 압력을 가했다. 폼페이우스는 결국 파르살루스에서 회전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파르살루스 전투에서는 폼페이우스가 명성에 걸맞지 않게 너무도 뻔한 전술을 썼는데, 즉 카이사르군과 자기 쪽 보병이 붙으면 자신의 기병으로 카이사르군의 우익을 공격하겠다는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이것을 예측하여 폼페이우스 기병의 예상 이동로에 장창병을 잔뜩 포진시켜 이 기병을 격파하고 거꾸로 폼페이우스 보병의 좌익을 공격한다. 로마군이 장창을 썼다하니 뭔가 이상한데, 플루타르코스는 비교열전 카이사르전에서 원래 로마군이 돌격 직전에 날려댔던 필룸을 이날 전투에서만큼은 날리지 말고 집어서 폼페이우스의 기병대원들의 얼굴에 겨냥하도록 카이사르가 그의 병사들에게 명령했고, 필룸은 던지는 걸로 알고 있던 폼페이우스의 기병대는 자신들의 얼굴에 상처가 날까봐 면상을 가리고 도망쳤으며 이게 기병대의 패주로 이어졌다고 서술해놓았다. 이들이 도망친 이유에 관해선 매우 수상하기는 하지만[68] 플루타르코스가 전투 당시에 생존했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와전된 이야기를 바탕으로 서술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69] 허나 앞서나온 장창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은 그의 서술에서 나온 필룸으로 변경되면서 많이 사그라들었다. 어찌됐든, 여기서 폼페이우스군은 대패하고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달아났지만 카이사르에게 붙기로 결심한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실에 살해당한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여 이집트에 들어온다. 여기서 폼페이우스의 목을 건네받은 카이사르는 눈물을 지었다고 한다. 카이사르의 저서인 내전기에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폼페이우스의 죽음을 알았다'라고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때의 눈물이 '악어의 눈물'인지, 아니면 한때 자신의 동료였던 자의 죽음을 보고 슬퍼한 눈물인지는 해석이 분분하다. 이는 이후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로마의 영웅'으로 추대하고 그를 기념하는 조각들을 대거 남긴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보통은 의도적으로 카이사르가 프로파간다를 위해 폼페이우스를 띄워주긴 했지만 어느 정도는 진심이 담겨있지 않았나 하고 추정한다.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클레오파트라 7세의 권력 싸움에 개입하여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 상당히 유리한 판결을 내리는데 여기서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측의 반감을 사게 된다. 결국 이들은 카이사르를 공격하게 되었고(알렉산드리아 전쟁) 적지에서 소수 병력밖에 없었던 카이사르는 죽을 고비도 넘기는 등의 고생을 하지만 결국 원군이 도착하면서 승리한다.[70] 그 뒤 소아시아의 젤라 전투에서 유명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말을 남긴 승리를 거두어 이 지역을 평정한 뒤 로마로 귀국하여 다시 집정관에 선출된다. 그리고 북아프리카에 남아있던 원로원파 잔당을 소탕하러가 탑수스 전투에서 이들을 깨끗이 정리하고 돌아와 유일한 최고 권력자로 등극하게 된다. 이때 갈리아와 이집트 사건을 묶어 처음이자 마지막 대개선식을 치렀다.

4.6. 카이사르의 개혁[편집]

카이사르는 기원전 46년 탑수스 전투에서 스키피오를 비롯한 폼페이우스 잔당을 격파하고 로마로 귀환한다. 카이사르는 이때 방대한 개혁을 실시한다.

카이사르는 기존에 사용하는 구 로마력의 오차를 간파하여 1년을 365일로 하고 4년에 한 번씩 윤년을 두어 실질적으로 1년을 365.25일로 정한 율리우스력을 만들었다. 율리우스력의 오차는 겨우 1년에 11분 14초였으며, 16세기에 그레고리력이 만들어질 때까지 1500년이 넘게 사용되었다. 다만, 율리우스력을 도입하면서 기존 달력의 오차를 수정하느라 기원전 46년은 445일이 되었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포룸을 건설하였으며, 로마 최초의 국립도서관과 쿠리아 율리아를 세웠다. 또 바실리카 율리아와 마르켈루스 극장을 건설하였고, 세르비우스 성벽을 파괴하여 도시를 확장했다.

원로원을 약화시키기 위해 술라 시대에 600명으로 증원되었던 정원 수를 900명으로 늘렸다. 기사계급에게 의석을 주어 원로원 강화를 꾀한 술라와는 다르게 카이사르는 의석을 대부분 자신의 지지자로 채웠고 갈리아의 유력자들에게도 제공했다.

늘어난 로마 영토에 따라 속주를 재편성했는데 카이사르가 직접 정벌한 갈리아와 누미디아, 폼페이우스가 정복한 비티니아, 시리아를 추가하여 18개의 속주가 편성되었다. 속주가 늘어나면 이에 군사 지휘권이 부여된 총독이 임명되어야 하는데 카이사르는 행정 개혁을 통해 이를 해결했다. 공화정 시절 집정관 다음가는 관직이었던 법무관을 8명에서 16명으로 늘리고 재무관을 20명에서 40명으로 2배 늘렸다.

곡물을 국가에서 매입하게 법제화하고 곡물 수령자를 공식적으로 정한 복지 정책을 시행하였다.

갈리아 키살피나의 속주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고, 프로빈키아와 트리나크리아(시칠리아)의 속주민에게는 라틴 시민권을 부여했다. 이러한 속주민 융화 정책을 통해 카이사르는 이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원로원의 계엄령인 원로원 최종권고를 폐지했다. 원로원의 기득권 세력은 이 비상계엄을 통해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재판없이 처분할 수 있었는데 카이사르는 지속적으로 이것의 불합리성을 주장해왔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한 깊은 역사를 가진 이 비상결의는 그 대상이었던 카이사르에게 폐지된다.

카이사르는 마리우스나 술라와는 달리 정적을 숙청하지 않았는데 이를 늘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관용을 정책으로 내세웠는데 카토를 비롯한 보수파들은 카이사르가 로마 시민을 용서할 자격이 없다며 반발했다.[71]

대도시였던 로마는 교통이 매우 혼잡했기에 카이사르는 수송차를 낮에 다니지 못하게 했다. 다만 로마 시민들은 밤에 소음으로 잠을 자지 못하는 부작용이 있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방음이 잘되지 않았던 탓에 소음공해는 심했을 것이다.

술라가 배심원단을 원로원 의원으로 구성한 것을 폐지했다. 원로원 귀족들로 구성된 기존 배심원단은 보수적인 성향이 강해 편향된 판결을 내기 쉬워서 공정한 판결이 불가능했다. 거기다가 기존 배심원단이 유리한 판결을 내리는 쪽은 거의 유력자들이었기 때문에 뇌물을 받기 쉬웠다.[72] 카이사르는 배심원단을 로마 시민일정한 재산을 지닌 모든[73]으로 구성하여 사법개혁을 실시했다.

의료와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우를 개선하고 의료와 교육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의사와 교사에게 시민권을 제공했다. 군대에서만 12년 가까이 보낸 카이사르는 군인에 대한 대우 역시 개선하기 위해 70데나리우스였던 봉급을 140데나리우스로 2배 늘렸다.

카이사르는 그렇게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로마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했다.

4.7. 종신독재관 시절[편집]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로마에서 개혁을 마친 뒤, 종신독재관에 취임하여 자신을 임페라토르(imperator, 최고사령관)라는 호칭[74]을 사용하면서 사실상 황제나 다름없는 권세와 절대권력을 누리게 되고, 이때부터 사실상 로마의 제정이 시작되는 과정을 밟게 된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자신을 스스로 황제라고 부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그의 정치적인 위치는 사실상 절대권력을 지닌 황제나 다름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에 황제라는 개념이 없었다. 카이사르가 임페라토르의 칭호를 받으면서 황제의 개념을 만들어가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를 거쳐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전제정의 제도화가 시작되면서 현대의 개념이 완성된 것이다.

카이사르는 파르티아 원정을 추진하였는데 원정을 떠나기 전 불과 사흘 전에 원로원에서 암살당했다. 암살자들은 주모자인 마르쿠스 브루투스를 포함한 카이사르의 반대파가 주류였지만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비롯한 카이사르 휘하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젊은 장교들도 가담했었다. 암살의 주된 동기는 카이사르가 그간 보인 제정으로 가는 행보에 대한 반발과 카이사르에게 집중되는 명예에 대한 불만이었다.[75]

내전이 끝난 후에는 카이사르는 대놓고 왕처럼 행했다. 종신 독재관에 임명된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조각상을 로마 왕들의 조각상 옆에 만들어 놓고 자기 얼굴을 새긴 주화를 발행한 것은 로마인들에게는 문화 충격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그 외에도 루페르칼리아 축제[76]가 열리던 때 대중 앞에서 집정권 안토니우스가 왕관을 바쳤는데 카이사르가 조용히 거부했다. 이에 대해 그가 야심을 드러내고 사람들의 여론을 살피려 했다는 견해와 왕관을 거부하는 제스처를 통해 대중의 의혹을 불식시키려 했다는 견해가 엇갈린다.

외면적으로는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이 왕관을 바쳤을 뿐이고 카이사르는 로마에는 왕이 필요없다면서 왕관을 되돌려주었지만, 사실 이런 종류의 이벤트가 카이사르의 지시 혹은 묵인 없이 지지자들만의 독단으로 일어나기 어렵다는 점은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었고, 카이사르가 왕정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를 경계하던 사람들에게 이 사건은 불안감에 기름을 붓는 듯한 효과를 가져왔다. 카이사르의 이런 말년의 행보에 의문을 표하는 역사가들도 있는데 이러한 왕 행세는 암살이라는 결과가 보여주듯이 정치적으로 상당히 위험한 반면 실익은 전혀 없는 기분내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고 카이사르는 이때까지는 항상 자기 절제가 철저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카이사르도 나이가 들었고 또 모든 정적을 물리친 후라 긴장이 풀렸을 수도 있지만, 당시 카이사르가 어떤 심산이었을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77]

때문에 이를 두고 여러 가지 추측이 생겨났다. 일례로는 기생충에 감염되어 뇌에 손상을 입었을 거라는 가능성이다. 어디까지나 가설에 불과하지만, 이러한 기생충의 서식지로 가장 유력한 곳이 이집트이고 내전 막바지에 카이사르는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와 꽤나 오랜 시간을 보냈으므로 시기적으로는 대충 들어맞는다. 카이사르의 마지막 전투인, 스페인에서 폼페이우스의 아들들과 싸운 문다 전투에서 과거의 모습과는 달리 상당히 지지부진하며 고전한 모습을 보인 것도 뇌기능 손상설을 뒷받침한다. 또 다른 가능성으로는, 뇌졸중 등의 신체질환과 원로원의 견제 등으로 비롯된 우울증이 도져서, 격렬한 감정 변화로 인해 이전만큼의 신중함을 잃었다는 설도 제기된다.[78]

음모자 마르쿠스 브루투스를 카이사르가 애인의 자식이라 아낀 것은 맞지만 브루투스는 외삼촌이자 카이사르의 숙적인 카토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카이사르의 내전 당시 폼페이우스를 지지했다. 폼페이우스가 그의 아버지를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간 것에서 그가 얼마나 카이사르를 반대했는지 알 수 있다. 다른 주모자인 카시우스는 브루투스의 처남이고 독재에 대한 반감이 심한 사람이었다. 그 역시 폼페이우스 진영에서 카이사르와 맞서 싸우다가 항복했다.

한편 암살자 중 카이사르의 부하였던 사람은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트레보니우스, 미누키우스 바실루스와 술피키우스 갈바가 있었다. 이 중 카이사르의 최측근이라 할 만한 사람은 데키무스와 트레보니우스다.[79] 데키무스는 카이사르 휘하에서 해군을 지휘하던 장교로 카이사르가 유언장에 제2상속자로 정했을 정도로 아낀 인물이다.[80] 카이사르는 데키무스를 기원전 42년에 집정관 선거에 출마시키려 했다. 트레보니우스 역시 기원전 45년 보궐 집정관이었으며 갈리아 전쟁과 내전 당시 적지 않은 활약을 한다.

그가 가장 신뢰하는 일부 지지자들은 왕정이나 다름 없는 카이사르의 독재에 실망했다는 설이 있다. 또 측근들과의 관계가 아주 원만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서는 당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경계하라는 누군가의 말에 카이사르가 "나는 비쩍 마른 그 두 사람보다 뚱뚱한 둘(안토니우스, 돌라벨라)이 더 무섭다"라고 은근한 견제성 발언을 했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이다.

일단 카이사르의 암살에 직접 가담한 부하들 중 집정관급 인사는 트레보니우스가 전부였다.[81][82] 안토니우스는 알면서도 방기했다는 설[83]과, 카이사르 사후 빠르게 대권을 장악했다는 점 때문에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는 음모론이 약간 묘사된다.

카이사르가 그간 보인 행보로 볼 때 과연 그가 암살되지 않고 살았다면 자식이나 친지에게 물려주는 전형적인 제정을 할 것인가는 모를 일이다. 후계자로 지명했던 옥타비우스는 그의 친척이긴 하지만, 결혼으로 생긴 혈족이라 양자에 가까웠다.

암살 뒤 소위 '공화파'와 1차로, 다음엔 카이사르 후계자 자리를 놓고 안토니우스와 벌인 2차 내전의 최종 승리자가 된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로마의 제정은 그야말로 편법과 제도의 모순의 극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거듭해 맡아오던 집정관 자리에서 물러나는 대신, 호민관 특권[84]과 군단 지휘권만 원로원에게 얻어낸 다음 이것만을 자신의 자식에게 물려주는 희한한 계승방식을 썼으며 대외적인 호칭으로는 프린켑스[85]라는 칭호를 썼다. 이는 공화정에 익숙하고 왕정에 불안감과 혐오감을 갖고 있던 로마 시민과 원로원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것이었으나 직위는 없이 권리만을 애매하게 짜맞추는 식으로 만들어진 덕분에 불안정한 자리였고, 이 때문에 혈연에 집착하면서 왕정과 다름없는 체제로 나아가게 된다.

결국 유일하게 남은 창시자의 계보(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마지막인 네로가 암살당하면서 이 제도의 허점이 그대로 노출되어 내전기를 맞게 된다. 최초의 제정 내전기에서 그 1년 사이에 죽은 황제만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세 명. 그 뒤로도 황제의 계보가 끊어질 때마다 내전의 위험이 항상 도사렸고 원로원의 주도력과 후임의 센스가 발휘되었던 5현제(네르바~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때 외에는 내전으로 번졌다. 그리고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암살된 이후에 병사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일개 대대장이었던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황제가 되면서 결국 군인 황제 시대가 되어버렸다. 안 그래도 점차 문제가 쌓여가던 제국에서 정국의 극심한 변화는 로마에게 많은 어려움을 주었다.

이는 로마 황제라는 직위가 다른 왕국들의 왕과는 달리 공식적인 지위가 아니었고, 단지 호민관 특권과 최고 통수권을 가지고 있는 '일반 시민'이었기 때문에 직위 자체가 매우 애매했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황제를 암살한 뒤 그 직위를 자처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쉬웠고 여차하면 군단 지휘권만 가지고 다른 권리를 내놓으라고 협박할 수도 있었다. 내전기 때도 그런 식이었고, 3세기의 군인 황제 시대 때는 군단이 황제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자기네 사령관을 황제로 추대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것만으로도 황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황제라는 직위가 실제 존재하는 공직이었다면, 그리고 그 자리를 얻기 위해 그에 걸맞은 절차를 거쳐야 했다면 더더욱 이토록 쉽게 황제 자리를 아무나 주장할 수가 없었다.

카이사르가 역임했던 독재관이라는 자리와 비교할 때 이 차이점은 명백하다. 독재관이라는 직위는 분명한 공직이며 이를 위해서는 집정관 선출처럼 켄투리아(민회)에서 선출되어야 했다. 독재관을 맡으려면 좋든 싫든 수도 로마로 가서 켄투리아에 참석해 투표를 해야 했다. 이것 자체로 정국 불안정은 많이 견제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형태였다면 훗날 로마에서 많이 보여지는 외지에 있는 군단이 제멋대로 자신의 군 사령관을 로마 전체의 최고 권력자로 추대하는 일은 일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즉 로마의 최고 권력자가 아우구스투스의 프린켑스의 형태가 아닌 카이사르의 종신 독재관의 형태였다면 황제를 추대하고 싶은 군대는 우선 로마를 손에 넣고 나서 켄투리아 민회를 장악하는 수순을 밟아야 했다. 이러한 수순만으로도 황제의 난립은 예방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의 황제는 단지 호민관 특권과 군단 지휘권을 가진 일반 시민의 신분이었으므로 군대가 제멋대로 이러한 특권을 주장하고 자신의 사령관을 추대하는 일이 생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감안한다면 카이사르가 아우구스투스 같이 희힌한 형태의 독재를 고려하지 않은 채 죽어라 독재관, 집정관, 독재관 등을 역임했던 것은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무엇이 로마의 새로운 정부 형태가 될 것인가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채 죽어버렸고, 이것은 위에서처럼 아주 모호한 형태의 아우구스투스식 원수정으로 귀결된다.

아우구스투스는 상당한 기량[78] 의 소유자였지만 희한할 정도로 혈통에 집착[87]하였다. 물론 이는 인지상정이지만 나라를 통치하는 데 있어 혈통은 결코 100% 보장되는 능력이 아닌 데다 끊어지면 대책이 없다는 사실을 간과[88]했고, 그나마 아우구스투스 자신은 유능한 후계자인 티베리우스를 황제에 앉히는 등 최소한의 합리성이 있었지만[89] 그 이후의 황제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혈통이 끊어질 때마다 일어난 내전기와 3세기의 군인황제 시대를 초래한 원수정이었다.

카이사르의 종신독재관은 로마 역사상 전례가 없던 일이다. 전임 독재관인 루키우스 술라는 임기가 없는 독재관이지만 공화국이 복원되면 물러나야 했다.[90] 카이사르는 종신독재관 취임 이후로는 경호원을 원로원에 대동하지 않았고 카이사르의 독재는 원로원파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기 때문에 이는 카이사르 암살로 귀결된다.

4.8. 3월 15일[편집]

암살이 결행된 날짜인 3월 15일은 유명하다. 그가 파르티아 정복을 원로원에 공표하려고 했던 날이기도 했지만, 훗날의 문학적 창작력으로 여러 가지 의미[91]가 덧붙여졌다. 하지만 카이사르 한 명이 없어진다고 수백 년 전의 공화정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고,[92] 복고주의 세력(소위 공화파)은 이런 현실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낙관적으로 행동하다가 자멸했다. 훗날 카이사르의 후계자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을 세우면서 그들의 암살은 그 의미가 사라진다.

고대 로마에서는 날짜를 매달 초하루(Kalendae)와 이두스(Idus)를 기준으로, "무슨 달 초하루 며칠 뒤", "무슨 달 이두스 며칠 전" 하는 식으로 표시했다. 이 중 이두스(Idus)는 3, 5, 7, 10월에는 15일, 그 외의 달에는 13일을 말하며 카이사르 암살로 유명한 3월 15일은 라틴어로 Idus Martii(3월의 이두스)가 된다. 영어로도 이를 번역하여 Ides of March(3월의 이데스)라는 표현이 존재하며, 이는 카이사르가 암살된 날을 가리키는 말이다.
3월 15일 아침, 카이사르는 원로원에서 파르티아 정복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원로원에 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았고 그의 아내 역시 원로원에 가지 말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는 기어이 원로원으로 향했다.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들어가자 의원들은 모두 존경의 표시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이 그와 인사를 나누는 동안 브루투스와 암살자들은 슬쩍 그의 뒤로 갔다. 곧 일당 중 한 명인 킴베르가 카이사르의 옷을 양손으로 잡아당겼는데, 이것이 공격의 신호였다.[93]

카스카가 맨 먼저 목을 찔렀으나 상처가 깊지 않았으므로 카이사르는 칼을 빼들어 저항할 수 있었다. 원래 있던 호위병력은 불과 며칠 전 해산시켰기 때문에 그는 혼자였고, 주변 사람들은 하도 놀란 나머지 카이사르를 돕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암살자들은 그에게서 칼을 빼앗은 후 카이사르를 빙 둘러싸고 마구 찔러댔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의 사타구니를 찔렀다.

사실 카이사르는 자신을 잘 방어하고 있었지만 브루투스가 단검을 가지고 다가오는 것을 보고 체념한 듯 옷을 머리 위로 벗어 던지고 주저앉았다는 얘기도 있다. 암살자들은 카이사르를 그의 옛 적수였던 폼페이우스의 흉상으로 밀어붙였다. 때문에 흉상은 피로 물들었다. 카이사르는 모두 23군데의 상처를 입었다. 한 사람을 찌르기 위해 많은 칼이 난무한 탓에 암살자들은 서로의 칼에 찔려 상처를 입기도 했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재각색한 카이사르 암살 직후의 이야기가 또 유명하다. 그의 작품 'Tragedy of Julius Caesar'에서는 암살파의 대표인 브루투스가 카이사르 암살의 당위성과 지지를 얻기 위해 시민들 앞에 나서서 긴 연설을 한다. 하지만 그의 이상은 카이사르에게 익숙해진 시민들을 이해시키지는 못했다(심지어 한 시민은 브루투스를 왕으로 만들자고 한다).

이후 브루투스가 떠나자 원래 암살파들이 별 영향을 못 줄 것이라고 생각한 카이사르의 오른팔인 안토니우스가 나선다. 그는 브루투스의 연설에 동감을 표하는 듯하다가 결국 카이사르를 찬양하는 충격적인 반전을 구사하며 시민들의 암살자들에 대한 분노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다.[94] 안토니우스는 계속해서 카이사르에 대한 사람들의 추억과 감성을 자극하는 연설을 계속하여, 마침내 시민들은 카이사르의 이름을 외치며 울부짖기에 이른다. 안토니우스는 곧 카이사르를 죽인 브루투스 일당을 비난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이성을 잃은 시민들은 '브루투스와 일당들을 끌어내 죽여라!'라고 외치기 시작한다. 브루투스와 암살자들은 급변한 상황에 놀라 잠적하고, 안토니우스는 권력을 잡는다. 그러나 그도 훗날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에게 밀리고 만다.

이 사건은 감정에 대한 호소가 논리적 판단력을 마비시키고 사람에게 강하게 다가온다는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된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야말로 픽션이라는 사실과 셰익스피어는 왕권 사회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유념하도록 하자. 실제로는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그렇게 선동적이었는지는 불확실하며 카이사르의 죽음 직후 그는 집으로 도망쳤다. 확실한 것은 카이사르 장례식에 안토니우스가 참석하여 고대역사가들에 따르면 고인의 업적을 찬양하는 평범한 연설을 했고 민중이 대규모 봉기를 했다는것이다.

5. 사후의 카이사르[편집]

카이사르는 포로 로마노에서 장례를 치르고 화장되었다. 화장 당일,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가 작성한 유언장을 낭독한다.[95]
카이사르의 유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참고로 유언장 내용은 로마인 이야기 5권의 내용을 참고한 것이다.
  • 카이사르 소유 재산의 4분의 3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와 아티아의 아들인 옥타비아누스에게 남긴다.
  • 나머지 4분의 1은 루키우스 피나리우스퀸투스 페디우스에게 절반씩 나누어준다.
  • 제1상속인인 옥타비아누스가 상속을 사양할 경우, 상속권은 데키우스 브루투스에게 돌아간다.
  • 옥타비아누스가 상속할 경우 유언 집행 책임자로 데키우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지명한다.
  • 제1상속인 옥타비아누스는 상속과 동시에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고, 아들이 된 뒤에는 카이사르라는 성을 이어받는다.
  • 수도에 사는 로마 시민에게는 1인당 300세스테르티우스씩을 주고, 테베레 강 서안에 있는 카이사르의 소유 정원도 시민들에게 기증한다. 이 일을 실행할 책임자는 제1상속인으로 한다.
이로써 훗날로마제국의 초대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되는 18살의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에 등장한다. 처음에 그 누구도 옥타비아누스를 알지 못했으나 이 젊은 청년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로마 최초의 황제가 된다.

안토니우스가 이러한 유언장을 발표를 하고나서, 오히려 이 덕에 대중 사이에서 카이사르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으며 암살자들에 대한 분노도 높아졌다. [96] 그러다 보니 군중들은 카이사르를 추모하는 의미로 장례용 장작 위에 놓인 카이사르의 유해에다가 직접 구해 온 마른 나뭇가지들과 가구 조각들과 옷가지들을 땔감으로 수북이 덮어 주었고, 심지어 여자들은 보석들까지 불길에 넣어 주었다. 즉, 독재자였음에도 민중의 지지를 받는 카이사르였기에 수많은 로마 시민들이 경의의 표현으로 시신 위에 자신들이 가진 물건들을 땔감으로 수북히 덮어 주었고 그로 인해 화장을 위해 불을 당겼을 때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포룸이 심각하게 피해를 입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하필이면 불길이 꺼지고 나서 뼛가루(유해)를 수습하려고 했을 때 비가 세차게 내려 뼛가루들이 전부 강으로 쓸려가는 바람에 유해를 수습하지 못해 묘소를 만들지 못했다고 한다.[97] 그리고 이때 혜성이 하늘을 지나가서 많은 사람들이 카이사르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믿었다. 후대 학자들의 조사 결과, 이 혜성은 핼리 혜성으로 밝혀졌다.[98] 로마의 귀족들은 화장을 한 후 뼛가루나 유골조각들을 보관용 도자기(유골함, Urn) 또는 작은 석관에 담아 가족묘 건물에 봉안하는 식으로 장례를 치렀는데, 비바람에 유해가 모두 소실된 카이사르는 뼈조각 하나도 추릴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카이사르의 묘소는 남아있지 않다. 오히려 무덤이 없는 사실이 더욱 풍운아 카이사르답다고 평하는 이들도 있다.[99]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던 카이사르의 암살은 로마의 정국을 크게 요동치게 했다. 만일 이 과정에서 일이 다르게 풀렸다면, 카이사르는 일개 반역자로 역사에 오명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죽고 나서 암살파들은 정작 암살에 성공한 뒤 정국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고,[100] 오랫동안 카이사르와 싸워왔던 원로원의 옵티마테스 그룹은 폼페이우스의 패배 이후로 거의 와해되어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했다. 아직 살아 있었던 키케로조차도 별다른 일은 하지 못했다.[101] 결국 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레피두스가 2차 삼두정치를 결성하고 카이사르 암살범들과 그와 관련된 이들(키케로 포함)을 모조리 숙청하면서 로마의 정권은 카이사르의 후계자들이 장악하게 된다.[102]

애초에 카이사르와의 내전에서 폼페이우스, 카토, 렌툴루스, 메텔루스 스키피오 같이 영향력있는 이들이 사망하면서 보수파는 없어졌고 암살을 감행한 브루투스 일당에 카이사르의 죽음에 분노한 민중을 억누를 인재가 없었다.

이미 40년 전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에서 마리우스는 보수파에 대한 대숙청을 벌였고 주요 인사들은 대부분 사망했다.[103][104] 그러나 술라는 당시에 폼페이우스, 루쿨루스, 크라수스를 비롯한 젊은 보수파들을 결집하여 민중파를 박살내고 마리우스를 반역자로 규정한다. 술라는 당시 로마 진군으로 민중들에게 반발을 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압박하는 데 성공했다. 암살자들에게는 술라같이 냉정하고 술수를 잘 부리는 인물이 없었고 대부분 원칙주의자들이었는데다 상황판단이 느려 도피하는 신세가 된다. 이러한 암살자들이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에게 패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중에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를 물리치고 권좌에 올라 아우구스투스의 지위를 만들어내 로마 제정을 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를 신격화하였으며, 이로써 기독교를 도입할 때까지 로마 제국의 황제들이 대대로 신격화되는 관례가 만들어졌다. 이후로 황제들은 대대로 '카이사르'의 이름을 물려받았으며, 제정 말기에 이르게 되면 '카이사르'는 하나의 칭호가 되었다.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신격이 된 이후 그의 젊은 시절 모습을 한 조각상이 대량으로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일종의 제정기반 확립을 위한 프로파간다였다.

로마에서는 신격화된 카이사르에게 바치는 카이사르 포룸이 세워졌는데, 카이사르 포룸은 왠지 연인들의 밀회 장소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105]

6. 그에 대한 평가[편집]

6.1. 정치적 평가[편집]

내전기 이후로 혼란에 빠진 공화정 로마를 종결시키고 제정으로의 길을 연 인물이다. 카이사르 개인의 정치적 능력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으나, 그가 끼친 영향이 결과적으로 로마에 긍정적인 것이었는지는 평가가 갈린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가 낳은 걸출한 인재로서 포에니 전쟁 이후 표류하기 시작한 로마 제국[106]의 체제를 개혁하려고 했던 인재인 동시에, 공화정을 파멸시킨 독재자라는 양극의 평가가 존재하는 인물이다. 공화정만으로 로마가 결코 유지될 수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 개혁을 꿈꾸던 인물이라는 평과 그저 최고가 아니면 참지 못했던 성격 때문에 최고 권력자 자리에 도전했던 사람이라는 평이 갈린다.[107] 사실 둘 다였을 가능성이 높다. 카이사르 정도의 머리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야망이 로마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몰랐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원로원 중심 체제의 문제점을 잘 파악했으며 그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 또한 잘 제시했다. 물론 그로 인하여 발생하는 신체제의 한계와 부작용 역시 잘 알았겠지만 엄청나게 유능한 거물이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하튼 훗날 몽테스키외는 카이사르를 두고 이렇게 평했다.
카이사르가 행운을 타고났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 비범한 인물이 뛰어난 자질을 많이 지녔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결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어떤 군대를 지휘했어도 승리자가 되었을 것이고, 어떤 나라에서 태어났더라도 지도자가 되었을 것이다.

6.1.1. 긍정적 평가[편집]

로마가 낳은 유일한 창조적 천재


기본적으로 카이사르는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고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는데는 그야말로 동서고금을 통틀어서도 탑 오브 탑에 들어갈 만큼 뛰어났던 정치가였다. 당시의 광활한 로마 영토를 볼 때 당시의 포로 로마노에 모여 정치를 논하는 식의 공화정은 한계가 분명했다.[109] 그 증거로 카이사르가 암살당했지만, 결국 황제는 탄생한 점을 들 수 있다. 더군다나 이미 그라쿠스 형제의 실패, 술라와 마리우스의 내전 등을 통해 평민 계급과 원로원 계급의 골은 깊어져있었다. 즉, 강대한 카리스마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이 점은 사라질 수 없고 장기적으로 로마를 잠식했을 것이다. 이 같은 점으로 볼 때, 개인의 야욕이 있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으나, 단순히 사욕에만 불탄 것이 아니라 당대 시스템적인 한계점과 이를 해결하는 방법도 역시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카이사르의 정치체제는 1인이 독재를 하되 민중의 뜻을 존중하는 체제였다. 원로원의 부패한 기득권 세력을 청산하고 시민들에게 권리를 일부 되돌려주는 방식인 것이다. 카이사르가 시행한 개혁들은 무산자를 비롯한 빈민, 해방노예, 속주민들을 구제하고 원로원과 기사의 세력을 억제하여 민중에게 실익이 되는 개혁이었다. 그런 까닭에 민중이 카이사르를 지지한 것이지만.[110]

출생도 성격도 누구보다 귀족적이었던 카이사르가 민중의 숙원이었던 그라쿠스의 정책을 독재권력으로 시행한 것은 언뜻 모순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에 대해 포퓰리즘 정책이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것은 너무 현대적 관점에서 2,000년 전 활약한 인물을 폄하하는 것이다. 카이사르는 젊을 때부터 마지막까지 민중파[111]였다. 자신의 고모부이자 민중파의 상징이었던 마리우스의 장례식, 그것도 술라의 지배하인 로마 한가운데서 10대의 나이에 대놓고 민중파를 지지하는 조문을 읊어서[112] 술라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등, 어린 시절부터 이미 간이 어마어마하게 크고 타고난 정치인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113] 그래서 학계는 제정의 수립 여부를 떠나 수백 년간 대립해온 평민-귀족 간의 대결과 로마의 모순을 해결한 인물이었다는 점에선 이견이 없다.

카이사르는 술라에 의해 침탈당한 공적 소유를 복원하여 성장과 팽창에서 분배를 지향해 막대한 부를 지닌 귀족과 경제적으로 몰락한 평민과의 양극화를 효과적으로 해결했다. 그라쿠스 형제를 시작으로 민중파는 이러한 개혁을 실시하려 했으나 원로원의 보수 귀족세력에 의해 늘 저지되었는데 카이사르가 내전에서 승리하고 국가 개혁을 성공적으로 실시함으로써 거의 100년간 이어지던 민중과 민중파의 숙원을 해결한 셈이다. 호민관 그라쿠스가 이루지 못했던 문제를 역설적이게도 독재관 카이사르가 이루어낸 것.

부정적 평가 문단에서 '로마 공화정이 문제가 많기는 해도 민주정이기에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원로원도 민중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말하며 폼페이우스와 그라쿠스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데, 그라쿠스는 그 요구 들어주려다가 원로원한테 찍혀서 죽었다. 그리고 폼페이우스의 개혁책 역시 카이사르의 인기를 조금이라도 깎아내기 위한 기만책이라는 게 대세다. 이는 억측이 아닌 게 당장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당시, 원로원에서 드루수스라는 인물을 내세워 더 급진적이고 민중 친화적인 개혁안을 내세우게 해서 그라쿠스(동생)을 낙선시킨 뒤, 그가 죽자마자 자기네가 내세웠던 개혁안을 모조리 엎어버린 전적이 있다.

무엇보다, 초기 로마면 몰라도 당시 로마를 권력이 쪼개진 체제라고 주장하며 '폭주하는 집정관은 탄핵으로 어루만져주면 되지만, 폭주하는 황제에게는 칼 말고는 해결책이 없다' 라는 주장은 그야말로 문제의 본질에서 눈을 돌리는 헛소리인데, 공화정 말기 로마의 최대의 문제는 탄핵 먹일 수 있는 집정관이나 투표대상이 아니라 바로 원로원 최종 권고이기 때문이다.

이 원로원 최종 권고가 발동되어서 집정관에게 권한이 부여되면 거부권이나 탄핵을 모조리 무시하므로, 그들 그야말로 칼 말고는 해결책이 없는 수단이자 그 자체가 자국민 정적을 향한 재판없는 절대 무력행사 선언이나 다름없다. 발동되면 천 단위 이상의 자국민 학살조차 정당화시키고, 이게 발동된 순간 항복한 정적조차 죽어야 끝났다. 물론 재판 따윈 없다. 어지간한 절대왕정 체제의 왕도 단체 학살을 해버리면 반란이 일어나므로 함부로 휘두르기 힘든 무소불위의 권력을 부여하는 이 최악의 수단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문제지만, 초기 로마에는 이게 발동되지 않는 선에서 로마의 권력체계가 잘 유지되어왔다.[114]

하지만 로마 공화정 말기에는 이 원로원 최종 권고가 남용되었으며, 무엇보다 국가의 이득이 아니라 자기네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남용되었다는 것이 로마 공화정 말기의 결정적인 문제점 중 하나이다. 건강한 국가 시스템에 권력 견제가 필요한 근본적인 이유 중 가장 큰 원인이 이것이다. 권력자나 권력집단이 사익을 포기하고 오로지 국가를 위해서만 결정을 내린다면, 독재의 폐해는 현저히 줄어든다. 하지만 권력자나 권력자가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견제가 필요한것인데 로마 역사에서 확인되는 최초의 원로원 최종 권고가 발동된 안건이 바로 민중의 요구를 주장하던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그 지지자들을 학살하기 위함으로서 발동되며, 심지어 그라쿠스 1명도 아니고 그 지지자 약 3250여 명을 싹 다 죽여버린다. 권력 분리가 잘 되지 않은 건강하지 않은 정치 시스템이 일으키는 폐해의 대표적인 예시로 올려놔도 되는 케이스이다.

오늘날 정확한 표결 수는 알수없지만 로마에서는 한번 투표하면 수천에서 수만명 정도 투표한것으로 추산되는데[115] 오늘날의 투표시스템과 로마 공화정의 투표 시스템이 다르므로 투표수와 지지자수를 일대일로 대입할 수는 없지만 무려 3000명 단위로 지지자를 학살하는 행위는 그야말로 특정 지지자의 정치지지 기반을 추후에도 씨도 안 남기고 학살시키려고 한뒤, 도망치거나 숨지 못한 사람들 빼곤 다 죽였다고 봐도 될 정도의 학살이다. 공화정이라는 시스템이 투표로 인해 돌아간다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권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로원 최종 권고라는 수단이 군주정의 권력보다 나은점이 있다면 그나마 상시발동이 아니라는 점이겠지만, 대신에 상시발동이 아니므로 한번 발동이 걸리면 군주정에서조차 반란이 무서워서 함부로 못하는 짓을 끝까지 해버릴 수 있다.

또한 키케로와 카토는 개인적으로는 청렴했을지 몰라도 정치적으로는 절대 민주적이라고 할 수가 없는 인물들이었다. 당장 키케로가 자신의 최고 업적이라고 내세웠던 카틸리나 탄핵부터가 문학사적으로는 걸작 소리를 듣지만, 그 내막을 뜯어보면 유력한 정치인과 그 지지자들을 재판도 없이 처형시켜놓고는 그것이 로마를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며 정당화하며 법치주의를 완전히 무시한 연설이었다. 당장 키케로는 이 사건에서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동시킨뒤 카틸리나와 그 지지자들을 학살했다. 그라쿠스때 처럼, 약 3000명의 지지자들도 학살시켰으며, 이는 카틸리나의 지지자들을 보이는 족족 다 죽여버렸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투표에서 이기는 방법! 경쟁자의 지지자를 다 죽여버리자. 카토 역시 필리버스터를 남발하며 카이사르를 견제했다며 고평가 받지만, 이 인간이 필리버스터로 반대한 안건에는 민중에게 토지를 재분배하는 법안까지 들어있었다. 그나마 원로원파 중에서 나은 인물들로 언급한게 이 수준이었다.

심지어 술라가 카이사르보다 낫다는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는데, 술라가 사욕을 위하지 않았다는 부분을 아무리 높게 평가하더라도 기득권인 원로원을 위해서 내전을 일으킨 뒤, 내전 이후에도 수천 명 단위로 정적을 학살했다. 사욕으로 움직이진 않았지만 기득권층을 위해서 내전을 벌이고, 정적을 학살하고 독재를 하다가 내려온 사람이 낫다는건 말도 안되는 주장이다. 술라는 군사적 능력과 권력을 잡는 능력은 빼어났을지 몰라도 당시 로마체계의 문제의 본질조차 이해하지 못해서 결국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긍정적인 성과는 전무했으며, 개혁을 일으키긴 했지만 긍정적인 영향은 없는 반면 내전으로 국내를 피폐화시킨 이후에도 민중파를 학살하고 원로원 최종권고 발동등으로 국가 시스템의 불안정성만 키우는 퇴보나 다름없는 개악이었다. 무능한 리더가 열심히 일해서 열심히 말아먹었지만 의도는 좋았다는 건데, 카이사르가 민중에게 가져온 긍정적인 부분은 '독재를 정당화시킬 순 없다'며 전부 무시한뒤, 술라가 말아먹은 것에 대한 평가는 다 건너뛰고, 그 좋았던 의도에 대한 평가만 하면 전혀 공평한 비교가 못된다.

결정적으로 일부 공화정 말기의 원로원이 청렴한 사람이었다, 훌륭한 사람이었다. 아니었다를 논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과도 거리가 멀다. 원로원이 비판받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악이라서가 아니다. 단순히 그들이 부나 권력을 많이 가져서도 아니다. 로마는 중산층까지 무너져가는 상황에 있고 심지어 로마의 근간을 이루는 시민병조차 은퇴하면 퇴직금으로 땅도 못 받고, 벌어둔 돈은 부족하기 짝이 없어서 깡통차는 상황이다 보니 내전이나 반란 일어나기 딱 좋은 상황을 만들어놓았는데, 원로원은 이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해결하지 않은채로 부를 독점하고, 해결하라고 뽑아놓은 호민관들을 다 조지고 부를 독점했다. 하다못해 원로원이 부를 쓸어담더라도 시민병이 입에 풀칠할정도의 환경을 만들어주고 나서 벌어진 빈부격차라면 그래도 공화정을 유지하는 것이 독재보단 낫다고 주장할 여지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반란이나 내전을 부르는 전형적인 방식으로 국정운영을 진행한 것이다. 이런 시스템하에서는 내전이 진압되고 반란이 진압되더라도 얼마 안 가서 내전이 다시 발발할게 뻔하고, 다시금 진압되더라도 무한반복될 게 뻔하다. 그 원로 중 몇 명이 개인적으로 청렴했다고 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더군다나 그 상황을 수습할 의지조차 없었고, 그 해결을 하려는 민중파의 의견을 묵살하기 위해, 원로원 최종 권고를 때리거나 필리버스터로 토지 재분배를 막는데 앞장서기까지 한 모습을 보인다면 더더욱 옹호의 여지가 없다.

카이사르가 정적을 숙청한 뒤, 절대권력을 구축한 것이 민주주의에 악영향을 끼쳤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동시에 당시의 원로원이 이끌어가던 공화정은 민중을 위한 법을 만들 생각도, 의지도 없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가 없다. 때문에 원로원한테서 권력을 뺏은 것 자체는 잘못한 일이라고 볼 수가 없으머, 카이사르의 오점을 찾는다면 그렇게 획득한 권력을 독점한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권력을 손에 넣은 자의 인간적 한계라고 봐야지, 카이사르가 야망이 넘치는 폭군이라서 그랬다고 보는 것은 심한 처사다.[116]

그리고 사실 카이사르가 공화정을 파괴했다고들 흔히 이야기하지만, 카이사르가 살아있을 당시는 물론이고 그 후에도 로마의 공화정은 명목상으로나마 계속 존속했다. 로마가 황제정이 된 것은 그 후임자였던 아우구스투스의 직위였던 임페라토르(총사령관)이 절대 권력을 지닌 채로 그 후계자들에게 세습되면서 왕과 같은 권위를 갖추며 종국에는 엠퍼러(황제)의 어원이 되는 지경에 이르면서 공식화된 거지, 당장 아우구스투스도 자신을 부를 때는 프린켑스(제1시민)이라 불렀고, 공식적인 직함은 어디까지나 그전부터 있던 호민관이었다. 정확히는 국가의 대표가 모든 권력을 잡고 정국을 다스리는 전제정이라는 개념 자체가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도 있다.

물론 이 시점에 이미 로마의 공화정이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아우구스투스가 한 일이지 카이사르가 한 일이 아니다. 카이사르는 왕과 다를 바 없는 권력을 누리기는 했지만,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왕에 취임한 적이 없으며, 기존의 임시직이었던 독재관직을 종신화하는 것에서 그쳤다. 그리고 이마저도 원로원의 거두였던 술라가 먼저 한 짓이지 딱히 카이사르가 오리지널인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앉은 자리에서 1년도 안 되어 암살로 숨을 거둔지라, 그가 평생 독재자로 살았을지, 아니면 술라처럼 2년만에 은퇴하고 내려왔을지조차 판단할 수가 없게 됐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바로 당대 로마가 가야할 길을 알고 실천했다는 점이다. 당시 로마는 포에니 전쟁을 겪으면서 이로 인해 내부적으로든 외부적으로든 환경에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117] 그런데 기존의 원로원파들은 이런 변화에 대한 대처를 소홀히하고 오히려 포에니 전쟁으로 인한 과실을 독점하는 데만 급급했으나 카이사르는 이 변화를 읽고 민중의 편에 서서 기득권과 싸웠다. 이 점만 놓고 봐도 카이사르는 쉽게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는 인물이다.

6.1.2. 부정적 평가[편집]

독재자들이 제정한 법률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정당하다는 말인가? 아테네에서 저 유명한 30인(三十人) 독재자가[118] 법률을 부과하려고 한다면, 또 설령 아테네인들 전부가 독재자의 법률을 좋아한다면, 그것만으로 그 법률을 정당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법률론」 1.15.42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여! (중략) 제가 염려하는 바는 당신이 영예의 참된 길을 망각한 채, 당신 혼자가 우리 모두보다 강한 것을 영예로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며, 동료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것보다 그들을 두렵게 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영예의 길을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소중한 시민이 되는 것, 국가에 공헌하는 것, 칭송받는 것, 존경받는 것, 사랑받는 것이야말로 영예의 길입니다. 실로 두려움과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반감과 혐오와 미약하고 덧없는 길입니다. "두려워하기만 한다면 나를 증오해도 상관없다." 극중에서도 이렇게 말했던 사람은 파멸의 길을 걸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몰락을 보고서도 사랑받기가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을 여전히 원한다면, 누가 무슨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카이사르가 행복한 인생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참으로 가련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살해자에게 처벌이 아니라 최고의 명예를 안겨 주게 될 그런 삶은 결코 행복한 삶이라 할 수 없습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필리피카이」 中
역사서를 읽었고 고대에 벌어진 일들의 기록을 잘 활용한다면, 공화국에서 개인 시민으로 사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분간을 반드시 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시민 자격으로서는 카이사르나 스키피오 같이 될 수 있다면 차라리 스키피오 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랄 것이다. (중략) 또 고대의 저술가들이 카이사르를 아무리 칭송하여도 그 영광에 속아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를 칭송한 사람들은 그의 좋은 운명에 현혹되었거나, 카이사르(황제)의 이름으로 운영된 제국이 너무 오래 지속하여 그에 대하여 자유롭게 쓰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겁먹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저술가들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카이사르에 대하여 어떤 글을 했겠는지 알고 싶은 사람은 그 저술가들이 카틸리나에 대해서 어떻게 말했는지 살펴보면 된다. 카이사르는 이 사람과 비해 보면 더욱 더 혐오스러운 자이다. 카틸리나는 고작 국가를 전복하려는 생각을 품었을 뿐이지만, 카이사르는 그런 생각을 실천했으니 더욱 비난 받아 마땅하다. 또 독자들은 저술가들이 카이사르 암살자인 브루투스를 어떻게 칭송하는지 살펴보기 바란다. 카이사르의 권세에 눌려 그를 비난하지 못하니까 그 적수를 높이 칭송했던 것이다.
(중략)
그리고 그가 그 다음으로 암군들의 시대를 자세히 검토해 본다면, 전쟁으로 적개심이 가득한 시대, 소요 사태로 의견 분열로 가득 찬 시대, 전시나 평시나 가리지 않고 잔인한 시대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중략) 그는 카이사르가 로마, 이탈리아, 그리고 온 세상에 얼마나 많은 혼란을 초래했는지 똑똑히 보게 될 것이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로마사론」 1-10 中
후일 이 파당의 지도자로 올라선 카이사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을 가렸고 그리하여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목에다 멍에를 얹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로마사론」 1-17 中

다만 우리나라에선 로마인 이야기의 영향으로 무슨 결함이 없는 완벽한 체제를 그린 영웅으로만 통하는데 정작 서양에서는 그렇지 않다. 정치적인 의미에서 '카이사르'라고 까면 '독재적 야심이 있는 사람'이라는 정도의 의미로도 통한다.[119]

로마의 체제는 기본적으로 혼합정의 형태를 한 공화정 체제이다. 즉, 왕정의 요소를 지닌 행정관, 귀족정의 요소를 지닌 원로원, 민주정의 요소를 지닌 민회가 상호견제를 하면서 권력이 쪼개진 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근현대의 국가들에 비하면 문제점이 많으며, 실상은 원로원 위주의 체제였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로마 공화국'에서는 폭주하는 집정관과 호민관을 탄핵할 수 있었고, 뻘짓하는 원로원 의원을 제명할 수 있었고, 민회는 집정관, 법무관, 호민관, 조영관 등 행정관들을 선출했다. 반면 카이사르로부터 비롯된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에 대한 합법적인 견제 장치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고 최고권력자의 폭정에 대항할 수단은 군사 쿠데타와 암살만이 존재하게 되었다.[120][121] 마키아벨리가 「로마사론」에서 쓴 표현을 빌리자면, 폭주하는 집정관은 탄핵으로 어루만져주면 되지만, 폭주하는 황제에게는 칼 말고는 해결책이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카이사르 본인부터가 '칼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탄핵이 아니라 암살로 정치 커리어가 끝나버렸다. 그리고 카이사르가 파괴해버린 로마 공화정은 훗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전제정까지 이어진다. 로마 황제의 형식적인 견제 및 권고 기관인 원로원은 시간이 지날수록 힘을 잃어갔고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사후 로마의 정세는 황제를 꿈꾸는 군인 야망가들의 전쟁으로 이어졌으며 결국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전제정을 성립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카이사르가 민중을 존중했네 어쩌네 하는 것은 결국 부차적인 문제이다. 그러한 존중은 어디까지나 최고권력자 한명의 의지에 종속되어있으며, 그 의지가 돌변해버린다면 '칼'이라는 선택지만 남아버리는 것이다. 카이사르에게 한참 이후의 디오클레티아누스를 거론하며 비판하는 게 가혹하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그가 공화정의 권력견제장치를 파괴해버린 것은 분명하고,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카이사르 본인부터가 잘 알았을 것이다. 만약 몰랐다면, 그건 공화정 로마의 정치가로서 무능한 것이고.

게다가 "공화정 체제는 답이 없었고, 원로원은 부패했고, 따라서 군주정으로의 복귀는 필연이었다"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적 입장이다.[122] 카이사르의 옹호자들 일부는 카이사르 암살 후의 로마가 아우구스투스의 체제로 쇄도한 것을 예로 들면서 이러한 필연성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말도 안 되는 비판이다. 이미 카이사르가 공화정을 유린하고 파괴하여 원로원의 권위를 박살내버린 상황이었는데, 이걸 토대로 공화정의 필멸성을 논하는 것은 당대의 공화정 지지자들에게 너무 억울한 평가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돌이켜보면, 공화정의 몰락을 거의 예정된 일처럼, 즉 마치 버틸 수 없는 늪에서 어쩔 수 없이 추락할 수밖에 없었던 사건으로 보기 쉽다. 사태의 전개에 어떠한 외부 위험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 갈등은 내부에서 비롯되었다. 제국을 통치하는 데 필요한 요구들에 공화정 시기의 사회와 정부가 대응하는 과정에서 빚어졌고, 로마의 팽창 동력이었던 귀족 간의 경쟁 그리고 '영광'과 '위엄'의 압박에서 비롯되었다. 사병화된 군대들, 점점 늘어가는 부로 인해 경쟁은 더욱 격화되었고, 결국 한 사람의 수중에 위엄, 부, 군사적 지배권이 집중될 때까지 싸움은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떠한 역사도 진정으로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 마지막 시점에서조차 사람들은 공화정과 이상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공화정의 몰락은 불가피한 운명이 아니었다. 이것은 야망과 자기희생, 천재성과 어리석음이 섞여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이야기이다.

데이비드 M. 귄, 「로마 공화정」 中

결국 부정적 평가를 요약하자면, "카이사르가 제아무리 민중을 위해줬다고 하더라도, 그 본질이 독재자라는 것은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일 것이다. 민중의 지지는 결코 독재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독재의 반대말은 '다수의 지지'가 아니라 '권력의 분립과 상호견제'이다. 카이사르는 결국 권력을 좋아하던 탐욕스러운 개인에 불과했으며, '인민의 것(Res populi)'인 '공공재산(Res publica, 의역하면 공하국)'을 박탈하여 자신의 '사유재산(Res privata)'으로 만들어버렸다. 카이사르의 패악질에 비한다면, 차라리 술라는 잔혹했을지언정 '공화정을 지켜야 한다'라는 신념이라도 있었다. 물론 술라의 개혁에는 구체적인 여러 문제점이 있고, 무엇보다 그 스스로가 군벌이었기에 모순이 가득했으나, 술라는 마지막에 스스로 모든 관직을 사임하고 개인의 생활로 은퇴함으로써 자신의 의도가 진심이었음을 입증했다.[123][124]

또한 카이사르의 일부 옹호자들은, 카이사르의 적들을 구시대적인 기득권층으로 모조리 몰고가는데, 이는 너무나 부당한 평가이다. 키케로는 이상주의자이고 원칙주의자였으며 카이사르가 유린한 공화정을 수호하느라 인생을, 그리고 최후에는 목숨을 바쳤다. 소(小) 카토는 깨끗하고 검소하며 총독으로서의 내정도 마찬가지였다는 평이 대다수였고 내전이 사실상 카이사르의 승리로 결착나자 자살로 생에 마침표를 찍었으며,[125][126]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의 개인적 호의에 힘입어 자신에게 보장된 장래의 공직을 뿌리치고 가시밭길의 모험에 나섰다.

다만 위의 서술은 긍정적 평가에서도 기술했듯이 그들이 보인 위선적 면모[127][128] 때문에 그리 호응받지 못하고 있다.[129]

6.2. 군사적 평가: 기적의 반전 전술가[편집]

카이사르가 얼마나 훌륭한 장군이었는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그가 싸운 곳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험악한 곳이었고, 그가 정복한 지역도 매우 광대했다. 또한 그는 잔인하고 야만스러운 민족들을 너그럽게 다스렸고 포로들에게도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부하들에게도 누구보다 따뜻한 장군이었다. 그는 갈리아 지방에서 크고 작은 전쟁들을 치르면서 10년 동안 무려 800개의 도시를 점령하였으며 300개의 나라를 무찔렀다. 그래서 300만 명의 적과 싸워 100만 명을 죽이고[130] 100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카이사르> 中

군사적 영웅으로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업적은 상당히 특이하다. 역사상 대부분의 명장들은 알고 보면 전투 이전에 이미 이길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대승리를 거뒀는데,[131] 카이사르는 오히려 정상적인 전투에서는 곤경에 처하는 일도 적지 않았지만, 상황이 궁지에 몰렸을 때는 예상 외로 승리하는 일이 매우 많았다. 대표적으로 다음 전투들이 있다.
  • 사비스 전투: 숲길을 지나던 중 두 배에 달하는 네르비족의 매복에 걸려 장기인 로마군의 조직력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싸워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놓였지만 결국 승리한다.
  • 알레시아 전투: 공성전에서 갈리아 구원병에게 역포위를 당하는 치명적인 상황에 놓였지만 오히려 역전에 성공한다.
  • 파르살루스 전투: 정석적인 망치와 모루 전술을 펼친 폼페이우스 군을 상대로 하여, 기병이 부족하다는 약점을 보조병으로 기병을 맞받아치는 변칙 전술로 승리한다. 망치와 모루 전술의 변칙 기술을 사용했다는 것이 특기할 만한 점이다. 망치와 모루 전술이 불후의 전술임에도 이를 그대로 답습했던 폼페이우스가 이 회전에서 카이사르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한 것을 생각하면 카이사르의 변칙이 얼마나 훌륭했는가를 알 수 있다. 망치와 모루 전술에서 가장 중요한 기병의 열세(1:7의 비율)를 만회하기 위해서 기병을 뒤에 투석병을 매달고 뛰면서 잠시 정차후 투석, 다시 질주를 무한 반복함으로써 폼페이우스의 기병을 견제하게 한 후 정예 중보병을 이용하여 폼페이우스의 기병대를 섬멸한 것은 탁월한 임기응변이었다.[132] 이는 알렉산드로스나 한니발과 같은 선배와 달리 기병의 전력이 열세인 점에서 '정석을 사용할 수 없었던 것'에 기인하긴 하지만, 결과가 말해주듯이 유효하며 훌륭한 변칙이었다.

주요 전투를 살펴보면 카이사르는 정석적인 길을 걸어간 지휘관이 아니라 타고난 임기응변과 재치가 뛰어난 타입의 지휘관이었다. 바꿔 말하면 개인의 자질에 의존하는 인물로써 후세의 장군들이 배워 따라하기 어려운 타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알렉산더나 한니발과 달리 군사적인 정석을 세우지는 못했다. 사실 카이사르는 권력을 얻기 위해 무력을 사용한 타입에 가깝다. 물론 드넓은 갈리아 지역을 단 10년 만에 평정하고, 여러 위기 상황을 기가 막힌 임기응변으로 돌파했으며 나아가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렸던 폼페이우스를 격파했으며 내전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휘하 군단병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카이사르의 군사적 자질을 낮게 평가할 이유는 없다.

애초에 그가 이렇게 독특한 전술을 쓸 수 있었던 이유도 상황의 유불리를 읽어내는 뛰어난 통찰력과 병사들에게서 거의 광적인 복종심을 이끌어낼 정도의 지도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병사를 통솔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났고 그 휘하에서 종군했던 로마 군단병들 역시 전투력 수준이 남달랐다. 물론 카이사르의 군단병의 수준은 수년에 걸친 갈리아 전쟁을 치르면서 다져진 것이지 처음부터 뛰어난 병사들을 통솔했던 것은 아니다. 갈리아 전쟁기 초반에는 경험없고 우왕좌왕하는 군단의 모습이 나오나 차차 정예병이 되어간다.[133] 이는 항상 수적으로 열세였던 카이사르가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자 자신의 부대를 무적의 군대로 키워낸 그의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이 훌륭했음을 나타내준다. 예컨대 파르살루스 회전에서 그와 그의 병사들이 보여준 전략은 독창적이다 못해 잘 단련된 병사가 훌륭한 지휘관을 만나면 어떻게 유기적으로 움직이는지를 보여준다. 이때 당시 반대파의 지휘관이었던 폼페이우스는 수년간 갈리아에서 생존한 카이사르의 베테랑 부대를 맞아 양 진영 간의 거리를 정석의 두 배쯤으로 늘린 후 휘하 병사들에게 돌격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이는 카이사르 측 병사가 먼 거리를 달려오느라 지치는 것을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카이사르 측 병사들은 절반쯤 뛰다가 상대편이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는 중간에 잠깐 숨을 고른 후 다시 뛰었다. 당시 카이사르는 그쪽에 없었기 때문에 카이사르가 시켜서가 아니라 군단병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멈춘 것이었다.

카이사르가 전략가로서는 그리 높은 수준은 아니라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략가로서는 뛰어나지 않지만 돌발상황이 닥쳤을 때 임기응변으로 수습하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보는 것이 그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버나드 로 몽고메리가 쓴 전쟁의 역사다. 하지만 엘 알라메인 전투에르빈 롬멜과 자신의 대결로 미화하고, 조지 S. 패튼의 이름이 단 한번도 나오지 않고,[134] 마켓 가든 작전마저도 억지로 변호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신뢰도가 좀 떨어진다. 어쨌든 몽고메리는 철저한 계획이 아닌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 것을 유달리 싫어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전후 서술과정을 보면, 감히 브리튼을 침공한 괘씸죄로 카이사르를 깎아내리는 느낌이 매우 강하게 든다는 말도 있는데, 이건 억측에 가깝다. 기본적으로 다수의 영국인들은 로만 브리튼 시대를 긍정적으로 보며, 몽고메리가 교육받았던 시대에는 그런 경향이 더 강했다.[135]

사례를 보아도 위의 두 전투도 궁지에 몰리지 않을 수 있는데 일부러 찾아 들어간 것이다. 카이사르가 워낙에 전술가로써 능력이 뛰어나고 기회를 찾아내는 데 탁월하다보니까 순간적인 판단으로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카이사르만 아니고 전술가로 이름을 날리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경향인데 기회를 포착하고 밀어붙이는 성향상 위험한 작전을 선택하는 모험주의에 전술가의 고질병이라고 할 수 있는 한방에 모든 것을 거는 대결전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본인 스스로도 실수를 만회하려하거나 단점을 고치려하기보단 대역전승의 기회를 찾고 장점을 극대화하는 것이 낫다라고 말했을 정도니 그 성향이 이해된다.

베르킨게토릭스폼페이우스를 상대해서 카이사르가 패배한 두 전투, 게르고비아 공격, 디라키움 포위전을 볼 때, 카이사르는 너무 공세적인 작전을 선택했고 이게 패배의 원인이었다. 전략적인 열세에서 강대한 적을 공격하는데, 상대방은 전략적 우세를 이용해서 카이사르의 병참을 끊으면서 자신은 병참선을 확보한 뒤에 요새화한 진지에 틀어박혀서 소모전을 펼친다. 당연히 결전을 벌이려는 카이사르는 군량 부족과 포위의 위협 때문에 장기전에서 불리해진다. 카이사르의 군대가 회전 이외의 전투 경험도 풍부하다지만 로마군의 장점은 조직력에서 나오고 방어전에서는 조직력과 전투력을 상쇄할 수 있다. 거기다 수적으로 밀리면서 꼭 일부 병력을 떼어놓아서 다른 쪽을 견제한다는 식의 작전을 구사한다. 자신의 전술적 역량에 자신을 가지니까 하는 것이지만 직접 전투를 회피하고 소모전을 강요하는 전략에 스스로 걸려들어가는 식의 전투를 벌임으로서 쓸데없이 패배하고 만다는 면도 있다.

요컨대 카이사르는 공세일변도 전술 때문에 위기를 자초하는 면이 강한 만큼 상대가 판짜기를 잘하는 방어적인 장군이면 살짝 휘둘리는 경향이 존재한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전략적 식견은 군사적인 면보다 정략적인 측면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갈리아 전쟁 때는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서 게르만족과 대결상황에서 충분히 갈리아에 동맹군을 만들어냈고 이후에도 갈리아가 통일되지 않은 상황을 잘 활용했다. 그러다가 베르킨게토릭스라는 걸물이 나타나서 갈리아 전체의 동맹을 이끌어내는 상황에서 예상치 못하게 고립되었다. 내전에서도 원래대로라면 북아프리카부터 차분하게 공략하려는 당초 계획이 무너지자 정치적으로 우위를 점한 뒤에 가한 공세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전략적으로 주도적인 위치를 가질 수 있는 경우가 없었고 항상 적지에서 혼자 싸우는 상황이 연출되었다는 환경적 문제도 감안해야 한다. 갈리아 전쟁도 사전에 치밀한 계획 아래에 대군을 조직적으로 밀어붙인 것은 아니었고, 내전도 예상치 못한 싸움에 동족과의 전쟁이라는 면에서 제약이 있었다.

가장 큰 불운이라면 카이사르의 장점과 약점을 파악하고 소모전을 벌이려는 우수한 지휘관을 두 번이나 연달아 상대한 것이고 가장 큰 행운이라면 둘 다 소모전에서 승기를 타고 전투를 걸었다가 카이사르에게 회생의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다.

카이사르 본인의 전투 실력이라면 의외로 모자라기는 커녕 뛰어난 편이었다. 카이사르는 젊을 때부터 마르고 호리호리한 체형이었는데 의외로 뛰어난 검술과 기마술, 격한 전투에도 지치지 않는 강한 체력을 가져 군단병들이 처음엔 무시하다가 나중엔 존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말을 잘타서 등자가 없던 시기에 허벅지 힘만으로 말의 배를 잡고 두 손을 고삐도 안 잡고(!) 뒷머리에 대며 말을 타버리는 바람에 어머니인 아우렐리아를 기겁하게 만들었다고 한다.[136] 갈리아 전쟁 중에서는 하루동안 말을 타고 무려 100km를 돌파하는 고대 최고속도의 진군을 한 적이 있었다.

폼페이우스의 맏아들인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스페인에서 치른 문다 전투에서는 직접 전투에 앞장서서 싸운 기록이 나온다. 높은 지형에 있던 적군의 공격에 고전하자 직접 선두로 나섰고 선봉에 선 카이사르에게 적군의 공격이 집중됐다. 아피아누스는 “카이사르에게 날아온 투창이 200개나 됐다”고 기록했다. 카이사르는 투창을 피하기도 했고 일부는 방패로 막기도 했다. 투창 몇 개는 방패에 매달려 덜렁거리기도 했다. ‘운이 좋게도’ 카이사르는 상처 하나 없었다. 카이사르는 투구를 벗어 자신이 누구인지 병사들이 쉽게 알아보도록 했다. 그러고는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브리타니아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정예 10군단에게 다음과 같이 외쳤다. “그대들은 그대의 장군이 고작 아이들에게 패배하도록 놔두면 수치스럽지도 않은가?”(플루타르코스) 주춤하던 병사들은 다시 전진했고 끝내 승리를 거둔다. 후에 카이사르는 “나는 항상 승리를 위해 싸웠지만 이번에는 처음으로 살기 위해 싸웠다”고 토로했다. 수십, 수백명의 집중공격을 받으면서도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남은 운빨과 실력을 갖췄다고 볼 수 있다.[137]

리델 하트의 경우 카이사르가 일레르다와 파루살루스 이전에는 잘 쳐봐야 능력 있는 부관형 지휘관일 뿐이라며 여기서 최고의 승리인 파르살루스 하나를 더해봤자 일급 지휘관이 되긴 힘들다고 혹평했다. 다만, 이건 리델 하트의 스키피오 빠심이 폭주한 결과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평가로 인정받진 못한다.

7. 사생활[편집]

나이가 먹어선 머리가 빠지자 대머리란 소리에 좀 민감했다고 한다. 월계관을 항상 쓰게 해달라고 원로원에게 요청한 게 빠지는 머리숱을 가리기 위해서였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카이사르가 개선식을 할 때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었다. 당시 로마에서는 개선식에서 병사들이 개선장군의 체면을 깎는 희극적인 구호를 외치는 게 전통이었다. 개선장군이 너무 교만해지면 신들의 질투와 미움을 사게 될까 우려해서 일부러 신들이 들으라고 소리치게 됐다고 한다. 동시에 당당하게 대중 앞에 선 개선장군을 신나게 놀려먹음으로써 개선식 행사의 분위기를 더욱 재미있게 만드는 효과도 있었다. 카이사르의 개선식 때 병사들이 선택한 구호는 밑에서 언급하는 동성애 스캔들 구호와 아래의 구호였다.
시민들이여, 마누라를 숨기시오.
대머리 난봉꾼이 지나간다오.
그대의 마누라들이 카이사르에게 바친 돈은,
전부 갈리아 창부들의 주머니로 들어갔다오.
이 말을 들은 카이사르는 첫 줄에 나오는 바람둥이 드립까지는 전통대로 웃고 넘겼지만 이 대머리 난봉꾼 구호는 "좀 심하지 않느냐"며 투덜댔다고.[138]

그는 대체적으로 정숙한 유부녀 취향이었다고 한다.조조? 기원전 63년 카틸리나의 탄핵 당시 원로원 회의에 참석 중이던 카이사르에게 웬 서신 한 통이 전해졌는데 카이사르가 서신을 읽자 카이사르 반대파인 소 카토가 갑자기 일어나 카이사르가 읽고 있는 서신이 카틸리나 일파와 상호 모종 관계[139]에 있다는 증거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며 내용을 공개해야 한다고 소리쳤다. 카이사르가 지극히 사적인 서신일 뿐이라고 응수하자 카토는 더 기세등등해졌고 결국 카이사르는 그럼 카토 본인이 직접 이 자리에서 낭독하라면서 서신을 건네주었다. 그런데 그 서신의 내용은 사실 소 카토의 이복누이인 세르빌리아 카이피오니스가 카이사르에게 뜨거운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소 카토는 한마디도 낭독하지 못하고 얼굴이 시뻘개진 채로 카이사르에게 편지를 내던지며 ''작작 좀 밝혀!"라고 소리쳤고 원로원 회의장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참고로 그녀의 자식은 그 유명한 마르쿠스 브루투스다. 일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정말 사랑했던 여인이 세르빌리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브루투스를 너무 아낀 나머지 이런 야담까지 나왔다. 그러나 브루투스 본인은 그 말 때문에 시달려서 싫어했다. 연애 편지와는 별개의 이야기지만 이때 카틸리나에 대한 여론이 지독히도 나빠서 카이사르는 카틸리나에 대해 '일단 재판을 하고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군대로 감시하자'라는 발언을 했다가 군중들에게 맞아 죽을 뻔했다. 법적으로는 엄밀히 말하면 카이사르가 옳았고, 키케로가 틀렸다. 재판없이 로마 시민을 즉결처분하는 건 불법이었다. 한마디로 법적 절차도 없이 그냥 심증만 믿고 즉각 처형한 셈.
심지어 그의 자금 스폰서인 크라수스의 아내마저 넘어갔지만 크라수스는 계속 군자금 융통을 해주었다. 단순히 채권뿐 아니라 크라수스 본인이 카이사르의 매력에 빠진 탓도 있었을 것이다. 크라수스는 자기 아들인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를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시작했을 때 맡기기도 했는데 카이사르도 그를 '젊은 크라수스'라 부르며 매우 아꼈다고 한다. 정치적 협력자에 대한 배려도 있었겠지만 상당히 유능한 청년이었기 때문이다.[140] 자신의 정적이 되는 폼페이우스의 아내하고도 바람을 폈으니 어떤 의미에서 삼두정치의 알파라 할 수 있을 듯. 그리고 자신이 바람핀 피해자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냈다.

이 외에도 장가를 여러 번 갔는데, 주로 정치적인 목적. '결혼은 현실'이라는 것을 몸소 실천했다.[141] 사실 당시 로마의 절대 다수의 결혼은 정략결혼이었다. 현대적 의미의 연애 결혼은 단적으로 말해 19~20세기에 영미권에서 발생한 개념으로 봐도 좋다. 다만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는 리비아와 오로지 사랑만으로 결혼을 했다.[142]

카이사르가 여성들에게 보냈던 연애 편지들은 사후 신격화가 되면서 엄격하고 냉정한 성격인 후계자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싸그리 사라졌다. 카이사르가 남긴 편지들은 '신적인 인물'이 작성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감정이 녹아들어 왕조의 실질적이고 정신적인 시조가 수많은 여자들과 그렇고 그런 관계였다는 기록을 일부러 삭제한 것이다. 후손들에겐 대단히 아쉬운 일이다.

한가지 특기할 점은, 크라수스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카이사르는 바람둥이 노릇을 하면서도 여자 문제 때문에 중요한 인간관계에 문제가 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관리했다는 점이다. 이는 유명한 클레오파트라와의 염문에서도 드러나는데,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연애를 즐기면서도 로마에서건 이집트에서건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언급한 적은 한번도 없고, 그러면서도 클레오파트라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클레오파트라가 자신과의 관계를 이용해서 이집트에서의 지위를 강화하는 것은 묵인했다. 즉 카이사르는 이집트의 여왕과의 관계를 이집트를 관리하는데 최대한 활용하면서도 로마인들의 반발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적절하게 줄타기를 한 것이다.[143] 게다가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카이사리온을 아들이긴 하지만 공식적인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유언장에도 카이사리온과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언급은 한 단어도 나오지 않았다. 이러한 모습은 후에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반해서 아내와 이혼하고 로마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된 것과 대조적이다.[144]

많은 여인들과 연애설을 뿌리고 다녔지만 정작 본인은 간절히 원하던 적자를 얻지 못했다.[145] 유일하게 언급된 분명한 혈육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얻은 카이사리온뿐이지만 그는 절대로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사실상 남남 취급이었고 그외에 여러 여인들에게 아들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없다.[146]

비록 양자를 들여서 가문의 대를 이었지만 본인의 피를 이은 적자를 얻기를 간절히 원했을 거라고 하는데, 기록에는 남아있지를 않다. 유일한 아들인 카이사리온은 양자 옥타비아누스에게 참살되었으며 카이사르의 적통은 대가 끊겼다. 드라마 ROME에서는 카이사리온이 죽지 않고 무사히 탈출했다는 대체역사로 흘러가고 PS2 게임 '아르고스의 전사'에서는 카이사리온의 죽음에 보복하기 위해서 클레오파트라가 악의 여왕으로 부활한다는 설정이다.

이러나 저러나 카이사르는 끝내 자식복이 없었고 그렇기에 미련없이 양자 옥타비아누스에게 정통성을 다 몰아줄 수 있었다. 물론 인간적으로 솔직한 심정이야 이집트의 카이사리온에게 뭔가 한몫 떼어주고 싶을지 모르겠지만 그랬다가는 자신이 구상한 로마 제국의 계획을 망칠 수 있기에 씁쓸한 심정으로 넘어갔을지도.[147]

사후에 신격화되어 세워진 '카이사르 신전'은 왠지 로마에서 연인들의 밀회 장소로 자주 쓰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카이사르가 흐뭇하게 내려다보지 않았을까 하면서. 참고로 카이사르의 가문은 사랑의 여신 비너스의 후손을 자칭하고 있다.

8. 카이사르의 교양[편집]

많은 문학작품(?)들이 사라지긴 했어도[148] 후세까지 전해지는 갈리아 전기[149]의 담백한 문체는 키케로의 화려한 문체와 함께 라틴어에 입문하는 이들에게 지옥을 선사한다.[150] 일반적으로 라틴어 초급에서 배우는 주어+목적어+동사의 간결한 문구(라틴어는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문장 내에서의 품사의 순서가 자유롭다)는 갈리아 전기에서의 카이사르의 문체이다. 일단은 이탈리아에서는 초등, 중학생도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것에 익숙해진 뒤, 키케로의 문체를 자유자재로 해석할 수 있게 되면 라틴어를 그럭저럭 한다고 자부해도 좋다.실제로 갈리아 전기 원문을 보면 단순하고 담백하다는 문체도 해석하기 어려울 때가 많지만.[151]

뛰어난 지성인이기도 해서 로마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키케로와도 절친한 사이였고 내전이 일어났을 당시 그를 만나서 협력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고 한다. 귀족 가문이라고는 하나 태어났을 당시엔 평민과 별다를 것 없는 상황이었지만, 상당한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또한 엄청난 독서량을 자랑했으며 젊은 시절부터 여러 문학작품을 저술하는 등 의외로 학구파적인 면모가 있었다. 카이사르가 장년기에 대단한 행보를 보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어릴 적부터 쌓아온 학문적인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집트를 방문해서 책력과 천문학 등에 관심을 가졌고 나일 강의 수원을 탐색하기도 했다고(물론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이후 이런 관심은 당시 태음력을 사용하던 로마에 율리우스력을 사용하게 해서 오늘날의 달력체계의 기틀이 되기도 했다. 아시아경제 보도에 따르면 라틴어로 달력(캘린더)는 칼렌다리움(Calendarium)이라고 해서 차용증, 채권, 빚문서, 금전출납부 등의 의미도 지니고 있었으며, 고대 로마에서는 그리스의 관습을 본따 매년 1월 1일에 로마 시내 모든 주민들이 광장에 모여 신전에서 주관하는 의식을 치르고 새해 달력을 받아오면서 채권자와 채무자들이 모여 기존 채무관계를 재조정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채무자들이 돈 떼먹고 외국으로 튀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나오지 않으면 즉시 추방 및 로마 내에서 보유한 모든 재산을 동결시켜버렸다고.# 본인이 늘 빚에 쪼들려 살던 카이사르로서는 달력이 전혀 예사로 보이지 않았을 법도 하다. 또한 카이사르 본인이 폰티펙스 막시무스였던 이유도 있을 것이다. 최고사제가 해야 할 일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일이 달력을 조정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책들의 제책 방식 또한 카이사르가 고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로마인들은 팔랑팔랑 책장 넘기는 게 그전까지 쓰던 두루마리를 펼치는 것에 비해 위엄이 떨어진다고 생각해서[152]널리 사용되지는 못하고, 파피루스 대신 뻣뻣한 양피지를 쓰던 중세 수도자들이 사용하면서 일반적인 제책 방식으로 이어져오게 된다.

9. 카이사르의 행운[편집]

먼저 행운을 약간 우연 내지 미신으로까지 치부하는 동아시아 문화권과 달리, 서양에서는 고대로부터 행운을 성공을 위한 덕목들 중 하나로 보고 인생과 관련된 진지한 관점으로 접근했다는 문화적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로마에서는 패장을 처벌하지 않았는데 전쟁에선 가능한 모든 준비를 해야 하지만 결국 승패는 운에 달려있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153] 당시 유명한 장군들에겐 fortuna, felicitas, felix 같은 행운과 연관된 별칭이 붙어다니곤 했다. 술라는 자기 스스로 존칭을 행운아라는 뜻의 Felix로 지어 술라 펠릭스라 했다. 장군보다는 문학가였던 키케로조차 위대한 장군이 갖춰야 할 필수요소 중 하나로 felicitas를 꼽기도 했다.

‘카이사르의 행운(Fortuna Caesaris· Felicitas Caesaris)’이란 표현은 당대와 그 이후에도 일종의 상용어구가 되다시피 할 정도로 강한 행운력(?)을 갖고 태어난 사람으로 묘사된다. 당대인들에게도 운명의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 묘사된다. 많은 고대의 전기 작가들은 카이사르의 성공이 운명의 호의 덕분이라고 믿었다. 수에토니우스는 카이사르를 “자신의 운명을 알았고, 그 운명을 권력 쟁취의 동력으로 삼았던 슈퍼 휴먼”으로 그렸다. 플루타르코스는 “누구보다 자신의 운명에 강한 믿음을 가졌던 인물”로 카이사르를 묘사했다. 현대의 연구가인 에이드리언 골즈워디는 행운의 연속이라고 평할 만한 카이사르의 삶을 두고 “운명의 여신은 계속해서 카이사르에게 미소 지었다”고 요약했다.

아예 카이사르 본인부터가 “나는 운이 좋다”, "행운의 여신(Fortuna)은 나의 편"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로마 당대에도 이상적인 어머니로 뽑히는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의 가르침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154] 각종 기록에서 카이사르는 거의 자신의 행운을 종교수준으로 믿은 사람으로 그려진다. 자신의 외모를 포함해 거의 모든 측면에서 그는 허영에 가까울 정도로 자부심이 강했다. 무엇보다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카이사르는 행운의 역할을 강조했다. “오늘 전투에선 적군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적군 안에 (운이 좋은) 카이사르가 있다면.”이란 문구도 카이사르의 말이다. 자신보다 운이 좋은 사람은 있을 수 없다는 자신감이 넘치는 표현이다.

카이사르 본인의 운명에 대한 강한 확신이 잘 드러난 사례로는 기원전 48년 겨울 항구도시 디라키움에서 벌어진 일화가 유명하다. 악천후로 선장과 선원들이 두려워하자 "걱정하지 마라, 너희들은 카이사르와 카이사르의 행운을 태우고 있다!"라고 소리쳤다.

기원전 48년 폼페이우스 잔당을 추격해 아프리카에 상륙할 때 그는 발을 헛디뎠는지 병사들 앞에서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당시의 기준으로는 매우 불길한 징조였기 때문에 모두가 웅성댔지만 카이사르는 넘어지자마자 모래를 움켜쥐며 “아프리카여! 드디어 내가 너를 잡았다.”라고 소리쳤다. 리더의 즐거운 목소리에 군단병들은 불안감을 떨치고 환호했다고 한다. 이런 장면들로 보았을 때 막무가내로 자신의 행운을 맹신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강하고 위기를 기회로 생각하는 긍정적이고 도전적인 성격이 극도로 강한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꼭 행운이 좋기만 한 사람이었냐라고 하면 꼭 그렇다고 하기도 어렵다. 집안은 전통은 있었지만 돈없고 한미해서 로마 서민들이 사는 수부라 외곽지역에 살았고 아버지는 카이사르가 어릴 때 신발을 신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또한 알렉산더가 33세에 세계를 정복하고[155] 스키피오도 20대에 정점을 찍었으나 카이사르는 40세가 넘어서야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156] 또한 전쟁터에서 수많은 위기를 겪어야 했고 본인이 죽을 뻔한 전투도 여럿 있었다. 그리고 최후에는 암살당해 자신의 생을 마감한다.[157] 죽기 직전 저녁식사에서 '가장 이상적인 죽음은 무엇인가'라는 토론에서 스스로 '아무 예상없이 갑작스럽게 닥치는 죽음'이라고 꼽은 걸 보면 스스로에겐 행운일 수도 있겠지만.

카이사르 반대파가 전쟁에서 패배한 뒤 “패전은 운이 나빴던 탓이었다”는 면죄부를 받기 위해 카이사르의 행운을 강조했다는 분석도 있다.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는 필리피 전투에 패해 죽기 직전 "가증스런 운명이여, 너도 행운(카이사르의 행운을 뜻함)의 편이더냐!"[158]라고 했다.

또한 카이사르가 막상 자신의 저술에선 행운의 역할을 최소한으로만 적었다는 점이 흥미로운 점이다. 카이사르가 정작 본인은 정쟁이든, 전투든 승리를 위해 철저한 준비에 매달리는 한편, 행운에 대한 당대 사람들의 신앙을 이용해 군단의 사기를 올리고 '프로파간다'로 써먹었다는 관점도 있다. 다시 말해 현실과 자신감을 구분할 줄 알고 요행에 기대는 성격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종합적으로 보면 카이사르와 행운의 조합은 천생연분처럼 붙어 다녔고, 지금도 사람들 사이에서 끝없이 회자된다.

10. 기타[편집]

"위대한 결정은 다만 수행될 뿐이다. 심사숙고하는 게 아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 등 굴지의 명대사들도 다 이 사람의 명언으로 여겨지고 있다. 또 유명한 대사로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159][160][161]도 있는데, 이것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그만 죽어라, 카이사르!(then fall, Caesar!)라는 부분이 덧붙여진다. 수에토니우스의 저술 중에 이때 "내 아들아, 너마저도냐"라고 쓴 것에서 영감을 받은 듯하다. 다만 많은 명언의 경우 후대의 창작이란 설이 있다.

실제로 카이사르는 암살자들에게 포위당한 채로 몸을 20군데가 넘게 찔려 순식간에 '윽윽윽...' 하다가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는 게 정사에 가까우며, 드라마 ROME에서도 그쪽에 가깝게 그리고 있다. 그런데 20군데가 넘는 상처 중 실제로 치명타를 입힌 건 네 곳에 불과하다고 하니 암살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도 짐작할 수 있으며, 암살자들은 동료들을 찌르기도 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은 실제로 다가올 로마 혼돈의 전조이기도 하다. 암살자들은 카이사르를 암살하면 저절로 카이사르파가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해 암살 이후에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확실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희한한 점은 충분히 자신에 대한 암살기도를 예측하고도 남는 사람이었음에도 불안하게 살고 싶지 않았던 마음 때문인지 경호원을 제대로 데리고 다니지도 않았다. 이 점은 술라와 비슷하다. 신변 경호를 충고하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평생 불안하게 숨어살고 싶지 않다는 말을 했다. 결국 이는 암살로 이어졌고 이에 영향을 받은 아우구스투스는 평생 강력한 경호원과 근위대를 이끌고 다녔다.

카이사르가 죽은 곳은 폼페이우스가 생전 건축했던 폼페이우스 포룸이었다. 그날은 그곳에서 원로원 회의가 열렸기 때문.

참고로, 카이사르의 저서 갈리아 전기에서는 객관적인 서술을 위해 본인을 칭할 때 '카이사르는 XXX 했다'라는 식으로 썼다. 그랬기 때문에 후반, 그러니까 암살 이후에 쓰여진 부분에서는 카이사르 본인이 아니라 부관(심지어 그 전장에 있지도 않았다)이 쓴 것이라서 원문을 보면 사실상 다른 문장으로 보일 정도이다.

카이사르는 최초로 어머니의 배를 갈라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으며, 이 때문에 산모의 배를 갈라 아이를 꺼내는 수술을 제왕 절개(帝王切開, Caesarean section)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물론 후세에 만들어진 전설로, 실은 '절개'를 뜻하는 독일어 단어의 철자가 카이사르의 이름과 비슷해 영어로 번역될 때 와전된 것이 유래다.[162]

흥미로운 점은 유럽 역사상 최초의 실질적 황제였으나 그는 단 한 번도 군주로 불린 적도 없고 왕으로 추대되거나 군주의 자리에 오른 적 또한 없었다. 상술했듯 로마의 근간 그 자체인 공화정을 흔듦으로써 로마 시민들의 반감을 사는 불안한 통치를 하고픈 마음이 없었기에 그랬던 것. 따라서 그는 자신의 원래 군인으로서의 직위였던 '임페라토르(Imperator - 라틴어로 최고사령관)'[163]라고 불리웠는데, 이것이 변형되어 오늘날의 Emperor, 즉 황제를 일컫는 단어가 되었다.

문제는 이 때문에 후대의 독재관들 또한 감히 스스로를 군주로 호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카이사르가 군주를 자칭하지 않은 판국에 카이사르만큼 대단한 업적을 세우지 않고서 군주를 자칭하는건 그냥 '나는 독재관이 뭔지도 모르면서 닥치고 자리에 오르고 본 욕심만 더럽게 많은 못난 놈입니다'라고 공개적으로 자살 선언을 하는 행위에 불과할 뿐이니... 그나마 그의 뒤를 이은 양아들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의 정당한 후계자라는 정통성에다가 본인 스스로도 많은 업적과 공을 세운 인물이다보니 1등 시민(Princeps)이라는 전용 직함을 신설하긴 했는데, 이것은 '정치, 경제, 문화, 사회, 행정, 군대 등 로마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힘을 지녔으나 어쨌건 시민'이라는 뜻의 직함으로 절대로 군주가 아님을 강조하였다. 이 역시 후대에 군주를 뜻하는 Prince로 바뀌었으니 그야말로 부전자전.

이렇다보니 로마의 역대 독재관들은 그냥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직함을 대신해서 썼다. 로마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황제 = 엠퍼러'니까 로마 황제들은 '엠퍼러'(좀 알아도 '임페라토르')를 호칭으로 썼을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상기하였듯 임페라토르는 최고사령관을 일컫는 호칭으로 이는 로마의 독재관이 지닌 수많은 호칭들 중 하나에 불과한 호칭이었다. 최고사령관(임페라토르) + 최고정치가 + 최고경제관 + 최고산업관 + 최고행정관 + 최고집행관 + 최고법무관... 등을 하나로 모아서 카이사르라고 불렀다. 즉 '그 일들을 한 사람이 카이사르, 즉 나도 카이사르이니 같은 일을 하는 존재임'이라는 식으로 퉁쳐서 썼다. 간단하게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를 계승한 자'라는 의미였던 것.[164] 예를 들자면 '네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즉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의 자리를 물려받은자 네로'라는 식이다. 성경마태복음 22:21에도 나오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라는 구절의 카이사르는 진짜 이 이름을 갖고 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 황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의역을 한다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정도.

이 문화 또한 임페라토르 → 엠퍼러와 마찬가지로 후대 유럽 국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는데, 서로마 제국의 가톨릭을 이어받은 신성 로마 제국이 위치한 독일 지방에서는 카이사르를 독일어로 읽어 '카이저'로 만들어 황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했고, 동로마 제국의 정교회를 이어받은 제정 러시아가 위치한 러시아 지방에서는 카이사르를 러시아어로 읽어 '차르'로 만들어 황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했다. 이 외에도 폴란드 지방에서는 카이사르를 폴란드어로 읽어 '체사르쉬(cesarz)'로 만들어 황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했다. 유럽권의 역사상 첫 황제답게 여러모로 서구권의 '황제'의 대명사가 된 셈.

그의 생일이 포함된 달인 7월(July)의 명칭은 원래 Quintilis였는데,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율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변경되었다. 더불어 8월(August)은 Sextilis에서 자신의 이름을 따서 바꾸었다.[165] 참고로, 이 때문에, 달력이 2달씩 밀렸다고 잘못 알려지기도 하였다. 율리우스력 이전에는 10개월짜리 달력밖에 없었는데, 겨울에 해당하는 2개 달이 달력에 추가되고, 카이사르가 율리우스력을 확정하면서 이미 2달씩 밀린 것이다. 태양력 참조.

개선식하면서 병사들이 외친 구호로 보아, 카이사르가 대머리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카이사르는 어느 정도 수준의 탈모였을까?

1980년대 미국의 학술단체에서 연구한 적이 있다. 그 연구에 따르면 카이사르의 탈모는 심각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귀밑머리만 조금 있는 정도... 실제로 카이사르는 탈모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있었을 때는 이집트의 비법이랍시고 악어똥을 발랐다고 한다. 그런데 이집트의 비법이라는게 통할 리가. 당대의 멋쟁이라 불렸던 카이사르는 대머리란 사실 때문에 늘 마음 고생했다. 그래서 양 귀밑머리를 길게 길러 정수리까지 끌어올리는 방법으로 본인의 대머리를 가렸다. 양 귀밑머리를 정수리에서 크로스시키면 마치 닭벼슬처럼 붕 뜨게 된다.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이 된 후 월계관을 쓰고 다녔는데, 이 머리 스타일을 유지시키기 위함이다. 서양에서는 이런 머리 스타일을 카이사르컷 혹은 시저컷이라 부른다.

뛰어난 장군이었지만 피나 잘린 머리를 보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이집트에서 폼페이우스의 머리를 잘라다 바치자 보는 것을 거부했다. 어릴 적 술라의 대숙청 때 광장에 쌓여있던 머리들을[166] 보고 트라우마로 남았다는 설이 있다.

어릴적엔 마르고 연약했지만 어릴 때부터 말은 잘 탔다고 한다.[167] 그리고 운동을 좋아하고 부단히 체력단련을 해서 마른 몸에도 불구하고 젊은 군단병들에게 밀리지 않는 강건한 체력을 가지게 되어 병사들이 겉모습만 보고 무시하지 못했다고 한다.[168] 문다 전투에서는 200개의 투창을 홀로 받으면서 선두에서 적군과 싸워 사기를 끌어올리기도 했다.

카이사르의 정적이었던 카토가 "로마가 멸망했을 때 유일하게 술에 취하지 않고 걷는 사람일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술을 좋아하지 않았고 알콜에 기대지 않았다. 밥도 산해진미를 즐기지 않고 적당히 먹는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편식하는 것도 아니고 잘 먹었다.[169] 초대받는 자리에서 집주인이 음식을 잘못 요리해 모두가 불평할 때 "애써 만든 건데 주인이 얼마나 민망하겠나" 하면서 혼자 맛있게 먹었다는 일화가 있다.

젊을 적 남을 위해 호의를 많이 베풀었는데 도움을 받고 도와주는게 아니라 남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을 위해 돈을 쓰고 다녔다고 플루타르코스와 수에토니우스가 기록한다. 이는 남에게 빚진 마음을 심어주었고 나중에 정치적 자산이 된다. 심지어 돈을 빌려주기 위해 남한테 돈을 꾸기도 했는데 아예 돈이 없는 사람에겐 빌려주지 않았다. 이때 "당신에게 필요한건 돈이 아니라 전쟁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어느 촌락 집에 머무는 중에 몸이 아픈 부하에게 편한 자리를 양보하고 본인은 불편한 곳에서 잠을 잤다. 그러면서 "약한 사람에겐 편한 자리를, 위대한 사람에겐 명예로운 자리를..."이라고 말했다 한다.

또, 그의 장군들에게 오른손잡이 악수를 보급시킨 사람이기도 하다. 물론 잘 쓰는 손을 잡고 있으니 무기를 휘두를 수 없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카이사르 본인은 왼손잡이였으며, 따라서 오른손으로 악수하면서 무기를 휘두르는 "못미더운 왼손잡이"의 이미지를 로마에 보급시킨 장본인이라는 것.[170] 군대 같은 경우에는 전술적인 이유 때문에라도 대세에 맞춰서 누구나 오른손에 무기를 쥐어야 했고, 따라서 오른손을 잡는 제스처가 그럭저럭 문제없이 받아들여졌을지 모르겠지만.[171]

여담이지만 시대의 영웅이라고 추앙받는 다른 인물들과 달리 상당히 늦은 나이에 일어섰다는 특이한 사항이 있다.[172] 나이 마흔에 되어서야 겨우 두각을 드러냈기에 아주 빠른 속도로 로마사를 화려하게 장식했을지도... 그리고 여러 번 결혼했으며 그 와중에도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어머니와 연애한 이력이 있듯 수많은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11. 카이사르가 치른 유명한 전투들[편집]

12. 대중 문화[편집]

'일개 장군이었지만 뛰어난 재능과 실력으로 승승장구하였고, 결국엔 부패한 지도층을 몰아내고 여러 비극적인 일을 거쳐가며 강력한 카리스마로 제국의 유일한 지도자에 올랐다가 절정의 순간에 죽임을 당했다'는 이미지 때문인지 로마 제국의 유명인사들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인지도가 높다.
  • 조셉 L. 맨키위즈(Joseph L. Mankiewicz)가 제작한 1963년작 '클레오파트라'에서는 조연으로 렉스 해리슨이 연기했다. 주연은 리처드 버튼이 안토니우스,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클레오파트라를 연기했다. 엄청난 규모의 호화로운 의상과 촬영세트 때문에 현재까지도 1960년대 할리우드 대작 사극의 대표격으로 인식되고 있다.
  • 폴아웃: 뉴 베가스
    카이사르의 군단의 지도자의 이름이 당연히 카이사르이다. 리즈 시절엔 나름 통솔력과 능력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하는 짓은 죄다 악인에 가까운 인물. 사실 모티브라기보다는 작중 이 양반이 카이사르와 로마 군인들의 코스튬 플레이를 하는 것일 뿐이다.
  • 엘더스크롤 5: 스카이림
    제국군 측 지도자인 툴리우스. 이쪽은 카이사르가 캐릭터 모티브인 경우. 남쪽의 수도를 떠나 거친 북방에서 묵묵히 자기 일을 하고 있고, 얼핏 단순 무식해보이지만 나름대로 카리스마와 지도력도 있는 등[173] 위 항목에 비해 좀 더 제대로 된 카이사르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 영미 합작 드라마 ROME에서 시즌 1의 주연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실제 역사와 달리 대머리는 고증하지 않아 머리숱은 그럭저럭 평범한 수준. 캐릭터는 그야말로 간지폭풍이지만, 멋진 모습 만큼이나 사악하고 능구렁이 같은 모습으로도 등장한다. 카이사르가 영웅이라는 동양식의 일방적인 역사인식과 달리 민주정을 쓰러뜨리려는 독재자의 면모도 유감없이 발휘한다. 브루투스를 사기가 떨어졌다는 거짓말로 속여넘기거나 보레누스에게 자신은 독재자가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왕좌를 얻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못하겠나"라고 해서 노예 포스카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하고[174] 폭력을 용납하지 않고 복수를 안 한다면서 슬그머니 폼페이우스파 인물을 살인청부업자를 시켜서 암살한다. 드라마가 역사 고증을 따르면서 어느 정도 재창조를 하고 있기에 간질 증세나[175][176] 최후의 순간에 실제 역사 고증대로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는 처절한 죽음을 맞이하며, 이는 심지어 그를 죽인 브루투스에게도 트라우마가 된다. 배우는 썸 오브 올 피어스에서 카리스마 쩌는 러시아 대통령 역으로 나왔던 키어런 하인즈.
  • 라스베이거스에 가면 가끔 로마 군인 코스튬이나 로마인 코스튬을 입은 사람들이 쇼를 하는 걸 볼 수 있는데, 베가스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호텔 중 하나가 바로 '시저스 팰레스'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을 땄기 때문. 때문에 베가스가 배경인 영상물에서도 로마 관련이나 시저가 언급되곤 한다. 패미콤, 슈퍼 패미콤, 메가드라이브로 caesars palace라는 게임이 있다. 타이틀 스크린을 보면 저 시저스 팰레스 호텔이 배경임을 알 수 있다. 게임 내용은... 카지노이다. 설명 끝.
  • 아스테릭스에도 당연히 등장한다. 골족 마을을 점령하려 노력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인물. 물론 실제 역사에서는 골족의 로마에 대한 반항은 카이사르의 원정에 의해 사실상 끝났고 이탈리아 반도를 제외한 로마화가 가장 빨리 이루어진 지역은 갈리아다. 사실과는 정반대로 왜곡되어 묘사된 정신승리. 물론 진지한 내용은 아니고 재미를 가미한 풍자물이기 때문에 카이사르에 대해 우호적으로 나오는 부분도 있다. 베르킨게토릭스의 예처럼 고대 골족은 프랑스의 민족주의 감정의 중심이지만 프랑스가 로마 문명의 일부라는 복잡한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카이사르도 빌런이면서 주인공 일행을 돕거나 주인공들에게 빚을 져서 그것을 갚아주는 등 원수졌다고만은 하기 힘든 묘한 사이다. 심지어 주인공들과 웃으며 만찬을 갖기도 한다(!) 그 외에도 카이사르의 월계관을 훔쳐내는 것을 두고 주인공들이 내기를 하는 바람에 시금치 관을 쓰는 굴욕까지 겪기도 한다. 더 자세한 건 율리우스 카이사르(아스테릭스) 참고.
  • 영국의 BBC에서 제작한 6부작 다큐멘터리 로마 제국의 탄생과 멸망에서도 등장한다. EBS 방영 기준으로는 2화이며, 국내판 성우는 홍시호. 자존심 세고 야심 만만하며 카리스마가 넘치는 카이사르의 인물상을 제대로 반영해 냈다. 원판 배우는 숀 퍼트위.[177]
  • 도미네이션즈에서 줄리어스 시저 동상이 월드워 전당의 전쟁 전설로 등장하며 줄리어스 시저의 투구가 유물로 등장한다.
  • 대체역사물 로마 재벌가의 망나니에서는 주인공과 정치적 파트너로 활약한다. 주인공[178]은 일찍 그 카이사르와 대립하는 것은 미친짓이라고 판단하고 안면을 트자마자 호의적으로 나서서 온갖 지원을 해준다. 나중에 카이사르는 딸인 율리아를 주인공에게 시집보내 주인공의 장인어른이 된다. 이 작품에서 카이사르는 첫등장부터 제왕적 기질이 넘처 흐르는 야심가로 등장하며, 만렙 정치력과 갈리아, 게르마니아 원정과 흉노 전쟁에서 뛰어난 지휘관의 모습을 보여줘 온갖 보정을 다 받는 주인공도 쉽게 넘볼 수 없는 비범한 인물로 묘사된다.
    주인공의 활약으로 훨씬 안정적인 1차 삼두정치(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2세) 체계에서 강경 민중파의 역활을 자처하다 폼페이우스 사망 이후 민중파의 유일한 지도자가 된다.[179] 최종적으로 로마의 양대 종신 최고지도자가 되는데, 이 와중에 암살도 피하고 임페라토르의 칭호를 받는다.[180] 크라수스(주인공의 아버지)가 더 활동할 수 있음에도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하고[181] 소일거리를 하며 지내는 것을 보고 뭔가를 깨달아, 후에 로마가 안정되었다는 판단이 서자 미련없이 주인공에게 자신의 직위를 넘기고 명예롭게 은퇴한다.

[1] 재미있게도 로마의 적으로 유명한 한니발 바르카의 조각상 옆에 세워놓았다.[2]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고대 로마 당시의 고전 라틴어 표기와 대강의 발음.[3] 독일어권에서 황제를 이르는 '카이저'와 슬라브어권의 '차르'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4] 이후 르네상스시대의 인물인 체사레 보르자의 이름이 여기서 나왔고, 스펠링도 똑같으나 각각 시저와 체사레로 다르게 불린다.[5] 라틴어는 외래어 표기법이 없고, 국립국어원에서 사용하는 관행적인 표기 원칙이 있기는 하나, 정식으로 규정된 적은 없다. 관행적 표기는 고전 라틴어 발음에 가깝기는 하지만 고전 라틴어보다는 현재 가톨릭에서 쓰는 교회 라틴어 발음에 가까운 것도 있다. 한국에서 라틴어의 V의 발음은 일반적으로 /v/라고 보아 ㅂ로 적는데 이는 교회 라틴어(중세 이후 라틴어)에서의 발음이고, 고전 라틴어에서는 /u/나 /w/ 발음이었다.[6]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소설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에서도, 시빌라 예언으로 등장하는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제들의 운명에 대한 시에서 황제들을 은유해 '털북숭이'라고 부르고 있다.[7] 즉 어느 가문에서 파란 눈을 가진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를 어느 가문의 파란 눈이라고 부르다가 그 아이의 후손들 구분을 위해 어느 가문의 파란 눈 분파라고 부르는 식이었다.[8] 병사가 코끼리를 죽였다는 건 요즘으로 치면 알보병 하나가 중화기도 없이 전차 한 기를 무력화시킨 셈이다.[9] 참고로 현재에는 돈에 많은 위인들이 들어가지만 최초로 돈에 사람을 새겨 넣은 것은 카이사르다...라는데 실존 인물의 초상화가 새겨진 주화는 그보다 앞선 헬레니즘 시대에 이미 널리 퍼져있었다.[10] 공화정 초기의 주요 가문 중 하나였던 율리우스 가문 사람들은 후기 공화정에서는 BC 267년, BC 157년을 제외하고는 집정관직을 역임하지 못했다.[11] 하드리아누스시대의 변호사,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에 의하면, 3대 황제 가이우스(칼리굴라)처럼 카이사르 스트라보 역시 킨나 시절 칼에 맞아 죽었다면서 율리우스 가문 내의 가이우스를 개인이름으로 사용한 카이사르 집안 남성들은 칼에 맞아 죽을 운명이었다고 <황제열전><가이우스 60>에 서술했다. 하지만 카이사르 스트라보는 병으로 사망했고, 저서 말미에 수에토니우스 스스로 자신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그리고 칼리굴라를 얼마나 혐오했는지 기술한 탓에 국내 번역서 저자들까지도 "틀렸다", "명백한 오류다" 등으로 각주를 달아 짚고 넘어가고 있다.[12] 직역하면 최고의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엘리트주의를 내세운 귀족파를 뜻하는 말.[13] 그러나 그 외에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며, 일부 사가는 이 율리아가 카이사르의 오촌 당숙 루키우스의 여자형제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역사소설 <로마의 일인자> 등을 집필한 콜린 매컬로는 이 율리아를 카이사르의 고모이자 마리우스의 아내 율리아의 여자형제로 설정했으나, 이는 마리우스와 술라를 동서지간으로 만들고 카이사르를 마리우스와 술라 양쪽과 엮어 이야기 진행을 수월하게 만들기 위한 단순한 창작이다. 다만 술라가 초기 마리우스의 보좌관으로 활동했던 것은, 율리우스 가문과 혼인관계를 맺었다는 공통점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은 제기해볼 수 있다.[14] 실제로 로마 귀족들은 이념에 따라 붕당을 형성하기보다는, 그때그때의 이해관계, 친족이나 보호자에 대한 의무에 따라 이합집산을 반복했다. 포풀라레스와 옵티마테스를 '민중파'와 '귀족파'라는 고정된 붕당으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못한 시각이다. 카이사르와 함께 삼두연합을 형성했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한때 술라의 측근이자 술라파의 핵심 인사였다.[15] 실제로 카이사르의 친척들 중에서 카틸리나 탄핵 때 같이 엮여서 옵티마테스 쪽에 완전히 찍힌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카이사르의 부관노릇을 한 안토니우스 정도만 제외하면 거의 다 옵티마테스 쪽 인사들이었다. 그 정도로 카이사르는 가문만 보면 완벽한 귀족자제였다. 그나마도 루키우스도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려고 할 때 이건 반역이라며 반발했을 정도.[16] 플라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술라의 방해공작이 있었지만 당선되었다고 쓰고 있지만 당시 로마는 고모부 마리우스와 훗날 장인이 되는 킨나 등 술라에 반대하던 마리우스 일파가 집권하던 상황이라 설득력이 부족하다. 실제로 당시에 킨나의 후원으로 최고사제에 당선됐다는 것이 정설이다.[17] https://penelope.uchicago.edu/Thayer/E/Roman/Texts/Suetonius/12Caesars/Julius*.html[18]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박을지언정 박혀서는 안 되는' 행동으로 여겼다.[19] 폰토스의 왕 미트리다테스 6세가 비티니아 증여에 태클을 걸며 '미트리다테스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미트리다테스 전쟁은 술라, 루쿨루스, 폼페이우스를 참고하자.[20] 참고로 이 시민관은 아무나 받는 게 아니다. 전장에서 전우의 목숨을 구해줬을 때 도움받은 전우가 직접 만들어 증정하는 관. 이걸 받는 것 하나만으로도 평생의 자랑거리가 된다.[21] 이 사람의 아들이 나중에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제2차 삼두동맹을 맺는 레피두스다.[22] 다만 이건 상대적으로 애송이인 카이사르를 띄워주는 발언에 불과하다. 이때 카이사르는 20대였으며, 안찰관이나 법무관은커녕, 정치 경력의 초기 단계인 대대장(Military Tribune)조차 거치지 않은 상태였다.[23] 키케로도 이 사람 밑에서 수학한 적이 있다.[24] (로마의) 1탈렌트= 32.3kg. 현대 기준으로도 3억 원이 넘는 거액이다.[25]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Julius-Caesar-Roman-ruler[26] 그나마 자비를 베풀어서(?) 교수형에 먼저 처한 다음 시체를 십자가에 매달았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십자가형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이 형벌은 고통이 상상을 초월한다. 어떤 어린이용 위인 동화에서는 몸값 치르고 풀려나서 해적들을 잡아놓고 "다음에 또 날 잡거든 그땐 몸값으로 100탈렌트를 요구하도록. 알겠나?"라고 했다는 얘기도 나온다.[27] 에게 해를 건너는 것은 동일하나 수에토니우스는 로도스 유학 시기의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플루타르코스는 술라를 피해 도망다닐 때라고 기록하고 있다.[28] 루쿨루스는 확실한 술라파였지만, 카이사르의 외가인 코타도 술라파였고 루쿨루스가 카이사르의 외삼촌인 아우렐리우스 코타와 함께 집정관을 지냈을 정도로 접점이 없지는 않았다.[29] 로마 공화정은 부모의 위대함이 자식들에게 전해진다고 믿었다. 그런데 카이사르 가문은 유서가 깊기는 했어도 집정관도 겨우 3명밖에 안 나왔고, 당장 카이사르의 아버지만 하더라도 법무관에서 커리어가 끝났다. 자신이 선거에서 당선되어야 할 명분을 쌓으려는 프로파간다라고 보면 된다.[30] 그 2차 삼두정치의 레피두스의 아버지다.[31] 폼페이우스는 이 시절 관직을 전혀 지내지 않았으므로 법적으로 군대지휘권을 갖는 건 엄연히 불법이었다.[32] 키케로를 엿먹이기 위해서 카이사르가 일부러 해줬다는 설이 우세하다.[33] 키케로는 카틸리나가 반역자라며 재판도 없이 먼저 처형하였고 이로 인해 명성이 높아졌고 본인도 자신의 최대 업적으로 선전했다. 하지만 재판도 없이 카틸리나를 처형한 건 엄연히 불법이었고 로마인들도 열기가 식은 뒤 이래도 되는 건지 고민하던 참이었다.[34] 다만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일을 자기 재산으로 처리해버려 빚이 엄청났다. 애초에 패션에 관심이 많고 수집욕도 있어서 돈을 펑펑 쓴 데다가 국가 단위의 행사를 개인 돈으로 치렀으니 빚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속주 통치를 하러 떠날 때 빚쟁이들이 돈을 떼어먹힐까 봐 못 가게 막기까지 했다. 결국은 대부호 크라수스가 보증을 서줘서 겨우 떠날 수 있었다. 그런데 카이사르의 최대 채권자가 바로 이 크라수스. 이 엄청난 빚도 카이사르가 탕아 정도로 취급되게 만든 원인 중 하나였다는데, 이 시절 선거는 돈으로 승부를 보는 경향이 강했고 다른 사람들도 다 비슷해서 빚을 졌다고 탕아 취급을 받았다는 건 조금 어폐가 있다. 당장 위에서 나온 카틸리나만 해도 카이사르보다 훨씬 많은 돈을 빚지기도 했고.[35] 소규모 개선식. 나중에 갈리아 정벌과 이집트 정복(실은 카이사르의 내전의 종식)으로 대개선식의 숙원을 풀었다. 그러나 저때에는 같은 로마인을 상대로 싸운 걸 가지고 개선식을 한다고 로마 시민들이 내켜하지 않았다고 한다.[36] 개선식은 개인에게 비할 데 없는 엄청난 영예였다.[37] 술라에 협력한 후 반대파 자산 매입 등으로 엄청난 거부가 되었으나, 소방서를 매수해서 화재진압을 늦추고 화재가 발생한 건물을 똥값에 매입하는 등 돈벌이에 지나치게 혈안이 되어 민심을 잃어서 고위직 선출 선거에서 당선되지 못했다. 군공도 스파르타쿠스 반란 진압 정도로 폼페이우스에 비교가 되지 않았다.[38] 특히 고대 로마에서는 선거운동을 하는 데 엄청난 돈이 들었다. 지금으로 치면 FA컵이나 가을야구를 자기 이름으로 개최하고 대진료와 상금을 자기 재산으로 지급할 수 있어야 했으니까.[39] 후의 2차 삼두정치와 다르게 첫 삼두정치는 비밀리에 결성된 것이었다.[40] 단순히 점괘를 언급한 건 부끄러울 일이 아니다. 로마인들도 다른 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꽤 미신적인 전통이 있었다. 문제는 민회가 열린 그 날이 길흉을 판단하는 최고 권위자인 공화국 최고제사장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택한 길일이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집정관이 되기 훨씬 전부터 이례적으로 젊은 나이에 종신 공화국 최고제사장에 선출되어 있었다.[41] 공화정 로마에서는 두 집정관 중 1명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민회나 원로원에서 통과된 법안도 실행할 수 없었다.[42] 후대 "황제"들은 악타를 새 정책들을 공표하기 위해서 사용하였다. 다만, 때때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비공개로 돌리는 등 언론 통제를 하기도 하였다.[43] 내전에 승리한 이후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속주민들에게도 라틴 시민권을 주고, 로마에서 온 세리나 총독이 세금을 거두는 대신에 속주들이 원하는 만큼 알아서 세금을 걷어서 로마에게 바치는 시스템으로 바꾸려고 했지만, 이 법안이 원로원에서 논의 중이던 상황에서 암살당했다.[44] 단 비불루스가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한 것은 카이사르가 입안한 농지개혁법에 무조건적인 반대를 표명했기 때문이다. 비불루스가 사악한 카이사르에 의해 무고한 피해를 입은 선량한 정치인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때 비불루스가 한 짓은 아무리 좋게 봐도 치졸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카이사르가 공개적으로 이 법안에 대해서 동료 집정관인 비불루스에게 지지를 요청하고 반대한다면 왜 반대하는지 토론해보자고 했는데, 비불루스는 이 농지법에 대해서 반박은 못하고, 자신의 임기동안에는 어떠한 개혁도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으며, 민회에서는 호민관 3명을 자신의 편으로 끌여들여서 계속 투표를 방해했다. 나중에는 카이사르를 상대로 암살자까지 보냈다가, 덜미가 잡혀 군중에게 강하게 비난을 받고, 농지법을 반대할 변명들이 다 없어지자 비불루스는 집안에 틀어 밖혀서 종교적인 이유로 카이사르의 법안 통과를 방해한다.[45] 카이사르는 군사적 재능은 둘째치고, 언변이 매우 능했던 정치인이었다.[46] 물론 단순히 카이사르가 언변이 좋아서만이 아니라 명분부터가 압도적으로 카이사르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마군이 포에니 전쟁 등에서 엄청난 영토를 얻었는데 그걸 원로원 의원들이 죄다 빼돌려서 자기 농장으로 만들어놓는 바람에 정작 고생한 로마의 평민 군인들이 굶어죽게 생겼는데 어떤 명분을 내놓을 수 있을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47] 이 사람은 법안이 통과된 이후에도 법안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나중에 카이사르가 민회에서 통과된 법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법안을 통과한 다음에야 투덜거리면서 인정한다.[48] 대략 지금의 프랑스[49] 현대의 서북부 발칸 반도, 즉 아드리아 해 연안에 해당한다. 거의 구 유고슬라비아의 영토라고 보면 된다.[50] 루비콘 강 이북, 알프스 산맥 이남의 이탈리아 북부지방에 해당한다.[51] 지중해 연안의 프랑스 남부지방에 해당한다.[52] 라틴어로 옛 스위스 지방 사람을 가리키는 말. 현재 스위스에는 독일어, 프랑스어권 사람들이 살기 때문에 어느 한쪽 언어만으로 국명을 지정할 수가 없어서 중립적으로 라틴어명을 사용하다 보니 아직까지도 살아있는 단어이다. 교양 만화 먼나라 이웃나라에도 나오는데 스위스의 영어 약자는 S[53]도 Sw[54]도 아닌 CH로 이는 라틴어 명칭인 Confoederatio Helvetia에서 나온 것이다.[53] 스페인.[54] 스웨덴.[55] 실제로 카이사르는 그의 저서에서 살육했다라고 언급한다.[56] 이는 완전한 오판이었는데 카이사르군에게 숫적으로 우위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카이사르의 전력을 앝잡아 본 것이었다면 애초에 왜 청야전술을 썼던 것이었는지 의문이다. 그가 카이사르를 게르고비아에서 패배시킨 것으로 베르킨게토릭스의 군사적 재능이 상당히 높이 평가되는 게 일반적이나 이러한 판단 미스를 하는 것을 미루어 본다면 이는 과대평가일 가능성이 높다.[57] 사실 로마 군단병의 무장 수준은 중세 시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물론 플레이트 갑주까지는 아니지만 이 정도의 완전무장은 주로 기사계급이나 할 수 있었고 일개 병졸들이 그 정도의 갑주를 갖추는 것은 드물었다.[58] 애초에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 남부의 대지주 집안 출신으로 술라의 반란 때도 자비로 군사를 모아 함께 했던 보수파였다.[59] 공화정 말기에는 귀족집안이 거의 사라지고 의미가 없어졌지만 그래도 귀족가문이라는 출신성분이 도움이 되지 않았냐하면 그것도 아니었다.[60] 이해가 안 되면 영화(대부 등) 속 마피아 두목의 카리스마와 인망을 생각하면 편하다. 어차피 비슷하기도 하고, 실제로 심지어 일각에서는 고대 로마의 정치체계나 현대 이탈리아 시골의 마피아 체계나 별 다를 바 없다고 평하기도 한다.[61] 애초에 그는 크라수스의 피호민이었다.[62] 애초에 이런 막대한 지휘권과 많은 속주를 준 것도 카이사르가 크라수스랑 폼페이우스를 보호자들로 두고 있으니 싸우기 싫고 어차피 능력있는 놈이니 폼페이우스처럼 해먹고 알아서 군대해산하겠지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63] 다만 소 카토가 전쟁 준비가 안 되어 있었는데 괜히 전면전을 카이사르에게 강요했다고 폼페이우스를 욕하고 튄 걸 보면 이 이너 서클에서도 의견 통일이 되지 않았던 걸로 보인다.[64] 카이사르는 민중파의 일원으로서 이전부터 꾸준히, 자문기관에 불과한 원로원이 자기네 정적을 처벌할 목적으로 발동하는 최종권고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65] 애초에 원로원 최종권고는 구체적인 성문법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집정관, 호민관 등이 원로원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작동되는 원리였다. 그게 어느새 초법적인 조치이자 원로원의 무소불위 권리처럼 변질된 것이다.[66] 카이사르 암살 당시 명분은 독재자를 제거하고 공화정을 수호한다는 것이었는데, 정작 포에니 전쟁을 거치면서 원로원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카이사르와 차이점이라면 권력이 카이사르 한 사람에게 몰리냐, 원로원에게 몰리냐 차이다. 현대인의 시야에서 보면 그냥 권력 투쟁일 뿐이다.[67] 여기에서 원로원과 폼페이우스의 결정적인 오판은 이탈리아 도시들의 빠른 이탈이다. 동맹시 전쟁의 여파로 인해서 동맹시들은 아직도 원로원파와 폼페이우스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고, 이들에게 더 많은 시민권과 권리를 약속한 민중파 카이사르는 당연하게 환대를 받았다.[68] 파르살루스 전투 이전 디라키움에서의 포위상황에서 폼페이우스가 바다를 통해 식량은 공급받았지만, 말들이 먹을 건초를 보급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말들이 비실비실해서 패퇴했다는 설도 있다.[69]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고전, 헤로도토스의 역사,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필두로 수많은 저서들도 이러한 오류들이 있다.[70] 이때 기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소실되었는데, 도서관은 이후 클레오파트라가 페르가몬 등에서 책을 가져오는 등의 노력을 통해 다시 채워진다.[71] 키케로와 바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게 투항했고 카토는 끝까지 맞서다 폼페이우스군이 패하자 자결했다. 카토의 조카였던 브루투스는 훗날 얼마없는 보수파를 결집하고 카이사르를 암살한다. 카토와 브루투스는 이후 공화국 정신의 상징이 된다.[72] 대부호 크라수스가 이를 잘 이용해 먹었다. 그 덕에 크라수스는 원로원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다.[73] 실제로는 기사계급과 호민관 위주로 구성되었다.[74] 다만 이건 최고사령관에게 쓰이던 호칭으로 어디까지 합법이었다.[75] 로마 공화정이 공화정인 이유는 왕이 없이 유력가문 몇몇이서 중요 관직 나눠먹기를 했기 때문에 공화정이었는데 카이사르는 이 모든명예로운 관직들을 사실상 독점하고, 말년에 가서는 술라가 했던 것처럼 원로원을 본인이 임명하든지 자신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선출직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등의 횡포가 심했기 때문이다.[76] 이 축제는 귀족이나 고급 정무관들이 무리를 지어 나체로 시내를 뛰어 다니면서 손에 든 채찍으로 아무나 때리는 행사였다. 이때 이들의 매를 맞으면 임산부는 순산하고 석녀는 임신을 한다는 전설이 있었다.[77] 당시 카이사르의 후계자 제 1 후보로 여겨진 안토니우스가 야심을 품고 카이사르의 명성을 떨어트리기 위해 벌인 자작극이라는 가설도 있다. 이는 카이사르 암살을 안토니우스가 사전에 알고도 방기했다는 설과 잘 매치되므로 어느 정도 지지를 받고 있다. 컬린 맥컬로우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에서는 이 설을 채택하고 있다[78] 78.1 78.2 #[79] 특히 바실루스는 갈리아 전쟁기에서 몇줄 안 나온다. 그것도 암비오릭스를 죽이는 자객 같은 임무를 맡기는 걸로 보아 카이사르가 크게 신임하지 않은 듯하다. 게다가 바실루스는 키케로를 매우 존경하는 사람이었다.[80] 갈리아 전쟁기를 보면 그를 젊은 브루투스라 칭하는 등 데키무스에 대한 카이사르의 애정을 알 수 있다.[81] 그것도 파비우스가 죽고 나서 임명된 보궐 집정관이었다.[82] 로마 최고위 관직인 집정관 당선 이력은 그 사람의 영향력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83]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카이사르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보다는 돌라벨라와 안토니우스가 더 두렵다고 안토니우스와 다소 거리를 둔 모습이 있다.[84] 신체불가침권(즉, 사형당하지 않을 권리)과 민회를 통한 법률 제정권, 그리고 원로원 의결 거부권.[85] 제1시민. 쉽게 말해 '로마 시민 중 으뜸'이란 뜻으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도 이렇게 불렸다.[87] 자기 대신 군사 활동을 전담하던 친구 아그리파에게 까지 줘가면서 혈통을 이으려고 했다.[88] 그러나 위에 이미 서술되어 있다시피, 그 자신이 이미 불확실한 상태에서 권력 투쟁에 뛰어든 데다 모호하기 짝이 없는 최고권력자 지위를 설정한 아우구스투스에게는 혈통보다 확실한 정통성 확립수단은 없었다. 어찌 보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89] 다만 티베리우스의 뒤는 자신의 후손 과 혈연관계가 있는 인물(게르마니쿠스)에게 돌아가도록, 결국 꼬이게 되기는 했지만 조치를 했다.[90] 술라의 독재관은 참 교묘한데 특정한 기간의 임기가 정해져 있지 않으나 비상시의 종결을 임기 종료로 정의한 독재관이다. 역설적으로 비상시를 기준으로 임기가 존재하는 것이다. 즉, 원로원에는 공화국 복원의 강력한 의지를 알리는 동시에 민중파에게는 절대권력을 가진 일인자임을 알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것이다.[91] 어떤 노인이 나타나 "3월 보름을 조심해라!"라고 했다라든지, 그 전날 파티에서 누가 어떤 종류의 죽음을 선호하냐고 물었더니 '갑작스러운 죽음'이라고 했다든지, 암살된 당일 아내가 예지몽을 꾸고 극구 말렸는데 갔다든지. 이 모든 것의 결정판이 바로 셰익스피어의 희곡이다. 물론, 그가 숙적인 폼페이우스 동상 앞에서 죽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심지어 현대까지도 서양에서는 3월 15일은 불길한 날로 여겨진다.[92] 오히려 왕정과 공화정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구속구 역할을 하던 카이사르가 사라지자 공화정의 몰락이 가속화됐다고 보는 게 맞는다. 카이사르 암살은 그의 후계자들에게 좋은 명분이 되었고 실제로 원로원에게 돌아온 것은 마리우스 이후의 대숙청이었다.[93] 혹은 카이사르에게 감옥에 갇혀있는 형제를 풀어달라고 요청했다가 카이사르가 거절하자 옷자락을 잡았다고 한다.[94] 이 과정에서 안토니우스는 로마 시민들에게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의 피묻은 옷을 보여주면서 로마 시민들을 부추겼다고 하는 판본도 있다. 이원복이 감수하고 박흥용이 그림을 담당했던 계몽사의 학습만화 세계사 로마편에서도 이 장면이 나온다.[95] 안토니우스도 카이사르가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하루정도 지나서 유해를 발견했고 이 현장에서 피소라는 원로원 의원이 유언장을 사망하기 6개월 전에 작성하여 여제사장에게 맡겨둔 사실을 알려준 것으로 알려져있다.[96] 참고로 이때 카이사르의 유언장 공개현장에 클레오파트라카이사리온도 같이 있었고 유언장에 본인과 아들의 이름이 없자 짐을 싸서 이집트로 돌아갔다.[97] 참고: 위키피디아 카이사르 항목[98] 물론 카이사르가 생존하고, 사망했던 로마 시절 당시에 핼리 혜성의 존재가 알려져 있던건 아니었다. 핼리 혜성을 발견한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는 한참 후대인 17~18세기경의 인물로, 75~6년마다 한 번씩 출현하는 핼리 혜성의 출현 주기와 기록을 확인해본 결과 카이사르의 장례 당시 나타난 혜성의 출현 날짜가 같았기 때문에 이 혜성이 핼리 혜성이었다고 규정한 것이다.[99] 하지만, 어떻게 보면 카이사르는 최소한 죽어서도 행운을 누린 셈인데 로마가 정권이 교체되거나 멸망 이후로 각종 문화재와 무덤이 약탈된 것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다. 비록 강물로 씻겨내려가긴 했지만 사람들의 입에서 대대로 내려오고 이름마저도 기억되고 있으니...[100] 키케로와 트레보니우스를 제외하면 대부분 집정관급 임페리움도 못 부여받은 인물들인 데다(카이사르 암살로 유명해진 인물이 대다수였다) 카이사르와 대적하던 거물급 인사들은 대부분 사망하거나 은퇴했기 때문에 영향력이 거의 없었다.[101] 애시당초 키케로는 이런 일에는 능한 인물도 아니었고 암살 자체가 즉흥적으로 일어났기도 했고 무엇보다 원로원파는 가장 중요한 군대를 전혀 통제하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102] 또한, 이들이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하긴 하지만 실제로는 공화정 이념에 어긋나는 행동을 많이 보이고(당장 브루투스조차 속주에서 고리대금업으로 속주민들의 주머니를 탈탈 털었다) 시민들의 원로원에 대한 인식이 워낙 부정적이다 보니 카이사르와 같이 대중을 대리하여 원로원을 견제하는 인물이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들 중 카이사르가 명목상이라고는 하지만 원로원 그 자체를 없애거나 하진 않은 데다가 내란에서 그에게 적대하던 자라도 죽이지 않았던 경우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암살자들은 로마 시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배신자에 은혜도 모르는 사람으로 보이는 데다가 당시 로마군 역시 카이사르에게 충성하는 자들이라 이들의 암살 계획은 매우 허술했다.[103] 물론 술라는 많은 군공을 세운 명장인 데다 유능한 정치가라 그를 중심으로 보수파를 결집시키기는 쉬웠다. 게다가 당시의 술라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는 명분도 충분했고 유능한 인물도 카이사르 암살자들보다 훨씬 많았다. 이러한 점에서 카이사르 암살자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보수파는 마리우스의 숙청 당시보다 훨씬 불리했다.[104] 사실 엄밀히 말하면 술라가 이때 한 짓은 전부 다 불법이었다. 하지만 당시 이를 규탄하고 맞서 싸울 만한 민중파의 거두들은 마리우스를 비롯해서 대부분이 이런저런 이유로 사망해 버렸기 때문에 갖다붙일 명분을 만들어내기 좋았다.[105] 포룸에 있는 조각상이 카이사르의 기마상, 그리고 카이사르가 자신의 가문(율리우스 씨족)시조의 어머니라는 비너스(아프로디테)의 조각상도 포룸에 가져다 놓았다고... 반면 아우구스투스의 포룸에는 로마의 역대 인물들(깐깐하고 야단잘 칠듯한)의 조각상이 있었기에 자연적으로 카이사르의 포룸으로 연인들이 이동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들도 있다. 라틴 문학들 중에서도 연인을 카이사르의 포룸까지 데려는 왔는데 결정적(청혼?)인 대쉬를 못하는 남자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응원하는 비너스와 껄껄 웃으며 좀 잘해보라고 타박하는 카이사르를 묘사하는 내용도 있다.[106] 당시 로마 제국은 '레스 푸블리카 - 공화국'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많은 속주들을 거느리고 군사적으로 위압하는 '임페리움 - 제국'이기도 했다.[107] 사실 당시의 로마 공화정 체제가 유지 되는 것은 힘들었다. 아테네와 비교해 보면 아테네는 민중이 권력을 뒤집는 데 성공하여 귀족과 민중의 차이가 줄어들고 결국 평등한 입장에서 정치를 할 수 있었는데, 그 요인 중 가장 중요한 점은 아테네는 인구가 도시국가 수준으로 적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는 포에니 전쟁 이후로 이베리아 반도, 그리스, 카르타고 등에 속주들을 두었고 이탈리아 반도의 동맹시들도 로마와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고, 이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공화정을 유지하기에는 너무 영토가 넓고 인구가 많았던 데다가 원로원은 이런 문제에는 거의 신경쓰지 않았고 민주정치라고 평가받지만 실제로는 귀족 중심의 과두정에 가까웠다. 호민관이 막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그런 막대한 권한을 견제하기 위해 원로원에서는 원로원 최종권고를 남발해서 아래로부터의 요구를 억눌렀다. 이를 통해 로마의 공화정은 말기로 갈수록 모순으로 가득찼으며 뛰어난 정치 능력을 가진 사람이 개혁하여 체제를 바꾸는 길 밖에는 없었다. 한마디로 당시 로마 공화정은 포에니 전쟁 이후로 바뀐 저변에 대해 적응하는 데 실패하는 바람에 제정으로 넘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108] 단순한 역사가가 아닌 19세기 인류가 낳은 가장 위대한 역사학자 중 한 사람으로 로마에 관한 연구에서는 당대 사람들 중 가장 독보적인 업적을 자랑한다. 불멸의 명작인 로마사의 저자이며 1500편이 넘는 로마 관련 연구를 남겼다. 이를 바탕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109] 게다가 공화국 말기에 들어서는 공화정과는 거리가 멀어져 과두정으로 변질되었는데 로마의 영토가 넓어지면서 공화정 체제가 한계에 달해 과두화되었다 볼 수 있다.[110] 민중이 카이사르의 군공만으로 지지를 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루키우스 술라나 루쿨루스 역시 화려한 군공을 세웠음에도 그들은 보수파라는 이유로 인기가 없었다.[111] 카이사르는 뼈대있지만 몰락한 귀족가문이라 서민들이 몰려살던 수부라에서 평범하게 나고 자랐으며(일단 카이사르 이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문에서 공직으로 활약한 사람 자체가 루키우스 카이사르 말고는 역사에 없을 정도), 민중파 마리우스가 고모부였고 친척이 술라의 숙청에 목이 베이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112] 학자들은 10대였던 카이사르의 첫 정치무대라고 평한다.[113] 카이사르는 10대의 나이에 살생부로 정적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던 로마의 지배자 술라의 이혼 명령을 대놓고 쌩까서 몇 년간을 죽음의 위협 속에서 도망쳐다녔다. 고열이 난 채로 노예의 간병을 받으며 술라의 군사들이 추적하는 와중에 동굴 속에 숨어서 목숨을 부지했다는 일화도 있으며 유명한 해적 이야기도 이때 시절. 10대 시절부터 이미 보통 인간이 아니었다.[114] 사실 엄밀히 말하면 원로원 최종권고는 로마에 내려오던 무슨 전통적인 방법이거나 한 것도 아니다. 원래 로마에 내려오던 제도는 원로원 권고로 집정관이 도를 넘을 가능성이 있으면 원로원의 권고로 이를 바로잡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어느 새인가 원로원 최종권고로 바뀌고 사람을 마구 학살해도 용납되는 어처구니없는 제도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제도는 결국 대 민중파 최종병기인데(후술하겠지만 최초로 발동한 것이 바로 그라쿠스 형제를 때려잡기 위해서였다.) 결국 민중파를 때려잡기 위해 원로원에서 고안된 제도로 봐도 무방한 셈이다.[115] 키케로의 언급에에서 집정관 1명을 뽑는 투표가 있는데, 해당 내용을 오늘날 역사가들의 추산한 결과 약 6000명에서 16800명 사이의 표가 나왔을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주류 의견이다.[116] 전제정은 고대와 중세 기준으로 봤을 때 매우 효율적인 정치 체제이다. 오늘날에야 교육의 질 상승, 계몽주의와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둔 인권 의식의 상승, 정보통신과 교통수단의 발달 등을 통해 민주주의가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자리 잡았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그러질 못했으며 영역이 넓어지고 처리해야할 일이 많아진 로마 입장에서 민주정이던 과두정이던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가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유능한 한 사람이 모든 정권을 위임 받아 일을 처리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빠르다. 전제정에는 무능한 한 사람에 의해 나라가 기우는 형세를 만들 수 있다는 단점이 있지만 이마저도 민주정 혹은 과두정에서의 지지부진한 일처리와 다수라는 명목하에 개혁 의지를 없애버리는 것보단 낫다. 전자는 유능한 한 사람이 나오면 나라가 개혁될 수 있지만 후자는 그 다수가 전부 바뀌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물론 결과론적으로 바라본 것이지만 카이사르는 유능했고, 불안한 정세를 바로잡고 다수의 의견을 수용할 능력이 있었다.[117] 외부적으로는 전쟁의 승리로 인해 일개 도시국가가 아닌 거대 제국으로 변모했고 내부적으로는 거대 제국으로 변화한 상태에서 현 체제는 이를 수용하기에 매우 비효율적이라는 것이었다. 공화제 자체가 비효율적인 제도는 아니지만 당시 사회 발전 상황으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고 거기에 더해 로마의 공화제는 불완전한 것(귀족과 평민간 차별이 존재하고 로마와 로마 외부간 신분상 차이도 있었다.)이라는 점도 문제였다.[118] triginta illi : BC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패배 등으로 인해 아테네의 민주정이 휘청거릴 무렵, 크리티아스를 포함한 30명이 아테네에서 전권을 장악하고 폭정을 일삼다가 트라시불로스(Thrasybulos)의 반격으로 내전 끝에 민주정이 회복된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다. '30인 참주(僭主)'로 흔히 번역된다. 주도자격이었던 크리티아스는 플라톤의 친척이자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는데, 민주정 회복 이후 소크라테스가 사형당한 원인으로도 꼽힌다.[119] 예를 들어 스타워즈 시리즈의 팰퍼틴 황제는 카이사르를 모델로 묘사되었다고 조지 루카스가 인증했을 정도. 솔직히 팰퍼틴이 적들까지 동시에 컨트롤한 거만 빼면 두 사람의 노선의 차이는 거의 없다. 공화국을 전제정의 제국으로 만드는 것.[120]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처럼 원수정이 황제와 원로원의 권력 분립이 적절하게 이루어졌다는 시각이 있으나 다수의 역사가들이나 학자들은 황제의 일인통치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형식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게다가 베스파시아누스 집권 이후로 원로원은 상당히 약화된 상태였어서 사실상 견제가 가능했던 세력은 군사력을 가진 속주의 총독밖에 없다.[121] 하지만 이것은 아우구스투스의 원수정 체제가 가진 문제점이다. 카이사르의 구상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그가 맡았던 독재관직은 원로원이나 시민이 맘에 들지 않아하면 탄핵할 수 있었다. 이미 포에니전쟁 시절 파비우스가 독재관 3개월차에 탄핵당한 사례도 있다.[122] 군주정으로 복귀가 필연이라는 주장이 결과론적 입장이라는 거지, 술라가 그랬듯이 아무리 민중파를 밟아버려도 잡초처럼 계속 자라나듯 부패한 원로원이 이끌었던 로마는 어떤 형태로든 부당하게 차별받고 로마 제국의 과실을 나눠줄 것을 요구했던 민중이 원하는 대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술라의 부하였던 폼페이우스와 그라쿠스가 민중파가 원하는 바를 어느 정도 이뤄줬던 것처럼.[123] 다만 오랜 시간 민중에게 나눠준 권력, 예를 들어 호민관의 특권이나 민회의 권리 등을 회수하고 원로원에게 나누어주었으며 술라 이후로 민회는 민중의 대변자가 아니라 기득권의 하수로, 호민관은 원로원과 뜻을 맞추는 관직이 되어버렸다. 이는 결국 카이사르가 삼두정치를 펼치기 전까지 원로원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결과를 낳았다.[124] 사실 민회가 그렇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원로원 최종권고라는 초법적 권한을 남발하여 민중파를 때려잡은 결과지 원래 민회나 호민관은 평민이 자신의 힘을 쟁취한 권리이다. 이걸 왜곡시킨 것 또한 원로원이니 남말할 처지가 못 된다.[125] 다만 카토의 자살은 공화정 수호라는 대의도 대의지만, 카이사르가 내전기에 표방한 관용의 수혜를 입지 않겠다는 의도가 더 클 것이다. 한평생 카이사르를 증오하다시피했던 그에게 카이사르의 은혜를 입어 목숨을 부지하는 한편 카이사르가 극도로 반목하던 상대에게도 은혜를 베풀 아량의 소유자임을 보여주는 정치적 선전물로 이용되는 일은 참기 힘든 굴욕으로 여겨졌을 것이다.[126] 카토는 카틸리나 탄핵 시절부터 카이사르에 반목하는 사이었으며, 카이사르에게 집정관 선거와 개선식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하게 하도록 의미없는 필리버스터까지 한 인물이었다.[127] 긍정적 평가에서도 기술했듯이 키케로는 원칙주의자라고 하지만 카틸리나 음모사건 때 국법을 어겼으며 카이사르 내전기와 이후에도 국법을 어겨서라도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 하는 행동을 상당히 많이 했고 그 본인 역시 평민 계층에 생각만큼 개방적이지 않았고 카이사르에 대한 비판 사항을 보면 결국 원로원 기득권 수호라는 면에 갇혀있다. 또한 키케로는 내전 직전 원로원 최종 권고에 찬성안을 던졌다. 카토 또한 평민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원로원과 대지주 평민들만 변호했다. 본인은 청렴했다 하지만 동료들의 부패에 비판하지 못했으며 평민 지원책에 정당한 의사소통을 방해하는 형식으로 오히려 공화정이 소중히 여기는 토론으로 의사결정을 위반했고 이러한 행위 때문에 후대 역사가들에게 카토의 일부 인기를 얻은 정책이 인기 영합 정책이 아니냐고 비판을 들었다. 이 문제의 정점은 바로 술라로, 공화국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옵티마테스이면서 로마에 군대가 있으면 안된다는 법을 어기고 로마로 진군했으며, 재판 없이 로마 시민들을 마구잡이로 죽여댔다. 이미 술라 시대에 로마 공화정의 도덕성은 끝장나 있었던 것이다.[128] 로마 공화정의 위기는 전근대에 로마에 모이는 몇몇 시민들만이 통치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으나 당대에는 그런 구조적인 결함보다는 원로원 의원들의 지나친 탐욕으로 인한 양극화 때문에 시민 계급이 몰락하는게 더 큰 문제로 여겨졌다. 당대에도 이 문제는 잠재적 군단병인 로마 시민들의 경제적 몰락으로 인한 국방력 악화와 경제 불안 등의 이유로 매우 진지하게 다뤄져서 그라쿠스, 사투르니누스 등 수많은 호민관들이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원로원은 이런 급진 개혁가들을 원로원 최종 권고라는 초법적인 조치로 죽이기에 바빴다. 호민관은 무려 신체불가침권이 있는 이들인데도 말이다. 결국 체제 내부적인 개혁은커녕 원로원이 앞장서서 공화국의 전통을 스스로 짓밟아오다가 결국 카이사르라는 민중의 지지와 무력을 가진 독재자가 나타나서 공화국이 종언을 고한 것이지 멀쩡하게 운영되던 공화국을 갑자기 나타난 독재자가 뒤집어 엎은게 아니다.[129] 가장 큰 문제는 포에니 전쟁 이후로 로마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였던 패러다임의 변화에 대한 대처가 전혀라고 할 정도로 없었다는 점. 제정이 카이사르가 원한 것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한가지 확실한 건 카이사르는 최소한 이런 패러다임의 변화에 대해 분명히 해결책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리고 원로원파는 포에니 전쟁으로 인해 얻은 전리품을 또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민중들에게는 나누어 줄 생각이 없이 기득권인 그들이 독점해 버렸다. 정작 그 전리품을 얻는데 있어서 가장 큰 역할을 한, 포에니 전쟁에서 종군했던 민중들을 철저히 외면한 채로 말이다.[130] 메리 비어드의 '로마는 왜 위대해졌는가'에 의하면 이를 학살로 일컬어야 한다고 한다. 또한 당대의 로마인들 중 이를 근거로 비난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131] 예를 들어 한니발 바르카의 경우 이길 수 있는 전장인 남부 이탈리아의 칸나이로 가기 위해 엄청난 낙오병을 감수하고 이탈리아를 통과하는 강행군을 했다.[132]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는 폼페이우스의 기병이 전부 귀족출신이라 얼굴에 돌을 던지자 얼굴 안 다치려고 피해서 와해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고 한다.[133] 같은 군대가 맞나 싶을 정도로 갈리아 전쟁기 초반과 후반의 군단들은 질적, 경험적으로 엄청나게 차이나는 역량을 보여준다. 갈리아 전쟁기를 읽는 재미요소 중 하나가 오합지졸에서 역전의 용사로 변해가는 군단의 모습이다.[134] 다만 이건 좀 이상한 비판인 것이 일단 2차 엘 알라메인 전투의 주축은 영국군이었고 그걸 지휘한게 자신이니 미국쪽 지휘관 언급이 적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패튼은 2차 엘알라메인 전투에는 관여한 바가 없기 때무에 언급이 없는 게 당연한 노릇이다. 그와 별개로 두 사람의 사이가 더럽게 나쁘기도 했고.[135] 사실 이건 당연한 게, 로마한테 털리고 점령당한 당시의 영국 민족은 켈트족이고, 지금의 영국을 구성하는 앵글로색슨족은 로마가 물러난 뒤에 켈트족이 용병으로 끌어들인 거다. 그 뒤 앵글로색슨족이 고용주를 스코틀랜드 쪽으로 내쫓고 잉글랜드를 먹고 퍼진 것이 현대의 영미 계열 국가다. 민족적으로 볼 때는 로마와 척질 이유가 하나도 없다.[136] 서양에서 등자가 보급된 시기가 중세쯤인데 이 정도 기행을 보일 정도면 카이사르가 말을 잘 탔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나 여느 기마 민족들이 말을 태어날 때부터 타고 자랐듯이 본인이 말을 계속 타고 지냈다면 이런 묘기를 부렸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도 이래저래 대단하기는 하다[137] 그리고 이런 배짱이 군인들에게 신뢰를 받아서 나중에 군인들이 파업을 해도 카이사르가 타이르면 곧장 귀담아 듣거나 전쟁 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해주는 리더쉽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138] 참고로 이 에피소드는 카이사르의 관용(clemency)을 보여주는 사례로 기억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때 카이사르는 독재관으로 막 내전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절대 권력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례대로 병사들이 희극적인 구호를 외치는 것에 투덜거리기만 하고, 아무도 처벌하지 않았다. 다만 카이사르는 자신의 병사들을 아꼈으며 군인 대우 개선에 많은 노력을 가했다. 이 구호를 들은 카이사르는 부하들하고 웃으면서 어떻게 이런 가사를 생각해냈냐고 웃다가 갑자기 정색을 하면서 대머리는 좀 아니지 않냐고 했고 그 다음부턴 부하들이 머리에 대해선 언급을 안했다고 한다.[139] 당시 카틸리나의 정치적 목표가 바로 채권자들에게 부채 전액탕감을 강제하는 것이었는데 카이사르도 빚을 엄청나게 지고 있어서 한 패로 의심을 받았다.[140] 오죽하면 푸블리우스 크라수스에 대한 로마 시내의 중평은 솔개에게서 매가 태어났다.였다고.[141] 정치적인 목적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첫 번째 부인인 코르넬리아와는 차라리 이혼하는 게 정치적으로 이득이었는데도 당시 독재자였던 술라가 이혼하라는 명령도 거부하고 튀었다. 이는 카이사르가 자신은 민중파라는 것을 술라를 비롯한 보수파들에게 알린 일화라고 보는 것이 맞다. 자신은 마리우스를 지지하기에 술라의 말은 듣지 않는다는 뜻. 이후로 카이사르는 자신이 마리우스와 혈연이면서 민중파라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다녔으며 이 때문에 정치적으로 성공하기 전까지 원로원의 견제를 지속적으로 받았다.[142] 그래도 합법이기는 했다. 그 유부녀의 남편이 결혼식 들러리를 해줬다고 하고, 전 남편의 자식 2명(그중 임신 중이던 둘째가 불륜의 결과라는 이야기도 있지만)을 모두 떠맡았으며 데려온 자식 중 첫째가 결국 후계자가 되기도 했다.[143] 1999년작 프랭크 로덤 감독의 영화 클레오파트라에선 작중 클레오파트라와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클레오파트라와 그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와의 결혼을 제의하는데, "저런 코흘리개 어린애하고 결혼하기 싫다"고 투덜대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여왕이 되었으면 여왕처럼 생각하는 방법도 배워라. 프톨레마이오스와 부부가 되면 그의 군대를 합법적으로 해산시키고 당신의 반대 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걸 모르겠냐."며 일침을 놓는 장면이 있다.[144] 당시에 로마인들 기준에서 카이사르의 행위는 법적으로 간통으로 보지 않았다. 반면, 안토니우스는 명백한 간통이었다. 당시에 남자가 여러 첩을 두어도 상관은 없었으나 문제점은 정식 부인으로 인정하는 쪽이 문제가 되었는데 하필이면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에 이익이 되는 쪽으로, 여론으로 보아도 명백히 로마를 배신하는 듯한 이미지인 클레오파트라를 정식 부인으로 인정하고 결혼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카이사르는 그냥 클레오파트라를 자신과 그냥 밤을 나눈 여자라고 생각하고 정식 부인으로 인정하지 않아 당시로서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스캔들로 넘어갈 수 있었다.[145] 첫 아들은 유산이었다.[146] 그러나 이 때문에 자기 친인척 및 가문사람들을 대거 기용하는데, 이들이 나중에 큰 힘이 된다. 사실상 부관이나 다름 없던 안토니우스도 친척.[147] 많은 소설가들이 카이사르가 이상할 정도로 옛 연인이었던 세르빌리아에게 잘 대해주고 아들인 브루투스에게까지 호의를 베풀자 사실은 브루투스가 카이사르와 세르빌리아의 사생아가 아니냐는 소문을 채용해 카이사르가 브루투스를 남몰래 자신의 아들이었다는 점을 알고 그렇게 호의를 베풀었다는 소설도 나오고 있지만, 그가 정식으로 카이사르의 아들이었다는 증거는 없다.[148] 아우구스투스가 카이사르의 신격화를 위해 신에 어울리지 않는답시고 갈리아 전기와 내전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작품을 소각했기 때문.[149] 카이사르 본인은 7권까지 썼고 마무리는 그의 부관이 8년째 뒷마무리 과정을 쓰면서 완성시켰다.[150] 사실 카이사르의 작품은 입문자가 읽기에는 무리가 있다. 아무리 담백한 문체라고는 해도 카이사르가 저술활동을 한 고전 라틴 시기는 라틴어가 고도로 정형화되어 확실히 자리를 잡은 시기였기 때문에 문장의 구조 등이 매우 복잡하다.[151] 갈리아 전기의 문체를 쉽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면 정말로 라틴어 공력이 쌓인 것이다. 키케로 저작까지 갈 것도 없다. 키케로 저작을 쭉쭉 읽을 수 있다면 아마추어 레벨은 진작에 지났다.[152] 의외로 로마인들은 실용보단 '위엄'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로마 귀족들의 전통 예복인 토가가 실용과 거리가 억만 년쯤 떨어진 복장인 걸 생각하면 제책법 역시 '위엄이 넘치지 않아서' 거부했다는 주장이 아예 생뚱맞은 주장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153]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는 패장을 가차없이 처형했는데 이런 고급 인력의 손실과 달리 실수를 만회할 의지에 불타는 장군들이 넘쳐난 로마에게 유리했다는 평가도 있다. 심지어 로마의 패장은 패전 자체로는 처벌받지 않았지만 전투 직전에 닭 모이 점을 치다가 불길하게 나오자 닭을 바다에 집어 던져버려 경솔하게 신을 모독했다는 이유 때문로만 처벌받은 경우도 있다.[154] 그 외에 2명의 어머니는 아우구스투스의 어머니인 아티아, 스키피오의 어머니인 코르넬리아다. 가부장적인 로마사회에서 가장 이상적인 현모양처로 로마 역사내내 칭송받던 3명의 어머니다.[155] 어느날 카이사르가 책을 읽다가 갑자기 울었는데 친구가 "왜 그러냐"고 하자 "알렉산더는 33살에 세계의 주인이 되었는데 동갑인 난 뭘하고 있나"라고 한탄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156] 그런데 이건 애초에 비교대상이 잘못됐다고 보는게 맞다. 예시로 나오는 알렉산더, 폼페이우스, 스키피오 모두 유의미한 군사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여건이 젊은 나이부터 가능했음을 고려하면(알렉산더는 당대의 강국에 해당하는 마케도니아의 왕자였고, 폼페이우스는 가문 대대로 전해지던 다수의 후원자들이 있었으며, 스키피오는 아버지가 군단 사령관이었고, 아버지 아래에서 종군했던 케이스다.) 오히려 카이사르는 키케로나 루키우스 카이사르처럼 특수한 케이스들을 제외하면 소위 말하는 '명예로운 경력'을 착실히 쌓아가는 평균적인 로마의 정치인 코스를 탄 케이스이다.[157] 여러 사료에서는 3월 15일의 암살 직전 수많은 불길한 징조들과 아내의 악몽 등이 거론된다.[158] 당시 로마인들에게 행운, 운명은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는 신앙이었다. 결국 정적에게도 카이사르는 죽어서도 행운의 가호를 받는 슈퍼 휴먼으로 인식되었다는 것.[159] 영어로 하면 even you, Brutus이다. 이걸 피하기 위해 브로콜리 너마저는 영어 명칭을 brocoli, you too? 라고 했다는 후문[160] 영문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and you, Brutus?" 혹은 "you too, Brutus?"라는 뜻이라고 한다.[161] 단 이 어록의 원전인 그리스어 "Kai su, Teknon?"은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수에토니우스의 저작에서 유래했고 플루타르코스는 꼴사납게 죽지 않으려고 토가로 자신을 가리고 죽었다고만 썼는데, 원어의 어감은 "이 개같은 새끼!" 정도의 욕설이라고 한다. 어떤 작가는 훌륭한 개드립을 첨부했다. "카이사르의 진짜 유언은 "아아아아악"이었을 겁니다. https://www.theguardian.com/notesandqueries/query/0,5753,-1156,00.html[162] 이 시기 제왕절개 수술은 마취 따위 없이 말 그대로 생살을 가르는 수술이었으며, 그에 따른 고통과 출혈량을 무시할 수 없으므로 필연적으로 산모의 죽음을 의미했으며, 산모가 가망이 없거나 사망했을 때 아이라도 살리고자 시행했던 말 그대로 응급 수술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는 이 이후에도 역사상에 등장하므로, 이는 말 그대로 전설임을 알 수 있다.[163] 어떻게 보면 명목상의 최고 존엄은 따로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장군이 최고 정치 역할을 겸한다는 점에서 일본의 쇼군과도 비슷한 케이스이다. 물론 파고들면 세부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많긴 하지만.[164] 이렇게 선대의 이름을 계승함으로서 자신이 선대를 계승한 존재임을 선언하는건 동서양을 막론하고 흔한 일이었다. 당장 한국만 해도 고려고구려를 계승했다고 고구려의 진짜 이름인 '고려'를 자기 국명으로 삼은 것이고 단지 편의상 구분을 위하여 고씨 가문의 고려를 고'구'려로 바꿔서 부른게 굳어져 온 것이다. 즉 진짜 삼국시대 당대의 백제, 신라 사람들은 그 북방 국가를 '고려'라고 불렀지 '고구려'라고 부르지는 않았다는 것. 실제로 왕씨의 고려 이전, 남북국시대에서 고려(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주장한 발해 역시 '발해'는 중국으로부터 수여받은 국명이었고 자체적으로는 '고려'를 국명으로 썼다. 발해의 문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 당당하게 "나 고려왕 대흠무는..."이라고 쓴 글귀도 남아있다. 조선 또한 마찬가지로 원래 단군 왕검이 건국한 국가의 이름은 고조선이 아니라 '조선'이었으나(기자조선 설의 근원으로 여겨지는 상서대전에 "은나라의 왕족인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조선후로 봉해졌다."는 구절이 남아있는데 당연히 몇 천 년 후의 이성계의 조선(...)일 리는 없다) 후에 이성계가 고려를 전복하고 새로이 국가를 창건하면서 "고려는 고구려만 계승했지만,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된 조선을 계승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국가다"는 명분으로 건국을 정당화하고자 국명을 조선으로 칭하면서 단군 왕검의 조선을 편의상 '고'조선으로 바꿔서 부른게 굳어져 온 것이다.[165] 후대의 수많은 로마 황제들이 자신의 이름을 넣어 월의 이름 바꾸려고 시도하였으나, 결국 끝까지 살아남은 건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뿐이다.[166] 그중에 자신의 친척도 포함되어 있었다.[167] 당시에는 말 위에서 발을 거는 등자가 없었을 시기다. 때문에 단순히 허벅지 힘만으로 말을 조이고 그 위에서 무기를 다뤄야 했다. 그래서 고대에는 기마병이 흔치 않았고 고급인력이었다. 어린 카이사르가 두손을 머리 뒤로 하고 말을 타는 모습에 어머니인 아우렐리아가 기겁했다고 한다.[168] 갈리아 전쟁 당시 20대 초중반의 군단병에 비해 카이사르는 40대를 넘긴 나이였다. 당시에는 이미 아버지뻘 나이이고 무엇보다 카이사르는 전투 뿐 아니라 보급, 병참, 전략, 정치, 현지 안정화 등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하는 격무에 시달렸다. 호리호리하고 격무에 시달리는 아버지뻘 지휘관이 아들 나이대의 정예병들과 대등한 체력으로 싸웠다는 건 충분히 존경받을 일이었을 것이다.[169] 아우구스투스와의 공통점은 둘 다 당대 로마 귀족들과 달리 미식에 전혀 관심이 없었음에도 직접 음식, 인테리어 매뉴얼을 만들 정도로 손님 대접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차이점은 카이사르는 전쟁터에서 단련돼서 그런지 이것저것 주는대로 잘 먹었으나 아우구스투스는 소화불량으로 평생을 소식했다는 점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장수비결을 소식에서 보기도 하지만.[170]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카이사르는 왼손잡이였지만, 글은 왼손으로 쓰고 전쟁터에서는 칼을 오른손으로 잡았다.[171] 당장 방어 무기를 들지 않는 오른쪽에 대해 대놓고 노출된 측면(latere aperto) 이라는 표현이 카이사르 본인의 저서인 '갈리아 전쟁기'에서도 나오며, 로마 군단병은 모두 일렬로 합을 맞춰야 했기 때문에 왼손잡이, 오른손잡이에 상관없이 오른손에 칼, 왼손에 방패를 들어야했다. 지금까지 발굴된 수많은 로마 시대 군단병 무기 중에서 왼손잡이용 칼과 방패가 발굴된 적은 한번도 없다. 기술이 발달한 현대의 제식소총도 왼손잡이용이 거의 없다는 걸 생각해보자.[172] 다만 따지고 보면 카이사르의 출세는 늦은 편이 아니라 로마의 정상적인 엘리트 코스였고, 동시기 인물 중에서 그보다 더 빨리 출세한 인물은 키케로나 젊은 시절에 술라의 내전이라는 특수 상황이 있었던 폼페이우스 정도였다. 그런지라 사실은 '시대를 좌지우지했던 다른 인물들은 특이하게 이른 나이부터 두각을 보이고, 정석 코스를 밟은 다른 인물들은 카이사르만큼 걸물이 아니었던 것'에 가깝다.[173] 사실 알두인이 방해해서 물거품이 됐을뿐이지 울프릭을 진작에 잡아들여서 처형하기 일보 직전까지 간 것을 감안하면 굉장히 능력있는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174] 그저 시적 허용일 뿐이라고 황급히 얼버무리지만 파렴치하게도 후일 원로원에 진짜 왕좌를 갖다놓는다. 이것은 공화주의자인 브루투스를 놀라게 해서 카이사르 암살의 동기로 작용한다.[175] 이때 카이사르의 하인과 아우구스투스가 급히 그를 숨겨서 간질이 있다는 것을 숨기는데, 이는 카이사르가 간질이 있는 것이 알려지면 로마 시민들이 그의 리더쉽에 의문을 품을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다만 어린 미청년 아우구스투스와 함께 방으로 사라지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이후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난다(!).[176] 사실 카이사르의 간질설은 셰익스피어의 저술로 유명해지긴 했지만 실제 사료로 남아있는 것은 100년 이상 뒤인 오현제 시절에 쓰여진 플루타르코스의 저술이고 동시대의 사료는 없어서 신빙성이 떨어진다. 게다가 플루타르코스의 저서가 옳다고 해도 그걸 바탕으로 의사들이 검토한 결과 카이사르의 간질은 부정된다. 대개는 가벼운 뇌졸중이나 저혈당증의 증세에 더 가깝다고 한다. 출처 따라서 현대 학자들은 카이사르의 간질설을 거의 부정하고 있다. 참고로, 고대 유럽에는 간질이 일종의 신성(神性)을 갖고 있는 자의 증상이라고 여겨져 사후에 신격화된 카이사르의 간질설이 퍼졌다는 말도 있다.[177] 3대 닥터로 유명한 존 퍼트위의 손자이며 배우성우로써도 활동하고 있다. 영화 이퀼리브리엄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 감정의 어두운 부분에 대해서 설명하는 영상을 통해 얼굴이 나오며, 해당 배우는 최근 2014년 미드 고담에서 알프레드 페니워스 역을 맡았다.[178] 삼두정치의 일원이었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장남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2세에게 빙의. 어린 시절부터 로마에 악명이 자자한 망나니였던 것으로 설정했다.[179] 폼페이우스는 군인을 대표하지만 그 군인들이 원정 나갔다가 보상을 못받은 서민 병사들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민중파 취급을 받는다.[180] 주인공은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는다.[181] 작중에 원로원과 주인공이 내세운 대리인이 정치적 암투를 너무 거하게 벌여 로마 정계가 개판이 되는 바람에 여러 원로원 의원들이 개입을 요청하나 전부 거절하고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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