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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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高麗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80px-Goryeo_%28orthographic_projection%29.svg.png
공민왕 23년(1374년) 고려 영토
각 시대의 강역은 아래 역사 단락 참고
시대 구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영토(위치)
한반도[2] 및 부속도서
울릉도(930)
제주도(1105)
요동 일대[3](1357[4] - 1370[5])
역사
수도
철원 (918 - 919)[6]
개경 (919 - 1232, 1270 - 1382, 1383 - 1390, 1391 - 1392)[7]
강도 (1232 - 1270)[8]
남경 (1382 - 1383, 1390 - 1391)[9]
서경 (921 - 1136)[10]
종족
언어
고려어 (중세 한국어)
문자
국교
정치 체제
대왕(大王)(천자)[13]
황제(皇帝)(천자)[14]
대왕(大王)(천자)
대왕(大王)(제후)[15]
국성
개성 왕씨 (開城 王氏)
현재 국가

1. 개요2. 국호3. 역사4. 왕사5. 행정
5.1. 중앙 행정5.2. 지방 행정5.3. 형벌 제도
6. 군사7. 경제8. 문화9. 외교10. 외왕내제 여부11. 평가12. 인물13. 고려사 연구의 난관14. 고려를 배경으로 한 작품15. 같이보기
15.1. 정치15.2. 행정15.3. 군사15.4. 경제15.5. 문화15.6. 건축15.7. 고려를 다룬 사서15.8. 당시 만들어진 책, 작품15.9. 기타
1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고려(高麗)는 918년부터 1392년까지 약 474년 동안 한반도 지역에 위치했던 전제군주정 불교 국가이다.

통일신라의 분열 후 고려, 후백제, 신라로 나뉘어 대치하던 후삼국시대왕건이 936년에 통일하였고, 이후 약 456년 동안[16] 총 34명의 군주가 계승하여 1392년에 이성계역성혁명에 의해 조선이 건국되기까지 함경북도함경남도 그리고 평안북도의 일부 지역들을 제외한[17] 한반도 대부분의 지역들을 지배하였다.

고려 전기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거란족)와 송나라의 세력 균형 체제라는 국제적인 정세 속에서 고려는 요나라의 3차에 걸친 대규모 침략막아내며 자주국방의 위세를 뽐냈으나, 중기 이후 내부적으론 무신정권이 들어서고 외부적으론 금나라(여진족)의 부흥에 요와 북송이 차례로 털리고 금이 고려에 칭신을 요구하자 책봉 질서의 사대적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18] 이후 몽골 제국과 30년간의 처절한 항쟁 끝에 결국 항복하여 원 간섭기엔 심한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된다. 말이 좋아 항쟁이지 3차 침입 이후부터는 국토의 대부분이 쓸려나가는 동시에 육지의 백성들이 몽골군에게 참혹하게 도륙당하는 그야말로 악몽과도 같은 시기였다. 한편 당시 권력자 집단이었던 무신정권은 강화도에 숨어 호의호식하고 있었다.

다만 남송을 포함한 유라시아 수십여개 국들이 몽골 제국에 쓸려나가는 동안, 고려는 비록 조정은 강화도에서 무능한 모습을 보였지만 지방 정규군과 백성들의 끈질긴 저항과[19] 적절한 외교술로[20] 나라 자체가 완전히 멸망하진 않았고, 이후 몽골의 부마국으로 존속하다가 고려 후기 이 쇠퇴하자 공민왕 시절에 반원정책을 펼치면서 몽골의 내정간섭에서 벗어나게 된다.[21]

2. 국호[편집]

언어별 명칭
고려(高麗)[22], 고려 왕조(高麗王朝)
高麗[23]/高麗王朝(정체), 高丽 /王氏高丽 (간체)
高麗(こうらい)(고라이), 高麗(こま)(고마)[24]
Cao Ly
Солонгос[25], Kuryo[26]
Корё
گوریو
كوريا, غوريو
Goryeo, Koryŏ, Korea, Corea

국호는 고(구)려의 국호를 그대로 이었다. 그 이유는 말 그대로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것.

다만 중국과 국내 일부 재야학자들 사이에선 여전히 고려가 신라를 계승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무조건 어거지로만 보기도 뭐한 게 중국 쪽 일부에서 고려가 신라를 계승했다는 인식은 단순히 동북공정의 여파가 아닌 오래전부터 있던 인식이었기 때문. 실제로 고려 서희와 요나라 소손녕과의 회담에서도 소손녕이 고려는 신라를 계승한 나라이니 통일 신라가 지배한 적이 없는 옛 고구려의 영토였던 한반도 북부의 영토 획득에 고려는 정당한 권리가 전혀 없음을 주장한다.

하나 이에 서희가 고려는 신라가 아닌 고구려를 계승하여 평양을 수도 중 하나인 서경으로 삼은 나라이니 거란이야말로 그들이 동경요양부(옛 고구려의 요동성, 현 랴오양시)로 삼은 옛 고구려의 땅을 정당한 권리도 없이 점거한 것이라고 반론하여 소손녕의 오해를 정정하여 지적한 바 있다.[27] 이후 소손녕 또한 서희의 말에 수긍한다. 게다가 소손녕은 유목민족인 거란족이었기 때문에 비록 거란족의 요나라가 중국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세워진 나라이기는 하지만 그걸 '보편적인 당대 중국인의 시각'으로 볼 수 없다. 화북은 커녕 연운16주 같이 화북의 북쪽 매우 일부만 점거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후 서긍을 포함한 송나라인들의 인식을 비추어볼 때 오히려 고구려의 정체성을 고려인들이 이었다는 인식이 한족 사회에선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요의 황제는 이후 고려의 왕에게 삼한과 5부(고구려의 5부)의 주인이라는 관작을 내린다. 역사적으로 옛 고구려와 만주에서 직접 얽히고 섥혀서 고구려인들의 정체성을 중화인들보다 비교적 정확하게(중국인이나 반도남부인들은 그냥 삼한인이라 퉁쳐 불렀다.)파악하고 있었으며, 이후 만주영토를 거의 점거했던 거란조차도 고려의 정체성을 고구려의 직계후예라고 결론을 내린것이다.[28]

애초 삼국이 현존하던 당나라대 중국에서는 삼한이라고 해서 고구려, 백제, 신라를 같은 족속으로 퉁쳐서 보는 시각이 많았다. 당장 중국에서 죽은 고구려인들의 묘지 비문만 봐도 요동삼한인이라고 지칭해놓은 게 상당하다. 게다가 요나라와 동시대에 존재했으며 정통 중국이라 할 수 있는 송나라의 지식인인 소식은 정작 고려를 비칭할 때 고구려를 까는 것과 마찬가지의 단어인 맥적(맥족 도적)을 그대로 사용했다. 마찬가지로 송의 서긍이 고려를 직접 방문하고 저술한 고려도경에서도 고려는 고씨 왕조가 망했다가 왕씨 왕조가 들고 일어난 걸로, 즉 고구려에서 고려로 그대로 이어지는 것으로 서술해놓았다. 그 외 원이 새로 일어난 명에 달달 털려 북원으로 전락하던 시기에도 "북원의 요양성(遼陽省) 평장사(平章事) 유익(劉益)과 우승(右丞) 왕카라부카(王哈刺不花) 등이 명나라에 귀순하려 하였으나 그들은 명나라가 주민을 이주시킬까 근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요양이 본시 우리 땅이었으므로 만약 고려가 청하면 이주를 모면할 수 있지나 않을까 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통보하여 왔다."라는 기록도 있다. 요양성은 옛 요동성을 가리키는데, 이에 의하면 원나라 장수와 고려 정부 모두 요동이 옛날에는 고려의 땅이었다고, 즉 '고구려=고려'라고 인식하고 있었다(물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구려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들이 난립하는 형태였지만 당시엔 대부분 망하고 없었다). 한편, 좀 더 현실적인 시각으로 접근하자면 계승 의식은 고구려를 표방했지만 실질적 세력권은 신라 영역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고구려+신라+백제를 다 품은 것. 이는 한족이란 개념이 하상주나 진이 아닌 한나라에서 나온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 고려의 고구려 계승에 대해 더 자세하게는 고려/평가 항목 참조.

고구려의 국호는 초기엔 고구려, 구려, 고려 등의 여러가지로 불렸는데 장수왕 대부터 고려(高麗)로 고정되어 사용됐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에게는 고구려보다는 고려가 더 익숙한 명칭이었으므로 고려를 사용한 것이다.

중국식 역사서가 편찬될 만큼 한문학이 발달된 시기라 후연, 후당, 후조 같이 자국을 고려(고구려)땅에서 일어난 나라라고 "후고려(後高麗)"라고 표현한 기록이 종종 발견된다. 예를 들어 태자사낭공대사비나 대각국사문집. 일반적으로 중국에서 후라는 앞글자는 건국한 땅의 옛국가에서 따온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상할 것 없는 표현.

현대에 고구려를 당대에 널리 사용되던 고려 대신 고구려라고 부르는 이유는 첫째로 뒤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서, 둘째로 삼국사기에 그렇게 적혀 있기 때문이다. 궁예의 후고구려 역시 개국 당시의 국호는 고려였다. 이후 마진, 태봉으로 변경하긴 하지만 왕건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궁예의 고려는 후고구려라고 호칭된다. 때문에 한국의 외국 이름인 'Korea'의 어원을 제공한 나라가 왕건이 세운 고려일 수도 있지만, 언급했듯이 장수왕 이후인 고(구)려에서 이미 어원이 형성됐을 가능성도 있다. 어느 쪽이든 지금까지 이어진 KOREA라는 호칭의 근원이 고구려임은 변함이 없다. 그 코리아의 어원이 왕건의 고려라고 해도 그 고려라는 명칭이 고구려를 계승하면서 전달된 국호이기 때문.

3. 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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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왕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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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행정[편집]

파일:external/www.yuniljung.com/0091000301200501240125_16_4.jpg
11세기 고려의 행정구역.
고려의 대외무역도.

신분 제도에 관한 내용은 계급 참조. 고려는 크게 양인과 천인으로 구별되고, 다시 양인을 왕족 - 귀족, 중간계층(남반, 향리, 서리, 하급 장교), 양인(백정, 양수척, 향 소 부곡민)으로 3등급으로 세분화하여 천인(공노비, 사노비)과 더불어 4계층으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신량역천[양천제(良賤制)의 신분제하에서 양인신분을 갖지만, 그 역이 고되어 사회적으로 천시되는 사회계층]이었던 향 / 소 / 부곡은 구분이 엄격하였으나 신분 상승(특히, 향 / 소 / 부곡의 현 승격에 따른 공동 신분 상승)은 가능했다.

5.1. 중앙 행정[편집]

고려는 초기에는 태봉과 신라의 고유 관제를 바탕으로 광평성을 최고 중앙관부로 두었고, 이후 성종 때 당나라의 3성 6부제를 차용한 2성 6부제와 더불어 송의 중추원(추밀원), 삼사 등의 제도를 도입하였다.[29] 이에 태봉의 내의성, 내봉성, 광평성으로 이어지는 3성의 전통과 당의 3성제도를 결합하였다.
  • 내의성 → 내사문하성 → 중서문하성이되었으며,
  • 내봉성 → 상서성으로,
  • 광평성 → 어사도성 → 상서성으로 이어졌다.
현재 연구자 및 교과서에 따라 3성 6부, 2성 6부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 명예직 (최고 직위)
    • 3사 - 태사, 태부, 태보 / 정1품
    • 3공 - 태위, 사도, 사공 / 정1품
    • 중서령 (내사령) - 중서문하성 소속, 인신지극, 수상을 역임한 사람에게 명예직으로 부여 / 종1품
    • 상서령 - 상서성 소속, 왕족 종친(제왕)에게 수여 / 종1품
  • 중서문하성 소속 재신 (5재, 8인)
    • 문하시중 - 이상 종1품, 수상(총재), 실질적인 최고 관직
    • 문하평장사
    • 중서평장사
    • 문하시랑평장사
    • 중서시랑평장사 - 아상(2재) / 정2품
    • 참지정사 - 3재
    • 정당문학 - 4재
    • 지문하성사 - 5재 / 종2품
  • 중추원 소속 추신 (6추, 8인)
    • 판중추원사 (판사) / 종2품
    • 중추원사 (사) - 2인
    • 지중추원사 (지사)
    • 동지중추원사 (동지사)
    • 중추원부사 (부사) - 2인 / 정3품
    • 첨서중추원사 (첨서사)
    • 중추원직학사 (직학사) - 충렬왕 때 추가

이상 5재 6추 16명을 양부 재상이라 부르며 이들이 고려 재추회의 (재상회의)에서 국정을, 도병마사 (후기에는 중추원)에서 군정을 주도하였다.
  • 상서성 소속
    • 상서령(尙書令: 종1품)
    • 좌우복야(左右僕射: 정2품) 각 1명
    • 지성사(知省事: 종2품) 1명
    • 좌우승(左右丞: 종3품) 각 1명
    • 좌우사랑중(左右司郞中: 종5품) 각 1명
    • 좌우사원외랑(左右司員外郞: 정6품) 각 1명
    • 도사(都事: 종7품) 2명
  • 조선시대의 영의정과 달리 고려시대의 문하시중이 항상 보임하지는 않았던 관계로 판이부사를 담당하는 사람을 수상 또는 총재라 일컬었다. 문하시중이 보임한 경우 판이부사를 겸하고 결원인 경우 차석의 평장사가 판이부사를 맡았다.
  • 중서문하성은 종2품 이상의 재신과 간쟁과 봉박을 담당한 정3품 이하의 낭사(간관, 성랑)로 구성되었다. 문하시중 이하 지문하성사까지가 재신이며 간의대부 이하 정언까지를 말한다.
  • 상서성은 종1품 상서령 및 정2품 좌우복야가 있었으나 실제로는 재신들이 6부 판사를 겸직하였고 정3품 6부 상서를 추신(추밀)들이 겸직한 경우가 많아 재추에 의한 정치의 근거로 활용되어 왔다. 그러나 재추에 문벌귀족이 아닌 과거를 통한 관료재신들이 있었으며 또한 6부 판서를 모두 재신이 겸직하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아 실제로는 왕권이 강했다는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6부의 순서에서 고려는 사실 병부가 6부 중 2위에 있었다. 조선 때는 공조 바로 위로 강등되었다. 또한 예부 앞에 형부가 있었다. 즉 고려는 이부, 병부, 호부, 형부, 예부, 공부순으로 독자적인 구성을 갖추었다.

    상서성의 위상을 중서문하성의 아래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는 재신(재상)의 범위에 좌우복야, 지성사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중추원(후에 추밀원)은 왕명의 출납 및 궁중의 숙위, 군기를 담당하였으며 종2품 이상의 추밀(추신)과 정3품 이하의 승선으로 구분되었다. 추밀(추신)은 재추16인에 포함되는 고려의 재상이었으며 추부에 있었고 정3품 이하의 승선[30]은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며 승선방에 입직하였다.
  • 어사대는 시정을 논하고 풍속을 교정해 백관의 부정과 비위를 규찰하고, 탄핵하는 역할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사대의 독자적인 활동보다는 중서문하성의 간관(諫官)인 낭사(郎舍)와 상호불가분한 관계에서 직무가 수행되었다.

    따라서 본래의 임무에 봉박(封駁)·간쟁(諫諍)·시정논집(時政論執)·서경(署經) 등의 간관임무가 더해져 그 기능은 광범위하고 다양했다.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어사대의 관원에게는 불체포·불가범(不加犯)·면계(面戒: 면전에서 충고함.) 등의 특권과 여러 은전이 부여되었다. 또한 청요직(淸要職)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학식·출신성분·인품·외모 등의 여러 가지 자격과 조건이 요구되었다. 즉 역임자들은 과거 출신자로서 인품이 청렴강직하고, 외모가 뛰어난 문벌귀족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고려시대의 어사대는 조선시대의 의금부와 사헌부의 기능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법제와 왕실의 격식을 담당하는 식목도감이 있었으며 수상(총재)을 맡은 판이부사가 사를 맡았다. 이외 전곡(錢穀)의 입출과 회계를 맡은 삼사(송의 영향. 원 간섭기에도 존재), 천문을 보는 태사국 등의 중앙 행정기관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는 원 간섭기부터 즉, 충렬왕 대부터 제후국 체제로 관제가 격하되면서 변경되었다. 국가의 행정 업무는 2성이 1부(첨의부, 충렬왕 1년(수상은 첨의중찬, 좌우첨의중찬을 따로 부수상으로 둠))로 바뀌고, 6부는 4사(판서)(이부와 예부가 통합되고 공부가 폐지)가 되었으며, 다시 충렬왕 19년에 첨의부(첨의중찬)가 도첨의사사(도첨의시중)가 되었다. 충선왕이 복위된 뒤로는 다시 도첨의부(도첨의정승)이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과 같은 의정부와 정승의 시작이다.

    한편 추밀원은 밀직사가 되었고, 광정원으로 잠시 고쳤던 적이 있다. 충선왕 때는 밀직사가 첨의부와 동급이 되었다. 추밀원의 승선이 밀직사의 승지가 된 것이 조선시대 승정원 도승지 관직의 시작이다. 충선왕 때부터는 대언이라고 했었다. 금오대는 감찰사가 되었다가, 충렬왕 24년부터 사헌부가 되었다.

    공민왕 5년(1356년) 반원 자주 정책에 의해 2성은 중서문하성(문하시중), 상서성으로 회복되었으나, 6년 뒤 옛 이름인 도첨의부(첨의정승 - 첨의시중)로 통합되었으며, 7년 뒤 문하부(문하시중, 문하좌우시중이 부수상)가 되었다. 우왕 때 시중인 최영이성계의 쿠데타로 물러나자 문하좌시중이었던 이성계가 문하시중, 문하우시중이 된 조민수가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밀직사 역시 공민왕 5년 추밀원으로 부활했으나 6년 뒤 다시 밀직사로 낮춰졌다. 대언은 고치지 않았다가 조선 왕조에 가서야 승정원으로 고쳐진다.

    하지만 이런 변동에도 불구하고 실질적 문제는 군사 문제만을 논하던 임시기구 도병마사(성종조엔 병마사)가 변환된 도평의사사에서 처리하게 된다. 이는 조선의정부로 이어지며, 흥미롭게도 도병마사의 지위 변화는 조선 후기에 군사 임시 기구였던 비변사가 의정부를 대체하게 된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5.2. 지방 행정[편집]

사방 경계를 보면, 서북은 당(唐)나라 이래로 압록을 한계로 삼았고 동북은 선춘령을 경계로 삼았다. 서북은 그 이르는곳이 고구려에 미치지 못했으나 동북은 그것을 넘어선 것이다.

고려의 지방 행정 구역은 최초에는 8목이었으며, 성종 (995년) 때는 당나라를 모방한 10도 12군 체제였다.

10도는 관내도(關內道, 개경의 수도권), 중원도(中原道), 하남도(河南道), 강남도(江南道), 영남도(嶺南道), 영동도(嶺東道), 산남도(山南道), 해양도(海陽道), 삭방도(朔方道), 패서도(浿西道)였다.

한편 12군은 8목에서 늘린 12목에서 명칭을 바꾼 것으로, 양주(楊州)·광주(廣州)·충주(忠州)·청주(淸州)·공주(公州)·진주(晋州)·상주(尙州)·전주(全州)·나주(羅州)·승주(昇州. 훗날의 순천시해주(海州)·황주(黃州)로써 이 도시들은 조선 시대까지도 지방의 중심 도시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 태종 때 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州가 붙은 도시들이 많다는 이유로 이를 山 또는 川으로 변경했는데, 이 도시들은 대부분 州 호칭을 유지한 것도 알 수 있다.

또한 도읍 개경에 고려가 계승한 고구려의 도읍 서경 (평양성)에 더해 신라의 도읍 서라벌이었던 경주시동경으로 삼아(성종 6년) 삼경을 이루었다. 문종대에는 서울 강북 역시 남경으로 승격해 삼경의 한 축을 이루었다. 다만 서경의 지위는 동경, 남경과 같은 '부수도'가 아닌 개경에 버금가는 '제 2의 수도', 혹은 '또 다른 수도'였다. 원나라의 대도-상도의 이중 수도 시스템에 비슷했다.[31] 하지만 1136년 묘청의 난 이후 서경은 그저 그런 '부수도' 지위로 격하된다.[32]

이후 현종 때는 5도 양계경기 체제로 변경되었으며 5도는 경상, 전라, 양광[33], 교주[34], 서해[35]이며 양계는 북계[36]와 동계[37]였다.

경기는 수도 개경 주변을 일컬었다. 정확히 말해 경기'도'가 아니다. 이 당시 고려는 경기를 도와 별개의 지역으로 설정했다.[38] 경기 지역은 오늘날의 개성, 개풍, 장단, 연백 일대였다. 고려 말에는 경기가 더욱 확장되어, 현재의 황해도(북한이 설정한 행정 구역으로는 황해북도) 일대 및 경기도의 한강 이북 지역이 편입된다. 서경(평양)과 그 인근 지역에는 서경기를 설치해 수도로서의 서경을 존중하였지만 묘청의 난 진압 후 서경이 푸대접을 받게 되면서 폐지됐다.

문종 21년에는 삼경에 더해 양주의 일부에 남경(지금의 서울 강북)을 설치했다. 당시 동경이라 불렸던 경주는 몇 차례의 반란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일반 군현으로 격하된 적이 있었으나 고려가 황제국 지위를 유지하는 동안 전체적으로 동경의 위상을 유지하였다.

그렇지만 남경으로 지정되었다 하더라도 후에 조선 왕조에 의해 왕도(王都)로 승격되고 대한민국의 수도로 있는 서울은 이때까지는 어디까지나 개경서경에 비해서 크게 밀리는 편이었다. 물론 단순한 지방 도시는 아닌 삼경 중 하나인 남경이긴 했지만 지금과 같은 그런 큰 지위를 가지지 않은 곳이었다. 이런 곳이 후에 조선 왕조에 들어서 왕도로 지정되어서 600년 전통의 대도시가 될 줄은 이때까지만 했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서경, 동경은 애초에 고구려와 신라를 염두에 두고 지정한 것이라 각각의 수도였던 곳과 일치한다. 반면 남경이 백제의 수도 일대였다는 말은 지리적으로는 대충 맞지만 전통적인 인식상 틀린 말이다. 백제의 수도는 고려 남경이 있었던 한강 이북이 아니라 한강 이남의 남한산 일대에 있었지만, 고려가 구획한 남경 일대는 한강 이북에 있었는데다가 이 지역은 백제가 아닌 고구려의 영향력에 있었다고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에 쓰여져 있다. 즉 전통적으로 한강을 기준으로 이북(고려 남경)을 고구려, 이남(백제 한성)을 백제로 인식되었던 것.[39] 사실 한강 이남과 이북이 한몸이 된건 백년을 겨우 넘기는 정도이고, 한반도 역사 오랜 시간동안 한강 이북의 서울은 양주 → 한양으로, 한강 이남의 서울 동남부는 광주의 일부분으로, 아예 별개의 행정구역으로 있었다.[40] 또한 백제의 한성이 들어섰던 것으로 추정되는 일대는 조선 시대 한성부의 행정 구역 밖이었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온조왕이 초기에 수도 한성을 한강 이북에 지었다가 온조왕 14년(기원전 5년)에 다시 한강 이남으로 완전히 옮긴 것으로 보인다. 보통 풍납토성몽촌토성을 하남 위례성 일대로 보고, 하북 위례성은 유적이 없어서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으나 도봉구에 있었다는 추정이 있다. 이 추정이 맞다고 치면 위례성 일대가 현재의 서울로 편입된 건 오래되지 않았으므로 고려 남경 = 백제 위례성이라고 하기 곤란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백제를 염두에 두었으면 고구려의 영토로 인식되었던 한강 이북이 아니라 정말로 백제의 수도가 있었던 한강 이남의 한성이나 공주, 사비 일대로 했어야 하는게 맞다.

다만 고려사 지리지 남경 부분에 백제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고려인들도 대충 남경 부근에 백제의 옛 수도가 있었을 것이라 짐작한 것으로 보인다.[41] 추가적으로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고려가 삼경 중에서 특별히 서경을 우대했지만 개경-서경 사이에는 또 선을 그었다는 사실이 고려가 삼한일통 의식을 내세워 삼국을 모두 계승하였지만 개중에서도 고구려를 더 특별 취급을 해주었고, 그럼에도 본인들은 또한 삼한일통에 기반한 초월적인 정체성을 내세우며 이전의 고구려와 또 미묘하게 차별화를 시도했다는 점과 묘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점이다.[42] 사실 애초에 고려 왕실이 노린 바일 수도 있다.

5도는 그 아래에 주현과 속현이 있었는데, 주현은 규모가 큰 도시에 지방관이 파견된 고을을 말하고, 속현은 그 주현의 지휘를 받는 지방관이 없는 고을을 가리킨다. 고려 시대는 주현보다는 속현이 많았다. 심지어 조선 초까지도 속현이 존재했다. 지방에 외사정을 파견한 신라보다 중앙 집권 체제가 철저하지 못했다. 고려의 태생 자체가 호족들이 연합해서 세워졌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다고 신라가 고려보다 엄청나게 중앙 집권 체제가 강했던 건 아니었고 한국사에서 중앙 집권 체제가 철저하게 이루어졌던 나라는 오로지 조선뿐이었다. 그 이전 국가들은 시대적, 지리적 한계상[43] 재지 세력들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것 자체가 힘들어 연맹왕국 단계를 넘어서도 봉건제적 요소가 꽤 남아있었다. 이건 철저한 관료제를 통해 중앙 집권 체제의 선두국이었던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골머리를 앓았던 문제였기 때문에 이상할 건 없다. 물론 그 중국 또한 각 왕조의 말기에 가면 통제를 잃고 지방에서 반란 터지고 난리 나는 건 똑같았다. 조선의 경우도 몽골군의 침략과 고려말의 대혼란으로 한반도 지방 세력들의 사회 공동체가 와해되고 기반이 완전히 박살난 뒤였기에 중앙 집권 체제가 수월하게 자리잡을 수 있었다.[44]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교체기에, 할거하거나 독자정체성을 주창하며 일어난 지방세력이 전혀 없이, 쉽게 말해 후삼국시대가 재현되지 않았던 점도 이와 연관이 깊다고 보인다.
도 아래에는 군, 현이 주를 이루었으나 특수 행정 구역인 향, 소, 부곡도 있었다. 이것들은 주로 천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는데 종류에 따라 수공업과 농업 기능을 가졌다고 2011년 기준으로 2년 ~ 3년 전까지의 국사 교과서에서 말해 왔다. 하지만 전부터 향, 소, 부곡민에 대해선 논쟁의 대상이었다. 학계에서는 이미 1960년대 이래 향, 소, 부곡민이 양민이었다는 설이 나오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향, 소, 부곡이 천민이 아니라 '신량역천', 즉 천민의 일을 하던 양인들이 살던 곳이라고 하는 주장이 나온다. 이것은 양인에 대한 해석에서 나온 것인데 양인은 국역을 지고 독립된 가호로서 존재하여 개인에 종속되어 국역을 지지 않는 천인과는 구별된다. 부곡민의 경우 중국의 부곡과 달리 주가의 호적에 부적되지도 않았던 데다 국가에 각종 공역을 지고 있다. 이는 분명 천인과는 다른 모습이다. 향, 부곡은 농사를, 소는 수공업을 생산하는 기능을 한다는 해석이 발표되었다. 또 소에선 일부만 수공업에 종사하고 소의 주민 대부분은 농사를 짓는다는 설도 존재한다. 또 소에서 수공업을 하는 주민은 소의 주민이 아니라 진정한 소의 주민은 농사를 짓는 주민들이란 설도 존재한다. 실상 사료가 적은 탓에 이리저리 많은 설들이 난무한다. 이러한 특수 지역은 고려 말이 되면 주민들의 저항과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사실상 향, 소, 부곡 제도가 붕괴되어 다른 지역과 실질적으로 차이가 없어졌다. (웅진 지식 하우스,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 참조)

양계(북계, 동계)는 특수 군사 지역으로 그 아래에는 군현 대신 도호부와 진이 있었다. 속현이 많은 5도 지방과 다른 점은 대부분 진에 지방관이 파견되었다는 점인데 국방을 위해 당연한 조치라고 할 수 있겠다. 5도 양계였던 시절 동계는 특이하게 국경선에서 한참 떨어진 현재의 강원도 영동 지방까지 관할 지역으로 걸쳐 있었는데, 이는 여진족 해적들 때문이었다.

5도 양계 이외에 지금의 함경도 지역에 여진족들을 직간접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기미주현을 설치하여 고려와 인접했던 여진족들을 관리하였다. 이곳에는 실제로 고려 관리들을 파견하여 고려 민호로 등록하고, 이 지역에 고려법을 적용하는 등 이곳을 관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실제로 수천에서 만 명 이상 규모의 여진족들이 지금의 길주 이북지역에서도 귀화하려고 했다.[45] 하지만 금나라를 세운 완안부와의 갈등으로 이 지역을 중심으로 동북 9성을 설치하였고, 이후 결국 동북 9성의 반환과 금나라의 건국으로 이 지역에 대한 고려의 영향력은 줄어들게 되었다.

수도인 개경 외에도 따로 부(副) 수도들이 존재했다.[46] 흔히 고려 3경이라고 부르는데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 개경 + 부 수도 2곳('개경, 서경, 동경' 또는 '개경, 서경, 남경')을 가리키거나 개경을 제외한 나머지 세 곳(서경, 동경, 남경)을 지칭할 수도 있다. 개경을 포함한 3경에는 동경과 남경이 동시에 들어간 시기가 매우 짧아서 시대에 따라 둘 중 하나가 빠졌다가 다시 포함되었다가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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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기의 행정 구역. 성종 때의 10도 구역.

고려 후기의 행정 구역. 북방으로 영토가 확장되는 등 변동이 있어서 양계가 없어지고, 대신 동북면(고려 말 이성계의 본거지로 유명)과 서북면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경기 및 각 도의 행정 구역에도 여러 변동이 있었다. 동계의 영동 지방과 교주도가 '교주강릉도'로 통합되고, 서해도의 상당 부분과 양광도의 남경(한양), 양주, 부평, 인주 등 서북부 지역이 경기에 편입됐다. 이로써 이어지는 조선8도와 유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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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형벌 제도[편집]

고려사 '혹리열전'의 서문을 보면 '고려는 나라를 관대하게 통치해 참혹한 형벌이 없었으나, 변란이 잦아진 이후로 일 처리에 밝은 관리를 임용하면서 잔혹(殘酷)한 풍조가 비로소 일어났다.'라고 밝히고 있고, 또 고려사 권 84, 지제 38, 형법(刑法)1의 서문을 보면 고려왕조 5백년 동안의 형법 제도에 '그러나 그 폐해를 살펴 보면, 법망을 제대로 펴지 못해 형벌이 느슨하고 사면이 잦은 까닭으로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들이 법망을 빠져 나와 제멋대로 행동해도 이를 금지할 도리가 없었으니, 고려 말기에 이르러서는 그 폐해가 극심해졌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어서 고려의 형벌제도가 고려왕조 5백 년 기간 내내 매우 너그러웠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중종실록 중종 13년(1518년) 10월 23일 기사를 보면 권벌이라는 신료가 '또 전조(前朝)에서는 가법(家法)이 아름답지 못하여 동성(同姓)과 결혼하여 기강(紀綱)이 없었지만 죄없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았으니 이는 취할 만합니다.'라는 이야기를 해 고려왕조가 형법과 사형에서 너그럽고 훌륭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고려 인종 당시에 1개월간 고려를 방문하고 돌아가 고려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문화 제도들을 설명한 책인 고려도경을 쓴 송나라 사신 서긍도 '고려도경' 제16권 관부(官府) 영어(囹圄)편에서 '태장(笞杖)은 매우 가벼워 백 대에서 열 대까지 그 경중에 따라 가감(加減)한다, 오랑캐들의 성격이 본디 인자하여, 죽을 죄라도 거의 용서하여 산골이나 섬으로 유배(流配)하고, 사면해 주는 것은 세월의 다소와 죄의 경중을 헤아려 용서하여 준다.'라고 말해 우리나라를 오랑캐라고 대놓고 비하하는 짓을 했어도 고려가 형법과 사형 집행에서 매우 너그러운 사실은 분명히 인정할 정도였다.

물론, 여기서 고려에서는 중죄인의 경우 '결박하여 앉힌 다음에 등을 계속 세게 눌러 가슴과 넓적 다리가 계속 닿게 해서 피부가 터진 다음에야 그만둔다.'라는 말을 하기는 했으나, 실제로 고려사에 적힌 형법의 종류에서 이런 형법은 없었고, 또 서긍이 자신의 책에서 우리나라를 대놓고 '오랑캐'로 비하하는 것을 모두 감안하면 이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47]

그리고 고려시대 사극에서도 흔히 나오는 주뢰, 압슬, 낙형 같은 조선시대에 비로소 나왔던 혹형이 나오는데 이 역시 전혀 사실이 아니다. 고려사 형법지 '형장의 규격' 부분을 보면 고려시대 고문의 방법은 등에 때리는 곤장과 엉덩이에 때리는 곤장, 또 얇은 몽둥이로 엉덩이를 때리는 태형, 이 3가지밖에 없는 것으로 나오고, 압슬의 경우 두산백과에서는 조선시대 때 시행된 고문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흔히 단근질로 이야기되는 낙형의 경우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낙형 편을 보면 조선시대때 시행된 고문으로 나올 뿐이다. 고려사 지의 '사형의 두 종류' 편을 보면 교수형과 참형밖에 없다고 나온다.

6. 군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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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경제[편집]

고려는 창업군주 태조(고려)왕건부터 상업으로 세력을 키운 호족 가문 출신으로 건국 초기부터 상업을 보호, 육성했다. 태조 2년(919년)에 개경의 궁성 동문인 광화문에서 남대가(南大街)를 따라 십자가(十字街)에 이르는 중심 도로변에 시전(市廛)이라는 시장을 설치했고 여기서 지배층 및 사찰과 연계된 상인들이 상업 활동을 했다. 고려 말을 기준으로 개경에는 최소한 1,200여 칸 이상의 시전 행랑에서 2,400명 ~ 3,600명 이상의 시전 상인이 영업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정부는 시전 운영에 적극 관여해서 각 시전의 판매 품종을 지정했고, 활동하는 상인에 대한 장부를 만들어 철저히 관리했다.(고려사 권85, 지39, 형법2, 금령, 공양왕 2년 4월).

시전 이외에 국가에서 운영하는 주점, 다점(찻집), 식미점 등 관영 상점이 있었는데 이들은 화폐의 민간 통용을 장려하기 위한 시설로 이용되었다. 상행위를 감독하기 위해 경시서를 설치했고, 경시서는 도량형을 감독하고 물가를 조절하며 불법 상행위를 단속하는 일을 했다.

개경서경, 동경 등 전국의 주요 도시에도 개경의 시전과 비슷한 관영 상가가 있었고, 전국 각지에 비상설 시장인 장시(場市)가 열렸다. 고려시대에는 최소한 조선 초기보다 훨씬 활발하게 장시가 운영되었다.[48] 송나라 사람 서긍이 1123년(인종 1년)에 사신으로 개경에서 한 달을 체류한 후 돌아가 쓴 『고려도경』에 아래와 같은 글귀가 있다.
고려의 고사(故事)에, 매양 사신이 이르게 되면 사람들이 모여 큰 저자를 이루고 온갖 물화를 나열하는데,… (중략)… 대개 그 풍속이 사람이 살면서 장사하는 가옥은 없고 오직 낮에 시장을 벌여(惟以日中爲虛) 남녀・노소・관리・공기(工技)들이 각기 자기가 가진 것으로써 교역하되 돈을 사용하는 법은 없다. 오직 저포나 은병으로 그 가치를 표준하여 교역하고,… (중략)… 그러나 백성들은 오래도록 그런 풍속에 익숙하여 스스로 편하게 여긴다.

고려도경, 권3 무역.

위 인용문 중 ‘허(虛)’는 허시(虛市), 즉 장시를 의미하는데 특정한 시설물이 없이 빈 터에 장이 섰다가 사라졌기 때문에 허시라고도 했다. 지방의 장시에서는 고려 정부에서 찍어내는 화폐보다는 쌀과 포로 매매가 주로 이뤄졌다. 고려 시대에는 여행객의 편의를 위해 조성된 원(院)이 발달했는데, 이 원은 상인의 숙박 시설을 넘어 그 자체가 상업 중심지가 되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한강광주의 사평원은 많은 배가 오가는 중요한 교역처였다. 고려의 지배 이념이자 종교였던 불교 역시 상업 활동에 호의적이고 사찰이 상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 말기 개혁파 신진사대부들은 성리학적 상업관(억말론, 抑末論)에 입각해 상업 활동에 비판적이었고 백성들이 농업에 집중하기를 장려해 왕조 교체를 거치며 상업 정책도 방향을 달리하게 되었다.

고려 시대의 무역은 공무역(公貿易) 중심으로, 통일신라 시기보다 사무역은 쇠퇴하였으나 화북의 이민족 왕조를 견제하기 위해 고려에 어느 정도 의존하는 송의 외교 상황과 맞물려 문화적 교류는 더욱 활발하였다. 개경에는 벽란도라는 무역항이 있어서, 이곳에서 무역이 상당히 활발했으며 송나라, 일본의 상인은 물론이고 교지국, 섬라곡국, 마팔국에다가 대식국이슬람 상인들까지도 거쳐갔다고 한다.

고려는 벽란도와 같이 수도 개경과 가까운 예성강하구를 국제무역로로 육성하였는데 이곳에는 송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순천관이 있었고, 외국상인들을 위한 오빈관 등 10개나 되는 외국인용 숙소가 있었다. 이곳에서 개경까지는 동서로 도로를 만들어 놓았고, 뱃사공을 배치하여 사신이 개경에 갔다 올 때까지 선박을 지키게 하였다. 고려의 대학자 이규보는 벽란도의 붐비는 풍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물결은 밀려왔다 다시 밀려가고, 오가는 뱃머리 서로 잇대었네
潮來復潮去 來船去舶首尾衡相連
아침에 여기서 떠나면 한낮이 못 되어 남만에 이른다네
朝發此樓底 未午棹入南蠻天


또한 고려사절요에는 배들이 수없이 들어와 값진 보배가 넘쳐나서 중국과 교역하더라도 얻을게 없을 정도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나라는 문물과 예악이 흥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며 장삿배가 연이어 내왕하여서 값진 보배가 날마다 들어오니, 중국과 교통하여도 실제로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거란과 영구히 절교하지 않을 터이면 송 나라와 교통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따랐다.

<고려사절요 문종 12년>

한국의 비한자계 외국어 명칭이 코리아(Korea)가 되어 조선 시대를 거쳐 현대까지 사용되는 것도, 이때 이슬람 상인들이 '고려'를 그들 식으로 발음한 것이 어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 다만 여기에는 다른 설도 있다. Korea란 명칭이 서역에 알려진 것은 751년 탈라스 전투고구려 유민 출신인 고선지의 용맹함이 이슬람 연합군에 알려지면서라는 설이다.[49] 사실 고려와 고구려는 같은 말인데, '구려'는 옛말로 성, 읍, 나라의 뜻을 가진 단어고 한 글자로 줄여서 부를 때 '려'로 불렀다.[50] 이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이전 중국 사서에서도 고구려를 고려라 표기한 흔적에서도 나타난다. 고려의 ㅕ가 탈락하면서, 현대 우리말에도 '고을'이라는 단어로 나타난다.

대신 고려가 이슬람 사서에 기록된 것은 총 2회뿐이다. 물론 사서에 명시되지 않았다고 비중이 적어졌다고 보긴 힘들 것이다. 앞서 말한 송나라의 상황이나 코리아의 근원, 쌍화점을 보면 민간에 끼치는 영향은 적지 않았을 수준이었을 것이다.

고려가 가장 빈번하게 교역한 나라는 송나라였다. 당나라에 있던 신라방처럼 송나라에, 특히 절강성, 복건성 같은 강남지역의 해안지역에 고려인 거주지역이 있었다. 중국과의 교류에서 주로 압록강을 건너는 육로를 택했던 조선시대와 달리 고려시대에는 초기에는 산둥 반도의 등주에서 거의 직선 코스로 대동강 어구의 초도, 옹진, 예성강으로 이르는 길이 중심, 그리고 거란족의 위협을 느낀 이후로 전라도 방향으로 항해하기도 했다. 활발하던 양국 간의 무역은 남송 시대 이후 차츰 쇠퇴했다.

일본은 907년 견당사 파견을 중단한 이후 쇄국정책을 유지하며 왕건의 국서에 황제국 용어가 쓰였다며 국서를 거절했다. 하지만 현종대 여진해적들에게 잡혔던 일본인 포로를 송환하면서 관계가 본격적으로 성립되었다. 이후 다자이후진해를 중심으로 지역적인 경제교류가 진행되었다. 또한 고려는 대마도와 이키섬에 지방관들에게 관직을 주고 규슈지역의 지방관들의 조공을 받으며 왜구방지와 고려인의 해상활동을 보호했다.

거란과는 초창기 이후 국교를 트긴 했지만 교역은 송나라 방면에 비해 활발하지 않았다. 거란은 무역장 설치를 요구하는 등 비교적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고려와 여진족의 교류는 금나라가 성립되기 훨씬 전부터 있었는데, 고려사에 따르면 10세기 초반에서 11세기 초반까지 여진의 추장이 무역을 위해 고려에 온 것이 230여 회나 될 정도로 자주 왕래했다. 고려로서는 경제적 부담이 있었으나, 안보적 측면을 고려해 여진과 교역했다. 금나라 건국 후에는 국경선 부근에 무역장(각장)을 설치해 비교적 활발하게 교역했다. 금나라는 각장에 세금도 부과하고 유출금지 품목이나 동전유출도 금지하였다.

상술했듯 고려 시대에는 아라비아 (대식국, 大食國)인과의 교역도 종종 이루어졌는데, 당, 송 시대 이래로 무슬림들은 광저우 등 남중국을 중심으로 무역을 했으며, 송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해외 무역을 장려하는 왕조였기에 이들이 고려에까지 진출했다. 1020년대에서 1040년대에 걸쳐 3차례 100여 명의 대규모 상단이 방문한 것이 확인되며 그 이후에도 계속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수은, 향료, 상아 등 고려에서 귀한 사치품을 팔았다. 그러나 아라비아 상인단은 송나라의 시박사(市舶司)의 통제를 받았기 때문에 고려와 1대1로 활발하게 교역하기는 어려웠고 주로 송을 매개로 간접적으로 교류하는 쪽이 주류였다.

훗날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진 후에도 주변 국가인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조선을 가리켜 여전히 '고려'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성계주원장과의 알력으로 명나라 황제의 책봉을 받지 못하자 왕건 때부터 전해 내려온 '고려권지국사'라는 명칭을 사용한 적도 있다. 당나라가 망한 뒤에도 일본에서 중국을 여전히 당이라고 부른 것이나, 일본이 일본이란 국호를 만들었음에도 다른 동아시아국가들로부터 왜(倭)라고 불린것과 진나라가 망했음에도 중국이 차이나라고 불리는 것과 같은 이치. 조선 측에서는 이러한 이름을 부담스러워 했고, 바뀌는 데 시일이 걸렸으나, 한자문화권에서는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슬람쪽과는 교역이 없었기에, 이슬람과 서양 쪽에 굳혀진 고려라는 이름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대한제국은 영미권에서 Korean Empire로 불렸는데, 대한제국(조선)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멸망시킨 전 왕조의 이름이었기 때문에 기겁하고 Empire of Dai Han 같은 이름을 열심히 밀었지만 끝까지 관철되지는 못했다. 러시아쪽도 마찬가지라 중국조선족이지만, 중앙아시아에서는 고려인이다. 정치적 문제도 있지만, 그 이전에 러시아어로 우리 민족을 조선이 아닌, 고려로 불렀다.

대외적으로 한반도 국가를 가리키는 명칭은 고려에서 비롯된 비한자 계통 외국어 이름인 'Korea'가 되어버리고, 심지어는 지리적 지형 자체가 '고려 반도'라는 뜻의 'Korean Peninsula'로 굳어져버렸다.

원 간섭기에 들어서 고려는 세계 제국 원나라와 단일 경제권에 속함으로서, 고려 후기의 대외 교역은 그 양적으로 현대 이전 한국사의 어느 때보다 활발했다. 원나라의 지폐인 보초(寶鈔)가 고려에서도 활발히 사용되었다.

8. 문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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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외교[편집]

고려가 자리잡았던 10~13세기는 동아시아에는 다원적 천하질서가 자리잡았던 시대였다.[51] 이에 송, 요/금, 서하, 고려, 일본, 대월, 대리국 등 모두 자국의 군주를 천자나 그에 준한 존재로 자칭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이 시기의 국제관계는 각 국의 독자성을 기초로 형성되었다. 그러나 당시 동아시아에서 국가 간의 질서가 다중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해서 국가 간의 차등적인 위상이 배제되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실례로 송과 요는 실질적으로는 대등한 대적국의 위치였으나 형식적으로는 상호 형제국으로 송이 형, 요가 아우의 위치에 있었으며 그 대가로 송은 요에게 공물의 성격을 지난 막대한 세폐를 요에 헌납해야 했다. 이에 형식적 위상은 실제 힘의 차이에 따른 관계와 괴리되어 있었다.

요나라와의 관계를 먼저 살펴보면 만주를 포함한 북방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두고 서로 다투는 사이였으며 고려가 여요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북방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따라서 고려가 요에 대해 취한 신하로서의 위치는 명목상에 불과했다고 여길 수 있는 부분. 실제로 고려는 전쟁 이후 요와의 관계를 화친 관계로 규정했고 그것이 당시 실정에 부합하기도 했다.[52] 여기서 화친관계란 양국 간의 전쟁 이후 맺어진 평화적인 국제관계를 의미하며 주로 정치적인 관계를 중심으로 형성된 국제 평화 질서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개념이다.[53] 고려의 해동천자, 해동천하 개념의 확립은 여요전쟁 승리 후 북방 제번에 대한 통할력이 생긴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할 수 있다.

고려와 송 사이도 역시 국제 관계의 형식과 내용이 괴리되고 있었다. 송이 고려에 대해 갖는 영향력은 극히 제한적이었는데(일단 육로로는 요에 의해서 끊겨 있고 바다로만 오가는 사이었으므로) 외교의 단절 및 통교의 주도권은 항상 고려가 지니고 있었으며 송은 그를 저지할 힘도 명분도 부족했다. 고려의 송에 대한 관계는 통교 관계 이상이라 볼 수 없다. 통교관계는 무역, 통상, 무역교류 등을 중심으로 한 관계로 정부 대 정부의 성격은 약한 관계를 말한다. 송은 고려와의 외교 수준을 국신사로 정리하여 진행하였으며 이는 당대 요와의 관계와 동일한 수준이었다.

한편 일본은 동아시아 세계의 외곽에 있으면서 다른 여러 나라에게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외교적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일본 자체가 고립을 선택했고 그 바탕에는 자기 세계에 대한 자족적 인식이 깔려있었다. 그러나 고려, 송 등과의 경제적 교류는 있었으며 때로는 일본 상인이 팔관회에 참석하여 해동천하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고려 해동천하는 10세기~13세기 중엽까지 지속되었으며 1126년 금나라에 대한 사대 외교를 정하면서 그 방향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54] 북방의 번국으로 여기던 여진이 금국으로 독립하면서 북방의 영향력뿐만 아니라 번국의 상실은 해동천하의 붕괴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면상 칭신사대였으나 고려에서는 화친으로 표현했으며 실제로도 그러하여 금과의 외교 관계 번반은 모두 이전 요와의 화친 격식에 준하여 성립되었고 금이 멸망할 때까지 지켜졌다.[55] 그러나 한때 번국이었던 여진에 대한 화친수용 및 칭신사대에 대해 고려 내부의 진통이 없을 수 없었다.[56]

다원적 천하질서는 13세기 몽골의 발흥으로 그 수명을 다했으며 이후 명, 청으로 이어지는 강력한 중화제국과의 관계는 전통적인 해동천하관을 붕괴시켰고 그에 따라 고유의 천하관을 포기한 조선의 외교정책 수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57]

10. 외왕내제 여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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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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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인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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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고려사 연구의 난관[편집]

고려 시대 연구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점은 조선시대에 비해 사료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특히 고려 초는 더 심해서, 몇백년 전인 7세기 삼국통일 당시보다도 사료가 적다.[58] 이 시기를 다룬 주요 사서로는 조선시대에 쓰여진 고려사, 고려사절요가 있으며 동시대 북송의 사신이었던 서긍이 쓴 고려도경요사, 금사, 송사, 원사, 명사 외국열전의 고려 편이 중요 사료로 꼽힌다. 고려사, 고려사절요는 조선 시대에 편찬된 고려의 역사서다. 고려에도 고려실록이 있었으나 여요전쟁이나 대몽항쟁기 등의 전란 때 소실, 남아있는 실록 또한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조선 초에 남아있던 고려실록을 바탕으로 하여 만든 축약본이다.

그러나 3가지 사료 모두 편파성이 있다. 일단 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의 입장에서, 나머지 사료들은 요나라, 금나라, 나라, 원나라, 명나라의 입장에서 바라본 고려의 모습이기 때문에, 사실 그들 스스로 역사를 서술한 예는 드물다. 고려 시대에 삼국을 바라본 예가 삼국사기, 삼국유사이다. 이 두 역사서는 삼국의 역사를 서술했지만 고려의 시각에서 고대를 해석한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그나마 세종대왕이 각별히 신경써서 편파성을 줄인 고려사와 그런 거 없는 고려사절요는 고려가 멸망한 후 조선 초기에 고려의 사초를 바탕으로 편집되었는데, 아무래도 조선 건국의 정당성 홍보 요소가 제외될 수가 없다. 따라서 고려 말기의 사건들(특히 공민왕, 우왕, 창왕시기)은 여러 모로 비판을 받고있다. 거기다 요약집이나 다름없어 텍스트가 조선왕조실록과 비교했을때 너무 부족하다.[59] 이는 고려가 겪었던 여러 전란이 원인이기도 하다.

고려도경과 요사, 금사, 송사, 원사, 명사의 경우, 사신단의 교류와 고려에 심어놓은 스파이를 통해 보고 들은 정보를 요나라, 금나라, 나라, 원나라,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 글이기 때문에 주마간산, 수박 겉핥기 수준이다. 몇 가지만 들면, 고려도경에서는 고려의 역사와 관리 등급을 설명하는 부분이 고구려와 뒤섞여 있다. 또한 서긍은 고려가 바닷가에 위치해 있으면서 선박이 지극히 단순하고 조잡하며 작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고려는 여진족 해적을 토벌하면서 일본까지 원정을 갈 정도로 선박 / 항해 기술이 뛰어났고(과선 문서 참조.), 근래 고려 시대의 고선 발굴을 통해 대형선의 존재도 입증되었다. 물론 당시 서긍 일행이 타고 온 사신선인 신주(神舟)에 비하면 보잘 것 없을지 몰라도, 신주 자체도 당대 송나라의 엄청난 기술력과 자본을 투자해 만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고려의 선박 수준은 전혀 낮은 수준이 아니다. 더구나 원래 문서에는 도경이란 표현처럼 그림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이게 세월이 흐르면서 난리통에 다 날아갔다. 때문에 이 세 사료 모두 철저한 사료 비판이 필요하다.

고려에도 분명히 실록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전부 유실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중 선조수정실록을 보면 원래 한성 춘추관 사고에 고려 실록이 보존되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유실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고려사고려사절요는 안의, 손흥록 등이 보존하여 오늘날에 이를수 있었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이 고려왕조실록의 것을 전범으로 삼았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내에 짐, 외왕내제 등 조선 시대 사람으로선 상상도 못할 단어가 가감없이 들어갔다곤 하지만 고려 사람의 시각에서 고려시대를 기술한 것은 아니다. 또 고려도경은 중국의 입장에서 고려를 바라본 사서고 그 시기 또한 한정적이다. 그 외에 이규보 등의 문집이 있지만 고려 시대 전체를 파악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드물게 문중에서 고려 시대 문서가 나온다 해도 그 수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 오죽하면 고려 시대 관직 임명장은 나오면 보물급이라는 말까지 할 정도다. 이 때문에 고려 시대사 연구자 대부분은 한문을 기본 소양으로 장착하고 몽골어, 만주어 등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면서 사료 탐색에 열을 올리고 있다.

여담으로 인하대 고조선 연구소[60]에서 2017년 5월 22일 고려의 천리장성이 요동에 있었다는 주장을 제기했으며, 5월 26일 관련 학술 대회를 열어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 # 그러나 학술 대회를 반복적으로 열 뿐, 정식 논문으로는 단 한 차례도 제출된 바 없으며, 통용되어 쓰이는 압록(鴨錄)과 압록(鴨淥)이 서로 다른 강이라고 주장하는 등 논리적으로 문제가 많다. 다만 러시아에서 블라디보스토크 근처에서 고려시대 유적이 나왔다고 하니...# 일단은 두고 봐야할 듯 싶다. 조선시대 유적도 나옴으로서 고려-조선 시기의 국경에 대한 논의가 새롭게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다른 난관을 하나 뽑자면 조선과 달리 고려 유적지 접근에 대한 한계를 들 수 있다. 고려 수도인 개성은 현재의 북한령이라 북한과의 긴밀한 협력 없이는 만월대고려왕릉 등 주요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 진행 자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고려시대 연구는 특히 남북관계가 진전되면 활성화되고 반면 남북관계가 경색되면 더뎌지는 독특한 특성이 있다. 그나마 고려 왕조가 강화도를 수도로 삼은 기간이 있어 위안이 되기는 하지만 문제는 강화도는 임시 수도격이었기 때문에 본 수도였던 개성과 기간면에서나 남아있는 문화유산의 질적 수준에 있어서나 격차가 상당한 편이다. 남한에 남아있는 고려왕릉 중 가장 잘 보존된 무덤이 고종홍릉인데 아무래도 고려 국력이 약했을 시기이고 또한 왕실보다 최씨 무신정권의 권세가 막강했던 시기라 개성의 무덤들이나 조선 및 신라의 왕릉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양식도 간소하고 초라한 편이다.[61]

북한이 가난해지면서 평양개성 등의 수많은 문화재들을 중국에 팔고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땅만 파면 문화재가 나오는 곳이니 그들 입장에서는 분명한 노다지일 것이다.

14. 고려를 배경으로 한 작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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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같이보기[편집]

15.1. 정치[편집]

15.2. 행정[편집]

15.3. 군사[편집]

15.4. 경제[편집]

15.5. 문화[편집]

15.6. 건축[편집]

15.7. 고려를 다룬 사서[편집]

15.8. 당시 만들어진 책, 작품[편집]

15.9. 기타[편집]

1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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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의 시대별 사회지배계층 구분
[1] 고려의 의장기 중 하나인 봉기(鳳旗)로, 템플릿의 이미지는 1123년 북송의 사신 서긍이 저술한 선화봉사고려도경의 봉기 관련 서술과 조선시대의 벽봉기를 바탕으로 전쟁기념관에서 복원한 것이다.[2] 후기 이전까지는 압록강 ~ 동한만 이남에 이르는 영역으로 비정하고 있으나, 고려의 정확한 영토 경계에 대해선 아직 연구 중이다. 또한 동북 9성의 해석에 따라 동북지방에 대한 비정이 달라질 수 있다. 당대에 고려의 동계가 전대의 고구려보다 더 동쪽이었다는 기록도 있다.[3] 공민왕기 제1차 요동정벌.[4] 현 랴오닝 성 단둥 시 일대 점령.[5] 현 랴오닝 성 랴오양 시 일대 점령 후 퇴각.[6] 본궐은 태봉국 철원성.[7] 전반부 본궐은 만월대. 임시로 연경궁, 수창궁이 쓰였다. 후반부 본궐은 만월대를 흡수한 연경궁, 공민왕 대엔 수창궁.[8] 대몽 항쟁기에는 강화도(강도, 江都)가 수도였다. 본궐은 고려궁지. 1270년 원종이 개경으로 환도한 뒤, 부수도가 되었고 충렬왕 34년엔 강화현으로 격하되어 부수도의 지위도 잃었다.[9] 우왕공양왕대 각각 5개월 정도 고려의 정식 수도였다. 이러한 남경의 기반 덕에 바로 뒤이은 조선이 한양을 수도로 삼을 수 있었다.[10] 본궐은 장락궁.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태조 ~ 인종 중반 기간 동안 서경의 지위는 고려의 '부수도'가 아닌 '또 다른 수도'였다. 1136년 묘청의 난 이후 수도가 아닌 부수도로 격하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의 지방 행정 부분 참조.[11] 말갈족은 대부분이 발해 멸망 이후 고려가 발해의 유민들을 받아들였을 때 들어왔다. 이후에도 여진족이나 거란족 중 일부가 고려인으로 통합되었다. 통일신라기에는 후삼국으로 분열할 만큼 종족 정체성이 유동적이었으나, 고려 후기에 고구려인, 신라인, 백제인 등의 독자적 정체성이 완전히 소멸한 것으로 보인다.[12]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긴 했지만 이슬람 등 타 종교도 금하지 않고 자유로이 믿게 하는 등 신앙의 자유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13] 모든 고려국왕의 공식 존호는 '대왕(大王)'이었다. 광종 재위 중 몇년 간 황제(皇帝)호로 바뀌었다가 대왕호로 돌아왔다. 고려국왕은 외왕내제 체제 하에 천자로 군림했다. 고려국왕은 만승(萬乘), 성황(聖皇), 황왕(皇王), 신성제왕(神聖帝王) 등 천자국 예법에 맞는 미칭을 사용하였다.[14] 광종 대성대왕의 칭제건원[15] 원 간섭기로 인해 천자의 제후가 됐으며 성립 후 명 천자의 제후임을 천명했다.[16] 918~936년의 18년은 엄밀히 고려시대가 아닌 후삼국시대이다. 936년~1392년의 역사니까 당연히 456년.[17] 이들 지역들은 세종대왕4군 6진 개척으로 조선의 영토로 편입이 되었다.[18] 이전에 고려가 여진족들에게 조공받던 시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19] 몽골군 초기 침입군의 총사령관은 한국인들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살리타이인데, 이 사람은 무칼리가 이끌던 잘라이르족 출신으로 이 부족은 당시 최강대국이자 몽골족 최대의 원수 금나라와 여러 차례 정면으로 충돌한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스님인 김윤후에게 죽었다고 무시당하는 경향이 있지만 살리타이 본인도 금나라와의 전면전에 참전한 역전의 용사였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그리 무능한 인물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철저한 능력주의 사회였던 초기 몽골에서 능력이 없었으면 그 정도 지위까지 가지도 못했을 테고. 이후에는 원정 병력의 정예도가 좀 떨어졌을 가능성이 있지만, 쿠빌라이 칸이 고려에 "아직 몽골에 항복하지 않은 나라는 남송과 너희 나라(고려)뿐이다."라고 한 적도 있다는 걸 보면 전쟁 후반부에도 몽골 수뇌부는 고려가 끈질기게 저항하는 세력으로 인식했던 모양(정확힌 베트남 등까지). 더군다나 당시 쿠빌라이 칸은 남송정복전쟁을 직접 지휘하고 있었다.[20] '역사저널 그날 - 쿠빌라이와 원종의 만남, 고려의 운명을 바꾸다.' 편 참조. 하지만 여몽전쟁 당시 고려가 정말로 제대로된 외교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비판하는 의견 또한 많다. 임용한 교수 또한 자신의 저서에서 이 당시 고려 조정의 행태를 강하게 비판한 적이 있을 정도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여몽전쟁/평가여몽전쟁/무신정권 비판 문서를 참조.[21] 당시 몽골인들은 옛 송나라 영토나 서쪽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 등으로 이주의 눈을 돌렸기 때문에, 위구르계 장씨 정도 등을 빼면 생각보다 고려에 귀화한 몽골인은 수가 많이 적었다.[22] 고려와 고구려는 사실 같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이전에 고구려가 고려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왕건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그냥 고구려로 부르는 것. 실제로 중국 사서에서는 장수왕 이후 고구려를 고려로 표기했다. 조선 전기의 한글 문헌에서는 '고려'로 발음이 언급되는 바, 적어도 고려 후기에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고려라고 불렀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는 훗날 서양에는 Corea 내지는 Korea로 알려지게 된다.[23] 현대의 발음은 '가오리'지만 당송대의 중고한어 발음으로는 까우례(kɑu liᴇ) 또는 까우레이(kɑu lei)다.[24] 고구려 역시 고마라고 읽는 경우가 있다. 고마 신사(고구려 멸망 후 일본에 정착한 유민들이 세운 신사. 현존하고 있다.), 코마가와역 등.[25] Solongos, 중세 몽골어로는 ᠰᠣᠯᠤᠩᠭᠤᠰ, Solungɣus. 현대 몽골인들은 한국을 설렁거스(Солонгос)라고 부른다. Solongos는 몽골어로 '무지개의 나라'라는 뜻인데, 몽골 국립 할하 몽골어 학회에서는 Solongos가 '해 뜨는 동쪽의 나라'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공식적으로 명시했다. 색동저고리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으나, 근거없는 낭설이다.[26] 현대 몽골어로는 현대 한국과 구별하여 고려를 Kuryo라고도 한다.[27] 와전되어 서희가 소손녕을 속였다고 보는데 서희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애초 고려의 국호 자체가 고구려 계승을 선포하며 만들어졌고, 서경은 분사제도로 고려의 수도 개경의 일부 관아들이 서경에도 설치되는 등 제 2의 수도로 대우를 받던 곳이다. 훈요 10조에도 서경의 특별 대우는 다른 누구도 아닌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이 직접 남긴 것이다.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이 시도가 가능했던 것도 이때문이다.[28] 사실 이것도 별 의미가 없다. 애초에 거란은 고구려의 정체성을 이어받았다는 주장을 한게 아니라, '고구려의 옛 나와바리를 우리가 다 회수하겠다'는 단순히 땅욕심 의도로 서희를 압박한것이기 때문이다. 거란에게 애초에 고구려에 대한 정체성 의식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보는게 합당하다.[29] 송이 중추원, 삼사 등의 기관을 부설한 까닭은 송은 3성 6부제가 원활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기도 하다.[30] 승선은 조선시대의 승지로 이해하면 된다.[31] 서경의 수도로서의 확고한 지위는 훈요십조, 분사제도, 서희의 발언, 서경별곡의 가사 등 여러 방면에서 드러난다. 다만 그럼에도 개경보다 왕이 머무는 기간이 짧았고 주요 정쟁도 개경에서 벌어졌으며 고려왕릉 한 기도 평양 근교에 없기 때문에 '제 1 수도' 개경의 지위가 조금 더 높았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개경에 비한 은근한 차별의 결과가 바로 그 유명한 묘청의 난.[32] 이 역시 다르게 생각해보면 동경, 남경보다 여전히 우월한 서경의 지위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동경을 예로 들면 반란이 날 경우 일시적으로 일반 군현으로 나가떨어졌지만 서경은 숱한 반란에도 불구하고 '부수도' 미만으로 격하당한 적이 없다. 묘청의 난 당시에도 따지고 보면 개경의 조정(중앙정부)에게 대놓고 반기를 드러낸 사건임에도 개경과 서경의 지위 사이에 선을 보다 확실하게 긋는 수준에 그쳤지 서경을 지방 도시로 전락시키지는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33] 양주시, 광주시. 오늘날의 경기도, 충청도.[34] 오늘날의 강원도 영서.[35] 오늘날의 황해도.[36] 오늘날의 평안도.[37] 오늘날의 강원도 영동과 함경남도.[38] 비슷하게 과거 일본의 행정 구역도 기(畿)와 도를 구분해서 크게 5기 7도의 행정 구역(홋카이도가 추가된 뒤 5기 8도.)으로 나누었다.[39] 다만 한강 남부도 온전한 백제 영향권으로 본 것까지는 아니고 삼국의 문화가 모두 혼합된 곳으로 보았다. 당장 후백제가 아닌 태봉-고려가 경기도와 충청도 북부까지 장악하고 있었으니...[40] 여기서 논해지는 삼국이나 고려보다도 훨씬 미래이며, 오늘날에서 불과 200여년 전인 조선 후기 정조 시대에도 한강에 다리를 놓을 기술이 없어서 수원화성영우원(현륭원)에 임금이 다녀올 때마다 갈 때 및 올 때 각각 한 번씩 배를 다닥다닥 붙여서 임시로 다리를 만들어서 다닐 정도였으니, 그보다도 훨씬 과거인 삼국과 고려시대에 한강 이편과 저편이 오늘날과 달리 서로 다른 행정구역인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41] 조선시대까지도 이러한 인식은 이어져 남한산성을 옛 백제의 왕도로 보아 이곳에 온조왕을 기리는 숭렬전이 지어지기도 하였다. 남한산성이 위치한 경기 광주가 강북 한양 일대와 별개의 지역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북한산성과 더불어 전시 한양을 대신하는 양대 산성 중 하나였기에 한양과 매우 가까운 지역으로 여겨지기는 하였다.[42] 고려는 고구려의 장수왕 이후 국명 '고려'를 그대로 따왔지만 정작 본인들이 삼국사기를 저술할 때에는 고구려를 고려라 하지 않고 장수왕 이전의 국명인 고구려로 명명해 본인들과 또 미세한 선을 그었다. 게다가 삼국 중 신라본기가 가장 앞에 온다는 점은 덤.[43] 알다시피 한반도는 산지가 70%를 넘는 지형이라 지리적 구분이 상당히 공고했다. 괜히 삼국이 수백 년을 싸워도 당나라가 개입하기 전까진 결판이 안 났고 그 와중에 가야, 마한의 소국들이 한반도 남부에서 오랜 시간 동안 잔존할 수 있었던 게 아니다.[44] 조선을 세운 전주 이씨 왕가도 원래는 전주 지역의 호족 가문이었으나 몽골군의 침략으로 전 국토가 박살이 난 뒤에는 강원도로 이주했다가 함경도 끝단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등 광범위한 이동성을 보인다. 고려 초중기 때만 해도 본관은 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연고, 신분, 세력 등을 드러내는 등 지역과 가문이 극도로 밀착된 모습을 보여줬는데 몽골군에 의해 대혼란이 찾아온 뒤로는 그러한 개념은 무너져 버린다.[45] 하지만 고려에서는 길주 이북까지는 관리의 어려움으로 귀화를 거부하였다.[46] 다만 위에서도 설명했듯 고려 전기의 서경의 지위는 부수도라 하기 힘든 부분이 많다.[47] 다만 이게 당시 기준으로는 혹형이라 볼수없었는게 피부 파열같은 경우에는 재생이 잘 되어서 이후 충분히 치료를 받는다면 이후 생활에 별 지장이 없을 만큼 충북히 회복가능하므로 십자가형이라던지 궁형같이 아예 병신으로 만드는 형벌보다 훨씬 신체에 부담이 적기 때문이다. 애초에 수십년전 학교 체벌만해도 몽둥이 몇대만 맞으면 피부가 터지는 수준이었다. 해당 형법이 없었다고 보는 이유는 잔인해서가 아니라 딱히 기록이 없어서 였을 뿐이다.[48] 조선의 경우엔 개국과 함께 억상 정책의 일환으로 초기에는 지방에 장시가 열리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일상 생활에 필요한 물품에 수요가 없을 수가 없으므로 조선 초기를 지나 1470년경부터 전라도에서 다시 장문(場門)이라는 이름으로 태동하기 시작해 조선 중후기에 다시 활발하게 열리게 되었다.[49] 하지만 고선지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당군은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했고 이 이후 억울하게 모함을 받아 처형당한다.[50] 백제나 신라처럼 끝글자인 려를 사용했다. 여제, 나제동맹처럼.[51] 13세기 몽골의 등장으로 다원적 천하질서가 점차 붕괴되어 갔고 1227년 서하의 멸망, 1234년 금나라 멸망, 1270년 고려의 출륙과 개경 환도, 1271년 원의 건국으로 4세기에 걸친 다원적 질서는 종말을 고했다.[52] 실제 요, 금의 사신이 입경할 경우 왕이 북면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면을 하는 것으로 일종의 손님을 맞는 예를 갖추었다. 고려사에 보면 북조의 사신을 맞는 예와 명의 사신을 맞는 예가 달리 기술되어 있다.[53] 한국역사연구회시대사 총서 고려시대사 참조.[54] 북방의 요와 송이 동시에 금에게 갈려나가면서 고려는 1125년까지 국서에 표현하지 않던 신 이란 표현을 1126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한다.[55] 금도 고려의 칭신사대가 꽤나 필요했었다. 당시 요, 송 등 중원에 자리잡은 왕조들을 그야말로 때려 잡고 잘나가던 시기에도 고려 전선에서는 꽤나 고전했었으니 고려에 대한 공포심이 생각보다 컸을 가능성이 높다. 오죽하면 금의 황제가 부하들로 하여금 고려의 국경을 침범하거나 사사로이 공격하는 것을 금지시켰을 정도. 물론 고려에 대한 공포심도 조금은 있었겠지만 그보단 한반도에 개입하고 싶지 않은 금의 의중이 반영되었을 것이란 시각도 있다. 실제로도 금의 관심은 언제나 중원에 쏠려있었고, 만주 쪽은 자신들의 근거지에 불과했다. 원의 발흥으로 위기가 시작되었던 때에도 끊임없이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남송과 혈전을 벌였을 정도니.[56] 묘청의 난[57] 다만 조선도 철저한 사대관계를 따르기는 했지만, 왕의 묘호에 '조'나 '종'을 사용하는 등 소극적으로는 표시했었다.[58] 이 시기는 한중일 3국이 모두 엮여서 기록이 적은 삼국시대 중 유일하게 그나마 기록이 풍부한 시기다.[59] 물론 비교 대상이 너무 먼치킨인 점은 고려해야 한다.[60] 참 골때리는 게, 역사 학술 연구소를 표방하면서 정작 연구소장인 김연성 교수는 역사학 비전공자(경영학부)이다. 그나마 복기대 교수(융합고고학)가 사학 전공이지만 학계의 주류 학설과는 다르다.[61] 병풍석도 안 둘러져 있고 인물석도 솜씨가 매우 투박하다. 솔직히 말하면 왕릉이란 요소 제외하고 외관만 보았을 때는 조선시대 권세가 무덤보다도 허접한 편이다. 게다가 대상으로 삼은 홍릉이 남한 소재 고려왕릉 중 상태가 가장 나은 편이고 다른 무덤들은 더 심각한 편이다.[62] 중국 시각에서 고려역사를 기록하기는 했지만, 당대에 기록했기 때문에 후대에 기록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비하면 당시 고려사회가 어땠는지 잘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어찌본다면 삼국지의 위서 동이전과 같은 위상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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