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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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
전두환
全斗煥 | Chun Doo-hwan
출생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現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2길 14)
자택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로27나길 11-14[3]
재임기간
제11대 대통령
제12대 대통령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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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완산 전씨 23세손 #
부모
아버지 전상우, 어머니 김점문
형제자매
형 전열환, 전규곤, 전기환
누나 전홍렬, 전명렬, 전선학
남동생 전석환, 전경환
여동생 전점학
배우자
자녀
학력
종교
신체
171cm, 66kg, B형
약칭
, DH
용성(勇星)
아호
일해(日海)
군사 경력
임관
복무
1955년 ~ 1980년
최종 계급
대장 (대한민국 육군)
주요 보직
병과
참전

1. 개요2. 상세3. 약력4. 일생5. 평가6. 추징금 환수7. 선거 이력8. 소속 정당9. 기타10. 각종 타이틀11. 다른 정치인과의 사이12. 대중매체에서13. 관련 문서14. 둘러보기


제11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 선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제11·12대 대통령.

경상남도 합천군 출생으로, 육사 11기로 입교하였다. 후에 이 기수가 주축이 되어 하나회를 결성한다. 5.16 군사정변박정희를 지지하여 박정희의 신임을 얻게 된다. 1979년 3월 계엄사령관에 임명되었는데, 10.26 사건 이후 계엄법에 의거 계엄사령관이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자동 보직되었고 이때 수사본부장이라는 직책과 하나회를 통한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잡았다. 1980년에는 5.17 내란을 일으키고 5.18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최규하 대통령을 사임시킨 후 간접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임기가 거의 만료되어갈 때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여 6.10 민주 항쟁이 일어나 국민의 불만이 점점 거세지자,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및 단임제로 개헌을 마치고 만기 퇴임하였다.

퇴임 후 1995년 노태우와 함께 구속 기소되었으며, 반란 수괴죄 및 살인, 뇌물 수수 등으로 1심 사형, 2심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10]
노태우에 이어 헌정사상 두 번째로 구속된 전직 대통령이 되었으나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선 이 둘에 대한 사면 여론이 생기면서 김대중만이 아닌 이회창, 이인제 모두 사면을 공약으로 들고나왔으며, 결국 김영삼 대통령의 결단으로 사면되었다. #1 #2[11]

2021년 기준 생존해 있는 전직 대통령 중 최고령(90세)이며, 동시에 퇴임 후 지낸 기간(33년)이 가장 긴 대통령이다.

2. 상세[편집]

전두환은 하나회 소속 대한민국의 장성이었다. 그러던 중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자 계엄법에 의거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은 10.26 사건의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았다. 이후 김재규의 궁정동 사건과 전혀 관계없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법으로 체포, 군권을 장악하고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은 서울의 봄, 5.18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집권기 동안 삼청교육대, 땡전뉴스,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평화의 댐, 형제복지원 사건,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 등 각종 반민주, 반인권적 사건이 발생하였다.

결국 6.29 선언으로 노태우 등과 함께 재판[12]에 회부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1997년 12월에 전두환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운 대선 후보들과 김영삼 정부에 의해 사면되었다. 이때문에 사면권 남용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집권하자마자 삼청교육대 등 인권 유린 사건이 줄을 이었고, 사법적 측면에서 볼 때 식민지 시기보다 엄격한 판결 및 국민 통제가 있었고 국민들에게는 가혹한 고문과 체벌 등이 일상이 되었다.[13]

박정희와 다르게 전두환은 본인이 군인 출신인 만큼 경제는 김재익전문 관료에게 맡기는 경향이 강했다. 전두환은 국보위 시절부터 유명한 경제 관료들에게 개인 과외를 받을 정도로 경제 공부에 열중했으며 당시 경제에 대해 가르쳐 준 인물 중 한 명이 김재익이다. 과외를 받으며 그의 식견에 감탄한 전두환은 김재익의 정권 참여를 권했다. 그러자 김재익은 자신이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불간섭과 외부 압력에 대한 보호를 요구했고 그러면서 나온 유명한 말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였다. 그렇게 김재익이 신고전주의 경제학을 알기 쉽게 밑그림을 그려 전두환의 머리에 넣어준 것이 전두환 집권기 내내 큰 영향을 끼쳤다. 상기한 경제의 김재익, 외교의 노신영, 이범석, 과학 기술의 오명 등.[14] 중공업 과잉 투자가 대대적으로 정리되었고 3저호황을 통해 80년대 전 세계에서 눈에 띄게 빠르고 안정적인 성장을 보였다.

그러나 김재익이 정말 온전히 "경제 대통령"이었냐면 그렇지는 않았다. 당시 박정희 정권 시기에 이루어진 중화학 공업 분야에 대한 막대한 산업 투자를 정리하는 임무가 전두환 정권에게 주어졌는데, 전두환은 김재익의 의견을 온전히 따르진 않았기 때문이다. 김재익은 농업이나 자동차 산업 포기를 외칠 정도의 안정화론자였다. 이런 김재익을 위시로 한 안정화론자들과 발전주의자들의 싸움에서 최종 결정에 관한 사항은 결국 대통령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으로 김재익은 정권 초기의 기초만 다지는 역할을 했을 뿐,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으로 인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 사공일 등 경제 보좌관들이 중용되었다. 김재익이 적극 지지한 이른바 금융실명제에 대해서 전두환도 도입 의지를 보였으나, 1977년 부가가치세 실시되어 큰 혼란 끝에 겨우 정착된 마당에,[15] 또 다시 큰 경제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정책 시행에 부담을 느낀 일부 경제 관료들과 학자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대표적인 반대론자가 그 유명한 김종인이다. 그가 전두환 앞에서 평소 친한 김재익과 설전을 벌여가며 전두환을 설득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일각에서는 자신의 비자금을 위해 시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80년대는 한국 상류층 사회의 엘리트화가 진행된 시기로 전두환은 소수의 재벌 및 상위 관료로 나라를 재편한 시기라는 평가까지 있다. 물론 실효적인 재벌 견제와 수많은 중소기업 육성책이 지원되었으나, 소위 엘리트주의와 한국에 고질적인 일류 대학교 학벌 선호 문제도 이 시기에 고착화되었다. 이러한 특권층 사회화 부작용은 다음 대통령인 노태우, 김영삼 시기에 한꺼번에 터져나와, 지존파 사건 등 이른바 유전무죄 무전유죄 사회에 대한 극단적 반감으로 이어진다.

3. 약력[편집]

4. 일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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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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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추징금 환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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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0
2,524 (100.0%)
당선 (1위)
초선[20]
1981
4,745 (90.2%)
재선[21]
  • 11대, 12대 대통령 선거는 모두 간선제로 치러졌으므로 전두환은 윤보선, 최규하와 함께 국민의 직접선거 없이 대통령에 당선된 세 사람 중 하나다. 그러나 윤보선, 최규하와 전두환의 중요한 차이점이 있는데 윤보선은 제2공화국 헌법에 따라 의원내각제 의회에서 선출하는 명목상의 국가원수였으며, 최규하는 10.26 사건 이후 박정희의 잔여 임기를 재직하고 정권을 정상적으로 이양하기 위해 선출된 대통령이다. 즉, 일반적으로 갖는 대통령의 이미지를 생각해보았을 때 전두환은 사실상 유일하게 국민의 직접선거를 통하지 않고 대통령직을 수행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이승만, 박정희가 직접선거로 치러진 대선에서 각각 2회, 3회 당선되었다는 것[22]과 대비되는 점이다.

8.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1980 - 1981
정계 입문
1981 - 1988
창당
1988 -
백담사 은둔 시기에 탈당
정계 은퇴

9. 기타[편집]

  • 알아주는 골초였다. 공식 석상에서 담배를 피워대는 모습은 당시 사진이나 방송영상에서 꽤 많이 보여왔고, 심지어 본인의 퇴임식에서도 연단에서 줄담배를 피웠다. 당시 전매청(현 KT&G)에서 전두환이 피는 담배는 최고급 연초만을 엄선해서 납품했다고 한다.[23] 청와대 정례회의 때 본인은 한두 가치 정도만 피우고 늘 놔두고 갔는데, 관료들이 서로 나눠 가지려 했었다고 한다. 1997년에 출소한 이후 나이도 많고 해서 건강을 위해 담배를 끊었다.
  • 식성은 육회, 갈비찜, 수육, 편육 등 육식을 즐기는 편이고, 술도 매우 좋아한다고 알려졌다. 또한, 전반적으로 맵고 자극적인 음식을 선호했다고 한다. 건강이 빨리 망가지기 쉬운 식습관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전두환은 지금까지도 건강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 선우인 노태우가 전립선암과 소뇌 위축증을 앓아 오늘내일하고 있는 것과 후임자 김대중이명박이 당뇨병 및 고혈압으로 고생한 것과 비교된다.
    전두환은 육식주의자라서 비만에 각종 질병을 앓고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전두환은 의외로 비만이 아니며 그 어떠한 질병에도 시달린 적이 없다. 몸무게도 70kg대를 넘긴 적이 없고 지금도 60kg대의 정상 체중을 유지하고 있다.[24] 이는 전두환 본인이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인 것도 있고 무엇보다 육체 노동을 많이 해야 되는 직업인 군인으로 25년 가까이 복무했기 때문인 것도 있다. 또한 전두환 본인이 매일 운동을 열심히 하는 스타일인만큼 건강 관리를 철저히 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군 시절 권력과 엄청난 인맥 아래 거침이 없었다. 대령 때 주요 지휘관 회의에 참모로서 참여하였는데 주요 장성들의 담화 발표 시 맨 앞줄에서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상태로 듣는 등 당시 서슬퍼런 군부 사회에서도 아랑곳없이 행동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가 육사 11기생인데 그 위의 선배들은 전시 상황이라 약식으로 교육받았고, 자기 기수부터 정식 교육 과정을 이수하였으니 실질적인 육사 1기생은 자신들이다 하는 그런 자부심이 있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육사 선배들을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거기에다 군내에서 무시 못할 사조직의 수장으로 인망도 높았으니 상식의 선을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선배들을 잡아먹을 수 있었다. 12·12 사건 주동자 가운데에는 자신보다 계급이 높은 사람도 있었지만 아무도 전두환 위에 서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장군으로 진급했을 때는 박정희 대통령이 친히 금일봉과 선물을 하사하기도 했다. 이는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도 묘사한 바가 있다.
  • 대한민국 대통령 중 처음으로 대한민국이 설립한 교육기관인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는 대통령이다. 이승만조선~대한제국 시절에,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는 모두 일제강점기 시절에 학창시절을 보냈다. 당시 미국 관료는 박정희 시기의 군장성 및 관료들이 미국에 대한 심한 열등감에 짓눌려 거의 말을 못하며 수줍어하는 분위기였는데, 전두환은 자신만만해한다며 다른 시대가 시작된 세대 교체가 진행되었다고 평가했다. 광복이후 우리 손으로 설립된 교육기관에서 처음으로 교육받은 대통령은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교한 박정희이다.
  • 전두환은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축구선수로서 체육특기생이었으며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학창 시절엔 운동하는 건강한 소년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여성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하며, 여자 관계가 꽤 복잡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축구 외에 복싱도 꽤 잘했다고 한다. 때문에 박정희가 청와대에서 축구 경기 또는 복싱 매치를 시청할 때 전두환을 불러 같이 보았다는데, 이는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그려지는 장면.[25] 축구와 복싱을 잘했다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 싸움 실력이 매우 뛰어났다.
  • 전두환 정부 시절 외래어를 순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을 했는데, '골키퍼'는 끝내 바꾸지 못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골키퍼'를 '문지기'로 쓰려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전두환의 과거 경력이었던 육사 골키퍼가 육사 문지기가 되기 때문이다.
  • 공부는 잘 못했지만 리더십은 대단히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유학성처럼 계급이 높거나 노태우처럼 공부를 훨씬 더 잘하는 사람들을 전두환이 이끌었던 것을 보면... 그래서 학창 시절의 전두환을 시기하는 학생이 대판 싸움을 걸어왔고 이 싸움에 승리한 덕에 학교에서 유명했다고 한다. 어째됐든 입시에는 나름 노력한 덕분인지 육군사관학교를 들어갔는데, 사실 추가합격으로 들어갔다. 1차 합격자들이 육군사관학교 지원을 대거 포기하자[26] 보충 인원으로 들어갔는데 행운도 상당히 받쳐줬던 셈이다.[27]
  • 전두환이 박정희의 눈에 들어온 계기는 5.16 군사정변. 당시 전두환은 대위 계급으로 서울대학교 학군단 훈육장교였는데, 박정희가 군사정변을 일으키자 모교로 찾아가서 자신의 후배에 해당하는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빼다가 예복을 입히고 박정희 지지 퍼레이드를 벌였다.[28] 이후로 전두환은 박정희에게 정계 진출을 권유받지만 전두환은 거절하고 군에 남는 쪽을 택했다. 이때 박정희는 차지철에게도 같은 권유를 했고, 차지철은 이에 응해 정계에 진출한다.
    이것은 두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가른 선택이었다. 만약 차지철이 정계에 진출하지 않고 묵묵히 군인으로 남았으면 오히려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키지 못하고 대통령의 더 큰 신임을 받던 차지철이 일으켰을 수도 있다. 차지철은 정계에 진출하면서 박정희에게 엄청난 충성을 맹세했고 승승장구했으나, 그 원한의 결과는 차지철의 죽음이었다. 박정희, 차지철의 죽음과 김재규의 잘못된 육본행 판단으로 구속된 상황에서 그 누구도 수사권을 가진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을 막을 자가 없었다.[29][30]
  • 친구 노태우와 걸어온 인생(군 장성 → 대통령)이 거의 판박이다. 자세한 내용은 노태우 문서로.
  • 강력범죄에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직접 수사에 관여한 적도 있는데, 그것이 이윤상 유괴 살인 사건이다. 1981년에 이윤상이라는 중학생이 모교 체육 교사인 주영형(30)에게 유괴당하자, 전두환이 직접 방송에 출연해 다음과 같이 선언하기까지 했다. 81년도는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 선거로 집권한 후 민심 수습책을 고민하던 시기였다.
    범인은 듣거라. 윤상이를 데리고 파출소로 와서 자수하면 최대한의 선처를 베풀겠다. 윤상이가 살면 네놈도 살 것이고, 윤상이가 죽으면 네놈도 죽을 것이다!
    그러나 이윤상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애초에 주영형은 이윤상을 납치하자마자 죽여버렸고, 사전에 녹음된 목소리를 들려주며 몸값을 요구했기에 전두환의 요구를 따를수가 없었던 것이다. 약속대로 전두환은 범인 주영형을 체포하자 직권으로 형법을 개정해버리고 주영형을 사형 판결 확정 후 단 열흘만에 사형을 집행했다. 또한 이에 그치지 않고 주영형을 체포한 경찰관을 고속승진시킨 끝에 청와대 대통령 경호실에 속하게 하였다. 이 사건이 해결된 후 전두환은 다시 방송에 출연해서 대국민선언을 했다.
    국민 여러분, 아동유괴살인에 대해서는 앞으로 무조건 이렇게 조치할 것입니다.
  • 전두환과 로널드 레이건미국 대통령의 한미 정상회담 당시, 전두환과의 4번째 만남이었음에도 레이건이 집권 말년 치매로 인해 기억력이 떨어져 전두환에 대해 기억을 못했다. 그러자 측근들이 전두환에 대해 설명했고, 처음에 알아듣지 못하다가 나중에 결국 알아들었는데 "아, '학생들은 전부 공산당'이라고 했던 그 친구"라며 기억해냈다고 한다. 한-미 정상회담 통역관이 말하는 '그때 그 대통령'
  •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한국의 전두환이 정말 부럽다"고 한 적이 있었다. 기자들이 그 이유를 묻자, "전두환은 국민들이 반대하자 어린 대학생이라도 자기 뜻대로 모조리 감옥에 처넣을 수 있는데, 미국은 그게 안 되지 않느냐"고 대답하여 기자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 이규동 라인을 이용하려고, 이규동의 차녀 이순자와 결혼했다. 결혼한 이후에도 여자 관계가 정말 복잡했다는 등, 온갖 이야기가 다 있었다. '모 여배우가 전두환과 친밀한 관계를 맺자 이를 마음에 안들어하던 이순자가 드라마 촬영하고 있던 그녀를 납치해 자궁적출수술을 받게 하고는[31], 알몸 상태로 5일 동안 남자 흉악범들이 들어가 있는 감방에 처넣었다'는 루머가 대표적이다.
  • 그와 8촌 이내의 친척 관계를 가진 사람 중 하나가 한화 이글스와 기아 타이거즈에서 활동했었던 전직 야구선수인 전현태다. 명절에는 전두환의 연희동 저택에 세배하러 간다고 한다. 그런데 이 선수가 활동했던 구단이 전두환에 대한 반감이 강한 호남 지역 팀이라는 것이다. 현재는 방출당했다.
  • 전사모, 일베저장소 등의 막장 극우 진영에서는 매우 좋아한다. 전두환 재임 시절이 경제 호황기였다면서 진정한 서민 대통령이라고 찬양한다. 엔두(엔젤두환), 전땅크, 프로야구의 아버지인 야버지라 부르면서 띄워준다. 이전에는 국내 야구 갤러리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진심으로 띄어주는건 아니고 반쯤 조롱조로 위의 별명을 부르는게 대다수이며 모두까기의 특성상 까이는 경우도 있다.
  • 사주와 현실의 불일치가 가장 심한 인물이다. 사주대로라면 대위로 제대한 후 구멍가게를 차려 운영하다가 1996년에 사망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 합성 갤러리에서 주로 "○○는 ○○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야"나 "진압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라는 대사가 합성 소스로 쓰이며 그의 전차와 함께 등장한다. 전차를 타고 나타나서 짜라빠빠를 진압하러 갔다가 패배하거나, 인관 관악기로 바뀌기도 하며 설날에 심영에게 세배를 받고 전차를 심영에게 주기도 한다. 그 덕분에 전차를 보면 전두환이 떠오르는 인터넷 밈이 생기기도. 보통 동시대의 M48을 타고 나왔지만 최근에는 장태완 장군과 겹쳐서인지 은근 K2 흑표 전차와 많이 얽히는 편이다. 그런데 흑표는 국방 정책으로 유명한 노무현이나 박근혜와 엮이기도 한다.
  • 박정희에 대한 우상화가 워낙 심하게 되어 있고, 전두환의 악행이 널리 알려져 있는 탓에 박정희가 저지른 잘못도 전두환이 저지른 것처럼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예를 들면 대한민국 해병대를 부대 해체해서 대한민국 해군 보병 병과로 넣은 인물이 박정희이며, 전두환은 되려 박정희가 그렇게 해체해 버렸던 대한민국 해병대를 되살려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세간에는 전두환이 대한민국 해병대를 해체했다고 잘못 알려진 것 등이 있다. 실제로 대한민국 해병대의 부대 해체일은 대한민국 제4공화국 시기인 1973년 10월 10일이며, 재창설일은 대한민국 제5공화국 시기인 1987년 11월 1일이다.
  • 2010년 1월 SS501 멤버 김현중이 전두환 팔순잔치에 참석했다가 대중들에게 욕을 먹었다. 김현중 본인은 소속사인 DSP 이호연 사장 생일에 참석한 것이라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실제로 전두환과 이호연 사장 생일이 1월 18일로 같긴 하다. 이호연은 연예계에서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는데, 전두환과도 인연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 1990년대 후반에 조훈현을 바둑으로 이긴 적이 있다. #
  • 전두환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주로 알려져 있는 꽉 막힌 이미지와 다르게 전두환 정권 때부터 사회의 자율화 및 다양한 문화컨텐츠가 성장했다. 프로야구와 프로축구가 시작된 것도 5공 시절이고 교복이 폐지되었으며,[33] 통금 해제에 현재의 포맷과 같은 가요 프로와 영화, 드라마, 예능 산업이 태동한 시기였다. 비록 국민들을 정치에서 관심을 떼고 우민화시키려는 의도라는 말이 많고, 검열을 다소 완화한 것과는 별개로 정치적인 검열은 몹시 엄격하기 짝이 없었기는 했지만. 자세한 것은 평가 문단으로.
  • 초대형 개신교회 중 하나인 김삼환 목사의 명성교회불교 신자인 전두환을 초청한 적이 있다. 메인 예배인 3부 예배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맨 앞자리에 앉히고, 전두환이 왔다고 소개했다. 물론 1회성 방문으로 김삼환 목사와의 개인적인 친분에서 갔을 가능성이 크다. 당장 정치적인 이유에서 자신이 안 믿는 종교의 교회나 사찰을 방문하는 정치인들이 많다.
  • 싸이월드가 한창 유행했을 때 전두환의 손녀 전수현[34]이 해외 여행을 가서 찍은 사진을 사진첩에 올려 놓고는 "우리나라는 아직도 발전하려면 멀었다"라는 식의 글을 써서 구설수가 된 적이 있으며 당시 네티즌들의 큰 공분을 샀다.
  • 출판사인 시공사와 대형 서점인 리브로의 실질적인 소유주였었다. 1989년에 자신의 비자금을 털어서 아들인 전재국에게 출판사를 세워주는데, 이 회사가 바로 시공사이다. 지금은 전재국이 시공사를 매각해 전씨 일가와는 관계가 없다.
  • 전현직 대통령 중 유일하게 대머리라 그런지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대머리'가 금지어였다. 아내인 이순자주걱턱이었기에 '주걱턱'도 금지어였다. 그래서 유머 1번지일요일밤의 대행진, 웃으면 복이 와요 같은 당대의 개그 프로그램에서는 전두환 정권이 끝날 때까지 대머리와 주걱턱을 개그 소재로 삼는 것이 암묵적으로 금지되었으며, 당시 방송사 PD들이 대본에 혹시 대머리나 주걱턱 같은 개그나 정치 풍자 유머가 들어가서 전두환이나 이순자 그 외 방송사 임원진들을 자극하는 장면이 있을까봐 미리 대본을 검열했다.[35] 아기공룡 둘리로 유명한 김수정이나 고바우 영감으로 유명한 김성환도 대머리를 그렸다는 이유로 만화연재가 짤리는 곤욕을 당해야 했다. 그나마 고바우 영감은 위낙 네임드급 만화였기 때문에 얼마 못가서 연재가 재개되었지만, 김수정의 만화는 그대로 연재가 짤리고 다른 작품을 연재해야 했다.
  • 개그집에서도 사정없이 까이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개그집에 실린 내용 중 이런 내용이 있다.
    외국에서 머리를 집어넣어 아이큐를 측정하는 기계를 도입해 실험을 하려고 영부인 이순자가 먼저 해보니 차마 말할 수 없는 결과가 나와서 보다못한 전두환이 자기가 시험해보겠다며 머리를 넣으니 기계가 답하기를 "돌 갖고 장난치지 마시오" 라고 했다. 하도 어이가 없어 밖으로 가서 큰 돌을 갖고 와서 기계에 넣으니 기계가 다시 왈, "각하, 안녕하십니까?", 아울러 '전두환과 개가 경주해서'란 개그 역시 인기를 끌었는데 결과에 따라 평이 다르다는게 이 개그의 포인트; 실례로 '개가 이겼을 경우'엔 '개보다 못한 놈'이 되고 '둘 다 무승부인 경우'엔 '개 같은 놈'이며 '개를 이겼을 경우'엔 개보다 더한 놈'으로 불리는 식이다. 아예 이 개그를 다룬 유머집마저 있을 정도이다. 또한 개그집에서는 전두환이 손오공처럼 나오는데 사람들은 그를 손오공이라고 부르지 않고 5공 비리라고 부르고 옥황상제도 이렇게 부르면서 손오공이 된 전두환에게 벌을 주는 개그도 있다. 심지어는 전두환임을 명시하지 않고, 옥중에 들어간 남편이 아내가 면회를 오자 아내의 턱을 보고는 "뾰족한 수" 없냐고 물으니, 아내가 남편의 머리를 보면서 '당신이야 말로 반짝이는 방법 없느냐' 라고 되물었다는 의미심장한 개그도 90년대 아동용 개그집에 순화되어 오르내렸다.
  • 배우 박상아가 전두환의 둘째 며느리다. 전재용과 불륜 관계였지만 결국 전재용이 이혼하고 결혼했다.
  • 정치인 윤상현이 전두환의 딸인 전효선과 결혼하였으나, 2005년에 이혼했다. 윤상현과 전효선 슬하에는 2녀가 있다.
  • 유명 코미디언인 이주일은 전두환 정권 초기에 방송 출연 금지 연예인으로 찍혔다. 공식적으로는 시청자들에게 혐오감을 준다는 게 이유이지만, 실제로는 전두환 정권이 사회 분위기를 휘어 잡기 위해 평소 마음에 들지 않던 연예인들을 탄압하였다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막상 전두환 본인은 언론 탄압과는 별개로 이주일의 개그를 꽤 재미나게 보았다고 하며[36] 오히려 이후 박종환 감독의 주선으로 만나서 사적으로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출연금지 조치가 풀린 건 덤. 이주일의 동료 코미디언인 최병서의 회고에 따르면, 이주일이 최병서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뜬금없이 한밤중에 전두환의 집에 찾아갔는데[37], 전두환은 내쫒기는커녕 오히려 반갑게 맞이하며 술상을 차려오더라는 이야기도 있다. 최병서 일화
  • 퇴임 직후 백담사에서 생활한다고 이야기가 굳어지기 전, 퇴임일 오전에 청와대를 차를 타고 나오며 비우는 시간의 TV 생중계에서 차량 출발이 잠시 지체되는 중간에 헬기에서 찍은 청와대 시설을 하나씩 소개하면서 청와대에 엄청 규모가 큰 수영장을 두고 나온다며 공중에서 찍은 수영장이라는 큰 건물을 TV로 보여준 적이 있었다.
  • 일제강점기 때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뜻이 잘 맞았던 박정희와 대조되는 대목.[38] 전두환의 부친이 일제 순사를 공격한 영향이 이에 한몫한 듯.
  • 광주 충장로에 전두환 동상과 함께 뿅망치를 같이 두었는데,너무 세게 때려서 전두환 동상의 두개골이 갈라졌다.
  • 정적 김영삼 부부와 함께, 아내 이순자와는 금슬이 좋은 애처가이다. 전두환이 이순자의 친정아버지 이규동의 부관으로 근무할 시절부터 알게되었는데,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이순자는 전두환을 "아저씨"라고 불렀다고. 전두환이 본격적으로 출세가도를 달리기 전, 가난한 군인인 상태에서 병원에 입원중이던 이순자에게 선물을 사주기 위해 지인의 부대로 돈을 꾸러갔다가 실패하고 울면서 걸어왔다는 사례가 있을 정도로 비록 이규동 라인을 이용하려고 이순자를 만났지만 연애시절부터 서로에게 나름 호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로도 측근들에게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선 아내에게 잘 해주라"는 말을 하기도 하였으며, 지금도 공식 석상에서는 나름 화목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10. 각종 타이틀[편집]

  • 박정희에 이어 2번째 군인 출신 대통령
  • 간선제로 당선된 마지막 대통령[39]
  • 이승만과 함께 학살 전적이 있는 둘 뿐인 대통령
  • 임기를 모두 끝마치고 만기 퇴임한 최초의 대통령[40]
  • 가장 높은 형량을 선고받은 대통령[41]
  • 박정희에 이어 2번째 경상도 출신 대통령
  • 최초의 경남 지역 출신 대통령
  • 최초의 정보기관장 출신 대통령(중앙정보부장)
  • 전임 대통령에 이어 두 가지를 다 가진 대통령
  • 예복 차림으로 취임식을 거행한 마지막 대통령[42]
  • 최연소(57세)의 나이로 퇴임한 대통령이자, 유일하게 50대에 퇴임한 대통령
  • 국내 최초, 유일무이한 대머리 대통령[43]

11. 다른 정치인과의 사이[편집]

11.1. 박정희[편집]

박정희는 전두환이 반평생을 섬겼던 그의 상관이었다. 박정희가 소장이던 시절에 전두환은 대위에 불과했으니 계급 차이가 상당했었다. 나이 차이도 14살이니, 당연히 전두환은 박정희에게 꼼짝 못 했을 수밖에 없다.

5.16 직후 전두환은 대위(ROTC 교관)으로 육사 생도들을 규합, 군사정변 지지 시위를 벌임으로서 박정희의 눈에 들게 되었고 이후 군 내 요직을 두루 거치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전두환에게 있어 박정희는 주군이자 은인인 셈이다.

소령 진급까지는 육사 11기생 동기들 중 가장 진급이 빠른 선두주자는 전두환이 아닌 손영길[44]이었다. 그러나 전두환에 대한 박정희의 총애 덕분에 소령은 짧은 기간 동안(1년 2개월)만 하고 바로 중령으로 진급했다.[45]

박정희 덕분에 당시 장성급들도 못 건드리는 존재가 되기도 했다. 이게 어찌나 심했던지 12.12 군사반란 당시 차규헌, 유학성, 황영시 이 3명의 중장들이 소장인 전두환의 부하로 활약했을 정도였다. 중장이 소장의 부하로 활약한다는게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대통령이 제일 아끼던 사람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11.2. 노태우[편집]

육사 11기 생도 시절의 전두환과 노태우
역사는 그들의 우정에 돌이킬 수 없는 애증의 골을 심어 놓았다. 우리 역사가 민주주의를 향해 한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그들의 악연은 더욱 깊어져갔던 것이다.

드라마 《제5공화국》 마지막 회 中

전두환과 노태우는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부터 가깝게 지냈고,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 쿠데타를 같이 일으키는 듯 사이는 좋았지만 그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전두환을 백담사로 보내버리자 이때 "노태우 그 놈이 대통령이라도 나한테 이런 식으로 나오면 귀싸대기 맞는다"라는 말을 했었다.[46] 하지만 1996년 재판 당시 같은 자리에 마주했을 때는 자네 구치소에서 계란 후라이 주나? 하며 훈훈하게 털어버린 듯 하다. 이후로도 노태우가 2014년 와병 중일 때 병문안 갔던 적도 있었다. 이때 호흡기를 꽂고 있는 노태우에게 전두환은 "이 사람아 날 알아보겠는가?" 라고 물었고, 노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어차피 이 둘은 평생 친구인 사이이기 때문에 한두 가지 일로 사이가 벌어져도 결국 같이 갈 수 밖에 없는 인생이다.

11.3. 김영삼[편집]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치소에 넣은 인물로, 결국 김대중 차기 대통령의 공약을 비롯한 정치 상황상 사면되었긴 하지만 전두환을 대통령이라고 부르지도 않았고 경멸하였다.물론 2010년이후고 그 이전엔 그러지 않았다.

1998년 전직 대통령 초청 청와대 만찬에선 전두환 전 대통령이 김영삼 전 대통령을 향해 "경제도 모르는 사람이 대통령을 해서 나라가 절단났다"고 비판했다. 물론 빡친 김영삼은 집으로 가버렸다.

이명박 정부였던 2010년에도 청와대에서 전직 대통령 연회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김영삼이 이명박에게 대놓고 "전두환이는 와 불렀노? 쟈는 대통령도 아이데이. 죽어도 국립묘지는 몬 간다."라고 개망신을 주고, 뒤이어 만찬 시간에 전두환이 "와인 더 없느냐"고 하며 와인을 찾자, 김영삼이 "니는 청와대에 술 처무러 왔나?"[47]하며 높은 언성으로 전두환을 호되게 혼내는 바람에 격노한 전두환이 화를 참지 못하고 집에 가버렸던 얘기는 아주 유명한 일화다. 근데 이명박이 가지말라해서 남았다. 그리고 전두환을 사면해 준 것이 잘못이라고 말하기도 했다.[48]

김영삼은 김대중과 마찬가지로 박정희와 전두환에게 모진 수난을 당했는데, 그런 박정희가 가장 아끼는 부하였던 전두환이 농담으로라도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김영삼의 사망 후 전두환이 빈소에 가서 도의적인 조문을 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역사적 화해'를 하겠냐는 기자들의 질문에는 침묵한 채 자리를 떴다.

11.4. 김대중[편집]



전두환은 한 때 내란음모 누명 사건으로 김대중을 죽이려고 했고[49], 이후에는 정치적으로 유배시키기까지 했으나, 15대 대선 당시 김대중은 수감되어 있던 전두환의 사면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도 김대중은 전두환을 전 대통령으로서 예우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김대중은 박정희 기념사업회의 명예회장을 역임하고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국비 200억 지원을 약속하기도 하였다.[50]

특히 김대중 대통령은 전두환·노태우·최규하 전 대통령을 10여 차례 청와대에 초청해 국정에 대해서 의논하였으며, # 전두환도 이에 대해서 언제나 감사한다고 언급하였다.

비록 자기 자신이 김대중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고 (정확히는 내리는데 관여했고), 5.18 민주화운동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의 고향 합천 출신 친척을 둔 위키러의 증언으로는 매년 신년 인사 등으로 전사모, 장세동 등의 측근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 YS와는 정 반대로 "진심으로 김대중을 존경한다."라는 증언이 나왔다고 한다. 김대중의 건강이 나빠지자 문병을 가기도 했고, 영결식에도 직접 참석해 조문을 하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김대중이 이희호 여사와 재혼하기 전 차용애 씨라는 사별한 아내가 있었는데, 차용애 씨가 바로 전두환의 먼 친인척 관계이므로 한때 먼 사돈 관계이기도 했다.

11.5. 노무현[편집]


5공 청문회 당시 청문회에서 전두환이 퇴장한 후 명패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러나 2004년 대통령 임기 중 설에 유인태 정무수석을 보내서 세배를 드린 것, 전두환 부부를 청와대에 초청해서 만찬을 대접한 것을 봤을 때 전 대통령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는 한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당시 조문은 하지 않고 "전직 대통령으로서 좀 더 버티지 왜 스스로 목숨을 끊는가." 라고 한탄하며 짧게 애도의 말을 전했다고 한다.

11.6. 이명박[편집]

이명박이 17대 대선 후보 시절에 정치 원로들 예방 차원에서 만난 것을 빼면 딱히 접점은 없지만, 훗날 전두환을 만찬에 초청해서 극진히 예우하는 등 그럭저럭 원만했던 관계로 보인다. 이때 김영삼이 과격한 팩폭을 날려서 갑분싸를 만드는 바람에 박차고 나가려던 전두환을 말린 사람도 이명박이었다.

굳이 접점이라고 따지고 들어간다면 박정희인데 전두환은 박정희가 가장 아끼는 부하였고, 이명박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서 현대건설 사장 자격으로 현장소장을 담당한 적이 있다.

11.7. 박근혜[편집]

아버지 박정희암살당하면서 박근혜가 청와대에서 물러났는데, 이때 전두환에게서 6억을 받았다. 전두환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태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 수 없다. # 박근혜 정부에서 전두환 추징금 환수에 박차를 가하면서 사이가 벌어졌다.[51]

전여옥의 증언에 의하면 그녀가 전두환을 방문해 "박근혜를 대통령 만들겠다"고 했더니, '꼭 그래야겠는가'[52] 라는 탐탁치 않은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긍정적으로 본 것은 아니었거나 뭔가를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계 원로들은 국정 농단의 예측 여부를 떠나서 최씨 일가의 존재는 알았다고 한다.

11.8. 문재인[편집]

여단장 시절인 1976년, 아이러니하게도 문재인에게 특전병 최우수 표창을 직접 준 적이 있다. 더 아이러니한 사실은 문재인에게 특전사령관도 표창을 수여했는데 그 사령관이 전두환 반란 때 맞섰던 정병주 소장이라는 것이다. 이후 문재인은 복학 이후 1980년 5.17 내란 때 복학생 협의회 활동으로 문제가 되어 계엄령 위반으로 구속되면서 청량리 구치소에 수감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가 세워진 후 과거 청산을 위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조사하면서 점차 전두환의 입지가 위태해져 가고 있다.

12. 대중매체에서[편집]

  • 탤런트 박용식이 전두환과 용모가 닮았다는 이유로 갖은 고초를 겪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 박용식은 1991년 MBC 드라마 《땅》과 1993년 KBS1 《다큐멘터리극장》, 1995년 MBC 《제4공화국》, 1998년 《성공시대》 등지에서 전두환 역을 맡아 혼신의 열연을 보여주었다. 박용식 문서에서도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다.
  • 2005년 후속작 제5공화국에서는 이덕화가 전두환 역할을 이어받으며 절륜한 연기를 펼쳤다. 비록 외모적인 유사성은 박용식에 미치진 못했지만 주인공으로서의 묵직한 포스를 내며, 유의 말투까지 음성을 전두환 본인과 비교해도 거의 판박이로 재현해낸대다 특유의 대머리와 날카로운 용모 덕에 박용식에 못 미칠 뿐 전두환의 외모에도 상당한 싱크로율을 선보였다. 본인도 연기에 상당히 만족했다는 것이 후문이다. 이를 위해 집안 친척인 최병서에게 특훈을 받았다는 후문도 전해지기도. 그리고 이덕화 본인이 악역 전문 배우로 명성을 날린 적이 있는 사람인데 조선왕조오백년장희재, 사랑의 종말의 남현필, 사랑과 야망의 태수 등 완벽한 인간말종 연기를 달인 수준으로 실감나게 잘했던 과거가 있어서 여기에서도 전두환의 냉혹한 면모를 잘 살려서 연기한 덕에 외모는 박용식에 비해 미치지는 못했지만 분위기는 되려 박용식을 압도했고, 박용식이 타계한 지금은 전두환 담당 배우 중 전두환과 제일 외모와 음성이 제일 흡사하다고 평가받는다. 확실히 장군 시절의 전두환의 모습은 웃음기 없는 냉철한 분위기로 연기했지만 대통령이 된 후의 모습은 그보다는 다소 희화화된 모습도 보여준다.
  • 1998년 SBS 드라마 삼김시대와 영화 26년에서는 장광이 전두환 역을 맡았다.[54] 해당 작품은 전두환의 퇴임 후 현재의 모습을 담아낸 이미지였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와 작은 운동장 급의 광활한 그의 사택에서 쓸쓸히 바깥을 바라보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영화 후반부에는 곽진배에게 붙들려 힘없이 표적에 잡히는 등 안습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김갑세 회장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선물을 주면서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데, 악역으로서 보이는 악랄한 연기가 일품이다.
  • 2010년 SBS 드라마 자이언트에서는 56화에 잠시 출연했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뒷통수만 나와 배우가 누군지는 추정할 수 없다.[55]
  • 2006년작 영화 홀리데이에선 성우 겸 배우 이의선이 전두환을 본뜬 '전직 대통령' 역으로 나왔는데, 점퍼에 마스크 차림으로 나왔다. 2020년작 남산의 부장들에서는 전두혁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배우 서현우가 연기했다.
  • 2020년 발매된 래퍼 비프리의 정규앨범 'FREE THE BEAST' 앨범 커버에 비프리가 전두환의 얼굴에 소변을 보는 모습이 표현되었다.

13. 관련 문서[편집]

14. 둘러보기[편집]

[1] 공식적 생일. 비공식적으로는 1930년생이라는 설도 있다만 빠른 1931년생이므로 1930년생이나 다름없다. 이 시절에는 영아 사망률이 높아 출생신고를 실제보다 늦게 하고 애초에 학교 교육이 의무교육이 아니었기에 빠른 생일과 아닌 사람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2] 현재 생존한 전직 대통령들 중 가장 오래 살고 있다. 역대 전직 대통령들 중에서는 윤보선에 이어 2번째.[3] 노태우와 이웃사촌으로 연희궁이라는 논란이 있었다. 실제로 집 근처에 연희궁로라는 도로 표지가 있었다가 논란이 일자 지워졌다.[4] 보궐선거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당선 확정과 동시에 임기가 시작되었다. (관보) 취임식은 1980년 9월 1일 잠실 실내 체육관에서 거행되었다.[5] 사실상 실권은 1979년 10.26 사건 직후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얻었으며, 총 2996일간, 약 8년 동안 재임하며 철권통치를 누렸다.[6] 1944년 가족들이 대구로 돌아오면서 전학하였다. #[7] 당시 6년제였으며, 1950년 4월 대구공업중학교와 대구공업고등학교로 개편하였다가 1951년 7월 대구공업중학교를 폐지하였다.[8] 대통령 퇴임 이후 불교로 개종. 참고로 개종 전에 스스로 가톨릭 신자임을 밝힌 적은 없었다. 군대에서 세례를 받은 냉담자로 알려져 있었으나, 사실 고등학생 때부터 가톨릭 교도였다고 한다. 김수환 추기경 기념서인 "아, 김수환 추기경" 등에 따르면 세례명베드로다. 다만 대통령 임기 내내 천주교와 대립했으며 87년에는 명동성당에 숨은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성당에 전경을 투입할 계획을 세우는 등# 신자로 보기 어려운 모습을 보여줬다.[9] 차남인 전재용목사가 될 것이라는 소식에 기뻐했다는 점과 전재용이 시무하는 교회에 출석하겠다는 말을 했다는 점에서 추가 개종의 가능성도 있다.[10] 정확히는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판결, 확정되어 경호/경비를 제외한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가 박탈되었다. (대법원 1997. 4. 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11] 사면시기때문에 김대중의 일이란 주장이 주도적이었으나, 김영삼은 조선일보사에서 발간된 자신의 회고록에서 임기 내에서 선거 후에 둘의 사면과 추징금 환수를 계획하고, 어떤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이를 진행시킬 수 있는 절차를 밟았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김대중은 정치적 부담이 없이 사면을 진행하는 그림이 그려지게 되었다. 여담으로 김대중은 김영삼의 사면 이야기에 있어서 아무말 없이 그러라고 답했으나, 정작 자기당의 대표였던 이회창은 지지율을 의식했는지 김영삼과의 주례회동이 예약된 날의 3일 전인 9월 1, 2일 동안 이회창이 추석 전에 사면을 추진하겠단 이야기로 사면론이 대두되었고, 선거 전에 이런 일이 일어나서 화가 난 김영삼에게 불려가 혼쭐이 났다고.[12] 군사재판군사법원에서 군형법에 의거하여 진행되는 재판을 이르는 것이며, 전두환과 노태우 등 내란 수괴와 내란 중요 임무 종사자들은 최종적으로 형법상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 등의 혐의를 받아 민간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당시 장태완 등이 군형법상 내란 혐의로 고소하기도 했으나, 검찰의 법리 및 공소시효 등의 검토 결과 형법이 적용되었다.[13] 이 당시 일본인 관광객이 많았는데, 일본인 관광객은 한국인들에게 "식민지 시기가 더 행복하지 않냐"고, 일본 신문은 공공연히 일본 지배가 나았다는 망언을 했다. 일본인과 일본 매체의 이런 망언은 한국에서 반일 소재로 사용되었다.[14] 자세한 것은 이장규의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책에 나온다.[15] 실제로 신군부는 부가가치세를 박정희 정권의 몰락의 큰 원인으로 보고 폐지를 시도했다. 그러나 부가가가치세로 인한 세수 증대 효과가 상당했기 때문에 재정을 우려한 폐지 반대론자들의 적극적인 의견 개진으로 무산되었다.[16] 후에 11기로 변경.[17] 소령에서 중령 진급까지 불과 1년 2개월밖에 안 걸렸다. 이는 박정희의 대단한 신뢰가 있어서 가능했다.[18] 1972년 9월부로 제1공수특전'단'이 제1공수특전'여단'으로 증편되어서 부대장도 대령에서 준장 보직으로 승격되었기 때문에, 당시 대령이었던 전두환은 정식 여단장은 될 수 없어서 일단 '여단장 직무대리'의 형식으로 부대장직을 유지하다가 1973년 1월 임시제 준장이 됨과 동시에 정식으로 제1공수특전여단장이 된던 것이다.[19] 전두환이 받은 마지막 직위로, 아마 평생의 마지막 직위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20] 간접선거[21] 간접선거[22] 간접선거까지 포함하면 이승만은 3회(3.15 부정선거 제외), 박정희는 5회 당선되었다.[23] 1980년 이진희와의 대담에서는 태양을 피웠고, 1982년 이후로는 장미를 피운 것으로 보인다.[24] 전두환이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들 중에서 가장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틀렸다. 키는 성장기가 종료된 20대에 진입하면 어지간해선 쉽게 변하지 않지만, 몸무게는 젊을 때나 늙을 때나 당뇨병 및 고혈압 등 각종 질병으로 인해 언제든지 변수가 생긴다. 당장 김대중의 예를 들면 국회의원 시절 때까지만 해도 후덕한 체형이었으나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온갖 격무로 인한 스트레스로 인해 당뇨병을 앓고 나서부터 살이 쭉 빠졌다. 김정일도 마찬가지. 참고로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들 중에서 가장 키가 크고 가장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은 최규하이다.[25] 헌데 박정희는 프로레슬링을 좋아했지만 전두환은 프로레슬링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루는 프로레슬링을 관람하고 있던 박정희에게 전두환이 "각하, 프로레슬링은 쇼인데 뭐하러 보십니까?"라고 했다가 분노한 박정희에게 얻어맞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박정희가 팬이어서 그런지 박정희 정권 때는 한국에서 프로레슬링이 가장 인기 스포츠였다.[26] 입학년도가 1951년도였다. 그러니까 4년 후 소대장으로 전선에 투입된다는 소리인데 그래서 포기율이 높았다. 당시에는 그놈의 전쟁이 3년 만에 끝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27] 운동을 통해 군인으로서 출세한 다른 유명인은 박정희의 경호실장이자 10.26 사건 때 같이 피살된 차지철이 있다. 이쪽은 태권도를 잘 했다고 하는데, 실력이 정말 좋았는지 미국에서 연수하던 시절 덩치 차이가 2배 정도 나는 거구의 미군 생도가 인종차별을 하자 때려눕혔다고 한다. 얼마나 심하게 때렸으면 "무기로 때린 게 아니냐"라는 반응이 있었을 정도였다. 전두환의 주장에 따르면, 연수 당시 차지철을 외국인들의 불만을 대표해서 때린 거라고 두둔한 게 전두환이었다고 한다.[28] 그 당시의 장교는 정의로운 이미지가 강했고, 육군사관학교 출신은 군에서나 사회에서나 엘리트였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육사 생도들의 퍼레이드는 5.16 군사정변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효과적이었다.[29] 다만 이 선택 덕분에 전두환보다 3살이나 어렸던 차지철의 승진이 더 빨랐던 것 역시 사실이다. 전두환이 육사 11기였는데, 차지철이 육사 12기를 지원했다가 떨어지고 광주포병학교를 졸업한 것은 유명한 일화. 그런 미묘한 열등감으로 차지철은 육사 출신들을 싫어했다고 한다. 전두환 역시 육사 12기 지원 건을 언급하면서 '차지철은 원래 자기 밑에 있던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 실제로 전두환이 1979년 3월 보안사령관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알아본 것이 계엄 시에 차지철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보안사가 중심이 되어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게 되면 다른 정보·수사기관까지 지휘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얻자마자 전두환은 매우 흡족해 했는데, 차지철은 10.26에 죽어버렸지만 이 합동수사본부로 정권을 장악하는 아이디어는 12.12에서 현실화된다.[30] 재미있는 건 윤필용 사건으로 전두환, 노태우와 하나회 인맥이 위기에 빠졌을 때 이를 모면하게 해준 것이 차지철이란 점이다. 1976년 6월부터 전두환이 차지철의 발탁으로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겸 보안차장보로 임명되고 노태우가 청와대 경호실 행정차장보로 임명되면서 중앙에 복귀한 것. 전두환을 발탁한 이유는 입이 무거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차지철와 전두환의 이런 역기수 관계는 전두환이 1978년 1월 육군 1사단장으로 전출되면서 1년 6개월 만에 끝나게 되지만, 후임 작전차장보는 노태우가 역임했다.[31] 모 여성 잡지의 표현에 따르자면, 구봉합수술(즉 여성할례)을 했다고 한다.[32] 한국일보 칼럼과 단행본 <정치의 무늬>에 실렸음.[33] 상기했듯이 재정적인 문제를 비롯 여러 문제가 있어 얼마 안 가 다시 부활했지만서도.[34] 전수현은 전두환의 장남 전재국의 딸로, 1985년 12월 19일생(현재 35살)이다. 2012년 서울신라호텔 다이너스티 홀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여담으로 여기서 결혼식을 하려면 최소 1억 원이 든다고 한다.) 이때 KBS 윤인구 아나운서가 사회를 맡았다.[35] 최양락상상플러스에 출연했을 때 당시의 검열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유머러스하게 설명했다.[36] 박정희도 비슷한 일화가 있는데 전유성이 《윤형주의 0시의 다이얼》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싸움을 하면 육박전이다"라는 식의 개그를 쳤다. 하지만 방송사 내 간부진들이 그 유머를 듣고 식겁해서 PD들을 혼내고 전유성에게 3개월 출연 정지령이라는 징계를 내렸는데, 막상 해당 유머를 들은 박정희는 박장대소하면서 껄껄 웃었다는 후문. (라디오로 직접 들은 것은 아니고 스튜어디스를 통해서 전해들었다.)[37] 정확하게는 사기를 당해 금전적인 손해 때문에 실의에 빠져 포장마차에서 과음을 해 취중이었다. 최병서가 옆에서 자리를 지키던 중 "병서야, 누군가에게 위로를 좀 받고 싶다"라고 하고는 느닷없이 "혹시 너 전두환 전 대통령 댁 어딘지 아냐?" 하기에 찾아가게 된 것이라고 한다.[38] 하지만 박정희도 일본군에 입대하기 전 초등학교 교사 시절에는 일본인 교장의 감시를 피해 한국어로 수업을 진행하고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에 대하여 가르쳤다고 한다.링크[39] 초임인 이승만, 임기가 짧았던 윤보선, 개헌으로 간선제를 만들어 집권했던 박정희, 그 뒤를 이은 최규하에 이어 마지막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서 간선제로 선출된 초대 선거를 빼고는 2회, 3회 모두 국민투표로 당선되었으며,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접 선거로 정권을 연장하였던 박정희제5대 대통령 선거 부터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까지는 3회간 국민 투표로 당선되었다.[40] 그 이전 대통령들은 모두 임기를 제대로 끝마치지 못하였다. 이승만은 3.15 부정선거로 인해 촉발된 4.19혁명으로 하야하였고, 윤보선은 5.16 군사 쿠데타의 압박으로 사임했고, 박정희는 유신 체제와 18년 장기 집권으로 비판을 받다가 결국 1979년 10월26일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의 총에 맞아 재임 중에 사망하였으며, 최규하는 12.12 군사반란으로 압박을 받다가 취임 8개월만에 사임했다.[41]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 재판 1심은 사형, 2심과 3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42] 굳이 말하자면 11대 취임식에서는 수트에 무궁화대훈장을 패용했는데 이것도 공식 석상에서 대통령이 패용한 모습으로는 마지막이었으며 12대 취임식에서는 훈장 패용 없이 모닝코트 차림이었다. 19대 문재인 대통령은 5월 10일에 취임하여 일반적인 양복 차림으로 취임했으며, 20대 대통령 역시 유권해석에 따라 5월 9일 또는 10일에 취임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문재인 대통령이 정상적으로 임기를 마친다면 모닝코트조차도 대통령 취임식에서는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지구 온난화 문제도 있고[43] 20대 대선이 1년을 앞둔 현재까지도 대한민국에서 대머리 정치인은 찾아보기 힘들다.[44] 1964년에 하나회를 만든 주역이다.[45] 전술한 것처럼 1962년 12월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박정희가 차지철과 전두환을 불러 국회의원을 해보라고 권유했는데, 차지철은 의원직을 맡기로 하고 전두환은 군에 남기로 했다. 전두환은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비서관이었는데, "아직은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답변을 했던 것.이 '의원 문답' 이후 전두환이 본격적으로 빨리 진급하게 되었다. 1961년 11월에 소령으로 진급한 전두환은 그로부터 불과 1년 2개월만인 1963년 1월에 중령으로 진급하여 중앙정보부 총무국 인사과장이 되었으니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한 기간이 무척이나 짧은 것이다. 물론 한국전쟁 중에는 고위 지휘관이 턱없이 부족해서 닥치는대로 진급시켜버리는 바람에 이보다 빠른 경우들이 많이 존재하긴 했다. 참고로 미국에서도 진급속도가 빠르기로 유명했던 케이스가 있는데, 바로 둘리틀 특공대제임스 둘리틀이다. 둘리틀의 경우, 에서 준장까지 1년 조금 넘는 기간밖게 안 걸렸다.[46] 하지만 노태우의 입장에선 전두환이 퇴임 이후에도 뭔가 이상한 기구를 만들어 대놓고 자신이 막후 실세가 되겠다는 식으로 나온 터라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그리고 전두환을 백담사로 보낸 것은 배려를 한 것이다. 구속시킬 수도 있었던 일을 백담사로 보내서 조용해질 때까지 숨어있게 했기 때문이다.[47] 과장이 아니라 두 말을 전부 반말로 했다. 사실 김영삼이 전두환보다 연상이라 반말이 못할 것은 아니였다.[48] 그런데 시대적 배경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은 맞다. 군대를 억압한다면 국방 전체가 마비가 오는 것처럼 넬슨 만델라 대통령도 이와 비슷하게 백인들이 재산 들고 해외로 도망가는 것을 막으려고 "용서는 하지만 잊진 않겠다."라는 유화책을 써야 했었으니 말이다. 그 당시 남아공은 백인들이 경제와 행정을 쥐락펴락했기에 백인들이 철수하면 경제뿐만 아니라 행정에도 마비가 생긴다.[49] 미국의 압력으로 좌절되었다.[50] 김대중은 정치보복을 지양하는 사람이었던지라 이런 일을 한 것으로 보인다.[51] 애초에 박근혜랑 전두환이 같은 보수 대통령이었다 하더라도 둘의 사이는 과거부터 정말 최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전두환이 박정희 대통령의 흔적을 지우려고 안간힘을 쓰고 박근혜도 사실상 탄압했기 때문. 박근혜 흑역사[52] 박근혜는 인간 자체가 빈 깡통이고 이것은 김재규, 이후락, 전두환, 차지철, 김종필, 노태우 등 박정희의 최측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박지만이 전두환 노태우에게 누나 좀 말려달라고 호소한 적까지 있었다.[53] 응답하라 시리즈에서는 카메오로 나왔다.[54] 이분 이전에 전두환 전담 배우로 유명했던 박용식 씨가 자신의 후배 성우인 박지윤의 친아버지라는 것을 생각하면... 게다가 둘 다 KBS 성우극회 소속이다.[55] 황태섭 역을 이덕화가 맡았는데, 제5공화국에서 이덕화가 전두환 역을 맡아서 배우개그가 성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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