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는 1905년 정교 분리 이래로 ‘의식의 자유’를 의미하는 ‘라이시테(Laïcité)’의 가치를 사상적, 정치적 이념으로 숭상하게 되면서
국교가 없으며, 철저한 수준을 넘어 강경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정교분리를 추구하는 세속국가이다. 이를테면
독일이나
미국 등 일반적인 서방 국가의 정교분리는 국가가 특정 교단을 편들어주지 않는 개념인데 프랑스의 정교분리는 공적인 장에서
종교를 철저하게 배제하자는 개념이다.
독일에서는 기민련 등 종교정당이 원내에서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지만, 프랑스에서는 안 된다.
역사적으로는 ‘교회의
맏딸’이라고 불릴 만큼
가톨릭의 전통이 깊어, 지금도 약 58% 인구가 가톨릭 신자이다. 프랑스가
가톨릭 국가가 된 기원은 메로빙거 왕조의
클로비스 1세가 496년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성직자들과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지지를 받아
프랑크 왕국을 탄생시킨 것에서 찾을 수 있다. 클로비스의 개종은 로마 가톨릭에 기초한
유럽 탄생의 단초가 됐다.
프랑스에서
가톨릭은 역대 왕조의 흥망성쇠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종교 뿐 아니라 국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이뤄왔다. 특히 교육과 행정은 가톨릭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됐다. 이러한 상황 등으로 인하여 프랑스가 '교회의 맏딸'이라 불리는 것은, 바로 프랑스가
로마 제국에 이어 공식적으로 가톨릭 국가가 된 나라이기 때문이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프랑스 가톨릭교회와 인연이 깊은데,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흘린 피 위에 세워졌으며 파리 외방전교회의 한국 선교 역사는 곧
한국 가톨릭의 역사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파리외방전교회는
교황청 포교성성(現 인류복음화성) 선교 지침에 따라 아시아 선교를 목적으로
교구 사제들로 결성된 프랑스 최초의 외방전교회다.
한국 가톨릭교회와
파리 외방전교회의 인연은
미사와
성사를 집전할
사제가 필요했던 조선의 신자들이 1811년과 1827년 2차례에 걸쳐
교황청에 편지를 보낸 것으로 시작된다. 프랑스 남서부의 가톨릭 성지
루르드의 '무염시태
[28] 성당'에는
선교사들이
서해의 거친 풍랑을 헤치고 무사히 조선 땅에 도착한 것을
성모 마리아에게 감사하는 감사비(碑)가 새겨져 있다. 이 감사비는 1876년 무염시태 성당 축성식 때 성당 벽돌판에 새긴 것으로,
성모 마리아는
한국 가톨릭의
주보성인(主保聖人.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나무파일:external/info.catholic.or.kr/%ED%95%9C%EA%B5%AD%EC%9D%98%ED%8C%8C%EB%A6%AC%EC%99%B8%EB%B0%A9%EC%A0%84%EA%B5%90%ED%9A%8C%EC%88%9C%EA%B5%90%EC%9E%90.jpg왼쪽 위부터 성(聖)
모방 나 베드로 신부, 성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29] 주교, 성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 푸르티에 신 요한 신부, 프티니콜라 박 미카엘 신부, 성 오매트르 오 베드로 신부, 성 도리 김 헨리코 신부, 성 베르뇌 장 시메온
[30] 주교, 성 다블뤼 안 안토니오
[31] 주교, 성 위앵 민 루카 신부, 성 볼리외 서 루도비코 신부, 성 브르트니에르 백 유스토 신부.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했고, 나머지 주교들과 신부들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울 새남터와
충남 보령시 갈매못에서
순교했다.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조선을 북경교구에서 분리하여
조선대목구를 설정한 이래,
파리 외방전교회가 조선 천주교회의 사목을 맡았다.
[32] 파리 외방전교회는 지금까지 한국에 173명의
선교사를 파견했고, 그 중 14명이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다.
파리 외방전교회는 170여 명의
순교자를 배출했는데 이들 중 12명이 한국에서
순교했고, 그 가운데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10명의 순교자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때 시성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 103위 순교성인 항목 참조.
파리 외방전교회 프랑스인 선교사들은 초대
조선대목구장부터 1942년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가 제10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되기까지 약 110년 간 9대에 걸쳐
조선대목구장직을 승계했다.
천주교 대구대교구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와 제2대 교구장 무세 주교,
천주교 대전교구 초대 교구장
아드리앙 조셉 라리보 주교,
천주교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
두봉 주교도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또한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파견된
프랑스인 신부들은
예수성심시녀회,
성가소비녀회 등의
수녀회도 창설했다.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방인(邦人)
사제, 즉
한국인 가톨릭 사제 양성에도 힘썼다. 성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 성
모방 나 베드로 신부 등은 3명의 조선 소년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이 세 소년이 바로 최초의 한국인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2번째 한국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 그리고 최방제
[33] 프란치스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사회의 변화와 맞물려 프랑스의 많은
교구와
수도회에는 성소자(聖召者)
[34]가 급격히 감소했다. 프랑스의
수도자 수는 40% 이상 줄었다. 같은 기간 프랑스의
사제와 신학생도 3분의 1이 줄었다. 짧은 기간에 엄청난 수가 감소한 것이다.
이 도전에 대한 응답으로 일부
수도회는 다른 대륙, 특히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눈길을 돌려
콩고,
필리핀,
한국,
베트남,
인도 공화국,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성소자를 대거 계발했다. 현재 45세 미만의
수도자 가운데 절반이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왔다. 2012년을 기준으로 양성 중인 여성 수도자(수녀) 490명 가운데 310명이, 남성 수도자(수사) 392명 가운데 140명이 외국인이다.
다만 프랑스가
가톨릭 문화권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가톨릭교회와의 관계는 참으로 오묘하다. 가톨릭에서 시성까지 된
루이 9세 성왕(聖王) 등도 있지만, 프랑스의 통치자들은 대체로 자국 교회를 '
교황에게 충성하는 조직'이 아니라 '프랑스에게 충성하는 조직'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물론 안 그런
서유럽 국가가 어디 있겠냐만은, 일찍부터 강력한 중앙정부를 갖춘 프랑스는 이러한 점이 더욱 두드러졌다.
아비뇽 유수로
중세 가톨릭 세계를 흔들어본 사례가 있고,
30년 전쟁 때는 합스부르크를 엿먹이기 위해서
개신교 편에서 싸우는 등 (
가톨릭 입장에서는) 희대의
트롤러로 활약했다.
부르봉 왕조를 개막한
앙리 4세 역시도 정치적 이유로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이라 교회와의 관계가 여러 모로 미묘했고,
프랑스 대혁명이 당시에도
앙시앵 레짐의 주요 세력인 성직자들이 '
교황 말고 정부에게 충성하라'는 강요를 받으며 쓸려나간 적이 있다.
프랑스 제3공화국이 들어서 프랑스에 공화정이 확립된 이후로는
왕당파/반공화파의 주요 세력인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는데, 오늘날 프랑스의 라이시테도 이 때 확립된 것이다.
한때
위그노를 중심으로
개신교 신자도 상당수가 있었으나, 갖은 박해로 지금은 그 수가 많지 않다.
프랑스는 다른 유럽국가들에 비해
무슬림 인구 비율(약 8~10%)이 높은 편이다. 프랑스의 무슬림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북아프리카 출신이 70% 이상이다. 출신국별로는
알제리 35%,
모로코 25%,
튀니지 10% 등이며 이들은 주로 파리, 릴, 리옹, 마르세유 등 대도시의 외곽에 집단을 이뤄 살고 있다. 현재
이슬람교는
가톨릭 다음으로 프랑스 제2의 종교로 부상하였다. 세속주의와 사이가 좋지 못한 이슬람교의 부상은 프랑스의 라이시테 원칙과 큰 충돌을 빚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