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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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김영삼
金泳三[1] | Kim Young-sam
출생
자택
서울특별시 동작구 매봉로2가길 11 (상도동)[3]
사망
2015년 11월 22일 (향년 87세)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김영삼대통령묘소
재임기간
제14대 대통령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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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김녕 김씨 충정공파 28세손
부모
아버지 김홍조, 어머니 박부련
형제자매
여동생 김호금, 김호아, 김호임, 김두선, 김두아
배우자
자녀
아들 : 김은철, 김현철, 김상만[5]
딸 : 김혜영, 김혜정, 김혜숙
학력
통영초등학교 (졸업 / 1회)
통영중학교 (졸업 / 1회)
경남고등학교 (졸업 / 3회)
서울대학교 (철학 / 학사)
병역
파일:roka_logo.png 파일:대한민국 육군기.png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 제대(학도병[6]) (국방부 본청 정훈국)
복무 기간 : 1950년 6월 25일 ~ 1953년 7월 27일
종교
신체
168cm, 63kg, AB형
의원 선수
9
의원 대수
3, 5, 6, 7, 8, 9, 10, 13, 14
약칭
YS
거산(巨山)[8]
1. 개요2. 일생3. 평가4. 사상과 신념
4.1. 자유주의4.2. 대북관
4.2.1. 한반도 평화와 남북 협력의 4대 원칙 제시4.2.2. 6.25 전쟁 만주 폭격 발언
4.3. 종교
5. 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6. 기타
6.1. 그의 인기6.2. 한자 선호파6.3. 인재 발굴6.4. 각종 타이틀
7. 어록8. 가족 관계9. 대중 매체에서10. 수상 내역11. 선거 이력12. 소속 정당13. 둘러보기

제14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 선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제14대 대통령.

삼김시대의 일원이었으며 김대중과 함께 대한민국 민주화에 삶을 바친 민주화 운동가이다.[9] 자유당에서 정치에 입문하고 민주당 구파에서 출발한 보수 우파 정치인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역대 최연소인 만 25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10] 자유당에서 정치에 입문해 9선 의원을 지내면서 3공화국~ 5공화국 치하의 야당 지도자, 통일민주당 총재 등으로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까지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으며, 제14대 대통령 선거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퇴임 후 자택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2015년 11월 22일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 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급성 패혈증과 급성 심부전으로 향년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경상남도 거제 출신이며 호는 '거산(巨山)'이다. 태어난 고향인 '거제'와 정치적 기반이 된 곳(정치적 고향)인 '부산'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었다. 이름의 영문자 이니셜을 딴 YS로도 유명하다.

2. 일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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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김영삼은 정치가 이외에는 별 다른 이력이 없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자유당 정치인이었던 장택상의 비서가 되었고 그 이후 자유당에 입당해서 만 25세에 최연소 국회의원 기록을 달성하며 당선되면서 정치경력을 시작했으며 그 이후에는 평생 정치인으로 지내왔다. 자유당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했으나 이승만이 장기 집권을 위해서 대통령 3선 제한 철폐를 추구하자 거기에 반대했고 마침내 사사오입 개헌이 통과되자 자유당을 탈당하고 민주당에 합류하였다.

김대중[11]과 더불어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일생을 바쳐 헌신한 한국 민주화 역사의 양대산맥이었다. 또한 고위 공직자 재산 공개를 도입한 청렴한 정치의 선구자이자 수많은 개혁을 단행한 개혁가라는 평가도 있다. 1993년 금융실명제를 시행하기 앞서 본인의 재산 내역을 공개했을 정도였다. 반면 국가 및 집안 경영에 실패해 1997년 외환 위기를 막지 못한 지도자라는 평도 있다. 과감한 개혁 조치로 한국 갤럽 조사 기준으로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는 역대 최고 지지율을 기록했으나, 임기 말 외환 위기로 지지도 조사에서 6%를 기록해 역대 최하 지지율을 기록한 대통령으로 오랜 기간 남아있었다. 이후 2016년 박근혜의 지지율이 4%를 기록하며 경신되었다.

하지만 2015년 사망한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IMF의 원인을 온전히 김영삼의 잘못으로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지적에 동의하는 사람이 늘었고, 금융실명제 실시와 하나회 해체, 역사 바로 세우기 같은 긍정적 업적들이 재평가를 받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말년을 제외하고는 괜찮은 대통령이었다는 평가가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 뭐 그렇다고 전임 대통령 지지도 조사에서 크게 높게 나오지는 않지만[12] 2000년대 초반에는 그야말로 대한민국 역대 최악의 대통령이었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재평가 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례로 김영삼은 2012년 대선을 즈음하여 박근혜의 집권을 영 마뜩찮아하는 모습을 종종 보여주었는데, 김영삼이 신랄한 독설을 퍼부으면 박근혜가 "역대 최저 지지율 기록한 분"[13] 운운하며 맞받아치는 식으로 한바탕 난타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김영삼 하면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인식이 201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 정도로 강했다.

이렇게 김영삼이라는 개인의 대통령으로서의 업적은 여러 의견들이 갈리나, 군사정권 대통령의 시대를 마치고 본격적인 (실권을 가진) 문민 대통령의 시대가 이 사람을 시작점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에 적지 않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인물임은 분명하다.

3.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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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상과 신념[편집]

김영삼의 정치철학은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하고 있었다. 야당에서 활동하였지만 정치학자 김용욱에 의하면 그의 노선은 보수주의 성향이었다고 한다.즉 자유보수주의자이자 자유민주주의자, 스펙트럼은 중도우파 성향이다.[14]

4.1. 자유주의[편집]

"공산주의와 싸워서 이길수 있는 가장 강한 무기는 자유의 유보가 아니라 자유의 신장이며 인권의 탄압이 아니라 인권의 보장이고 언론의 통제가 아니라 자유언론의 창달이며 민주체제라는 것을 인식해야한다"#

자유가 없는 세계가 잘못하면 공산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한국의 보수정당 중 민주계 역시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운동권 혹은 냉전의 붕괴를 겪고 자유주의로 노선을 바꾼 민주화 운동가 출신이 많았고, 김영삼은 그들을 데리고 초기 신한국당에서 군부 TK 기반의 민정계들을 견제하였다. 또한 공산주의사회주의는 실현 가능성도 없고, 개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탄압하는 체제라고 지칭하며 매우 비판적으로 보았다. 김영삼은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PD/NL 등 좌파 성향 운동권들과는 끝까지 선을 그었으며, 극좌 성향 대학생 단체인 한총련에 대해 강경하게 통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에 의하면 자유가 전부 없어지고 그런 구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되면 공산주의에 호기심을 갖는 사람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수의 <지도자가 가는 길>을 감명깊게 읽었다고 한다. 존경하는 인물로는 한국 사람 중에서는 개인적으로 성격이라든가 지도력이라든가 정치가로서 조병옥을 지목했고, 외국 사람으로서는 전 미국 대통령인 존 F. 케네디를 지목하였다.

4.2. 대북관[편집]

그는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에 의하면 "공산주의자는 어렵습니다. 아무리 베풀어도 욕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재임 중에 쌀 15만 톤을 달라고 해서 5만 톤을 먼저 보내고 나머지는 순차적으로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쌀을 실은 배가 원산으로 가는데 선장이 (북한 지역) 사진을 찍었다고 감옥에 보냈어요. 선장이 배에서 사진 좀 찍었다고 무슨 문제가 됩니까. '쌀을 안 주겠다' 했지요. (공산주의자들은) 매달리다가도 금방 변합니다."라는 것이다. 그는 야당활동과 대통령 재직 기간 내내 공산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버리지 않았다. 사실 공산주의 국가들이 하나같이 탄압적인 정국을 가졌다는 것도 민주화 운동을 하던 김영삼에게 부정적으로 보이도록 한 몫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당연하게도 6.25 전쟁을 몸소 겪었던 인물이었던데다가 어머니를 무장공비에게 잃기까지 했으니[15][16] 공산주의에 대해 우호적인 시각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집권 기간 동안 반공을 내세우거나 강력한 반공 분위기를 만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공기조는 약해져, 90년대 초반까지 공공장소에 비일비재하던 반공구호는 1995년을 전후하여 국제사회의 탈냉전시기와 더불어 죄다 없어지고, 반공교육도 공교육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던 게 이 시기이다. 일단 김영삼의 어머니가 북한 공비의 총탄에 사망했다는 걸 부울경 사람들도 다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공과 사를 구분해 북한과 대화를 추진하는[17] 모습을 보였다. 미워도 동족이라 어쩔 수 없다면서 말이다. 대북 경수로 사업(KEDO)[18]비전향 장기수의 첫 송환이 이루어진 시기도 이때이다. 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수도 있었으나, 김일성의 사망 이후 북한의 혼란으로 인해 무산된 바가 있다[19]. 하지만 입장을 선회하여 1996년 신년연설을 보면 "북한 경제난의 근본원인은 과다한 군사비와 공산주의 경제체제의 비능률에 있다. 북한이 동족을 위협하는 군사력 유지에 모든 국력을 쏟아넣으면서 구호를 바라는 것은 민족에 대한 배신이며 죄악이다. 북한이 화해와 협력이라는 세계적인 추세를 직시하고 對南 자세를 바꿀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는 입장으로 선회했음을 보여준다.#

한국 보수세력의 주요 대북 담론인 '북한 붕괴론'이 등장한 건 김영삼 정부 시기라고들 한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자 정부 당국자들은 북한 붕괴를 기정사실화 했다고한다. 당시 정종욱 안보보좌관은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앤서니 레이크)에게 "북한이 6개월 내지 2년 안에 붕괴할 것"이라고 말했다고『두 개의 한국』의 저자 오버도프가 전했으며, 갈루치·위트·폰먼의 공동 저서 『북핵 위기의 전말』에서는 “김영삼 대통령은 ‘김정일의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 상태도 정상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의 최측근 참모였던 이원종 전 정무수석은 "YS는 김일성의 건강이 나쁘다는 정보부의 보고를 워낙 많이 들어서 사실 북한의 붕괴를 기대하고 있었다. 김일성이 죽으면 북한은 무너진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영삼 대통령은 94년 8월 “남북의 체제 경쟁은 끝났다”며 “언제 갑자기 통일이 눈앞에 닥쳐올지 모른다”고 말해 북한의 붕괴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 # #

또한 2004년에는 다음과 같은 발언도 하였다. "북한은 인권이 없는 나라다. 김정일을 제거하지 않으면 북한에 자유를 가져올 수 없다", "북한 정권과 대화를 통해서 뭔가를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김정일 멸망 이외에는 그 어떤 경우에도 (한반도에) 평화는 없다", "북한에선 56년동안 김일성, 김정일 두 사람이 정권을 잡아오지 않았느냐. 그런 독재정권이 어디 있느냐."#

4.2.1. 한반도 평화와 남북 협력의 4대 원칙 제시[편집]

파일:DN19970046-00_01073905.jpg

1997년 8월 15일, 광복절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통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평화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 원칙으로 무력포기와 상호존중, 신뢰구축 그리고 상호 협력을 제시했다. 김 대통령은 이날 광복절 경축식 연설에서 이같이 강조하면서 북한의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을 제시했다. 김 대통령은 이를 위해 북한에 경제 전반을 회생시킬 수 있는 민족개발 공동계획을 남북대화를 통해 추진하자고 말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어 우리는 북한이 변화의 길로 나온다면 얼마든지 협력할 의지와 능력이 있다고 강조하고 북한 당국의 호응을 촉구했다.[20]

4.2.2. 6.25 전쟁 만주 폭격 발언[편집]

1996년 6월 24일 전방부대를 시찰한 자리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북한은 세계의 모든 나라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지만 마지막으로 도울 수 있는 나라는 동족인 우리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6.25 당시에 만주를 폭격했으면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고 발언하여 여야간 극한 언쟁이 오갔다.

당시 국민회의 정동영 대변인은 해당 발언에 대해 국가안보를 해치고 4자회담[21] 성사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라면서 "국가이익을 현저하게 해칠 우려가 있는 발언을 한 것은 대통령의 직무와 관련해 탄핵소추도 가능한 발언이라고 본다"는 논평을 냈고,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측에서는 "대통령 자신이 북을 자극하여 찬물을 끼얹고 있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는 논평을 냈다. 집권당인 신한국당의 김철 대변인은 "어느 쪽의 안보를 지키려는 정당인지 의심이 들 정도라는 점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회의는 북한에 대해 그렇게 미안하고 조심스러운지 묻고 싶다"는 논평을 냈다.[22]

당시 공방의 발단은 김영삼 대통령의 지난 24일 중부전선 시찰 당시 발언으로 김영삼 대통령은 심각한 북한 상황과 한국전쟁의 참상을 회고하고 당시 맥아더 장군이 주장했던 만주폭격이 가능했더라면 이미 통일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면서 철저한 안보태세를 당부했다. 그러자 국민회의 측은 어제와 오늘 잇따라 비난공세에 나섰고 신한국당 측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양쪽 공방은 김영삼 대통령의 발언이 과연 우리 국민의 안보의식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줬다.
국민회의 정동영 대변인은 만주북폭 지지발언은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중대한 발언이라고 규정을 했다. 그러자 신한국당 김철 대변인은 전방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과거의 통일의 기회를 아쉬워하면서 젊은세대들에게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이같은 회상을 한 것은 매우 자연스럽게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는 논평으로 김영삼 대통령을 비호했다. 또 이번 발언이 지금은 우호국(?)이 되었다는 '비'우호국 된 중국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도 논란이 됐다. 정동영 대변인은 한중 우호에 악영향을 초래하고 간접적으로 외환을 불러올 수도 있는 중대한 발언이라는 것이라고 논평했고 신한국당의 김철 대변인은 반세기전의 전쟁 상황을 기준한 대통령의 발언이 어떻게 해서 현재의 한중 한러 관계에 영향을 준다는 얘기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논평을 냈다.

새정치국민회의는 김영삼 대통령이 전국민 한테 이 발언을 해명해야 한다고 촉구했고 신한국당은 당시 공산당을 제외한 대다수 국민이 맥아더의 주장을 지지했으며 지금도 대다수 국민들이 그대로 했다면 통일이 됐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면서 국민회의가 6.25에 대한 기본적 이해도 결여되어있을 뿐 아니라 어느쪽 안보를 지키려는 정당인지 의심이 들 정도라고 반박했다.[23][24][25]

4.3. 종교[편집]

김영삼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일찍이 할아버지 김동옥의 대에 장로회를 받아들이고 대대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1975년 손세일과의 접견에서 국민이면 누구나 모든 문제에 참여해야 된다며, 종교인의 현실 참여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피력하였다. 그런데 그 방법을 어디까지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한정하였다. 2015년 그의 사후에도 종교적 예식에 맞추어 장례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5. 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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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기타[편집]

  • 정치 인생의 대부분을 박정희 - 전두환 등 군사 독재 정권과 맞서 싸우는 일에 써왔던 인물이라 그런지 육사군인들에 대한 반감이 심했던 것 같다. 대통령 퇴임 후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육사는 공부도 안 하고 사람 죽이는 것만 배우는 집단"이라고 하거나, 심지어는 "육사는 바보들의 모임"이라는 등 과격한 발언들을 아끼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과 인터뷰 영상은 다음 영상으로. #
  • 서법에 따르지 않고 나름대로 독창적인 글씨체를 구사했다고 한다. ‘大道無門’(대도무문)은 그의 필체 특징을 잘 보여주는데 붓만 왔다 갔다 한 듯 필획이 약하다는 평. 여백을 거의 두지 않고 굵은 체로 종이 전체를 메우고 있는 것에서 ‘통 큰’ 사람임을 드러낸다고 한다. 또한 글씨 속도가 매우 빠른 편이라 실제로도 일을 빠르게 결정하고 좌고우면하지 않았을 성격으로 보인다고. 글씨의 기교가 거의 없고 정확한 정사각형 형태로 쓰고 있는 것은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고 올곧은 사람임을 드러낸다는 분석이다. 나름 마니아층이 있어서 그의 글씨는 한 점당 300~400만 원까지 꾸준히 경매에 낙찰된다고 한다. 최고 기록은 560만 원.
  • 단식 투쟁 하던 시기와 관련해 김영삼 보름달 사건이라는 유명한 도시전설이 전해진다. 그리고 보름달 사건보단 유명하진 않지만 또 도시전설이 있는데 노태우 대통령 시절 김영삼이 노태우의 집무실에 쳐들어와서 막말을 퍼부었다는 소문이 정가에 암암리에 퍼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노태우 전 대통령은 회고록을 통해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한 바가 있다.
  • 퇴임 후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총 5번 대만을 찾았다. 대만을 방문하여 천수이볜 당시 총통과 면담하고 대학에서 강연을 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그의 대만 방문은 단순한 외유일 뿐만 아니라 1992년 단교 이후 끊겼던 한국-대만 직항을 되살리고자 한 것이기도 했는데관련 기사 이는 2004년에 성사되었다. 중국은 김영삼의 대만 방문에 불편한 기색을 보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관련 기사
  • 김영삼의 아버지 김홍조(金洪祚, 1911~2008, 향년 97세)와 김영삼 본인(향년 89세)은 모두 80이 넘게 살았다. 유일하게 아버지가 아들의 대통령 취임식을 본 사례다. 김태향(金泰香, 1910~1999, 향년 89세, 노태우의 어머니), 강한옥(姜韓玉, 1928~2019, 문재인의 어머니)은 어머니가 아들의 대통령 취임식을 본 사례다. 매일 아침 조깅과 배드민턴을 하면서 젊은이 같은 건강함, 활력을 유지하였으며, 대통령 시절 국빈이 방문해서 청와대에 머물면 같이 조깅을 하기도 했다. 지미 카터빌 클린턴도 예외는 아니었다. 민주화 투쟁을 하던 80년대에는 가택 연금 해제 후 민주 산악회를 조직해, 민주화 동지들이 건강을 유지하고 뜻을 모으는데도 도움되는 일석이조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26] 이런 철저한 관리 덕분에 단식 투쟁 후에도 회복이 빠른 편이었으며 만 88세까지 장수하였다.[27] 김영삼은 생전에 질산 테러 및 조폭, 경찰들과 부딪히며 위험한 고비를 수차례 넘겼으나, 심적으로 움츠러들지 않고 다음날 김대중과 함께 국회에 등원해 여권의 잘못을 지적하는 배짱을 발하였는데, 이러한 기백 저변에는 타고난 건강 체질 + 철저한 관리 + 용기가 있었던 것.
  • 선친 김홍조는 거제도에서 멸치 어업을 했다.[28] 그냥 동네 어민 수준이 아니라, 어선 수십여 척에 멸치 가공 공장을 여러 개 갖춘 업계의 큰손이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김영삼은 야당 정치인 시절부터 주요 정치인들과 재야민주화운동가들에게 명절때마다 꾸준히 멸치 박스를 선물로 보냈다. 이때문에 정치인과 재야인사들 중에 YS 멸치 혹은 민주멸치를 받은 사람이 허다했다. 김종필이 김영삼을 조문하면서 이 멸치 박스 이야기를 언급했는데, 김영삼은 여당, 야당, 정치적 대립 관계 여부를 신경 쓰지 않고 설 선물로 멸치를 보냈다고 한다. 지금도 깨끗한 멸치는 귀한 선물이지만 당시엔 꽤나 이색적인 선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김영삼 재임 시절인 1995년에는 멸치 가격이 급등해서 큰 난리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당시에는 '김영삼이 아버지 돈 벌게 해주려고 멸치값을 올렸다'라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물론 이 멸치값 급등 자체는 김영삼과는 무관하고, 실제로는 씨프린스호 기름유출 사고 등으로 멸치 어획량이 크게 감소한 탓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야당에서는 정부의 물가정책을 질타하고, 김영삼 정부에서 긴급 대책 자료를 만들고 멸치를 긴급 수입하는 등의 소동이 있었다.
  • 박근혜와 함께 금수저 출신 대통령으로 자주 언급된다. 바꿔 말하면 한국에선 부잣집 출신 대통령은 이 둘뿐이고 나머지 대통령들은 전부 가난 속에서 태어났다. 물론 이 시기에 잘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했던 것도 이유지만. 거기다 유일한 서울대학교 출신이기도 하다. 이런 부유한 집안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학생 때 전쟁에 징병되어 군복무를 수행했다. 더군다나 김영삼은 집안의 하나뿐인 아들이였다. 집안의 대를 이어줄 아들을 낳는데 집착했던 과거에 외동아들이 군대에 끌려간다는 것은 부모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같은 일이었을 것이다.[29] 또한 가진 돈도 다 털어붓고 목숨 걸고 민주화 운동을 했기에 금수저에 대한 반감이 강한 유권자들에게도 인정받았다. 더구나 김영삼 본인은 부잣집에서 살아서 그런지 오히려 비리를 저지른 적도 없고 재산도 깔끔하게 공개했었다.
  • 김영삼이 빌 클린턴을 두 번째로 만났을 때 대뜸 "Who are you!"(너 누구야!) 라고 인사를 건넸다. 화들짝 놀란 통역관이 대통령이 "How are you?"(잘 지냈어?)를 잘못 말한 줄 알고 정정했는데 나중에 왜 그러셨냐고 물어보니 경상도에선 반가운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면 "이게 누꼬?" 라고 인사한다며 그래서 Who are you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30] 그러나 통역관이 영남 방언을 모르자 "배아라(배워라)"라고 돌직구를 날리기도 했다. 그 외에도 YS 관련 유머를 보면 이 영남 방언과 관련된 유머가 많으며 실제 사례도 적지 않다.
  • YS 시리즈 내용 中에 김영삼 대통령이 재임 시절 빌 클린턴과 만나서 빌이 "I'm Hillary's husband." 라고 하자, 김영삼이 그걸 'nice to meet you' 비스무리한 인사말로 알아듣고 "Me too." (사실은 nice to meet you too 또는 you too 라고 해야 맞은 문법) 라고 답변했다는 유머가 있다. 한때 이 일화가 사실인 것처럼 항간에 퍼졌지만, 사실 이건 일본의 전 총리 모리 요시로의 일화를 차용한 것이다. 나중에 일본 모리 요시로 총리의 일화가 구설수에 오르자, 일본 측 관계자들은 "한국의 어느 대통령의 일화가 와전된 것."이라 해명하려 했다고 한다.
  • 생전에 칼국수를 매우 좋아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칼국수 집 단골이었다. 단골 국숫집으로 알려진 모 점포에 매년 연하장을 보낼 만큼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2013년 뇌졸중 증세가 악화되기 직전에는 고생 많이 했다고 따로 돈을 주고 갔는데, 이게 마지막 만남이었다고. 대통령 재직 당시에도 칼국수가 청와대 주력 메뉴로 완전히 자리잡은 바 있었다. 이 시절 청와대에 초청받은 손님들은 꼭 칼국수를 대접받았으며, 이에 대해 면을 싫어하는 사람은 초청받기를 질색했고, 또 국수의 특성상 먹어도 배가 빨리 꺼지기 때문에 YS와 함께 칼국수를 먹었던 사람들 중에는 식사가 끝나면 몰래 다른 식당에 가서 또 식사를 한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는 후문이 전해지기도.[31] 나중에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곰탕을 메뉴로 내놓은 부분을 이와 관련해서 개그로 연결시키기도 했다. "청와대에서 칼국수 먹고 나온 사람들은 다 배고파서 곰탕집에 모여서 2차를 했는데, 그런 일이 없도록 곰탕을 차렸습니다!" 라고 페북에 적은 것. 이러나저러나 당시를 겪은 사람들에게는 감회가 남다른 듯도 하다.

    김영삼 관련 유머에도 칼국수가 단골로 등장한다. 당시 유행하던 김영삼 시리즈에는 칼국수 관련 유머가 하나씩은 들어 있었다. 임기 말에 터진 IMF 사태로 인해 인기가 바닥을 찍었을 땐 '먹으면 먹을수록 머리가 나빠지는 음식'이라는 조롱도 돈 적이 있었다. <고바우 영감> 만평에서 자꾸 먹으면 머리가 나빠진다면서 '4년 동안의 임상 실험 결과'라고 확인사살을 하는 장면이 나올 정도. 원래 김영삼은 서울대 출신이지만 머리 나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보니 더더욱 그랬다. 칼국수 애호에 대해서도 '일부러 청렴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조작한 거 아니냐'라는 비난도 없지 않았다. 물론 이런 이미지 구축의 의도가 없지는 않았겠지만 김영삼이 칼국수를 좋아한 것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김영삼의 단골 칼국수 식당들마다 김영삼이 남긴 휘호나 기념사진들이 걸려 있을 정도. 다만 김영삼이 생전에 가장 즐겼던 칼국수멸치 육수나 바지락으로 국물을 낸 해물 칼국수가 아니라 쇠고기사골 육수로 끓인 형태의 안동식 칼국수, 일명 안동국시로, 시중에서 먹으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해물 칼국수에 비해 좀 더 비싼 물건이다. 그렇다고 아주 사치스러운 음식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고, 보통 서울 시내의 매장에서 한 그릇에 1만 원 안팎 수준으로 판매하는 편이니 일반인들도 쉽게 먹을 만한 가격대이다. 즉 일반인들이 먹는 음식 중에서 좀 비싼 물건 정도. # 따라서 결론을 내리자면 '이미지 메이킹을 할 필요가 있었는데 마침 좋은 소재가 김영삼 본인에게 있었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스케일은 다르지만, 이명박은 배고픕니다를 비롯한 각종 이명박의 먹방처럼 이해하면 될 듯 하다.

    당시 청와대칼국수 대접에 대해 정치적인 전략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는데, 3당 합당 이전까지는 김영삼을 열렬히 지지했다고 밝힌 시사평론가 이동형은 팟캐스트 이이제이 김영삼 편에서 "김영삼은 거제시의 아버지 선단에서 잡은 멸치를 자주 선물로 보냈다. 멸치라는 게 금방 먹는 것도 아니고 두고두고 먹는 식재료이기 때문에 선물받은 사람은 먹을 때마다 YS를 생각하게 된다. 칼국수 육수 또한 멸치로 우려내는 것이기 때문에 같은 이유에서 해석할 수도 있다"는 의견을 낸 바 있다. 다만 YS 임기 당시 청와대에서 나왔던 칼국수는 당연히 평소 대통령이 선호하는 안동식 칼국수, 즉 '육수를 멸치로 우려내지 않은 칼국수'였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진짜 저런 의도가 있었을지는 미지수.

    김영삼 대통령이 단골로 찾아 안동국시를 즐겼던 곳 중 한 곳인 성북구 성북동의 '국시집'이라는 음식점은 역사성을 인정받아 김영삼 사후 한 달 뒤인 2015년 12월에 서울특별시 미래유산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기사 그 외에도 서민 음식을 많이 좋아했다고 하며 설렁탕을 먹는 사진이 사후 포털에 올라온 적도 있었다. 신사동에 위치한 '봉희설렁탕'(새절역 인근)이라는 음식점 역시 김영삼 대통령의 단골 식당 중 한 곳이었다고 한다.

    김영삼이 칼국수를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을 때 당시의 대학가에서는 YS를 폄하할 때 칼국수가 아니라 차라리 보름달빵을 먹으라는 대자보가 돌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올림픽 탁구 금메달리스트이자 김영삼의 정적이었던 박철언의 처제이기도 한 현정화인터뷰에서 "땀 흘려 뛰고 온 운동 선수들한테 칼국수가 뭡니까?"라고 까기도 했다.
  • 그의 딸 김혜영(김현철의 누나)이 배우 이덕화와 국민학교 6학년때 같은 반이었다. 이덕화에게 김영삼은 친구의 아버지인 셈. 그 인연으로 이덕화는 1992년 대선 때 김영삼을 공개 지지하기도 했고 유세에도 참여했으며, 1996년 총선에 출마하기도 했지만 남궁진과 맞붙어 단 1,400여 표 차이라는 아주 근소한 차이로 낙선하였다. 이때 선거자금으로 돈 엄청 까먹었다고. 이 때의 경험이 상당히 뼈아팠는지 이후 이덕화는 단순한 지지 선언 정도를 제외하면 정계에는 관여하지 않고 있다. 헌데 공교롭게도 이덕화는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김영삼의 평생의 숙적 중 한 사람인 전두환 역할을 맡았다.
  • 김영삼이 평소 가장 아꼈던 차남 김현철은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고,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출마한다는 설이 돌았으며 본인이 2014년 하반기 재보궐 출마를 시사한 적도 있으나 성사되진 못했다. 원래 무소속이었다 한나라당 소속으로 거제시 지역구에 여러차례 출마하려 했으나, 과거 구속 전례 등 공천받기엔 워낙 여건이 좋지 않아 공천을 못 받았고 2012년에도 새누리당 소속으로 공천받지 못하자 당을 탈당했다. 당초 2016년 총선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출마할 가능성이 점쳐졌고, 이에 대해 구체적인 기사도 나왔으나, 부친의 사망 후 충격 때문에 정치 활동을 중단하고 부친의 기념사업에 전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제19대 대통령 선거 때에 김현철은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고 그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또한, 더불어민주당에도 입당하면서 현재는 더불어민주당 소속 당원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돌아가신 아버님의 뜻과 다르다"며 이후 탈당했다.
  • 관공서 대통령 사진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에 대한 경칭인 '각하'가 쓰인 마지막 대통령이기도 하다. 역시 김대중 대통령부터 '대통령님'이란 호칭으로 바뀌었다.[33]
  • 상도동에 장기간 거주했다. 김영삼계를 지칭하는 상도동계라는 명칭도 여기서 비롯됐다. 1960년대에는 상도동이 영등포구에 속해 있어서 영등포구로 주민 등록이 되어 있다가 1973년, 관악구가 영등포구에서 분구되고 상도동도 관악구에 편입되면서 관악구로 주민등록이 이전되었다가 1980년, 동작구가 관악구에서 또 분구되고 상도동도 동작구로 편입된 이후 별세할 때까지 동작구로 주민등록이 되어있었다.
  • 김두한 의원과 같은 시기에 정치 생활을 했고 그와 같은 당이었던 적도(자유당, 신민당)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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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쪽에서 첫 번째가 김두한, 두 번째가 김영삼.
    야인시대에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등장했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김두한이 3김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궁금해하기도 했다.[34] 위의 사진은 국회의원 야구대회 사진이고, 김영삼이 나중에 퇴임 후 2010년대에 김두한 이야기를 인터뷰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야인시대에서 나왔던 것처럼 김두한은 부하들 끼니를 챙겨주고자 김영삼을 포함한 동료 의원들에게 돈을 빌리곤 했고, 김영삼은 김두한을 '머리랑 언변은 좋은데 글은 못 읽는 사람' 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김두한 의원은 자신에게 온 편지들을 읽을 줄을 몰라 김영삼을 찾아와서 좀 읽어달라고 한 적도 많았다고 하는데, 이는 평소 김두한에게 "이렇게 작고 예쁜 손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느냐?"며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는 김영삼에게 호감을 느낀 김두한이 YS를 만나고자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
  • 인재를 판단하는 통찰력 및 안목이라는 혜안 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고, 동지이자 맞수인 김대중보다 이 방면에서는 한 수 위였다. 3김이 한국 정치 무대에서 퇴장한 뒤 한국 정치를 좌우해온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김영삼의 손을 잡고 정계로 들어온 사람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노무현이명박. 또한 이회창, 손학규, 이재오, 정의화, 김영춘, 박형준, 안희정, 최기선, 박재호[35] 등의 인재를 발굴해 내었는데, 알다시피 노무현과 이명박은 대통령까지 되어 나름대로의 치적을 남겼고, 이회창 또한 3 대선에서 존재감을 보였으며, 손학규 또한 경기도지사와 민주당 당대표를 역임했다. 이재오는 이명박 정부 시절 이명박의 왼팔 역할을 했고, 정의화는 18대 국회에서 부의장을, 19대 국회에서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안희정 또한 노무현의 측근에서 노무현을 보좌하다가 이후 충남지사가 됐으며, 민주당의 유력 대선 주자로 떠오르기도 했다. 김영춘 역시 문재인 정부에서 해수부 장관직을 수행하였다. 최기선도 인천시장을 두번이나 역임했다. 박재호는 3전 4기 끝에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현재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당시 변호사였던 문재인박원순의 발탁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당시엔 이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어 김영삼의 영입 제안을 거절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도 나중에 대통령과 서울시장이 되면서 정치적 거물이 되었다.
  • 이명박 정부 시절 이명박이 정운찬을 국무총리로 임명하면서 중용했는데, 이 시기에 정운찬과도 상당히 친해졌다.
  • 5공 때 가택연금을 당하던 시절 상도동 옆집에 살던 당시 국민학생인 이규희와 친해졌다. 당시 10살이던 이규희씨는 운동 중인 김영삼에게 인사하고, 김영삼이 나올 수 없으니 이규희가 놀러 가며 김영삼이 이규희를 '꼬미동지'라 부르고 자신은 '대장동지'라 하며 친해졌다. 이규희가 부모님이 해준 음식을 들고 가기도 하고, 김영삼도 아버지 김홍조 옹이 보낸 멸치를 나눠주기도 했다. 서슬퍼른 5공 경찰들도 10살 꼬마는 수색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일하게 김영삼의 집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던 사람이었기에, 이를 이용해 김영삼의 편지를 숨겨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에는 이 시절 이야기들을 『꼬마동지 대장동지』라는 책으로 내고, 이 때 인세로 심장병에 걸린 어린이의 수술을 도왔다. 결혼 후 한 때 미국으로 떠났다 상도동의 그 집으로 돌아오고, 어머니가 되어 아들을 데리고 김영삼을 만나기도 하고, 김영삼 서거 후 빈소도 방문하였다.[36] 관련기사
  • 상기했던 2003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일본에 대한 감정과는 별개로, 통역 없이 일본어로 인터뷰를 진행했을 정도로 일본어 실력이 뛰어나다. 하긴 김영삼이 태어날 당시의 시대를 생각해 보면 이상할 것은 없다[37]. 처음에는 약간 머뭇거리는 듯한 말투였으나, 인터뷰가 진행될 수록 특히 전두환을 까는 부분에선 예전의 감을 찾아가는지 현지인과 별 다를 것 없는 인토네이션을 보인다.

6.1. 그의 인기[편집]

집권 초[38]반에는 하나회 숙청, 금융실명제 도입, 부정 부패 사정[39] 및 공직자 재산 공개 제도화[40] 등으로 초반 지지율이 90%를 상회했었다. 이러다보니 집권 첫 해인 1993년에는 방송국 코미디 프로에서 뜬금없이 도우미 복장[41]을 한 김영삼 대통령 캐릭터가 등장하기도 했다.[42]

덕분에 그를 소재로 한 유머집 YS는 못말려도 발간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원래 이 'YS는 못말려' 시리즈는 유머 1번지 작가 출신인 장덕균이 세간에 떠돌던 유머를 모으고 그 자신도 여러 개를 창작하여 1993년 대전 엑스포에 맞추어 펴낸 것이다. 상단 사진의 2권은 장덕균이 아닌 다른 편집자가 PC통신 유머를 끌어모아 엮어낸 것. 저자의 말로는 노태우 정권 당시 노태우를 주인공으로 한 풍자 유머집을 냈다가 안기부에 끌려가서 심문을 당했다고 한다. 고문이나 밤샘 조사 같은건 없었지만, 출판사까지 압력이 들어가서 광고도 못하고 증쇄도 못했다고 한다. 그와 관련된 여러 유머 시리즈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다시 회자되기도 했다.

김영삼을 주인공으로 한 무협소설도 나왔다. 그것도 팬픽처럼 대충 쓴 게 아니라 무협 1세대 작가 중 손꼽히는 사마달이 쓴 작품으로 전 12권 분량의 대하소설이다. 대도무문 문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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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심지어 PC용 게임(메인 게임은 퍼즐, 보스전은 대전 액션 게임형식...이라기엔 스트리트 파이터 2를 베낀 수준)까지 등장할 정도였으니...

물론 단순히 인기가 많았기 때문만은 아니고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언론 등을 압박하던 이전 정부들과는 다르다면서 김영삼 본인이 자신을 소재로 한 풍자작품등을 만드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농담이 아니라 이전 정권까지만해도 풍자 한번 잘못하면 코렁탕을 먹을 수 있던 시대였기도 했고. 전임인 노태우 역시 자신의 풍자를 허용해서 여기저기서 노태우를 풍자하거나 하는 모습은 볼 수 있었다. (물태우라는 별명이 대놓고 쓰이는 등..) 그러나 노태우 역시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고, 당시는 민주주의 공화정 체제가 시작되긴 했지만 하나회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등... 전두환과 달리 자신을 비판했다고 잡아가서 고문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노태우 정권 때도 심한 풍자를 할 경우 데려가서 심문하거나 하는 경우는 있었다고 한다. 김형곤 문서의 방귀개그 문단으로.

다만 'YS는 못말려'를 비롯하여 당시 나온 풍자작품들의 경우 김영삼을 희화화하기는 했지만 대부분 호의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고, 김영삼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내용은 찾아보기 어렵다. 위 대도무문만 해도 사상 초유의 가상정치무협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왔지만 주인공 곡운성(김영삼을 모티브로 한 인물)은 부정적인 면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인간형이다. 이런 점은 시대적 한계로 볼 수도 있다.

IMF 사태 이후로 시간이 많이 흐르면서 평가가 많이 올라온 편이다. 민주당과 보수정당 사이에 걸친 애매한 행보때문에 과거에는 민주당계에게는 보수 대통령, 보수세력에게는 진보 대통령이라고 비난받았지만 최근에는 오히려 그때문에 민주당계와 보수정당 양쪽에서 진영논리에 얽히지 않고 평가받는 추세다.

6.2. 한자 선호파[편집]

한글로만 된 신문은 읽지도 않아요.[43]
- 월간조선 2001년 2월호 내용 중 조갑제 편집장과의 상도동 사저 인터뷰에서
사적으로 한자 선호자로 알려져 있어서 항상 친필 사인에도 한글 대신 한자로 사인을 하는 편이다.[44] 하도 많이 뿌려대서 '영삼시계'란 별명을 갖고 있는 청와대 기념품 시계에도 김영삼은 한자로 사인했고 이 사인이 널리 알려져 있다. 또 신문을 읽을 때도 한글로 된 신문은 보지도 읽지도 않는다고 조갑제 인터뷰에서 밝혔다.[45]

또한 퇴임 후에도 한자교육은 국민들의 인식능력이 향상된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면서, 한자 선호에 대한 애정과 자신감을 보이기도 하였고, 한자교육 강연회에도 곧잘 참석하는 행보를 보이기도 하였다. 다만 같이 3김으로 묶여있던 김대중김종필도 평소에 국한문혼용체로 글을 썼던것을 보면 사상이나 신념의 문제라기보다는 신문이나 잡지에서 국한문혼용체를 쓰던것이 당연시되었던 시대에 정치활동을 한데다가, 사회전반적으로도 한문학 지식을 가진 인재를 높게 평가하던 시절에 교육받고 활동했던지라 그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것이 타당할것이다. 즉, 세대차인 것.

6.3. 인재 발굴[편집]

1968년에는 정치학을 지망하던 서석재를 발탁하여 자신의 비서로 채용하여 정계에 입문시켰고 1970년에는 서울대학교 운동권 출신 김덕룡을 발굴하여 정계에 데뷔시켰다. 1971년 유신 선포 이후에는 김동영, 최형우도 측근으로 발탁하였다. 이들은 김영삼의 최측근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김동영과 최형우의 활동은 두드러져 '좌동영 우형우'라는 별칭이 생겼다. 그의 휘하에는 수많은 반군정, 반독재 성향의 정치 지망생들이 모였다. 대표적인 현재 상도동계 현역 정치인으로는 김무성, 김영춘, 정병국 등이 있다.

1988년에는 인권 변호사로 이름이 알려지던 노무현을 발탁하여 정계에 입문시켰고, 안희정 또한 김영삼 측의 통일민주당 보좌관으로 근무했었다. 문재인도 김영삼에 의해 영입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과 3당 야합을 하는 과정에서, 노무현과 안희정은 김영삼과 갈라섰다. 1993년에 권좌를 차지한 뒤부터는, 이명박이재오, 손학규[46]를 비롯한 여러 사람을 민주자유당에 넣었다. 홍준표, 이인제, 홍사덕처럼 굵직한 사람이 많다. 지금 이미지와 달리 홍준표도 당시에는 민주화 투사들과 친했던 검사였고, 이인제도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던 사람이었다. 위에 언급했다시피, YS키즈라고 분류되는 인재들 중 김영삼 대통령 이후 정계 및 정계 계파에 큰 영향을 끼친 인재들을 상당수 발탁해냈고, 현재도 호평을 받는 인물을 많이 발굴했다.

6.4. 각종 타이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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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규하 이후 15년만에 등장한 민간인 출신 대통령
  • 삼김 중에 최초의 대통령
  • 역대 최다선 국회의원(9선)[48]
  •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만 25세 5개월)
  • 정계 입문부터 대통령 당선까지 최장기간[49]
  • 최초로 대선 낙선 이후 당선된 대통령
  • 최초로 동향인 영부인을 둔 대통령[50][51]
  • 가장 많은 당적으로 선거에 당선된 대통령[52]
  • 최초로 전임자보다 연장자인 대통령[53]
  • 유일하게 임기 후에 부친상을 당한 대통령
  • 유일한 서울대학교 출신 대통령
  • 최초로 군내 사조직의 영향력을 실각시킨 문민 출신 대통령[54]

7. 어록[편집]

YS는 특유의 거침없는 성격과 직설적 화법으로 유명했다. 거물 정치인 치고 YS에게 비판받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 언론 등에서 언급된 주요 어록을 정리. 위의 일생 파트에서 언급이 된 어록들도 존재한다.
어제 한잠도 자지 못하고 여러가지 정신적으로 피로합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 김영삼이가 목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55] 바른 길, 정의에 입각한 일, 진리를 위한 길, 자유를 위하는 일이면 싸우렵니다. 싸우다가 쓰러질지언정 싸우렵니다.
ㅡ 1969년 6월 23일 초산테러 당시 국회연설 中
ㅡ 1979년 10월 4일, 국회의원 제명 직후
"아주 악재만 아니면, 정치인이 언론에 다양하게 노출되는 게 나쁜 일만은 아니다."
ㅡ 야당 총재시절, 여권에서 일부 언론을 통해 공격을 시도하자 했던 말. 여기에 그치지 않고 기자들과 자주 모임을 가지면서 이야기를 화통하게 경청, 이들 대부분을 우군으로 끌어들이는 수완을 발휘한다. 훗날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장이 "YS를 대통령으로 만든건 언론"(16:24초부터)이라 평했을만큼 YS의 친화력이 십분 발휘된 것.
나를 해외로 보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나를 시체로 만든 뒤에 해외로 부치면 된다.
ㅡ 1983년 5월 29일,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 단식농성 후
날 감금할 수는 있어. 힘으로. 이런 식으로 힘으로 막을 수는 있어. 그러나 내가 가려고 하는 민주주의의 길은 말이야. 내 양심은, 마음은 전두환이가 뺏지를 못해!영상
ㅡ 1985년 2월 8일 상도동 자택 앞에서[56]
선거혁명을 통한 민주화가 내 지론이었으나, 이 정권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젯밤과 오늘 내내 생각한 끝에 이 정권을 완전히 타도할 것을 결심했다. 나는 박정희 정권을 타도시킨 사람이다. 기필코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타도할 것이다.
ㅡ 1987년 대통령 선거 직후 기자회견에서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
3당 합당
오늘 탄생되는 정부는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불타는 열망과 거룩한 희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ㅡ 취임사 中
우리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우리가 먼저 깨끗해져야 한다. 우리가 먼저 고통을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 나는 대통령인 나 자신이 솔선해야 한다는 각오 아래 오늘 나의 재산을 공개하는 바이다.
ㅡ 93년 첫 국무회의 中, 이후 공직자 재산공개 시행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릴 수밖에 없다.[57]
하나회 척결시 반발에 일침을 놓으며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금융실명제 긴급 명령 담화문 中
그래서 이번에 그 버르장머리를 기어이 고쳐놔야겠다.
ㅡ 1995년 한 중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 일본 정치인의 거듭된 망언을 언급하며 영상
이에 일본에서는 '버르장머리'라는 한국어 단어 자체가 해석이 안 돼서 당황했었다는 후문이 있다.
공산당을 닮아가는 것이 김대중 정권.''' '"독재자 김대중씨가 벌인 내각제 사기극에 준엄한 심판이 있을 것."'
"부익부 빈익빈,정경유착의 왜곡된 경제구조와 오늘의 경제위기도 박정희의 잘못된 정책에 기인한바가 크다"

나도 전에(제3공화국) 초산테러 등 테러를 많이 받은 사람이라 이번 일에 큰 충격을 받았다.
ㅡ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테러를 당하자 문병을 간 자리에서[58]
만약 내가 하나회를 깨끗이 청산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다.[59]
ㅡ 2008년 우석대 초청 강연 中
"나는 경제 걱정을 했는데 부총리가 별 문제 없다고 말해서..", "김대중 전대통령에게 imf의 65%의 책임이 있다"
김대중 대통령하고 나하고 관계는 6대 국회부터 동지적인 관계에 있었고, 오랜 동지적인 관계로 있었지만, 경쟁 관계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입니다. (기자들이 두 분이 화해한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냐고 묻자) 그렇게 봐도 좋죠. 이제 그럴 때가 된 것도 아닙니까?
ㅡ 2009년 8월 10일, 병상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문병하며[60]
전두환이는 왜 불렀노. 대통령도 아니데이. 죽어도 국립묘지도 못 간다.
ㅡ2010년 이명박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들을 청와대에 초청한 자리에서.
이어진 오찬에서 전두환이 와인을 찾자, "청와대에 술 먹으로 왔나?"라면서 다시 한 번 면박을 주었다고. 이에 화가 난 전두환은 일찍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김영삼 특유의 깡따구와 함께, 재임 중 5.18 특별법을 제정하여 전두환을 단죄하였으며 퇴임 이후에도 결코 학살과 군사독재의 수괴를 용서할 수 없다는 스탠스가 잘 드러나는 대목.
그건 사자도 아니다. 칠푼이다.
ㅡ2012년 상도동 자택을 예방한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를 만난 자리에서.
정치도, 대통령도 그 모두가 인간이 되고 난 뒤의 일입니다. 먼저 인간이 돼야 합니다. 2007년 발언. 출처 15.11.22 사망일 SBS 뉴스
헵상은 겔렐되었다.[61]
1987년 6월 24일, 전두환 대통령과 회담을 가진 후 했던 말.
김영삼이 어떤 인물인가를 단적으로 가장 잘 보여준 말이다.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였던 김영삼은 전두환과 회담을 가지며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후 문을 박차고 나오며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로 저런 말을 했다고. 이에 대해선 유시민 작가의 '나의 한국현대사'에 나와있다.
통합과 화합
김영삼 대통령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 사실상의 유언. 아들 김현철이 무슨 뜻이냐고 묻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6.25 당시에 만주를 폭격했으면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62] (1996년 6월 24일 중부전선 시찰 당시 발언.)

8. 가족 관계[편집]

  • 아버지 : 김홍조 (1911년 ~ 2008년)
  • 어머니 : 박부련 (1907년 ~ 1960년) [63]
    • 여동생 : 김호금 (1932년 ~ )
      • 매제 : 김상기 (1925년 ~ 2003년)
    • 여동생 : 김호아 (1934년 ~ )
      • 매제 : 김영모
    • 여동생 : 김호임 (1936년 ~ )
      • 매제 : 김상한 (1934년 ~ )
    • 여동생 : 김두선 (1938년 ~ )
      • 매제 : 최영욱 (1933년 ~ )
    • 여동생 : 김두아 (1940년 ~ )
      • 매제 : 김창원 (1936년 ~ )
  • 배우자 : 손명순 (1929년 ~ )
    • 장녀 : 김혜영 (1952년 ~ )[64]
      • 사위 : 이창해 (1948년 ~ )
    • 차녀 : 김혜정 (1954년 ~ )
      • 사위 : 송영석 (1950년 ~ )
    • 장남 : 김은철 (1956년 ~ )
      • 며느리 : 황경미 (1958년 ~ )
    • 차남 : 김현철 (1959년 ~ )
      • 며느리 : 김정현[65] (1960년 ~ )
    • 3녀 : 김혜숙 (1961년~ )
      • 사위 : 이병로 (1959년 ~ )
    • 3남(혼외자) : 김상만[66] (1959년 ~ )

9. 대중 매체에서[편집]

한국 현대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인데다가 민주화 개막 이후 첫 민간인 대통령이다보니 대중매체에서의 등장도 비교적 잦은 편이었다. 다만 대부분의 작품이 제1공화국이나 군사정권이 배경이라 야당 정치인으로 등장한다. 짧게 나마 대통령으로 등장한 작품은 제5공화국[67] 국가부도의 날.

영상물에서는 길용우가 김영삼 역할을 독보적으로 많이 맡았다. 제2공화국, 제3공화국, 삼김시대에서 3번 김영삼 역을 맡았으며, 특유의 능란한 연기를 잘 살렸다는 평이다. 제4공화국에서는 임동진, 제5공화국에서는 김용건이 맡았다. 드라마 코리아게이트에서는 이영하가 맡았다. 무풍지대에 나온 젊은 김영삼은 이인철이, 야인시대영웅시대에 나온 젊은 김영삼은 성우 정우석[68]이 맡았다. MBC 라디오 드라마 격동 50년에서는 탁재인이상훈이 맡았다.[69]

파일:KimYS.jpg
(길용우가 연기한 김영삼)
파일:KimYS-Y.jpg
(정명준이 연기한 김영삼)
파일:KimYS-5.jpg
(김용건이 연기한 김영삼)

10. 수상 내역[편집]

  • 1993년 해리먼 민주주의상
  • 1994년 비폭력평화상
  • 1995년 UN협회 세계지도자상
  • 1995년 마틴 루터 킹센터 비폭력평화상
  • 1996년 제1회 루스벨트 국제장애인상
  • 2011년 제3회 대한민국법률대상 입법부문

11.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54
경남 23
20,770 (44.77%)
당선 (1위)
초선[72]
1958
경남 2
18,862 (42.98%)
낙선 (2위)
1960
경남 2[74]
29,754 (66.87%)
당선 (1위)
재선[75]
1963
부산 3
39,946 (41.7%)
3선
1967
61,957 (59.23%)
4선
1971
74,589 (63.17%)
5선[76]
1973
부산 2
83,661 (40.4%)
6선[77]
1978
137,826 (53.77%)
7선[78]
1987
대한민국
6,337,581 (28.03%)
낙선 (2위)
1988
부산 서
72,599 (66.48%)
당선 (1위)
8선[79]
1992
전국구
7,923,718 (38.5%)
9선[80]
1992
대한민국
9,977,332 (41.96%)
역대 선거 벽보[82]
[ 펼치기 · 접기 ]
제7대 국회의원 선거벽보
제8대 국회의원 선거벽보
제9대 국회의원 선거벽보
제10대 국회의원 선거벽보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벽보
제13대 대통령 선거 선거벽보
제14대 대통령 선거 선거벽보

만 26세 5개월로 역대 최연소 의원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선거이력이 긴 것은 라이벌 DJ도 마찬가지지만, 김대중과 달리 낙선 전력이 딱 2번 뿐이다. 선거이력의 절반이 낙선인 김대중과의 엄청난 차이. 김종필과 함께 9선 의원이란 어마어마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12.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1954
정계 입문
1954 - 1955
사사오입 개헌에 대한 반발로 인한 탈당
1955 - 1960
창당
1960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1960 - 1961
창당
1961 - 1963
5·16 군사정변로 인한 정당 해산
1963 - 1965
입당
1965 - 1967
합당[83]
1967 - 1969
합당[84]
1969
자진 정당 해산
1969 - 1980
정당 재등록
1980 - 1986
정당 해산
1986 - 1987
입당
1987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1987 - 1990
창당
1990 - 1995
합당[85]
1995 - 1997
당명 변경
1997 - 2015
정계 은퇴

13. 둘러보기[편집]

[1] 일제강점기 말기 창씨개명한 일본식 이름은 '가네무라 코유(金村康右)'[2] 공식적인 생일은 1927년 12월 20일생이다. 1929년 1월 14일생이라는 설도 있는데 세간에 알려진 그의 사주에 따라 추정한 생일로 보인다.[3] 1969년부터 살았던 생전 거주지로 아버지가 사준 마지막 집이라고 한다. (상도동계의 뜻이 바로 이 집이다.)[4] 사실 김영삼의 경우는 한글 서명보다 한자 서명이 압도적으로 유명하다. 그 이유는 바로 영삼시계 때문.[5] 혼외 아들.[6] 6.25 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김영삼이 군복무를 전혀 하지 않은 것으로 잘못 아는 사람들이 많다.[7] 충현교회 장로.[8] 자신의 고향인 거제도의 巨와 부산의 山에서 한자씩 따와서 지었다고 한다.[9] 또 다른 3김 정치인의 일원이었던 김종필과는 때로는 대척점에 서있기도 하고, 같이 손을 잡고 협력관계에 있기도 했었다.[10] 2020년 21대 총선이 끝난 현재까지도 김영삼이 이 당시 기록한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27세까지는 몇 차례 있었다.)[11] 김대중이 후임 대통령이다.[12] 이러한 성격의 조사에서는 박정희,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을 제외하고 높은 지지율이 잘 집계되지 않는다. 인터넷 조사에서는 노무현이 우세하고, 실제 언론 조사에서는 박정희와 김대중이 높은 수치를 기록한다.[13] 정작 이 기록은 자신이 갱신하게된다. 김영삼은 IMF 당시 6%를 기록한 바 있으며 탄핵 정국때 박근혜는 5%로 1%p 낮다. [14] 후임인 김대중 역시 자유보수주의였다가 중도개혁주의 성향으로 바뀌었다.[15] 그러나 무장공비일 가능성은 낮다. 사건 발생 1년 뒤에 검거하였는데, 무장공비가 1년이나 체류할 이유도 없고, 사건 당시 범인들이 고작 24세의 2인조였다. 당시 정권이 민의원 김영삼을 압박하기 위해 강도사건을 간첩 사건으로 조작한 것이라 보는 견해가 많다.[16] 그러나 섣불리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 만약에 그것이 독재정권 시절의 음모였다면 김영삼 본인도 모를리 없었을 것이고 만약 냄새가 난다면 집권 당시에 수사했었을 가능성이 크다. 거기다 당시에는 냉전체제였고 이념갈등이 심화된 시기라 무장공비가 1년 동안 존속했다고 사건이 허구였다고 섣불리 판단하기는 어렵다. 당시에 독재정권들이 잡으라는 사회주의 세력만이 아니라 무고한 민간인도 많이 탄압해서 그렇지 과거에도 주사파와 종북관을 가진 세력들도 꽤 있었다.[17] 김영삼 정부가 주도적으로 북한과 대화를 시도했다고 하기보다는 1994년 미국의 카터 대통령과 북한의 김일성이 남북정상회담을 약속했고 이에 대해서 김영삼 정부도 긍정적 태도를 보인 것이다.[18] KEDO는 소위 통미봉남(코리아패싱)의 대표적 사례로 일컬어진다. KEDO는 한국을 제외한 '북미 제네바 합의'에서 도출된 것으로서, 한국의 자발적 의지없이, 비용에 대한 협상도 없이 그 사업에 막대한 비용을 청구받게 되었다. 오히려 대화가 없어서 생긴 결과라고 볼수있다. '북미 제네바 합의' 에서는 북한측에 건설에 40억 달러 이상이 필요한 100㎿ 용량의 원자력발전소 2기 건설과 산업용 중유 50만 톤 제공하기로 합의.[19] 물론, 김영삼 前 대통령 본인도 회담이 이루어지지 않아 매우 아쉬웠다고 솔직한 심정으로 SBS 녹취록에 고백했었다.[20] 김영삼대통령 한반도 평화와 남북 협력의 4대 원칙 제시[21] 기존의 북미간 핵협상(예: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에서 중국대한민국을 포함시킨 4(2+2)자간의 회담을 말한다. 미 국무장관 키신저가 제안했으며, 해당 발언 2개월전인 1996년 4월 김영삼 대통령과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은 ‘한․미 공동발표문’을 통해 4자회담 개최를 공식 제의했다.4자회담[22] 여야, 김대통령의 6.25 만주 폭격 발언 놓고 치열한 성명전[23] 김영삼 대통령의 6.25 만주폭격주장 회고 관련 안보논쟁 가열 1996.6.26 kbs뉴스[24] 김영삼 대통령 만주폭격 발언 일파만파[25] 여야 만주폭격 공방[26] 당시 중앙정보부나 안기부 등의 도청을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추측도 있다. 건물 안이나 평지에 비해 미행이 붙거나 전자 도청을 하기가 어려운 높은 산에서 정치 전략을 짜기 위해 등산을 자주 하였다는 것이다.[27] 교통사고로 무릎이 불편하게 된 DJ은 몸 운신이 비교적 편한 수영을 택했다. 또한 부인인 이희호가 헌신적으로 음식 내조를 해주었다는 후문.[28] 영화 투캅스 2에서도 이와 관련된 대화가 나온다. 이제 더 이상 대놓고 지역 유지들에게 보호세를 걷을 수 없게 되어 툴툴거리는 강형사(박중훈)를 파트너인 이형사(김보성)가 "용기를 내십쇼. 대통령도 월급받으면서 일하는 세상인데요"라 위로하자, 강형사는 "마! 대통령은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멸치어장이라도 있지"라고 되받아치고 이형사가 전혀 몰랐다는 듯이 "멸치어장이요?"라 반문하자 "넌 신문도 안 보냐?"라고 한심해하는 강형사에게 이형사는 "전 가쉽란은 안 읽습니다"라고 대꾸한다.[29] 그래서 1980년대까지는 조건(삼대독자)을 총족시켜야했지만 외동아들일 경우에는 일종의 병역특례를 받을 수 있었다.[30] 영어에도 거의 똑같은 표현이 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look who it is!" 라며 못 알아보겠다는 척을 하는 것.[31] 사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야당 총재시절 영수회담을 하면서 칼국수를 대접받았는데, 한그릇으로 성이 차지 않아 회담을 마치고 나서 돌아와 당사 지하 식당으로 내려가 혼자서 해물탕 3인분을 해치우고서야 포만감을 느꼈다고 한다. 근데 김대중도 대식가, 이명박에 가려져서 그렇지 굉장한 대식가에 미식가 기질도 상당했다. 하지만 대통령 당선 이후에는 식사량을 많이 줄인 듯.[32] 파일:김영삼 관공서사진.jpg 참고로 이 사진이 기존의 근엄하게 입을 굳게 닫은 사진에서 웃는 사진으로 바뀐 1995년 ~ 1996년경에 실제로 관공서에 걸렸던 사진이다.#[33] 원래 노태우 대통령부터 "'각하' 대신 '대통령님'이라 호칭하자"고 했지만, 김영삼 때까지 잘 지켜지지 않았다.[34] 야인시대에서는 자유당 정부 시절 젊은 YS가 유진산, 조병옥, 김두한 및 야당 의원들과 함께 원탁에 앉아 시국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다.[35] 김영춘, 박재호, 최기선은 상도동계 직계 인물이다.[36] 다만 정재계의 쟁쟁한 인사들이 모인 자리다 보니 불편해서 오래 있진 못했다고 한다.[37] 당장 삼김시대의 김영삼 뿐만 아니라 김대중, 김종필도 그 당시에 태어나서 일본어를 할 줄 안다.[38] 임기 2년 차 4분기부터는 직무수행 평가에서 긍정 비율이 30%대로 떨어진데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 후에도 41% 밖에 얻지 못했기 때문에 중반도 인기가 없었다고 봐야 한다.[39] 수십 년 동안 권위주의 독재 정권의 집권으로 사회 곳곳에 부정과 부패가 만연화되어 있던 상황이라 사회 전방위로 하루가 멀다하고 비리로 잡혀가고, 공직을 사퇴하는 기사가 1면을 장식했다. 공직자의 의심스러운 과다한 재산, 율곡 사업과 같은 방위 사업의 비리, 사행산업과 연관된 검경 등등. 이러한 부정부패 관련 기사가 1면을 차지하는 것은 9월말까지 지속된다.[40] 이전 버전에 있던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는 집권 3년차 시점이라 초기도 아니었고, 지지율도 많이 떨어진 상태라 제외한다.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시점에는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지방선거의 참패로 인기가 많이 떨어져 있던 시기이다. 갤럽 자료에 의하면 95년 3분기의 업무수행에 관한 긍정 지지율은 29%이다.해당 그래프[41] 지금은 널리 쓰이게 된 단어가 되었고 어떤 판촉행사의 행사 진행자를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지만, 도우미는 원래 93 대전엑스포 행사의 접객원으로 새로 창설한 단어였다. 방송에서 엑스포의 상징 중 하나로 굉장히 많은 홍보를 했다.[42] 참고로 이 코너가 등장한 당시 MBC 토요일 저녁 6시대의 코미디 프로그램은 후대의 무한도전-1박2일 같은 양강구도가 아니라 아예 MBC의 독주시대였다. 기본적으로 시청률 40%는 깔고 가던 시대였으니...[43]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문민정부때 신문의 순한글화가 진행되었다. 이유인 즉슨, 신문 인쇄의 전산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세로쓰기-국한문혼용체를 유지하기보다는 가로쓰기-한글전용으로 신문인쇄하는것이 비용절감에 유용한데다가 편집이 간편해지기도 하고, 한글전용 세대가 본격적으로 사회진입을 할 무렵이되면서 수요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44] 이는 정치적 라이벌인 박정희가 한자 사인을 쓰다가 한글 사인으로 바꾼 것과 대조되는 부분이다.[45] 재밌게도 조갑제는 김영삼 생전에는 '좌파숙주'라면서 김영삼을 비난했던 인물이었다. # 그러나 사망 후 조문왔을 때에는 김영삼은 독재와 싸운 챔피언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46] 이 셋은 10년 정도 이후에 노무현 정부 시절 때는 소위 한나라당의 Big4로 불리기까지 했다. 박근혜는 당시 능력과 별개로 세력이 거대했다.[47] 그리고 뒷날에 이르러서도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었다.[48] 김종필이 타이 기록을 갖고 있다.[49]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 당선 이후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까지 38년이 걸렸다.[50]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고향경상남도 통영시(現 거제시)인데, 손명순 여사의 고향 또한 경상남도 김해시로, 같은 경남 지역 출신이다.[51] 두번째는 노무현 전 대통령. 경상남도 김해시 출신이며, 아내인 권양숙 여사는 경상남도 창원시 출신으로 역시 같은 경남 지역 출신이다.[52] 6개의 당적을 가지고 총선과 대선에서 당선되었다. 6개의 당적은 문재인 대통령과 동률이지만, 문재인 대통령의 역대 당적 중에서 당선된 당적은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 2개 뿐이다.[53] 두번째는 1927년생인 전임자 김영삼 대통령보다 연장자인 1924년생 김대중 대통령. 세번째는 1946년생인 전임자 노무현 대통령보다 연장자인 1941년생 이명박 대통령.[54] 실제로 김영삼 덕분에 김현집을 제외하면 대다수 하나회 간부들이 정치적 실각을 겪고, 몇 년 뒤 알자회 출신들은 대다수가 강제 전역되어 실각했다.[55] 연설을 들어보면 끊어지는한 으로 들린다.[56] 이 날은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이후 미국의 구명으로 망명 중이던 김대중이 귀국하는 날이었고, 김영삼은 김포공항으로 김대중을 마중 나가려 했으나 이미 경찰 병력이 집을 포위하고 있었다. 그 앞에서 경찰들에게 일갈하던 중 나온 명언이다.[57] 본래는 투르크의 속담을 일부 변형한 것이다. #[58] 당사자나 어법이나, 김영삼 본인이 박근혜를 보는 시선이나 위로가 아니라 면전에서 대놓고 놀리는 수준이다.[59] 김대중이 대선에 나올 때마다 돌았던 것이 '군 김대중 비토설'이었다. 하나회가 무너진 후 치러진 97년 대선을 제외하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실제로 YS 정권 초기인 1993년에도 군 인사를 마음대로 하면서 YS 길들이기를 시도했던게 하나회였다.[60]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의식이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두 사람 생전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61] 협상은 결렬되었다.[62] 여야, 김대통령의 6.25 만주 폭격 발언 놓고 치열한 성명전[63] 박부련 사후 김홍조는 새 아내를 2번 들였다. 최남순(1925년 ~ 1971년)과 이수남 (1924년 ~ 2012년).[64] 배우 이덕화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이다.[65] 김웅세 전 롯데물산/호텔롯데 월드사업부 대표의 장녀이다.[66] 김현철보다 2일 늦게 태어났다[67] 대통령 당선자 시절 권영해와 하나회에 대해 논하는 장면, 현직대통령으로 노태우 비자금에 대처하는 장면이 나온다.[68] CJ E&M 4기 성우로, 성우 외에도 각종 촬영물에 단역으로 종종 활동했으며 정치 초년병 시절의 젊은 김영삼 역할을 맡아 특유의 말투까지 훌륭하게 재현해냈다.[69]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들 모두 YS와의 싱크로율이 제로에 가깝다.[70] 이후 같은 작가가 쓴 야인시대에서는 이기붕 역할로 출연한다.[71] 얼굴이 안 나오는 캐릭터로 딱 한 장면만, 그나마 얼굴이 나오는 부분도 초점이 흐리게 처리된다. 엔딩 크레딧에서는 YS로 표기.[72] 거제 및 통영 일대 선거구.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 (만 26세 5개월), 1955년 민주당으로 당적변경 (사사오입 개헌 반대)[73] 현재의 부산 서구[74] 민의원[75] 1961.5.16 자격정지 (5.16 군사정변)[76] 1972.10.17 자격박탈 (10월 유신)[77] 부산 서구 및 동구 일대[78] 1979.10.4 제명 (김영삼 제명 파동)[79] 1990년 민주자유당 합류 (3당합당)[80] 최다 국회의원 당선 (9선) 1992.10.13 의원직 사퇴 (대선출마)[81] 1997.11.7 신한국당 탈당[82] 제 3, 4, 5, 6대 국회의원 선거벽보는 확인 되지 않는다. 심지어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정보도서관에서 김영삼으로 검색했을 시 7대 이전의 것도 확인할 수 없다. 이는 김대중도 마찬가지.[83] 민주당과 신설 합당[84] 신한당과 신설 합당[85]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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